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시간, 성연은 늘 하듯이 보건실에 가서 잠을 잤다.그녀가 보건실에 갈 때마다 서한기는 항상 먹을 것을 준비해서 내놓았다.모두 성연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보통은 주는 대로 먹었으나, 어쩐지 오늘은 한 번 휙 보기만 하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서한기의 눈에 의혹의 빛이 들어찼다.“보스, 배고프지 않아요? 음식은 먹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몸에 좋지 않아요. 아니면 이것들이 당기지 않는 겁니까?”“벌써 먹었어.” 서한기의 수다를 듣고 싶지 않은 성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드셨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서한기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언제 드셨어요? 설마 아침을 말하는 건 아니죠?”“아니야. 방금 식당에서 먹고 왔어.” 서한기의 시끄러운 잔소리에 짜증이 난 성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조금 전 수업이 끝났자, 몇 명의 여자 아이들이 함께 밥 먹으러 가자고 성연에게 왔다.원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또 자신이 북성남고에 온지도 꽤 되었지만 아직 식당에 가서 먹은 적이 없다는 생각에 승낙했던 것이다.귀족학교답게 학교 식당의 음식들이 다 괜찮았다.“식당요?” 서한기가 속으로 놀랐다. “보스도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어요?”성연이 눈을 치켜 뜨며 흘겼다.“왜? 나는 식당에 가서 먹으면 안돼?”“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요. 제 말은 보스가 워낙 귀한 신분이잖습니까? 그러니 식당 같은 곳과는 어째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서한기가 얼른 변명을 했다.“네가 나에게 주문해 준 배달 음식이 식당보다 더 낫다고 생각해?” 성연이 서한기를 비웃었다.서한기는 앞에 놓여있는 플라스틱 도시락을 쳐다보았다.‘아니, 배달 음식이 어때서? 최소 식당보다 종류는 더 다양하잖아.’‘요즘 배달 음식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어?’但是这个人如果是自己的老大,那就正常了。‘하지만 이 사람이 우리 보스라면 말이 달라지지.’자신이 좀 찌질했음을 서한기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그는 어물 슬쩍 웃으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뒤, 백화점에서 옷을 사서 직접 갈아입은 성연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원래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북성남고의 교복은 너무 눈에 띄었다.그렇다고 교복을 입고 소지한이랑 만날 순 없지 않은가?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갔다.소지한은 레스토랑 위층 전체를 예약해 두었다.여기서 내려다보면 북성 시 전체의 경관이 한 눈에 들어왔다.촘촘히 이어진 조명으로 반짝이는 야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레스토랑은 이미 깨끗이 정리되어 소지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워낙 알려진 소지한의 신분으로 인해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식사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빽빽이 둘러싸여 제대로 식사할 수 없을 터였다.성연이 들어가자마자 안에서 맑고 깨끗한 음성이 들려왔다.“송성연, 여기야.”성연의 뒤를 따르던 종업원이 소지한의 음성을 듣고 성연을 힐끗 쳐다보았다.하, 한숨을 내쉰 성연이 멋쩍은 듯 코만 만지작거렸다.이렇게 큰 식당에 소지한 혼자 있었다. 고개만 들면 바로 보이는데 굳이 큰 소리로 부를 건 또 뭐란 말인가?‘소지한, 저는 자신이 얼마나 유명한지 모르는 거야?’성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청수한 얼굴의 소지한은 마치 예술조각 같이 어디 한 군데 흠잡을 곳이 없었다.화장을 지운 상태인데도 피부는 또 어찌나 깨끗한지.오늘 성연을 만나러 온다고 일부러 캐주얼한 차림을 해서인지 온몸 전체에서 부드러운 빛을 뿜어내는 듯했다.소지한과는 여러 번 만났으니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성연은 저도 모르게 소지한의 얼굴에 잠시 넋이 나갔다. 사실 저 얼굴은 정말 치명적이다.과연 아시아 여성들의 ‘국민 남편’감 1순위에 손색이 없을 정도다.얼굴 하나만으로도 사람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하지만 잠시 멈칫했던 성연은 곧바로 다시 침착함을 되찾아 응대할 수 있었다.이미 다년간 친구로 지내왔는데, 새삼 저 얼굴에 미혹된다는 게 웃기지 않겠는가?소지한이 성연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손을 뻗어 성연의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송
