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거의 1미터 90에 육박하는 키와 체중이었다.묵직한 체중에 눌린 성연이 지탱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넘어졌다.“윽, 아파!”성연에게서 숨이 터져 나왔다.등이 바닥에 완전히 닿을 정도로 넘어진 데다 위에서 누르고 있는 남자때문에 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이중으로 전해지는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그러다 성연은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심하게 잘 생긴 이목구비는 성별이 모호할 만큼 정교해서 천사와 요괴 중간쯤 되는 것 같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과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반듯한 미간을 쓸어 올리니 정신을 잃고 있는 와중에도 냉랭한 포스가 배어 나온다.꽉 다문 얇은 입술은 서늘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고, 도자기 같은 피부는 병적일만큼 창백해 보였다.그때,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남자의 이마 위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약하고 가쁜 호흡이 그녀의 얼굴 위에 뿌려졌다.몹시 초조해진 성연이 속으로 생각했다.‘아니, 이게 다 뭐람?’그러나 남자가 이미 몸을 누르고 있는 이상,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젖 먹던 힘까지 짜내 간신히 일어난 성연은 남자를 끌며 근처의 폐창고로 갔다.이 폐창고는 평소 달리 오는 사람이 없는 곳이라, 성연이 망설이지 않고 피로 물든 비싼 양복과 셔츠를 재빨리 풀어헤쳤다.상처가 드러났다!복부에 위치한 새끼손가락 길이의 상처는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흘린 피의 양을 봤을 때, 확실히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이 상황이라면 병원에 보내는 게 맞겠지만, 이 작은 마을엔 제대로 된 병원이라고는 없었다.유일하게 진료하는 보건소에서도 이 상처를 제대로 처치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성연에게는 이 정도 상처 치료쯤 일도 아니었다. 성연은 손을 재게 놀리며 책가방을 열고 안에서 잡다한 병이랑 용기들을 꺼내었다. 남자의 상처를 깨끗이 씻고 소독한 다음 지혈을 시키고, 약을 발랐다!치료하는 모든 과정들이 아주 깔끔한 것이 매우 숙련되어 보였다.모든 처치를 끝낸 성연은 다
반쯤 눈을 뜬 채 생각하던 강무진은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이 기억나기 시작했다.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적의 흉계에 걸려 이 작은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당시 골목에서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를 만나 구조를 요청했었다.결국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의식을 잃었고!“목숨은 건졌나 보군!”고요한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임무 중 상대의 계략에 빠졌던 것은 팀 내의 스파이가 적에게 정보를 팔아먹었기 때문이다.기억을 떠올리던 강무진의 얼굴이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손목시계의 버튼을 눌러 구조 신호를 보냈다.약 20분 뒤, 창고 밖에서 일사불란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곧이어 검은 옷의 한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강무진을 본 수석비서 손건호는 다소 감정이 격해지면서 바짝 긴장했다.“보스, 괜찮으십니까? 제가 애들을 데리고 보스를 한참 찾고 있었습니다! 보스 상처는 어떻습니까?”“괜찮아, 이미 처치했어!”잔뜩 잠긴 음성은 무심한 듯 냉담함이 배어 있는 어조였다. 미간에는 타고난 위압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그는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나자, 상태를 살표보고 있던 손건호가 얼른 부축했다.강무진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도 약간 돌아와 있었다.“보스, 보스 상처는…… 누가 처치했습니까?”손건호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강씨 집안 후계자 강무진은 오랫동안 수면장애를 앓아 왔다. 집안에서는 세계 명의들은 모두 찾아 모셔왔지만, 근본적인 치료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부상을 당한 강무진이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상처로 인해 반 송장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차였다.그런데 이렇게 기운이 생생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질문을 받은 무진도 잠시 멍하다가 곧바로 기억을 되살렸다. 정신을 잃기 직전, 희미한 약 냄새를 맡았던 같았다. 그러다가 바로 의식을 잃었고.막 대답하려던 그는 ‘어'하는 손건호의 음성을 들었다.“이건 뭐지?”그리고 허리를 굽힌 손건호가 건초 더미에서 향낭을 하나 집어 올렸다.은은한 약향이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서 쫓겨나도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다 자란 지금은 다르다.