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알겠어요.”“자, 이제 됐다.”USB에 자료를 복사한 이서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소희에게 말했다.“소희 씨, 꼭 기억해. 회사를 잘 관리하는 것 외에도 장희령이 왜 소희 씨를 노리는 건지 분명히 알아내야 해.” “이번에는 장희령의 계획이 수포가 되었지만, 다음에 또 이런 문제를 일으킬까 봐서 걱정이야.” “그리고 장희령이랑 심동이 결혼을 약속했다는 소문이 들리더라고. 일단 그 여자가 심씨 가문의 며느리가 된다면, 우리를 상대하는 데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더 많아질 거야. 그래서 진정한 날개를 달기 전에, 모든 일을 똑똑히 조사해야 해.”이서가 말했다. “네.”이서가 이토록 이토록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본 소희는 또 한번 따스함을 느꼈다.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을 확인한 이서는 하나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하나가 물었다.“어디로 갈 생각이야?”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하나야, 미안해. 그것도 비밀이야.” 하지만 하나는 별로 개의치 않고 말했다.“아, 그냥 별생각 없이 물어본 거였어. 어쨌든 이번에는 하은철이 너무했어. 아니다, 매번 그랬었지? 그래도 이번에는 너를 너무 궁지로 몰았어.” 여기까지 말한 하나는 잠시 멈추고서야 계속 말했다.“이서야, 윤씨 그룹을 매각하고 외국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이서가 고개를 기울여 하나를 바라보았다. “국내에서 계속 하은철의 타깃이 되느니, 그냥 해외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 어쨌든 윤씨 그룹을 매각하면 적어도 200억 원은 받을 수 있을 거야. 그 정도 돈이면 네가 외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이서가 잠시 후에야 천천히 말했다.“사실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애초에 국내로 돌아온 이유도 외국에서 누군가의 타깃이 되었기 때문이잖아. 내가 또 외국으로 나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하긴.”하나가 턱을 만지면 심란해했다.“외국에도 하은철 같은 적이
고집스러운 이서를 본 하나는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간 후, 그녀는 이서가 걱정되어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무래도 이서가 좀 이상해. 확인 좀 해줘.”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안에 있던 이서는 바다에 주저앉고 말았다. 극심한 두통을 느낀 그녀는 머릿속을 전부 찢어버리고 싶었다. ‘아파!’‘너무 아파!’게다가 통증과 함께 밀려온 것은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하 선생님의 신분을 알게 되면, 세상에 종말이 올 것만 같아!’ 이서가 머리를 힘껏 감싸 쥐었다. 같은 시각.하나의 전화를 받은 소희는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서 점점 올라가는 층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해당 층에 도착하자, 그녀가 찡그렸던 미간을 조금 폈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소희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는 이서를 보고는 잠시 멍해졌다. “이서 언니...” ‘완전 괜찮아 보이는데?’“어?”이서는 소희를 보자마자 하나가 그녀를 여기서 기다리게 한 것을 알아차렸다.“중요한 서류를 깜빡해서 다시 왔어. 내려가려고?”“아니에요, 아니에요.”소희가 재빨리 이서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시종일관 반듯하고 침착한 것을 본 소희가 그제야 안심하고 말했다.“이서 언니, 무슨 중요한 자료길래 저를 시키지 않고 직접 온 거예요?” “중요한 서류는 내가 직접 챙겨야지.”이미 문 앞에 다다른 이서가 소희를 막으며 말했다.“자, 소희 씨는 이만 할 일 하러 가.” “네.”소희가 얼른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3, 4미터 정도 멀어진 것을 본 이서는 몸을 돌려 문을 닫았다. 눈을 거세게 감고, 전류가 흐르는 듯한 통증이 물러가기를 기다리고서야 서랍으로 가서 진통제 한 알을 꺼냈다. ‘하 선생님의 신분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이었구나.’‘앞으로는 하 선생님의 신분이 궁금해도 알려고 하면 안 되겠어.’‘그렇지 않으면... 하 선생님을 잃게 될지도 몰라.’ 근거 없는
“하지만 사람이라면 약점이 있기 마련이지.”이미 이서와 몇 번이고 맞붙었던 하은철은 더 이상 맹목적으로 자만하지 않았다. 심동이 말했다.“근데 그 어르신은 약점이 없는 것 같아.”“이전에 어르신의 손자가 납치된 적이 있었거든? 그 납치범은 몸값으로 20억을 요구했었는데, 결국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그 어르신은 최대 10억만 줄 수 있다고 쐐기를 박더라고.” “협상이 결렬된 납치범은 인질을 죽이겠다고 협박했지만, 어르신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지.”“결국 그 납치범은 돈을 한 푼도 못 받고 인질을 돌려보내야 했어.” “그런 사람한테 윤 대표의 설득이 통할 것 같아? 정말 윤씨 그룹의 화물을 수출해 주겠냐는 말이야.” 찌푸려진 하은철의 미간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뭐 하나만 묻자, 손씨 가문이 계약을 체결하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있어?” “당연하지, 윤 대표가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겠어?”“그럼 됐어. 그 사람들이 이미 협상을 마쳐서 윤이서가 계약을 체결하러 가는 거든, 아니면, 협상이 안 돼서 설득하러 가는 거든, 우리는 그 협력을 반드시 막아야 해!”심동은 아마 협상하러 간 것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하은철의 엄숙한 표정 때문에 이서가 손씨 가문의 어르신인 손문덕과 이미 합의를 마쳤다는 착각이 들어서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잠시 침묵하던 심동이 말했다.“그럼 우리도 가야 할까?” “아니.”하은철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너는 이만 가봐.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심동은 이 말을 듣자마자 기뻐하며 손을 털고서 즐겁게 떠났다.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하은철은 그제야 핸드폰을 들고 번호를 눌렀다. 전화가 연결되자, 그의 목소리에서는 평소와 다른 열정이 묻어 나왔다. 놀란 상대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하 사장님, 무슨 일이든 지시만 하십시오.]하은철은 그제야 얼굴에 만연하던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좋습니다. 뭐 하나만 물을게요.
