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확실히, 저도 무진 씨와 제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딱 맞는 인연이죠. 저는 우리 무진 씨의 외모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이 외모 한 번 보세요. 두 사촌동생분들하고 비교도 안되지 않나요? 물론, 사촌동생분들도 못생긴 건 아니지만, 우리 무진 씨에 비하면 쫌 처진다고 봐야죠. 그렇지만 두 분에게도 좋은 점 하나는 있네요. 안목이 훌륭하다는 점요.” 성연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두 남자를 ‘사촌동생’이라고 불렀다. 확실하게 우세를 점한 뒤, 기세를 몰아 반격한 것이었다.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굴이 벌게진 두 사람은 사나운 눈빛으로 성연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녀가 눈치껏 처신하기를 바라며.하지만, 성연은 두 사람이 보내는 경고의 시선을 외면했다.성연을 본 둘째, 셋째 작은할아버지는 입 근육만 움직여 가느다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확실히 촌에서 온 게 맞군. 예의범절도 못 배운 듯 무례한 말을 하다니.”“촌 사람인 점은 문제될 것 없다. 앞으로 무진이가 제대로 교육을 시키겠지.”셋째 할아버지는 장애를 가진 무진의 다리를 보며 비웃었다.마치 그들의 말뜻을 못 알아들은 것 마냥 성연이 따졌다.“둘째 작은할아버님, 셋째 작은할아버님, 두 분 어째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제가 뭐 잘못 말하기라도 했나요? 사촌 동생분들을 칭찬하고 있었는데요. 게다가, 저는 줄곧 호의를 보이며 악담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요. 설마…… 강씨 집안에서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잘못된 건가요?“만약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된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시골뜨기라, 예의범절에 있어서 사실 잘 모르는 점이 많습니다.”말을 마친 성연이 다시 몸을 돌려 안금여를 마주보았다.“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예의를 잘 몰라서 무진 씨 체면을 깍았어요. 앞으로 할머니께서 많이 가르쳐 주세요. 나가서 웃음거리가 되면 안되잖아요?”이 말을 들은 둘째, 셋째 할아버지들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거렸다.그렇다고 자신들의 위
차를 한 모금 마신 안금여는 얼굴의 웃음기를 지운 채 한 차례 헛기침을 했다.“어린 아이가 철이 없습니다. 둘째, 셋째 서방님 모두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마세요.”이어 굳은 얼굴로 화가 난 척 호통을 쳤다.“성연아, 얼른 무진이 뒤에 가서 서지 않고 뭐하니!”성연이 매우 얌전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무진의 뒤에 섰다.“오늘 여러분들을 부른 까닭은 함께 식사하며 무진이의 약혼녀를 선보이고자 해서입니다. 그러니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강씨 집안에서 발언권이 가장 큰 안금여의 눈빛이 닿을 때마다 손아래 젊은 세대들은 입을 다물었다.모두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잘도 듣고 있다.시골 계집애 때문에 난처해진 강일헌과 강진성은 속으로 바드득 이를 갈았다.곧 식사가 시작되고 음식이 들어왔다. 육, 해, 공 빠진 것 없이 다 갖춘 푸짐한 성찬이었다.성연이 본 것도 있고, 보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어쨌든 비싸면 되는 거지.’강씨 집안의 한끼 식사가 일반 사람들의 반년치 월급과 맞먹을 정도였다.그야말로 돈지랄이었다.설사 자신에게 돈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이렇게 쓰지는 못할 터였다.조용히 무진의 옆에 앉은 성연은 다른 사람들이 수저질을 시작하자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성연이 먹는 모습은 솔직히 예의범절에 맞춘 조신한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작이 우아하고 보기 좋아서 빨리 먹는데도 경박스러워 보이지 않았다.무진이 옆에서 성연을 살폈다. 때때로 채소를 집어 주거나 생선 가시를 발라주면서.성연이 너무 빨리 먹다가 체하기라도 할까 걱정된 무진이 연신 주의를 주었다.“천천히 먹어. 서두르지 말고.”맞은편에 앉아 마침 이 말을 들은 강진성이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가시를 세웠다.“형수님, 이건 좀 곤란한데요. 식사 예절, 우리 집안에선 아주 엄격합니다. 식사하시는 모습이 썩 좋지 않군요. 이후 밖에서 어떤 비난을 듣게 될지. 집에서 형님이 굶기는 줄 알겠어요.”약한 모습 보이기 싫은 성연 역시 입안의 고기 조각을
