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짝할 사이에 운경의 생일이 되었다.예년에는 무진이 외국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운경도 그런 습관이 없었다. 생일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기껏해야 식사만 했을 뿐이다.올해는 무진이 돌아온 데다 성연이도 있어 온 가족이 모두 모였다.운경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운경의 생일은 성연이 우연히 알게 되었다.그날 그녀는 고택에서 안금여와 함께 있었다.흥이 난 안금여가 예전의 가족앨범을 가지고 나와 성연에게 보여주었다.가족사진들이 들어있었다.그리고 각자의 개인 사진 같은 것도 있었다.그녀가 제일 먼저 본 사람은 무진이었다.무진은 어렸을 때도 옥처럼 매끈한 이목구비의 어린이였다. 줄무늬 멜빵바지를 입은 무진의 뒤에는 잘생긴 남자와 부드러운 얼굴의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이 두 사람이 무진의 부모님일 것이라고 추측했다.그러나 그들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서있는 무진은 활력이 넘쳤다.이후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점차 사라졌다. 마지막에는 강운경, 안금여, 그리고 무진 세 사람만 남았다.무진의 얼굴에 있던 웃음도 사라졌다.그런 무진의 변화를 본 성연은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부모님의 죽음은 분명 무진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무진의 사진을 바라보는 성연을 보며 안금여도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예전에는 무진이도 많이 밝았었지. 나중에 사고가 있었던 거 너 들었지? 무진이에게 큰 충격이었다는 것도.” 지난 일을 생각하던 안금여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이 안금여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옛날이 어땠든 지나간 일은 지나갔어요. 지금은 괜찮잖아요?”성연이 자신을 위로하는 본 안금여가 미소를 지으며 감탄했다.“네 말이 맞다. 사람은 앞을 봐야지. 나를 봐라. 점점 옛날로 돌아가.”“할머니, 앞으로 우리 모두 할머니 곁에 있을 거예요. 잃어버린 사람은 돌아오지 않겠지만요.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어요.”성연이 일부러 안금여를 일깨웠다.좋은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몸도 좋아질 수 있었다
아이가 없는 운경은 거의 모든 시간을 회사와 가족에게 바쳤다.어쨌든 표시를 해야 했다.성연은 어차피 똑똑히 봤으니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자신이 하기로 결심한 이상 후회하지 않게 해야지.성연은 집으로 돌아간 후 무진과 운경의 생일에 대해 의논했다.무진의 눈에 한 가닥 놀라움이 스쳐 지나가더니 곧 평온함을 되찾았다.“성연아, 그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무진이 물었다.“아직 특별한 생각은 없어요.” 성연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했다.그녀의 기억에 예전 자신의 생일을 운경이 많이 도왔다고 들었다.성연은 아주 마음에 들었었다.이번에는 자신이 운경을 위해 힘을 쓸 차례였다.“괜찮아, 아직 좀 남았어. 천천히 생각해.” 무진은 어떻게 하든 성연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성연은 늘 사리판단이 분명하니 절대 터무니없는 일을 하지 않을 테니.그가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그의 가족을 위해 애쓴다는 건 성연이도 자신을 이 집안의 일원으로 여긴다는 뜻이리라.무진의 기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점차 성연이 이 집안에 녹아들기 시작했다.이렇게 지내다 보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성연이 쉽게 떠나지 않겠지?무진은 자신에게 사심이 있음을 인정했다.그러나 그의 눈에 성연의 즐거움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고모님께 좀 색다른 생일파티를 해드리고 싶은데 좋은 제안이 없나요?” 성연이 턱을 괴고 말했다.“난 그런 거 잘 몰라.” 무진이 태연하게 말했다.성연을 제외하고 그는 어느 누구도 기쁘게 해주려 시도한 적이 없었다.고개를 끄덕인 성연은 무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그래서 무진에게 기댈 수가 없었다.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성연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탁자 위를 긁고 있다.무진이 그녀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정말 생각이 안나면 안 하면 돼. 회사의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도 있어.”그의 밑에는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많이 있으니.사실은 성연이 고생하는 걸 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성연이 의기소침하게 말했다.“무진 씨 무
