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눈을 뜬 채 생각하던 강무진은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이 기억나기 시작했다.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적의 흉계에 걸려 이 작은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당시 골목에서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를 만나 구조를 요청했었다.결국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의식을 잃었고!“목숨은 건졌나 보군!”고요한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임무 중 상대의 계략에 빠졌던 것은 팀 내의 스파이가 적에게 정보를 팔아먹었기 때문이다.기억을 떠올리던 강무진의 얼굴이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손목시계의 버튼을 눌러 구조 신호를 보냈다.약 20분 뒤, 창고 밖에서 일사불란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곧이어 검은 옷의 한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강무진을 본 수석비서 손건호는 다소 감정이 격해지면서 바짝 긴장했다.“보스, 괜찮으십니까? 제가 애들을 데리고 보스를 한참 찾고 있었습니다! 보스 상처는 어떻습니까?”“괜찮아, 이미 처치했어!”잔뜩 잠긴 음성은 무심한 듯 냉담함이 배어 있는 어조였다. 미간에는 타고난 위압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그는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나자, 상태를 살표보고 있던 손건호가 얼른 부축했다.강무진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도 약간 돌아와 있었다.“보스, 보스 상처는…… 누가 처치했습니까?”손건호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강씨 집안 후계자 강무진은 오랫동안 수면장애를 앓아 왔다. 집안에서는 세계 명의들은 모두 찾아 모셔왔지만, 근본적인 치료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부상을 당한 강무진이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상처로 인해 반 송장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차였다.그런데 이렇게 기운이 생생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질문을 받은 무진도 잠시 멍하다가 곧바로 기억을 되살렸다. 정신을 잃기 직전, 희미한 약 냄새를 맡았던 같았다. 그러다가 바로 의식을 잃었고.막 대답하려던 그는 ‘어'하는 손건호의 음성을 들었다.“이건 뭐지?”그리고 허리를 굽힌 손건호가 건초 더미에서 향낭을 하나 집어 올렸다.은은한 약향이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서 쫓겨나도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다 자란 지금은 다르다.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성연의 말을 들은 송종철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너…… 너는 정말 싹수가 없구나!”성연은 그 말에도 아랑곳없이 몸을 돌려 자신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트렁크를 끌고 집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제 방은 어디예요? 피곤해서 좀 쉬고 싶네요!”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송종철은 이 큰딸이 더 싫어졌다.그런데도 데려왔다. 그리고…… 지금 송씨 집안은 성연을 이용해 위기를 넘겨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거실에서 마스크 팩을 쓴 채 피부관리를 하고 있는 계모 임수정과 피아노를 치고 있는 의붓 여동생 송아연이 눈에 들어왔다.이 두 모녀는 예쁘장한 외모가 무척 닮았다.특히 송아연은 상큼한 얼굴에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 덕택에 고상한 분위기를 지녔다.작은딸을 보는 송종철의 눈에 자랑스러운 빛이 가득했다.성연을 돌아보니, 낡아빠진 교복을 입고 온몸에 말로 표현 안되는 거친 기운이 넘실거렸다. 건들건들 책가방을 들고 저쪽에 서 있는 폼이 아주 비딱해 보였다.둘을 비교해 보려던 송종철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앞에 걸어가던 성연의 뒤에서 송종철이 소리쳤다.“나 왔어.” “아빠, 오셨어요?”건반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춘 송아연이 먼저 반가운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임수정 역시 돌아보며 말했다.“어떻게 이제 왔어요? 나는 당신이 또 진미선 그 여자를 못 잊어서 못 오나 했는데…….”말을 막 끝내며 돌아보던 그녀의 눈에 뒤편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성연이 보였다. 순간 표정이 돌변한 임수정이 손으로 마스크 팩을 뜯어내며 노발대발했다.“송종철, 당신 무슨 짓이야? 내가 말했지? 데려오면 안 된다고. 당신 뭐 때문에 얠 데려온 거야? 우리집에 얘가 들어와도 된다고 생각해?”눈살을 찌푸린 송아연도 일어서며 불만스럽게 말했다.“그래요, 아빠.
