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지환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 이서가 다시 한번 힘을 주려던 손을 망설였다.“제 곁에만 있어 주신다면, 절대 선생님의 가면을 벗기지 않을 거예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단지 마음속의 의문을 풀기 위해 이런 짓을 한다고?’ 손을 천천히 움츠린 이서가 꽤 억울하다는 듯 지환의 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분풀이 삼아 그의 턱을 세게 물었으나, 그것은 결국 키스로 이어지고 말았다. ‘아쉬워... 너무.’술에 취한 척하던 지환은 그제야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사실, 그는 이서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호흡에 맞춰 술에 취한 척하며,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지 고민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서는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고, 지환이 피하려던 위기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위기로 변했다. 이서는 중독되기라도 한 듯 지환의 아래턱을 계속해서 문질렀다. 그녀는 서서히 턱 아래로 손길을 뻗었지만, 지환의 얼굴에 솟아오른 터질 듯한 핏줄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사실, 그녀는 아무리 신경 쓰려고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었는데, 지환이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당장이라도 눈을 뜨고 빠져나가려는 충동을 억누르며 몸을 뒤척였고, 이 움직임은 마침내 겁 없는 이서를 놀라게 할 수 있었다. 이서가 고개를 들어 지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을 확인한 이서가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술에 취한 모습은 이런가 보네요... 잠들었을 때랑 똑같네요.” 지환은 밀려오는 후회를 느끼기 시작했다.몸을 돌린 그는 잠시 숨을 돌릴 기회를 얻었으나, 이서가 온몸을 지환에게 기대어 밀착했기 때문이었다. 이서의 숨결에 완전히 메어버린 지환은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처럼 빠져나갈 길을 잃고야 말았다. 이러한 고문은 그를 사나운 늑대로 만들어 매섭게 물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했다. 꿈틀거리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 지환이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아무
이튿날, 술에서 깬 이서가 침대 옆에 엎드려 잠든 지환을 보더니 안색을 굳혔다. ‘어젯밤에 술에 취한 나를... 하 선생님이 데려오신 거야?’ ‘뭐야, 그럼 취한 척하신 거였어?’ ‘마지막 순간에 가면을 벗기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이서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지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걸 보면... 화가 나지 않으신 건가?’ 한참 동안 안절부절못하던 이서가 매우 후회하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하 선생님의 가면을 벗기려고 하다니!’‘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나를 경계하실 게 분명해.’ 이서가 스스로를 나무라고 있을 때, 지환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후회막심한 표정의 이서를 마주해야만 했다.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은 생기가 넘쳤는데, 햇빛처럼 아름답고 눈부셔서 시선을 떼려야 뗄 수 없었다. 이서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순간, 지환과 눈이 마주쳤다. 멍해진 그녀가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지환이 웃으며 말했다.“어제는 용기 내서 날 취하게 했으면서, 왜 오늘은 고양이를 본 쥐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거야?” 이서가 바삐 말했다.“가면 아래의 진짜 얼굴은 궁금해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는데... 어제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제발 믿어주세요.” 불안감을 느낀 이서가 지환의 손을 잡았다. ‘곧 내 눈앞에서 사라지실 것만 같아.’ “정말이에요,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 거예요. 하 선생님, 화내지 마세요... 네?” 지환이 살포시 이서의 손을 마주 잡았는데, 그의 목소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이서야, 나는 화나지 않았어.” “그리고 사실... 어제 네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하지만 내 얼굴을 못 보게 한 이유는 내 얼굴을 마주한 네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릴까 봐 걱정돼서 그랬던 거야.” “사실 나의 두려움 때문이었던 거지.” 이 말을 들은 이서는
“하지만 제가 듣기로...”이서는 꽤 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다.“각 도시는 지역적인 이익을 아주 중요시한다고 했어요. 정말 이 도시에 있는 항구가 윤씨 그룹의 화물 수출을 허용해 줄까요?” 그녀는 이러한 문제 때문에 부근의 도시에 가서 수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런 건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이미 그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끝냈거든.” 이서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그 사람들이 허용해 주겠대요?” “응, 그래서 앞으로는 항구 문제로 심씨 가문의 압박을 받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정말 감사해요.” “너랑 나 사이에도 그런 말이 필요한 거야?”웃는 듯 마는 듯하던 지환이 또다시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 윤씨 그룹도 이번 일에 대해서 경각심을 느껴야 할 필요는 있어. 남의 항구를 빌려서 수출하는 건 늘 안심할 수 없는 법이야. 상대가 수출을 허용하지 않는 한, 수출할 방법이 없는 거니까.”이서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4대 가문 중에서 몰락했다가 다시 재기한 윤씨 그룹을 제외하고, 나머지 3대 가문은 모두 기업 산하의 항구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항구들도 이미 하위 가문들에 의해 나누어진 상황이었다. 