운경의 생일을 준비하기로 한 후 성연은 난관에 봉착했다.운경에게 잊을 수 없을 만치 의미 있는 생일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예태까지 성연은 늘 홀로 자유롭게 지냈던 사람이었다.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예 가족애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그러다 강씨 집안에서 유일하게 가족의 정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성연은 모든 것들을 더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하지만 생일 파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도무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성연은 학교에 가서도 이 일만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생각할수록 걱정이 되는 성연.옆에 앉아 있던 짝 연정은 딴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듯한 성연에게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성연아, 무슨 일인데 그래?”연정의 관심 어린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자신에게도 이렇게 진심으로 다가오는 학교 친구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순수한 마음을 가진 연정에게는 말해 줘도 무방하지 싶었다.그래서 고모 운경의 생일 파티에 대해 연정에게 말해 주었다.성연의 말을 들은 연정이 바로 말했다.“성연아, 너네 고모처럼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부족한 게 뭐가 있겠니? 사실 화려하게 꾸미고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애. 고모님이 원하는 건 그냥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지 않을까? 정성껏 준비해서 고모님이 네 마음을 아시면 되지 않을까?”연정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적절하다 싶은 조언을 했다.연정의 말이 상당히 타당하다고 여겨진 성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의 말을 메모했다.“고마워, 나중에 내가 밥 살게.” 성연이 맥이 풀린 듯 말했다.“그럼 나 기다릴 테니 잊으면 안돼.” 연정이 귀엽게 혀를 내밀었다.물론 성연이 사 주는 밥을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성연과 좀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으로.연정은 진심으로 성연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성연은 성격이 아주 좋았다. 게다가 성적도 무려 전교 1등으로 아주 뛰어났다. 비록 자신은 1등과 무관하지만,전교 일등과 짝이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어깨가 올라가는지.전교 1등의
어느덧 운경의 생일날이 되었다.조승호는 아내 운경과 함께 생일을 보내기 위해 특별히 휴가까지 내었다.전날 밤, 성연은 고모부 승호에게 먼저 계획을 알렸다. 그리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운경을 데리고 나가 있어달라고 요청했다.성연의 요청을 받아들인 승호가 운경을 데리고 외출한 후, 성연과 무진은 생일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운경의 저택으로 왔다.운경과 승호, 두 사람이 거주하는 저택은 아주 포근한 느낌을 자아냈다.평소 아주 사이 좋은 두 사람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성연은 직접 사 온 물건들로 거실을 장식하기 시작했다.성연이 선택한 재료들은 모두 저택 내부 벽에 아무런 흠집이 나지 않는 것들이다. 성연이 벽에 장식물을 달기 시작하자 무진이 옆에서 도왔다.성연이 지시하는 대로 무진이 따라 하는 모습은 마치 여러 번 해본 듯 호흡이 척척 맞았다.성연은 운경이 장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무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장미를 통해 낭만과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 좋아한다고.사실 장미, 하면 흔히 가녀린 꽃 송이를 떠올리지만, 스스로 꿋꿋이 비바람을 견디며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들장미도 있으니까. 그래서 장미를 사용해서 거실을 장식할 생각이다.하지만 성연은 한참을 고민하고서 겨우 시작했다. 장미를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마치 프로포즈 장소로 보이기 쉬우니까 말이다.그래서 성연은 장미를 과하게 사용하지는 않았다.하지만 화원 주인에게 가장 신선한 꽃을 달라고 신신당부했었다.구석구석에 적당하게 꽂힌 장미꽃들이 화려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자신이 장식한 거실을 보며 성취감으로 뿌듯함을 느끼는 성연이다.한편 생일 파티 준비에 열중한 성연을 바라보던 무진은 심장이 벌렁거리자 뒤에서 성연을 끌어안았다. 이런 친밀한 접촉에 익숙하지 않았던 성연은 온몸을 통해 미세한 전율을 느꼈다.잠시 멍했다 정신이 돌아온 성연이 팔꿈치로 무진의 가슴을 밀어내며 말헸다.“무진 씨, 너 뭐하는 거예요? 환한 대낮에 이 무슨 불한당 같은 짓이에요?”“내 약혼