성연은 트렁크를 들고 송아연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아름답게 차려 입은 송아연은 걷는 것도 작은 보폭의 잰 걸음이었다. 낡은 교복의 성연은 한가하기 짝이 없는 자태로 마치 구경 온 듯 조금도 궁색해 보이지 않았다.이런 성연의 모습을 힐끗 곁눈질하던 송아연은 속으로 비웃었다. ‘예쁘면 뭐해? 품격이라는 건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지.’‘쓰레기는 쓰레기인 채 진흙탕에 있어야지. 이런 대도시는 그녀가 올 곳이 아니지.’가슴을 꼿꼿이 세운 송아연은 좀 더 반듯한 자세로 걸으며 성연에게 보여줄 참이었다. 스스로 창피하게 여겨 더 이상 여기 있을 낯이 없게 말이다.하나하나 모두 화려하게 장식된 방들을 지나 마침내 송아연은 성연을 데리고 복도 끝에 가서 멈추었다.송아연은 위에서 아래로 성연을 훑어본 뒤, 손을 뻗어 문을 힘껏 열었다.헛방 안의 잡동사니들은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어 방 한쪽에 쌓여 있었고, 다른 한쪽 구석에 작은 침대 하나가 간신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방이 밝은 편이라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들이 부옇게 보였다.바닥에 세워 놓은 트렁크 옆에 반쯤 기댄 성연은 헛방의 환경을 보고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팔짱을 낀 느긋한 자세로 송아연을 쳐다보았다.가진 수를 다 꺼내 보이는, 이런 어린애 장난하는 듯한 얕은 생각은 그녀의 눈에 볼품없었다.방안으로 머리를 내밀고 한 번 둘러본 송아연은 다시 성연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째 그녀가 기대했던 효과에 미치지 못한 것 같았다.‘송성연은 왜 저리 잘난 척을 하는 거야? 일부러 신경 안 쓰는 척하는 걸까?’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듯한 성연의 태도에 송아연은 화가 나 가슴이 답답해졌다.“언니, 집이 꽉 차서 지낼 곳이 없네요. 섭섭하겠지만 아쉬운 대로 여기에서 지내는 수밖에 없겠어요.”“집에 객실도 있지 않아?”나른한 음성으로 묻는 성연은 송아연의 몸을 한 바퀴 휘돌던 시선을 아무런 기색 없이 다시 거두어들였다.뒷짐을 진 송아연이 미간에 여자들 특유의 애교스러운 표정을 띄었다
송씨 저택에서 나온 성연은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갔다.최고급 스위트 룸을 잡은 성연은 샤워를 한 후 넓고 푹신한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시큰거리는 목을 잠시 주무른 뒤 머리를 베개에 묻고 세상 모르게 한숨 잘 생각이었다.막 잠이 들려는 찰나,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발신자 번호를 슬쩍 본 성연은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한쪽으로 던져버렸다.비록 저장해 놓진 않지만 기억력이 좋은 성연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 송종철의 번호였다.연속해서 몇 차례나 울렸지만, 성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벨 소리가 울리게 그냥 둔 채 그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또 다른 벨 소리가 울릴 때까지 성연은 눈을 뜨고 있었다. 살짝 들려 올라간 가는 눈꼬리가 완벽한 이목구비에 날카로운 느낌을 더했다.전화를 집어 든 그녀는 헤드셋을 끼고서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직접 디자인한 헤드셋으로,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소리는 절대 새어 나가지 않는다.“보스, 제가 직접 나서서 혈귀, 그 개자식을 잡으러 북성에 갈까요?” 서한기가 걸어온 전화였다.혈귀의 행방을 알았을 때, 서한기는 감정을 좀처럼 억제할 수가 없었다.혈귀는 그들 조직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놈이었다. 하마터면 조직원 두 명을 잃을 뻔했다.이 배신자는 반드시 잡아와야만 했다.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성연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서한기 역시 어떤 동작도 취할 수가 없었다.얼굴에 표정을 지운 성연이 발 아래 드리워진 북성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필요 없어. 내가 직접 나선다.”이번에는 서한기가 멍하니 있다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거렸다.“어? 보스, 직접 나서시게요? 보스까지 움직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북성으로 돌아왔어. 앞으로 한동안 북성에서 생활할 가능성이 높아.”이어서 성연은 담담한 음성으로 서한기에게 자신의 현재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서한기는 보스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송성연의 손에 떨어진다면, 그게 누구든 국물도 없
