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네?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심 대표님 내외 분의 시선이 쭉 소희 씨를 향하고 있잖아?’ ‘심지어 나는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아.’ ‘일부러 무시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소희에게 떨어진 심근영 부부의 시선은 도저히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흠흠!”이서는 어쩔 수 없이 기침하며 심근영 부부의 주의를 끌었다.“이제 막 귀국하셨다고 들었는데, 따님을 찾는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이서는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조사해 놓았다. ‘그동안 심 대표님 부부가 심씨 가문을 심동에게 맡긴 건... 딸을 찾으러 갔기 때문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걸 보면, 딸을 찾았을 가능성이 커.’ “그래.”심근영 부부는 소희를 보며 눈을 떼기 아쉬워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만날 기회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소희의 눈에는 두 사람이 이상하게 보일 뿐이었다. 소희는 무의식적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내가 실례를 범하기라도 한 걸까?’ 이서의 시선이 심근영 부부에게서 소희로 옮겨졌다. 이서는 왼쪽과 오른쪽을 살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이상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두 분, 제가 오늘 심씨 가문의 고택을 찾은 이유는 오양 항구가 이유 없이 수출을 중단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예요.”심근영의 주의력이 마침내 이서에게 쏠렸다. “오양 항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이서가 미소를 지었다.“그게 바로 제가 묻고 싶은 내용이에요. 오양 항구가 아무 이유 없이 수출을 중단했더라고요.” 심근영이 핸드폰을 꺼내 심동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오양 항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평소대로 모든 화물을 수출했고요.] 심근영은 이 말을 그대로 이서에게 알렸다. 이서는 생각에 잠겼다.“그럼 저희 윤씨 그룹만 겨냥하신 거네요. 심 대표님, 말씀해 주세요, 왜 저희 윤씨 그룹의 화물만 수출하지 않으신 건가요?”‘아무래도 하은철이
‘만약 이 시점에서 윤이서의 편에 선다면, 하은철의 화를 불러일으킬 거야. 그럼... 소희에 관한 기사를 철회하는 게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지.’ 차에 오른 소희는 곧 차 문을 닫았다.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쌀쌀맞아?”“아니에요.”소희가 난감해하며 말했다.“사실... 대표님 부부께서 저를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고 느꼈거든요.”‘두 분의 눈동자에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 이서도 이상함을 느끼던 참이었다. 그녀가 물었다.“이전에도 두 분을 만나 뵌 적이 있었어?” 곰곰이 생각하던 소희가 입을 열었다.“없는 것 같아요.” 소희는 이전에 심근영 부부와 같은 대단한 인물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이후에는 두 사람이 딸을 찾으러 다녔기 때문에 자연히 만날 기회가 없었다. “음...”소희가 하이먼 스웨이와 심가은을 떠올렸다.“스웨이 작가님은 따님을 찾으셨을까요?”이서가 말했다.“아마 스웨이 작가님은 이제 따님을 급하게 찾지는 않으실 거야.”“아무래도 그렇겠죠? 지난번 심가은의 일로 큰 상처를 받으셨잖아요. 그 상처를 회복하고 따님을 찾으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이서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심씨 가문의 고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희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심씨 가문의 고택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 이만 돌아갈까요?” ‘심 대표님은 이 일에 대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는 것 같았어.’ 이서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심 대표님께서는 최근에 장희령과 나 사이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을 모르시는 눈치였어. 우선 기다려보자, 심 대표님도 곧 모든 걸 알게 되시겠지.” “그때가 되면, 심동이 이렇게 하는 걸 막지는 않더라도, 동의하지는 않으실 거야.”‘윤씨 그룹 화물의 수출을 정지시키는 건 분명 하은철의 생각이었을 거야. 심 대표님께서 이 일에 동의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하씨 가문과 맞설 수는 없으셨겠지.’‘더군다나 두 회사는 협력을 맺은 상황
‘나랑 한없이 멀어지길 바랐으면서... 정말 멀어지게 되니까 발악하는구나. 이렇게 자기 마음을 모를 수가 있나?’ “이서 언니.”소희의 목소리가 마침내 이서의 주의를 끌었다.“앞을 좀 보세요.”이서가 앞을 보니, 회사 앞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지난번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던 것은 장희령이 이서가 사람을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또 뭐 때문이지?’소희가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먼저 차에서 내려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 테니까 먼저 올라가세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들이 이서 때문에 온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두 사람은 전혀 알 리가 없었다. 그 사람들이 소희 때문에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것도 모르는 소희가 차에서 내려 자발적으로 덫에 걸려들자, 기자들은 하이에나처럼 그녀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밀쳐진 소희는 하마터면 납작해질 뻔했다. “심소희 씨,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다는 기사가 터졌는데, 사실인가요?” “부모님을 폭행한 건 사실입니까?” “친동생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뭡니까? 동생의 출생이 심소희 씨의 행복을 앗아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가요?” “...”질문 세례를 받게 된 소희는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인지 숨이 막혀오는 듯했다. 다행히 보안 요원이 제때 도착했고, 그의 보호를 받은 소희는 마침내 회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 들어선 그녀는 기자들처럼 차가운 시선을 뿜어내는 동료들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리려던 찰나, 힘찬 두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 소희가 익숙하고 안정감 넘치는 이서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서 언니...”소희는 또 울고 싶어졌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이서가 소희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갔고,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후에야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나도 이제야 알았어. 소희 씨의 어머니가 소희 씨가 부모님을 봉양하지 않았다는
