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파리 같이 귀찮게 웽웽굴던 두 사람이 떠나자, 성연은 점심을 먹고 백화점으로 갔다.5성급 호텔 바로 옆이 북성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몰이었다. 몰 안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곳곳에 조화롭게 자리한 각종 매장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의류 매장에 들어간 성연은 눈에 들어오는 옷을 집어 들고 가격표도 보지 않은 채 바로 매장 직원에게 포장하게 했다. 쇼핑을 끝낸 성연은 호텔로 돌아와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원래 본바탕이 좋은 그녀는 옅은 화장으로 충분했다. 길게 뻗은 아이라인에 약간의 음영을, 맑고 선명한 눈에 약간의 색감만 더했을 뿐이다. 몸에 딱 붙는 반 슬릿 레드 스커트는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었다.호텔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탄 성연은 바로 킹스 클럽으로 향했다.성연이 클럽에 들어서자 즉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겼다.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바로 갔다. 비어 있는 좌석에 툭 걸터앉은 성연이 색이 예쁜 칵테일 한 잔을 주문했다.앉은 지 얼마돼지도 않아 다가와 말을 걸은 남자가 벌써 여러 명이었다.“아가씨, 혼자 왔어요?”와인색 슈트를 걸친 남자가 다가왔다. 왁스로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빗어 넘긴 남자는 자리에 선 채 일부러 손목에 찬 명품 비취시계를 슬쩍 드러냈다.삽시간에 시선을 아래로 내린 성연이 다시 따분하다는 듯이 시선을 들어올렸다.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의기양양한 기색이던 남자가 얼굴을 굳혔으나 곧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아가씨, 제가 안에 룸을 하나 빌렸는데, 안에 가서 한 잔 같이 마시지 않겠어요?”말하는 남자의 손이 성연의 손등으로 뻗어왔다.곧 ‘우드득'하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남자가 손을 가린 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사납게 성연을 쳐다보는 남자의 눈이 음흉하게 변했다.“내 눈에 띈 것 자체가 네 복이야. 이 몸의 호의를 무시해선 안되지!”성연이 슬쩍 올라간 입술에 검지를 갖다 세웠다. 이어서 손목을 슬슬 돌리
‘무슨 상황이지?’성연이 정신을 바짝 차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제일 먼저 몸이 반응하며 얼른 룸 반대편으로 피한 성연은 어둠을 빌려 몸을 숨겼다.성연은 룸에 바짝 몸을 붙여 귀를 갖다 대었다. 안쪽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운지, ‘쿵, 쾅’대는 소리가 함께 울려 나왔다.‘안에 있는 사람들이 분명 싸우는 소리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큰 소리를 내지 테니까.’그녀는 사태를 관망하면서 섣불리 안으로 뛰어들지 않았다.한참 지난 후, 인영 하나가 룸 안에서 뛰쳐나왔다. 눈을 가늘게 좁힌 성연이 집중해서 똑똑히 보니 뛰쳐나온 것은 혈귀였다.혈귀의 상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룸에서 복도까지 핏자국이 이어졌다. 룸에서 뛰쳐나온 그는 손을 가슴에 댄 채 비틀거리며 복도를 뛰어갔다.복도를 빠져나온 그는 주위를 경계하며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다친 몸을 이끌고 클럽의 뒷문으로 달아났다.클럽의 뒤쪽은 빈민가로, 너무 지저분해서 보통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오기 전, 이미 클럽과 주변의 지도를 살폈던 성연은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한 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해냈다.혈귀와는 반대 방향으로 길을 돌아간 성연이 혈귀가 지나갈 길목에서 기다렸다.클럽에서 점점 멀어지며 드디어 자신이 위기를 넘었다고 생각하는 혈귀였다.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 바로 앞에 선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빛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혈귀는 겨우 붉은 롱 스커트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아름다운 몸매와 곧게 뻗은 긴 다리가 어렴풋이 드러났다.몸매에서 엄청난 미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러나 혈귀에게는 미녀와 노닥거릴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그는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앞의 사람이 바로 조직 내에서 듣기만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마녀라는 걸 말이다.성연의 신분은 아주 특수했다. 그녀에 관한 자료는 모두 극비로 취급되었으며, 일반인은 볼 수 없었다.혈귀조차도 성연과 통화만 한 적 있을 뿐이었다.혈귀는 단
