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족의 비열한 속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성연이었다.방에 들어온 그녀는 문을 잠갔다.트렁크를 열고 미니 핀홀 카메라와 소형 녹음펜을 꺼냈다.한쪽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미니 웹캠을 설치하고, 또 다른 쪽 구석에 녹음펜을 두었다.아직 이 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다, 문밖에는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두 사람이 있으니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지금은 송씨 가족도 그녀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성연이 장비들을 다 설치하고 손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트렁크 안의 잡다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물건들을 모두 정리한 후에 보니, 자신의 향낭이 보이지 않았다.전신을 더듬어 보고 가방도 다시 한 번 검사해 보았지만, 향낭을 찾을 수 없었다.성연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외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들어 주신 향낭이었다.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사랑해 준 분이신 외할머니는, 그녀 마음에 단 하나 남은 순수였다.외할머니와 관련된 물건이니, 절대 버렸을 리가 없었다.‘몸에 차고 다니면서 지금까지 잘 가지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잃어버린 거지?’성연은 턱을 괴고 침대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며, 머릿속의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날 밤 마을에서 한 남자를 치료해 주었던 상황을 차례로 떠올려 보았다.‘분명 거기서 떨어트렸을 거야.’성연이 한숨을 내뱉고는 고운 눈썹을 오므렸다.‘어쩌다 떨어졌지?’향낭은 외할머니가 남겨준 유일한 증표 같은 것이라, 그녀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든 찾아야 해.’성연이 휴대전화를 꺼내 서한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뭇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어투였다.“물건을 잃어버렸어. 애들을 보내 마을의 폐창고를 뒤져봐. 찾거든 연락해.”“보스, 뭔 데 그렇게 급해요?” 성연의 말투에서 조급한 기색을 읽은 서한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말이 많다?” 성연이 무표정하게 말했다.그 즉
탕에는 기름이 둥둥 떠다니고, 접시에는 허연 고기 몇 점 걸려 있을 뿐이었다.성연은 위가 쓰려 왔다.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눈앞에서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북성의 명월각 요리가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가서 한 상 주문하면 얼마나 할까요?”성연의 수중에 돈이 없다고 믿고 있던 송종철은 성연의 말을 듣자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또 며칠 전 성연이 5성급 호텔에 묵으며 썼던 수백만 원을 그가 계산했던 게 생각났다.명월각 요리는 보통 당일 해외에서 공수해 온 고급 식자재에다 최상품의 술까지 더하면 기본이 수백만 원이었다.‘성연이 쟤가 진짜 가면 결국 또 내가 돈을 내야겠지?’임수정이 몇 백만 원을 써도 두고두고 속이 쓰리고 아팠는데, 하물며 수백만 원이라니!이 놈의 딸 송성연은 도대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생각하면 할수록 불쑥 화가 치밀어 올라 괜히 애꿎은 집사를 불러 호통을 쳤다.“뭣들 해? 아가씨 먹을 거 준비 안 하고?”괜히 자신에게 화풀이하고 있음을 잘 아는 집사는 목을 움츠린 채 별 다른 대꾸 없이 주방에 일러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지켜보던 성연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그리고 별 말없이 털털하니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로 모바일게임을 했다. 볼륨을 키워 성가시게 하는 세 사람의 음성을 차단시켜 버렸다.성연을 골탕 먹이려다 실패한 임수정과 송아연은 화가나 죽을 지경이었다.저 아래에서 증오심이 끓어오르고 가슴이 답답했다.다리를 꼬고 앉아 게임 삼매경에 빠진 성연을 보며 임수정이 비아냥거렸다.“너는 허구한 날 공부는 안 하니?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는 거야? 시간 있을 때, 아연이에게 좀 많이 배워라, 얘. 아연인 일전에 피아노 콩쿠르에서 2등 하고, 또 학교 성적도 학년 전체에서 10위권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뭐 시골에서 교육받고 자란 너한테 무슨 기대를 하겠니? 그래도 얼굴이 반반해서 다행이네. 아니면 시집도 못 갈 텐데 말이야.”송아연도 가슴을 내밀며 경멸스럽다는 듯
