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솔은 화끈거리는 뺨을 손으로 가리며 음흉하게 웃었다.“너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는구나. 지금 너의 이 찐 모습을 지환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막돼먹은 년…….”이서는 두 손으로 팔짱을 끼고 말했다.“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환 씨 너보다 더 잘 알고 있거든. 이것도 너한테 배운 거야. 겉 다르고, 속 다르고.”박예솔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너도 너 자신에 대해 정확히 잘 알고 있구나. 쓸데없는 말 말고, 너 수영장에서 있었던 일 나랑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는 거잖아. 근데 증거는 없고…… 맞지? 내 얘기는 똑같아. 지환이가 나를 싫어하게 할 그런 행동을 할 정도로 난 바보가 아니야.”이서는 박예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수영장 일이 정말 그녀와 관련이 없다면,그럼, 이 여자,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윤수정처럼 청순가련형 여우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감성지수가 높고, 논리가 치밀하며, 일 처리에 빈틈이 없다.’하지만……이서는 곧 웃음을 자아냈다. 떠나버린 기러기도 머문 곳에 흔적을 남기는 법, 일을 저질렀으면 언젠가는 마각이 드러날 게 뻔하다.“그래서 내 남편 좋아하는 건 인정해?”“그래,” 박예솔은 당당하게 인정했다.“그리고 너 윤이서, 지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아.”이서는 가볍게 웃으며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었다. 쏴아, 하는 물소리에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그건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넌 지환의 진짜 모습을 전혀 몰라. 만약 네가 알고 있다면…….”박예솔이 고개를 들자 거울에 갑자기 나타난 지환을 보고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녀는 당황하여 허둥지둥 고개를 돌렸다.“지환아…….”지환은 성큼성큼 걸어와서 건조기에 손을 말리고 있는 이서 앞에 다가왔다.“이제 가자.”“네.”이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박예솔을 보았다.“예솔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지환의 그 칠흑 같은 눈동자를 본 박예솔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말을 마치자, 주위의 억누
“아니에요.” 이서는 웃으며 그 사람이 호텔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지환을 봤다.지환은 아직도 통화 중이었다.심심했던 이서는 휴대전화를 꺼내 이것저것 보고 있었다. 갑자기 큰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많이 기다렸지?”이서는 고개를 들었다.“아니요, 우리 이제 집에 갈까요?”“음.”“아버님은요?”지환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아직 예솔 집에 있어.”“모셔 올까요?”지환은 이서의 가는 허리를 매만졌다.“영감쟁이의 최대 소원이 빨리 손주 보는 건데, 우리 집에 오려고 하겠어?”말하면서 그는 이서를 훌쩍 안았다.“애 만들러 가자.”지환은 이서의 마음이 온전히 자기한테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고 생각했다.하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그는 그들만의 아이를 원했다. 이렇게 해야만, 이서가 자기를 떠날 수 없는 낙인 같은 게 찍힐 것 같았다.지환을 쳐다보는 이서의 눈에 사랑이 철철 넘쳤다. 그녀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직 할 게 많다.“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이제 곧 일을 시작할 것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일찍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지환은 눈동자 깊은 곳의 빛이 조금씩 어두워지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당신…… 기분 안 좋아요?”“아니야.” 지환은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화가 난 게 아니라 질투가 난 것이었다.‘그녀에게, 하은철은 남다른 의미인가 보다.’집에 오는 길에 둘 다 말이 없었다.비록 화 난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서는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밤마다 한참을 괴롭히다가 잠이 들었는데,오늘 밤의 지환은 비정상적으로 너무 얌전하게 자기를 안고만 있었다.모든 열정이 다 사라진 것처럼.왠지 모르지만, 마음속으로 무지 허전하고 당황했다.“저…… 물 좀 마시러 갈게요.”일어나서 거실로 나온 이서는 슬그머니 임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이 시각, 대한민국은 대낮이다.벨 소리가 두 번 울리기도 전
