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지환이 보는 앞에서 소희의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같은 시각, 창가에 앉은 소희는 멍하니 창밖의 복잡한 교통을 보고 있었고, 현태는 곁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소희가 인터넷 소식에 자극받을까 봐 걱정되었던 현태는 밤새 잠을 자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때, 이서에게 걸려 온 전화를 확인한 그가 바삐 전화를 받았다. [윤 대표님.]현태의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소희 씨는요? 할 이야기가 있어서 전화했어요.” [인터넷 일에 진전이라도 있는 건가요?]핸드폰을 쥔 현태가 문가에 가서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지금 바로 소희 씨 좀 바꿔주시겠어요?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현태가 기뻐하며 말했다.[네, 지금 바로 바꿔드리겠습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가 흥분을 억누르며 소희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소희 씨, 윤 대표님에게서 온 전화야.”여전히 창밖의 풍경을 주시하고 있던 소희가 몇 초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몹시 흐리멍덩했는데, 여전히 현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한참 후에야 그의 말을 알아차린 소희가 급히 핸드폰을 빼앗았고, 비틀거리며 통유리창 앞을 지나쳤다. 현태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천천히, 조심해.” 소희는 이미 핸드폰을 든 채 말하고 있었다.[이서 언니, 저를 향한 인터넷상의 악플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그렇죠? 이미 회사에는 막대한 피해가 생겼을 거예요. 절대 저 같은 사람 한 명 때문에 회사가 피해를 볼 수는 없어요...] “또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야?”이서가 웃으며 말했다.“난 그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한 거야. 소희 씨, 최근에 장희령의 미움을 산 적 있었어?” 소희는 멍해졌다.[장희령이요?] “응.”[장희령과 접촉할 일은 거의 없었어요. 굳이 장희령에게 미움을 살 이유를 찾는다면... 제가 언니의 비서라는 사실뿐이에요.]지난번에 나나가 장희령의 타깃이 된 것도 이서와 사이가 좋았기 때
‘두 분이라면 더한 일도 해결할 수 있으실 거야.’회사로 돌아온 이서는 곧바로 정인화가 7성급 호텔에 묵고 있는 사진을 최미영에게 건넸다. 사진을 본 최미영은 멍해졌고, 몇 초 후에야 반응했다.“윤 대표님, 이 사진...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이서가 물었다.“왜 그러세요? 사진에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사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이 사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엄청 대단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호텔이요... 제 기억이 맞다면 심씨 가문의 소유일 거예요.” “심씨 가문의 호텔은 안전과 보안으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에요. 그래서 부유층 사람들이 애인을 데리고 가는 걸 즐긴다고 하더라고요.”“이 소문을 들은 파파라치 기자들이 호텔에 잠입해서 부유층이 불륜을 저지르는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지난 십여 년 동안 그 계획을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들었어요.” “철저한 호텔의 보안성을 방증하는 결과인 거죠.”이서는 멍해졌다.‘고작 이 사진 한 장에 그런 이야기가 숨어 있을 줄이야!’ 그녀가 어제 전세를 냈던 지환을 떠올렸다. 이서가 손에 사진을 쥔 채 천천히 앉았다. 그녀는 M국에 있을 때부터 지환의 신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던 참이었다. 다만, 그때의 이서는 병세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귀국한 후에도 계속되는 압박에 시달리느라 이 문제를 제대로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한숨 돌리게 된 이서가 최미영의 말 한마디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윤 대표님?” 이서가 오랫동안 말이 없자, 말하기를 꺼린다고 생각한 최미영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그럼 지금 바로 이 사진을 공개하겠습니다.” “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니까 팀장님은 그저 사진만 공개해 주세요. 나머지는 집요한 네티즌들이 스스로 상상하게 내버려두자고요.” 이서가 말했다.“네.” 최미영이 몇 걸음 나아가려던 찰나, 무언가를 떠올린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발걸음을 멈춘 최
최미영이 그 사진을 공개하자, 집요한 네티즌들은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집이 가난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딸이랑 사이도 멀어진 마당에 저렇게 좋은 호텔에 묵을 돈이 있다는 게 말이나 돼요?][제가 알기로 저 호텔은 심씨 가문의 소유예요. 가장 저렴한 방이라도 하룻밤을 묵는 데 몇백만원은 필요할 텐데, 그런 돈은 어디서 얻은 걸까요?] [설마 심소희 씨가 낸 돈은 아니겠지요?] [심소희 씨가 낸 돈이 맞다면,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다던 주장은 설명이 불가능하잖아요!] 마지막 댓글은 소희가 돈을 지불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사람들은 한참이나 각자의 주장을 펼쳤으나 결론을 얻지는 못했다. 정인화는 인터넷 계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처음에 소희의 패륜을 폭로한 계정의 운영자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계정의 운영자는 당연히 자초지종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의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을 느낀 운영자는 어쩔 수 없이 장희령에게 상황을 알려야 했다. 같은 시각.장희령은 심씨 가문의 고택에서 심근영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 사장님을 찾아뵀는데요, 보도를 철회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실 뿐이었어요.” 장희령의 이 말은 진실이었다.하은철은 이서와 지환이 헤어지도록 압박하기 위해서 이서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보도를 철회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이서가 자리를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곧바로 자신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그 보도를 철회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다.그래서 심근영 부부와 소희를 충분히 골탕 먹였다고 생각한 장희령은 기사를 철회하고 아름다운 결혼을 준비하려던 찰나, 운영자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게 된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하 사장님의 명령 없이는 기사를 철회할 수 없어요.] 장희령은 하은철을 찾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만나지 못했고, 오히려 하은철의 비서에게 모욕당해야만