평소 귀가 밝던 성연은 그날, 임수정과 송종철이 하는 대화를 모두 들었다. 겨우 한두 마디 들었을 뿐인데도 그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날 이용하겠단 말이지? 오히려 고마운 일인걸!’성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북성에 왔으니 전학수속을 빨리 했으면 좋겠어요.”순간 송종철의 안색이 굳어졌다. “알아보는 중이야.”그는 성연이 다시 학교문제로 따지고 들까 봐 재빨리 말했다. “북성에서는 학교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아. 학교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사실 그는 성연을 입학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강씨 집안으로 보낸 후 돈을 받게 되면, 그 이후의 일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었다.‘강씨 집안에서 얼마나 버틸지는 순전히 자기 운이지, 뭐.’지금은 성연에게 돈을 적게 쓰는 것이 곧 돈을 버는 것이었다. 성연은 소파에 기대앉아 실눈을 뜬 채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사립학교 같은 경우에는 그냥 돈 내고 입학시험만 치르면 되는 거 아니에요?”그 말을 들은 임수정은 입에 넣었던 과일을 도로 뱉어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넌 사립학교의 일 년 학비가 얼마나 비싼지 알기나 하니?”그녀는 휴지를 꺼내 손을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우리가 그만한 돈이 있다고 해도, 네 성적으로 들어갈 수나 있는 줄 알아?”성연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다 멈추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흘겨보았다.“제 성적은 어떻게 아세요?”임수정은 냉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학년 내내 꼴찌인데 당연한 거 아니니?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마. 창피하니까.”실은, 성연의 IQ 지수는 상위 1%였다. 하지만 그녀가 성적이 좋지 않은 이유는 시험문제가 너무 쉽고 간단해서 도무지 도전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귀찮아서 시험을 안 친 것뿐인데, 꼴찌는 무슨?’하지만 이런 얘기를 저들에게 할 필요는 없었다.성연은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괜찮아요. 저 혼자 가도 돼요. 돈이나 내주세요
휠체어에 앉은 강무진의 흰 셔츠 아래로 근육이 선명한 팔이 드러나 있었다.무진은 할머니의 얘기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는 듯,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할머니가 건네준 서류에 손만 올린 채 한참이 지나도 펼쳐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안금여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그를 다그쳤다.“시간만 보내면서 이 꼴로 살면 대체 어쩌라는 거니?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이 할머니에게 증손주도 안겨주지 않을 작정인 거야?”무진은 시선을 돌려 할머니를 쳐다보며 늘 그랬듯 냉랭하게 말했다.“손자가 저 하나는 아니잖아요. 증손주는 다른 손자들이 많이 안겨드릴 겁니다.”‘천하의 안금여가 이리 못난 소리를 하는 손자를 어떻게 내버려 둬?’화가 난 안금여는 씩씩대며 호통을 쳤다.“네가 내 장손이고, 후계자야. 그러니 당연히 네가 증손주를 안겨줘야지. 안 그러면 내가 죽어서 먼저 간 네 할아버지를 어떻게 보겠니? 또, 강씨 가문 조상들은 어찌 뵙고!”하지만, 무진이 여전히 서류를 볼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직접 그것을 펼쳐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무진아, 이 할머니 얼굴 봐서 한 번만! 딱 한 번만 만나봐!”그러자 그는 아예 눈을 감고는 딴청을 피웠다.손금여가 첫 장을 넘기자. 소녀의 사진이 보였다.무진의 비서인 손건호가 뜻하지 않게 그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투명인간처럼 무진의 곁을 지키며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며 사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여자애였다!그는 허리를 굽혀 강무진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보스, 보세요. 그 여자애입니다…….”무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사진 속의 그녀는 그가 손건호를 시켜 찾았던 바로 그 여자아이였다!이번엔 또 다른 사진이 보였다.흰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미소는 상큼했고 자태는 우아했다. 알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그는 눈빛이 진지해지며, 서서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안
안금여는 무진의 대답을 듣는 순간, 온몸에 희열을 느끼며 조금 전까지 했던 근심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난 바로 가서 준비해야겠다. 이 아가씨를 아주 예쁘게 단장해서 네 앞에 데려와야지.”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흔들며 방을 나갔다. 마치 무진이 딴소리라도 할까 봐 겁이라도 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비서 손건호는 자기 보스가 이런 결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에 깜짝 놀랐다.‘정말, 보스가 결혼한다고? 그것도 사진 속의 여자아이와?”‘어려 보이지만, 그간의 행적으로 봐서 보통이 아닌 게 분명해.’……안금여는 애당초 두 가지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했다. 