“이 녀석.” 어쩔 수 없다는 듯 소지한이 고개를 저었다.“생일 선물을 주러 왔어. 지난 번엔 촬영 때문에 직접 못 줬잖아. 그래서 지금 직접 건네주려고 바로 달려온 거야.”뒤자리에서 정교하게 포장된 상자를 집어 든 소지한이 성연에게 건넸다.애초에 뉴스 기사를 통해 들은 바로는 소지한이 자신에게 사파이어 목걸이를 선물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성연이 케이스를 열어 보니 반짝이는 목걸이가 안에 조용히 누워 있는 게 보였다.조명 아래에서 무수한 파란 빛을 뿜어내고 있는 목걸이 뒤에는 성연의 이름과 생일이 새겨져 있었다.살짝 손끝으로 쓰다듬어 보니 감촉이 좋았다.목걸이를 구경한 성연이 케이스와 함께 받아 든 채 웃으며 말했다.“고마워. 마음에 들어.”메인 메뉴는 스테이크였다. 소지한은 자신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잘게 썰은 다음 성연의 앞에다 옮겨 주었다.“천만에. ‘오빠’ 라고 불러주면 더 기쁠 텐데 말이야.”성연은 편안한 마음으로 소지한의 서비스를 즐겼다. 두 볼이 빵빵할 정도로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 씹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마치 도토리를 입에 물고 있는 다람쥐 마냥.“음…… 다음 생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성연과 실랑이하지 않은 채 계속 스테이크를 썰어준다, 물을 따라준다 하며 바쁘게 식사 시중을 들던 소지한도 드디어 식사를 시작했다.성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도시로 돌아오니 어때? 적응은 됐어?”“뭐 그럭저럭. 그치만 시골에 있을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애.” 성연이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시끄러운 도시보다 평온한 시골을 더 좋아하는 성연이다. 시골의 나이 많은 어른들은 친절하면서도 편안함을 주었다.북성 시에 와서 못 볼 꼴을 너무 너무 많이 보았다.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은 강씨 집안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밉상들이었다.소지한은 성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성연이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다.성연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던 소지한이 부드러운 음
성연과 함께 저녁을 먹을 생각에 무진은 일찍 퇴근하고 이제 막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하지만 돌아온 집 어디에서도 성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무진이 집사를 불러 물었다. “성연이는요?”집사가 고개를 저었다.“도련님, 저도 영문을 모르겠네요. 작은 사모님이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무진이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성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은 한창 소지한과 웃고 떠들고 있던 중이었다.테이블 옆에 두었던 휴대폰이 울리자 성연이 고개를 돌려 발신자를 확인했다. 뜻밖에도 강무진이었다.성연의 표정이 한순간에 변하자 소지한이 물었다.“왜? 누구야?”성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야. 너 먹고 있어. 나가서 전화 좀 받고 올게.”소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화장실에 들어간 성연이 수신 버튼을 눌렀다.전화가 연결되는 것을 본 무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어디야?” 무진이 물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 초조함이 짧은 한 마디에 묻어났다.무진의 음성을 들은 성연은 그제야 저녁 먹고 늦게 들어간다는 걸 무진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음을 상기했다.만약 무진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다.성연이 대답했다.“친구와 밥 먹고 있었어요.”무진의 음성이 곧장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내가 데리러 갈까?”차마 강무진 더러 데리러 오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만약 와서 소지한을 보게 된다면 뭐라고 설명할 지 난감하기도 하고.그녀 같은 일반인이 대스타와 식사를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니까.그러니 강무진이 모르게 하는 편이 좋았다.그러자 성연이 대답했다.“괜찮아요. 거의 다 먹었어요.”“그래, 그럼 조심해서 들어와.” 무진 또한 더 이상 긴말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성연이 손을 씻은 후 밖으로 나갔다.소지한은 서빙 직원에게 주스 두 잔을 다시 건네어 받았다.성연이 탄식하며 말했다.“나를 돼지처럼 살찌울 생각이야? 너는 스타잖아? 스
저녁을 다 먹은 후, 소지한은 성연과 헤어졌다.그러나 소지한과 함께 있는 성연의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찍혔다.그날 저녁, 뉴스, 인터넷 등의 머리기사는 모두 ‘소지한과 밀회를 즐긴 묘령의 여성’이었으며, 두 사람의 연애가 드러난 것으로 의심받았다.인터넷이 발칵 뒤집혔다.수많은 팬과 네티즌들은 모두 소지한의 SNS에 글을 남겼다.[이건 사실이 아닐 거야. 나 실연당했어.]댓글 창의 메세지는 모두 이 한 줄로 도배되었다.그토록 오랫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며 여태 어떤 여자 스타와도 스캔들이 난 적이 없었던 소지한이었다.그러니 한 번 말이 나오니 모두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지난번 언론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물을 보낸 소지한을 떠올린 팬들은 소지한 스스로 이 스캔들을 사실로 확증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진흙탕 속에서도 고고하고 깨끗했던 우리 오빠야. 