혈귀가 끌려간 후, 송성연은 수정구 양 사이드를 눌러 채찍을 거두어들이고, 재빨리 그곳을 떠났다.긴 채찍이 회수되자, 서릿발 같던 냉혹함도 서서히 그녀에게서 거둬졌다. 점차 나른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변모한 그녀는 걸음걸이조차 제멋대로였다.처마 밑에서 졸고 있는 어미 고양이처럼 온몸에서 나른한 기운을 풍겼다.골목을 나선 뒤, 성연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휙 주위를 한 번 훑었다. 의심스러운 인물이 없음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떠났다.앞서 그녀가 섰던 곳, 높이 솟은 신형 하나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방금 골목에서 있었던 일들은 빠짐없이 강무진의 눈에 담겼다.워낙 은신에 탁월한 그인 터라, 보통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그래서 한참을 구경꾼으로 현장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눈을 가늘게 좁힌 강무진의 검은 눈동자가 우아한 뒷모습을 주시했다.‘저 여자, 도대체 뭐지?’무척 드물게 한 여자에게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강무진이었다.그가 텅 빈 골목을 바라보고 있은 지 얼마 후,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강무진이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을 데리고 쫓아온 손건호가 숨을 헐떡이며 그의 뒤에 섰다.강무진의 모습을 아래위로 세심히 살피던 손건호는 그의 몸에 혈흔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물건은 손에 넣었나?” 강무진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손건호는 손에 들고 있던 은색 슈트케이스를 들어올려 강무진 앞에 흔들어 보였다.“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거래자가 달아나 버렸습니다!”거래자를 언급하며 손건호는 화가 나 이를 갈았다. 그렇게 교활한 놈인지 누가 알았겠는 가. 몇 초 한 눈 파는 동안에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강무진의 뇌리에는 자연히 붉은 스커트가 떠올랐다. 그의 음성이 왠지 좀 더 낮고 쉬어 있었다.“누군가 이미 끌고 갔어.”“제가 가서 그 놈을 꼭 찾아오겠습니다!”단호한 음성으로 말한 손건호의 몸은 이미 쫓아갈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강무진이 손을 들어 손짓을 하
강무진이 사진 속의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며, 적막한 그의 눈동자에 빛이 서렸다.“최대한 빨리 찾아서 데려와.” 강무진이 재촉의 기운이 다분한 어조로 지시했다.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고 느낀 무진은 이런 소소한 재미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손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보스, 밤이 너무 늦었습니다. 먼저 모셔다 드리고 돌아가겠습니다. 사람을 찾는 일은 아래 수하들이 바로 시작할 겁니다. 의사 선생님이 이미 댁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가볍게 턱을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한 강무진.뒤편의 작은 창고에서 휠체어를 밀고 온 손건호가 강무진을 부축해서 앉혔다. 그리고 두꺼운 담요로 무진의 다리를 덮은 후, 휠체어 채로 안아 올려 차에 태웠다.수천 번도 더 해 본 동작들은 모든 진행과정이 일사천리로 매끄러웠다.곧 무진의 거처에 도착했다.거실에는 이미 흰색 셔츠를 입은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반쯤 기른 머리는 목덜미 쪽에 작은 꽁지머리로 묶여 있었다. 꼬리가 살짝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썹 아래에는 길게 뻗은 도화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살짝 웃는 듯이 꼬리가 내려온 서글서글한 한 쌍의 눈이 자칫 사람을 빠져들게 한다.위로 약간 들려진 적당한 두께의 붉은 입술은 자웅을 겨루기 힘들 정도로 수려했다.금테 안경 아래의 두 눈동자에는 다정한 빛이 서려 있어 온화하고 점잖아 보였다.강무진의 오랜 친구이자, 강무진을 전담하는 정신과 의사, 진우현이었다.사실 그는 전적으로 강무진의 심리 상담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불면증을 앓아온 강무진을 위해 최면을 걸어 수면을 돕고, 또 수면의 질을 높여 주는 게 그가 담당한 역할이었다.인기척 소리에 고개를 돌린 진우현의 눈에 손건호가 강무진의 휠체어를 밀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또 일하고 왔어?” 진우현은 한 차례 기지개를 켠 후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었다.고개를 끄덕인 무진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휠체어에서 일어나며 진우현에게 말했다.“먼저 목욕부터 하고 올게.”이런 장면 또한 무수히 보았던 터라