거실 장식을 끝낸 후 이상은 없는지 구석구석 확인까지 마무리한 성연은 직접 사온 재료로 운경의 생일 음식을 만들 참이다.무진도 그 옆에서 거들기 시작했다.다시 봐도 무진이 음식을 하는 모습은 성연에게 적잖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아, 지난번에 먹었던 야식이 무진 씨가 준비했던 거지’라는 생각을 하니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안금여의 말에 따르면 무진은 혼자 생활한 시간이 많았다고 하니까.‘음식을 할 줄 아는 것도 정상적인 일이겠지.’무진 같은 류의 사람은 음식을 하는 것보다 배달을 시키는 게 더 이상해 보이긴 했다.능숙한 동작으로 칼질을 하는 무진을 보면서 성연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마음 놓고 재료를 손질하던 일에 집중했다.성연이 고생하는 게 안타까운 무진.하지만 오늘의 세프는 성연이인 이상 말릴 수도 없는 노릇.그래서 손질하기 힘든 재료들은 모두 무진이 미리 다듬어 놓았다.성연이 간단한 것들만 다듬으면 되게.재료 손질이 끝난 후에는 무치고 볶고 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옆에서는 미역국을 끓고 있었다.땀을 뻘뻘 흘리는 성연을 본 무진이 휴지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내가 할게.”성연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어요.”성연이 끝까지 버티자 무진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저 옆에서 양념병을 건네고 땀을 닦아주며 최대한 일을 덜어주기 위해 애썼다.성연이 한 가지 한 가지씩 음식을 만들어 푸짐한 생일 상을 차렸다.상 차림이 끝나자 성연은 무진과 함께 할머니 안금여를 모시러 고택으로 향했다.안금여는 두 사람과 함께 운경의 저택에 도착했다.그 때까지 운경은 백화점에 있었다.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남편 승호가 함께 쇼핑을 하자며 자신을 데리고 나왔다.그리고는 영화를 보며 데이트 중이었다.운경이 보기에 오늘 승호는 평상시와 많이 달랐다.평소 자신을 무척 아끼고 잘했다. 남편 조승호는. 하지만 뒤에서 든든히 받쳐줄 줄이나 아는 목석 같은 남편은 데이트에는 잼병이다.생일
사실 운경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오빠와 올케가 같은 날 사고로 사망한 후, 그저 남은 가족들이라도 오순도순 함께할 수 있기만 늘 바랬다.지나간 과거를 붙잡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는 잡을 수 있는 것이니까.지금 이 순간 눈앞의 이 장면이 운경의 마음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감정을 건드렸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앞으로 걸어간 그녀는 안금여와 무진을 끌어안았다. 성연을 가운데 둔 채로.온 가족이 함께 부둥켜안았다.옆으로 다가간 승호가 운경의 어깨를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운경은 때로 감정에 잘 치우는 사람이었다. 결점도 감싸 안을 만큼 오직 신경 쓰는 이는 가족들뿐이었다.성연이 준비한 생일이 운경의 마음을 건드렸다.눈물을 그치지 않는 운경을 보며 안금여 또한 마음이 아렸지만 부러 여상한 말투로 핀잔을 주었다.“어른이 되어서도 울고 있으면 어떡하니? 어린 조카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안금여에게 핀잔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운경은 안금여의 품에 안겼다.기대어 오는 운경의 표정을 보며 안금여도 울컥하는 표정으로 운경의 어깨를 살살 어루만졌다.어렸을 때는 집 안에서 오냐오냐 떠받들어지며 응석받이로 자란 운경이다.세상 물정 모르고 좋아하는 것들만 해도 집에서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위로 오빠가 버티고 있었기에 운경이 걱정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그러나 이후 오빠네 부부, 즉 무진의 부모가 사망하고 이어서 아버지 강상중이 세상을 떠났다.무진만 의지할 기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운경도 마음의 기둥을 잃었다.그 동안 강씨 집안과 그룹을 지키느라 안금여는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바빴다.나약하다고 생각해서 늘 마음이 놓이지 않던 운경이었다.하지만 그런 일이 있은 후, 운경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한순간에 훌쩍 자란 듯했다.알아서 먼저 무진을 보살폈고, 무진이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은 후에는 알아서 회사 경영을 돕기 시작했다.한창 사랑을 받아야 할 아이들이 불의의 사고로 인해