손자 무진이 결혼을 받아들이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상상하며 그에 맞는 대처법을 생각했으나, 결혼하겠다고 하니 송종철에게 연락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강씨 집안은 성연을 마음에 들어 하며 만족스럽게 생각했다.안금여의 연락을 받은 송종철은 너무 기뻐 소리를 지를 뻔했다. 송성연이 집에 온 이후로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드디어 송성연을 시집보낼 수 있게 됐다!이제 남은 일은, 성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속여서 강씨 집안에 보내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다음날, 성연은 학교에 가서 모의고사 시험을 봤다.송종철은 전에 없이 다정하게 힘내라는 응원의 말까지 했다. 정작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성연은 그를 흘깃 한 번 쳐다본 후, 그대로 지나쳐 차에 올랐다.그 모습을 본 송종철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그녀가 곧 이 집에서 사라질 거라는 생각에 애써 화를 눌러 참았다. 얼마 후, 검은 벤츠가 속도를 서서히 줄이며 멈추어 섰다.입구에 ‘북성남고’라고 쓰인 글자가 보였다.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금빛 간판은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북성남고는 북성에서 이름난 명문 학교로, 재벌 자제들이 다니는 최고의 귀족학교였다.어떻게 해서라도 상류사회에 속하고 싶은 중산층 사람들은 무리해서라도 자기 자식을 이 곳에 보
이번에 성연이 본 시험은 북성남고의 다음 월말고사 시험문제였다.명문 학교 선생님들이 출제한 것 중 중점 문제만 모은 것으로, 난이도가 높았다.그런 시험을 만점 맞은 성연이 입학하게 되면, 북성남고는 성적이 우수한 영재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그녀가 북성남고에 다니는 동안 학교에 크나큰 영예를 가져다줄 지도 모른다.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유별나게 친절한 시험 감독은 직접 그녀의 입학 절차를 도와줬을 뿐만 아니라, 학교 소개도 해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입학 절차는 아주 빨리 마무리되었다.집에 돌아온 송아연은 분통을 터뜨리며 송종철과 임수정에게 송성연이 만점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뜻밖의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멍한 얼굴이었다.특히 송종철은 마치 그녀를 처음 보는 것처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성연은 거실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가방 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녀의 휴대전화에는 두 가지 벨 소리가 저장되어 있다. 그중 조직에서 걸려 오는 전화는 특별한 벨 소리가 울렸는데, 그녀는 그런 전화는 늘 먼저 받았다.성연은 습관적으로 문을 잠그고 전화를 받았다.“보스, 혈귀가 아수라문에 들어왔다가 달아나 버렸습니다. 출구 쪽에 내통한 놈이 있었습니다.”평소 건들거리던 말투는 완전히 사라진 채, 서한기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성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온몸에서 얼음장 같은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요즘 내가 아수라문에 가질 않았더니 난리네. 너희들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할 거야? 너희가 못 찾으면 내가 나서야 하는데, 그때까지 안 잡고 내버려 둘 거야?”서한기는 코만 만지작거리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혈귀를 지키던 부하에게는 이미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흥!” 성연이 코웃음을 쳤다.서한기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눈 딱 감고 말했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도둑맞았습니다. 혈귀, 그 개자식이 달아나면서 시스템도 가져가 버렸습니다. 누군가에게 팔려고 했던 모
성연은 전화를 끊고도 한참 후에야 비로소 마음속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송종철은 어떻게든 그녀를 강씨 집안으로 시집을 보내려 했고, 그녀는 결혼을 깨 버릴 방법을 궁리 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면서 말이야.’강씨 집안은 사실 상대하기 까다로운 곳으로 백 년의 전통을 지닌 가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 집안이 그저 북성 최고의 갑부라고만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세계 최고의 갑부였다. 강씨 가문 재산의 90% 이상이 지하에 숨겨져 있어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들리는 말로는, 강씨 집안의 젊은 세대 중에 아주 유능한 키 맨이 있다고 한다. 업종을 망라하며 손 대지 않는 것이 없을 만큼 실세인 데다, 그의 영향력은 하늘을 찌를 정도라고.하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성연이 세운 ‘아수라문'의 정보팀에서도 그를 조사했었다. 