그런데 감히 누가 우리 오빠에게 손을 댄 거야? 도대체 누가?”팬들은 모두 눈이 헐도록 울고불고 난리였다.소지한이 여자친구가 없다면 팬들은 모두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어느 누구도 그를 얻을 수 없으니 모두에게 공평한 셈.그러나 지금 누가 소지한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그들에게 떠든 것이다.오빠 부대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인터넷 사이트가 소지한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기사로 도배되었다.사진 속의 소녀는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흰색 맨투맨을 입은 채 옆모습만 살짝 드러낸 상태였다. 급하게 찍었는지 초점이 잘 맞지 않아 정확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집에 돌아온 성연은 소파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무진을 보았다.성연이 먼저 그에게 인사를 했다.“다음에는 밥 먹고 오게 되면 미리 말할게요.”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그리고 성연을 보며 이어서 말했다.“앞으로 나는 항상 집에 와서 밥을 먹을 거야.”원래 방에 갈 생각이었던 성연이 반쯤 갔다가 다시 돌아섰다. 무진이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뭐 먹었죠?”무진이
손건호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사모님이 어떻게 소지한을 알고 있을까요? 지난번에 소지한이 언론 앞에서 공개적으로 한 사람의 생일을 축하한 적이 있었는데, 설마 사모님은 아니겠지요? 마침 사모님 생일도 그날이었고요.”무진이 손한기의 휴대폰을 치웠다. 무진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보스?” 무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어디 불편한가 싶어 손건호가 물었다.무진이 미간을 찡그렸다.“먼저 돌아가. 이 일은 당분간 할머님에게 알리지 말고.”“알았습니다.”대답한 손건호는 강씨 집안 사람들이 아직 알지 못한 틈을 타 안금여에게로 들어가는 정보를 통제했다.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곳 저택에도 안금여의 사람들이 있었다.집사도 가끔 불려가 여러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이런 식으로 사람을 지켜보는 걸 무진은 극도로 싫어했다. 감시와 다를 바 없이 느껴져서.나중에야 할머니 안금여의 관심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자신의 병만 아니었다면 안금여도 지나치게만 묻고 살피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그에게 아주 큰 개인 공간을 주었다.무진은 결국 이 사람들이 자신의 곁에 머무는 걸 묵인했다.일이 있든 없든 이쪽에서 저쪽으로 소식을 전할 것이다.이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안금여가 송성연을 얼마나 아끼는지.그런 성연에 관한 정보니 반드시 중요하게 다룰 것이다.알게 되는 순간 가장 먼저 할머니에게 전해질 것이다.그래서 무진은 손건호에게 빨리 통제하란 지시를 내린 것이다.그러나 이 일을 겪으면서 그도 고민해야 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할머니 사람들을 깨끗이 정리할 것인지 말 것인지.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무엇을 해도 불편할 터.무진이 안금여를 속이려는 것은 아니다.그저 자유롭지 못하다는 단순한 불편감일 뿐.게다가 오늘 밤은 기분이 엄청 나쁜 터라 평소 마음속의 응어리 같은 것들을 떠올리자 더 거슬린 것이다.서재가 휑뎅그렁했다.무진이 인터넷에 접속하자 자극적인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전체적인 실루엣으로 보면 잘 어울리는 두
무진이 위층으로 올라가니 성연은 이미 목욕을 끝내 나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참을성 있게 옆에서 기다리던 무진은 드라이기가 멈추자 입을 열었다.“오늘 어디 갔었어?”성연이 눈살을 찌푸렸다.“말했잖아요? 친구를 만나러 갔다고.”아까 무진이 전화를 했을 때, 친구와 밥을 먹고 있다고 말했었다.‘그런데 지금 또 다시 묻는 건 뭐야? 강무진이 단기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거야? 아니면 뭐 때문인데?’무진이 다시 또 물었다. “어떤 친군데?”성연을 똑바로 쳐다보는 무진의 눈빛이 형형했다. 말투도 다소 거칠었다.성연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무진을 쳐다보았다. ‘저 말이 어째 좀 흉흉하게 들리는 건 왜지?’그러나 또 아무 생각 없이 설명했다.“예전에 알던 친구예요.”무진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친구라면 조심해야지. 온통 기사로 시끄러워.”바로 이어서 휴대전화를 성연에게 건네주었다.깜짝 놀란 성연은 즉시 무진을 보았다. 그리고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알아차렸다.‘톱스타를 알고 지내는 이유를 설명하긴 쉽지 않을 것 같은데…….’후대폰을 돌려받은 무진은 목욕을 하러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더 이상 물어볼 뜻이 없다는 듯.하지만 성연은 무진이 여전히 화가 나 있음이 느껴졌다.게다가 그 화가 절대 가볍지 않은 느낌이다.그러나 성연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친구면 친구인 거지. 밥만 먹었을 뿐 별다른 것도 없었는데 뭘.’단지 소지한의 신분이 좀 특수한 것뿐이다.무진이 무슨 화를 저렇게 내는지 모르겠다.‘왜 남의 사생활까지 신경 써? 그런 법이 어딨어?’성연도 이유 모를 그의 화를 상대하기 귀찮았다.야식 거리를 찾아 주방으로 갔다.소지한과 저녁으로 많이 먹었는데도 왠지 또 위가 텅 빈 것 같았다.자꾸 뭔가 당겼다.그래서 주방으로 내려가 요기 거리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평소 일찍 쉬러 가던 집사가 오늘 저녁에는 가지 않고 있었다.집사에게 배고프다고 하소연한 성연.집사도 요리 솜씨가 꽤 좋았다. 그리고 성연의 평소 입맛을