곧 일년에 한 번 있는 ‘강씨 집안 대모임’이 돌아온다.여느 가족모임과는 달리 집안 대모임 날에는 강씨 집안 자손이라면 아무리 먼 곳에 있다할 지라도 달려와야 했다.멀리 떨어져 있어도 모두 한 가족임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옛 선조 때부터 정해진 집안 규칙이었다.하지만 어느새 모임의 목적이나 성격이 변해 버렸다.이제 대부분 의무적이거나 또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집안 대모임에 참석할 뿐이다.해외에 뿌리를 내린 집안 사람들도 대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잇따라 입국했다.무진 쪽에서는 이 사람들의 행방을 모두 알고 파악하고 있었다.관례에 따라 모두 제일 먼저 본가 고택을 방문해서 안금여의 안부를 물어야 한다. 안금여는 현재 최연장자인데다 본가라는 권위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하루 일찍 들어와 강상철과 강상규를 먼저 만났다.무진은 이 사람들의 행적을 예의 주시하도록 지시한 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북성에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할 정도는 아니기에.집안 대모임 전날 밤.안금여는 무진과 성연을 고택으로 불렀다.운경도 함께 자리했다.颜如意想着他们有事情要谈,自己应该不方便听,于是就找了个地方,自己逛一逛。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었던 안금여는 잘 듣지 못할 장소를 찾아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비록 강씨 집안 사람들은 자신을 경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면한 사태를 조금이라도 알아 두어야 했다.안금여가 앞으로 움직이는 것을 본 무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안금여의 앞에 서서 낮은 음성으로 ‘할머니’ 하고 불렀다.그는 안금여가 자신들을 부른 까닭을 잘 알고 있다.집안 대모임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할머니는 분명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계실 터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그 사람들이 곧 올 거야. 내 속이 참 시끄럽구나.” 안금여가 눈썹을 찌푸렸다.다른 것은 걱정되지 않았지만, 유독 무진과 성연에 대해서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저들은 감춰둔 속셈도 많은데다 외국에서 자라서인지 정당하지 않은 술수도 곧잘
손건호는 요 며칠 해외에서 들어온 일가의 명단을 정리했다.그리고 강상철과 강상규를 방문한 인사들을 무진에게 보고했다.이쪽에 좋은 감정을 품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일이 좋을 리가 없다.무진도 알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찌 되었든 안금여를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이는 모든 일가가 본가를 염두에 두는 건 아니라는 증거다.미리부터 타초경사, 즉 풀을 베어 뱀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다. 저들이 진짜 움직일 생각을 할 때, 진정한 강자가 무엇인지 무진은 저들에게 가르쳐 줄 작정이다.손건호가 옆에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보스, 저들에게 경고를 좀 할까요?”손건호는 무진의 깊은 생각을 모른다.다만 강상철과 강상규를 먼저 방문한 이들이 보스 강무진과 본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점은 분명했다.최근 몇 년간은 본가가 언제나 최고 권위의 상징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에,저들은 본가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경고를 주지 않으면 이 분노를 삼킬 수 없을 것 같은 손건호다.“됐어. 필요하다 싶으면 말할 테니 경거망동하지 마.” 뒤에서 호시탐탐 노리는 저들의 목표는 강상철, 강상규 쪽과 일치한다.저들은 본가의 실수를 찾으려 들고 있었다. 무진 또한 마찬가지로 저들의 약점을 찾고 있다.지금은 누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느냐에 달렸다.“알겠습니다.”손건호가 우물우물 내키지 않는 듯이 말했다.무진은 손건호를 한 번 돌아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뒷짐을 진 채 창가에 서서 저 멀리 시선을 던지고 있는 무진의 얼굴이 싸늘했다.안금여의 염려스러운 마음, 손건호의 불편한 마음을 어찌 그가 모르겠는가?하지만 방법이 없다. 급한 마음에 뜨거운 두부를 먹을 수는 없으니.천천히,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때가 되면 본가에 맞서는 인간들 모두를 깨끗이 쓸어버릴 것이다.이 일에 대한 보고를 마친 후, 손건호가 나갔다.무진이 서재 문을 열자 성연이 입구에 서 있었다.시계를 보니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평소 이 시간이면 잠이 드는 성연이기에
