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앉은 곳은 바로 소희의 아파트 현관 입구였는데, 주변 이웃들이 모두 나와 구경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정인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소희에게 떨어졌는데, 그들의 눈빛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조롱과 경멸, 그리고 혐오까지... “평소에는 아주 얌전해 보이는 아가씨였는데... 원래 좀 그런 사람이었나 봐요.” “그러게요,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니, 마음이 모질고 악랄한 사람인 것 같아요. 어쩐지 젊은 여자가 이런 집에 사는 게 이상하다 싶었어요.”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집에 살면서 부모님께는 한 푼도 주지 않는 자식이라니... 염치가 전혀 없네요.” 소희는 줄곧 이서의 곁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그녀의 심리적 안정감은 이서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사람들의 가십을 들은 소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희를 진정으로 한스럽게 하는 것은 부모의 방식이었는데... 그녀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경시했다. 하지만 소희는 이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그저 부모님이 이전 세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단 한 번도 부모님을 원망한 적이 없었고, 좋은 것이 모두 동생에게 돌아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다만, 어른이 된 후에는 부모님과 어느 정도의 거리나 제한을 두고 행동했다. 소희는 자신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월급의 반이나 부모님께 드렸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모두의 가십을 들은 정인화가 소희를 보았고, 순식간에 밝은 눈빛을 띄웠다. “소희야, 왔구나!”갑자기 달려든 정인화가 소희의 허벅지를 껴안고 애걸복걸했다.“소희야, 엄마가 이렇게 빌게, 제발 네 동생 좀 살려주라, 응?”“2000만원이 없으면, 네 동생은 살 수 없단 말이야!” 그런 정인화의 태도에 소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돈을 위해서 저런 거짓말까지 지어내는 거야?’ “엄마, 지금 대체 무슨
현태는 소희의 곁으로 다가가 정인화를 향해 말했다.“또 돈 받으러 오신 겁니까?” 많은 훈련을 거친 현태는 기운이 넘치는 듯했다.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똑똑히 물었다. 마치 정인화의 목소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현태는 그 사람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아드님께서 원하는 건 고작 400만원짜리 노트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분은 이미 성인이 된 걸로 아는데, 왜 스스로 아르바이트해서 노트북을 구매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겁니까?”소희가 놀란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뭐야, 다 알고 계셨던 거야?’“네? 조금 전에는 아들이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요?”한 이웃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프다고요?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그 이웃의 시선을 따라 정인화를 바라본 현태가 냉소하며 말했다.“이분이 하시는 말을 믿으신 겁니까? 설마, 아드님이 우주에 있다고 해도 믿을 건 아니죠?” 고개를 숙인 사람들은 방금 정인화가 한 모든 말이 일방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설령 아프지 않다고 하더라도.”다른 이웃이 승복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이렇게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동생한테는 400만원짜리 노트북도 사줄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아파트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겁니다.”현태가 주위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그리고 누가 그러던가요? 이 아가씨가 동생에게 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요.”그가 곧이어 정인화를 쳐다보았다.“소희 씨가 노트북을 사주는 대신에 이전에 받아 갔던 2000만 원은 돌려주셔야겠습니다.” 이 말이 나오자, 반박하려던 이웃들은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 “와, 이미 2000만원을 받아 갔었나 봐요! 쯧쯧쯧,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그러니까... 저 할머니는 자기 아들을 저주하고, 억지까지 부린 거잖아요? 뻔뻔한 사람은 따로 있었네요.”“집안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2000만원이 넘는 노트북을 원하다니...