하지만 이미 알려진 사실 외에는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이제, 그녀가 진상 파악을 위해 직접 강씨 집안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강씨 집안이 호랑이 소굴이라 해도 반드시 들어가야 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성연은 송종철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사실, 그는 성연을 속일 핑계가 생각나지 않아 답답하던 참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임수정이 과일 한 접시를 들고 성연의 방으로 갔다.침대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던 성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임수정을 바라보다 다시 휴대전화를 봤다.임수정은 이를 악물었다. 예의 없고 무시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분노가 솟아올랐다.‘자기가 정말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분수도 모르고 말이야.’하지만 임수정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성연아, 여기서 지내는 게 좀 불편해 보이는구나. 환경을 좀 바꿔 보는 건 어떻겠니?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곳이야. 귀족 자제들이 살
성연과 송종철이 도착한 곳은 북성의 유명한 고급 빌리지였다.이 빌리지는 값비싼 땅 위에 지은 곳으로, 직위가 높은 정치인이나 재벌 일가가 주로 살았으며, 일반인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엠파이어 하우스]성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입구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 명필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힘차고 기세가 웅장한 글씨체는 사람들을 압도할 만했다. 송종철도 뒤따라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는 듯, 차 문은 그대로 열어 둔 채였다. 그는 하나의 절차라도 되는 양 형식적으로 당부하는 말을 건넸다.“성연아,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 이곳은 우리 집보다 백 배는 더 나은 곳이야. 네가 여기서 살 생각을 하니 나도 마음이 놓인다.”그는 말을 마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성연의 마음이 어떤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송종철이 이곳에 도착할 때부터 다시 떠날 때까지는 채 2분도 안 걸렸다. 마치, 귀찮은 일을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마음이 놓인다고?’성연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그가 마음이 놓이는 이유는 아마도 번거로운 일을 해결해 버린 데에서 느끼는 안도감일 것이었다. 엠파이어 하우스의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성연은 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잠시 자리에 서서 건물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엠파이어 하우스는 매우 인상 깊은 곳이었다. 정교하게 지어진 건물마다 값나가는 침향나무로 만들어진 긴 회랑이 있었다. 그곳에 서니 은은한 나무 향이 났다. 긴 화랑의 한쪽 끝에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 아래에는 연꽃이 심겨 있었고, 비단잉어 홍백이 바닥이 보이는 맑은 연못에서 보일 듯 말듯 헤엄쳐 다녔다.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찬 전형적인 정원식 건축물은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그때, 검은 제복을 입은 집사가 그녀를 마중 나왔다.거실에 들어서자 곳곳에 놓인 값진 골동품과 명화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웬만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던 성연에게도 강
이튿날 오후, 가게문을 닫은 뒤 유채연은 성연의 안내로 그래함을 만났다.이번에는 유채연의 수줍은 성격을 고려해서, 밀크티 가게가 아니라 칸막이가 있는 식당을 골랐다.엉성한 칸막이지만 그래도 모두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우아한 분위기가 넘치는 잘생긴 그래함을 보자, 유채연의 얼굴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유채연이 그래함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없었다면 그 옥노리개도 간직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채연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래함이 유채연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나는, 다 괜찮아.” 유채연은 그래함을 똑바로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래함은 이렇게 멋스러운데, 나는 진흙밭의 진흙일 뿐이야.’요 몇 년 동안 유채연은 전혀 자신을 꾸미지도 않았다.날마다 그럭저럭 지냈을 뿐이다.지금은 그래함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도 없었다.‘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래함에게 어울릴 수 있겠어?’그래함이 종업원을 불러서 가정식 요리를 몇 개 시켰다.모두 유채연이 좋아하는 음식들이다.