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참관이 끝난 후 성연은 무진을 데리고 내실로 들어갔다.“대표님, 여기 위에 누우세요. 제가 검사할 수 있게요.” 성연이 한 팔을 펼치며 청하는 자세를 취했다.무진이 누웠다.성연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의료기기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서서히 입구가 닫히며 의료기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체 데이터를 측정하기 시작했다.성연은 스크린에서 번쩍이는 데이터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그런 성연의 모습에 연경훈의 두 눈은 경탄으로 반짝였다.마치 영화를 찍는 것처럼 아주 환상적이었다.성연의 진지한 옆모습을 바라보던 연경훈은 눈치 있게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옆으로 비켜섰다.성연을 방해할까 봐 숨을 죽인 채.좋아하는 사람 앞이니 당연히 알아서 잘해야 할 터였다.십여 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무진의 검사가 끝났다.성연은 문을 열자 무진이 일어나 앉았다. 성연의 표정이 좀 굳어 있었다.“대표님, 체내에 내상이 많이 쌓여 몸이 매우 좋지 않아요. 장기적으로 관리해야 합니다.”연경훈 또한 무진의 상태가 그토록 심각할 줄은 몰랐다.강씨 집안 내부의 복잡한 관계를 생각하면, 보호해 줄 부모가 없는 무진이 잘 지냈을 리 만무한 터.옆에서 연경훈이 관심 있게 물었다.“무진 형, 기분이 좀 어때요? 참기 힘들어요?”좌절감이 느껴졌다. 하필 의학엔 문외한인지라 무진을 도울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무진은 평소 자신에게 아주 잘해 주었다.“익숙해졌어.” 무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그 한 마디가 엄청나게 무겁게 들렸다.무진이 익숙해지기까지 뒤로는 얼마나 병고에 시달렸을지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무진이 결코 쉽게 살아오지 않았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좀 아닌 것 같아 축 처진 모습으로 한쪽편에 섰다.성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데리고 밖에 있는 휴게실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연구실로 들어가며 말했다.“두 사람은 여기 앉아서 좀 기다리세요.”연경훈과 무진이 휴게실에
성연이 나온 후 무진에게 약 한 병을 건넸다.이는 희귀한 약재들로 만들어진 매우 귀중한 약이었다.무진에게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무진이 약병을 받자 성연이 말했다.“이 약은 하루 세 번, 식후에 드세요. 까먹으시면 안 돼요.”그러다 성연은 여러 가지 약재를 살펴보며 무진에게 처방을 내렸다.이 약재들은 보통 몸을 보호하고 기력을 보충하는 데 쓰였다.그녀는 처방을 내린 후, 무진에게 건네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은 북성 시에서 높은 자리에 계시니 약재 몇 가지를 찾는 건 일도 아닐 거예요.”무진은 처방전을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물론 고 선생님이 치료를 도와주시겠죠? 강씨 집안에서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 고 선생님이 돈을 쓰지 않도록 할 겁니다.”성연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강씨 집안에 이런 약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처방전만 썼을 뿐 약을 만들지 않았다.약을 만들어 주는 건 약재를 낭비하는 것에 불과했다. 강씨 집안은 부유했고 심지어 어떤 약재는 훨씬 상태가 좋았다.무진은 그쪽에 있는 약재를 먹는 편이 더 나았다.옆에 있던 연경훈은 성연이 아픈 무진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자 질투가 좀 났다.이에 경훈이 입을 열었다.“고 선생님, 저도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한 번 봐주세요.”성연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연경훈 씨는 너무 튼튼해서 백 살까지도 거뜬히 살 수 있을 거예요.”진료를 마친 후, 무진은 회사에 아직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아 떠나려 했다.그가 없이는 회사가 돌아가지 않았다.연경훈도 더 머물 다른 구실을 찾지 못해 무진과 함께 떠나야 했다.무진이 선뜻 말을 건넸다.“고 선생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성연이 고개를 저었다.“아직 할 일이 남아서 연구실에 있어야 해요. 먼저 가세요. 전 나중에 택시 타고 가면 돼요.”무진은 더 이상 그녀를 잡지 못했다.경훈은 차창에 기대 아쉬운 듯 성연을 바라봤다.“고 선생님, 다음에 시간 되면
실험이 끝난 후, 성연은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왔다.바로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것처럼 가장했다.하지만 검사 결과를 통해 무진의 몸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현재 다른 방법으로는 안된다. 식단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레시피를 다시 정리한 성연이 집사에게 무진의 건강에 더 도움이 될만한 식단들로 준비해 줄 것을 요구했다.집사에게 레시피를 건네주는 순간, 집사가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짝 웃었다.“작은 사모님, 도련님에게 정말 잘하시네요.”과거 무진이 병에 걸려 몸져누웠을 때 모든 친척이 그를 신경 쓰지 않은 탓에 그의 성격은 더 내성적이고 배타적으로 변했다.