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남자 셰프의 과장된 표정에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요?”“네, 저는 절대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이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피자 한 판을 예쁘게 포장하고 나머지는 구내식당 직원들에게 드렸다.이서가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식당 직원들은 남자 쉐프의 곁으로 다가갔다.“쉐프님, 이 총괄 디렉터라는 사람, 다른 사람들 얘기처럼 그렇게 쓸모 없는 사람은 아닌 듯한데요. 적어도 요리 면에 있어서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네요.”남자 쉐프는 이서의 뒷모습을 보며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하은철처럼 까다로운 사람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사람이 어찌 보통사람이겠어요?”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이서는 포장한 피자를 챙겨서 케빈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갔다.호텔은 회사가 제공한 것으로, 신분을 밝히자, 막힘없이 다이랙트로 룸 앞까지 갈 수 있었다.그녀는 노크했다.곧 문이 열렸다.안에 서 있는 사람이 뜻밖에도 지환이라는 것을 보고 이서는 순간 놀라서 멍해졌다.그녀는 다시 한번 방 번호를 확인하고, 착오가 없다는 것을 반복 확인한 후에야 지환을 보며 말했다.“당신이…… 왜 여기 있죠?”지환은 눈가에 옅은 웃음을 띠며 몸을 옆으로 돌려 이서를 들여보냈다.그때서야 이서는 지환 뒤에 ‘아담한’ 노인 한 명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175센티미터 정도 되 보이는 노인은, 결코 작은 키는 아닌데 지환 옆에 서 있으니 상대적으로 아담해 보였다.이서를 본 노인은 지환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지환, 자네 정말 대단하군. 오늘 방문할 손님이 있다는 것도 알고…….”이서가 눈썹을 치켜 뜨고 지환을 보았다.지환은 가볍게 웃었다.두 사람은 소리 없이 교류했고, 노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바로 서우 디자인부 총괄 디렉터, 윤이서 씨?”이서는 그제야 노인을 보고 예의 바르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케빈 씨.”“들어와요.”이서는 고개를
케빈은 의심의 눈초리로 다시 되물었다. “방금 그 여자랑 정말 모르는 사이야?”지환은 휴대전화를 한 바퀴 돌리더니 다시 앉아 두 손을 머리 뒤로 깍지를 꼈다.“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네가 그녀를 보는 눈빛이 남달랐어. 솔직히 말해봐, 둘이 사귀고 있는 거지? 오늘 네가 나를 찾아온 것도 그녀 대신 사정하러 온 거지? 우리 오랜 지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은 분명히 해야겠네. 내가 친구의 체면을 안 봐주는 게 아니라, 자네도 알듯이 난 공사가 분명한 사람이네. 네가 그녀를 위해 왔다고 해고, 이번 건은 어쩔 수 없어. 봐주지 없네.”지환은 웃으며 말했다.“내일 건에 대해 난 한 마디도 안 했는데…….”“정말 아까 그 여자 때문에 온 거 아니야?”“아닌데요.”케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둘이 정말 생판 모르는 사이?”지환은 침묵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케빈은 그가 묵인했다고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난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알았네. 하긴, 너처럼 일에 미쳐 사는 녀석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됐어, 이제 가 봐도 돼.”지환은 외투를 팔뚝에 걸치고 케빈과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하고 총총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 도착했는데 이서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지환이 씨익 웃었다.‘이 녀석, 아직도 화가 나 있나 보군.’이서에게 막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이천의 전화가 먼저 들어왔다.[회장님, 전에 사모님을 메리아트 호텔로 데려간 사람을 알아냈습니다.]지환은 미간을 찌푸렸다.“누구야?”[그게…….]이천은 자료를 보며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사모님의 어머님이 보낸 사람들입니다.]지환은 온몸의 피가 거구로 솟는 것 같았다.“확실해?!”[사람은 이미 잡았고, 그 놈들의 은행 계좌에 찍힌 송금자 이름이 성지영이었습니다…….]이천은 망설이다 물었다.[회장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사모님도 참 안 됐다.’‘그녀를 납치하라고 시킨 사람이 글쎄 친 엄마라니…….’