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성연의 말을 들은 송종철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너…… 너는 정말 싹수가 없구나!”성연은 그 말에도 아랑곳없이 몸을 돌려 자신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트렁크를 끌고 집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제 방은 어디예요? 피곤해서 좀 쉬고 싶네요!”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송종철은 이 큰딸이 더 싫어졌다.그런데도 데려왔다. 그리고…… 지금 송씨 집안은 성연을 이용해 위기를 넘겨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거실에서 마스크 팩을 쓴 채 피부관리를 하고 있는 계모 임수정과 피아노를 치고 있는 의붓 여동생 송아연이 눈에 들어왔다.이 두 모녀는 예쁘장한 외모가 무척 닮았다.특히 송아연은 상큼한 얼굴에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 덕택에 고상한 분위기를 지녔다.작은딸을 보는 송종철의 눈에 자랑스러운 빛이 가득했다.성연을 돌아보니, 낡아빠진 교복을 입고 온몸에 말로 표현 안되는 거친 기운이 넘실거렸다. 건들건들 책가방을 들고 저쪽에 서 있는 폼이 아주 비딱해 보였다.둘을 비교해 보려던 송종철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앞에 걸어가던 성연의 뒤에서 송종철이 소리쳤다.“나 왔어.” “아빠, 오셨어요?”건반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춘 송아연이 먼저 반가운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임수정 역시 돌아보며 말했다.“어떻게 이제 왔어요? 나는 당신이 또 진미선 그 여자를 못 잊어서 못 오나 했는데…….”말을 막 끝내며 돌아보던 그녀의 눈에 뒤편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성연이 보였다. 순간 표정이 돌변한 임수정이 손으로 마스크 팩을 뜯어내며 노발대발했다.“송종철, 당신 무슨 짓이야? 내가 말했지? 데려오면 안 된다고. 당신 뭐 때문에 얠 데려온 거야? 우리집에 얘가 들어와도 된다고 생각해?”눈살을 찌푸린 송아연도 일어서며 불만스럽게 말했다.“그래요, 아빠.
성연은 트렁크를 들고 송아연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아름답게 차려 입은 송아연은 걷는 것도 작은 보폭의 잰 걸음이었다. 낡은 교복의 성연은 한가하기 짝이 없는 자태로 마치 구경 온 듯 조금도 궁색해 보이지 않았다.이런 성연의 모습을 힐끗 곁눈질하던 송아연은 속으로 비웃었다. ‘예쁘면 뭐해? 품격이라는 건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지.’‘쓰레기는 쓰레기인 채 진흙탕에 있어야지. 이런 대도시는 그녀가 올 곳이 아니지.’가슴을 꼿꼿이 세운 송아연은 좀 더 반듯한 자세로 걸으며 성연에게 보여줄 참이었다. 스스로 창피하게 여겨 더 이상 여기 있을 낯이 없게 말이다.하나하나 모두 화려하게 장식된 방들을 지나 마침내 송아연은 성연을 데리고 복도 끝에 가서 멈추었다.송아연은 위에서 아래로 성연을 훑어본 뒤, 손을 뻗어 문을 힘껏 열었다.헛방 안의 잡동사니들은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어 방 한쪽에 쌓여 있었고, 다른 한쪽 구석에 작은 침대 하나가 간신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방이 밝은 편이라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들이 부옇게 보였다.바닥에 세워 놓은 트렁크 옆에 반쯤 기댄 성연은 헛방의 환경을 보고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팔짱을 낀 느긋한 자세로 송아연을 쳐다보았다.가진 수를 다 꺼내 보이는, 이런 어린애 장난하는 듯한 얕은 생각은 그녀의 눈에 볼품없었다.방안으로 머리를 내밀고 한 번 둘러본 송아연은 다시 성연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째 그녀가 기대했던 효과에 미치지 못한 것 같았다.‘송성연은 왜 저리 잘난 척을 하는 거야? 일부러 신경 안 쓰는 척하는 걸까?’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듯한 성연의 태도에 송아연은 화가 나 가슴이 답답해졌다.“언니, 집이 꽉 차서 지낼 곳이 없네요. 섭섭하겠지만 아쉬운 대로 여기에서 지내는 수밖에 없겠어요.”“집에 객실도 있지 않아?”나른한 음성으로 묻는 성연은 송아연의 몸을 한 바퀴 휘돌던 시선을 아무런 기색 없이 다시 거두어들였다.뒷짐을 진 송아연이 미간에 여자들 특유의 애교스러운 표정을 띄었다
송씨 저택에서 나온 성연은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갔다.최고급 스위트 룸을 잡은 성연은 샤워를 한 후 넓고 푹신한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시큰거리는 목을 잠시 주무른 뒤 머리를 베개에 묻고 세상 모르게 한숨 잘 생각이었다.막 잠이 들려는 찰나,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발신자 번호를 슬쩍 본 성연은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한쪽으로 던져버렸다.비록 저장해 놓진 않지만 기억력이 좋은 성연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 송종철의 번호였다.연속해서 몇 차례나 울렸지만, 성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벨 소리가 울리게 그냥 둔 채 그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또 다른 벨 소리가 울릴 때까지 성연은 눈을 뜨고 있었다. 