하지만 성연이 나타난 후, 무진은 건강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밝아졌다. 점차 그에게서 인간미가 보이기 시작했다.무진이 어릴 때부터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봐 왔던 집사는 무진의 변화가 무척 반가웠다.“당연한 일인 걸요. 무진 씨 건강은 관리하지 않으면 더 심각해질 거예요.”성연이 부드럽게 대답했다.그녀는 무진을 단지 환자로 대했다.‘무진 씨는 내 환자야. 내가 책임감 있게 대해야 해.’하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바로 무진이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다. 더 이상 무진이 이러한 고통을 견뎌서는 안 됐다.“작은 사모님, 도련님이 사모님과 결혼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집사는 옆에서 그녀를 치켜세웠다.“그이도 저에게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무슨 생각인지 그녀는 나오는 대로 말했다.성연은 수학 경시대회 문제를 풀던 날, 자신이 잠들 때까지 무진이 안마해준 것을 기억했다.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다고 했던가, 무진이 그녀에게 잘하는 만큼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아이고, 두 분 사이가 좋은 걸 보니 큰 사모님께서도 마음이 놓이실 겁니다.”처음에 안금여는 집사에게 엠파이어 하우스를 감시하게 지시했었다.무진이 성연을 싫어해서 성연을 난처하게 할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지금 보니 역시 안금여는 안 해도
한편 소지한은 진미선과의 연락을 며칠째 질질 끌고 있었다.그러다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매니저를 시켜 광고 촬영 건으로 진미선에게 연락하게 했다.소지한의 매니저에게서 전화를 받은 진미선은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속의 큰 짐을 덜 수 있었다. 다행히 소지한의 최종 결정은 승낙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시어머니가 어떤 얼굴을 할 지 모를 일이었다.보아하니, 소지한을 찾은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았다.어머니로서의 위신은 아직 쓸만했다.소지한이 도착했을 때, 왕대관과 진미선이 직접 그를 맞이하러 나왔다.“소 배우님, 드디어 오셨네요. 원하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회사로 연락주십시오. 그럼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왕대관이 말했다.왕대관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가장 낮은 가격으로 전국을 뜨겁게 달군 대스타 소지한을 모셨으니 말이다.‘감히 누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보아하니, 진미선의 의붓딸은 소지한과 깊은 사이일 게 분명했다.‘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조그만 회사에 찾아와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어?’“뭐든 말해요?”소지한은 두 사람이 성연에게 한 짓을 생각하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이내 차가운 어조로 비웃었다.“아직도 뻔뻔하시네요. 제가 여기에 왜 왔는지 확실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앞으로 원하는 금액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왕대관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회사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 어떻게 감당하라는 말이야?’소지한은 어디서든 분당 수 억을 벌고 있었다.그 액수는 그들과 같은 소형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왕대관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소지한한테 더 이상 미움을 사면 안 돼.’그는 몇 차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소지한 씨가 기꺼이 도와주신다면, 제가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생활이나 광고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해주세요.”소지한은 비웃으며 말했다.“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입을 다무세요. 쓸데없이 비행기
소지한은 진미선과 왕대관을 싫어했지만, 그는 프로였고 또 성연이 부탁한 일이었다.광고 촬영에 있어서는 진미선과 왕대관을 난처하게 하는 일 없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진미선은 쉬는 시간을 틈타 학교로 성연을 찾아왔다.주연정은 오늘따라 성연과 함께 하교하고 싶었다.친구끼리는 뭐든 함께하고 싶어 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평소 냉정해 보이는 성격의 성연이지만 주연정이 성연을 좋아하는 데 하등 문제가 되진 않았다.연정은 활발한 성격을 가진 소녀였다.그녀는 성연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었고, 성연은 단답으로 대답할 뿐이다.하지만 성연은 연정을 싫어하지 않았다.연정은 보기 드물게 순진하고 나쁜 마음이 없었다.성연도 작은 태양처럼 주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성연아, 북성시 시내에 엄청 맛있는 꼬치집이 있대! 다음에 시간 되면 우리 같이 먹으러 가자.”서로 친해지면서 연정도 성연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그래.”