“그럴 리가 없어!” 단호히 부정하는 우현의 매혹적인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믿을 수 없어.”애초 강씨 집안에서는 무진의 불면증을 치유하려고 전세계의 명의란 명의는 다 찾아서 치료를 받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향낭 하나 때문에 치유가 된단 말인가?마치 그를 놀리는 것 같았다?결국 꿈틀꿈틀 일어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우현이 확인해 볼 생각에 향낭을 가져오라고 손건호를 부추겼다.일년 내내 무진의 곁을 지키는 손건호는 그의 생활 습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한눈에 향낭의 위치를 찾아냈다.하지만 향낭을 손에 넣는 순간, 침대에 누워 있던 무진이 조용히 눈을 떴다.순정한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산했다. 왠지 정글에 숨어 있는 맹수를 연상시킨다. 언제든 달려들어 사냥감의 목을 문 채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놓지 않는 맹수를.무진의 눈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손건호와 진우현, 두 사람 모두 얼음 같은 냉기에 온몸이 관통 당하는 듯했다.얼이 빠진 바로 그 순간, 손건호가 손에 쥐었던 향낭이 단숨에 낚아 채여 다시 무진의 손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정신을 차린 손건호와 진우현은 방금 전 무진의 동작에 대경실색을 했다.우현이 침을 삼키며 즉시 해명했다.“그냥 한 번 살펴만 볼 생각이었어. 넌 방금…… 잠들었잖아?”불면증에 시달리는 무진은 늘 수면 부족으로 머리가 맑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면부족으로 두통을 달고 사는 그였다.정상적인 수면의 느낌을 경험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그런데 방금 막 깨어난 이 순간, 아주 드물게도 머리가 상쾌했다.살짝 고개를 끄덕인 무진이 곧 허락의 눈빛으로 우현을 응시했다.“네 의술이 발전한 것 같군.”무진의 말에 답답함을 느낀 우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자신의 의술이 무진의 오랜 고질병을 치료했다고 생각하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었다. 그런데 무진이 잠든 게 결코 자신의 공이 아니라는 말을 이미 들은 차였다.우현은 소매를 걷어붙였
다음 날 깨어난 강무진의 안색은 평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무진의 곁에 선 비서 손건호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해줬다.무진은 길고 늘씬한 몸을 곧게 세우고 뒷짐을 진 채 창 앞에 섰다. 그의 눈동자에 미미한 놀람이 담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향낭이 자신에게 효과 있다는 걸 그 역시 짐작하지 못한 듯했다.보고를 들은 강무진의 입에서 지체없이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군.”……지난 밤을 무척 바쁘게 보낸 성연은 호텔의 침대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다.쾅쾅쾅……. 지축을 흔드는 듯한 소리에 성연이 놀라 잠에서 깼다.이를 빠드득 갈며 솟구치는 화를 꾹 누른 채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었다.매섭게 치켜 뜬 성연의 눈에 냉기가 흘렀다. 송씨 집안 세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아니, 이게 시골 계집애 기운이야?’송씨 일가 세 사람을 본 성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고 섰다. 예의 그 나른한 자세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방금 전의 기세는 순전히 착각라는 듯이.“무슨 일?”문 앞에는 송종철과 임수정이 서 있었고, 두 사람 뒤에 숨듯이 선 송아연이 보였다.“네가 말한 대로 아연일 데려왔어.”송종철은 올라오는 화를 참으며 뒤에 서 있던 송아연을 앞으로 끌어당겼다.시선을 송아연에게 보낸 성연이 나른하게 쳐다보았다.앞으로 떠밀려 나온 송아연은 웃음기가 다분한 성연의 눈을 마주 대하는 순간, 다시 화가 나 노려보았다.송성연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자신이 저런 촌뜨기에게 사과해야 하다니, 이런 치욕이 없었다.송아연은 아무 말도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성연 역시 느긋이 편한 자세로 문 가에 기대어 서서 기다렸다.성질을 참지 못한 송종철이 송아연을 재촉했다.“아연아, 어서.”송아연이 도와 달란 듯이 임수정 쪽을 쳐다보았지만, 역시 못 본 척 슬쩍 고개를 돌리는 임수정이었다.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지자, 입술을 깨문 채 내키지 않는 듯 재빨리 말했다.“언니, 그땐 내가 철이 좀 없었어요.