살짝 들려 올라간 가는 눈꼬리가 완벽한 이목구비에 날카로운 느낌을 더했다.전화를 집어 든 그녀는 헤드셋을 끼고서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직접 디자인한 헤드셋으로,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소리는 절대 새어 나가지 않는다.“보스, 제가 직접 나서서 혈귀, 그 개자식을 잡으러 북성에 갈까요?” 서한기가 걸어온 전화였다.혈귀의 행방을 알았을 때, 서한기는 감정을 좀처럼 억제할 수가 없었다.혈귀는 그들 조직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놈이었다. 하마터면 조직원 두 명을 잃을 뻔했다.이 배신자는 반드시 잡아와야만 했다.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성연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서한기 역시 어떤 동작도 취할 수가 없었다.얼굴에 표정을 지운 성연이 발 아래 드리워진 북성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필요 없어. 내가 직접 나선다.”이번에는 서한기가 멍하니 있다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거렸다.“어? 보스, 직접 나서시게요? 보스까지 움직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북성으로 돌아왔어. 앞으로 한동안 북성에서 생활할 가능성이 높아.”이어서 성연은 담담한 음성으로 서한기에게 자신의 현재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서한기는 보스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송성연의 손에 떨어진다면, 그게 누구든 국물도 없
잠시 후, 마침내 강무진이 입을 열었다.“이 여자아이의 뭐가 특이하다는 거지?”손건호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아……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웃의 말에 따르면, 평소 잔병을 앓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여자아이가 준 약을 먹고 아주 좋아졌다고 합니다. 이웃들 모두 그 여자아이가 평범하지 않다고 입을 모아 칭찬하더군요…… 다만 보스를 치료한 그 약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자료를 한쪽에 내려놓은 강무진이 쫙 펼친 손바닥을 다리를 덮은 담요 위에 올려놓았다.“기회가 되면 그녀를 데려올 수 있겠지.”손건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보스가 여자아이에게…… 아, 아니, 여성 생물에게 저리 관심 가지는 건 처음 보았다.……성연은 이튿날 정오까지 내리 잠을 잤다.깨고 싶지 않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끊이지 않았다.그야말로 귀를 찢는 듯한 ‘쿵쿵쿵’ 소리가 잠을 깨웠다.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여는 성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짜증을 참지 못해 온통 찌푸려졌다.송종철과 임수정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송종철은 하룻밤 꼬박 성연을 찾아다니다 겨우 여기에서 찾아낸 것이다.어느 육교 밑에서나 찾을 줄 알았었다.그런데 5성급 호텔에 와서 로열 스위트룸에 묵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이곳은 하룻밤 숙박료만 수백만 원이다. 평소 접대할 일이 없으면, 그 역시 이리 사치스러운 스위트룸에 묵은 적이 없었다.성연에 대한 미운 감정이 다시 한 단계 상승했다.‘진짜 분수를 모르는 천방지축이구나!’두 사람을 본 성연이 우아한 동작으로 하품을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른한 모습으로 문틀에 기대었다.밤새도록 자고 일어났는데도 성연의 머리카락은 가지런한 모양으로 등뒤에 얌전히 내려와 있었고, 하얀 피부는 모공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끈했다.임수정의 눈이 질투의 빛으로 가득 찼다.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송성연의 이 얼굴이 엄청난 밑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많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
날파리 같이 귀찮게 웽웽굴던 두 사람이 떠나자, 성연은 점심을 먹고 백화점으로 갔다.5성급 호텔 바로 옆이 북성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몰이었다. 몰 안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곳곳에 조화롭게 자리한 각종 매장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의류 매장에 들어간 성연은 눈에 들어오는 옷을 집어 들고 가격표도 보지 않은 채 바로 매장 직원에게 포장하게 했다. 쇼핑을 끝낸 성연은 호텔로 돌아와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원래 본바탕이 좋은 그녀는 옅은 화장으로 충분했다. 길게 뻗은 아이라인에 약간의 음영을, 맑고 선명한 눈에 약간의 색감만 더했을 뿐이다. 몸에 딱 붙는 반 슬릿 레드 스커트는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었다.호텔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탄 성연은 바로 킹스 클럽으로 향했다.