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또래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꽤 신기했다.“같이 가기로 한 거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어!”연정이 활짝 웃었다.“알겠어.”성연도 입술을 오므렸다.성연과 연정은 교문까지 걸어갔고 연정은 성연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다른 길로 걸어갔다.연정은 방방 뛰며 매우 행복해했다.성연은 때때로 아무 걱정 없이 해맑은 연정이 부럽기도 했다.얼굴의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고개를 돌린 성연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진미선을 보았다.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완전히 사라지고 무표정해졌다.“여기서 뭐 하세요?”진미선은 이런 성연의 무관심에 익숙해져 있었다.성연의 달라진 표정을 본 진미선은 전혀 개의치 않고 연정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물었다.“성연아, 쟤가 네 친구니? 학교에서 몇 명 정도 친구를 더 사귀렴. 그래야 네 학교생활이 더 즐거워질 거야.”“무슨 상관이에요. 왜 찾아오셨어요? 앞으로 부탁하지 않기로 약속하셨잖아요.”성연
진미선은 운전석에 앉아 운전을 하고 성연은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드디어 그들은 작은 별장 입구에 도착했다.성연이 눈살을 찌푸렸다.‘여기서 밥을 사겠다는 말이야?’‘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진미선은 혹여나 성연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고의로 거짓말을 했다.“성연아, 여긴 엄마가 사는 곳이야. 오늘 엄마가 널 위해서 요리를 다 해 놨으니까 가서 한 입만 먹어.”성연은 진미선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집에 들어간 후, 성연은 진미선이 자신을 왕씨 집안에 데려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성연은 화가 났다.‘지금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그녀는 고개를 돌려 진미선을 바라봤다.진미선은 돌아서서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성연아, 얼른 들어가자.”집 안에는 왕대관과 그의 어머니, 왕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도 다 모여 있었다.성연을 본 왕대관이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성연이 왔니? 다들 널 기다리고 있었단다.”“이 아이가 성연이야? 정말 예쁘게 생겼구나.”진미선의 시어머니도 반가운 척 친절하게 말했다.그들 앞에는 커다란 접시가 놓여 있었고, 마치 성연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것 같았다.성연은 입술을 오므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두 사람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진미선의 태도를 보면 왕씨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그들과 그 어떠한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있자 왕대관과 시어머니는 조금 당황스러웠다.특히 시어머니는 체면도 내려놓고 성연에게 말을 걸었기에 더 그랬다.한참이나 나이 어린 여자애가 완전 자신을 무시한 것이다.‘누가 그 엄마에 그 딸 아니랄까 봐. 첫인상부터 마음에 안 드는군.’그녀는 진미선을 바라보며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그 표정은 마치 ‘이게 네가 키운 딸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성연의 행동에 진미선도 난처했다.그래서 그녀는 성연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성연아, 이왕 왔으니 날
‘가장 역겨운 사람들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당신들이야.’성연은 왕대관과 그 어머니의 위선적인 얼굴이 너무 역겨웠다.‘내가 모를 것 같아?’그들은 분명 성연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들은 강씨 집안이라는 목적만을 생각하고 행동했다.만일 그녀가 강무진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성연을 본체만체 했을 게 뻔했다.그녀의 운명은 진미선에게 버림받은 것과 다름없었다.진미선은 왕씨 집안에서 남의 비위를 맞추며 비참한 삶을 살았는데 그녀까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진미선의 팔에 난 상처를 생각하면, 성연은 그 시어머니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지금의 진미선은 그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에 불과했다.분명 진미선은 혼자 좋은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남의 시중이나 들며 살고 있었다.성연은 그녀를 동정해서는 안 됐다.이는 그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었다.시어머니와 왕대관은 계속해서 말을 꺼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그러자 그들은 침묵을 유지했고 분위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진미선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그녀는 성연이 시어머니의 위신을 깎아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이렇게 가다간 시어머니가 자신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게 뻔했다.