강진성과 강일헌은 번번이 성연이에게 깨졌다.아직도 송성연이 머리에 든 거 없는 촌뜨기라고 생각한다면, 그들 두 사람이 바보 천치일 것이다.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저 모습이 어디 산골 여자아이에게 볼 수 있는 감성이란 말인가?더 이상 성연에게 열 받지 않기 위해 아예 입 닫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저녁 식사는 금방 끝이 났다.모임에 참석했던 강씨 집안 일원들이 잇달아 자리를 떴다.사람들로 붐볐던 거실이 순식간에 휑해졌다.고용인들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치우기 시작했다.“드디어 조용해졌구나.”강운경이 안금여를 부축해서 소파에 앉혔다.고개를 끄덕이던 강운경은 보이지 않는 총과 몽둥이로 조롱해대던 사람들을 생각났다. 곧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이 사람들, 매번 집안 모임 때마다 방법을 바꾸어 가며 우리 무진이를 조롱해댔지. 듣기만해도 역겨웠는데, 이제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듣기 좋게 말해서 모두 강씨 집안 사람들이지, 하나같이 야심만만한 여우들 아냐? 무진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거지.’안금여가 강운경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위로하고는 웃으며 말했다.“신경 쓸 필요 없다.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사는지 보라고 하는 것도 괜찮을게다.”둘째와 셋째 시동생은 매번 집안 모임을 핑계로 이쪽 종가의 밑바닥까지 살폈다. 곤경에 처한 모습을 봐야 두 늙은 여우는 마음을 놓았다. ‘그렇게 보고 싶어하니 보여주마.’“됐다. 이미 오래된 일인데 괜히 그 사람들 꺼내지 말거라. 속 시끄러우니까.” 일찍부터 강씨 집안 사람들의 태도에 익숙한 터였다.예전 자신의 영감이 살아있을 적에 잘 대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영감이 가자마자 무진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것 같다. ‘무진일 그렇게 힘들게 하더니.’무진의 상태를 위장해야만, 무진이 안전할 수 있었다.그녀는 살아생전 무진을 제대로 지켜주고 싶었다.안금여의 머릿속에서 많은 옛날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자연히 시선이 무진에게 향했다.무진 옆에 앉은 성연을 보는 안금여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
강무진은 성연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 맞아. 매사 거침없이 행동하는 애가 어떻게 앉아서 예의 같은 걸 배우고 있겠어?’그는 휠체어를 조종하여 소파 쪽으로 갔다.“고모는 바쁘신 분인데, 이런 일로 귀찮게 해드릴 수는 없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절 선생님을 모셔와서 성연이를 지도하게 하겠습니다.”그러자 안금여가 입을 열었다.“나는 오히려 성연의 이런 성격이 마음에 든다. 이제 우리 집안에도 규칙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도 되었지 않니? 그런 사람이 집안을 이끌면 좋겠다.”그 말을 들은 성연이 깜짝 놀라 안금여를 쳐다봤다.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실 줄은 몰랐다.성연은 할머니가 더 좋아질 것만 같았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안금여는 피곤이 몰려오는 듯했다. 아직 열 시도 채 되지 않았는데. 크게 하품을 하고는 이내 한숨을 쉬었다.“이제 정말 늙었나 보다. 에너지 넘치는 젊은 너희들을 따라 갈 수가 없구나. 성연아, 무진아! 할머니는 더 이상 여기 못 있겠다. 그만 방에 들어가 쉬어야겠어. 낡은 뼈마디가 더는 안된다고 신호를 보내는구나.”강운경이 얼른 일어나 안금여를 부축했다. “엄마, 천천히요.”계단 입구까지 간 강운경이 고개를 돌려 무진과 성연을 쳐다보았다.“둘 다 조심해서 들어가. 오늘은 푹 쉬고 시간이 될 때 또 보자.”강운경에게 인사를 건넨 두 사람은 강씨 고택을 나섰다.돌아가는 길에 한참을 망설이던 성연이 입을 열었다. 걱정거리가 생겼다. “설마 정말 예절 선생님을 데려오는 건 아니죠? 난 싫어요.”무진은 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설령 예절 선생을 모셔온다 해도, 이틀도 안 돼 거품 물고 때려치울 거라고.성연이 먼저 싫다고 말한 이상, 그도 굳이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배우지 않아도 돼. 하지만, 배우는 척은 해야 해. 나중에 고모가 물어볼 때, 뭐라고 할 말은 있어야지.”성연도 그쯤은 충분히 이해한다.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강운경도 있지만, 괜히 트집을 잡