잠시 후, 마침내 강무진이 입을 열었다.“이 여자아이의 뭐가 특이하다는 거지?”손건호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아……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웃의 말에 따르면, 평소 잔병을 앓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여자아이가 준 약을 먹고 아주 좋아졌다고 합니다. 이웃들 모두 그 여자아이가 평범하지 않다고 입을 모아 칭찬하더군요…… 다만 보스를 치료한 그 약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자료를 한쪽에 내려놓은 강무진이 쫙 펼친 손바닥을 다리를 덮은 담요 위에 올려놓았다.“기회가 되면 그녀를 데려올 수 있겠지.”손건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보스가 여자아이에게…… 아, 아니, 여성 생물에게 저리 관심 가지는 건 처음 보았다.……성연은 이튿날 정오까지 내리 잠을 잤다.깨고 싶지 않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끊이지 않았다.그야말로 귀를 찢는 듯한 ‘쿵쿵쿵’ 소리가 잠을 깨웠다.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여는 성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짜증을 참지 못해 온통 찌푸려졌다.송종철과 임수정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송종철은 하룻밤 꼬박 성연을 찾아다니다 겨우 여기에서 찾아낸 것이다.어느 육교 밑에서나 찾을 줄 알았었다.그런데 5성급 호텔에 와서 로열 스위트룸에 묵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이곳은 하룻밤 숙박료만 수백만 원이다. 평소 접대할 일이 없으면, 그 역시 이리 사치스러운 스위트룸에 묵은 적이 없었다.성연에 대한 미운 감정이 다시 한 단계 상승했다.‘진짜 분수를 모르는 천방지축이구나!’두 사람을 본 성연이 우아한 동작으로 하품을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른한 모습으로 문틀에 기대었다.밤새도록 자고 일어났는데도 성연의 머리카락은 가지런한 모양으로 등뒤에 얌전히 내려와 있었고, 하얀 피부는 모공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끈했다.임수정의 눈이 질투의 빛으로 가득 찼다.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송성연의 이 얼굴이 엄청난 밑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많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
날파리 같이 귀찮게 웽웽굴던 두 사람이 떠나자, 성연은 점심을 먹고 백화점으로 갔다.5성급 호텔 바로 옆이 북성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몰이었다. 몰 안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곳곳에 조화롭게 자리한 각종 매장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의류 매장에 들어간 성연은 눈에 들어오는 옷을 집어 들고 가격표도 보지 않은 채 바로 매장 직원에게 포장하게 했다. 쇼핑을 끝낸 성연은 호텔로 돌아와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원래 본바탕이 좋은 그녀는 옅은 화장으로 충분했다. 길게 뻗은 아이라인에 약간의 음영을, 맑고 선명한 눈에 약간의 색감만 더했을 뿐이다. 몸에 딱 붙는 반 슬릿 레드 스커트는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었다.호텔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탄 성연은 바로 킹스 클럽으로 향했다.성연이 클럽에 들어서자 즉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겼다.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바로 갔다. 비어 있는 좌석에 툭 걸터앉은 성연이 색이 예쁜 칵테일 한 잔을 주문했다.앉은 지 얼마돼지도 않아 다가와 말을 걸은 남자가 벌써 여러 명이었다.“아가씨, 혼자 왔어요?”와인색 슈트를 걸친 남자가 다가왔다. 왁스로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빗어 넘긴 남자는 자리에 선 채 일부러 손목에 찬 명품 비취시계를 슬쩍 드러냈다.삽시간에 시선을 아래로 내린 성연이 다시 따분하다는 듯이 시선을 들어올렸다.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의기양양한 기색이던 남자가 얼굴을 굳혔으나 곧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아가씨, 제가 안에 룸을 하나 빌렸는데, 안에 가서 한 잔 같이 마시지 않겠어요?”말하는 남자의 손이 성연의 손등으로 뻗어왔다.곧 ‘우드득'하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남자가 손을 가린 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사납게 성연을 쳐다보는 남자의 눈이 음흉하게 변했다.“내 눈에 띈 것 자체가 네 복이야. 이 몸의 호의를 무시해선 안되지!”성연이 슬쩍 올라간 입술에 검지를 갖다 세웠다. 이어서 손목을 슬슬 돌리
‘무슨 상황이지?’성연이 정신을 바짝 차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제일 먼저 몸이 반응하며 얼른 룸 반대편으로 피한 성연은 어둠을 빌려 몸을 숨겼다.성연은 룸에 바짝 몸을 붙여 귀를 갖다 대었다. 안쪽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운지, ‘쿵, 쾅’대는 소리가 함께 울려 나왔다.‘안에 있는 사람들이 분명 싸우는 소리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큰 소리를 내지 테니까.’그녀는 사태를 관망하면서 섣불리 안으로 뛰어들지 않았다.한참 지난 후, 인영 하나가 룸 안에서 뛰쳐나왔다. 눈을 가늘게 좁힌 성연이 집중해서 똑똑히 보니 뛰쳐나온 것은 혈귀였다.혈귀의 상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룸에서 복도까지 핏자국이 이어졌다. 룸에서 뛰쳐나온 그는 손을 가슴에 댄 채 비틀거리며 복도를 뛰어갔다.