요 며칠 그녀는 대스타가 되는 꿈을 매일 꾸었다.오늘 저녁 하은철과 하경철을 만난 뒤, 이서정은 그녀의 꿈이 실현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지환의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하은철의 삼촌인 건 확실했다!하씨 가문은 국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이다. 삼류 무명배우가 뿐만 아니라 무명감독을 유명한 대 스타, 대감독으로 치켜세우는 것도 말 한 마디에 불과했다.지환은 흥분해서 들떠 있는 이서정에게 차가운 찬물을 끼얹었다.“하지만…… 네 신분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생기면 이번 생에 좋은 날은 끝날 줄 알아.”이서정은 몸이 으스스 떨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바삐 대답했다.“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들어가.”지환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고급 차량 한 대가 그들 앞에 섰다.이서정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올랐다.이천은 차가 멀리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앞으로 나아갔다.“회장님, 마음에 드십니까?”“괜찮아, 아주 영리해. 하경철한테 정체를 들키지만 않으면, 어떤 요구사항도 다 충족시켜 줘.”“네.” 이천은 말을 마치고는, 지환을 바라보며 뭔가를 얘기하려다 멈추었다.그러고는 한참 뒤에야 물었다.“회장님, 왜 사모님께 회장님 신분을 직접 말씀드리지 않습니까?”지환은 그를 흘겨보았다.이천은 곧 바삐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지환은 그를 질책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그는 드디어 두려움이라는 게 뭔지 알기 시작했을 뿐이다.그래서 모험을 할 수 없었다.……같은 시각 민씨 집안.여전히 이서의 거처를 찾지 못한 경호원들을 앞에 두고, 민호일은 더는 욕설을 퍼부을 힘도 없었다.“꺼져, 꺼져, 멍청이 새끼들 싹 다 꺼져.”부하들은 서로 쳐다보며 방을 나갔다.실내가 잠깐 조용해지나 싶다니 곧 문 밖에서 황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회장님, 좋은 소식입니다!”민호일은 용수철이 튀어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윤이서 거처를 알아냈어?”“아니요!” 들어
지환은 사람을 품에 꼬옥 안았다.“아니, 많이 안 기다렸어, 배고파?”“아니요. 당신은?”“난 조금…….”아까 호텔에서 별로 먹지 않았다.“그럼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이서는 지환이 자기를 안도록 내버려두었다. 심지어 몸을 슬쩍 움직여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그의 품은 너무 따뜻했다.“너는?”이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난 괜찮아요. 벌써 잊어버렸어요?”“어떠한 순간에도, 당신의 요구가 최우선이라는 것만 기억해.”이서는 멍해지더니 곧 자조하며 웃었다.“나는 그렇게 중요한 사람 아닌데……. 그나저나 뭐 먹고 싶어요?”지환은 이서의 어깨를 바로잡고 엄숙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당신은 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야! 당신이 있어서 살 맛이 나, 당신이 없으면 난 죽은 목숨이야.”이서는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녀는 지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의 두 눈은 바다처럼 깊고 맑았다.“나…… 정말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에요?”이서를 꼭 껴안은 지환의 몸은 약간 떨렸다. 아득한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더없이 미묘하면서도 공허했다.“응, 아주 중요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떠나지 마, 알았지?”지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이서는, 옷 속에 가려진 그의 탄탄한 복근과 쿵쾅거리며 미친 듯이 뛰는 그의 심장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지환을 꽉 안았다. 마치 세상 전부를 안은 것처럼 있는 힘을 다해.“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잠시 뒤, 지환의 품에서 고개를 든 이서가 물었다.“자, 이제 우리 뭐 먹으러 갈까요? 나보고 정하라고 하지 말고…….”지환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그럼 자기가 추천하는 걸로 먹으면 되겠네.”이서는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보쌈은 어때요?”길 건너편의 보쌈집에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문전성시를 이루니 틀림없이 맛이 좋을 것이다.두 사람은 곧 식당으로 향했다.대부분 포장하는 손님들이라 가게 안에는 빈 자리가 몇 곳