장희령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던 심근영 부부가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그렇긴 하지만, 우리도 그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단다. 게다가 이런 일은 빨리 처리해야 하는데, 만약 그 여자를 찾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해도 헛수고일 뿐일 거야.” 장희령이 웃으며 말했다.“두 분, 벌써 잊으신 거예요? 저는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이에요.” 그녀는 일부러 ‘연예계’라는 세 글자를 강조했다.“저희 업계에서는 정보를 캐내는 사람들을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제 매니저한테 부탁하면, 빠른 시일 내에 소희 씨의 양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순간, 장희령을 바라보는 심근영 부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럼 부탁 좀 하마.” 장희령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영자가 걸어온 전화였는데, 일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한 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반쯤 말했을 때, 장희령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심근영 부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느끼고서야 자신이 여전히 심씨 가문의 고택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른 몸을 일으킨 장희령은 핸드폰을 가리키며 정원으로 향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지숙이 다소 걱정하며 말했다.“상황이 달라진 건 아니겠지?” 심동이 미소를 지으며 이지숙을 위로했다.“엄마, 걱정하실 거 없어요. 희령이가 소희의 양어머니를 찾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두 분이 보시기에는 희령이가 단지 연기만 하는 사람일 수 있지만, 나름의 방식이 있을 거예요.” 이 말을 들은 이지숙의 태도가 다소 부드러워졌다.“그래, 아무래도 우리가 고리타분한 생각을 했던 것 같구나. 희령이를 연예계에 있는 다른 여자들처럼 여기면서, 우리 집안을 탐낸다고 생각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이번에 우리 집안일을 위해서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을 좀 바꿔보기로 했어. 내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잖니?”“네 여동생 일만 잘 해결되면, 결혼
이렇게 생각한 장희령은 곧바로 하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하은철의 비서였는데,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에 장희령이 말했다.“하 사장님이랑 급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지금 당장 하 사장님 좀 바꿔주세요!” 이 말을 들은 비서는 무슨 큰일이 난 줄 알고 급히 하은철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다. 피어오르는 의심을 느낀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장희령은 하은철과 자신 사이의 신분 차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하 사장님, 이게 재미있다고 생각하세요?”하은철은 그녀가 전화한 이유가 소희의 보도를 철회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이 회사의 주인은 나라고요...] “하 사장님 회사의 자원을 제멋대로 사용하고, 허락을 구하지 않은 건 분명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모든 건 다 하 사장님을 위한 거였잖아요!” 장희령은 자신이 그런 일을 벌인 이유가 심씨 가문에 시집가기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없었다. “심소희는 윤이서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윤이서처럼 정이 많은 사람은 심소희에 관한 일로 정신없이 바쁠 거라고요.” “하지만 하 사장님은 그까짓 하신 한 장으로 제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요, 하 사장님이 윤이서를 좋아하는 것도, 윤이서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제 노력을 이용해서 윤이서의 환심을 사려고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장희령의 표정은 말할수록 더욱 일그러졌다. 그녀는 하은철이 이미 결혼한 이서를 왜 이토록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서의 곁에는 남편뿐만 아니라, 가면을 쓴 잘생긴 남자도 있지 않은가. ‘당신 같은 명문가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갈대 같은 여자를 가장 싫어하는 거 아니었냐고!’ ‘대체 뭐 때문에 하은철까지 윤이서를 원하게 된 거지?’장희령이 쏟아내는 분노를 듣던 하은철이 냉소를 지었다.[이제야 알겠네요. 누군가가 어떤 사진을 유출했다는 거죠?] [어떤 사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아무래도 하은철에 맞먹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니까.’‘하지만 두렵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늦었어.’ ‘이미 윤이서와 지독하게 엮인 상황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면, 윤이서 쪽도, 하은철 쪽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생각한 장희령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두렵긴요... 단지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윤이서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대단하다니...” “하지만, 저는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하은철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다른 일은 없는 겁니까?] 