이 가족의 비열한 속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성연이었다.방에 들어온 그녀는 문을 잠갔다.트렁크를 열고 미니 핀홀 카메라와 소형 녹음펜을 꺼냈다.한쪽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미니 웹캠을 설치하고, 또 다른 쪽 구석에 녹음펜을 두었다.아직 이 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다, 문밖에는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두 사람이 있으니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지금은 송씨 가족도 그녀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성연이 장비들을 다 설치하고 손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트렁크 안의 잡다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물건들을 모두 정리한 후에 보니, 자신의 향낭이 보이지 않았다.전신을 더듬어 보고 가방도 다시 한 번 검사해 보았지만, 향낭을 찾을 수 없었다.성연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외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들어 주신 향낭이었다.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사랑해 준 분이신 외할머니는, 그녀 마음에 단 하나 남은 순수였다.외할머니와 관련된 물건이니, 절대 버렸을 리가 없었다.‘몸에 차고 다니면서 지금까지 잘 가지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잃어버린 거지?’성연은 턱을 괴고 침대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며, 머릿속의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날 밤 마을에서 한 남자를 치료해 주었던 상황을 차례로 떠올려 보았다.‘분명 거기서 떨어트렸을 거야.’성연이 한숨을 내뱉고는 고운 눈썹을 오므렸다.‘어쩌다 떨어졌지?’향낭은 외할머니가 남겨준 유일한 증표 같은 것이라, 그녀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든 찾아야 해.’성연이 휴대전화를 꺼내 서한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뭇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어투였다.“물건을 잃어버렸어. 애들을 보내 마을의 폐창고를 뒤져봐. 찾거든 연락해.”“보스, 뭔 데 그렇게 급해요?” 성연의 말투에서 조급한 기색을 읽은 서한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말이 많다?” 성연이 무표정하게 말했다.그 즉
탕에는 기름이 둥둥 떠다니고, 접시에는 허연 고기 몇 점 걸려 있을 뿐이었다.성연은 위가 쓰려 왔다.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눈앞에서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북성의 명월각 요리가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가서 한 상 주문하면 얼마나 할까요?”성연의 수중에 돈이 없다고 믿고 있던 송종철은 성연의 말을 듣자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또 며칠 전 성연이 5성급 호텔에 묵으며 썼던 수백만 원을 그가 계산했던 게 생각났다.명월각 요리는 보통 당일 해외에서 공수해 온 고급 식자재에다 최상품의 술까지 더하면 기본이 수백만 원이었다.‘성연이 쟤가 진짜 가면 결국 또 내가 돈을 내야겠지?’임수정이 몇 백만 원을 써도 두고두고 속이 쓰리고 아팠는데, 하물며 수백만 원이라니!이 놈의 딸 송성연은 도대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생각하면 할수록 불쑥 화가 치밀어 올라 괜히 애꿎은 집사를 불러 호통을 쳤다.“뭣들 해? 아가씨 먹을 거 준비 안 하고?”괜히 자신에게 화풀이하고 있음을 잘 아는 집사는 목을 움츠린 채 별 다른 대꾸 없이 주방에 일러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지켜보던 성연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그리고 별 말없이 털털하니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로 모바일게임을 했다. 볼륨을 키워 성가시게 하는 세 사람의 음성을 차단시켜 버렸다.성연을 골탕 먹이려다 실패한 임수정과 송아연은 화가나 죽을 지경이었다.저 아래에서 증오심이 끓어오르고 가슴이 답답했다.다리를 꼬고 앉아 게임 삼매경에 빠진 성연을 보며 임수정이 비아냥거렸다.“너는 허구한 날 공부는 안 하니?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는 거야? 시간 있을 때, 아연이에게 좀 많이 배워라, 얘. 아연인 일전에 피아노 콩쿠르에서 2등 하고, 또 학교 성적도 학년 전체에서 10위권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뭐 시골에서 교육받고 자란 너한테 무슨 기대를 하겠니? 그래도 얼굴이 반반해서 다행이네. 아니면 시집도 못 갈 텐데 말이야.”송아연도 가슴을 내밀며 경멸스럽다는 듯