이서의 온몸에 홍조가 빠르게 퍼졌다.“나 지금 진지하단 말이야, 어떻게 매번 이렇게 장난질이야?”임하나는 붉은 입술을 가리고 이야기했다.[장난 아냐, 아주 진지한 방법이라니까. 날 믿어. 이 방법은 백발백중이야. 에이, 테스트해 보고 반드시 나에게 피드백을 줘!]“…….”영상통화가 끊고, 임하나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웃고 나니 또 실의에 빠졌다.‘내 순진한 친구…….’우울하던 참에 이상언이 보낸 문자를 보았다.[오늘 저녁 식사 어때요?]눈에 초점을 잃은 임하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카오톡을 꺼버렸다.지난번 이상언과 관계 이후로, 둘은 만나지 않았다.그는 아무 일 없는 사람인 양 가끔 그녀와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임하나는 솔직히 화가 났다.그녀는 벙어리 냉가슴 앓고 있는데 그는 까맣게 잊고 있다니…….그렇다고 다짜고짜 찾아가서 이상언한테 한바탕 퍼부을 수도 없는 노릇.괜히…… 자기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임하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짜증이 나서 손에 일도 안 잡혔다.이쪽.이서는 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임하나의 말은 마치 메아리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그녀는 심지어 진지하게 그 방법이 먹힐지에 대해 고민했다.이서는 말없이 눈살을 찌푸리다가 문득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그분이 화내는 건 처음도 아니고, 자주 있는 일인데, 왜 굳이 내가 달래야 하지?’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문을 벌컥 열었다.그러나 침대에 누워 그녀를 등지고 있는 지환을 보자, 또 마음이 다시 약해졌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부끄러워 빨개진 얼굴을 참으며 지환의 옆에 누워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그러고는 작은 손은 덩굴처럼 지환의 튼튼한 허리를 감쌌다.눈을 뜬 지환은 온몸의 근육들이 긴장하여 팽팽해졌다.소녀의 부드럽고 가는 작은 손은 마치 신비한 마력을 가진 듯 가볍게 몸속의 잠재되었던 욕망을 일깨웠다.그는 혀끝을 아래턱에 대고 눈을 감고 계속 자는 척했다
이튿날, 이서는 등도 쑤시고, 허리도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일어나 지환과 함께 디즈니랜드에 갔다.줄을 서야 할 줄 알았는데, 안에 들어가니 직원 말고는 관광객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왜…… 관광객이 없지?” 이서가 의아한 듯 물었다.한국에 아직 디즈니랜드가 없어 가까운 홍콩이나 도쿄로 가본 적은 있지만 갈 때마다 인산인해였다.‘너무 한산한데?’‘한산한 게 이상할 정도로…….’게다가 가는 곳마다 스태프들이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반겨주었다.지환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우리가 너무 일찍 왔나 봐. 어디 가보고 싶어?”이서는 지도를 펴고 그 중의 한 곳을 가리키며 신나서 말했다.“우리 여기 가요.”지환은 한 번 훑어보았는데, 지도에는 이라고 적혀 있었다.“그래, 나 전화 좀 하고 올게.”“네.”이서는 제자리에 서서 잠시 기다렸다. 잠시 뒤 지환이 돌아왔다.“가자.”은 디즈니의 가장 핫한 프로젝트이다. 최신형 선적 레일 기술을 이용한 리얼리티 몰입형 체험시설로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그러나 지난번 홍콩에 갔을 때도 대 기줄이 너무 길어 울며 겨자 먹기로 포기했었다.오늘 드디어 재미있게 놀 수 있게 된다니, 이서는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그들이 막 도착하자마자 앞에 한 커플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래도 사람이 있네요.” 이서가 웃었다.역시 그들이 너무 일찍 왔다.지환은 웃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끌고 입구로 갔다.안내원은 여학생이며 한국 사람이었다. 그녀는 고개는 푹 숙인 채 바닥만 보고 있었다.이서는 그녀의 빨간 귓불과 떨리는 손만 보았다.그녀는 별생각 없이, 지환을 따라 들어갔다.안에 도착하자 해적선은 이미 대기 중이었다. 일찍 들어온 커플은 맨 뒤에 앉았다.두 사람 모두 설렌 기분으로 앉아 탑승할 놀이기구가 기대되는 눈치였다.이서는 그들이 노는 걸 좋아하는 어른이라고 추측했다.그녀가 중간 자리에 앉으려고