이서는 연거푸 물을 몇 모금 들이키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열을 꺾었다.지환은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일부러 물었다.“왜 그래?” 이서는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그를 힐끗 보았다.“나 바람 좀 쐬고 올게요.”말이 끝나자, 얼른 지환의 마수에서 벗어나 식당 밖으로 나와 임하나와 어디로 갈지 이야기를 나누었다.하지만 ‘딸기’를 얘기할 때마다 이서는 왠지 모르게 온몸이 꺼림칙했다. 지환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바로 이때 이천의 메시지가 도착했다.[회장님, 민씨 가문에서 이서정 씨 뒷조사를 하고 있습니다.]지환은 눈동자를 약간 움츠리고 긴 손가락으로 답장을 보냈다.[조사하라고 해.]약 5분이 지나자, 이천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하경철 어르신 쪽도 이서정 씨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쪽에서 동시에 조사하고 있는데다 민씨 집안에서 사모님에 대한 조사를 계속 진행 중이라 우리 쪽의 일손이 부족할까 염려됩니다.]잠깐 고민하던 지환은 곧 답장을 했다.[걱정 마, 곧 민씨 집안에서 더 이상 이서를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문자를 보내고, 지환은 휴대전화를 식탁에 엎어 놓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이 집의 보쌈 맛은 확실히 괜찮았다. 야들야들한 고기에 구수한 고기향이 더해지면서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게 맛이 좋았다.예전의 지환이라면 절대 먹지 않았을 음식이었다.이천은 지환이 보내온 문자를 보고 아리송했다.‘민예지가 정신 이상장애를 보이면서 민호일이 사모님의 정보를 캐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특히 회장님을 찾으려고……. 아직 하나도 캐낸 게 없는데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다고?’임하나와 통화를 마친 이서는 문밖에서 잠시 바람을 쐬고 나서야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다.마침 지환이 배불리 먹고, 우아하게 입을 닦고 있었다.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서는 눈과 마음이 즐거웠다. 지환의 집에 한번 다녀온 게 아니라면, 그녀도 임하나가 얘기한 것처럼 그가 정말 귀공자가 아닐까 의심했을 것이다.“다 드셨어요? 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그랬다가는 도둑이 제발 저린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라는 걸 잘 알 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이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이서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저…… 저분은 여기 어떻게 왔어?”이서는 입술을 오므리고 옅게 웃었다.“이상언 씨 국내에 친구가 별로 없잖아. 그래서 같이 놀러 가면 재미 있을 거 같아서…….”말을 마치고 임하나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하나야, 너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니?”켕기는 게 있는 임하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아, 아니야. 없어.”“그래? 그런데 난 왜 자꾸 너희 두 사람 이상한 거 같지?!”“아니야!”임하나는 극력 부인하였다. 곁눈질로 이상언이 다가오는 걸 본 그녀는 온 몸이 경직되었다.이상언은 몸을 숙여 임하나의 손에 든 캐리어를 건네받으려 했다.“주세요.”“아니에요…….”임하나는 감전된 것처럼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곧 자신의 행동이 너무 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말을 덧붙였다.“나 혼자 들 수 있어요…….”이서는 웃으며 난처해하는 임하나를 보았다.“하나야, 너 상언 씨 차 타고 가. 나 먼저 간다.”“…….”이서가 차에 타자, 임하나와 이상언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겨졌다.이상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임하나의 캐리어를 들었다.“타세요.”임하나는 제자리에 서서 타기도 뭐하고, 안 타기도 뭐하고 난처하기 그지없었다.이상언은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잘 생긴 이목구비는 이 동작으로 인해 더욱 얼굴이 환해 보였다. 방금 전까지 피곤이 역력했던 기색마저 말끔히 사라진 듯했다.“왜 그래요?”임하나는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했다.“우리…….”“하나 씨가 말했잖아요,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자고. 아무 일도 없었으니, 우리는 여전히 친구잖아요……. 하나 씨는 친구랑 있을 때 어색한가요?”임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우리……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할 수 있을까요?”“뭐…
이서는 이 모든 상황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다.마음이 착잡해진 그녀는 지환을 보며 말했다.“우리 이제 올라가요.”이 말은 지환에게 한 말이기도 하지만, 이상언한테 들으라고 한 말이기도 했다.“응.” 지환이는 믹서기를 들고 말했다.“가자.”임하나는 앞장서서 맨 앞에서 걸었다.이서와 지환이 그 뒤를 이었다.맨 뒤에 있는 사람은 이상언이었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귓가에 울리는 카톡 소리를 들으며 임하나는 짜증을 냈다.“요즘 여학생들, 정말 적극적이네.”말을 내뱉고서야 그녀는 자기 말에 질투의 냄새가 따분하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이서는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래, 우리 때랑은 완전히 다르지. 그들이 받은 교육이 우리 때와는 다르니, 다를 수 밖에…….”임하나는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이서를 한 번 보았다.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다행히 방이 3층에 있어서 곧 도착했다.네 사람이 갈라섰다.방에 들어서자마자, 지환은 이서를 손목을 잡고 문에 기대어 키스를 퍼부었다.오늘 그의 키스는 평소에 없던 인내심과 부드러움이 더해졌다.5분 뒤.지환은 이서를 놓아주며 자기 이마를 이서의 이마에 대고, 그윽한 눈으로 이서의 정욕에 가득 찬 눈빛을 보며 못된 웃음을 지었다.“원해?”