평소에 모두가 화목하게 지낼 때는 이 항구들로 인해 특별히 문제 생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갈등이 생기기만 하면, 항구를 이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해외에서 사업을 펼치는 기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곤 했다. “3대 가문은 손에 쥔 항구를 절대 내놓지 않으려 할 거야. 하지만, 하위 가문들이 가지고 있는 항구는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몰라.” 지환이 말했다. 이서가 쓴웃음을 지었다.“그럴 리가요. 그 기업들도 분명히 이번 일을 알고 있을 거예요. 심씨 가문과 하씨 가문이 윤씨 그룹을 겨냥하는 걸 아는 이상, 항구를 내놓지는 않을 거라고요.” “게다가 항구를 가지고 있는 가문들은 해외 시장을 노리고 있잖아요.”“그 사람들도 항구를 내놓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윤이서는 결혼했다.그러나 결혼 상대는 그녀가 8년 넘게 사랑을 했던 약혼자인 하은철이 아닌 만난 지 5분도 안 된, 기본적인 정보만 대충 아는 남자였다.“후회되시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사무소 대기실에서 남자는 조금 귀찮다는 눈빛으로 윤이서를 흘겨보았다.윤이서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머릿속은 하은철의 차갑고 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3일전, 줄곧 윤이서를 피했던 하은철이 직접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고, 전화를 받은 그녀는 순간 지난 8년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정성껏 꾸미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은철뿐만이 아니라 그와 손을 깍지를 낀 채 휠체어에 앉아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윤수정도 함께 있었다.--그녀의 사촌 여동생!그녀가 아직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고 있을 때, 하은철은 갑자기 폭탄발언을 했다.“네 신장을 수정이에게 주면 너와 결혼할게.”윤이서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몸이 굳어지며 믿을 수 없단 듯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맞은편 남자의 눈빛은 시종 차갑고 증오로 가득 찼다. 마치 자신을 8년 동안 정성껏 뒷바라지 한 약혼녀가 아닌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도 보는 것 같았다.그녀는 마치 갈 곳을 잃어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 같았다.하은철과 어릴 때 약혼한 사이였고, 16살 되던 해 귀국한 후, 하은철을 걷잡을 수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이 8년 동안 그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그녀는 빨래와 밥하는 것을 배웠고, 또 그에게 걸맞는 아내가 되기 위해 피아노, 그림 등을 배웠으며 심지어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오직 그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결혼해주기 꿈꾸며.그러나 현실은 그녀에게 매몰찼다. 하은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촌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었다.심지어 그의 애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무슨 문제 있나요?” 하지환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윤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벌리고 있다가 또 하지환이 오해할까 봐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아니요, 가요.”어차피 언젠가 마주해야 할 문제였다.도중에 윤이서는 하은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스크린이 끊임없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윤이서는 마치 지난 8년 동안 비굴했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전에는 모두 그녀가 먼저 하은철에게 전화를 걸며 그의 관심을 끌려했다.그러나 하은철은 단 한 번도 먼저 그녀에게 전화를 지 않았다.설령 그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한다 하더라도 그는 한 마디 관심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윤수정을 위해 그는 몇 번이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정말 컸다.“안 받아요?” 조수석에서 눈을 감고 쉬고 있던 하지환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윤이서는 남자의 완벽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그가 짜증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입을 열기도 전에 맞은편 하은철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이서! 너 당장 병원으로 오지 못해! 지금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너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 수정이는 얼마나 괴로운지 아냐고? 너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어? 나는 이미 너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했는데, 넌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윤이서의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비록 하은철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은철의 마음속에 있는 자신이 그렇게 형편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이왕 이렇게 된 이상…….“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잖아?” 윤이서의 눈빛은 차가워졌다.“난 너의 사랑을 원하는데, 너는 줄 수 있어?”“뻔뻔한 년!”하은철은 그녀를 비꼬았다.“나는 절대로 너 같은 여자 사랑하지 않을 거야! 윤이서, 너 지금 오면 아직 하씨 집안 아