야식을 먹은 후 방으로 돌아온 성연은 무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냥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잠을 잤다.일찍부터 졸렸던 성연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얌전하게 자는 성연의 얼굴을 보던 무진은 이가 근질근질했다.‘아니, 저 혼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거 아냐? 화를 냈는데도 눈꼽 만큼도 신경을 안 써?’무진이 다가가 성연의 얼굴을 꼬집었다.얼굴이 하얀 성연의 볼이 금세 붉어지는 것을 본 무진의 눈에 한순간 허탈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마음속의 답답함은 희한하게도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무진은 속으로 묵묵히 자신의 한계치를 하향 조정했다.성연이 내일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건다면 용서해야지,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성연의 반사신경이 뛰어난 편이지만, 그 남자에게 이런 뜻이 있다해도 성연은 모를 것이다.‘아마 진짜 친구이겠지.’마음속으로 묵묵히 자신을 위로한 무진이 겨우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다음 날 아침.아침 식사 시간, 먼저 일어난 무진이 식탁 앞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눈이 자꾸 위층을 향하고 있으니, 눈치 빠른 사람들은 모두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터.하지만 어찌나 감쪽같이 위장을 했던지 집사와 비서 손건호도 모두 무진의 작은 동작들을 놓치고 말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성연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평소처럼 성연이 자신에게 인사를 할 것이다.그런데 오늘 아침, 성연은 마치 그를 보지 못한 것처럼 앞을 쓰윽 지나가 버렸다. 그야말로 투명인간 취급을 한 것이다.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았더라면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한 무진이다. 그러나 성연은 아침식사 내내 무진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아니 도대체 누가 잘못했는데? 어떻게 자신과 성연의 입장이 바뀐 것 같지?’성연이 뜻밖에 화를 내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화를 내는 거냐고?무진은 울화가 치밀며 가슴이 아플 정도로 답답했다.조만간 성연 때문에 화가 나 죽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아침을 다 먹고 입을 닦은 성연이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성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말을 마친 사무는 옆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뚱뚱한 남자를 재빠르게 발견했다.“아저씨, 바로 저 사람이 사진이를 이렇게 다치게 했어요!”사무는 우렁찬 목소리로 방금 엘리베이터를 나온 남자를 가리켰다.팍!쿵!서한기가 재빨리 깔끔하게 손을 쓰자, 남자의 커다란 몸은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심지어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남자는 온몸의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 아이들은 네가 감히 건드릴 수도 감당할 수도 없어! 꺼져!”피에 굶주린 듯 핏발선 눈으로 쏘아보면서, 서한기가 나지막하게 외쳤다.쓰러져 있던 남자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온몸의 통증을 느끼면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다.그러나 막 일어나려던 남자는 등줄기의 시큰한 통증에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아!”다시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결국 주저앉은 채 고통스럽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다른 쪽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무진은 자연스럽게 이쪽의 소동에 시선이 향했다.사람들 속에서 처참한 모습의 마케팅팀 팀장과, 그 앞에 서서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미간을 찌푸린 무진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뒤를 바라보았다.“아이들이 아직 안 갔어?”