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일에 너무 몰입하다 보니 시간을 깜빡했어요.”임현태는 바로 손사레를 쳤다.“아가씨, 그런 말씀 마세요. 제 일입니다. 얼른 타세요.”심소희는 옆에서 임현태가 이서에게 차 문을 열어주고, 다양한 옵션과 차내 기능들을 보면서 부러운 듯 낮은 목소리로 이서에게 말했다.“언니, 본가에서 많이 지원해 주나 봐요. 이렇게 출퇴근 전용 차량도 준비해주고…….”‘본가’라는 두 글자는, 마치 한 자루의 칼처럼 소리 없이 이서의 심장을 후벼 팠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눈동자 속에 비친 아픔을 애써 숨겼다.“본가 차량이 아니라 회사에서 제공한 출퇴근용 차량이야.”심소희는 깜짝 놀랐다.“회사요? 그럼 왜 다른 팀장들은 이런 대우가 없어요?”다른 부서 팀장들은 다 스스로 운전하고 다녔다.이서는 멍해졌다.“뭐라고?”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앞좌석에서 운정 중인 임현태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그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그게…… 다른 팀장들은 다 혼자 운전하고 다니는 거 같아서요…….”이서는 눈을 들어 임현태를 한 번 보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언니, 내가 말실수했나 봐요……?”이서는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별말 하지 않았다.임현태는 먼저 심소희를 엘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고 다시 방향을 바꿔 별장으로 향했다.차안에서 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멈추고 임현태가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에야 이서는 입을 열었다.“임현태 씨.”타고난 직업적 경각성으로 인해 임현태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네, 아가씨.”“왜 회사 다른 부서의 팀장들은 전용차량이 제공되지 않습니까?”임현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그는 무의식중에 별장을 보려고 했었다.하지만 억지로 참았다.“현태 씨!” 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이게 그렇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가요?”임현태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전광화석 사이에 지환이 분부했던 얘기가 번쩍 떠올랐다.“네, 그렇습니다. 아가씨는 회사의 평생 총괄 디렉터입
지환은 이서의 쇄골에 코를 파묻고 그녀의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머리속에는 성지영과 윤재하가 딸 이서에 대해 저지른 종종 만행이 스쳐지나 갔다.이렇게 연약한 몸으로 그동안 어떻게 부모의 배신을 견디고 버텨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그는 더욱 힘껏 이서를 안았다.“괜찮아, 그냥 안아주고 싶어.”이서의 심장은, 손으로 꽃잎을 튕기듯 가볍게 떨렸다.그녀는 지환이 안도록 내버려 두었다.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이 멀리 떨어진 두 심장을 연결시켜주는 것 같았다.지환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이서의 눈꺼풀이 감기기 시작했다.갑자기 쇄골에서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그녀는 깜짝 놀랐다. 순간 쏟아지던 잠도 온데 간데없이 달아났다.눈을 떠보니 지환이 쇄골에 키스하며 가볍게 깨물고 있었다.“개띠에요? 왜 물어요?”이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지환은 눈을 들어 쇄골 부위 새겨진 예쁜 빨간색을 쓰다듬었다.“앞으로 너는 내 것이야.”이서는 별로 개의치 않고 그를 밀었다.“나 배고파요.”지환은 일어나서 주방에 가서 음식을 내왔다.이서는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지환은 이서 맞은편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이서야, 우리 아이 갖자.”이서에게 아이 얘기를 꺼낸 건 벌써 두 번째다.지금의 심경은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녀는 잠깐 멈칫 하더니 계속 밥을 먹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지환의 눈동자가 굳어졌다.“당신은 분명히 좋은 엄마가 될 거야.”입안의 음식이 모래알 같이 느껴졌다. 이서는 코가 시큰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슬그머니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그건 모르는 거예요. 사람은 변하잖아요. 엄마가 된다는 것은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인데…… 아마도 처음에는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거예요. 그러나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삶에 회의감이 느껴지고 후회하고 포기하고…… 그렇게 되더라고요.”지환은 이서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꺼풀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서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회의실로 불려갔다.모두들 숙연한 표정이었다.그러나 이서를 보는 순간, 다들 좋은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특히 장지완.조소와 멸시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김청용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한 어투로 이서에게 말했다.