그래함이 시키는 요리 이름을 들으면서, 유채연은 놀라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 당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그래함이 유채연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걸 내가 어떻게 기억하지 못하겠어?”“당신...”그래함이 자상하게 대할수록 유채연은 더 열등감을 느꼈다.‘나한테 무슨 덕과 능력이 있어서 이런 사람에게 어울리겠어?’“애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음식부터 먹자.” 그래함의 마음은 더 긴장하면서 안절부절 못했다.이번에 또다시 거절 대답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성연은 턱을 괸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유채연은 그다지 먹고 싶은 것 같지 않았다. 그래함은 수시로 유채연에게 음식을 집어 줬지만, 식사하는 내내 유채연을 쳐다보느라 음식도 그다지 먹지 않았다.안타까움이 가득한 식사였다.가까스로 식사를 마친 뒤, 그래함은 종업원에게 앞의 음식을 치우고 주스와 과일을 내오도록 했다.그래함이 유채
“나도 모르겠어.” 유채연은 고개를 저었다.이 옥노리개를 보고 유채연은 큰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그러나 여전히 모든 걸 맡길 용기를 내지 못했다.“언니,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 언니가 사형을 믿지 않는다면, 먼저 사형을 좀 지켜보다가 적당할 때 다시 승낙하면 돼요.” 성연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유채연을 너무 팽팽하게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언니의 마음속에 열등감이 있기 때문에 천천히 진행할 수밖에 없어.’“하지만...”유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별거 아니에요, 이건 언니하고 사형 두 사람의 일이잖아요.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겠지만, 그래도 사형을 한번 만나보세요.” 성연은 입이 닳도록 말하면서 언제 유채연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느꼈다.합쳐진 옥노리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채연이 마침내 용기를 냈다.“알았어. 그래함과 얘기해 볼게.”유채연도 그래함이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말만 하는 거니까 별거 아니야.’마침내 이 말을 듣자 성연은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드디어 유채연을 설득한 것이다.“그래요. 언니에게 기회를 주고 그래함 사형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지만 그래도 고려해 봐야겠지요.” 성연은 드디어 해냈다고 생각했다.‘오늘 헛걸음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야.’“고마워.” 유채연은 손에 든 옥노리개를 꼭 쥐었다.‘만약 성연이가 내게 그렇게 많이 권하지 않았다면.’‘아마 그래함을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하지만 이렇게 비참해진 나한테 더이상 비참한 일은 없을 거야.’‘그러니 나도 한번 노력해보겠어.’“언니, 자신의 마음을 존중하고 선택하면 좋겠어요.” ‘채연 언니가 사형에게 아무런 느낌도 없는 건 아니야.’“그럴게.” 유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유채연이 성연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성연은 그래함 때문에 사양했다.유채연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호텔로 돌아온 성연이 문을 열자, 그래함이 옆방에서 걸어 나왔다.‘사형이 계속 이쪽의
성연이 보니 이제 때가 된 듯했다.그래서 유채연에게 그래함 얘기를 꺼냈다.“채연 언니, 사형이 이번에 돌아온 건 바로 언니 때문이에요. 사형은 바로 언니를 찾으려고 온 거죠. 사형이 언니한테 어떻게 너에게 대하는지 언니도 봤을 거예요. 사형은 정말 언니를 좋아해서 언니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언니도 앞으로 결혼하겠죠, 그렇죠? 그런데 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아요?”성연이 한 말도 일리가 있지만 유채연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그동안 자신의 모든 것이 소멸되다시피 했다.유채연에게는 전혀 그런 자신감이 없었다.유채연이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래함에게 어울리지 않아.”말을 마친 유채연이 또 눈물을 흘렸다.그래함의 찾아와서 유채연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그러나 유채연은 자신과 그래함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다.자신은 이미 감히 그래함을 원할 수 없었다.성연은 유채연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감정의 일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어.’‘좋아하는데 그냥 함께 하면 돼잖아.’‘게다가 두 사람은 너무 많은 걱정을 하고 있어.’‘하지만 지금 채연 언니에게는 사형의 신분이 큰 문제야.’성연도 이해할 수 있었다.‘미래가 정말 너무 막막할 거야.’성연이 갑자기 반쪽짜리 옥노리개를 꺼냈다.옥노리개를 본 유채연은 깜짝 놀라면서 뭔가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이 옥노리개를 뜻밖에도 그래함이 여전히 가지고 있었어.’성연이 옆에서 말했다.“그래함 사형은 줄곧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여자친구도 없이 줄곧 언니를 기다린 거예요.”유채연이 목에 차고 있던 다른 반쪽의 옥노리개를 이어 붙이자, 완전한 옥노리개가 되었다.흥분한 유채연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나는 원래 그리움에 이 옥노리개를 남겨 두었을 뿐이야.’‘그동안 그래함도 나와 같은 생각일 줄은 전혀 몰랐어.’“그동안 그래함에게 정말 여자 친구가 하나도 없었어?” 유채연