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지만 눈동자 속의 욕망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지환은 손가락으로 이서의 등을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었다.“언행 불일치는 좋은 품성이 아닌데…….”이서는 지환이 다음 액션을 취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밖으로 그는 큰 손을 거두고 허리를 약간 굽혀 이서의 눈 밑에 다가갔다.“이것은 전채일 뿐이야. 먼저 딸기 주스 만들어 줄게.”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는 수도꼭지를 틀어 딸기를 씻었다.이서는 여유만만하게 딸기 주스를 준비하고 있는 지환을 바라보며 빨간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그럼 하나한테 좀 다녀올 게요.”말을 마
하나의 엄마는, 남편이 사흘이 멀다 하고 밖에서 바람을 피워도 남편과 이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전통적 가치관의 소유자였다.지금까지도 두 사람은 불륜-발각-이혼 제기-부결의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다.매번 쫓아다니던 잘 생긴 남자가 자기에게 넘어왔다 싶으면, 그녀는 상대방과 연락을 끊거나 잠수를 타고 헤어지는 루틴을 반복했다. 임하나는 쓴웃음을 지었다.“너도 확실하지는 않잖아. 난 그렇게 운이 좋은 사람 아니야. 게다가, 누군가에게 구속당하는 것도 싫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을 쫓아다니는 게 더 좋아.”이서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임하나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임하나는 애써 밝은 척했다.“내 얘기는 그만하고, 너랑 지환 씨는 어때? 이제 진짜 화해한 거야?”이서는 가볍게 대답했다.“응, 나도 한번 잘 해 보려고…….”임하나는 부러워하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야, 넌 나보다 훨씬 용감하고 씩씩해.”이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난 용감한 게 아니라, 상처를 받는 것보다 그를 잃는 게 더 두려운 거야…….”임하나는 순간 멍해졌다. “너…… 정말 지환 씨 사랑하는구나?”이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예전에는 하은철에 대한 내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겠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최면 같은 거였어.모든 사람들이 나와 하은철은 결혼할 운명이라고 얘기했어. 그래서 내가 처음 하은철을 만났을 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 사람이 내 미래의 남편이니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머리속에 뿌리 깊이 박혀있었어.8년 동안 나는 두려움도 없었고, 미래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물론 사랑의 즐거움도, 고통도 느껴본 적이 없었어.나는 마치 결혼이라는 임무를 완수하는 위한 기계처럼, 매일 실제행동으로 하은철을 사랑하는 임무를 완수했어.근데 지환 씨랑 함께 하면서, 모든 게 다 변했어.지환 씨를 잃을 까봐 노심초사하고 걱정돼. 심지어 작은 달콤함이 나를 세상 행복하게 만들고, 작은 응어리가 나를 오래동안 신경
지환의 안색이 어둡고 침울해지자, 이상언은 자기가 말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수습에 나섰다.“그러나 속담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이서도 언젠가는 너의 진심에 감동하여, 네가 하씨 집안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거야.”지환의 안색은 상언의 위로로 인해 좋아지지는 않았다.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는 한 대 얻어 맞을 것 같은 분위기라 이상언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나 먼저 간다.”말을 마치고 얼른 빠져나왔다.마침 옆방에서 나온 이서는 이상언의 뒷모습을 보며 지환에게 물었다.“방금 상언 씨 왔었어요?”지환은 딸기 주스를 쳐다보며 말을 하지 않았다.이서가 가까이 다가와서야 그의 몸에서 차갑다 못해 싸늘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지환은 눈을 들어 이서를 보자 눈 밑의 난폭한 기운이 물안개처럼 흩어졌다.“딸기 주스 다 됐다.”이서는 그를 자세히 살폈다.“정말 괜찮아요?”지환은 딸기 주스를 컵에 부었다.“응, 괜찮아.”이서는 그제야 걱정하던 마음을 쓸어내리며 다시 물었다.“상언 씨 왜 왔어요?”지환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서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이서는 몸이 움찔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아니야.” 지환시는 딸기 주스를 이서에게 건네며 말했다.“먹어봐.”이서가 입을 오므리고 한 모금 마셨다.선홍색의 주스 거품이 입술에 남아 있었다.지환은 눈동자가 흐려지며 침이 입안을 구르다 목젖을 지나 식도로 내려갔다.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갑작스럽게 닥친 폭풍우 같은 약탈에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으로 지환의 목을 껴안았다.한참이 지나서야 지환은 비로소 이서를 놓아주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스쳤다.“이렇게 먹으니까 주스가 몇 백배는 더 맛있네.”이서는 부끄러워 빨개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지환은 이서의 허리를 감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더 먹고 싶어?”이서는 다소곳하게 말을 더듬었다.