그리고 무진이 엘리베이터 문을 나설 때, 손건호는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던 서한기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그들 두 사람은 예전 진성 조직의 공동 대장이었다. 여러 해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인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지난 일 때문에 서로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이 가슴이 찢어질 듯한 느낌도 그들 두 사람만 알 수 있을 뿐...왜인지는 모르지만 서한기의 망설임이 느껴지자,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아직도 안 가보고 뭐 해?”‘저 두 아이는 뭔가 나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머릿속에서 어떤
아직도 물린 곳에 통증을 느끼고 있던 마케팅팀 팀장은, 갑자기 사무가 이런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심적으로 위축되었다.‘어린 애가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방금 전에 행동은 치밀하게 생각하고 한 건가?’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던 마케팅팀 팀장은 곧 한숨을 돌렸다.‘내가 뭘 무서워하는 거야? 기껏해야 아이일 뿐인데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이렇게 생각하자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변했다.“이 조그만 녀석이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이렇게 버릇없게 말이지!”사무는 코웃음을 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이 버릇없는 새끼가 감히 욕을 해! 보아하니 너는 혼나는 걸로도 부족하겠어!”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줄곧 말을 하지 않던 무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됐어, 너희 두 아이는 빨리 나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때문에 너희 엄마가 회사의 징계를 받게 돼.”사무는 무진의 얘기하는 모습을 힐끗 보았다. 전혀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볼 뿐.‘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맞는’ 걸 보면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 이런 아버지라니! 얼마나 마음이 독한 사람인지 충분히 알겠어.’‘오늘 아버지를 찾아온 건 결코 잘한 선택이 아닌 것 같아.’사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마케팅팀 팀장을 흘겨보기만 했다. ‘얼마나 더 웃을 수 있는지 보겠어. 조금 있다가 한기 아저씨가 시원하게 혼내 줄 테니까!’조심스럽게 여동생을 일으켜 세운 사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동생을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사진아, 가자!”사진도 지금은 여기에 더 있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문 채 오빠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입구로 걸어가던 사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상 앞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무진도 마침 사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무진은 왠지 가슴이 아팠다.그러나 무진이 움직이기 전에, 고개를 돌린 사진은 오빠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마침내 소동이 마무리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두 아이는 쌍동이겠지. 한 네다섯 살 정도 된 것 같아.’‘아이들 나이와 지금 상황을 보면...’‘혹시 이 두 아이가 정말 보스와 사모님 사이의 아이인 거야?’‘사모님이 낙태한 뒤 출국한 게 아니라, 모두를 속이고 아이들을 낳은 건가?’너무나 엄청난 상상이라서, 손건호는 곧 뭔가 큰일이 닥칠 거라는 느낌마저 들었다.지금은 원래 마케팅팀 팀장이 보고하면서 무진의 눈에 들 기회를 찾던 중이었다.그러나 오늘 보고는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무려 30분 동안이나 저기압인 대표의 기세에 눌려 있던 상태였다.‘지금 대표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면 칭찬을 받겠지.’눈빛을 빛내던 남자는 손을 비비면서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너희들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빨리 나가지 않고 뭐 해!”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면서, 마케팅팀 팀장이 사진의 여린 팔을 꽉 쥐었다.“어린 애들이 함부로 아빠라고 거짓말이나 하다니, 도대체 부모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이게 얼마나 심한 장난인지 알기나 해?”마케팅팀 팀장은 거칠게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무방비 상태였던 사진은 그저 팔이 꽉 잡힌 채 끌려갈 뿐이다.