이 말에 모혜정도 완전히 멍해졌다.마침내 성연에 대한 공격을 멈춘 모혜정.머리부터 발끝까지 성연을 찬찬히 뜯어보았다.성연은 가장 전형적인 학생의 옷차림이다.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게다가 명품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강무진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북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강무진이 아닌가?‘송성연은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야. 어떻게 이런 여자가 강무진 마음에 들었지?’‘수많은 명문가 아가씨들이 온갖 수단을 다 썼지만 결국 강무진의 관심을 얻지 못했어.’‘그런데 이 계집애는 뭐가 그렇게 잘났다는 거야?’모혜정의 눈빛에 의심이 가득했다.성연이 솔직하게 말했다.“당신들 두 사람의 일은 나하고 상관없어요. 안 선생님, 두 분이 잘 얘기해 보세요.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여기에 멍청하게 있으면서 날조된 누명을 뒤집어쓸 이유가 없었다.성연이 나가는 걸 아무도 막지 않았다.뒤에서 안진검이 모혜정을 구슬리는 소리도 들려왔다.“오해라고 말했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나와 송성연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송성연 씨는 정말 강무진 씨의 약혼녀야.”성연이 식당 문을 나서자 모혜정이 비로소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저 여자가 진짜 강무진의 약혼녀라고? 당신 설마 나를 속이는 거 아니지? 내가 의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핑계를 대고 얼버무리려는 거 아니야?”모혜정은 강무진이 저런 촌티 나는 송성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모혜정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정말 확실해. 강무진의 이름은 모두 잘 알고 있는데, 내가 이런 일을 가지고 농담을 할 필요가 있겠어? 내가 아무리 허튼소리를 잘 한다 해도 강무진을 방패막이로 쓸 용기는 없어!”안진검은 입이 닳도록 말했다.모혜정이 잠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그래도 여전히 머뭇거리면서 말했다.“정말 확실해? 그 여자가 강무진의 약혼녀야?”“물론이지, 내 눈으로 직접 봤어.” 안진검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임을 강조했
성연의 얼굴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 떠올랐다.‘밥 잘 먹고 난 후에 내가 왜 여우가 된 거야?’안진검이 바로 화를 내며 여자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혜정아, 오해야!”모혜정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모든 남자들이 바람을 피울 때 오해라고 하며 도무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모혜정은 성연을 향해 화를 내며 비난을 퍼부었다.“보니까 나이도 어린 게 어떻게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만 하는 거야? 남의 남자가 이용하기 좋은 모양이지? 요새 애들은 정말 너무 난잡해.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성연은 사실 좀 멍해서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나 성연을 겁먹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모혜정은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모헤정이 계속 말했다.“나는 지금 안진검 씨의 정식 여자친구거든? 네가 이 사람 곁에 있다 하더라도 단지 첩일 뿐이야. 그런데 같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겠어?”성연은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느꼈다.게다가 자신과 안진검은 친밀한 동작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런 일을 똑똑히 조사하지도 않고 바로 쳐들어온다고?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어쩌려고, 사람을 너무 얕잡아 보는 거 아냐?’성연도 이 여자에게 많은 걸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말을 많이 해도 모헤정은 듣지 않을 것이다.성연은 차갑게 경고했다.“입 닥쳐요! 나는 안 선생님과 우연히 만났을 뿐이에요.”모혜정은 바로 조롱하듯이 말했다.“그냥 우연히 만났어? 하던 일을 인정할 용기는 없는 모양이네?”곧 다시 고개를 돌려 안진검을 향해 잔소리를 했다.“당신, 이런 여자에게 당신이 좋아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무슨 일이 생기니까 바로 발뺌을 하잖아. 나중에 당신을 속이고 돈만 쏙 빼 가면 그때 가서 믿을 거야?”성연은 더 이상 말할 힘도 없어서 안진검을 바라보았다.안진검 본인의 일은 본인이 처리하고 자신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뜻을 표시했다.‘게다가, 여우라니, 절대 좋아할 만한 별명이 아니잖아?’‘식당에 사람도 적지 않은데, 만약 소문이라도
안진검은 일부러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도 휘둥그레 떴다.그리고 미친 듯이 기뻐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흥분한 것처럼 굴었다.“정말이에요? 그럼 제가 강 대표와 교제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성연 씨가 제게 좀 소개해 줄 수 있습니까? 저는 정말 강 대표를 존경합니다. 제가 강 대표와 함께 나란히 사업을 토론할 수 있다면, 제 인생은 아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겁니다.”성연은 즉각 응답하지 않았다.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안진검의 인품이 괜찮다고 생각했다.두 번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그는 남을 돕고 있었다.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기회가 있을 거예요.”안진검은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뻤지만 아무래도 계속 자제했다.절로 눈웃음을 지으면서 웃는 표정이었다.