”죄송합니다. 일에 너무 몰입하다 보니 시간을 깜빡했어요.”임현태는 바로 손사레를 쳤다.“아가씨, 그런 말씀 마세요. 제 일입니다. 얼른 타세요.”심소희는 옆에서 임현태가 이서에게 차 문을 열어주고, 다양한 옵션과 차내 기능들을 보면서 부러운 듯 낮은 목소리로 이서에게 말했다.“언니, 본가에서 많이 지원해 주나 봐요. 이렇게 출퇴근 전용 차량도 준비해주고…….”‘본가’라는 두 글자는, 마치 한 자루의 칼처럼 소리 없이 이서의 심장을 후벼 팠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눈동자 속에 비친 아픔을 애써 숨겼다.“본가 차량이 아니라 회사에서 제공한 출퇴근용 차량이야.”심소희는 깜짝 놀랐다.“회사요? 그럼 왜 다른 팀장들은 이런 대우가 없어요?”다른 부서 팀장들은 다 스스로 운전하고 다녔다.이서는 멍해졌다.“뭐라고?”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앞좌석에서 운정 중인 임현태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그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그게…… 다른 팀장들은 다 혼자 운전하고 다니는 거 같아서요…….”이서는 눈을 들어 임현태를 한 번 보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언니, 내가 말실수했나 봐요……?”이서는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별말 하지 않았다.임현태는 먼저 심소희를 엘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고 다시 방향을 바꿔 별장으로 향했다.차안에서 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멈추고 임현태가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에야 이서는 입을 열었다.“임현태 씨.”타고난 직업적 경각성으로 인해 임현태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네, 아가씨.”“왜 회사 다른 부서의 팀장들은 전용차량이 제공되지 않습니까?”임현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그는 무의식중에 별장을 보려고 했었다.하지만 억지로 참았다.“현태 씨!” 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이게 그렇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가요?”임현태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전광화석 사이에 지환이 분부했던 얘기가 번쩍 떠올랐다.“네, 그렇습니다. 아가씨는 회사의 평생 총괄 디렉터입
지환은 이서의 쇄골에 코를 파묻고 그녀의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머리속에는 성지영과 윤재하가 딸 이서에 대해 저지른 종종 만행이 스쳐지나 갔다.이렇게 연약한 몸으로 그동안 어떻게 부모의 배신을 견디고 버텨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그는 더욱 힘껏 이서를 안았다.“괜찮아, 그냥 안아주고 싶어.”이서의 심장은, 손으로 꽃잎을 튕기듯 가볍게 떨렸다.그녀는 지환이 안도록 내버려 두었다.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이 멀리 떨어진 두 심장을 연결시켜주는 것 같았다.지환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이서의 눈꺼풀이 감기기 시작했다.갑자기 쇄골에서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그녀는 깜짝 놀랐다. 순간 쏟아지던 잠도 온데 간데없이 달아났다.눈을 떠보니 지환이 쇄골에 키스하며 가볍게 깨물고 있었다.“개띠에요? 왜 물어요?”이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지환은 눈을 들어 쇄골 부위 새겨진 예쁜 빨간색을 쓰다듬었다.“앞으로 너는 내 것이야.”이서는 별로 개의치 않고 그를 밀었다.“나 배고파요.”지환은 일어나서 주방에 가서 음식을 내왔다.이서는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지환은 이서 맞은편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이서야, 우리 아이 갖자.”이서에게 아이 얘기를 꺼낸 건 벌써 두 번째다.지금의 심경은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녀는 잠깐 멈칫 하더니 계속 밥을 먹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지환의 눈동자가 굳어졌다.“당신은 분명히 좋은 엄마가 될 거야.”입안의 음식이 모래알 같이 느껴졌다. 이서는 코가 시큰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슬그머니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그건 모르는 거예요. 사람은 변하잖아요. 엄마가 된다는 것은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인데…… 아마도 처음에는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거예요. 그러나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삶에 회의감이 느껴지고 후회하고 포기하고…… 그렇게 되더라고요.”지환은 이서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꺼풀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서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회의실로 불려갔다.모두들 숙연한 표정이었다.그러나 이서를 보는 순간, 다들 좋은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특히 장지완.조소와 멸시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김청용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한 어투로 이서에게 말했다.“윤 총괄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오늘 아침에 케빈 씨의 수행비서가 연락 왔습니다. 우리와 합작하는데 동의하셨고 합니다!”이서는 입술을 오므리고 옅게 웃었다.“잘 됐네요.”“그런데…….”