“윤 총괄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오늘 아침에 케빈 씨의 수행비서가 연락 왔습니다. 우리와 합작하는데 동의하셨고 합니다!”이서는 입술을 오므리고 옅게 웃었다.“잘 됐네요.”“그런데…….”김청용은 이서의 눈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케빈 씨 쪽에서는 장지완 씨의 디자인 시안을 사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웃고 있던 이서의 표정이 잠깐 경직되었다가 곧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케빈 씨가 제 시안을 보셨나요? …… 안 보셨죠? 보실 생각이 없대요?”“네……. 그런 것 같습니다.”이서는 살짝 웃었다.“그래도 한번 보여 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어디서 나온 배짱일까?” 장지완은 경멸하며 웃었다.“케빈 씨가 그렇게 한가한 분이신 줄 아나 봐요. 당신이 뭐라고, 그 분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 참나 원…….”이서는 차분한 표정으로 장지완을 바라보았다.“그분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패키지 디자인에 대해 진심인 사람입니다. 저도 이번 시안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완성했습니다.”장지완은 냉소하였다.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윤 총괄님, 그렇게 안 봤는데, 근자감이 넘치는 분이셨군요. 혹시 그거 아세요? 자신감이 지나치면 교만입니다…….”재무팀 팀장도 무시하는 어투로 말했다.“이런 자신감은 ‘뷰티 페이스’ 입상하면서 생긴 거겠죠? 그러나 그걸 아셔야지, ‘뷰티 페이스’는 아마추어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콘테스트였다면,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장지완 씨 디자인 업계에서 10년 동안 몸담고 있으면서 실력을 갈고 닦은 사람이에요, 연공서열을 따져도, 아마 선배라고 불러야 할 텐데요. 그러니까 장지완 씨에게 졌다고 해서 X 팔려 할 필요 없어요. 이
현재…….장지완의 안색이 백지장이 되었다가, 곧 정상으로 회복되었다.“선생님, 우리 계약서에 사인부터 할까요?” 그녀는 앞으로 나가서 낮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그래, 그래요, 계약부터 해야지. 윤 총괄 얼굴 보니 너무 반가워서 오늘 온 목적을 깜빡했네.”말하면서 몸을 돌려 자리로 가려고 했지만 이서가 불려갔다.“선생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그럼요.”“이번 디자인 시안, 제 것…… 아직 안 보셨죠? 혹시 잠깐 시간을 내셔서 제 시안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케빈은 머뭇거렸다.“그런데…… 지완 씨의 시안이 이미 만족스러운데,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캐빈의 말을 듣고 장지완은 득의양양했다.“들었죠, 굳이 뭐 하러 봅니까? 윤 총괄, 내가 아무리 그래도 이 바닥에서 10년 넘게 몸담은 디자이너인데, 굳이 나와 비교하겠다는 건 번데기 앞에 주름잡는 격이지, 뭐 하러 굳이 굴욕을 자초할까요?”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지완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뭐 하러 굳이 시간 낭비해? 빨리 계약서에 사인이나 하지.”“내 말이! 질질 끌다가 변고가 생기면 윤 총괄이 책임 질 수 있겠어?”“그러게, 자기가 회사 오너야 뭐야? 칫!”많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이서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저는 그래도 선생님께서 한번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입니다.”케빈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작은 목소리도 말했다.“그러세, 나도 윤 총괄의 실력을 한 번 보고 싶네.”이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회의실에서 나와 디자인 시안을 사무실로 가지러 갔다.이서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장지완은 참지 못하고 케빈에게 말했다.“선생님, 사실 윤 총괄은 이쪽 관련 업무 경험이 전무한 초보 디자이너입니다. 만약 이번 콘테스트에서 실수가 없었더라면 윤이서 씨가 어떻게 우승을 하고 디자인 총괄 디렉터 자리를 꿰찰 수 있겠어요? 아마 윤이서 시안은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일 거예요.”케빈은 손을 흔들었다.“괜찮아, 봐도 시간이 얼
장지완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이서 씨, 졌으면 깔끔하게 승복해야지, 왜 남의 작품을 헐뜯는 거죠? 당신의 인품은 작품처럼 졸렬하네요! 이제야 왜 당신이 운전기사랑 결혼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가네…….”케빈은 이 말을 듣고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이서와 지환 두 사람 사이에 섬싱이 있는 줄 알았는데,윤이서는 이미 결혼한 유부녀라니…….그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귓가에 이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스킨 케어 업계에서 덕망이 높으신 대가라는 사실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선생님과 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생님께서는 상업화된 디자인, 즉 상업적 미학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이것이 바로 선생님의 상품이 훌륭한 데 비해 판매량이 따라주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다들, 덕망이 높은 대선배 앞에서 직설적으로 말을 뱉는 이서가 너무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했다.