성연도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진이 그렇게나 대단한 존재였다니.성연 자신도 속으로는 무진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느낌이 달랐다.“그럼 먼저 여기서 성연 씨에게 감사인사를 할게요. 그럼 성연 씨만 믿고 빨리 그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안진검은 환하게 웃는 표정이었다 성연이 소개해 줄 거라고 단정한 것 같았다.그 말은 심지어 성연의 마지막 퇴로마저 막았다.성연은 못 들은 척하면서 또 같은 말만 반복했다.“기회가 되면 소개해 드릴게요.”“그래요 성연 씨, 오늘처럼 좋은 날에 와인 한 잔 같이 안 하실래요? 와인은 도수가 낮아서 여성이 마시기에 괜찮아요.”안진검이 말하면서 곧 성연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성연은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술은 그냥 두시죠. 안 선생님, 저는 술 대신 차로 할게요.”말을 마치자 안진검은 자신에게 한 잔을 따른 뒤,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와인을 내려놓았다.“차를 드셔도 괜찮지만, 와인을 좀 마시면 확실히 기분이 업 되지요.”“이따가 운전도 해야 하니 술은 됐어요.” 성연은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연은 쉽게 외부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서, 안진검은 자신의 목적대로 진행했다.우선은 변죽을 울리며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성연씨, 옷차림은 소박한데 지난번에 몰던 차는 포르쉐더군요. 성연 씨는 과연 어느 명문가 출신인지 궁금하네요.”“언급할 가치도 없어요.” 뜻밖에도 안진검이 이처럼 자세하게 자신을 살폈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결코 안진검의 계획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게다가 성연 자신은 무슨 명문 가문 출신도 아니다.“그럴 리가요? 성연 씨, 너무 겸손하게 그러지 마세요.” 안진검은 믿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이미 성연의 신분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이 화제를 던졌을 뿐이다.“정말이에요, 전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내세울 만한 신분이 없으니 성연의 대답도 사실이다. 안진검이 이렇게 말해도 성연은 여전히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안진검은 속으로 송성연을 정말 다루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떠보듯이 물었다.“지난번에 이씨 가문 차남의 결혼식에서 성연 씨가 WS그룹의 강무진 씨와 함께 있는 걸 봤어요. 강 대표는 정말 큰 인물이지요. 나이는 젊지만 사업의 귀재로, 혼자 힘으로 WS그룹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죠. 제가 외국에 있을 때 강 대표의 명성을 들은 적이 있어요.”“제가 국내에 온 이유도 절반 정도는 강 대표의 영향이 있어요 언젠가 강 대표를 직접 만나 교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저는 강 대표를 정말 존경해요. 투자계에서 강 대표가 진행한 사업들은 모두 그야말로 교과서라고 부릴 정도예요.”강무진을 언급할 때 안무진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눈빛에 담긴 강무진에 대한 존경과 숭배의 기운은 진짜 같았다. 조금의 거짓도 없이.강무진의 약혼녀로서, 자신의 대단한 약혼자를 칭찬하는 말을 듣자 성연도 속으로 무척 기뻤다.지난번에 무진이 안진검을 꽤 높이 평가하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사업 방면에서 안진검의 이름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그런데 그런 사람이 무진을 끊임없이 칭찬한 것이다.이는 성연에게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안진검은 성연이 그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기색을 진즉 드러내고 있음을 알았다.‘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송성연 쪽에서 효과를 보기 위해 이 모든 걸 열심히 계획했는데.’‘그런데 송성연의 경계심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안진검은 미리 생각해 둔 말을 꺼냈다.“성연 씨, 지난번에 제게 커피를 사셨죠. 오늘 이렇게 공교롭게 만났으니 제가 밥을 살 게요. 제가 구시가지의 괜찮은 식당을 알고 있어요.”안진검은 계속 덧붙여 말했다.“그게 예의잖아요. 만약 성연 씨가 거절하시면 제 마음도 불편할 거예요.”원래 성연은 거절하려고 했다안진검과 함께 있을 때는 항상 미묘한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 그러나 이제 곧 유럽에 가니까 안진검과 만날 기회도 별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대충 응해 주면, 지난번 안진검이 도와준 걸 갚은 셈이 되겠지.’“그러죠, 안 선생님께 폐를 끼치겠네요.” 한참을 망설이던 성연이 승낙했다.“천만에요. 미인을 위해 봉사하는 건 제 영광이지요.”안진검이 길을 안내했다.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통해서 성연을 식당으로 데려갔다.식당은 2층에 있는데 장사가 아주 잘 되는 것 같았다.한 번 훑어보자 확실히 전통음식을 하는 식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보기에 음식은 꽤 괜찮은 것 같네.’룸 안에서 안진검이 먼저 메뉴를 성연에게 건네주었다.“성연 씨, 좋아하는 게 있는지 보시고 주문하세요”성연은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시켰다.안진검이 또 몇 가지를 추가한 뒤 메뉴판을 종업원에게 건넸다.잠시 후 음식이 나오자 성연이 맛을 보았다.갖가지 맛들이 아주 제대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안 선생님은 자주 이쪽으로 오세요? 어떻게 이런 곳을 다 아세요?” 성연은 자연스럽게 물었지만 사실 안진검을 떠보는 것이었다.지난번에 안진검은 자신에게 방금 해외에서 돌아왔다고 말했다.‘이 음식들은 모두 북성 토박이들의 음식이야.’‘안진검이 처음 왔다면 당연히 이런 곳을 알 수 없어.’‘만약 안다면, 안진검이 북성에 대해 잘