복도를 빠져나온 그는 주위를 경계하며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다친 몸을 이끌고 클럽의 뒷문으로 달아났다.클럽의 뒤쪽은 빈민가로, 너무 지저분해서 보통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오기 전, 이미 클럽과 주변의 지도를 살폈던 성연은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한 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해냈다.혈귀와는 반대 방향으로 길을 돌아간 성연이 혈귀가 지나갈 길목에서 기다렸다.클럽에서 점점 멀어지며 드디어 자신이 위기를 넘었다고 생각하는 혈귀였다.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 바로 앞에 선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빛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혈귀는 겨우 붉은 롱 스커트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아름다운 몸매와 곧게 뻗은 긴 다리가 어렴풋이 드러났다.몸매에서 엄청난 미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러나 혈귀에게는 미녀와 노닥거릴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그는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앞의 사람이 바로 조직 내에서 듣기만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마녀라는 걸 말이다.성연의 신분은 아주 특수했다. 그녀에 관한 자료는 모두 극비로 취급되었으며, 일반인은 볼 수 없었다.혈귀조차도 성연과 통화만 한 적 있을 뿐이었다.혈귀는 단
혈귀가 끌려간 후, 송성연은 수정구 양 사이드를 눌러 채찍을 거두어들이고, 재빨리 그곳을 떠났다.긴 채찍이 회수되자, 서릿발 같던 냉혹함도 서서히 그녀에게서 거둬졌다. 점차 나른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변모한 그녀는 걸음걸이조차 제멋대로였다.처마 밑에서 졸고 있는 어미 고양이처럼 온몸에서 나른한 기운을 풍겼다.골목을 나선 뒤, 성연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휙 주위를 한 번 훑었다. 의심스러운 인물이 없음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떠났다.앞서 그녀가 섰던 곳, 높이 솟은 신형 하나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방금 골목에서 있었던 일들은 빠짐없이 강무진의 눈에 담겼다.워낙 은신에 탁월한 그인 터라, 보통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그래서 한참을 구경꾼으로 현장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눈을 가늘게 좁힌 강무진의 검은 눈동자가 우아한 뒷모습을 주시했다.‘저 여자, 도대체 뭐지?’무척 드물게 한 여자에게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강무진이었다.그가 텅 빈 골목을 바라보고 있은 지 얼마 후,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강무진이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을 데리고 쫓아온 손건호가 숨을 헐떡이며 그의 뒤에 섰다.강무진의 모습을 아래위로 세심히 살피던 손건호는 그의 몸에 혈흔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물건은 손에 넣었나?” 강무진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손건호는 손에 들고 있던 은색 슈트케이스를 들어올려 강무진 앞에 흔들어 보였다.“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거래자가 달아나 버렸습니다!”거래자를 언급하며 손건호는 화가 나 이를 갈았다. 그렇게 교활한 놈인지 누가 알았겠는 가. 몇 초 한 눈 파는 동안에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강무진의 뇌리에는 자연히 붉은 스커트가 떠올랐다. 그의 음성이 왠지 좀 더 낮고 쉬어 있었다.“누군가 이미 끌고 갔어.”“제가 가서 그 놈을 꼭 찾아오겠습니다!”단호한 음성으로 말한 손건호의 몸은 이미 쫓아갈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강무진이 손을 들어 손짓을 하
무진은 그래함에게 로얄 스위트룸을 마련해 주었다.안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고 그래함은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었다.그래함과 밥을 먹은 후, 무진은 아직 처리해야 할 급한 서류가 남아 있었다.성연을 남겨두고서 회사에 갔다가 다시 오겠다고 했다.성연은 그래함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무릎 위에 땅콩 한 봉지를 놓고 먹으면서 아주 쾌적한 모습이었다.그리고 그래함의 앞에는 뜨거운 김이 나는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강무진을 선택했어?”“사형, 이유를 모르겠어요? 왜 또 물어봐요?” 성연은 그래함이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고 느꼈다.“난 잘 모르겠어. 네 마음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야.” 그래함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이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고 장난도 심한 데다가 애교도 잘 부려서, 거의 아무도 굴복시킬 수 없었지.’