‘자신에게 이렇게 큰 자식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는 게 겁나는 거야? 내가 혹시라도 자신에게 매달릴까 봐 미리 돈을 주는 거야?’이런저런 생각에 성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느끼는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일부러 전화를 해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말하다니, 너무 창피스럽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아빠, 엄마’라는 단어는 성연에게 더 이상 ‘사랑’의 의미가 아니었다.그녀의 부모는 정말 구역질 날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애써 마음속의 분노를 억눌렀다.“굳이 이렇게 알려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도 어머니에게 연락할 생각 없으니까요.”말을 마치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성연의 눈동자가 사납게 일렁이는 기운으로 가득 찼다.이제 이런 일에는 면역이 생겨 아무렇지 않다고 되뇌었지만, 마음속에서 이는 슬픔은 어쩔 수 없었다.‘이게 뭐야?’‘원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나를 낳은 거야?’‘하지만 고마운 것도 있어. 생명을 줬으니, 오늘의 송성연이 있는 거니까.’휴대폰을 한쪽에 두고 물을 마시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냉장고를 열고 얼음물 한 병을 꺼내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꺼지지 못한 마음속의 불덩어리로 인해 성연의 마음은 점점 더 뜨겁게 타올랐다.마침 집사가 지나가는 것을 본 성연이 물었다.“집사님, 혹시 게임을 연결할 수 있는 장비가 있을까요? 갑자기 게임을 하고 싶어서요.”잠시 머뭇거리던 집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원래는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괜찮을 것도 같았다.‘사모님은 아직 어린 나이니까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게 정상이지. 이 정도는 괜찮겠지 뭐.’‘도련님도 이해하실 거야.’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입니다.”집사가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에 게임기를 연결해 주자, 성연이 능숙하게 게임기를 조작했다.집사는 금방 게임을 설치해 주었다. 성연이 그냥 게임을 하고 싶은 거라고 생각하면서.만
성연이 직접 만든 이 게임은 모험심을 자극하며 꽤나 긴장감이 넘쳤다.평소 걱정이 많거나 스트레스가 많을 때 하면 딱 좋은 그런 게임이다. 성연이 무진에게 게임 규칙을 설명했다. 구체적인 게임 방법뿐 아니라 게임의 레벨을 깨트릴 수 있는 기술까지 모두 전수했다.손건호와 집사는 놀란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다.손건호는 마음속으로 감탄했다.‘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 보스가 집에서 게임 하는 것을 보다니!’‘우리 도련님, 엄청난 돈이 오가는 사업도 마다하고 지금 어린 사모님 유혹에 넘어가 게임을 하고 있다니. 이래도 괜찮나?’몇 번 게임을 하고 난 무진은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하면 할수록 더 빠지게 된다.원래 성연과 함께 있으면서 기분을 풀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자신이 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실력도 처음보다 많이 늘어 이제는 전혀 초보자 같지 않았다.만약 직접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 역시 무진이 처음 게임한다고는 믿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게임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성연은 그의 실력에 깜짝 놀랐다.게임을 깨나가는 속도가 그녀를 따라잡을 정도였다.“평소에 집에 있으면서 할 일이 없을 때는 무엇을 해요? 설마 계속 책만 읽는 것은 아니죠?”함께 게임을 하는 동안, 둘의 거리가 조금 가깝게 느껴졌다.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잠시 말이 없던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뭐…… 어떻게 보면 계약서도 글로 된 책이라 할 수 있지…….’‘온종일 책만 읽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으윽, 글자들로 꽉 찬 페이지만 봐도 머리가 아픈데, 온종일 본다니!’이런 생각을 하던 성연이 또박또박 말했다. “역시 게임을 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무진은 버튼을 누르면서 물었다.“이 게임은 시중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듯 무진은 대화를 하면서 게임도 하고 있었다. 성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TV 화면을 보고 있었다.‘누가 나에게 설명 좀 해줘! 강무진이 어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을 확인한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연은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게임을 하고 끝냈다.어쨌든 자신 역시 내일 학교에 가야 했다. 너무 늦게 자면 못 일어날지도 모른다. 게임을 마친 성연은 방으로 돌아왔다. 