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성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서 귀를 기울여 들으며 묵묵히 음료수를 마셨다.무진은 성연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렸다.어린 여자애가 두 볼이 붉어지고 두 눈에 물기가 흐르며 두 눈이 촉촉하고 눈빛이 이미 아리송하여 곤드레만드레 취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그는 성연이 손에 들고 있는 컵을 한 번 보았다.성연에게 준 것은 단지 낮은 도수의 과실주일 뿐이었다.성연의 주량이 그렇게 약한 줄은 몰랐다.무진이 할 수 없이 손을 들어 대화를 중단했다.그는 성연을 보며 부드러운 말투로 약간의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왜? 어지러워?”성연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른다.단지 음료수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 앞에 있는 것을 보면 아주 흐릿하다.그녀와 이야기하는 무진조차도 두 개의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났다.그러나 앞에 있는 사람이 무진이라는 것을 알고 성연은 안심을 했다.그녀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지러워요, 돌아가서 자고 싶어요.”성연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졸렸고 머리도 어질어질했다.생각이 많이 무디어졌다.사고력을 잃었다.무진이 손을 들어 성연의 볼에 붙였다. 그녀의 볼은 약간 뜨거웠다.무진의 손바닥은 얼음처럼 차갑고, 성연은 꽤 편안함을 느꼈다.참지 못하고 그의 손바닥에 비볐다.무진이 성연의 눈을 가늘게 뜨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 집으로 가자.”이 말을 마치자 무진은 두말없이 사람을 가로질러 문밖으로 나갔다.“이 어린이가 술에 취해서, 먼저 일어날게. 너희들끼리 놀다 가.” 무진이 룸을 떠나 버렸다.심재현은 멍해졌다. 두 사람이 간 후, 심재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우현을 바라보았다.“우현아, 무슨 상황이야?”평소에 무진은 여자를 보면 마치 그녀들이 전염병이라도 있는 것처럼 멀리 피했다. 예전에 그도 무진에게 많은 여자들 소개했다.그러나 예외는 없었다. 무진은 관심이 없다고 말하거나 여자가 귀찮다고 말했다.그때 심재현은 무진과 같은 목석이
무진은 성연을 데리고 엠파이어 하우스로 돌아왔다.성연은 정신이 흐물흐물해져 무진의 품에 안겨 있었다.무진은 몸매가 크고 성연은 그의 품에 안겨 마치 정교한 인형처럼 그가 안는 데 조금도 힘이 들지 않았다.위층으로 올라갈 때 성연은 무진의 목을 안고 또박또박 말을 했다.“나 목욕하러 갈래, 목욕, 목욕…….”성연의 몸에는 특별한 향기가 나는데, 이때 좀 가까워지자 향기가 더 뚜렷해졌다.그녀는 무진의 목 옆에서 숨을 쉬며 그 설레임이 무진의 마음속에 들어갔다.지금 성연의 모습을 보니 무진은 아무것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달래며 말했다.“그래, 먼저 방으로 가자. 그럼 내가 목욕 물을 받아 줄게.”방 안에서 성연을 잘 내려준 후에 무진이 욕실에 가서 성연이 씻을 물을 받아 주었다.무진은 물이 욕조를 조금씩 채우는 것을 보고 있었다.무진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든 적은 없었다.생각만 해도 웃긴다.예전에 무진은 자신이 그런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물 온도를 체크해 보고 적정온도가 된 후에야 무진이 침실로 돌아와 성연을 데리고 욕실로 갔다. “괜찮아? 혼자 할 수 있겠어?”성연은 취했지만 아직 정신이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당연하죠.”‘이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 송성연의 사전에는 안 된다는 단어가 없어.’성연은 자신만만하게 내려갔지만 발걸음은 흔들렸다.심지어 걸어가다가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무진이 먼저 걸어가서 성연을 부축하자 곧 화가 나서 웃을 것 같았다.“이런 게 바로 네가 할 수 있다는 말이야?”성연이 자신을 부딪칠지 모르겠다.성연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나 정말 할 수 있어요!”“아니면 나는…….”무진은 성연과 함께 들어갈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타이밍 아닐 것 같고, 성연도 이미 성인이 되었다.자신이 만약 따라 들어간다면 아마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다.“응?” 무진의 말을 반만 듣자
노트북을 들고 침대에 앉아 업무를 보던 무진은 귀여운 술주정꾼 생각에 좀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고 신경이 쓰였다.밖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욕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하니 성연이 욕실에 들어간지 이미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욕조에 물을 받고 목욕을 했어도 충분할 시간이었다.무진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며 성연의 이름을 불렀다.“성연아, 송성연, 다 씻었어?”그러나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결국 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 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욕실로 들어가니 욕조의 수면까지 미끄러져 내려간 성연의 긴 머리가 물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도대체 욕조 안에서 얼마나 몸을 담그고 있었는지.깜짝 놀란 무진이 황급히 다가가 손을 뻗어 성연을 붙잡아 올렸다.“콜록, 콜록.” 욕조 속에서 일으켜 앉힌 후 가슴을 압박하자, 성연이 입으로 물을 뱉어냈다. 욕실 안은 온통 성연의 기침 소리로 가득했다.드디어 성연의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눈을 뜬 성연이 자신을 안고 있는 무진을 보고는 와락 밀어냈다.“아저씨…….”지금 알몸인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며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든 탓이다.