사진은 본능정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어린아이가 어떻게 어른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까?사진의 발버둥은 결국 전혀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했다.“오빠, 오빠, 사진이 너무 아파!”“아아, 아파...”팔의 통증에 몸부림치던 사진은 기어이 기회를 틈타서 남자의 팔을 물었다.갑작스럽게 팔에 통증을 느끼자, 남자는 아이들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서 나뒹굴었다“아! 이 계집애가 감히 나를 물었어!”잔뜩 살이 찐 남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으름장을 놓았다.갑자기 바닥에 떨어졌지만, 사무는 별다른 이상 없이 일어섰다.하지만 팔을 물린 남자는 사진을 떨쳐내려고 거칠게 밀쳤다.결국 힘에 밀린 사진은 의자에 이마와 팔을 부딪혔다. 부딪친 곳은 바로 빨갛
사진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어제 오빠 컴퓨터에서 아빠의 사진을 봤을 때도 천하제일 미남인 아빠 모습에 감탄했지만!오똑한 콧날에 굳게 닫힌 두 입술, 단정한 헤어 스타일에 온몸에 남성미가 가득한 건장한 모습!지금 그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경외심이 들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이 모든 아우라는 바로 책상 앞에 앉은 무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야!’‘우리한테 이런 멋진 아빠가 있다니!’ 지금 사진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아빠!”두 아이는 곧바로 책상 앞으로 달려갔고, 사진이 크게 외쳤다.가뜩이나 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에 ‘아빠’라는 소리가 들리자, 무진은 미간을 점점 찌푸리면서 그윽한 눈빛으로 두 아이를 훑어보았다.“어디서 온 애들이야? 언제부터 우리 회사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게 됐지?”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뒤로 젖혔다.“게다가 아무 데서나 아빠라니?”기쁨에 겨워 아빠에게 다가가려던 사진은 무진의 바로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의 눈에서는 순식간에 눈물이 솟아났다.애절하게 흐느끼면서 사진이 말했다.“아빠, 바로 우리 아빠잖아! 우리는 오늘 특별히 아빠를 찾으러 온 거야.”아이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무진은 마치 가슴속이 꽉 막힌 듯했다. 당황한 무진은 얼른 내선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두 아이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하는 무진의 목소리에는 왠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나는 너희들 아빠가 아니야. 거짓말하면 안 돼. 얼른 너희 엄마한테 가야지.”잠시 후, 수화기에서 시원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네, 보스.]무진은 다시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들어와서 두 아이를 데려가.”[아이들요?] 손건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응.”무진은 단지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아빠는 우리가 그렇게 싫어요?”갑자기 사진의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이지만
사무가 눈을 치켜뜨면서 말했다. “그래야 해?”다시 한 번 우유 막대사탕을 입에 넣은 채, 사진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그럼, 오빠 그건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데?”“하지만 내 말은 사실이야, 설마 네 오빠가 뛰어나지 않다는 거야?”사무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진지한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사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면서 다시 빌딩을 바라보았다.“우리 그래도 일을 해야지. 사람들이 우리가 아빠를 찾으러 올라가게 할까?”웃음을 거둔 사무는 입술을 꼭 닫은 채 앞을 보면서 진지 모드로 돌입했다.“당연히 우리를 못 들어가게 할 거야.”“그럼 어떡해?”사진은 바로 풀이 죽었다.‘이미 집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빠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정말 피곤해.’다음 순간.사진은 익숙한 오빠 손에 이끌려서 따라갔다.사무가 앞에 서고 사진은 따라서 함께 빌딩의 옆쪽의 작은 문으로 걸어갔다.입구에 선 두 아이는 작은 키 때문에 아주 순조롭게 입구의 경비원 순찰을 피할 수 있었다. 한바탕 민첩하게 왔다 갔다 한 끝에 이미 계단 앞에 도착했다.고개를 든 두 아이는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입을 삐죽 내민 사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텔레비전에 나오는 회장 사무실은 모두 맨 꼭대기층에 있어. 오빠, 아빠도 꼭대기층에 있는 건 아니겠지.”사무도 이 많은 계단을 보자 약간 풀이 죽었다.그래도 앳되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로 사무가 나지막히 말했다.“그 점은 드라마도 틀리지 않았어.”