소희가 코를 훌쩍였다.“괜찮아요. 저는 단지... 가족들도 저를 매몰차게 대하는데, 가족도 아닌 오빠가 제 고충을 이해해 준다는 게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소희의 눈동자에 비친 고통을 마주한 현태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위로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머리를 긁적거릴 뿐이었다.“소희 씨한테 나는 제삼자일 뿐인 거야?”소희가 현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의 얼굴빛이 점차 홍당무처럼 붉게 변했다. 한참 동안 머리를 긁적거리던 그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소희 씨, 나는 소희 씨한테 제삼자로 남고 싶지 않아. 나는 소희 씨의 가족이... 아니, 가족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되어서 언제나 소희 씨를 보호하고 싶어.” 소희의 얼굴도 천천히 붉어지기 시작했고, 불타오르는 듯한 기미까지 보였다. “오빠... 무슨 뜻이에요?” 소희는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바라보았는데, 복잡한 감정으로 얽힌 덩굴이 마음속에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소희 씨의 남자 친구가 되고 싶어!”현태가 단숨에 이 말을 뱉었다. 소희가 당혹스러워하며 현태를 바라보았다. “뭐라고요?”“소희 씨의 남자 친구가 되고 싶다고.”금세 낯선 느낌에 익숙해진 현태가 마침내 더듬거리지 않고 소희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M국에 있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사람은 소희 씨였어. 아니, 밤낮으로 소희 씨만 생각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거야.” “그제야 알았어, 내가 진심으로 원한 건 동생 같은 소희 씨의 모습이 아니라...”현태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으나, 결국 이 말을 하고 말았다. “여자 친구로서의 소희 씨라는 걸.” 소희는 꿈쩍도 하지 않는 눈동자로 현태를 바라보았는데, 이미 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 현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소희 씨, 싫은 건 아니지? 하긴... 내가 너무 둔해서 소희 씨가 슬퍼하는 걸...”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든 힘찬 포옹은 하마터면 현태를 밀어
‘이 정도면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굳이 변화가 있다고 말하자면, 내가 친밀한 관계를 거부하지 않는 것뿐이지.’ ‘하지만 지금 당장 혼인신고를 하는 것도 비현실적이잖아?’ 상언도 이러한 부분을 잘 알고 있던 터라, 혼인 신고에 관한 이야기는 입도 뻥끗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는 때때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오매불망 자신만을 기다리는 상언의 모습이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또 한 번 강하게 밀려오는 듯했다. 톡방에 있던 사람들은 이 답장을 본 후에야 상황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녀들은 아무렇게나 대화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된 소희에게 한턱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소희는 정인화가 가져온 답답한 마음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그녀가 기쁜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좋아요! 내일 모두를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할게요!] 톡방에서는 또 한바탕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어떤 이가 기뻐하면 또 다른 어떤 이는 근심하는 법이었다. 같은 시각. 하씨 가문의 고택에 있는 은철은 기분이 바닥을 치는 듯했는데, 방금 들어와서 그의 맞은편에 앉은 심동도 오늘이 은철과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날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심동은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하 사장, 정말 윤씨 그룹을 압박하고 싶으면, 우리 두 가문이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은철이 불쾌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더는 하씨 가문이 윤씨 그룹을 압박할 방법이 없으니, 심씨 가문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거야?” 심동이 급히 반박했다.“그런 뜻이 아니야. 나는 단지 윤 대표의 배후에 후원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라고. 그리고 그 사람은 아주 막대한 권력을 가진 사람임이 틀림없어. 어쩌면 우리 4대 가문을 합친 것보다 더 막대한 권력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르지.” 안색
호텔, 지환의 방 안.이천은 하은철 쪽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하은철은 송철환 대표가 새벽에 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송 대표의 아내와 딸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답니다. 하지만 송 대표는 이미 두 사람과 출국한 상황이라... 하은철은 이번에도 허탕을 치게 될 겁니다.”이천은 말을 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환이 그를 힐끗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그게 다야?” “아직입니다.”“그럼 빨리 말해.” “대표님, 왜 그렇게 재촉하시는 겁니까?”이천은 담력이 커진 듯했는데, 지금의 지환이 예전처럼 냉정하고 무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그래서 가끔은 지환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네가 가야지만 이서가 올 수 있을 테니까.”이천이 뒤늦게 물었다.“이서 아가씨께서 저를 볼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 “그래.”지환이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펼쳤다. 이천이 말했다.“대표님, 임현태 형님도 이서 아가씨를 만날 수 있는데, 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저도 이서 아가씨를 뵙고 싶습니다.” 그는 어언 3개월 동안 이서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지환이 이천을 흘겨보며 말했다.“안 돼.” “이유가 뭡니까?”지환이 잡지 한 페이지를 펼쳤다.“너는 늘 내 곁에 있었잖아. 너의 존재가 이서한테 큰 자극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현태 씨는 상황이 다르지, 현태 씨는 이서가 힘들 때에도 늘 이서의 곁을 지켰으니까.” 이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더 할 말이 남았나?”지환이 다시 한번 이천을 내쫓으려 했다. 멍하니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딛던 이천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오늘 심씨 가문 가주의 큰아들이자, 장차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 하은철을 만나러 갔었답니다.” 이천은 지환이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할까 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지난번에 이서 아가씨께 밥을 사주겠다고 했던 그 사람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지환이 자신의 가면을 벗기려