하경철은 어두운 얼굴로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다.“지환이 결혼한 지 어느덧 3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 왜 이제야 여자 측에 집을 사줬을까? 저기 주 집사, 설마 그 여자 짝퉁 아닐까?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그런데…… 왜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하경철은 지팡이를 잡고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을 진정시켰다“왜냐면, 진짜 아내가 이서이기 때문이지!”주경모는 냉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어르신,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서 아씨와 큰집 도련님은 만난 적도 없는데…….”하경철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내 추측이 틀렸으면 하네.”“어르신, 큰집 도련님이 정말 이서 아씨와 결혼한 거 라면, 직접 아가씨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습니까?”“안돼!” 하경철은 한마디로 거절하셨다.지난번 만남은 이미 경솔했다.만약 이서에게 직접 물었다면 분명히 지환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하경철은 매섭게 눈을 감았다.활옷을 입고 화관을 쓰고 있는 소녀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소녀는 이서와 닮았다.소녀의 옆에는 사모 관대한 젊고 잘생긴 소년이 서있었다. 소년의 눈매는 지환과 매우 비슷했다.이 장면을 본 하경철은 눈을 번쩍 뜨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주경모는 상황을 살피고 얼른 하경철이 숨을 고를 수 있도록 가슴을 쓸어주었다.“어르신, 가정의를 불러오겠습니다.”“아니다…….” 하경철은 손을 흔들어 막았다.“인과응보야, 전부다 인과응보야, 주 집사, 가…… 가서 언론홍보 담당자 불러와!”주경모는 의아한 눈빛으로 하경철을 바라보았다.하경철은 은퇴한 후로, 지금까지 회사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이건…….’“빨리 안 가?!”“네!”……유채 꽃밭은 민박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도보로 십여 분만에 바로 도착했다.목적지에 도착하자 이서는 고개를 돌려 몇 미터 뒤떨어져서 걸어오고 있는 이상언과…… 민박집 딸래미를 보았다.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여자는 싱글벙글 웃었다.계획에 없던 여자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더욱 어색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
그 사람은 바로... 심유인!“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소희는 심근영 부부를 알게 된 후로 서서히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 찰나, 심유인이 거들먹거리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자, 소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인은 항상 뒤에서 작은 음모를 꾸미곤 해서, 소희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회사 기밀을 훔쳤다는 누명도 심유인이 벌인 짓인 것 같단 말이지...’‘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겠어?’‘자기 자신을 조사하는 셈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소희야, 오랫동안 널 만나지 못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너를 보러 온 건데,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이서의 배후 인물이 지환이라는 것과 하은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심유인은 소희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과거에 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심유인은 오직 한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의 남자 친구가 월요일에 찾아온다는 것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심유인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저는 언니를 반기지 않아요. 당장 나가주시겠어요?”심유인은 곧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심소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 지금은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신다지만, 언제까지 그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건 전적으로 윤 대표 때문이야. 네가 윤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실까?” 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와 저의 관계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관계가 아니에요!” 심유인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래,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다는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