저녁 무렵에 성연이 다시 왔다.두 사람이 이번에 온 목적이 유채연을 데려가는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그래함도 오고 싶었지만, 유채연의 감정이 너무 격해질까 봐 성연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메로나 두 개요.” 카운터 앞으로 바로 간 성연이 유채연을 향해 말했다.성연의 출현에 유채연의 마음도 흔들렸다.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동요하는 모습을 본 성연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유채연은 말없이 묵묵히 냉장고에서 메로나 두 개를 꺼냈다.“여기 있어. 돈은 필요 없어.”성연은 미소를 지었다. ‘채연 언니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언니 마음은 항상 착해.’성연도 계산을 하지 않고 포장을 뜯고 먹으면서 나머지 한 개는 유채연에게 주었다.“채연 언니, 여기요.”성연이 자신에게 줄 줄은 몰랐기에 유채연은 놀라서 성연을 바라보았다. 성연이 웃으면서 말했다.“예전에 언니도 우리에게 하드를 많이 사줬잖아요.”유채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과거의 기억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사람이든 일이든 다 똑같아.’유채연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성연이 주는 하드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성연이 고개를 돌려 유채연을 보면서 감탄했다.“채연 언니, 언니는 이전보다 더 예뻐졌어요.”‘채연 언니는 정말 예뻐.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도 여전히 부드럽고 아름다워.’‘이전과 달리 언니의 미모가 세월 속에 쌓였어.’유채연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이렇게 거친 얼굴이 어디가 예쁘겠어.”‘내가 좀 더 나은 모습이라면 그래함과 함께 할 용기가 있을 텐데.’‘그러나 세상 일은 종종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피부 관리만 잘하면 돼요. 화장만 하면 천상의 선녀보다 더 예뻐요.” 성연은 유채연의 바로 옆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때때로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 오거나 손님이 많은데 유채연이 바쁠 때면, 성연도 옆에서 도와주었
이때 산책하고 돌아오던 외삼촌이 성연을 보고는 불만을 표시했다.“걔가 원하지 않으면 그만둘 것이지, 왜 또 강요하는 거야? 나는 성질 좋은 사람이 아니야. 채연이를 괴롭히지 마.”외삼촌의 말을 들은 성연은 유채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성연도 중재자일 뿐이기에 유채연을 대신해서 결정할 수는 없었다.지금 유채연의 외삼촌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가 더 불편했기에, 돌아가서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성연이 나간 뒤 외삼촌을 보면서 유채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그 자리에 선 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더없이 가슴 아프게 했다.유채연의 이런 모습을 본 외삼촌은 크게 화를 냈다.바로 유채연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쳤다.“너 왜 그래? 아까 그 남자가 바로 네 사진 속에 있던 걔가 맞지? 그 사진을 몇 년이나 보고 있었는데, 그 남자를 좋아하는 거지? 그럼 나가. 이 작은 가게는 나 혼자서도 관리할 수 있어.”예쁘고 부지런한 유채연이 요 몇 년 동안 일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유채연에게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채연은 응하지 않았다.맞선을 볼 때마다 유채연은 자기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언젠가 문을 잠그는 걸 깜빡했을 때, 외삼촌이 무심코 유채연의 손에 든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유채연은 마치 보물을 대하듯이 사진을 보고 있었다.그때 외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 사람이 정말 나타났는데 조건도 아주 좋아 보여.’‘채연이가 그 남자와 함께 한다면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거야.’외삼촌의 말에 유채연은 순간 멍해졌다.유채연은 자신이 나간다고 하면 외삼촌이 제일 먼저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자신이 떠나면 외삼촌을 챙겨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유채연의 눈에 외삼촌은 줄곧 나쁜 사람의 모습이었다.하지만 그래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외삼촌이 자신을 돌보고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다.‘외삼촌이 가끔씩 말을 거칠게 해도 속마음은 부드러워.’