손건호와 상의할 일이 있는 무진 때문에 옆방에 있는데, 아직도 끝나지 않은 듯했다.혹시 무진이 같은 방을 쓰자고 요구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침대에서 자고 남은 한 사람은 소파에서 자는 거니까 상관 없었다.이 점에 대해서는 무진과 이미 약속을 한 상태였다.며칠 함께 지내면서 무진이 꽤 매너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첫날은 빼고 말이다. 그날 일은 그냥 사고라고 생각하기로 했다.무진이 자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때때로 강씨 집안의 이상한 친척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 말고는, 이곳은 송씨 집안보다 훨씬 편했다.적어도 강무진은 그녀에게 잘해 주는 편이니까.밤 10시 반.성연은 욕실에 들어가 간단하게 씻었다.욕실을 나오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수건으로 올리고 있던 머리를 풀며 문을 열었다. 입구에 손건호가 서 있었다.“무슨 일이에요?”손건호는 그녀를 보며 초조한 듯이 말했다.“제가 보스에게 약을 발라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회사에서 긴급 콜이 왔습니다. 지금 당장 가 봐야 하는데, 혹시 사모님께서 제 대신에 약을 발라 주실 수 있는지요?”성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집사님에게 부탁하시면 되잖아요.”성연은 손건호가 지금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회사 일이 아무리 급하다 해도, 자기에게 와서 이런 부탁을 할 시간에 약을 바르면 됐을 터.손건호는 성연이 그런 계산까지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이제는 대놓고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집사님은 연세가 많으셔서 잠이 부족하면 다음 날 편두통이 심해지십니다. 그러면 종일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지요. 사모님도 아시다시피 집사님은 이 집안의 살림을 꾸려 나가야
성연은 침대 옆에 앉아 그를 눕힌 후, 상처를 가리고 있는 목욕가운을 젖혔다.자세히 살펴보니, 상처는 이전에 창고에서 봤을 때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이제 서서히 아물기 시작하고 있었다.하지만 어찌 되었든 몸에 깊은 흔적을 남긴 상처였기에 그렇게 빨리 낫지는 않을 것이다.성연은 손에 든 연고를 한 번 살펴보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에 약을 짜서 무진의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아주 일반적인 상처에 바르는 연고는 병원에서 처방한 것이라, 순하면서도 서서히 상처를 아물게 할 것이다.그전에 무진이 사용했던 성연이 만든 연고는 상처에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만약 계속 그 연고를 사용했다면 지금쯤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을 터였다.그러나 성연은 무진 앞에 너무 많은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너무 똑똑한 사람이라 자칫하면 다른 사실들까지 알아낼 지도 모른다.그래서 성연은 매사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침착한 얼굴로 약을 바르며, 다른 감정은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보통, 여자들은 이런 상처를 보면 깜짝 놀랐다. 소리까지는 지르지 않아도 그녀처럼 침착하지는 못했다.무진은 성연이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호기심이 생겼다.하지만, 손건호가 조사해온 자료에 의하면, 평범하기 그지없었다.무진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의도적으로 물었다.“너는 이런 상처를 보고도 무섭지 않아?”성연은 무진의 복부를 가볍게 마사지하며 약이 더 잘 흡수되도록 했다.질문을 받고 성연이 놀리던 손을 멈췄다.“무서울 게 뭐 있어요? 그냥 상처일 뿐이잖아요.”무진이 웃으며 말했다.“넌 상처도 능숙하게 치료하고 마사지도 잘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네가 의술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그는 마치 성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긴장한 나머지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계속해서 부드러운 손길로 약을 발랐다.무진은 그녀의 손끝이 피부에 닿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간지러우면서도 찌릿찌릿한 느낌이었다.무진의 검은 눈동자가 더 새까매졌다.성연이 헛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