‘엄격한 고학중 사부님조차도 성연이를 대하면서 총애할 수밖에 없었어.’‘성연이가 우리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결혼하는 사람일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인연이 오는 건 누구도 막을 수 없잖아요.” 성연은 어깨를 으쓱거릴 수밖에 없었다.“말도 안 돼.” 그래함은 담소하면서 성연의 말을 믿지 않았다.사실 성연 자신도 무진과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 잘 몰랐다.애초에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접근했을 때 목적은 모두 단순하지 않았다.나중에 두 사람이 서로 보살피고 고백하면서 성연은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성연은 이렇게 발동이 늦게 걸리는 사람이다.무진만 성연을 원하면서 인내심 있게 성연이 깨닫기를 기다렸을 뿐이다.무진의 성연에 대한 이 인내심만으로도 성연은 완전히 마음이 기울었다.“사형, 정말로, 감정 이런 일은 인연에 달려 있어요.” 성연은 자신의 생각에 어떤 문제도 없다고 느끼면서 말했다.“그래.” 그래함의 시선은 어딘가 아련해 보였다.마치 아주 먼 곳까지 날아가는 것 같았다.성연이 말한 인연이 있는 그곳...“그 얘기는 그만해요
“만약 강 대표님이 관심이 있다면 저와 함께 미주 시장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가장 좋은 협력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그래함은 무진의 명성이 과연 헛된 것이 아님을 발견하였다.‘그는 정말 사업에 소질이 있어.’‘이 점에서는 다른 사람을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어.’무진에 대해 그래함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그런 의향이 있다면 총재님께 연락하겠습니다.” 무진에게는 지금 발목을 잡고 있는 일이 너무 많다.지금 WS그룹의 근간이 북성에 있다는 건 차치하고라도.안금여와 강운경도 동분서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발전 프로젝트는 괜찮지만, 미국에 간다면 아마 통하지 않을 것이다.“강 대표님이 가든 안 가든, 나와 강 대표님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음에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함의 표정은 온화했고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무진의 차가움과는 다르다.그래함은 뼛속까지 온유함이 새겨져 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그건 당연하지요.” 무진도 그래함이라는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단히 만족했다.“무진 씨와 성연이는 언제 결혼식을 올릴 계획입니까?” 그래함이 이번에 온 것은 역시 주로 이 일 때문이다.지난 번에 목현수가 소식을 알려주었지만, 그는 시종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반드시 와서 직접 봐야 했다.“이미 준비 중입니다.” 무진의 표정은 온화했고 성연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부드러움이 가득했다.“그럼 정말 좋지요, 그러면 제가 남아서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겠군요.” 그래함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그래함이 무진에게 아주 만족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잠시 쉬었다가 그래함이 계속 말했다.“예전에 성연이 스승님이 우리 사형들에게 성연이를 돌봐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약속이자 책임이지요. 저희는 모두 성연이의 친정 식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연이를 강 대표에게 맡기면 우리 모두 정말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그들은 번갈아 가면서 강무진의 사람됨을
특별히 외국에서 돌아온 그래함이 성연을 방문했다.성연에게 재미있는 선물도 많이 가져왔다.의심의 여지없이 모두 성연이 좋아하는 것이다.성연은 선물을 들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그래함은 성연을 아주 잘 알고 있다.선물한 물건은 그야말로 모두 성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려고 고른 것이다.“네가 좋아하니 됐어, 내가 이번에 괜히 오지는 않았구나.” 그래함이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바쁜 사람인데 시간을 내서 저를 보러 온 걸로 이미 만족해요. 또 무슨 선물까지 가지고 왔어요?” 성연은 그래함이 정말 바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매일 발을 땅에 댈 사이도 없이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한가할 때가 드물었다.“다 들었어. 우리 성연이가 약혼자를 정했다고. 나는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한번 보러 온 거야.”그래함이 담담하게 말했다.오히려 목현수처럼 무진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성연이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모두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성연이가 행복하면 돼.’그 이유를 들은 성연은 좀 어이가 없었다.“좋아요. 