항상 그랬다.진미선은 집에 있는 과일을 깎아 성연에게 갖다 줬다.“성연아, 내가 사온 과일이야. 한 번 먹어봐. 꽤 달아.”성연은 그 과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꽤나 비싸 보였다.평소 왕씨 집안이 얼마나 사치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그러나 이건 그들의 능력과 맞지 않았다.‘이렇게 돈을 써대니 회사가 그 모양이지. 회사가 굴러가는 게 이상해.’이를 보니 왕대관이 필사적으로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게 당연했다.그가 물질적인 면에서는 진미선에게 아끼지 않는 것 같았다.어쩌면 이게 진미선이 원하는 삶일지도 모른다.왕대관이 그녀에게 어떤 짓을 하든 그가 진미선의 삶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만 있으면 된 거였다.성연은 어이가 없었다.이전에 진미선은 자신
진미선은 마음이 불편했다.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그럴 만했다. 성연을 이용해 지위를 올리려면 이런 것쯤은 견뎌야 했다.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던 진미선은 혼자 돌아갔다.시어머니는 방금 성연이 자신에게 했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돌아온 진미선을 본 그녀는 즉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진미선에게 표출했다.그녀는 직설적으로 진미선을 조롱했다.“딸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니? 정말 교양도 없고 예의는 찾아볼 수도 없구나. 강씨 집안만 아니었으면 이 집안에 발도 못들이게 했을 거야.”시어머니의 친절은 연기에 불과했다.성연은 강씨 집안의 최고 자리에 올랐지만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시골 소녀였다.‘감히 내 앞에서 그렇게 오만 방자하게 굴어?’‘눈 씻고 봐도 예의를 찾을 수가 없는데, 강씨 집안 같은 재벌가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진미선은 그저 성연이 안타까울 뿐이었다.성연 때문에 그런 좋은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는 여전히 등 뒤에서 그녀를 욕하고 있었다.참다 못한 진미선이 입을 열었다.“어머니, 성연이가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요.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세요.”시어머니는 진미선이 딸을 위해 대드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화가 났다.그녀는 더욱 노발대발하며 말했다.“얼굴만 믿고 남자를 유혹하는 계집애 같으니라고. 강씨 집안이 왜 그 아이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모르겠어.”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진미선의 가슴에 대못으로 박혔다.진미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그러나 그녀 역시 시어머니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그녀는 시어머니가 자신을 무시하고 하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시어머니는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이 일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서인지 진미선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다.진미선은 멍하니 옆에 서 있었다.시어머니는 가만히 있는 진미선의 모습에 더욱 열이 올랐다.‘우리 아들 때문에 이런 호사를 누리면서, 감히 누구한테 불쌍한 척하는 거야
손민철의 안배로 조수경의 미모를 이용해서 돈 많은 사장들을 꼬셔냈다.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아주 빠르게 올라갔다.지난 번의 거의 두 배에 가깝게.이런 놀라운 업무 실적 상승에 사람들은 조수경의 능력을 다시 보게 되었다.이전에 조수경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도 이번 성과를 본 후에는 완전히 승복했다.사람들은 그 내막을 모르는 상태로 그저 조수경이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라고만 생각했다.앞으로 조수경은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옆에서 조수경을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대표실 안.비서 손건호가 서류 파일 하나를 손에 들고 있다. 바로 조수경의 업무 보고서가 들어 있는 파일이다.“보스, 좀 보시죠.”두텁게 쌓인 서류는 상당히 무게가 있어 보인다.무진이 눈을 들어 손건호를 한 번 쳐다본 후, 고개를 숙여 눈앞의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몇 분 동안 집중해서 문서를 모두 살폈다.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무진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보고서를 다 확인한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어떻게 이렇게 많지?”손건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는 조수경 쪽을 직접 주시하지 않고 따로 사람을 보내 지켜보게 했었다.그러나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조수경의 이 업무 실적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았다.손건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했다.“지금 조수경 씨의 이 업무 실적이라면 이론상 팀장의 위치까지 승진해야 합니다.”무진은 어렴풋이 조수경이 이렇게 하는 목적을 알아챘다.지금 강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조수경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방법을 썼을 테고...“묵살해!”손건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건 담당 부서의 책임자가 제출한 겁니다. 묵살할 방법이 없습니다.”만약 묵살해 버린다면, 회사 내의 많은 직원들이 실망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어쨌든 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여기에 이렇게 버젓이 있는 이상, 누구
