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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결혼하면 되잖아요

휠체어에 앉은 강무진의 흰 셔츠 아래로 근육이 선명한 팔이 드러나 있었다.

무진은 할머니의 얘기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는 듯,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할머니가 건네준 서류에 손만 올린 채 한참이 지나도 펼쳐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안금여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그를 다그쳤다.

“시간만 보내면서 이 꼴로 살면 대체 어쩌라는 거니?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이 할머니에게 증손주도 안겨주지 않을 작정인 거야?”

무진은 시선을 돌려 할머니를 쳐다보며 늘 그랬듯 냉랭하게 말했다.

“손자가 저 하나는 아니잖아요. 증손주는 다른 손자들이 많이 안겨드릴 겁니다.”

‘천하의 안금여가 이리 못난 소리를 하는 손자를 어떻게 내버려 둬?’

화가 난 안금여는 씩씩대며 호통을 쳤다.

“네가 내 장손이고, 후계자야. 그러니 당연히 네가 증손주를 안겨줘야지. 안 그러면 내가 죽어서 먼저 간 네 할아버지를 어떻게 보겠니? 또, 강씨 가문 조상들은 어찌 뵙고!”

하지만, 무진이 여전히 서류를 볼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직접 그것을 펼쳐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무진아, 이 할머니 얼굴 봐서 한 번만! 딱 한 번만 만나봐!”

그러자 그는 아예 눈을 감고는 딴청을 피웠다.

손금여가 첫 장을 넘기자. 소녀의 사진이 보였다.

무진의 비서인 손건호가 뜻하지 않게 그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투명인간처럼 무진의 곁을 지키며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며 사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여자애였다!

그는 허리를 굽혀 강무진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보스, 보세요. 그 여자애입니다…….”

무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사진 속의 그녀는 그가 손건호를 시켜 찾았던 바로 그 여자아이였다!

이번엔 또 다른 사진이 보였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미소는 상큼했고 자태는 우아했다.

알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눈빛이 진지해지며, 서서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안금여는 무진이 마침내 관심을 보이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이미 역술인을 찾아가 사주를 봤는데 말이야. 이 아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봉황이래. 강한 명운을 타고나서 너한테는 둘도 없을 귀한 인연이라지 뭐니. 이 아이와 결혼하면 모든 게 순탄할 거라니, 앞으로는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그녀는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눈물 몇 방울을 억지로 짜내고는 애원했다.

“네 부모가 세상을 뜬 후로, 난 내 모든 걸 쏟아부으며 널 위해 기도했어. 네가 좋은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게 해달라고 말이야. 네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난 그제야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거야.”

어느덧, 방안은 안금여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평소 우아하고 고상한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무진은 이런 장면을 수없이 많이 봤었다. 목적한 것을 이루려고 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눈물을 짜내는 할머니에게는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울고 있는 할머니를 바라봤다.

둘은 마주 앉은 채로 한참이나 대치했다.

손건호가 테이블에서 휴지를 가져와 안금여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손건호를 노려보며 휴지를 한쪽으로 치웠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 쪽으로 물러났고, 더는 감히 그녀의 연극에 끼어들지 못했다.

무진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급해진 안금여는 급기야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내 팔자는 어쩜 이리 사나울까? 남편 없이 긴 세월을 과부가 되어 손자 하나 의지하고 살았는데…… 이 녀석은 할머니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으니 난 이제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마 위의 혈관이 불거지며 마침내, 무진이 손을 들었다.

그것을 본 안금여는 얼른 울음을 그치며 기대에 찬 눈으로 무진을 바라보았다.

“그만 하세요. 결혼하면 되잖아요!”

무진은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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