이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래요, 확실히 소희 씨의 어머니께 유리한 점으로 작용하겠네요.” “네, 그래서 저희가 해명한다고 해도 첫 번째만 해명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의 해명을 들은 집요한 네티즌들이 직접 심 비서님의 고향을 찾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그 네티즌들은 제가 들은 것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또다시 모든 여론은 정인화 씨에게 기울게 되겠죠. 그때가 되면... 상황이 더욱 심각해질 거예요.” “해명하기보다는 냉정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이서가 물었다. 최미영이 말했다.“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최미영이 말을 다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서는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소희 역시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었기에 일어서서 말했다. “이서 언니, 제 사적인 일 때문에 회사의 이미지에 타격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저를 해고하셔도 돼요.” 이서가 최미영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최미영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소희 씨,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어? 우선 이렇게 하자, 소희 씨는 며칠간 최대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푹 쉬는 거야. 그동안 내가 꼭 방법을 강구해서 이 일을 해결해 볼게.” 소희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이서 언니, 언니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모든 게 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어서 저를 해고해주세요. 제가 회사를 떠나야만 저희 엄마가 소란을 피우지 않으실 거예요.” 안색이 변한 이서가 단호하게 말했다.“소희 씨,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움츠러드는 건 좋은 대처가 아니야.” “지금은 당장 갈 길이 없어 보이지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게 아닐 수도 있어.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거라고 하더라도, 벽을 넘을 수도 있고, 사다리를 찾을 수도 있는 거잖아?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소희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이자, 이서가 다소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소희 씨, 날 믿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소희가 이서의
기억을 잃은 이서에게 이 장면은 인상 깊을 수밖에 없었다.이서는 이전에 자신이 하씨 그룹을 방문할 때마다 하은철의 비서가 늘 거만한 태도를 보인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하은철의 비서뿐만이 아니라 하씨 그룹의 직원들, 바닥을 쓸고 있는 청소부 아주머니들조차도 그녀에게 거만한 태도를 보였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하은철만 보였기 때문에 그들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선들이 꽤 재미있었단 말이지.’ “그때의 나는 왜 하은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이제 이서를 보는 하씨 그룹 사람들의 눈빛에 예전의 오만함이 서려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여왕의 귀환을 맞이하듯 이서를 대했다. “윤 대표님, 이쪽으로 오시죠.”하은철의 비서가 이서를 대신하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들은 모두 영리한 사람들이었다.‘겉보기에는 하 대표님이 윤이서를 상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윤이서를 가질 생각이신 거야.’‘하 대표님의 성격이라면 갖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기어코 손에 넣으려고 애쓰시겠지? 윤이서는 아직 하씨 가문의 며느리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하씨 가문의 며느리가 될 거란 말이지!’ ‘아직도 윤이서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어떤 흉측한 말로를 맞이하게 될지 몰라.’ 비서의 인솔을 받은 이서는 이내 하은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다만, 그녀는 하은철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일부러 허세를 부리며 이서를 만나러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휴게실에서 어떤 옷을 입고 이서를 만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비서실을 통해 이서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하은철은 그때부터 사무실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비싼 옷들이 마음에 들었을 테지만, 오늘은 어떻게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바깥의 동정을 들은 하은철은 이서가 왔음을 깨닫고 잠시 망설였다. 그의 시선은 여러 옷을 스치다가 결국 오늘 입은 옷에 멈췄다. ‘됐어, 내가 아무리 공