조수경의 표정이 좀 어정쩡했다.사실 마음속은 성연에 대한 원망으로 꽉 차 있었다.고택에 찾아갔더니, 안금여와 강운경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강무진도 자신에게 어찌나 냉담한지.조수경은 성연이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라고 생각했다.물론 강씨 집안에서 충분히 많은 것들을 해 주었겠지만, 외부인이 송성연에게 이런 명품들을 선물한 적은 없을 것이다.송성연 쪽에서부터 손을 쓰기로 생각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성연은 자신들보다 더 상대하기 힘든 강골이었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수경의 얼굴에는 거꾸로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이 가득 차 있었다.“성연 씨, 당신 생각을 이해해요. 앞으로 꼭 무진 오빠와 거리를 둘 게요. 다만...”조수경은 성연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했다.“나는 할머님과 고모님을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고모님과 할머님은 지금 나를 전혀 만나시려고 하질 않으세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어 성연 씨를 찾아온 거예요. 성연 씨가 나를 용서해 준다면, 두 분도 나를 다시 만나 주실 거라고 믿어요.”조수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찾아왔는가 싶었더니, 알고 보니 조수경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택에 찾아가면, 무슨 일을 하든 훨씬 편리할 테니까.“할머니랑 고모가 어떻다고요? 그 분들 뜻이에요. 나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나도 두 분 어른의 뜻은 못 꺽어요. 나를 핑계로 해서 그 분들을 설득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말도 안 돼는 일이에요. 생각도 하지 말아요.” 성연이 딱 잘라 말했다.자신의 마음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을 본 조수경은 얼굴의 미소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래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는 그냥 우리 두 사람의 오해를 풀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때는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어요. 송성연 씨, 정말 미안해요. 나는 정말 일이 이렇게 되는 걸 원한 게 아니에요.”“조수경 씨가 무진 씨와 거리를 두기만 한다면,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생길 리가 없겠죠.”성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조수경을 쳐다보았다.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낸 후 성연의 시간은 다시 한가해졌다.지금 성연은 정원에서 꽃나무에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꽃모종이라고 하지만, 사실 다소 귀한 약재들이다.엠파이어 하우스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거의 비료를 준 적이 없는 셈인데도 토양이 아주 비옥했다.성연이 몇 그루를 심어 보았는데 모두 살아남았다.손을 씻고 거실로 들어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낯선 번호에 성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누구지, 이 사람은?’‘기억에 없는 번호인 것 같은데?’원래 받기 싫은 마음에 잠시 망설이던 성연이 결국 전화를 받았다.“네.”“송성연 양, 저 조수경이에요.”휴대폰 건너편에서 조수경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성연의 두 눈썹 앞머리가 올라갔다.“조수경 씨가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조수경이 자신 때문에 고택에서 쫓겨난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성연은 조수경을 보지 못했다.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자신에게 전화를 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그런데 내 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조수경은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송성연 씨, 얘기 좀 하고 싶어요.”성연은 나갈 생각이 없었다. 조수경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고.조수경을 본다면 그날 밤의 그 장면이 떠오르며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그런데 왜 조수경은 자신의 화를 돋우려 하는 거지?’“죄송합니다만, 요즘 바빠서 시간이 없네요.” 성연의 음성은 의외로 담담했다. 음성이 오르내림이 전혀 없이.오늘 반드시 성연을 만날 결심을 한 조수경이 애원을 하듯이 사정했다.“송성연 씨, 제발, 한 번만 저를 만나 주세요. 요 며칠 저는 무척 괴로웠어요.”성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수경이 더 간절히 매달리며 이어 말했다.“그냥 송성연 씨와 몇 마디 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성연 씨, 제발 부탁해요.”성연이 조수경을 겁내서가 아니었다.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억울하다는 듯이 사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도대체 조수경이 자신에게 무슨 이