김청용은 이서의 눈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케빈 씨 쪽에서는 장지완 씨의 디자인 시안을 사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웃고 있던 이서의 표정이 잠깐 경직되었다가 곧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케빈 씨가 제 시안을 보셨나요? …… 안 보셨죠? 보실 생각이 없대요?”“네……. 그런 것 같습니다.”이서는 살짝 웃었다.“그래도 한번 보여 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어디서 나온 배짱일까?” 장지완은 경멸하며 웃었다.“케빈 씨가 그렇게 한가한 분이신 줄 아나 봐요. 당신이 뭐라고, 그 분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 참나 원…….”이서는 차분한 표정으로 장지완을 바라보았다.“그분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패키지 디자인에 대해 진심인 사람입니다. 저도 이번 시안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완성했습니다.”장지완은 냉소하였다.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윤 총괄님, 그렇게 안 봤는데, 근자감이 넘치는 분이셨군요. 혹시 그거 아세요? 자신감이 지나치면 교만입니다…….”재무팀 팀장도 무시하는 어투로 말했다.“이런 자신감은 ‘뷰티 페이스’ 입상하면서 생긴 거겠죠? 그러나 그걸 아셔야지, ‘뷰티 페이스’는 아마추어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콘테스트였다면,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장지완 씨 디자인 업계에서 10년 동안 몸담고 있으면서 실력을 갈고 닦은 사람이에요, 연공서열을 따져도, 아마 선배라고 불러야 할 텐데요. 그러니까 장지완 씨에게 졌다고 해서 X 팔려 할 필요 없어요. 이
현재…….장지완의 안색이 백지장이 되었다가, 곧 정상으로 회복되었다.“선생님, 우리 계약서에 사인부터 할까요?” 그녀는 앞으로 나가서 낮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그래, 그래요, 계약부터 해야지. 윤 총괄 얼굴 보니 너무 반가워서 오늘 온 목적을 깜빡했네.”말하면서 몸을 돌려 자리로 가려고 했지만 이서가 불려갔다.“선생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그럼요.”“이번 디자인 시안, 제 것…… 아직 안 보셨죠? 혹시 잠깐 시간을 내셔서 제 시안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케빈은 머뭇거렸다.“그런데…… 지완 씨의 시안이 이미 만족스러운데,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캐빈의 말을 듣고 장지완은 득의양양했다.“들었죠, 굳이 뭐 하러 봅니까? 윤 총괄, 내가 아무리 그래도 이 바닥에서 10년 넘게 몸담은 디자이너인데, 굳이 나와 비교하겠다는 건 번데기 앞에 주름잡는 격이지, 뭐 하러 굳이 굴욕을 자초할까요?”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지완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뭐 하러 굳이 시간 낭비해? 빨리 계약서에 사인이나 하지.”“내 말이! 질질 끌다가 변고가 생기면 윤 총괄이 책임 질 수 있겠어?”“그러게, 자기가 회사 오너야 뭐야? 칫!”많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이서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저는 그래도 선생님께서 한번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입니다.”케빈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작은 목소리도 말했다.“그러세, 나도 윤 총괄의 실력을 한 번 보고 싶네.”이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회의실에서 나와 디자인 시안을 사무실로 가지러 갔다.이서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장지완은 참지 못하고 케빈에게 말했다.“선생님, 사실 윤 총괄은 이쪽 관련 업무 경험이 전무한 초보 디자이너입니다. 만약 이번 콘테스트에서 실수가 없었더라면 윤이서 씨가 어떻게 우승을 하고 디자인 총괄 디렉터 자리를 꿰찰 수 있겠어요? 아마 윤이서 시안은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일 거예요.”케빈은 손을 흔들었다.“괜찮아, 봐도 시간이 얼
장지완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이서 씨, 졌으면 깔끔하게 승복해야지, 왜 남의 작품을 헐뜯는 거죠? 당신의 인품은 작품처럼 졸렬하네요! 이제야 왜 당신이 운전기사랑 결혼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가네…….”케빈은 이 말을 듣고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이서와 지환 두 사람 사이에 섬싱이 있는 줄 알았는데,윤이서는 이미 결혼한 유부녀라니…….그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귓가에 이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스킨 케어 업계에서 덕망이 높으신 대가라는 사실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선생님과 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생님께서는 상업화된 디자인, 즉 상업적 미학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이것이 바로 선생님의 상품이 훌륭한 데 비해 판매량이 따라주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다들, 덕망이 높은 대선배 앞에서 직설적으로 말을 뱉는 이서가 너무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했다.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편으로, 케빈이 계약을 번복할까 봐 조마조마했다.김청용조차도 이서가 너무 무례했다고 느꼈다.그러나 잠시 뒤, 회의실에서 케빈의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하하하, 재미있네. 사실은 나도 오랜 시간 줄곧 이 문제를 고민해 왔어. 왜 내 제품이 십여 년 전보다 판매량이 훨씬 감소했을까……. 처음에는, 나같은 노인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후에 다시 생각해 보니, 스킨 케어 분야는 전문적인 영역이어서, 시대에 상관없이 제품의 효능만 좋다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네. 그런데 출시하고 보니 판매량이 매년 급감하고 있더군? 홍보가 제대로 안 된 건지, 판매 경로가 잘못된 건지 정말 고민 많이 했는데……, 오늘, 윤 총괄이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어. 허허, 족집게가 따로 없네. 내 문제점을 단번에 콕 집어내다니. 십여 년 전, 내가 만든 수분 마스크 팩이 인기를 끌면서 운 좋게 이 업계에서