로얄 스위트 룸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룸 내부 구석구석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스위트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은은한 향이 났다.“나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묙현수의 볼에 키스를 한 미스 샤넬은 목현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목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30분 후.찰칵,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스 샤넬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던 목현수.눈앞의 장면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물빛 실크 가운을 걸친 미스 샤넬의 허리에는 얇은 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실크 가운 사이로 풍만한 가슴 계곡과 희고 긴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가 천천히 목현수를 향해 걸어오자, 가운 안의 나신이 슬쩍 드러났다.목현수의 머리가 띵해 오기 시작했다.한 호텔 룸 안에서 내보이고 있는 샤넬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건강한 성인 남자인 목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미스 샤넬은 목현수에게 다가가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들었다.자신의 몸까지 드러내며 이렇게 다가가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목현수.점점 서운한 마음이 커지는 미스 샤넬.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현수 씨,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목현수도 미스 샤넬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미스 샤넬은 항상 씩씩하고 쾌활한 사람이어서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목현수 자신도 깜짝 놀랐다당황한 목현수가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그냥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미스 샤넬이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유혹하려는 거죠!”그녀의 눈에 원망과 질책의 빛이 들어찼다. 또한 짙은 실망감도.목현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
성연은 수시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음식을 먹으면서 성연이 농담처럼 물었다.“사형, 사형은 미스 샤넬과 언제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예쁜 미인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형을 따라다니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요?”성연은 그저 슬쩍 물어보았을 뿐이다.지난번에도 물어봤지만 매번 이 문제를 회피하는 목현수였기에.“곧 할 거야. 다음 달 즈음에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그런데 목현수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던 성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무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옆에서 목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두 달이면 목현수가 유부남이 된다는 말이지?’‘엄밀히 말해 지금 미스 샤넬은 목현수의 약혼녀.’‘이제는 목현수도 더 이상 성연이에게 매달릴 수 없다는 거지.’무진은 이제야 정말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그도 옆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그럼 이게 신혼여행인가요?” 그 말을 들은 목현수가 눈을 치켜 떴다.‘하, 내가 강무진 네 놈의 얄팍한 생각을 모르는 줄 알아?’‘성연이를 내가 뺏을까 봐 겁이 났던 거 아니야?’‘이제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강무진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어.’“그런 셈이지요.” 목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무진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슬쩍 가렸다.주문했던 음식들을 다 먹자, 디저트가 나왔다.이 음식점의 주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A국 특유의 디저트였다.미스 샤넬은 방금 먹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 만큼 맛있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디저트로 나온 이 케익들.동물을 본떠 동그랗게 만든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미스 샤넬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포크를 들었다.“이 케익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성연이 손을 흔들었다.“모두 먹는 것들이에요. 미스 샤넬. 많은 생각하지