성연이 클럽에 들어서자 즉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겼다.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바로 갔다. 비어 있는 좌석에 툭 걸터앉은 성연이 색이 예쁜 칵테일 한 잔을 주문했다.앉은 지 얼마돼지도 않아 다가와 말을 걸은 남자가 벌써 여러 명이었다.“아가씨, 혼자 왔어요?”와인색 슈트를 걸친 남자가 다가왔다. 왁스로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빗어 넘긴 남자는 자리에 선 채 일부러 손목에 찬 명품 비취시계를 슬쩍 드러냈다.삽시간에 시선을 아래로 내린 성연이 다시 따분하다는 듯이 시선을 들어올렸다.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의기양양한 기색이던 남자가 얼굴을 굳혔으나 곧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아가씨, 제가 안에 룸을 하나 빌렸는데, 안에 가서 한 잔 같이 마시지 않겠어요?”말하는 남자의 손이 성연의 손등으로 뻗어왔다.곧 ‘우드득'하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남자가 손을 가린 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사납게 성연을 쳐다보는 남자의 눈이 음흉하게 변했다.“내 눈에 띈 것 자체가 네 복이야. 이 몸의 호의를 무시해선 안되지!”성연이 슬쩍 올라간 입술에 검지를 갖다 세웠다. 이어서 손목을 슬슬 돌리
‘무슨 상황이지?’성연이 정신을 바짝 차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제일 먼저 몸이 반응하며 얼른 룸 반대편으로 피한 성연은 어둠을 빌려 몸을 숨겼다.성연은 룸에 바짝 몸을 붙여 귀를 갖다 대었다. 안쪽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운지, ‘쿵, 쾅’대는 소리가 함께 울려 나왔다.‘안에 있는 사람들이 분명 싸우는 소리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큰 소리를 내지 테니까.’그녀는 사태를 관망하면서 섣불리 안으로 뛰어들지 않았다.한참 지난 후, 인영 하나가 룸 안에서 뛰쳐나왔다. 눈을 가늘게 좁힌 성연이 집중해서 똑똑히 보니 뛰쳐나온 것은 혈귀였다.혈귀의 상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룸에서 복도까지 핏자국이 이어졌다. 룸에서 뛰쳐나온 그는 손을 가슴에 댄 채 비틀거리며 복도를 뛰어갔다.복도를 빠져나온 그는 주위를 경계하며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다친 몸을 이끌고 클럽의 뒷문으로 달아났다.클럽의 뒤쪽은 빈민가로, 너무 지저분해서 보통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오기 전, 이미 클럽과 주변의 지도를 살폈던 성연은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한 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해냈다.혈귀와는 반대 방향으로 길을 돌아간 성연이 혈귀가 지나갈 길목에서 기다렸다.클럽에서 점점 멀어지며 드디어 자신이 위기를 넘었다고 생각하는 혈귀였다.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 바로 앞에 선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빛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혈귀는 겨우 붉은 롱 스커트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아름다운 몸매와 곧게 뻗은 긴 다리가 어렴풋이 드러났다.몸매에서 엄청난 미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러나 혈귀에게는 미녀와 노닥거릴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그는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앞의 사람이 바로 조직 내에서 듣기만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마녀라는 걸 말이다.성연의 신분은 아주 특수했다. 그녀에 관한 자료는 모두 극비로 취급되었으며, 일반인은 볼 수 없었다.혈귀조차도 성연과 통화만 한 적 있을 뿐이었다.혈귀는 단
이 말에 모혜정도 완전히 멍해졌다.마침내 성연에 대한 공격을 멈춘 모혜정.머리부터 발끝까지 성연을 찬찬히 뜯어보았다.성연은 가장 전형적인 학생의 옷차림이다.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게다가 명품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강무진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북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강무진이 아닌가?‘송성연은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야. 어떻게 이런 여자가 강무진 마음에 들었지?’‘수많은 명문가 아가씨들이 온갖 수단을 다 썼지만 결국 강무진의 관심을 얻지 못했어.’‘그런데 이 계집애는 뭐가 그렇게 잘났다는 거야?’모혜정의 눈빛에 의심이 가득했다.성연이 솔직하게 말했다.“당신들 두 사람의 일은 나하고 상관없어요. 안 선생님, 두 분이 잘 얘기해 보세요.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여기에 멍청하게 있으면서 날조된 누명을 뒤집어쓸 이유가 없었다.성연이 나가는 걸 아무도 막지 않았다.뒤에서 안진검이 모혜정을 구슬리는 소리도 들려왔다.“오해라고 말했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나와 송성연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송성연 씨는 정말 강무진 씨의 약혼녀야.”