“아!” 오빠가 말을 하자 사진의 작은 다리는 벌써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만약에 이렇게 높은 층을 걸어서 올라간다면, 오늘 내 다리는 아마 망가지겠지?사진이 자신의 짧은 다리를 위해 ‘묵념’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사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가자, 위층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2층.지금은 출근 시간이라서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느라, 오히려 두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진 오빠의 이전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면, 내가 했던 짓도 모두 드러나지 않을까?’예민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처럼 느꼈다.‘약효가 줄어들면 그 뒤에는 반드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할 거야.’ ‘안 돼. 방법을 생각해야 해. 그런 상황이 절대 일어나게 해서는 안 돼.’찢어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무진을 보자, 예민주의 머릿속에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그 약을 다시 한번 더 먹여도 될까?’‘하지만... 하지만 또 복용하면, 나도 잊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겨.’‘이거 어떻게 해야 해?’일시에 모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모두 머릿속에 맴돌면서, 가뜩이나 초조한 예민주는 머리가 터질 듯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돌린 무진의 눈은 전혀 초점도 맞지 않은 채 암울해 보였다.걸음을 떼고도 마음의 피로로 인해서 이미 얼마나 붕 떠있는지도 몰랐다.무진이 예민주의 곁으로 다가가자, 예민주가 무의식중에 무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진은 다른 사람의 접촉을 원하지 않는 듯이 아주 교묘하게 예민주의 손길을 피했다.차로 향하면서 예민주에게 단 한 마디만 남겼을 뿐이다.“좀 있다가 너 혼자 돌아가. 오늘 일은 잠시 미루자.”그리고 곧바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남겨진 예민주만 어수선한 심정이었다.이어진 며칠 동안 무진은 여전히 평소와 마찬가지로 바빴다. 낮에는 업무를 볼 뿐만 아니라 접대도 해야 했다.그날, 산기슭의 별장 2층.위층에서 성연의 차가 점차 사라지는 걸 본 두 아이는 신속하게 작은 숄더백을 꺼냈다.사진은 동그란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맞은편에 있는 사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오빠, 정말로 이렇게 할 거야?”고개를 끄덕이는 사무의 눈에는 확고한 결의가 가득했다.“응, 엄마가 그날 돌아온 뒤 요 며칠 상태가 어떤지 못 봤어? 엄마는 분명히 아버지를 만났을 거야.” “내가 이미 아버지 위치를 알아냈어. 우리는 곧 아버지를 찾아갈 거야!”지금 집에 두 아이들밖에 없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성연은 낯선
“그렇게 트집을 잡겠다고?”“나는 단지 이 옷을 매우 좋아할 뿐이에요. 나와 무진 오빠의 결혼식에서 입고 싶은데 당신들도 마음에 들었는지는 몰랐는데요?”억울한 듯한 예민주의 얼굴.임서희는 마음이 우울했다. ‘무슨 이런 여우 같은 년이 다 있어? 그야말로 겉만 번드르르한 년이네!’“2억2천만 원! 빨리 카드 결제해요!”말을 마친 성연이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예민주는 마치 성연이 가는 방향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바로 성연의 앞을 막았다.짝!성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로 예민주의 따귀를 때렸다.얼굴의 통증을 느끼자 예민주는 무의식적으로 직접 만든 독약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성연은 이미 진작부터 예민주가 그럴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성연의 오른손에 갑자기 가는 은침 하나가 나타나더니, 예민주의 팔에 바로 박히면서 순식간에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좋은 개는 길을 막지 않는 법이야!”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지금 성연의 눈에서는 불꽃이 타오르면서 온몸의 피가 들끓는 듯했다.“서희야, 가자!”말이 끝나자 성연은 임서희를 데리고 웨딩 숍을 나섰다.오른쪽 얼굴의 화끈한 통증과 주위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느끼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화가 난 예민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무진 오빠!”그러나 다음 순간, 곧바로 문밖으로 나간 무진은 차의 시동을 걸고 바로 성연을 따라갔다. 울부짖는 예민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방금 회사를 나섰던 성연은, 임서희를 먼저 회사로 돌려보낸 뒤에 자신은 혼자 차를 몰고 떠났다.차 안.백미러를 통해 자신의 뒤를 바짝 뒤쫓는 무진을 발견하자, 성연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뭘 하려는 거야?’마음이 초조하자, 액셀러레이터를 바로 끝까지 밟았다. 성연의 차는 넓은 도로 위를 나는 듯이 달려갔다.고가도로 위.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진의 차가 성연의 차에 부딪치면서 곧바로 멈추게 만들었다. 빠른 속도로 달렸기 때문에 관성에 의해서 부딪친 것이다.성연은 입가가 찢어지면서 끈