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편으로, 케빈이 계약을 번복할까 봐 조마조마했다.김청용조차도 이서가 너무 무례했다고 느꼈다.그러나 잠시 뒤, 회의실에서 케빈의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하하하, 재미있네. 사실은 나도 오랜 시간 줄곧 이 문제를 고민해 왔어. 왜 내 제품이 십여 년 전보다 판매량이 훨씬 감소했을까……. 처음에는, 나같은 노인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후에 다시 생각해 보니, 스킨 케어 분야는 전문적인 영역이어서, 시대에 상관없이 제품의 효능만 좋다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네. 그런데 출시하고 보니 판매량이 매년 급감하고 있더군? 홍보가 제대로 안 된 건지, 판매 경로가 잘못된 건지 정말 고민 많이 했는데……, 오늘, 윤 총괄이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어. 허허, 족집게가 따로 없네. 내 문제점을 단번에 콕 집어내다니. 십여 년 전, 내가 만든 수분 마스크 팩이 인기를 끌면서 운 좋게 이 업계에서
“세상에, 나 소름 돋았어!”“어머나, 미쳤어! 정말 기가 막히네! 10년 이하 짬밥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건데!”“허허, 미대 가봐, 10년 배웠다고 이런 작품 만들어낼 수 있는지? 대박이다, 이게 어디 단순한 상업디자인이야,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미학과 상업을 겸비한 신의 작품이지!”다시, 비교해보니 장지완의 12화 시리지가 더없이 평범해 보였다.케빈은 이서의 작품에서 시선을 떼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결정했어. 윤 총괄 시안으로 하겠네!”케빈의 말을 듣고, 장지완은 화가 나서 얼굴 전체가 일그러졌다.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케빈이 말을 이었다.“지완 씨 작품도 좋지만, 윤 총괄의 시안에 비하면, 음…… 뭐라고 할까……,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천양지차, 그래 천양지차야. 지완 씨, 보아하니 앞으로 윤 총괄에게 많이 배워야 할 것 같네.”마지막 한마디에 장지완은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10년 넘게 이 바닥에서 버틴 나더러 초짜한테 배우라고!?’모두들 안색이 제각각이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김청용은 오히려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이서가 장지완에게 지면, 어떻게 보스에게 보고해야 하나 난처했다.계약을 마친 케빈은 이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윤 총괄, 다음에 우리 꼭 다시 보게나.”“네. 저도 선생님이랑 꼭 다시 뵙고 싶습니다.”두 사람은 연락처를 교환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차에 올라타서 케빈은 이서와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차가 일정한 거리를 달린 뒤에서 그는 개탄했다. “윤 총괄…… 보통내기 아니야. 이미 결혼했다니 아쉽군. 그렇지 않으면 지환에게 소개해주고 싶은데…….”앞 좌석의 기사가 웃으며 말했다.“저도 두 분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케빈은 고개를 저었다.“아쉽다, 아쉬워!”이때 케빈을 배웅하러 나온 각 팀의 팀장과 부팀장들은 모두 흐름을 바꾸어 이서를 에워싸고 한바탕 칭찬을 해댔다.“윤 총괄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 까다롭기도 유명한 캐빈 씨를 한 방에 설득시키다
디자인팀으로 돌아온 이서는 사무실 분위기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도 달라졌다.더 이상 이전의 경멸과 무시가 아닌,놀라움과 경외의 눈빛이었다.이서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한 명씩 훑어보며 말했다.“앞으로 디자인팀은 팀원들 간에 펼쳐지는 선의의 경쟁은 적극 권장하는 바이지만 팀원들을 비방하고 훼방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아무쪼록 앞으로 자신의 본연의 업무에 집중해주기시 바랍니다. 우리 잘 해봅시다.”이 말은 장지완을 따랐던 무리들을 안심시켜주기 위한 거였다.이서는 말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이서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온 심소희는 우상을 바라보듯, 얼굴에 존경심이 묻어났다.“언니, 리스팩해요, 이전부터 알아봤지만…… 언니, 나 오늘부터 언니 1호팬 할래요! 그리고 언니, 그 눈…… 어떻게 그렸는지 좀 가르쳐 주세요.”이서는 웃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SNS에 팔로워 수가 기화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각 부서 직원들이 그녀를 팔로우했기 때문이다.그녀는 한 명씩 맞팔했다.방금 핸드폰을 내려놓았는데, 또 카톡이 들어왔다. 확인해보니 회사 단톡방에서 누군가가 글을 올렸다.[우리 그러고 보니, 아직 윤 총괄님 환영식을 하지 않았네요, 오늘 저녁에 하는 건 어떨까요?]아래에는 모두 찬성한다는 얘기들이었다.이서는 사람들이 건네는 선의를 느끼며 문득 한 마디 생각이 났다. ‘강한 사람 주위에는 선의의 사람들이 따르는구나…….’ [그래요.]그녀도 답장을 하고는 핸드폰을 한쪽에 두었다.옆 사무실.장지완은 또 컵 하나를 박살냈다.옆에 있던 강수지도 하마터면 다칠 뻔했다. 장지완이 책상 위에 놓인 비싼 필통을 들고 화풀이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바삐 달려가서 장지완의 손을 잡았다.“언니, 진정하세요. 나는 언니 디자인이 윤이서보다 몇 백배나 낫다고 생각해요. 언니가 부족한 건 디자인 실력이 아니라…….”강수지는 장지완의 귀에 대