성연이 식당 문을 나서자 모혜정이 비로소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저 여자가 진짜 강무진의 약혼녀라고? 당신 설마 나를 속이는 거 아니지? 내가 의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핑계를 대고 얼버무리려는 거 아니야?”모혜정은 강무진이 저런 촌티 나는 송성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모혜정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정말 확실해. 강무진의 이름은 모두 잘 알고 있는데, 내가 이런 일을 가지고 농담을 할 필요가 있겠어? 내가 아무리 허튼소리를 잘 한다 해도 강무진을 방패막이로 쓸 용기는 없어!”안진검은 입이 닳도록 말했다.모혜정이 잠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그래도 여전히 머뭇거리면서 말했다.“정말 확실해? 그 여자가 강무진의 약혼녀야?”“물론이지, 내 눈으로 직접 봤어.” 안진검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임을 강조했
성연의 얼굴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 떠올랐다.‘밥 잘 먹고 난 후에 내가 왜 여우가 된 거야?’안진검이 바로 화를 내며 여자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혜정아, 오해야!”모혜정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모든 남자들이 바람을 피울 때 오해라고 하며 도무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모혜정은 성연을 향해 화를 내며 비난을 퍼부었다.“보니까 나이도 어린 게 어떻게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만 하는 거야? 남의 남자가 이용하기 좋은 모양이지? 요새 애들은 정말 너무 난잡해.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성연은 사실 좀 멍해서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나 성연을 겁먹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모혜정은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모헤정이 계속 말했다.“나는 지금 안진검 씨의 정식 여자친구거든? 네가 이 사람 곁에 있다 하더라도 단지 첩일 뿐이야. 그런데 같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겠어?”성연은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느꼈다.게다가 자신과 안진검은 친밀한 동작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런 일을 똑똑히 조사하지도 않고 바로 쳐들어온다고?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어쩌려고, 사람을 너무 얕잡아 보는 거 아냐?’성연도 이 여자에게 많은 걸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말을 많이 해도 모헤정은 듣지 않을 것이다.성연은 차갑게 경고했다.“입 닥쳐요! 나는 안 선생님과 우연히 만났을 뿐이에요.”모혜정은 바로 조롱하듯이 말했다.“그냥 우연히 만났어? 하던 일을 인정할 용기는 없는 모양이네?”곧 다시 고개를 돌려 안진검을 향해 잔소리를 했다.“당신, 이런 여자에게 당신이 좋아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무슨 일이 생기니까 바로 발뺌을 하잖아. 나중에 당신을 속이고 돈만 쏙 빼 가면 그때 가서 믿을 거야?”성연은 더 이상 말할 힘도 없어서 안진검을 바라보았다.안진검 본인의 일은 본인이 처리하고 자신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뜻을 표시했다.‘게다가, 여우라니, 절대 좋아할 만한 별명이 아니잖아?’‘식당에 사람도 적지 않은데, 만약 소문이라도
안진검은 일부러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도 휘둥그레 떴다.그리고 미친 듯이 기뻐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흥분한 것처럼 굴었다.“정말이에요? 그럼 제가 강 대표와 교제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성연 씨가 제게 좀 소개해 줄 수 있습니까? 저는 정말 강 대표를 존경합니다. 제가 강 대표와 함께 나란히 사업을 토론할 수 있다면, 제 인생은 아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겁니다.”성연은 즉각 응답하지 않았다.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안진검의 인품이 괜찮다고 생각했다.두 번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그는 남을 돕고 있었다.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기회가 있을 거예요.”안진검은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뻤지만 아무래도 계속 자제했다.절로 눈웃음을 지으면서 웃는 표정이었다.성연도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진이 그렇게나 대단한 존재였다니.성연 자신도 속으로는 무진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느낌이 달랐다.“그럼 먼저 여기서 성연 씨에게 감사인사를 할게요. 그럼 성연 씨만 믿고 빨리 그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안진검은 환하게 웃는 표정이었다 성연이 소개해 줄 거라고 단정한 것 같았다.