무진은 성연의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성연의 눈에서 화염이 쏟아지는 듯하다.“돌아서요!”수줍어하던 기색도 잠시,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었다.아무리 자신을 부르기 위해 들어왔다고 쳐도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강무진이라니.‘마치 색마 같잖아?’갸름한 성연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나는 게 무진의 눈에 들어왔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무진은 끝까지 몸을 돌리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성연의 얼굴 쪽으로 향한 채 턱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무진이 일부러 성연을 도발하듯이 말했다.“어차피 앞으로 다 볼 건데 뭘. 좀 일찍 보나 늦게 보나 매한가지 아니야?”“누가 보여준다고 그래요? 빨리 몸 돌려요. 안 그러면 정말 화 낼 거예요!”성연의 말투가 차가워지며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강무진이 보는 건
무진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네가 걱정돼서 들어온 거야.”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성연이 입을 열었다.“덕분에 내가 무사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끝장을 봤을 걸요!”방금 전 무진의 반응을 통해 무진이 일부러 자신을 훔쳐보려 했던 게 아니라는 것,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사람이 어쩜 이렇게 못돼 처먹었는지.’옷을 다 입은 성연은 얼굴이 화끈거리며 부끄러웠다.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을 정도로.결국 성연도 이런 방면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여자아이였다.이제 앞으로 절대 술을 마시면 안되겠다고 혼자 속으로 다짐했다. 안 그러면 진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겠다.만약 강무진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정말 욕조에서 익사했을지도 몰랐다.어쨌든 자신의 생명을 구한 거니까 성연은 더 이상 강무진의 실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뺨을 두드리며 열기가 좀 식길 기다렸다가 욕실 문을 열고 나갔다.침착한 척 가장한 성연은 일부러 굳은 표정을 지었다.사실 어떻게 무진의 얼굴을 봐야 할지 몰랐다.숙취해소제와 죽 한 그릇을 쟁반에 담아 온 무진이 성연에게 건넸다.“죽을 먼저 먹어서 위를 좀 달랜 후에 숙취해소제를 먹어. 안 그러면 위에 부담이 갈 거야.”성연이 욕실에 들어간 뒤에 무진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들이다.집사에게 죽을 쑤어 오게 하며 아주 세심하게 성연을 챙겼다.손에 쟁반을 받아 든 채 앞에 놓인 죽과 약을 보는 성연은 마음이 복잡했다.다른 건 몰라도 강무진의 세심함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외할머니가 떠나신 후 자신을 이처럼 세심하게 챙겨 준 사람이 있었던가 싶다.자신에게 이처럼 잘하는 무진을 모습을 보며 성연은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쟁반을 받아 든 성연이 어어 하며 말했다.“고, 고마워요.”“얼른 먹어. 숙취엔 몸이 힘들어. 다 먹으면 가서 쉬어.” 무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리고 한옆에 놓인 소파에 앉아서 노트북을 보며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성연은 한쪽 옆에서 죽을 먹었다.부드럽게
알코올이 들어가 수면을 도운 건지 성연은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머리도 아파하지 않고 정말 달게 잤다.아무 생각 없이 깊이 잠들었던 성연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무진이 거의 밤새도록 눈을 붙이지 못했다는 사실을.이튿날, 눈을 뜬 성연은 몸도 마음도 아주 개운했다. 그에 반해 무진은 온몸이 찌뿌둥하게 축 가라앉은 상태였다.눈 밑이 시커멓고 낯빛도 차갑게 굳어 있었다.아침 식사 중에도 무진은 정신을 딴데 팔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국그릇에 숟가락을 담근 채 휘이 젓기만 여러 차례. 정작 입에는 대지 않았다.어떤 것에도 관심 없는 듯한 모양새다.이처럼 비정상적인 무진의 태도에 성연이 물었다.“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어젯밤 자신을 살뜰히 챙긴 무진이니 자신도 관심을 좀 가져줘야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완전 인정머리 없어 보일 터.“아니야. 그냥 잠을 못 잤을 뿐이야.”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성연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식사를 마친 후에 등교했다.회사로 출근한 무진은 또 다시 손건호만 달달 볶았다.한바탕 욕을 먹고 나오던 손건호는 복도에서 재무본부장을 만났다.손건호를 한쪽으로 끌고 간 재무본부장이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손 비서, 총괄대표님 요즘 무슨 일 있으셔?”“휴, 말도 마십시오.” 얼굴을 찡그린 손건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계속 이런 식이면 아마 곧 대머리가 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원래대로라면 어젯밤 함께 식사하러 외출했던 대표님과 사모님의 관계는 당연히 좋아져야 했다.오늘 아침 사모님이 대표님에게 먼저 관심을 보여서 두 사람이 화해를 했구나 하는 생각에 희망이 보였었다.‘그런데 어째서 우리 보스는 여전히 저기압 상태인 거야?’‘화해해도 소용없고, 싸워도 소용없고,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지?’‘하아, 수하 비서로 일하기 너무 힘들다.’“손 비서, 좀 도와주게.” 재무본부장이 손건호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그의 눈빛을 본 손건호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