“세상에, 나 소름 돋았어!”“어머나, 미쳤어! 정말 기가 막히네! 10년 이하 짬밥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건데!”“허허, 미대 가봐, 10년 배웠다고 이런 작품 만들어낼 수 있는지? 대박이다, 이게 어디 단순한 상업디자인이야,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미학과 상업을 겸비한 신의 작품이지!”다시, 비교해보니 장지완의 12화 시리지가 더없이 평범해 보였다.케빈은 이서의 작품에서 시선을 떼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결정했어. 윤 총괄 시안으로 하겠네!”케빈의 말을 듣고, 장지완은 화가 나서 얼굴 전체가 일그러졌다.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케빈이 말을 이었다.“지완 씨 작품도 좋지만, 윤 총괄의 시안에 비하면, 음…… 뭐라고 할까……,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천양지차, 그래 천양지차야. 지완 씨, 보아하니 앞으로 윤 총괄에게 많이 배워야 할 것 같네.”마지막 한마디에 장지완은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10년 넘게 이 바닥에서 버틴 나더러 초짜한테 배우라고!?’모두들 안색이 제각각이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김청용은 오히려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이서가 장지완에게 지면, 어떻게 보스에게 보고해야 하나 난처했다.계약을 마친 케빈은 이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윤 총괄, 다음에 우리 꼭 다시 보게나.”“네. 저도 선생님이랑 꼭 다시 뵙고 싶습니다.”두 사람은 연락처를 교환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차에 올라타서 케빈은 이서와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차가 일정한 거리를 달린 뒤에서 그는 개탄했다. “윤 총괄…… 보통내기 아니야. 이미 결혼했다니 아쉽군. 그렇지 않으면 지환에게 소개해주고 싶은데…….”앞 좌석의 기사가 웃으며 말했다.“저도 두 분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케빈은 고개를 저었다.“아쉽다, 아쉬워!”이때 케빈을 배웅하러 나온 각 팀의 팀장과 부팀장들은 모두 흐름을 바꾸어 이서를 에워싸고 한바탕 칭찬을 해댔다.“윤 총괄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 까다롭기도 유명한 캐빈 씨를 한 방에 설득시키다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
그 사람은 바로... 심유인!“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소희는 심근영 부부를 알게 된 후로 서서히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 찰나, 심유인이 거들먹거리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자, 소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인은 항상 뒤에서 작은 음모를 꾸미곤 해서, 소희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회사 기밀을 훔쳤다는 누명도 심유인이 벌인 짓인 것 같단 말이지...’‘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겠어?’‘자기 자신을 조사하는 셈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소희야, 오랫동안 널 만나지 못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너를 보러 온 건데,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이서의 배후 인물이 지환이라는 것과 하은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심유인은 소희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과거에 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심유인은 오직 한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의 남자 친구가 월요일에 찾아온다는 것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심유인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저는 언니를 반기지 않아요. 당장 나가주시겠어요?”심유인은 곧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심소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 지금은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신다지만, 언제까지 그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건 전적으로 윤 대표 때문이야. 네가 윤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실까?” 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와 저의 관계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관계가 아니에요!” 