그 말은 심지어 성연의 마지막 퇴로마저 막았다.성연은 못 들은 척하면서 또 같은 말만 반복했다.“기회가 되면 소개해 드릴게요.”“그래요 성연 씨, 오늘처럼 좋은 날에 와인 한 잔 같이 안 하실래요? 와인은 도수가 낮아서 여성이 마시기에 괜찮아요.”안진검이 말하면서 곧 성연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성연은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술은 그냥 두시죠. 안 선생님, 저는 술 대신 차로 할게요.”말을 마치자 안진검은 자신에게 한 잔을 따른 뒤,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와인을 내려놓았다.“차를 드셔도 괜찮지만, 와인을 좀 마시면 확실히 기분이 업 되지요.”“이따가 운전도 해야 하니 술은 됐어요.” 성연은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연은 쉽게 외부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서, 안진검은 자신의 목적대로 진행했다.우선은 변죽을 울리며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성연씨, 옷차림은 소박한데 지난번에 몰던 차는 포르쉐더군요. 성연 씨는 과연 어느 명문가 출신인지 궁금하네요.”“언급할 가치도 없어요.” 뜻밖에도 안진검이 이처럼 자세하게 자신을 살폈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결코 안진검의 계획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게다가 성연 자신은 무슨 명문 가문 출신도 아니다.“그럴 리가요? 성연 씨, 너무 겸손하게 그러지 마세요.” 안진검은 믿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이미 성연의 신분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이 화제를 던졌을 뿐이다.“정말이에요, 전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내세울 만한 신분이 없으니 성연의 대답도 사실이다. 안진검이 이렇게 말해도 성연은 여전히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안진검은 속으로 송성연을 정말 다루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떠보듯이 물었다.“지난번에 이씨 가문 차남의 결혼식에서 성연 씨가 WS그룹의 강무진 씨와 함께 있는 걸 봤어요. 강 대표는 정말 큰 인물이지요. 나이는 젊지만 사업의 귀재로, 혼자 힘으로 WS그룹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죠. 제가 외국에 있을 때 강 대표의 명성을 들은 적이 있어요.”“제가 국내에 온 이유도 절반 정도는 강 대표의 영향이 있어요 언젠가 강 대표를 직접 만나 교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저는 강 대표를 정말 존경해요. 투자계에서 강 대표가 진행한 사업들은 모두 그야말로 교과서라고 부릴 정도예요.”강무진을 언급할 때 안무진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눈빛에 담긴 강무진에 대한 존경과 숭배의 기운은 진짜 같았다. 조금의 거짓도 없이.강무진의 약혼녀로서, 자신의 대단한 약혼자를 칭찬하는 말을 듣자 성연도 속으로 무척 기뻤다.지난번에 무진이 안진검을 꽤 높이 평가하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사업 방면에서 안진검의 이름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그런데 그런 사람이 무진을 끊임없이 칭찬한 것이다.이는 성연에게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안진검은 성연이 그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기색을 진즉 드러내고 있음을 알았다.‘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송성연 쪽에서 효과를 보기 위해 이 모든 걸 열심히 계획했는데.’‘그런데 송성연의 경계심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안진검은 미리 생각해 둔 말을 꺼냈다.“성연 씨, 지난번에 제게 커피를 사셨죠. 오늘 이렇게 공교롭게 만났으니 제가 밥을 살 게요. 제가 구시가지의 괜찮은 식당을 알고 있어요.”안진검은 계속 덧붙여 말했다.“그게 예의잖아요. 만약 성연 씨가 거절하시면 제 마음도 불편할 거예요.”원래 성연은 거절하려고 했다안진검과 함께 있을 때는 항상 미묘한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 그러나 이제 곧 유럽에 가니까 안진검과 만날 기회도 별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대충 응해 주면, 지난번 안진검이 도와준 걸 갚은 셈이 되겠지.’“그러죠, 안 선생님께 폐를 끼치겠네요.” 한참을 망설이던 성연이 승낙했다.“천만에요. 미인을 위해 봉사하는 건 제 영광이지요.”안진검이 길을 안내했다.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통해서 성연을 식당으로 데려갔다.식당은 2층에 있는데 장사가 아주 잘 되는 것 같았다.한 번 훑어보자 확실히 전통음식을 하는 식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보기에 음식은 꽤 괜찮은 것 같네.’룸 안에서 안진검이 먼저 메뉴를 성연에게 건네주었다.“성연 씨, 좋아하는 게 있는지 보시고 주문하세요”성연은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시켰다.안진검이 또 몇 가지를 추가한 뒤 메뉴판을 종업원에게 건넸다.잠시 후 음식이 나오자 성연이 맛을 보았다.갖가지 맛들이 아주 제대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안 선생님은 자주 이쪽으로 오세요? 어떻게 이런 곳을 다 아세요?” 성연은 자연스럽게 물었지만 사실 안진검을 떠보는 것이었다.지난번에 안진검은 자신에게 방금 해외에서 돌아왔다고 말했다.‘이 음식들은 모두 북성 토박이들의 음식이야.’‘안진검이 처음 왔다면 당연히 이런 곳을 알 수 없어.’‘만약 안다면, 안진검이 북성에 대해 잘