“소희 씨는 우리 사이의 싸움이랑 아무런 관련이 없잖아.”이서는 가능한 한 차분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했고, 하은철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그를 한 대 때릴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보도를 철회해, 내 주변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고.” “그래.”하은철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이서는 그가 쉽게 넘어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건이 뭐야?” “우리의 결혼이지, 너도 알고 있었잖아?”하은철이 허리를 굽혔다. “결혼하면 기사를 철회할게.”이서는 하은철의 제안이 가소로울 뿐이었다.“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싫다면... 난 그 기사를 철회하지 않고 계속 게재해 둘 수밖에 없어. 어차피 웹사이트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것쯤은 티끌보다 작은 돈이 들 뿐이니까.”1~2천만 원은 하은철에게 큰 의미가 아니었다.“하지만 네 비서는...” 하은철이 이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야 하은철을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 조건이 아니라면 뭐든 승낙할게.” “그 조건 말고는 원하는 거 없어.”이서가 이를 악물었다. 하은철이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를 감상하며 말했다.“항구에 관련된 일 때문에 온 줄 알았는데, 비서를 위해서 온 거였어?”“이서야, 네 비서한테는 그렇게 잘해주면서, 나한테는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군 거야?” 이서가 차가운 눈동자로 하은철을 바라보았다.“내가 기억을 잃은 건 맞지만, 네가 나랑 결혼하려고 했던 그 일을 잊은 건 아니야.” “하은철, 넌 미쳤어...” 하은철이 이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래, 난 미쳤어. 하지만 날 미치게 한 사람은 너잖아? 이서야, 솔직히 말해볼까? 지난번 호텔에서 장희령이 하지환의 가면을 벗기려고 했던 거, 내가 시킨 거야.” “너, 하지환이랑 그 정도로 사이가 좋진 않았잖아?”“기억을 잃었어도 예전보다 더 잘 지내는 것 같던데...”“허, 그런데
최미영이 말했다.[윤 대표님, 알겠습니다.] 이서는 그제야 전화를 끊었다. 최미영은 핸드폰을 든 채 감개무량해 했다.‘지난번 서나나 씨의 일로 윤 대표님이 정이 많고 의리 있는 사람이라는 걸 분명히 느끼던 참이었어.’‘그런데 이번에 심 비서님의 일로 윤 대표님에 대한 생각이 굳어졌어. 나는 확실히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거야.’ 최미영은 이서와 친구가 아니었으나, 친구에게 이렇게 다정한 상사는 부하에게도 다정할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운전기사는 이서가 전화를 끊기를 한참이나 기다리고서야 입을 열었다.“윤 대표님.” 이서가 인상을 찌푸렸다.“전화 한 통만 더 할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환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하 선생님.”이서가 피곤하다는 듯 좌석에 몸을 기대었다.“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저랑 쇼핑하지 않으실래요?” 그녀는 누구를 찾아야 할지 모르던 찰나, 머릿속에 오직 한 사람만을 떠올렸다. 지환은 금방 이서의 지친 목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좋아, 지금 어디야? 데리러 갈게.] “저는...”이서가 차창 밖의 우뚝 솟은 건물을 한 번 보고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데리러 갈게요. 어디세요?” 지환은 곧바로 주소를 알려줬고, 이서는 기사에게 주소를 전달해 주었다. 기사는 그제야 차를 몰고 지환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한 시간이 넘게 지난 후,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이서는 가장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지환은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지친 기색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서가 이곳으로 오는 동안, 지환은 이미 이천을 통해서 소희와 항구에 관한 일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환이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며 이서에게 말했다.“가자.” 이서가 그의 얼굴에 씌워진 가면을 쳐다보았다.“그 가면을 쓴 채로 쇼핑하시려고요?” “응.”지환이 대답했다. “하지만 너무 이상하잖아요. 사람들이 다 쳐다볼
백화점 입구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지환이 말했다. “이제 내리자.” “그런데...”백화점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이서가 망설이며 백화점 정문을 쳐다보았다. 정문 셔터는 이미 반쯤 내려온 상황이었다. ‘이미 영업을 끝낸 거 아닌가?’“내리자.”지환이 다시 말했다. 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환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백화점을 향해 걸어갔다.이때, 백화점 주변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가면을 쓴 지환과 이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두 사람이 백화점 앞에 다다를 때까지 말이다. 지환은 이서의 손을 잡은 채 정문 셔터를 향해 몸을 낮췄다. 정문 안에 있던 경비원은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쫓아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을 본 그는 미세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지환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를 끌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제야 백화점 영업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일부로 모든 사람을 내보낸 것임을 깨달았다. ‘설마 우리가 방해받지 않고 쇼핑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내보낸 건가?’ 이서가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네가 다른 사람한테 방해받기 싫은 것 같아서 백화점을 전세 냈어.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전혀 눈치 볼 거 없어.”이서가 막 대답하려 했으나, 연이어 들려오는 ‘어서 오세요’라는 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집어삼키고 말았다.그녀는 그들이 조용해진 후에야 작은 목소리로 지환에게 물었다.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윤씨 그룹 산하에도 백화점이 있었기에, 이서도 전세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전세를 내는 것은 기업에 있어서 큰 손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백화점 전체를 전세 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지환이 이서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너만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