이곳의 웨딩드레스는 모두 디자이너의 작품들로, 이 웨딩드레스도 당연히 하나밖에 없다. 이걸 예민주가 가져가면, 자신은 당연히 다른 웨딩드레스를 찾을 수밖에 없다.‘게다가 이건 분명히 우리가 먼저 보고 결정했어.’임서희가 무의식적으로 막았다.“아가씨, 이 옷은 우리가 방금 이미 고른 거예요. 면사포도 모두 골랐는데, 아가씨의 이런 행동은 우아하지 않은데요?”임서희는 아주 완곡하게 표현했다.하지만... 예민주는 임서희의 태도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호호, 당신이 어떻게 먼저 골랐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 웨딩드레스는 이미 오랫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거예요.”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이건 원래 일찍부터 내 소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예민주는 임서희의 반응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피식 비웃으면서 다시 직원에게 그 웨딩드레스를 가져오라고 했다.직원이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고 고민하자, 예민주는 짜증이 난 목소리로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너 거기서 뭐하고 있어? 빨리 안 움직여?”직원은 양쪽의 손님들 사이에 낀 채 난처한 표정이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야?’‘이 두 손님들은 척 봐도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지금 웨딩드레스 하나를 놓고 서로 싸우려는 기세인데, 우리는 이쪽을 도와도 안 되고, 저쪽을 위해도 안 돼.’“저는...”직원은 순간 말을 더듬으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래 좋은 기분이던 성연은 예민주에게 방해를 받자, 아예 신용카드를 꺼내서 직원에게 건네주었다.“이 웨딩드레스는 우리가 사겠어요. 카드로 결제할게요.”성연의 목소리에는 말참견을 용납하지 않는 힘이 실려 있었다.성연의 이 말은 또 마침 직원도 정확한 답안을 제시할 수 있게 도왔다. ‘옷을 입어보는 목적은 옷이 어울리는지 보기 위한 것이고, 어울리면 사는 거야.’‘하지만 이들은 지금 입어보는 단계를 건너뛰고 구매하겠다고 하니 가장 명확한 답이겠지.’“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포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말하면서 직원이 은행카드를 받으려고 했다.“잠깐만
지금 직원의 설명을 듣자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어때? 직원에게 한번 입어보게 가져오라고 해볼까?”임서희가 정말 마음에 들어한다는 걸 눈치챈 성연이 다가와서 건의했다.가게 앞.바로 같은 시간에 한 쌍의 남녀가 밖에서 들어왔다. 여자는 앙증맞은 표정으로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매달려 있었다.“무진 오빠, 이 브랜드의 웨딩 숍은 운성에 이곳 한 곳밖에 없어요.” “이 가게 웨딩드레스가 정말 예쁘다고 해요. 심플한 스타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좀 화려한 스타일이 좋을까요?”예민주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했다. 마치 꼬리를 활짝 편 공작새처럼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웨딩 숍 안으로 들어섰다.예민주가 팔을 꽉 잡고 있어서 무진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천천히 팔을 풀었지만 눈빛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좀 심플한 스타일로 해. 그렇게 화려한 걸 입을 필요는 없어.”예민주는 사실 결코 온화한 사람이 아니지만, 무진의 곁에 있으면서 오히려 많이 순해졌다.하지만 평생에 한 번 밖에 없는 결혼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무진의 말이 떨어지자, 예민주는 무의식 중에 그 말에 반박하려고 했다.“하지만...”‘지금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저건... 송성연이잖아?’머릿속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다시 자세히 보니 정말 성연이 맞았다.말을 하다가 만 예민주가 마치 뭔가에 시선이 고정된 듯이 바라보자, 무진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예민주의 시선을 따라갔다.‘왜 또 저 여자야?’성연을 보는 순간, 무진은 다시 한번 참기 힘든 두통을 느꼈다.‘왜, 왜 매번 저 여자를 볼 때마다 냉정을 유지할 수 없는지 모르겠어. 또 익숙한 느낌도 있지만, 분명히 저 여자를 만난 적도 없잖아.’또각또각!무진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예민주는 성연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갔다. 이미 조금 전처럼 놀라지 않았고, 온통 거만한 표정을 지으면서.“공교롭게도 이런 데서 만나게 되다니.”임서희와 함께 면사포를 고르고 있던 성연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눈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