뜻밖에도 이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그러나 안진검의 행동이 좀 의외로 여겨지긴 했지만, 성연은 이 남자가 그래도 바른 기운을 가졌다고 생각했다.안진검은 성연을 보고 놀란 척했다.“성연 씨도 여기 있었어요?”성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안 선생님 정의감이 대단하시군요. 마치 매번 적시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도우시는 것 같네요.”지난번 자신을 도와 차를 수리했던 당시를 떠올린 것.‘보아하니, 안진검은 정말 남을 돕는 걸 즐기는 것 같아.’안진검이 웃으며 말했다.“대단한 일도 아닌 걸요.”사실 조금 전까지 벌어졌던 장면들 모두 안진검이 연출한 연극이었다.단지 성연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송성연의 신임을 얻기만 하면 자신은 심지어 강무진과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그때 강무진을 무너뜨릴 방법을 강구하면 일이 훨씬 간단해진다.이번에 의부 앞에 내세울만한 공을 세운다면, 안진검은 MS 가문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이번 일은 MS 가문에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무진에 대한 MS 가문의 원한은 뼈에 사무칠 정도다.특히 삼장로.강무진은 MS 가문이 A국에서 자리를 잡고 성장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다. 강무진을 제거하는 사람은 당연히 MS 가문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성연이 눈을 들어 안진검을 바라보았다.“안 선생님은 작은 일이라고 하시지만, 많은 사람들은 할 수 없을 거예요.”사람들 모두가 자신 있게 남을 도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것은 아니다.성연은 여전히 안진검의 이런 정신에 탄복했다.“도울 수 있다면 최대한 도와야지요. 언젠간 저도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을 테니까요.”안진검이 하는 말이 구구절절 진리다.자신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을런지 누가 알겠는가!선행을 하고 덕을 쌓으면 나중에 자신이 도움을 받을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성연은 안진검의 정신에 대해 정말 탄복했다.‘안 선생님의 말에 일리가 있어. 앞으로 나도 배워야 할 것 같아.’성연이 속으로 생각했다.“성연
다음 학기 곧 다가온 성연은 요 며칠 정말 바빴다.하루 종일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분주했다.또 국내에만 있는 것들을 준비했다. 예를 들면 귀한 한약 약재들, 그리고 집 생각 나고 그리워지는 맛있는 음식들.이런 맛들은 가정에만 존재한다.성연이 외국에서 먹고 싶지만 먹지 못할 때면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다.그러므로 이번에 모두 준비해 가서 미스 샤넬과 목현수를 만나면 두 사람에게도 좀 나누어 줘야지. 그들도 일상의 맛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지난번에 미스 샤넬이 왔을 때, 중화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성연은 똑 같이 좀 받기로 했다.때가 되면 짐을 부치는 곳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성연은 구시가지로 나갔다.북성이라는 곳에는 거의 모든 물건들이 가장 잘 갖추어 있다.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여기로 오면 된다.다른 곳에는 없는 것들이 있었다. 여기는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물건을 파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성연도 이곳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샀다.이때 성연은 길 모퉁이로 나오자마자 마스크를 쓴 남자 하나가 한 여자 애의 가방을 낚아채며 빼앗는 것을 보았다.날치기의 동작이 어찌나 빠른 지, 빼앗자마자 달아났다.성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백주 대낮에 감히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니!곧 정신을 차린 여자아이가 즉시 구조를 요청했다.“살려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제 가방 안에는 중요한 증명서가 많이 있어요. 잃어버리면 안 돼요.”소리치는 여자아이의 음성에 울음이 미미하게 섞여 있었다.성연이 손에 든 물건을 놓고 앞으로 나가 도와주려던 순간.한 남자가 뛰어나가더니 곧이어 날치기를 잡아 땅바닥으로 밀었다.무척 빠르고 정확한 동작으로 날치기에게서 여자아이의 가방을 되찾았다.그 남자가 일어나 달아나려던 날치기범을 다시 붙잡으려던 중에 날치기범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는 모습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작은 칼의 날이 햇빛 아래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게 섬뜩해 보였다.날치기범이 눈앞의 남자를 향해 경고했다.