5일의 일정 동안 세 사람은 북성의 명소 네다섯 곳을 돌아다녔다.원래 좀 더 있을 생각이었지만, 샤넬 가문에 뭔가 일이 생겼는지 곧 돌아가야 했다.성연은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더 재미난 곳도 많은데.풀이 죽어 있는 성연의 모습에 미스 샤넬이 웃으며 성연의 뺨을 꼬집었다.“그러지 마. 나중에 우리 다시 올 기회가 있을 거야.”갑자기 일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 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연은 매일 같이 업무로 바쁜 무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떠나는 미스 샤넬과 목현수를 대접하기 위해 음식점 한 곳을 예약했다.성연이 이번에 예약한 곳은 평이 좋은 가정식 요리 전문점이었다.오랜 시간 외국에서 생활한 목현수가 이런 정통 가정식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을 거라 생각한 성연이 특별히 그에게 맛 보여 주기 위해 선택한 곳이었다.테이블에 오른 음식들은 소담하면서도 먹음직스러웠다. 미스 샤넬은 눈앞의 음식들을 보며 폰을 들어 한참 촬영을 한 후에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정말 맛있어. 와, 매번 색다른 맛을 경험하게 해 주네요.” 이곳의 음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미스 샤넬이 연신 감탄했다.입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맞아요. 우리 북성에는 맛있는 음식과 재미난 것들이 정말 많아요.” 성연이 미스 샤넬씨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맞아요. 이곳은 산수가 수려해서 경치도 너무 아름다워요. 앞으로 현수 씨가 원한다면, 현수 씨를 따라 이곳에 와서 정착해도 좋겠어요.” 첫날을 제외하고 그 이후의 시간을 미스 샤넬은 무척 즐겁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좋아요. 그러면 그 때 우리 적당한 곳을 고를 수 있어요. 나랑 무진 씨도 두 사람과 같은 곳에 살고.” 그 생각을 하던 성연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것도 좋죠.” 샤넬 양이 맞장구를 쳤다.그러나 그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샤넬 가문은 유럽에서 세력이 무척 큰 가문 중의 하나.지금 연세가 많은 미스 샤넬의 아버지는
남은 일정 내내 성연은 미스 샤넬, 목현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북성 주위의 관광 명소들은 전부 한 바퀴 돈 셈이다.무진의 당부를 새기며 최대한 깊은 물이 있는 곳은 피하면서.또 성현은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을 위해 온갖 명소들을 방문해서 즐길 계획을 짰다.성연은 하룻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그래도 무진의 말을 잘 따른 셈이다. 위험한 곳들은 가지 않았으니까.오늘 그들이 함께 온 곳은 커플들을 위한 테마파크였다. 주위에는 온통 팔짱을 낀 젊은 커플들이었다. 공기 중에는 핑크빛 기운이 가득했다.반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의 사이에 혼자 낀 성연은 눈치 없는 들러리 같았다.성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거니까 말이다.그러나 지금 서로 손을 깍지 낀 채 닭 털을 날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성연 자신이 피해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성연은 속으로 후회했다. ‘괜히 사서 고생한 거 아냐?’‘진즉 알았으면 무진 씨를 데리고 올 걸 그랬지.’“샤넬, 저기 아이스크림 파는데, 먹을래요?”성연은 핑크색으로 장식을 한 건너편의 가판대를 가리켰다.성연과 미스 샤넬은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성연은 미스 샤넬이나, 샤넬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해서 그냥 바로 이름을 불렀다.“나도 먹어요.” 미스 샤넬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목현수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낮 시간.하지만 건녀편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목현수는 양산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두 사람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내가 사올 게. 무턱대고 저쪽으로 갔다가 더위 먹으면 어떡하려고?”고개를 살짝 끄덕인 성연은 목현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샤넬,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 목현수가 먼저 미스 샤넬에게 물었다.“다 괜찮아요, 당신이 사 주는 거랴면요.”