H국에 있던 이천은 지환을 직접 대면할 필요가 없었지만, 업무를 보고할 때도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후에 이서의 상황이 눈에 띄게 좋아지자, 지환의 정서도 눈에 띄게 좋아졌고, 부하 직원들은 그제야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YS그룹에서 이서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살아있는 보살’로 모실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이천은 지환에게 설명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더욱 섬뜩한 장면을 맞이해야만 했다. 문밖에 서서 기다리던 이서가 갑자기 문 쪽으로 다가와 무언가를 중얼거린 것이었다.“이상하다, 분명히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이천이 곧바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문밖에 있던 이서는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 선생님, 안에 계시는 거죠? 소리도 들리는데 왜 나와보지 않으시는 거예요?”이서는 말할수록 밀려오는 불안감과 조급함을 느꼈다.“설마 또 저번처럼 숨어서 저를 만나주지 않으시려는 거예요?” 지환이 이천을 노려보며 문 뒤에 숨으라고 눈짓했고, 곧이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린 후, 지환을 마주한 이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제야 문을 여시는 거예요?”이서가 지환의 소매를 꽉 잡았다.“장희령이라는 사람이 선생님의 가면을 벗기려고 해서 화가 나신 거예요?” “저는 그 여자랑 아무런 관련도 없어요! 제가 시킨 게 아니었다고요!” 이서는 가면에 관한 일에 마음이 상한 지환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그녀조차도 지환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말이다.지환이 웃는 듯 마는 듯하며 이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을 마주한 이서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바보.”“지금 누구더러 바보라는 거예요?” “너.”지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바보도 아니면서 그런 말을 한 거야?” 이서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하긴, 장희령이 전에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데, 우리 두 사람이 한 패일 수 있겠어.’ ‘하 선생님도 뇌
이서의 입가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는데, 지환의 ‘숨겨둔 애인’이 상상한 것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서의 얼굴에 이상한 기색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지환이 그제야 이천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천이라고 해, 내 비서야.” 이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던 지환은 곧바로 그녀의 엉뚱한 생각을 억누르려 했다. 이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아, 비서시구나...” ‘깜짝 놀랐네.’이서를 바라보던 이천은 마음속에 억눌렸던 감정을 참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았고, 감격에 겨워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서가 당황스럽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의 치켜 올라간 눈썹은 이미 일직선을 이룰 지경이었지만. 이서를 만난 것에 대해 감격하느라 바빴던 이천은 자신의 오랜 친구가 또 다른 감격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환이 인상을 찌푸렸다.‘이럴 줄 알았어. 이래서 이서와 만나지 않게 하려던 거였다고!’ 한참 후에야 이서가 입을 열었다.“선생님, 비서분이...” “이천!”지환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천은 그제야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고, 바삐 코를 훌쩍였다.“죄송합니다, 윤 대표님, 저...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천은 영문도 모르는 이서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원래 저런 사람이거든.”지환이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이서야, 들어와서 앉아.” 지환의 뒤로 깔끔하게 정리된 호텔 방을 본 이서가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아니에요, 방이 엉망이잖아요.”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지환은 자존심이 강한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손끝으로 가면을 살짝 만졌고, 얼굴에 머금었던 따스함을 거두어들였다. 같은 시각.하은철과 협력방안을 정한 심동이 상쾌한 마음으로 차에 오르려 했다.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희령이 심동을 대신하여 차 문을 열었고, 그가 앉기도 전에 물었다.“어떻게 됐어? 하은철이 협력하겠대?
심동이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그는 방금 하은철과 협력에 관해 이야기를 하느라, 방해받지 않으려고 핸드폰을 음소거로 전환해 두었다. 아마 부모님은 심동이 전화를 받지 않아서 장희령에게 연락했을 것이었다. “이상하네, 여동생을 찾으러 가셨던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신 거지?”“설마, 벌써 내 여동생을 찾은 걸까?” 심동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장희령이 대답했다. 그녀는 또 한 번 심동을 힐끗 바라보았다. “자기야, 이제 머리 아픈 일도 다 해결됐네.”“만약에, 그러니까 내 말은... 정말 만약에 자기의 부모님께서 잃어버렸다던 따님을 찾으신 거라면... 틀림없이 기뻐하시겠지?” 심동은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당연하지.” 순간, 장희령의 눈동자가 밝아졌다.“그럼 기분이 좋아지신 자기의 부모님께서... 우리 두 사람을 허락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서 말인데 자기는...”심동은 장희령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자기야, 이번에는 확실히 자기의 잘못도 있긴 하지만, 자기의 도움으로 하씨 그룹과 심씨 그룹의 협력을 성사시킨 셈이잖아? 이건 역사적인 순간이나 다름없어.”“내가 이 일을 우리 부모님께 알려드린다면, 두 분께서는 분명히 다른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실 거야.” “게다가 지금 두 분은 온 신경을 내 여동생을 찾는 데에 쏟고 계시잖아? 정말 만약에 내 여동생을 찾은 게 맞다면... 두 분은 틀림없이 아주 기뻐하실 거야. 그렇게만 되면,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은 두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하늘에서 별을 따달라는 부탁을 해도 흔쾌히 들어주실 거야. 아마 입이 귀에 걸리도록 좋아하실걸?”행복감을 느낀 장희령이 펄쩍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붉은 입술을 내밀며 애교를 부렸다.“자기의 부모님께서 따님을 찾으신 게 맞다면, 바로 우리의 결혼 이야기부터 꺼내봐야겠어.” “걱정할 거 없어.”심동이 장희령의 손을 꼭 잡았다.“넌 반드시 내 와이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