심유인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래,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다는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이지숙이 꽤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어머, 내 정신 좀 봐.”“나는 윤 대표더러 소희를 설득해 달라는 의미였어. 오해하지는 마.” 이서는 이미 고개를 돌려 심근영과 대화를 이어가던 지환을 흘겨보다가 이지숙을 향해 말했다.“알맞은 상대를 찾는 일은 제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잖아요.” 이지숙이 말했다.“그거야 그렇지만... 윤 대표는 우리 소희의 친구잖아. 그러면 소희와 가치관이 잘 맞는다는 뜻이지 않겠어? 어쩌면 이 중에 두 사람 마음에 다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는 소희를 힐끗 보았는데, 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태 씨에 관해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진을 받고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요리가 나오는 동안, 이서는 구실을 찾아 소희와 함께 룸을 나섰다.“소희 씨, 왜 현태 씨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거야?” 소희가 말했다.“아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분이 현태 오빠를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요.”“만약 반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소희의 긴장한 모습을 본 이서가 웃기 시작했다.“두 분이 현태 씨를 반대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 거야? 현태 씨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네?” “이서 언니!”“그래, 인제 그만 웃을게.”“나는 두 분이 현태 씨의 출신을 전혀 개의치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 두 분에게는 현태 씨의 출신보다, 소희 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실 테니까.”“물론, 두 분이 소희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현태 씨의 출신을 더 중요히 여기시겠지.”“그럼 소희 씨도 두 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으면 되잖아?” “내 말이 틀렸어?”곰곰이 생각하던 소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언니 말이 맞아요.”두 사람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이지숙이 다시금 중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소희는 이서를 힐끗 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 사실... 제겐 남자 친구가 있어요.”놀란 이지숙은 대답도 잊은 채 소희를 바
이서의 심장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거부할 수 없는 그의 손길,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은근한 기대가 피어올랐다.그 순간, 지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이 많이 차갑네. 평소에 신경 좀 써.’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을 때는 5분이 흐른 후였다. 뺨에 오른 붉은 기운은 이미 옅어졌지만, 귓불의 붉은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다시 운전석에 앉은 지환의 모습이 맑고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이자, 이서는 방금 욕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환 씨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떨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이서와 지환은 마침에 호텔에 다다랐다.심근영 부부와 소희는 이미 도착해 있었는데, 두 사람을 보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게다가 심근영은 이 기회를 틈타 지환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하 대표님, 저희 체면을 세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지환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하지만 심근영은 그의 행동 스타일을 일찌감치 들은 모양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이서와 악수를 하려 했다.그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환이 이를 저지했다.“늦게 왔는데, 주문부터 하시죠.”심근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소희에게 두 사람의 일을 들은 상태였다.‘참, 두 사람이 싸우는 중이라 했었지?’‘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곧 화해하겠는걸?’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심근영이 지환에게 메뉴를 건넸고, 지환은 이서에게 메뉴를 건넸다. 이서는 모두의 권유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주문한 요리는 모두의 입맛을 고려한 것이었는데, 음식이 식탁에 오르자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심근영과 지환은 사업상의 일을 이야기했으며, 이지숙과 소희, 그리고 이서는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끝은 ‘결혼’이었다.“소희야, 너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곧 결혼해야 해.” “...엄마, 서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