성연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무진은 보이지 않고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운경만 보였다.거실로 들어오는 성연을 본 운경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성연이 학교에서 오는 거니? 학교 다니는 건 힘들지 않아?”“고모님, 어떻게 시간이 나셨어요?” 거실을 가로질러 간 성연이 강운경 가까운 곳에 앉았다.“사업상 이 근처에 왔다가 지나는 길에 들려봤어. 왜 반갑지 않아?”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운경이 다소 놀리는 투로 물었다.성연이 넉살 좋게 대꾸했다.“설마요. 환영인사가 늦었네요. 고모님이 날마다 오셨으면 좋겠는 걸요.”마치 서운하다는 듯한 성연의 표정이 운경을 한 차례 웃게 했다.“너 정말 아부도 잘하는구나.”성연이 웃었다.상체를 숙인 운경이 테이블 위의 찬합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정교하게 데코레이션 된 케익이 들어 있었다.“새로 온 주방장이 만든 거야. 할머니는 입에 맞다고 하시는데 너희들한테도 맛을 보여주려고 들고 왔어.”테이블 위의 케익을 보며 속으로 감동받은 성연이 조그마한 음성으로 말했다.“고모님, 다음 번에는 전화 주세요. 제가 가서 먹을게요. 이렇게 또 오실 필요 없이요.”“할머니가 안 보내셨으면 나도 안 왔어. 얼른 먹어보렴.” 운경은 한 조각 잘라 성연에게 건넸다.성연이 한입 베어 물었다. 신선하고 부드러운 케익의 향이 입안에 퍼졌다. 느끼하지 않을 만큼 달콤한 맛이 아주 좋았다. 성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주 맛있어요, 고모님. 감사해요.”“맛있으면 많이 먹어. 물도 좀 마시고, 체할라.” 운경이 성연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자 쌉사름한 차 맛과 달콤한 케익의 맛이 어우러지는 것이 새로운 맛이었다.성연은 몇 차례 더 베어먹은 뒤 남은 케익을 옆에 내려 두었다.운경이 성연을 보면서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성연아, 무진이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야. 무진이 나이 때면 의논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어. 너희들 언제 할머니에게 증손자
운경을 배웅한 성연은 혼자 저녁을 먹었다.식사를 하던 성연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강무진, 앞으로 매일 저녁 집에 와서 같이 밥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그런데 겨우 이틀도 못 버텨?’성연이 막 집사에게 물으려고 할 때, 마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성연이 입을 열기 전에 집사가 먼저 정중하게 말했다.“작은 사모님, 도련님은 오늘 저녁에 회사에 긴급한 일이 있어 함께 식사하러 오지 못하신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집사의 말에 성연이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사실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제 막 회사 대표를 승계한 무진인지라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걸.돌아오지 못하는 일도 다반사라는 것도.그의 입장이 이해되면서 마음속에 일던 울적한 감정이 사라졌다.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강무진이 보이지 않는 순간 왜 저도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았는지.그런데 이제 또 괜찮아졌다.저녁을 다 먹은 후, 성연은 혼자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혼자서도 신나게 게임을 했다.하지만 가끔씩 저도 모르게 돌아갔다. 무진이 서류를 보며 늘 앉았던 곳이 텅 비어 있는 걸 보는 순간 계속 왠지 허전함을 느꼈다.성연은 너무 자주 강무진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세차게 머리를 흔든 성연이 강무진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내몰았다.‘참내, 그 사람을 생각해서 뭘 어쩔려고?’‘요즘 나도 비정상적으로 변한 건가?’잡념을 몰아낸 성연은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성연이 곧 레벨 통과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미친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휴대폰 화면을 켜 보던 성연의 안색이 변했다.TV를 끄고 바로 방으로 올라가 문을 잠근 성연이 자신의 노트북을 꺼냈다.방금 휴대폰에 메시지가 떴다. 지금 누군가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려 한다고.그녀의 휴대폰은 ‘스카이 아이 시스템’과 연동되어 있었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에서 조그마한 움직임이라도 감지되면 즉시 알 수 있도록.‘스카이 아이 시스템’이 강
마침내 성연이 약간 앞서며 무진은 시스템 진입에 실패했다.어찌 되었든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만든 이는 성연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외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지도 더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두 손으로 키보드 위를 내리누르는 무진의 얼굴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을 눈앞에 두고 놓쳤다는 게 화가 났다.무진의 표정이 북풍한설처럼 차가웠다. 눈에서 뿜어 나오는 냉기는 쳐다보기만 해도 석빙고에 갇힌 듯했다.한옆에 선 손건호는 보스의 노여움이 자신에게 떨어질까 전전긍긍이었다.생각해보니 아무 말 하지 않는 것도 좋지 않은 것 같아 위로의 말을 건넸다.“보스, 패스워드가 정말 복잡하군요. 우리 쪽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연구한 다음에 겨우 대략적인 실마리만 건졌으니 말입니다.”줄곧 먹이사슬의 최상층에서 실패를 맛본 적이 없었던 무진이다.지금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정상이지, 하며 속으로 생각하는 손건호.한기가 가득한 표정임에도 무진의 어조는 꽤나 담담했다.“예전에 찾았던 단서는 이미 쓸모가 없게 됐어. 방금 상대하며 보니, 저쪽에서 이미 기회를 틈타 코드를 변조했더군. 