뜻밖에도 이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그러나 안진검의 행동이 좀 의외로 여겨지긴 했지만, 성연은 이 남자가 그래도 바른 기운을 가졌다고 생각했다.안진검은 성연을 보고 놀란 척했다.“성연 씨도 여기 있었어요?”성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안 선생님 정의감이 대단하시군요. 마치 매번 적시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도우시는 것 같네요.”지난번 자신을 도와 차를 수리했던 당시를 떠올린 것.‘보아하니, 안진검은 정말 남을 돕는 걸 즐기는 것 같아.’안진검이 웃으며 말했다.“대단한 일도 아닌 걸요.”사실 조금 전까지 벌어졌던 장면들 모두 안진검이 연출한 연극이었다.단지 성연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송성연의 신임을 얻기만 하면 자신은 심지어 강무진과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그때 강무진을 무너뜨릴 방법을 강구하면 일이 훨씬 간단해진다.이번에 의부 앞에 내세울만한 공을 세운다면, 안진검은 MS 가문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이번 일은 MS 가문에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무진에 대한 MS 가문의 원한은 뼈에 사무칠 정도다.특히 삼장로.강무진은 MS 가문이 A국에서 자리를 잡고 성장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다. 강무진을 제거하는 사람은 당연히 MS 가문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성연이 눈을 들어 안진검을 바라보았다.“안 선생님은 작은 일이라고 하시지만, 많은 사람들은 할 수 없을 거예요.”사람들 모두가 자신 있게 남을 도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것은 아니다.성연은 여전히 안진검의 이런 정신에 탄복했다.“도울 수 있다면 최대한 도와야지요. 언젠간 저도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을 테니까요.”안진검이 하는 말이 구구절절 진리다.자신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을런지 누가 알겠는가!선행을 하고 덕을 쌓으면 나중에 자신이 도움을 받을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성연은 안진검의 정신에 대해 정말 탄복했다.‘안 선생님의 말에 일리가 있어. 앞으로 나도 배워야 할 것 같아.’성연이 속으로 생각했다.“성연
다음 학기 곧 다가온 성연은 요 며칠 정말 바빴다.하루 종일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분주했다.또 국내에만 있는 것들을 준비했다. 예를 들면 귀한 한약 약재들, 그리고 집 생각 나고 그리워지는 맛있는 음식들.이런 맛들은 가정에만 존재한다.성연이 외국에서 먹고 싶지만 먹지 못할 때면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다.그러므로 이번에 모두 준비해 가서 미스 샤넬과 목현수를 만나면 두 사람에게도 좀 나누어 줘야지. 그들도 일상의 맛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지난번에 미스 샤넬이 왔을 때, 중화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성연은 똑 같이 좀 받기로 했다.때가 되면 짐을 부치는 곳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성연은 구시가지로 나갔다.북성이라는 곳에는 거의 모든 물건들이 가장 잘 갖추어 있다.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여기로 오면 된다.다른 곳에는 없는 것들이 있었다. 여기는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물건을 파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성연도 이곳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샀다.이때 성연은 길 모퉁이로 나오자마자 마스크를 쓴 남자 하나가 한 여자 애의 가방을 낚아채며 빼앗는 것을 보았다.날치기의 동작이 어찌나 빠른 지, 빼앗자마자 달아났다.성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백주 대낮에 감히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니!곧 정신을 차린 여자아이가 즉시 구조를 요청했다.“살려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제 가방 안에는 중요한 증명서가 많이 있어요. 잃어버리면 안 돼요.”소리치는 여자아이의 음성에 울음이 미미하게 섞여 있었다.성연이 손에 든 물건을 놓고 앞으로 나가 도와주려던 순간.한 남자가 뛰어나가더니 곧이어 날치기를 잡아 땅바닥으로 밀었다.무척 빠르고 정확한 동작으로 날치기에게서 여자아이의 가방을 되찾았다.그 남자가 일어나 달아나려던 날치기범을 다시 붙잡으려던 중에 날치기범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는 모습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작은 칼의 날이 햇빛 아래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게 섬뜩해 보였다.날치기범이 눈앞의 남자를 향해 경고했다.