다음 날 아침 일찍 성연이 왔다.성연은 바로 가게에서 유채연과 이야기하고 싶었다.“채연 언니.”어제 두 사람에 대한 유채연의 태도는 좋았다.그러나 오늘 유채연은 냉담하게 거부하는 모습이었다.성연을 보고 정색을 하면서 미소도 전혀 짓지 않았다.“성연아, 물건을 사지 않으면 나가. 우리 가게는 작으니까 여기에 있지 마.” 축객령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그런 유채연을 보면서 성연은 단지 가슴이 아팠을 뿐이다.‘두 사람에게는 분명히 좋은 미래가 있어.’‘그러나 채연 언니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해.’“채연 언니, 언니하고 그래함 사형 사이에 분명히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이 잘 이야기하면 오해도 잘 해결될 거예요.” 성연도 두 사람이 잘 지내면서 행복하게 함께 있기를 바랐다.하지만 매번 뜻대로 되지 않았다.“우리 사이에 무슨 이야기할 만한 게 있겠어. 나를 찾아온 거라면 돌아가. 만약 나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면, 여기서 즐기면서 나한테는 더 이상 오지 마.”이렇게 말하면서, 유채연은 마음속으로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그러나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돼.’‘그래함과 성연만 여기서 나가면 돼.’‘이렇게 하면 나도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지 않을 거야.’‘예전의 꿈만 기억하면 돼.’‘나는 다시 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어.’“언니, 언니는 지금 사형에게 정말 아무런 느낌도 없어요?” 성연은 유채연이 그래함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걸 믿지 않았다. 유채연의 눈빛이 반짝거렸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성연은 아직 희망이 있다고 느꼈다.더욱 분발해서 열심히 권유했다.“채연 언니, 언니의 생각이 어떤 지를 떠나서 나는 단지 언니가 사형하고 잘 얘기하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함께 해결하기를 바랄 뿐이에요.”유채연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자신과 맺어질 수 없는 그 사람을 지나치게 원하지 않기 위해서, 아예 생각을 끊으려는 것이다.“나는 여기에 남아서 가게를 봐야 해. 성연아, 네
외삼촌에게 밥을 차려준 뒤 유채연은 혼자 가게를 지켰다.손님에게 물건을 가져다주면서.오늘 밤, 유채연은 가게 문을 닫는 시간을 좀 연장했다.외삼촌이 의심할까 봐 유채연도 너무 오래 끌지는 못했다.마침내 작은 슈퍼마켓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유채연은 혼자 길모퉁이까지 걸어가 보았다.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더없이 서글퍼지자, 유채연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그래함은 납득했겠지.’‘내가 지금 어떤 처지인데, 또 어떻게 그래함을 연루시킬 수 있어?’‘나도 너무 뜬구름 잡는 생각만 한 거야.’유채연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하긴, 그래함이 왜 내게 반했겠어?’‘지금의 내게 그래함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겠어.’유채연은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방 문을 잠근 뒤 이불 속에 눕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마음속으로는 모든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마음은 그래도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그때 어머니의 병이 아니었다면 집안이 망하지는 않았을 거야.’‘아마도 나도 대학에 갔을 거고, 그래함과 함께 성장할 수 있었겠지.’‘어쩌면 모든 게 달라졌을지도 몰라.’‘그런데 지금 이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나와 그래함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이제 나는 아름다운 추억만 간직하고 살아가면 돼.’‘지금의 나는 이전처럼 헛된 망상을 할 자격도 없어.’‘현실로 돌아가는 게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유채연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똑똑똑- 넓은 방안에 문 밖의 노크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유채연은 이런 장면에 익숙한 듯 눈물을 닦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외삼촌, 무슨 일이세요?”약간 갈라진 듯한 유채연의 목소리는 특히 표시가 났다.하지만 유채연은 그렇게 많은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맘대로 하면 돼.’“너 오늘 저녁 안 먹었지?” 밖에서 외삼촌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먹을래요.” 생각할수록 슬퍼서 유채연은