안금여가 한숨을 내쉬었다.“너와 성연이 모두 착한 아이들이야. 만약 정말 무슨 부득이한 상황이 닥치면, 이 할머니는 너희들이 좋게 헤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니 그러지 마, 무진아.”“할머니, 말씀하신 그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무진은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안금여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강운경이 옆에서 말렸다.“엄마, 우리도 잘 알고 있잖아요. 엄마가 성연이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하시는지요. 하지만 무진이와 성연이 서로 감정이 깊어요. 둘 다 사리가 분명한 애들이에요. 무진이 우리를 찾아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건 기쁜 일이잖아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안금여의 말은 두 사람을 위한 것이 맞다. 불길한 말은 두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잠시 멍하니 있던 안금여가 입을 열었다.“성연이에 대해서는 네 말이 맞다. 우리 집 무진이가 마침내 일생을 함께 할 사람을 찾다니, 이 할머니가 당연히 기뻐해야지. 모두 이 할머니 잘못이다, 요 방정맞은 입 같으니라구.”무진이 얼른 말했다.“할머니, 할머니 탓하지 마세요. 모두 저와 성연일 위해서 하신 말씀이시잖아요?”“그렇네, 얼른 무진과 성연이 결혼식을 예약해야지. 성연이가 외국에서 나쁜 마음을 품은 놈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말이다!” 강운경은 성연의 성격을 안다.겉으로 보기에는 성격이 강하고 털털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아이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조그만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간다면...‘정말 무진이 죽으려고 하겠네.’“그래, 근데 성연이 나이가 한참 어린데, 그렇게 하겠다고 해?” 강운경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두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계획을 다 세웠다.그러나 성연이 그러겠다고 할지는 아직 미지수.“성연이는 분명히 그러겠다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성연이 곧 개학할 텐데, 성연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그러면 성연이 공부하러 가는 것을 막는 양상이 된다.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사실, 불안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성연이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시 돌아왔다.무진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그러나 마음이 심란해지며 성연이 떠나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그래서 무진은 성연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고택에 들렀다.무진이 고택으로 들어왔을 때, 안금여와 강운경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무진을 보던 안금여는 무진의 뒤를 쳐다보았다.“아니 왜 성연이는 너와 함께 오지 않았어?”무진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저었다.“같이 안 왔어요. 제가 오늘 여기에 온 것은 두 분에게 드릴 말이 있어서예요.”무진의 태도가 너무 공적이고 진지한 터라, 안금여와 강운경도 덩달아 긴장하며 다급히 물었다.“무슨 일이냐?”두 사람은 무의식 중에 회사의 일을 떠올렸다.“성연이가 곧 학교로 돌아갈 겁니다. 그런데 저는 성연이가 더 뛰어나게 성장하는 걸 가로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연이 떠나면, 더 이상 제가 마음을 놓고 지낼 수가 없습니다.”무진의 음성이 유난히 침중했다.성연은 아직 너무 젊었다. 외부에는 성연이를 끌어당기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무진이라 해도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무진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조바심과 불안은 오직 눈앞의 가족 두 사람 앞에서만 드러낼 수 있었다.무진이 에둘러 말했지만, 안금여와 강운경은 바로 알아들었다.무진의 말을 듣던 안금여와 강운경이 서로 마주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무슨 큰 일인가 했더니, 그걸 걱정하고 있었어?” 안금여와 강운경이 박장대소를 했다.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무진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날이 있다니.제 마음이 이리도 빨리 들통나 버리자 무진은 좀 민망함을 느꼈다.무진이 입술만 오물거리며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강운경이 그런 무진을 놀렸다.“예전에 내가 무진이 너에게 괜찮은 아가씨들을 참 많이도 소개해 줬는데, 그때는 너 꿈쩍 하지도 않더니. 그때 나 정말 걱정했었어. 네가 고독한 모습으로 혼자 늙어가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야.