“너네 A국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진작부터 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현수 씨한테 데리고 가달라고 졸랐죠. 첫 번 째로 성연 씨를 보러 온 거예요.” 미스 샤넬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어떤 의미에서는, 목현수가 자신을 A국으로 데려온 것 자체가 자신을 인정한 거라고 생각하는 미스 샤넬.미스 샤넬이 따라온 걸 본 무진은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성연의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아무 내색 없이 슬그머니 풀렸다.미스 샤넬과 성연이 다정한 모습으로 앞장서 걸었다.목현수와 무진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서로를 싫어하는 두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공항 밖을 나온 사람들은 모두 무진이 준비한 차량에 탑승했다.무진은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아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음식점으로 데려갔다.북성에서 아주 유명한 음식점인 이 곳은 언제나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하지만 이곳의 VIP고객인 무진은 얼굴을 보이자마자 곧바로 특실을 준비해 주었다.음식점의 총지배인이 직접 메뉴판을 가져와서 무진 일행의 주문을 받았다.살짝 허리를 숙인 채 아주 정중한 자세로 지배인이 말했다.“강 대표님, 최근 저희가 아주 참신한 신 메뉴 하나를 선보였는데, 평이 아주 좋습니다. 한번 맛보시겠습니까?”“이곳의 특선 메뉴들을 하나씩 내오세요.” 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지배인이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가서 준비하겠습니다.”특실 안에는 성연과 무진이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샤넬과 목현수가 나란히 앉았다.북성이 처음이라 연신 두리번거리던 미스 샤넬은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이게 바로 A국 스타일? 정말 예뻐요. 유럽과는 정말 다르군요.”“미스 샤넬, 여기가 마음에 들면 자주 오세요.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해요. 특히 미스 샤넬 같이 아름다운 외국 여성에게는 더요.” 성연이 미스 샤넬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며 놀리듯이 말했다.성연의 칭찬에 미스 샤넬은 좀 쑥스러운 표정을
“정말요?”“비행기 시간을 알려주면, 제가 그 시간에 마중 나갈게요.”전화를 받다가 의자에서 일어선 성연의 음성에 기쁨이 철철 넘쳐 흘렀다.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무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폰 건너편 음성이 남자 같은데...’무진이 무의식 중에 한마디를 꺼냈다.“누구?”성연이 재빨리 대답했다.“사형인데 벌서 북성으로 오는 중이라고 하네요. 나보고 마중나와 달라는데, 무진 씨도 같이 갈래요?”마음이 좀 불편해진 무진이 미간을 찡그렸다.‘그 자식은 왜 또 튀어나오는 거야? 사형이면 사형답게 행동해아지. 왜 자꾸 성연에게 들러붙는 거야?’성연이 혼자 목현수를 마중 나간다면 당연히 마음이 놓이지 않을 터.잠시 고민하던 무진이 이내 대답했다.“음, 내가 같이 가지.”“무진 씨 일은 안 바빠요? 바쁘면 나 혼자 가도 돼요.”그냥 공항으로 사람을 마중하러 가는 것이니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성연은 생각했다.무진이 바쁜 시간을 짜내 가면서 자신과 함께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괜찮아, 내가 같이 갈게.” 무진이 노트북을 닫았다.고개를 끄덕인 성연이 따라 일어섰다.“시간이 거의 다 됐어요. 우리가 공항에 도착하면 딱 맞을 거예요. 가요.”무진이 성연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북성의 공항.비행기 도착 시간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한 성현과 무진. 목현수가 탑승한 비행기는 아직 착륙하기 전이었다.두 사람은 함께 대합실에서 목현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목말라?” 무진이 물었다.“괜찮아요.” 성연이 고개를 저었다. 무진이 움직이는 순간, 성연은 그가 물을 사러 간다는 것을 알았다.성연이 무진의 팔을 잡아당겼다.“귀찮게 갈 필요 없어요.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형이 곧 도착할 거예요.”무진이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래.”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던 성연이 투덜거렸다“나올 때가 됐는데...”성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국 게이트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다시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하니 바로 목현수가