이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이 여자가 좀 수상하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막 연유를 물어보려고 할 때, 지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이서는 지환에게 시선을 빼앗겼다.지환의 주의력도 그 여자한테서 휴대전화로 집중되었다.하경수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는데, 사태가 사뭇 심각한 듯했다.[당장 예솔이네 별장으로 와.]“지금 바빠요. 시간 없어요.”[너 지금 반드시 와야 해, 큰일 났다!]지환은 눈썹을 찡그리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그럼 기다리라고 해요!”전화를 끊자, 공기조차도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이서는 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이상한 눈빛으로 여자를 다시 한번 보았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자는 마치 큰 병을 앓는 사람 같았다.옆에 있는 남자친구의 안색도 안 좋긴 마찬가지였다. 새파랗게 질렸다.해적 여행은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이서는 방금 그 커플 신경 끈다고 흥이 깨져 다시 한번 타고 싶었다.이번에 그 커플이 없어지자, 이서는 마침내 마음껏 즐기기 시작했다.기타 놀이기구를 탈 때도 이서는 더 이상 그 커플을 만나지 못했다.게다가 줄을 설 필요 없이 타고 싶은 거 다 타고, 하고 싶은 거 마음껏 다 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전세 낸 셈이다. 신나게 마음껏 놀고 있던 이서는 마음 속으로는 다음번에 임하나와 함께 와야겠다고 생각했다.디즈니랜드를 나가기 전, 지환은 또 하경수의 전화를 받았다.“아버님께서 급한 용무가 있으신가 봐요?” 이서가 물었다.방금 놀이기구 탈 때도, 지환의 핸드폰이 계속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지환은 별일 아닌 듯 운을 뗐다. “아냐, 별일 없어.” “그래도 전화는 먼저 받아요, 혹시라도 무슨 급한 일이 있으면 어떡해요?”지환은 이서를 보며 ‘응’ 하고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에서 하경수는 다소 흥분한 것 같았다. 한참 멀리 떨어져 거리에서도 하경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렸다.그녀는 조용히 몇 걸음 뒤로 움직여 지환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심심하고 무료했던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여직원은 멀지 않은 곳에서 전화 받는 지환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그러다가 다시 눈시울이 또 붉어지더니 고개를 숙이고 달아났다.“저기…….”“왜? 무슨 일이야?” 통화를 마친 지환은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가는 직원을 보며 눈 밑에 빛이 번쩍였다.이서는 볼을 만지며 물었다.“저 오늘 메이크업이 이상한가요? 무서워요?”‘왜 그 아가씨는 말 몇 마디에 울음을 터뜨린 걸까?’지환은 고개를 숙이고 이서의 얼굴을 진지하게 살펴보다가, 곧 활짝 웃으며 입술에 키스했다.“무섭긴, 예쁘기만 하네.”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밀쳤다.“장난 그만 해요, 아버님이 뭔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지환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잘 모르겠어, 우리가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시네.”“그럼 가요.”“음.”두 사람은 하경수의 거처로 갔다.문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박예솔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옅은 홍조가 남아 있었다. 며칠 전에 이서에게 뺨을 맞은 자국이었다.두 사람이 들어온 걸 본 예솔은 눈물을 쏟아냈다.이런 모습을 본 이미연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이서를 다시 보니 버럭 화가 났다.“아버님.”이서가 하경수를 불렀다.하경수는 고개를 들어 이서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 웃음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이서, 이리 와, 아빠가 너한테 물어볼 말이 있어.”이서가 다가갔다.“그게…… 예솔의 게임 컨셉 시안, 네가 유출한 거니?”이서가 눈을 깜박였다. 하경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님,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쇼 그만 해.”이미연은 듣다못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솔이가 너 때문에 직장에서도 짤린 것도 모자라, 동종 업계에서 아웃되었다고! 너 어쩜 이렇게 악랄하니? 솔이가 뭐 어쨌다고? 네가 온다고 여기저기 설치며 챙긴 게 누군데? 너 어쩜 그럴 수 있니?”“저는 대체 다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지환은 이서를 끌어서 소파에 앉히고는, 턱을 살짝 들고 담담한 말투로 말