다시 유채연이 고함을 치자 외삼촌은 크게 놀랐다.‘요 몇 년 동안 채연이는 내 앞에서 줄곧 순종했어.’‘지금 뜻밖에도 두 명의 외부인 때문에 감히 말대꾸를 하고 있어.’갑자기 외삼촌이 또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내가 보니까 네가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내가 그동안 너를 거뒀는데, 너는 전부 너는 짖어라 라는 식이야?”“나 아니면 누가 너를 신경이나 쓰겠어. 그 사람들은 돈이 있잖아. 진작에 갔다가 왜 이제야 온 거야?”“만약 또 내게 이렇게 말할 거면, 앞으로 너를 상관하지 않아도 탓하지 마.”외삼촌은 유채연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서 심하게 말을 했다.유채연은 그 말들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마음속으로는 온통 그래함을 생각하고 있었다.‘예전에 나와 그래함은 죽마고우여서 다른 사람에겐 하지 않았던 일도 많았지.’‘그래함이 병이 났을 때 내가 그래함을 돌보았어.’‘그때 사랑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그래함에게 감정이 생겼어.’‘그래함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내가 맞은편 마을로 가지도 않았을 거야.’‘심지어 그래함은 나중에 나하고 결혼할 거라고 예전에 말하기도 했어.’나중에 일어난 그 일들이 오히려 유채연을 심연 속으로 매섭게 끌고 갔다.만약 유채연의 집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유채연도 그래함과 함께 하는 걸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그래함은 내가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럴 리가 없어.’‘그래함은 단지 일시적으로 감정이 복받쳤을 뿐이야.’‘곧 후회할지도 몰라.’그들의 처지가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나기에.유채연은 감히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할 수 없었다.일을 너무 좋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간직할 것이다.‘빛나는 보석이 된 그래함은 가장 높은 위치에 서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거야.’‘그러나 지금 진흙투성이인 유채연은 그저 서민들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어.’‘지금까지 그렇게 좋지 않았던 내 처지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어.’‘예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자포자기하기도
유채연은 넋이 나간 채 슈퍼마켓으로 돌아왔다.머릿속에 맴도는 건 그래함의 자신에 대한 태도와 자신에게 했던 말뿐이다.슈퍼마켓을 지키던 외삼촌은 유채연이 오는 것을 보고는 가게에서 나가며 야단쳤다.“누구를 만났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집안 일은 할 필요가 없어?”“이 정도로 시간을 잡아먹을 거면 차라리 집에 잘 있는 게 낫겠어.”유채연은 반박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숙이고 서 있었다.유채연이 돌아왔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뜻밖에도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났어.’‘지금은 확실히 시간이 좀 늦었어.’평소에 외삼촌은 유채연에게 아주 엄격했다. 유채연은 오랫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은 채 매일 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유채연이 감히 항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본 외삼촌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너를 찾아왔던 그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야?”유채연은 건성으로 대답했다.“그저 고향 사람일 뿐이에요.”“고향 사람이 왜 너를 찾아왔어?” 외삼촌은 여전히 예민했다.유채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너무 오랫동안 나를 보지 못했으니까 나를 찾아왔지요.”“너는 지금 류씨 집안에 사는 게 아니야. 너를 찾아오려면 시간이 더 걸렸을 텐데, 그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한가해서 너를 찾아온 거야?” 외삼촌은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다.유채연의 상태가 아직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외삼촌이 그렇게 묻는 말을 듣자 외삼촌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평소에 외삼촌은 자신의 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렇게 세세하게 물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그때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 사람들이 구태여 알아볼 필요도 없이 조금만 물어봐도 알 수 있지요. 외삼촌, 그걸 왜 물어보세요?” 유채연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외삼촌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람들이 정말 호사스럽게 손을 쓰던데, 부자인 모양이야. 그 사람들한테서 돈을 좀 구할 수 없을까?”방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