안금여와 강운경은 마음을 정리했다. 오후, 무진이 회사에 출근한 시간에 성연을 고택으로 불렀다.“할머니,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으세요?” 성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할머니가 일 없으면 부르면 안 돼? 네가 한 번 생각해 보렴. 오랜만에 귀국했는데, 이 할머니를 보러 몇 번 왔었니?” 안금여는 일부러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성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귀국하자마자 비교적 많은 일이 생겼다. 또 공교롭게도 미스 샤넬과 목현수가 와서 성연이 그들과 함께 지내며 시간이 별로 없기도 했었다.그러고 보니 진짜 안금여의 말 그대로였다.성연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안금여에게 사과했다.“할머니, 죄송해요. 요즘 좀 바빴어요.”“네가 돌아온 후에 일이 많았다는 걸 알고 이 할머니도 너에게 강요하지 않았어. 다만, 사람이 늙으니 별 생각이 다 드는구나.” 안금여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안금여가 탄식하는 모습을 본 성연은 갑자기 마음이 언짢아졌다.성연이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왜 갑자기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세요? 지금은 괜찮으시잖아요? 마음을 편안하게 드시고 집에서 요양을 잘 하시면 돼요. 남은 일은 무진 씨에게 맡기시고, 걱정하지 마세요.”“말이야 그렇다만,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걱정거리가 없을 수가 있겠니? 괜히 이 할머니 위로할 필요 없다.” 안금여가 가볍게 웃었다.성연은 효심이 깊은 아이다. 오랫동안 집을 나갔다 들어왔지만, 지금까지 그들을 걱정시킨 적이 없다.“할머니,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 성연이 옆에서 위로했다.“하지만 할머니가 너를 부른 것은 진짜 중요한 일 때문이야.” 안금여가 성연을 바라보며 불현듯 진지하면서 다소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성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할머니, 무슨 일이신지 바로 말씀해 주세요.”“음, 그건 말이야, 이 할머니 생각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혹여 무슨 일이 생길지 어찌 알겠니. 그러니 네와 무진이가 우선 결혼부터 해놓으면 이 할머니가 안심이 좀 될 것
안금여가 한숨을 내쉬었다.“너와 성연이 모두 착한 아이들이야. 만약 정말 무슨 부득이한 상황이 닥치면, 이 할머니는 너희들이 좋게 헤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니 그러지 마, 무진아.”“할머니, 말씀하신 그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무진은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안금여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강운경이 옆에서 말렸다.“엄마, 우리도 잘 알고 있잖아요. 엄마가 성연이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하시는지요. 하지만 무진이와 성연이 서로 감정이 깊어요. 둘 다 사리가 분명한 애들이에요. 무진이 우리를 찾아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건 기쁜 일이잖아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안금여의 말은 두 사람을 위한 것이 맞다. 불길한 말은 두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잠시 멍하니 있던 안금여가 입을 열었다.“성연이에 대해서는 네 말이 맞다. 우리 집 무진이가 마침내 일생을 함께 할 사람을 찾다니, 이 할머니가 당연히 기뻐해야지. 모두 이 할머니 잘못이다, 요 방정맞은 입 같으니라구.”무진이 얼른 말했다.“할머니, 할머니 탓하지 마세요. 모두 저와 성연일 위해서 하신 말씀이시잖아요?”“그렇네, 얼른 무진과 성연이 결혼식을 예약해야지. 성연이가 외국에서 나쁜 마음을 품은 놈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말이다!” 강운경은 성연의 성격을 안다.겉으로 보기에는 성격이 강하고 털털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아이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조그만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간다면...‘정말 무진이 죽으려고 하겠네.’“그래, 근데 성연이 나이가 한참 어린데, 그렇게 하겠다고 해?” 강운경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두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계획을 다 세웠다.그러나 성연이 그러겠다고 할지는 아직 미지수.“성연이는 분명히 그러겠다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성연이 곧 개학할 텐데, 성연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그러면 성연이 공부하러 가는 것을 막는 양상이 된다.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사실, 불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