저녁에 데리고 와서 보게 해 줄게요.”“기다릴게.” 그래함의 말은 온화함이 가득했다.성연은 조치하기 전에 먼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렸다.성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들었을 때 무진은 한순간 멍해졌다.“그 그래함 씨야?”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무진 씨가 생각하는 그 사람 같네요.”무진은 잠잠해졌다.‘성연이가 도대체 또 얼마나 많은 큰 인물을 알고 있는데, 내가 모르는 건가?’그러나 성연이 소지한과 목현수와 아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된 뒤에, 그래함을 아는 걸 기이하게 여기는 것도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오늘 저녁에 시간이 돼요?” 성연이 물었다.“돼, 걱정하지 마. 내가 준비할게.” 무진이 바로 대답했다.‘만약 정말 그 그래함이라면, 어쨌든 예의를 잃어서는 안 돼.’저녁.성연, 무진과 그래함이 식당에서 만났다.‘자료상으로는 그래함은 줄곧 미국에서 거주해왔어.’‘그가 국내에 왔지만 국내 음식에 익숙하
곧, 조씨 가문에서도 사람이 왔다.아마도 손씨 가문에서 알려주었을 것이다.조수경과 손민철 이 두 사람의 사소한 일이 없어도, 손씨 가문과 조씨 가문은 관계가 아주 좋았다.온 사람은 조수경의 부친이었다.조수경의 부친은 딸의 얼굴에 난 손바닥 자국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누가 조수경에게 이런 잘못을 저지르라고 했는가?조수경의 부친이 안금여를 향해 끊임없이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했다.“노마님, 노마님, 정말 죄송합니다. 모두 제가 엄하게 가르치지 못해서 수경이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제 딸을 엄하게 가르치지 못했으니 만약 처벌하신다면 제게 벌을 내려주세요.”“이번에 사고가 날 뻔한 사람이 우리 강씨 가문의 며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해. 만약 우리 강씨 가문의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어?” 안금여는 매서운 표정이었다.일찍이 조수경이 그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자신들은 여전히 조수경이 회사에서 배울 수 있게 기회를 주었다.그러나 조수경은 조금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네, 저희 잘못입니다. 수경이가 철이 없습니다. 노마님, 수경이의 나이가 어린 것을 봐서 용서해 주십시오.” 조수경의 부친은 끊임없이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그런 모습을 보자 안금여도 동정심이 들었다.‘자식의 잘못을 나이든 아버지가 짊어지게 해서는 안 돼.’‘하지만 반드시 조수경에게 오늘의 교훈을 기억하게 해야 해.’‘다행히도 성연이는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안금여는 평생 자책했을 것이다.“나는 용서하지만 내 손주며느리가 받은 놀라움은 누가 달래주겠어? 수경이에게 물어봐. 아직 어린 아가씨일 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독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조수경을 보자 안금여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수경이가 잠시 뭔가에 홀렸을 뿐입니다. 수경이도 정말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조수경의 부친이 얼른 해명했다.그리고 옆에 있는 조수경을 잡아당겼다.“수경아, 빨리 할머님에게 사과를 드려야지
쌍방이 대치하면서 얻은 결과는 비할 데 없이 실망스러웠다.그때 손민철의 집에서 사람이 왔다.바로 손민철의 친동생이었다.무진도 막지 않고 바로 들어오게 했다.손민철의 동생은 점잖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강 대표님, 형님을 훈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이 여자에 홀려서 본업에 힘쓰지 못했습니다.”“됐습니다. 당신네 손씨 가문에서 좀 더 엄하게 가르침을 주기 바랍니다.” 무진이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사실 이 일은 완전히 손민철의 잘못도 아니었다.그래서 무진도 손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인상을 쓸 생각은 없었다.“당연히 그래야지요. 저희 형님이 고집이 세셔서, 제가 오기 전에 아버지께서 형님에게 강 대표님에게 인사하라고 특별히 신신당부하셨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손민철의 동생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형이 강씨 가문에 끌려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강씨 가문 사람들은 아무도 오지 않으려 했다.아버지가 가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괜찮습니다.”무진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사람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먼저 하지도 않았다.손민철의 동생은 이를 악물었다.‘강무진이 대처하기 어렵다는 건 진작에 알았지만, 결국 이렇게 맞추기 어렵다니.’‘보아하니 오늘 뭔가 내놓지 않으면 강무진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어렵겠어.’손민철의 동생은 손민철을 노려보았다.‘온종일 일을 성사시키지는 못하고 오히려 망쳤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형님을 감싸야 해.’손민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손민철의 동생이 앞으로 나와서 무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강 대표님, 형님이 잘못하셨으니 저희 손씨 가문에서는 북성에 추진 중인 큰 프로젝트를 강 대표님에게 양보하려고 합니다. 강 대표님께서 가볍게 처벌해 주셔서 형님을 데려가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집에 돌아가면 저희 부친께서 반드시 잘 가르치실 겁니다.”‘이번에 손씨 가문은 바로 이 프로젝트로 북성에 발을 붙이려고 했어.’‘지금 이 프로젝트를 포기한 것은 그들이 북성