손민철의 안배로 조수경의 미모를 이용해서 돈 많은 사장들을 꼬셔냈다.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아주 빠르게 올라갔다.지난 번의 거의 두 배에 가깝게.이런 놀라운 업무 실적 상승에 사람들은 조수경의 능력을 다시 보게 되었다.이전에 조수경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도 이번 성과를 본 후에는 완전히 승복했다.사람들은 그 내막을 모르는 상태로 그저 조수경이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라고만 생각했다.앞으로 조수경은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옆에서 조수경을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대표실 안.비서 손건호가 서류 파일 하나를 손에 들고 있다. 바로 조수경의 업무 보고서가 들어 있는 파일이다.“보스, 좀 보시죠.”두텁게 쌓인 서류는 상당히 무게가 있어 보인다.무진이 눈을 들어 손건호를 한 번 쳐다본 후, 고개를 숙여 눈앞의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몇 분 동안 집중해서 문서를 모두 살폈다.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무진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보고서를 다 확인한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어떻게 이렇게 많지?”손건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는 조수경 쪽을 직접 주시하지 않고 따로 사람을 보내 지켜보게 했었다.그러나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조수경의 이 업무 실적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았다.손건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했다.“지금 조수경 씨의 이 업무 실적이라면 이론상 팀장의 위치까지 승진해야 합니다.”무진은 어렴풋이 조수경이 이렇게 하는 목적을 알아챘다.지금 강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조수경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방법을 썼을 테고...“묵살해!”손건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건 담당 부서의 책임자가 제출한 겁니다. 묵살할 방법이 없습니다.”만약 묵살해 버린다면, 회사 내의 많은 직원들이 실망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어쨌든 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여기에 이렇게 버젓이 있는 이상, 누구
조수경의 표정이 좀 어정쩡했다.사실 마음속은 성연에 대한 원망으로 꽉 차 있었다.고택에 찾아갔더니, 안금여와 강운경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강무진도 자신에게 어찌나 냉담한지.조수경은 성연이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라고 생각했다.물론 강씨 집안에서 충분히 많은 것들을 해 주었겠지만, 외부인이 송성연에게 이런 명품들을 선물한 적은 없을 것이다.송성연 쪽에서부터 손을 쓰기로 생각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성연은 자신들보다 더 상대하기 힘든 강골이었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수경의 얼굴에는 거꾸로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이 가득 차 있었다.“성연 씨, 당신 생각을 이해해요. 앞으로 꼭 무진 오빠와 거리를 둘 게요. 다만...”조수경은 성연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했다.“나는 할머님과 고모님을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고모님과 할머님은 지금 나를 전혀 만나시려고 하질 않으세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어 성연 씨를 찾아온 거예요. 성연 씨가 나를 용서해 준다면, 두 분도 나를 다시 만나 주실 거라고 믿어요.”조수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찾아왔는가 싶었더니, 알고 보니 조수경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택에 찾아가면, 무슨 일을 하든 훨씬 편리할 테니까.“할머니랑 고모가 어떻다고요? 그 분들 뜻이에요. 나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나도 두 분 어른의 뜻은 못 꺽어요. 나를 핑계로 해서 그 분들을 설득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말도 안 돼는 일이에요. 생각도 하지 말아요.” 성연이 딱 잘라 말했다.자신의 마음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을 본 조수경은 얼굴의 미소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래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는 그냥 우리 두 사람의 오해를 풀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때는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어요. 송성연 씨, 정말 미안해요. 나는 정말 일이 이렇게 되는 걸 원한 게 아니에요.”