손민우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음탕한 웃음을 지었다.[알겠습니다, 하 사장님. 그건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윤 대표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음탕한 웃음은 불쾌함을 느낀 하은철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손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했던 하은철은 불쾌감을 억눌러야만 했다. ...같은 시각.이미 비행기에 오른 이서는 긴장한 채 자료를 보고 있었다. 당연히 손씨 가문에 대한 자료였다. 그것들은 모두 인터넷상의 정보였지만,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손씨 가문은 그 지역에서 주도권을 쥔 존재라 불렸다. 그 가문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가문들이 그 지역에서 사업을 확장하려 했지만, 결국 쫓겨나거나, 처참히 분할되어 쓸모없는 찌꺼기만 남는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이서는 자료를 보면 볼수록 심장이 뛰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하 선생님이 어떻게 손씨 가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거지?’ 이서는 이 문제를 떠올릴 때마다 지환의 신분을 조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환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않도록 주의를 돌리는 데 애써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효과가 미약했고, 지환은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금방 알아차리고 말았다. “어디 불편해? 곧 내릴 수 있을 거야!”“아니에요, 그냥 손문덕 어르신을 만나서 일을 해결하는 게 그리 간단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이미 다 이야기해 뒀으니까 너는 사인만 하면 돼.”“그렇다면 다행이네요.”물을 한 모금 마신 이서는 창백한 안색을 누그러뜨리고서야 웃으며 말했다.“좀 쉬고 싶어요. 도착하면 알려주실래요?” “알겠어.”지환은 다정하게 얇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눈을 감은 이서는 마음속으로 필사적인 자기 최면을 걸었다.‘하 선생님의 신분은 생각하지 말자... 절대 생각하지 말자.’ 최면이 통한 것일까, 아니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두 사람은 이내 경호원이 말했던 호텔에 다다랐다. 그 호텔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불안감이 극에 달했지만, 지환과 나란히 걸으며 조금이나마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불안을 느낀 것일까. 지환이 이서의 손을 꽉 잡았다. 경호원의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드디어 H시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손씨 가문의 가주, 손문덕을 만날 수 있었다. 손문덕은 올해로 80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늠름한 기운을 뽐내고 있었다. 심지어 80세가 아닌 60대처럼 보였으며, 막 노년기에 접어든 것 같았다. 지환과 이서를 본 그가 허허 웃으며 인사했다.“허허, 하 선생과 웬 아가씨가 왔군요.”그는 지환의 진짜 신분은 알 수 없었지만, 그날 밤 이미 그의 냉혹함을 목격한 바 있었다. 그날 밤, 그는 10여 명과 함께 함정으로 가득한 손씨 가문의 저택에 침입했으며, 손문덕의 목에 칼을 대고 윤씨 그룹의 화물이 손씨 가문의 항구를 지나게 하라고 협박했다.심지어 자신의 말 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의 골동품을 모두 태워버리겠다고도 했다. 하은철의 말이 맞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약점이 있는 법이다. 물론, 손문덕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는 그 골동품과 그림들을 목숨처럼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골동품과 그림을 모두 태워버리겠다는 지환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게다가 10여 명을 대동하고도 조용히 저택에 침입한 사람이라면, 목숨을 노릴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이것이 지환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하지만 이 선택은 아주 굴욕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계약을 체결하지 않을 방법이 있다는 큰손자 손민우의 말을 들었을 때,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손민우는 곧 알게 될 거라며 뜸을 들였고, 단언컨대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손문덕은 지환과 이서를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불안하지 않았고, 오히려 만개한 웃음
이내 그 발걸음 소리는 문 앞에서 멈췄다. 이서가 고개를 돌리자, 족히 120kg은 넘어 보이는 남자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는 너무 뚱뚱해서 저택의 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릴 지경이었다. 이서가 지환을 바라보았는데, 그도 문 앞에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안색이 약간 변한 듯했다. 그 남자는 지환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아, 저 사람이 하은철이 전화로 말했던 그 남자구나!’지환의 옆에 선 약한 여자를 보니, 담력이 더 커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이 사람들이 우리 항구를 쓰겠다던 사람들이죠?” “그래.”여전히 자리에 앉아있던 손문덕이 움직이지 않은 채 물었다.“준비는 다 된 게야?” “준비는 다 끝났어요.” 손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손문덕은 얼굴에 만연했던 선의를 거두었다.“그럼 준비도 됐겠다...” 지환을 바라보는 손문덕의 얼굴에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지만, 눈동자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독기뿐이었다. “하 선생, 하 선생의 앞에 서 있는 그 아이는 내 손자인 민우요. 그 아이가 윤씨 그룹에게 항구를 내주는 걸 동의하지 않더군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한순간에 마음을 바꾸는 것은 이서도 경험해 본 일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계약 직전에 마음을 바꾸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이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진심으로 항구를 빌려주려던 게 아니었던 거야?’