최근에 발생한 일을 재빨리 한 번 되새긴 장희령이 곧 지금의 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냈다.“네, 하 사장님, 이 문제는 제가 깔끔하게 해결할게요. 절대 사장님께 폐를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하은철도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요.][심 사장한테 전하세요, 또 문제가 생긴다면 두 가문 간의 협력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요!] 안색이 변한 장희령이 즉각 대답했다.“하 사장님,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하은철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린 장희령은 창가에 서 있는 심동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심동이 평소처럼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서야 그가 하은철과 자신의 통화 내용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제야 마음을 놓은 장희령이 심동을 향해 손을 흔들자, 격앙된 채 다가온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님께서 우리의 결혼을 허락하셨어!” 장희령은 아주 기뻤다. “그런데 소희에 관한 문제가 해결된 후에 우리의 결혼 날짜를 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심동이 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간단하지 않겠지만...”이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떠올린 장희령은 마음이 연처럼 날아오르는 듯했다.“나만 믿어, 곧 해결할게.” “정말?”심동의 눈동자에 불신의 기색이 떠올랐다. “응.” “그나저나 방금 네 표정을 보니까 화가 난 것 같던데, 누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진이 퍼지자, 정인화가 직접 나서서 해명 영상을 올렸다. “소희는 우리 부부에게 아주 잘하는 효심이 지극한 아이예요. 그런 아이가 우리를 때리고 동생을 죽이려 했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소희는 동생과의 관계도 아주 좋아요.” “대체 왜 그런 기사가 났는지 알 수가 없네요.” “아마 제 표현이 서툴러서 기사를 쓰신 기자님이 오해한 모양이에요.” 그녀는 모든 잘못을 기자에게 뒤집어씌울 기세였다. 하지만 그 기사를 발표한 기자는 정인화의 배후가 장희령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비난은 소희에게서 정인화로, 다시 기자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이번 논란은 얼마 가지 않아 연예계에서 터진 스타들의 불륜 뉴스로 묻혀버렸다. 어쨌든 소희의 위기는 이렇게 넘어간 셈이었다. 아래층에 있던 기자들은 더 이상 보도할 만한 내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아래층을 바라보던 하나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기자들이 있을 때는 비집고 들어오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매번 뒤로 돌아서 왔어.”소희는 오늘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하나 언니, 앞으로는 이러지 않을 거야.”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뭐가 이러지 않을 거라는 거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란 말이지.”“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어.”하나가 이서를 힐끗 쳐다보았다.“이서야, 내가 부정적인 게 아니야. 소희의 어머니가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더라도, 일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아서 그래.” “이번에는 소희의 어머니가 자발적으로 나섰지만, 분명 장희령의 지시가 있었을 거야.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합의가 있었던 것 같아.”이서가 눈썹을 찡그리며 소희를 바라보았다.“소희 씨, 장희령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 해.” “나는 장희령이 아직도 소희 씨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이서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확실히 알아볼
“네, 알겠어요.”“자, 이제 됐다.”USB에 자료를 복사한 이서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소희에게 말했다.“소희 씨, 꼭 기억해. 회사를 잘 관리하는 것 외에도 장희령이 왜 소희 씨를 노리는 건지 분명히 알아내야 해.” “이번에는 장희령의 계획이 수포가 되었지만, 다음에 또 이런 문제를 일으킬까 봐서 걱정이야.” “그리고 장희령이랑 심동이 결혼을 약속했다는 소문이 들리더라고. 일단 그 여자가 심씨 가문의 며느리가 된다면, 우리를 상대하는 데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더 많아질 거야. 그래서 진정한 날개를 달기 전에, 모든 일을 똑똑히 조사해야 해.”이서가 말했다. “네.”이서가 이토록 이토록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본 소희는 또 한번 따스함을 느꼈다.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을 확인한 이서는 하나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하나가 물었다.“어디로 갈 생각이야?”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하나야, 미안해. 그것도 비밀이야.” 하지만 하나는 별로 개의치 않고 말했다.“아, 그냥 별생각 없이 물어본 거였어. 어쨌든 이번에는 하은철이 너무했어. 아니다, 매번 그랬었지? 그래도 이번에는 너를 너무 궁지로 몰았어.” 여기까지 말한 하나는 잠시 멈추고서야 계속 말했다.“이서야, 윤씨 그룹을 매각하고 외국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이서가 고개를 기울여 하나를 바라보았다. “국내에서 계속 하은철의 타깃이 되느니, 그냥 해외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 어쨌든 윤씨 그룹을 매각하면 적어도 200억 원은 받을 수 있을 거야. 그 정도 돈이면 네가 외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이서가 잠시 후에야 천천히 말했다.“사실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애초에 국내로 돌아온 이유도 외국에서 누군가의 타깃이 되었기 때문이잖아. 내가 또 외국으로 나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하긴.”하나가 턱을 만지면 심란해했다.“외국에도 하은철 같은 적이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