성연과 무진은 조수경에 대해서 할 말도 없었다.조수경을 바로 본가로 데리고 간 뒤, 조수경의 진짜 모습과 그 범법 행위들을 일일이 안금여에게 말해주었다.안금여는 그렇게 믿었던 조수경이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은 전혀 몰랐다.게다가 오랜 친구의 손녀라서 자신이 직접 받아들인 것이다.안금여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네 할머니도 속였니?” 조수경을 원망하면서 안금여가 말했다.‘뛰어난 줄 알았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우리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당신은 그래도 할머니의 오랜 친구라고 하면서 결국 그 소식도 몰랐군요.” 조수경은 안금여를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게다가 얼마나 사이가 좋다고 했어.’‘결국, 우리 할머니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지.’“너, 너, 돌아가신 네 할머니가 알면 얼마나 네가 부끄럽겠어!” 안금여는 바로 지팡이를 들고 조수경을 세게 때렸다.한바탕 맞은 조수경이 아픔을 참고 말했다.“때려봐요, 나이를 먹고도 이러고 있으니 죽지도 않는 늙은이야!”“너, 너...”회개할 줄 모르는 조수경의 모습을 보자 안금여는 한바탕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제 모든 게 명백해졌어.’‘조수경은 할머니를 내세우고 스스로 강씨 가문에 왔지.’‘단지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어.’‘저 아이의 목적은 무진이였어. 강씨 가문의 작은 사모님이 되는 거야.’안금여는 조씨 가문의 내력을 알고 있었다.예전에는 한동안 그곳에 있었던 적도 있다.‘가풍과 가정교육도 좋은데 어떻게 조수경 같은 아이가 나온 걸까?’“할머니, 이런 사람 때문에 화내지 마세요. 이런 사람은 할머니가 화를 내실 가치도 없어요.” 안금여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걸 본 성연이 서둘러 가서 안금여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면서 말했다.가슴을 치던 안금여가 조수경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어쩌다 너 같은 흉악한 사람을 강씨 가문에 들어오게 했을까?”“아쉽게도 나는 들어왔고, 멍청한 당신들은 아직도 내게 놀림을 당하고 있지요. 강씨
조수경이 어떻게 모든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더욱이 성연의 앞인데.‘송성연에게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겠어.’조수경은 성연에게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송성연, 너는 정말 뭐라도 된 줄 아는 거야? 내가 왜 너한테 말해야 돼? 시골에서 올라온 촌닭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말하는 거야? 운이 좀 좋아서 강씨 가문에 들어가더니, 정말 자기가 작은 사모님이라도 된 걸로 생각하는 거야?”성연은 차갑게 입술을 깨문 채 조수경을 보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보아하니 조수경은 내 뒷조사를 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으면 내 출신까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그날 못 알아봤다고 했지.’‘그것도 조수경이 거짓말을 한 거야!’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본 조수경은 계속 비웃으며 조롱했다.“너희 강씨 가문의 할머니는 아직도 그렇게 순진한 걸 보면 정말 바보 같은 늙은이야. 그리고 너희 고모는 사업에서는 여걸이라고 하지만, 줄곧 내 손에서 놀아났으니 사실은 더 멍청해. 강씨 가문 전체에 똑똑한 사람은 한 명도 없어!”조수경이 한 말을 들은 성연은 그야말로 화가 나서 온 몸이 떨렸다.성연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조수경, 네가 강씨 가문에 왔을 때 고모와 할머니 모두 박하게 대하지 않았어. 그런 말을 하다니 양심에 찔리지 않아아?”“양심? 호호호.” 조수경은 무슨 우스운 농담을 들은 듯이 크게 웃었다.“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내가 양심을 가져서 무슨 소용이 있어?” ‘아쉽게도 그렇게 많은 일들을 심혈을 기울여 계획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어.’‘강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속이기 쉬웠어.’‘모두 송성연 때문이야. 송성연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강씨 가문 사람들은 여전히 내 손바닥 위에 있지 않겠어?’“송성연, 송성연, 왜 돌아왔어? 왜 돌아와서 내 길을 막은 거야?” 차가운 표정으로 성연을 바라보는 조수경의 눈빛은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조수경은 이미 숨기지 않았다.“내가 너의 길을 막았어? 네가 내 자리를 빼앗은 게 아니라? 네가 분수에 맞