조수경은 바로 손민철을 찾아갔다.두 사람은 커피숍에서 만났다.칸막이가 쳐진 룸에서 손민철은 조수경을 껴안고 뺨에 키스를 했다.“왜 그래, 우리 자기, 겨우 며칠 못 봤을 뿐인데 내가 보고 싶었어?”“나도 보고 싶었어요.” 조수경이 당당하게 대답했다.손민철의 표정이 일순 흐려졌다. 자신이 보고싶었다고 조수경이 자신의 입으로 처음 시인한 것이다.손민철이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말을 하면서 조수경에게 입을 맞추었다.조수경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목을 껴안고 고개를 들어 키스를 받아들였다.키스를 마친 두 사람은 모두 숨소리가 거칠어졌다.부족하다고 느낀 손민철은 다시 키스하고 싶었다.조수경이 손민철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면서 가로막았다.“민철 씨에게 할 말이 있어.”손민철은 키스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무슨 일인데?”“내가 더 큰 성과를 올리게 해 줘요. 지금으로서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해!”조수경의 눈에 모질고 포악한 기색이 번쩍였다.‘내가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무진 씨가 나를 다시 보게 될 거야.’손민철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그러지.”그러고는 조수경의 손을 더듬거리면서 말했다.“하지만 오늘 밤 무조건 나와 같이 있어야 해!”농담하듯이 웃는 조수경의 표정에는 이전의 내키지 않아 하던 모습은 전혀 없었다.“그래.”“밤은 짧아. 지금 가자!” 손민철은 한시도 기다릴 수 없었다.다급한 모습으로 조수경을 이끌고 호텔로 가서 방을 잡았다.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조수경을 벽에다 밀어붙인 채 격렬하게 키스를 했다.조수경의 옷을 벗기려던 순간, 조수경이 손민철의 손을 잡고 말했다.“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아요. 오늘 밤은 충분히 기니까 천천히 즐겨요.”손민철은 애가 타면서도 속으로는 동시에 조수경이 자신에게 어떤 즐거움을 선사할지 기대감마저 가지고 있었다.천천히 객실 안으로 들어선 조수경이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들고 나왔다.베란다로 나가 앉은 조수경이 손민철에게 손을 흔들었
조수경은 두 사람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며 이를 갈았다.‘나는 지금 무진 씨를 만날 수도 없건만.’‘송성연은 어떻게 저렇게 쉽게 불러낼 수 있는 거지?’‘도대체 송성연의 어디가 좋다는 거야!’조수경은 이렇게 앉아서 무진의 처분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계속 이러면 무진 씨가 나를 거들떠보기나 하겠어?’저녁에 퇴근한 조수경은 또 다시 많은 선물과 건강기능식품을 사서 고택으로 찾아갔다.집사는 바로 안으로 들이는 대신 조수경의 방문을 먼저 안금여에게 보고했다.안금여와 강운경이 고개를 돌려 서로 쳐다보았다.그날 밤의 일에 대해 나중에야 알게 된 두 사람.정말이지 조수경이 무진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하마터면 무진과 성연 사이에 오해가 생길 뻔했던 것.조수경을 쉽게 믿었던 안금여는 마음속으로 성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조수경에서 고택 외부에 따로 거처를 마련해주었다.옛 친구의 체면을 고려해서 안금여는 그래도 조수경이 계속 회사에 남아있게 해서 체면을 세워주었다.조수경이 방문했다는 말에 안금여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됐어, 가서 한번 만나 봐야겠어.”강운경이 안금여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회사에서부터 화를 참고 왔던 조수경은 자신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자 더 화가 났다.‘이전에는 이 집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거절당하다니!’안금여와 강운경이 나타나자 조수경은 억지로 눈물 몇 방울을 쥐어짜내며 불쌍한 척 쇼를 하기 시작했다.“할머니, 고모, 제가 잘못한 거 알고 있어요. 용서해 주세요. 두 분이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드럽고 여리여리한 외모의 조수경의 두 눈은 촉촉하면서 약간 충혈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이 더 동정심을 갖게 했다.안금여는 조수경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원래 여린 마음을 가진데다가 지금 조수경이 보이는 모습에 더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안금여는 강씨 가문의 입장 또한 잊지 않았다.안금여 또한 차마 조수경에게 심한 말