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H시에서 그렇게 제멋대로 굴던 사람이 흔쾌히 항구를 빌려줄 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항구를 빌려주는 것은 손씨 가문이 수출 물량의 일부를 줄여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수출 물량은 이익과 이어진다. ‘애초에 하 선생님이 뭘 어쨌길래 승낙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지금은 물어볼 시간이 없어. 왜냐하면...’ 손문덕의 손자인 손민우가 거들먹거리며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그와 같은 덩치의 사람이 여럿이나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잠시 후, 지환이 갑자기 번개처럼 손을 들어 손민우의 손가락을 덥석 잡았다. 손민우는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 이 비명은 다른 사람들을 모두 깜짝 놀라게 했다.손민우가 큰 소리로 외쳤다.“멍하니 뭐 하고 있어!”경호원들은 이 말을 듣고서야 돌진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건장하고 힘이 셌다. 마치 드높은 산이 지환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았다. 지환은 사방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자마자 손민우의 손을 놓았고, 이서를 몸 아래로 감쌌다. 품속에 한 사람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비처럼 가벼운 지환은 장정들의 사이를 유령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첫째는 그 사람들이 두 사람을 향해 돌진하고 있지만, 지환만을 목표로 한다는 것.둘째는 시종일관 지환의 얼굴을 공격하는 그들의 목표가 지환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라는 것. 이를 깨달은 이서는 지환의 품에 숨지 않고 주동적으로 돌진했다. 지환은 두 주먹만으로 네 손을 당해내기 어려웠다.갑작스러운 습격이 밀려올 때, 이서는 곧바로 지환의 뒤에 서서 그 사람들을 막았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정말로 꼼짝하지 못하고 공격 방향을 바꿨다. 처음에 지환은 동의하지 않았기에, 이서를 안고 피하느라 몇 번이고 공격을 당해야만 했다.하지만, 후에 이서가 확실히 그 사람들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안심하고 그의 가면을 벗기려는 큰 덩치에 전심전력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이서를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지환은 힘이 폭발하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10여 명의 경호원을 바닥에 쓰러뜨려 고통스럽게 소리치게 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손문덕과 손민우는 놀라 멍해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손민우가 얼른 소리쳤다.“사람이 죽었어, 거기 누구 없어? 사람이 죽었어! 어서 들어와 봐!” 밖에 있던 경호원들이 이 고함을 듣고 놀라 허겁지겁 들어왔다. 그들은 눈앞의 상황을 보자마자 무슨 일인지 바로 파악하고는 곧바로 지환을 포위하기 위해 떼거리로
지환이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가면의 단추가 ‘톡’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이서가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고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을 상상한 지환의 눈이 금세 붉어졌다.그는 갑자기 온몸에 강력한 힘이 주입되는 듯했고,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던 그 사람들을 확 떼어냈다. 벽에 거세게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고, 바닥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불과 30초 이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지환이 그 찰거머리들을 떼어내는 순간,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가면도 땅에 떨어졌다. 그는 단번에 다리를 들어 그 가면을 밟아 깨뜨렸다. 가면이 망가지는 소리는 누군가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같았다. 손문덕을 포함한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매우 놀라 온몸을 벌벌 떨었다. 특히, 그들은 지환의 얼굴을 보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손문덕은 H시의 패권자로서 이번 생에는 두려워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자부했다. 설령 상대가 하은철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연장자이기 때문에 H시에서 만큼은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절대 안 돼!’ 지환은 하은철처럼 젊었으나, 눈빛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손문덕은 그의 두 눈이 자신의 살을 베고 있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는 핏빛이 서린 두 눈을 피하기 위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지환이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것도 손문덕이 있는 방향으로... 놀란 손문덕은 얼른 일어서서 손에 들고 있던 술을 들며 말했다.“하 선생,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내... 내 손자가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 그런 겁니다.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협약서에 서명도...”지환이 손문덕의 손에 들려 있던 술을 그대로 쳐냈다. 술잔이 땅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손문덕은 놀라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지환이 자신을 지나쳐 손민우를 향해 다가가는 것을 보며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놀란 손민우는 두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