안금여와 강운경은 마음을 정리했다. 오후, 무진이 회사에 출근한 시간에 성연을 고택으로 불렀다.“할머니,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으세요?” 성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할머니가 일 없으면 부르면 안 돼? 네가 한 번 생각해 보렴. 오랜만에 귀국했는데, 이 할머니를 보러 몇 번 왔었니?” 안금여는 일부러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성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귀국하자마자 비교적 많은 일이 생겼다. 또 공교롭게도 미스 샤넬과 목현수가 와서 성연이 그들과 함께 지내며 시간이 별로 없기도 했었다.그러고 보니 진짜 안금여의 말 그대로였다.성연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안금여에게 사과했다.“할머니, 죄송해요. 요즘 좀 바빴어요.”“네가 돌아온 후에 일이 많았다는 걸 알고 이 할머니도 너에게 강요하지 않았어. 다만, 사람이 늙으니 별 생각이 다 드는구나.” 안금여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안금여가 탄식하는 모습을 본 성연은 갑자기 마음이 언짢아졌다.성연이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왜 갑자기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세요? 지금은 괜찮으시잖아요? 마음을 편안하게 드시고 집에서 요양을 잘 하시면 돼요. 남은 일은 무진 씨에게 맡기시고, 걱정하지 마세요.”“말이야 그렇다만,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걱정거리가 없을 수가 있겠니? 괜히 이 할머니 위로할 필요 없다.” 안금여가 가볍게 웃었다.성연은 효심이 깊은 아이다. 오랫동안 집을 나갔다 들어왔지만, 지금까지 그들을 걱정시킨 적이 없다.“할머니,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 성연이 옆에서 위로했다.“하지만 할머니가 너를 부른 것은 진짜 중요한 일 때문이야.” 안금여가 성연을 바라보며 불현듯 진지하면서 다소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성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할머니, 무슨 일이신지 바로 말씀해 주세요.”“음, 그건 말이야, 이 할머니 생각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혹여 무슨 일이 생길지 어찌 알겠니. 그러니 네와 무진이가 우선 결혼부터 해놓으면 이 할머니가 안심이 좀 될 것
안금여가 한숨을 내쉬었다.“너와 성연이 모두 착한 아이들이야. 만약 정말 무슨 부득이한 상황이 닥치면, 이 할머니는 너희들이 좋게 헤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니 그러지 마, 무진아.”“할머니, 말씀하신 그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무진은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안금여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강운경이 옆에서 말렸다.“엄마, 우리도 잘 알고 있잖아요. 엄마가 성연이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하시는지요. 하지만 무진이와 성연이 서로 감정이 깊어요. 둘 다 사리가 분명한 애들이에요. 무진이 우리를 찾아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건 기쁜 일이잖아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안금여의 말은 두 사람을 위한 것이 맞다. 불길한 말은 두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잠시 멍하니 있던 안금여가 입을 열었다.“성연이에 대해서는 네 말이 맞다. 우리 집 무진이가 마침내 일생을 함께 할 사람을 찾다니, 이 할머니가 당연히 기뻐해야지. 모두 이 할머니 잘못이다, 요 방정맞은 입 같으니라구.”무진이 얼른 말했다.“할머니, 할머니 탓하지 마세요. 모두 저와 성연일 위해서 하신 말씀이시잖아요?”“그렇네, 얼른 무진과 성연이 결혼식을 예약해야지. 성연이가 외국에서 나쁜 마음을 품은 놈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말이다!” 강운경은 성연의 성격을 안다.겉으로 보기에는 성격이 강하고 털털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아이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조그만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간다면...‘정말 무진이 죽으려고 하겠네.’“그래, 근데 성연이 나이가 한참 어린데, 그렇게 하겠다고 해?” 강운경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두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계획을 다 세웠다.그러나 성연이 그러겠다고 할지는 아직 미지수.“성연이는 분명히 그러겠다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성연이 곧 개학할 텐데, 성연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그러면 성연이 공부하러 가는 것을 막는 양상이 된다.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사실, 불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