암호방어를 위해 이미 여러 장치를 해 뒀고. 방금 다시 들어가려 했는데 이미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어.”무진은 입을 다문 채 컴퓨터를 노려봤다.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했는지 모른다.심지어 거금을 들여 세계 최고의 해커 팀을 스카우트까지 해서 간신히 실마리를 얻었다 싶은 순간, 코드가 단번에 변조되며 이전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버렸다.조금 전 시스템 해킹을 시도하려는 순간, 그렇게나 빨리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상대방의 대응 속도는 가공할 정도로 빨라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그러나 무진은 여기서 손 놓지 않을 것이다.“보스, 보스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까?” 손건호가 떠보듯이 물었다.무진이 직접 나서는 건 드물지만, 일단 한 번 나섰다면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지금 강무진이 실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
목현수도 한숨을 돌렸다.방금 성연에게 일이 생기자 목현수는 바로 손건호에게 알렸다.원래 다른 곳에 있던 손건호가 그제서야 달려왔다.“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성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손건호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난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던 성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무진 씨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손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옷을 갈아입게 민박집을 좀 잡아주세요. 자칫하다 감기에 걸리겠어요.”이 관광지는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근처에 민박집들이 많이 있었다.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성연이 미리 조사한 사항들이다.“예.”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두 차에 올랐다.차에 올라탄 성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미스 샤넬, 고맙습니다. 오늘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물속에서의 질식감을 떠올린 성연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했다.“괜찮아요. 당신은 내 친구니까 구할 수 있었어요. 물론 내가 구하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도와야지요.” 미스 샤넬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연은 그전에 미스 샤넬과 적지 않은 오해를 겪었다.그런데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미스 샤넬의 손을 잡은 성연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곧 그들은 손건호가 잡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목현수가 미스 샤넬과 성연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은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올 게.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래요.” 미스 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목현수가 옷을 사 주겠다고 하자 성연은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예전엔 별일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자란 성인들이었다.성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 나는 필요 없으니까 미스 샤넬만 사주면 돼요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
“누가 물에 빠졌어요.”“빨리 와요, 사람 살려요.”“빨리 여기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게 해.”주위에서는 모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성연은 물에 빠지는 순간 바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다행히 호수의 물이 깊어서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그러나 갑자기 물살에 충격을 받자 현기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아래의 물살이 좀 급해서 물살에 말려들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성연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짙은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성연의 몸은 천천히 계속해서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이럴 수가, 누구 수영을 할 줄 알아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조된 소년의 어머니도 옆에서 소리쳤다.자신의 과실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비록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몹시 조급해진 목현수는 몇 번이나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주위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갔지만, 구조대는 한참이나 오지 않고 있었다.“이걸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서 구해달라고 해.”“여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CCTV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직접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었다. 성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물에 뛰어들 용기는 부족했다.자기 자식이 잘못된 걸 본다면 뛰어들었겠지만 말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던 미스 샤넬이 주저함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러나 옆에 있던 목현수가 눈치 빠르게 붙잡았다.“샤넬, 뭘 하려는 거야?”성연 한 명이 빠진 걸로 이미 충분히 애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