대표실에 앉아 업무를 하던 무진이 고개를 돌려 맞은편 빌딩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내내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데스크 위의 전화가 울리며 무진의 정신이 돌아왔다.[보스, 적호가 유럽에서 MS 가문 칠장로의 아들 오웬을 죽였습니다. 이 일로 유럽이 한바탕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적호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신분을 숨겨서인지 아무도 그의 소행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만약 무진이 사람을 보내서 계속 주시하지 않았더라면, 이 일이 적호의 소행임을 그들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무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적호의 행동으로 해서 이 일 전체가 모호해졌어.’‘도대체 누가 적호에게 지시를 내린 거지?’‘설마 적호가 나를 노린 게 MS 가문과 상관이 없단 말인가?’‘그런데 MS가문에서 사주한 거라면 왜 도리어 MS가문의 사람을 죽인 거지?’‘아니면 저들 사이에 내분이라도 생긴 건가?’무진이 묵직한 음성으로 지시를 내렸다.“계속 주시하면서 무슨 소식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도록 해. 만약 자신이 있다면 적호를 생포하고, 자신 없으면 그냥 없애 버려.”어쨌든 적호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 안되었다.그가 살아 있는 한 무진과 성연의 안전은 늘 위협받게 될 테니까.[예.]수하에게 지시를 내린 무진이 전화를 끊었다.적호의 위협이 사라지자 무진의 마음이 다소 홀가분해졌다.적호가 북성을 떠났다는 사실은 성연의 외출 금지가 해제된다는 뜻이기도 하다.이제 성연은 언제 어디든 외출할 수 있게 된 것.불현듯 마음이 내킨 성연이 차를 몰고 무진의 회사로 찾아왔다.그룹 빌딩 일층에 차를 세운 성연이 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맞혀 봐요?”성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얼굴에서 음산한 기운을 모두 걷어낸 무진이 웃으며 말했다.“어디인데?”“맞혀보라니까요.” 성연이 애교를 부렸다.“모르겠는데? 그냥 얘기해 주면 안돼?” 무진의 입
일렬로 쭉 뻗은 건물이 구름 속으로 우뚝 솟아 있다.은백색의 양복을 입은 남자가 빌딩 내의 창문 앞에 서서 맞은편 빌딩을 바라보고 있다.‘저기가 바로 WS그룹의 본사.’안진검은 WS그룹 맞은편에 위치한 이 건물의 한 층을 임대해서 자신이 말했던 창업을 준비했다.물론 이는 모두 위장이다.그의 목표는 당연히 MS 가문에서 내린 지시, 즉 WS그룹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안진검은 창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빈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리자 안진검은 정신을 차렸다.힐끗 돌아본 핸드폰 화면에는 특수한 번호가 떠 있었다.적호가 건 전화였다.[오웬은 이미 죽었어!] 적호의 음산하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말을 들은 안진검은 속으로 기뻐했다.‘며칠 동안 지지부진하더니 겨우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 있군.’“다른 사람한테 들키진 않았어? 미행은?” 안진검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MS 가문의 세력은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그리고 오웬은 칠장로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 아닌가.오웬이 별안간 비참한 죽음을 당했으니 MS 가문에서 절대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미행하고 추격하는 놈들도 꽤 됐지만, 내가 다 따돌렸어. 가면을 써서 얼굴을 완전히 감춘 나를 그들은 전혀 못 알아봤어. 신분만 바꾸면 돼.]적호가 담담하게 설명했다.안진검은 속으로 흥분감을 느끼며 호쾌하게 말했다.“곧 백억을 쏴 줄 테니까, 잠시 유럽에서 휴식하며 재정비하도록 해. 내가 더 많은 리스트를 보내줄 테니.”적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안진검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안진검이 막 전화를 끊는 순간에 곧장 또 다른 전화가 들어왔다.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안진검의 양부, 일장였다.그가 전화한 목적도 오웬의 일 때문이었다.[오웬이 죽었어. 네가 요 몇 년 동안 오웬으로부터 억압받았다는 것도 알아. 이번에야 말로 너에게 좋은 기회야. 네가 WS그룹을 전복시키기만 하면 가문에서는 틀림없이 너를 크게 들어 사용할 거야!]안진검은 마음속으로 역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