식당 안.미스 샤넬은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앞접시에 가득 담았다.그러나 목현수는 음료수 한 잔만 손에 쥔 채 미스 샤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의아하게 쳐다보던 미스 샤넬이 물었다.“안 먹어요? 왜 날 쳐다보고 있어요?”오늘 목현수가 좀 이상했다.“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줄 게.” 정상적인 대화이긴 하지만, 목현수의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진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조금 전에는 먼저 수저를 놓아주기도 했다.이전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 목현수였다.미스 샤넬의 오늘 모습은 목현수로서는 정말이지 좀 새롭게 보였다.주스를 한 모금 마신 목현수가 입을 열었다.“미스 샤넬, 오늘 왜 굳이 성연을 구하러 강에 뛰어들었어? 설마 네도 위험하게 될 줄 몰랐어?”목현수의 눈에 미스 샤넬은 늘 연약하기만 한 존재였다.그런데 위급한 상황에 제일 먼저 강에 뛰어들어 성연을 구한 사람은 미스 샤넬이었다. 목현수의 물음에 잠시 멍해 있던 미스 샤넬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송성연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어요. 만약 그때 그러지 않고 송성연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평생 자책하며 살 테죠. 그래서 나는 반드시 송성연을 구해야 했어요.”그러니까 미스 샤넬은 목현수 때문에 송성연을 구했다는 의미.만약 송성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물에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을 터였다.미스 샤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어 말했다.“공교롭게도 내가 한 수영하잖아요? 그러니까 내려갔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감히 그런 용기 못 냈지.”미스 샤넬의 유머러스한 표현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순간 목현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목현수를 위해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미스 샤넬.목현수 자신이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목현수가 진지한 음성으로 미스 샤넬에게 약속했다.“이전에는 정말이지 결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미스 샤넬 당신과 기꺼이 결혼할 거야.”미스 샤넬의 눈에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
목현수도 한숨을 돌렸다.방금 성연에게 일이 생기자 목현수는 바로 손건호에게 알렸다.원래 다른 곳에 있던 손건호가 그제서야 달려왔다.“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성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손건호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난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던 성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무진 씨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손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옷을 갈아입게 민박집을 좀 잡아주세요. 자칫하다 감기에 걸리겠어요.”이 관광지는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근처에 민박집들이 많이 있었다.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성연이 미리 조사한 사항들이다.“예.”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두 차에 올랐다.차에 올라탄 성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미스 샤넬, 고맙습니다. 오늘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물속에서의 질식감을 떠올린 성연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했다.“괜찮아요. 당신은 내 친구니까 구할 수 있었어요. 물론 내가 구하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도와야지요.” 미스 샤넬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연은 그전에 미스 샤넬과 적지 않은 오해를 겪었다.그런데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미스 샤넬의 손을 잡은 성연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곧 그들은 손건호가 잡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목현수가 미스 샤넬과 성연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은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올 게.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래요.” 미스 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목현수가 옷을 사 주겠다고 하자 성연은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예전엔 별일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자란 성인들이었다.성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 나는 필요 없으니까 미스 샤넬만 사주면 돼요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