“조수경 씨가 무진 씨와 거리를 두기만 한다면,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생길 리가 없겠죠.”성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조수경을 쳐다보았다.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낸 후 성연의 시간은 다시 한가해졌다.지금 성연은 정원에서 꽃나무에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꽃모종이라고 하지만, 사실 다소 귀한 약재들이다.엠파이어 하우스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거의 비료를 준 적이 없는 셈인데도 토양이 아주 비옥했다.성연이 몇 그루를 심어 보았는데 모두 살아남았다.손을 씻고 거실로 들어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낯선 번호에 성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누구지, 이 사람은?’‘기억에 없는 번호인 것 같은데?’원래 받기 싫은 마음에 잠시 망설이던 성연이 결국 전화를 받았다.“네.”“송성연 양, 저 조수경이에요.”휴대폰 건너편에서 조수경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성연의 두 눈썹 앞머리가 올라갔다.“조수경 씨가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조수경이 자신 때문에 고택에서 쫓겨난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성연은 조수경을 보지 못했다.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자신에게 전화를 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그런데 내 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조수경은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송성연 씨, 얘기 좀 하고 싶어요.”성연은 나갈 생각이 없었다. 조수경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고.조수경을 본다면 그날 밤의 그 장면이 떠오르며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그런데 왜 조수경은 자신의 화를 돋우려 하는 거지?’“죄송합니다만, 요즘 바빠서 시간이 없네요.” 성연의 음성은 의외로 담담했다. 음성이 오르내림이 전혀 없이.오늘 반드시 성연을 만날 결심을 한 조수경이 애원을 하듯이 사정했다.“송성연 씨, 제발, 한 번만 저를 만나 주세요. 요 며칠 저는 무척 괴로웠어요.”성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수경이 더 간절히 매달리며 이어 말했다.“그냥 송성연 씨와 몇 마디 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성연 씨, 제발 부탁해요.”성연이 조수경을 겁내서가 아니었다.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억울하다는 듯이 사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도대체 조수경이 자신에게 무슨 이
5일의 일정 동안 세 사람은 북성의 명소 네다섯 곳을 돌아다녔다.원래 좀 더 있을 생각이었지만, 샤넬 가문에 뭔가 일이 생겼는지 곧 돌아가야 했다.성연은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더 재미난 곳도 많은데.풀이 죽어 있는 성연의 모습에 미스 샤넬이 웃으며 성연의 뺨을 꼬집었다.“그러지 마. 나중에 우리 다시 올 기회가 있을 거야.”갑자기 일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 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연은 매일 같이 업무로 바쁜 무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떠나는 미스 샤넬과 목현수를 대접하기 위해 음식점 한 곳을 예약했다.성연이 이번에 예약한 곳은 평이 좋은 가정식 요리 전문점이었다.오랜 시간 외국에서 생활한 목현수가 이런 정통 가정식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을 거라 생각한 성연이 특별히 그에게 맛 보여 주기 위해 선택한 곳이었다.테이블에 오른 음식들은 소담하면서도 먹음직스러웠다. 미스 샤넬은 눈앞의 음식들을 보며 폰을 들어 한참 촬영을 한 후에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정말 맛있어. 와, 매번 색다른 맛을 경험하게 해 주네요.” 이곳의 음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미스 샤넬이 연신 감탄했다.입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맞아요. 우리 북성에는 맛있는 음식과 재미난 것들이 정말 많아요.” 성연이 미스 샤넬씨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맞아요. 이곳은 산수가 수려해서 경치도 너무 아름다워요. 앞으로 현수 씨가 원한다면, 현수 씨를 따라 이곳에 와서 정착해도 좋겠어요.” 첫날을 제외하고 그 이후의 시간을 미스 샤넬은 무척 즐겁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좋아요. 그러면 그 때 우리 적당한 곳을 고를 수 있어요. 나랑 무진 씨도 두 사람과 같은 곳에 살고.” 그 생각을 하던 성연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것도 좋죠.” 샤넬 양이 맞장구를 쳤다.그러나 그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샤넬 가문은 유럽에서 세력이 무척 큰 가문 중의 하나.지금 연세가 많은 미스 샤넬의 아버지는