지환은 곧 전화를 받았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우리 자기가 어쩐 일일까나?]전류에서 가늘게 들려오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막에서 메아리 치자,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팔에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오늘 밤, 회사에서 환영 파티 하는데……, 저랑 같이 갈래요?”지환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당신 회사 환영 파티인데, 내가 가서 뭐해? 난 자기 회사 사람도 아닌데……?”“…….”그녀는 왠지 지환이 일부러 이런다고 생각했다.“당연히…….”[뭔데?] 지환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안이 벙벙해진 부하 직원을 뒤로하고, 낮은 목소리로 계속 물었다.[뭐긴…… 가족이지! 맞지?]이서는 어이가 없었다.지환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고, 남자다운 중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오늘 드디어 나를 가족으로 인정한 셈인가?]“암튼 올 건가요? 말 건가요?” 이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이렇게 좋은 기회에, 나도 당연히 가고 싶은데……, 오늘 선약이 있어 갈 수가 없네.]지환은 아쉬움을 내뱉었다.지환의 못 온다는 말에 이서는 살짝 실망감을 느꼈다.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답했다.“응, 알겠어요.”전화를 끊고, 지환은 휴대전화 배경화면으로 설정한 이서의 사진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천…….”그는 일어나서 양복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가며 물었다.“사람 왔어?”“네, 이미 밑에 와있습니다. 지금 약속 장소로 가실 겁니까?”“응.” 지환은 긴 다리를 활보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이천은 바로 2층 버튼을 눌렀다.“하경철 어르신 쪽도 출발했다고 합니다.”지환은 속눈썹을 내리고 가볍게 ‘응’ 소리를 냈다.오늘 밤 하경철과 만나기로 했다.그의 아내를 보여줄 시간이다.환영 파티 장소는 사무실 반대편의 술집으로 정했다. 퇴근 후 이서와 심소희는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전에 이서를 멀리하던 때와 달리 오늘은 동료들이 하나 둘씩 열정적으로 이서의 곁에 둘러서서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
그 사람은 바로... 심유인!“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소희는 심근영 부부를 알게 된 후로 서서히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 찰나, 심유인이 거들먹거리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자, 소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인은 항상 뒤에서 작은 음모를 꾸미곤 해서, 소희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회사 기밀을 훔쳤다는 누명도 심유인이 벌인 짓인 것 같단 말이지...’‘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겠어?’‘자기 자신을 조사하는 셈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소희야, 오랫동안 널 만나지 못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너를 보러 온 건데,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이서의 배후 인물이 지환이라는 것과 하은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심유인은 소희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과거에 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심유인은 오직 한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의 남자 친구가 월요일에 찾아온다는 것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심유인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저는 언니를 반기지 않아요. 당장 나가주시겠어요?”심유인은 곧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심소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 지금은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신다지만, 언제까지 그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건 전적으로 윤 대표 때문이야. 네가 윤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실까?” 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와 저의 관계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관계가 아니에요!” 심유인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래,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다는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