“잠깐!”하경수가 소리쳤다. 얼굴의 근육이 경직되었다. 정말 화가 났다.“사건은 아주 간단해. 예솔의 게임 컨셉 시안이 누설되었고 게다가, 경쟁 회사에 보내졌네. 경쟁 회사가 먼저 이 게임을 등록하여 출시했고……. 예솔이 반년 넘게 쌓은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 게지.회사는 내부 조사를 통해, 컨셉 시안을 경쟁 회사의 메일로 보낸 메일주소가 이서 거로 밝혀졌고…….”하경수는 마지막 몇 글자를 매우 느리게 말했다.“제가요? 제가 어떻게요?” 이서는 1초만 멍하니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오늘 여기 오기 전까지 전 예솔 씨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어요. 경쟁사는 말할 것도 없고요.”박예솔이 입술을 깨물자 고요한 미간에 애처로움이 더했다.“그…… 그건 나도 몰라요. 어차피 회사에서 조사한 메일주소가 이서 씨 거였어요. 솔직히 나도 믿기지가 않아요. 하지만 일이 내 앞에 떡하니 벌어져 있으니 안 믿을 수도 없어…….”이서는 박예솔의 뛰어난 연기에 감복했다.그녀가 연예계에 진출하지 않는 것은 정말 연예계의 큰 손실이다.“그래요, 그럼 내가 예솔 씨가 다니는 회사를 알고 경쟁사가 어디인지도 알고 있다고 쳐요. 그럼 물어볼 게요. 예솔 씨, 내가 어떻게 당신의 시안을 손에 넣었을까요?”“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박예솔은 흐느끼며 얘기를 이어 나갔다.“아무튼, 회사 내사 결과가 이런 거지,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그녀는 약간 멘붕이 온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엄마, 우리 돌아가자. 이 일에 대해 더 추궁하고 싶지도 않아. 내 인생이 망가져도 상관없어, 괜찮아. 이서 씨와 지환이만 잘 살면 난…… 그걸로 만족해.”이서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아마 이 일은 십중팔구 예솔이 자작극일 거라고 짐작했다.‘이 여자 정말 악랄하다.’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직장도 눈 깜짝 안 하고 그만두다니…….“그럼 안 되죠…….” 이서가 말을 했다.“이 일은 반드시 밝혀내야 해요. 좋은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서도 안 되고, 나쁜 사람을 가만두어
이 말인즉 이서 면상에 대고 가정교육이 없는 여자니, 지환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였다.이서는 성격 좋게 웃었다. 말투는 조곤조곤 부드럽지만, 등골이 서늘할 저압감을 내포하고 있었다.“저기, 아주머니, 아직 조사가 정확하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너무 말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나중에 자기 발등 찍을 수도 있어요.”이미연은 지환과 하경수에게는 거리낌 느껴 너무 방자하게 굴지는 못했다.그러나 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지금 이서가 또박또박 말대꾸하자, 갑자기 얼굴빛이 바뀌더니, 윗사람이고 뭐고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아직 제대로 조사 안 됐다는 거야? 솔이의 컨셉 시안이 네 USB 안에 있었잖아! 입만 살아가지고, 너처럼 뻔뻔하고 염치없는 애는 내가 살아생전 처음 본다.”바로 이때, 줄곧 흐느끼던 박예솔이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 그 USB는 확실히 이서 씨 거 아니야.”“솔아, 지금 이 지경에도 쟤 도와 얘기하고 싶니……?”“엄마, 그거 내 USB야.”예솔은 입을 오므리고 또 울려고 했다.“나도 회사에서 컨셉 시안이 누설된 걸 알고, USB 찾아봤더니, 사라졌더라고…….”“너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야? 다시 말해서, 이서가 너의 USB를 훔쳐서 컨셉 시안을 경쟁 회사에 보낸 거네. 그럼 이제 모든 게 납득이 되네.”이미연을 바라보는 이서의 말투가 물처럼 덤덤했다.“나는 예솔 씨와 거의 만나지도 않았어요. 처음은 여기서, 두 번째는 식당에서, 그게 다예요. 지금 계속 내가 USB를 훔쳤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도 물어보고 싶어요. 내가 언제 훔쳤을까요?”이미연은 말문이 막혔다.하경수도 이 일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거실은 괴상한 조용함에 빠졌다.유독 지환만 두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자기 집 아내를 바라보았다.지금 그녀는 마치 비바람에 맞고 자란 절벽 위의 난초처럼 강인하고 꿋꿋했다.별다른 매력이 느껴졌다.“엄마, 아저씨,” 박예솔은 울음을 참으며 일어나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