남은 일정 내내 성연은 미스 샤넬, 목현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북성 주위의 관광 명소들은 전부 한 바퀴 돈 셈이다.무진의 당부를 새기며 최대한 깊은 물이 있는 곳은 피하면서.또 성현은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을 위해 온갖 명소들을 방문해서 즐길 계획을 짰다.성연은 하룻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그래도 무진의 말을 잘 따른 셈이다. 위험한 곳들은 가지 않았으니까.오늘 그들이 함께 온 곳은 커플들을 위한 테마파크였다. 주위에는 온통 팔짱을 낀 젊은 커플들이었다. 공기 중에는 핑크빛 기운이 가득했다.반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의 사이에 혼자 낀 성연은 눈치 없는 들러리 같았다.성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거니까 말이다.그러나 지금 서로 손을 깍지 낀 채 닭 털을 날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성연 자신이 피해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성연은 속으로 후회했다. ‘괜히 사서 고생한 거 아냐?’‘진즉 알았으면 무진 씨를 데리고 올 걸 그랬지.’“샤넬, 저기 아이스크림 파는데, 먹을래요?”성연은 핑크색으로 장식을 한 건너편의 가판대를 가리켰다.성연과 미스 샤넬은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성연은 미스 샤넬이나, 샤넬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해서 그냥 바로 이름을 불렀다.“나도 먹어요.” 미스 샤넬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목현수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낮 시간.하지만 건녀편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목현수는 양산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두 사람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내가 사올 게. 무턱대고 저쪽으로 갔다가 더위 먹으면 어떡하려고?”고개를 살짝 끄덕인 성연은 목현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샤넬,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 목현수가 먼저 미스 샤넬에게 물었다.“다 괜찮아요, 당신이 사 주는 거랴면요.”
식당 안.미스 샤넬은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앞접시에 가득 담았다.그러나 목현수는 음료수 한 잔만 손에 쥔 채 미스 샤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의아하게 쳐다보던 미스 샤넬이 물었다.“안 먹어요? 왜 날 쳐다보고 있어요?”오늘 목현수가 좀 이상했다.“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줄 게.” 정상적인 대화이긴 하지만, 목현수의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진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조금 전에는 먼저 수저를 놓아주기도 했다.이전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 목현수였다.미스 샤넬의 오늘 모습은 목현수로서는 정말이지 좀 새롭게 보였다.주스를 한 모금 마신 목현수가 입을 열었다.“미스 샤넬, 오늘 왜 굳이 성연을 구하러 강에 뛰어들었어? 설마 네도 위험하게 될 줄 몰랐어?”목현수의 눈에 미스 샤넬은 늘 연약하기만 한 존재였다.그런데 위급한 상황에 제일 먼저 강에 뛰어들어 성연을 구한 사람은 미스 샤넬이었다. 목현수의 물음에 잠시 멍해 있던 미스 샤넬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송성연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어요. 만약 그때 그러지 않고 송성연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평생 자책하며 살 테죠. 그래서 나는 반드시 송성연을 구해야 했어요.”그러니까 미스 샤넬은 목현수 때문에 송성연을 구했다는 의미.만약 송성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물에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을 터였다.미스 샤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어 말했다.“공교롭게도 내가 한 수영하잖아요? 그러니까 내려갔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감히 그런 용기 못 냈지.”미스 샤넬의 유머러스한 표현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순간 목현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목현수를 위해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미스 샤넬.목현수 자신이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목현수가 진지한 음성으로 미스 샤넬에게 약속했다.“이전에는 정말이지 결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미스 샤넬 당신과 기꺼이 결혼할 거야.”미스 샤넬의 눈에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