로얄 스위트 룸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룸 내부 구석구석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스위트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은은한 향이 났다.“나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묙현수의 볼에 키스를 한 미스 샤넬은 목현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목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30분 후.찰칵,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스 샤넬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던 목현수.눈앞의 장면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물빛 실크 가운을 걸친 미스 샤넬의 허리에는 얇은 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실크 가운 사이로 풍만한 가슴 계곡과 희고 긴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가 천천히 목현수를 향해 걸어오자, 가운 안의 나신이 슬쩍 드러났다.목현수의 머리가 띵해 오기 시작했다.한 호텔 룸 안에서 내보이고 있는 샤넬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건강한 성인 남자인 목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미스 샤넬은 목현수에게 다가가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들었다.자신의 몸까지 드러내며 이렇게 다가가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목현수.점점 서운한 마음이 커지는 미스 샤넬.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현수 씨,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목현수도 미스 샤넬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미스 샤넬은 항상 씩씩하고 쾌활한 사람이어서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목현수 자신도 깜짝 놀랐다당황한 목현수가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그냥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미스 샤넬이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유혹하려는 거죠!”그녀의 눈에 원망과 질책의 빛이 들어찼다. 또한 짙은 실망감도.목현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
성연은 수시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음식을 먹으면서 성연이 농담처럼 물었다.“사형, 사형은 미스 샤넬과 언제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예쁜 미인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형을 따라다니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요?”성연은 그저 슬쩍 물어보았을 뿐이다.지난번에도 물어봤지만 매번 이 문제를 회피하는 목현수였기에.“곧 할 거야. 다음 달 즈음에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그런데 목현수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던 성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무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옆에서 목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두 달이면 목현수가 유부남이 된다는 말이지?’‘엄밀히 말해 지금 미스 샤넬은 목현수의 약혼녀.’‘이제는 목현수도 더 이상 성연이에게 매달릴 수 없다는 거지.’무진은 이제야 정말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그도 옆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그럼 이게 신혼여행인가요?” 그 말을 들은 목현수가 눈을 치켜 떴다.‘하, 내가 강무진 네 놈의 얄팍한 생각을 모르는 줄 알아?’‘성연이를 내가 뺏을까 봐 겁이 났던 거 아니야?’‘이제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강무진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어.’“그런 셈이지요.” 목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무진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슬쩍 가렸다.주문했던 음식들을 다 먹자, 디저트가 나왔다.이 음식점의 주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A국 특유의 디저트였다.미스 샤넬은 방금 먹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 만큼 맛있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디저트로 나온 이 케익들.동물을 본떠 동그랗게 만든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미스 샤넬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포크를 들었다.“이 케익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성연이 손을 흔들었다.“모두 먹는 것들이에요. 미스 샤넬. 많은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