무진은 손민철이 줄곧 조수경을 대신해서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그들이 결국 함께 쇼핑도 했다는 건, 조수경이 말했던 그런 상황은 애초에 없었다는 걸 말해주고 있어.’‘지난번에 조수경은 또 손민철을 무서워했어.’무진은 보고 있으면서 상황이 아주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무진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물었다.“손씨 가문과 조씨 가문은 원한이 있지 않나요?”손민철은 의아한 표정으로 무진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성연이 제대로 보았다.‘이 모든 게 다 조수경의 거짓말이었어.’‘손씨 가문에 업신여김을 당해서 강씨 가문에 의탁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도 사실 모두 거짓이었어.’‘즉, 조수경은 결국 할머니까지 속인 거야.’‘할머니가 이전에는 정말 조수경을 좋아했다는 걸 알 수 있었어.’‘할머니가 조수경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조수경은 자신이 이렇게 판을 짜고 모든 사람을 속인 거야.’‘조수경이 어디가 단순하다는 거야. 그야말로 뱀이나 전갈과 별 차이가 없어.’성연은 바로 조수경에게 다가가서 뺨을 때렸다.“빨리 진실을 말해. 네 목적이 도대체 뭐야?”조수경은 얼굴을 가린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지금은 일이 모두 발각되어서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어.’‘나와 무진 씨 사이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어.’결국 조수경은 손민철에게 희망을 걸었다.그녀는 구조를 요청하는 것처럼 손민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민철 씨, 빨리 나를 도와줘. 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게 전혀 아니야. 저 사람들은 고의로 나를 해치려는 거야.”조수경의 목소리를 듣자 손민철의 마음은 심란했다.‘강무진은 큰 인물이야. 절대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지 않아. 오해해서 조수경을 데려오는 번거로운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어.’‘모든 일이 조수경을 향하고 있어.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니야.’손민철은 갑자기 좀 실망스러웠다.조수경과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지만, 자신은 거의 조수경에게 코가 꿰인 채 다닌 것이었다.이제서야 자신이 조수경을 조금도
어느 창고 안.무진과 성연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하들이 조수경과 손민철을 그들 앞에 데려왔다.“조수경, 조수경, 당신 심보는 정말 지독했어! 왜 나한테 약을 쓴 거야!”조수경을 보는 성연의 눈빛은 예리했다.‘같은 여자로서, 조수경은 이런 일이 한 여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알고 있었어.’‘그러나 조수경은 여전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내게 손을 댔어.’조수경의 추측대로였다.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은 역시 성연과 무진이었다.조수경은 무서워서 벌벌 떨며 눈물을 흘렸다.“성연 씨, 난 아니에요, 난 정말 아니에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이 결백하다는 걸 밝히고 싶었다.“아니라고? 조수경, 사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당신 거짓말이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성연은 냉소를 지었다.“나, 나는 무심코 그런 거예요. 내가 한 게 아니라 커피숍 종업원이 그랬어요. 나는 강요를 받고 그런 거예요.” 조수경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성연과 무진은 조수경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조수경 이 여자의 말은 모두 의문투성이야.‘아무런 원한도 없는 커피숍 종업원이 왜 내게 약을 먹였을까?’‘게다가 조수경은 현장에 있었어.‘저 여자야말로 가장 범행 동기가 있는 사람이야.’무진은 고개를 돌려 손민철에게 물었다.“저 여자는 다른 사람에게 사주를 받았다는데? 당신 아니야?”잡혀온 이후 지금까지 손민철은 줄곧 망연자실한 상태였다.조수경이 단지 자신을 이용했고,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또 강무진을 유혹하려고 했다는 걸 손민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손민철은 조수경에게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손민철이 입을 열었다.“이 일은 나와 상관없습니다.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조수경이 떠나려고 한다는 걸 알고서 데리고 갔을 뿐입니다.”“정말인가요?” 무진이 자세히 보니 손민철의 표정은 진실했고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그럼 지금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조수경밖에 없어.’“정말 확실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