윤이서의 가슴은 놀라움에 줄곧 두근거렸다.마치 바다에서 떠 있다 마침내 부목을 잡은 것 같았다.고개를 들자 그녀는 마침 하지환의 눈빛과 부딪쳤다.그의 눈빛은 더 이상 장난기가 없었고, 오히려 무척 다정했다. 그 순간, 윤이서마저 하마터면 그에게 속아 넘어갈 뻔했다.그녀는 황급히 윤재하와 성지영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놀라서 소파에 주저앉았다.한참 뒤, 윤재하는 먼저 반응하여 고개를 들어 윤이서에게 물었다.“이서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윤이서는 막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하지환은 그녀를 자신의 뒤로 감쌌다.이런 전 없었던,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는 느낌은 그녀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고 이때 귓가에서 하지환의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오늘 금방 혼인 신고를 했는데, 정말 너무 바빠서 두 분께 미처 알리지 못했네요.”윤재하는 화를 참으며 이성을 유지했다.“이서야!”윤이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네, 저 사람 말이 모두 사실이에요. 난 결혼했고, 그 이유는 바로 하은철과 결혼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지영이 달려와 윤이서의 두 어깨를 쥐고 말했다.“이서야, 너 왜 그래? 너 줄곧 은철을 좋아했잖아, 지금 은철이 마침내 너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너 어떻게…….”그녀는 갑자기 경계하며 하지환을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너 솔직히 말해봐, 누가 널 협박한 거 아니야?”성지영이 하지환을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윤이서는 얼른 설명했다.“엄마, 아무도 나를 협박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냥 날 전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그녀는 지쳤다.그리고 더 이상 그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성지영의 손톱은 윤이서의 살에 깊이 파고들었다.“이서야, 너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 네가 은철과 혼약을 맺었을 때부터 우리는 널 그의 미래의 아내로 키웠고, 네가 시집가는 것은 윤씨 가문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지, 그 따위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야!”윤이서는 통증에
하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사람을 조수석에 앉힌 다음 운전석으로 올라왔고 문을 쾅 닫았다.윤이서는 놀라서 몸을 움츠렸고 하지환의 보기 흉한 안색을 슬쩍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화낼 사람은 분명히 그녀인데, 왜 하지환이 그녀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지?다음 순간, 하지환은 갑자기 차에 시동을 걸었고, 차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윤이서는 하마터면 날아갈 뻔했다. 그녀는 안전벨트를 꽉 잡았고, 목소리는 바람에 의해 다르게 변했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하지환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았고, 검은 눈동자는 마치 어두운 밤의 야수처럼 앞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순간, 평범한 아우디 A6는 철장에서 벗어난 맹수처럼 조용한 거리를 거침없이 질주했다.윤이서는 창백한 얼굴로 온 힘을 다해 안전벨트를 잡았고, 큰 소리로 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대한 바람소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그녀의 소리를 삼켰다.그렇게 윤이서는 차츰 발버둥 치는 것을 포기하고 광풍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불도록 내버려 두며 하지환이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3일 전, 그녀는 이미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자살은 너무 아파서 그녀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그리고 그때, 그녀는 부모님이 아무리 자신을 하씨 집안으로 시집가게 만들고 싶어도 하은철의 황당한 요구만 들으면 반드시 자신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이것 또한 그녀가 하지환을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러 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그러나 부모님의 눈에는 윤씨 집안을 다시 정상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의 행복보다 훨씬 중요했다.20여 년의 모든 아름다운 기억은 지금 산산조각이 났다.바람은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향해 불었고, 그녀는 이미 눈물이 다 말랐다.마음은…… 죽었으니까.차 속도는 어느새 느려졌고 윤이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차는 해변에 도착했고, 노을에 물든 모래사장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그들은 마치 작은 검은 점처럼 움
윤이서는 임하나의 터무니없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너 말이야, 드라마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그냥 상담소에서 찾은 사람이야. 하씨 집안과 관계가 없고, 유일하게 엮인 것은 그가 HS 그룹에서 일한다는 거야.”“아.”임하나는 크게 실망했다.“그러니까, 그는 심지어 하은철의 부하다 이거야? 그럼 앞으로 하은철이 너를 괴롭히려고 하면 더욱 쉬운 거 아니야?”윤이서는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아마…… 아닐 거야, 하씨 집안 어르신을 봐서라도 말이야. 게다가 난 이미 결혼했으니 하은철은 나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임하나는 약간 안심했다. 그러나 하은철이 한 짓을 생각하면 그녀는 또 참지 못하고 절친을 위해 불평을 품었다.“그때 내가 제대로 손봐줬어야 했는데. 설마 네가 얼마나 지랑 결혼하고 싶어 했는지 모르는 거야?”윤이서는 작은 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하나야, 이미 지나간 일이야. 앞으로 나와 하은철은 각자의 삶을 사는 서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야.”“그럼 그 혼약은…….” 임하나가 물었다.“어르신 쪽은 아직 모르지? 어르신께서 아시면 틀림없이 상심할 거야.”윤이서는 방금 전까지 내려놓은 근심을 다시 걱정하기 시작했다.하은철의 할아버지에 대해 윤이서의 마음속에는 양심의 가책만 남았다.그녀와 하은철의 혼약은 어르신이 직접 정한 것이었다. 윤씨네 집안이 몰락한 후, 모두들 어르신이 그 약속을 회수하며 그녀가 바닥까지 추락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그러나 어르신은 혼약을 취소하기는커녕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그녀만 손자며느리로 인정한다고 밝혔다.심지어 그녀 때문에 어르신은 손자인 하은철과 자주 다투곤 했다.지금 일이 이렇게 되자, 윤이서는 유일하게 미안한 사람이 바로 어르신이었다.“그냥…… 오늘 밤에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어.”윤이서가 말했다.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는 것보다 차라리 그녀가 직접 어르신께 말씀드리는 것이 낫다.임하나는 걱정을 금치 못했다.“내가 같이 가줄까?”“아니야.” 윤이서는 웃었다.“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