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애벗 쪽의 회담이 끝난 뒤 무진은 또 다른 두 기업과 영상 회의를 진행했다.믿고 싶지 않지만 생생한 현실이었다.강상철과 강상규 등 무진을 무시하던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예전 강무진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생각하면 지금 얼마나 난감할까.강무진이 보여주는 현실에 그야말로 자신들의 얼굴이 땅에 처박힌 꼴이었다.모든 회의가 끝나자 주주들은 모두 조용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더 이상 말할 면목이 없는 표정들이다.천지분간 못하고 눈앞에서 껍죽댔는데 결국 강무진이 그룹의 리더였던 것이다.운경 곧장 일어나 선언했다.“요 몇 년 동안 회사가 지금의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모든 게 무진이 뒤에서 손을 쓴 덕분입니다. 이 일은 회장님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지금 회장님의 연세는 쉬셔야 하는 게 맞습니다. 강무진은 자신의 신분에 맞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이때 무진은 예전처럼 침묵으로 대처하지 않고 마침내 입을 열어 발언했다.“여러분은 조금도 불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계속 회사에 남아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들을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회사를 더 잘 이끌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의견을 제기하셔도 됩니다.”무진이 차가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패기가 넘치는 말투에 그동안 애써 가두어 뒀던 기운이 발산되자 다들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타고난 카리스마에 두려움에 몸이 떨릴 정도였다.소위 지배자의 기운이란 게 아마 이렇지 않을까.주주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중요한 합작회사들과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는 무진이 그룹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고 봐야 했다.지금 만약 화가 난 강무진이 모든 인적 자원을 거둬 버리기라도 한다면자신들은 조금도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경악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주주들의 모습을 운경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지금 저들이 목격한 강무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평소 말하지 않은 건 그들과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뿐.강상철과 강상규까지 더하니 진짜 못 볼 지경이었
모두 의문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린 운경이 숨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 해 큰 오빠와 올케가 사망한 이후, 무진이 또한 알 수 없는 살해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려 왔습니다. 요 몇 년 동안 여러분들이 편안하게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들이 ‘쓰레기’라고 부르던 무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주주들은 순간 한 대 크게 얻어 맞은 듯했다. 창피해서 고개조차 들기 힘들었다.주주들 하나같이 닳고 닳은 사람들이다. 자연히 자신들에게 이익을 줄 사람을 편들 것이다.강무진이 회사를 이어받아 경영하는 것에 아무런 이견이 없는 게 당연했다.이날 회사 경영권을 정식으로 넘겨받은 무진이 드디어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그러나 회장직에 관심이 없는 무진은 그룹의 총괄 대표이사 직을 넘겨받았다. 최고 의결권을 가진.회사 직원들 동작도 빠르지, 회사 내에 즉시 무진의 집무실이 만들어졌다.의심할 여지없이 그룹 건물 전체에서 채광이 가장 좋은 위치였다.그의 위상이 단연 돋보이는 상황이다.그동안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 안금여의 사무실에서 일을 봐 왔었다.사실 무진에게는 별도의 사무실이 있었다.회사 내 아는 사람이 없었을 뿐.사무실 준비를 벌써 끝내다니 회사 직원들이 그래도 눈치가 좀 있는 듯하다.직원들이 새로 마련한 소파에 앉아 있다 회의실에서 나온 무진이 휠체어에서 일어나 직접 걸어 들어왔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운경의 눈엔 염려의 빛이 아직 남아있었다.“다리는 괜찮아? 의사가 서서 걸어도 된다고 했어?”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고모 운경이다.가까스로 좀 나은 터라 하루아침에 다치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괜찮아요. 의사가 운동을 많이 하는 게 다리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요.” 무진이 운경을 달래듯 웃었다.성연의 치료 방식이 아주 좋은 덕에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빨리 회복되었다.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그의 다리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그럼 됐어. 성연이가 도와준 거지? 엄마 말씀이 맞나 봐. 성연이
주주총회 직후.강상철의 집으로 들어서는 강상철, 강상규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형님, 무진이 다리 진짜일까요?” 사실 눈살을 찌푸린 강상규가 진짜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무진이 뭔가 기억을 떠올린 건 아닐까, 하는.“걷기까지 했는데 가짜겠어? 내가 그 놈을 얕잡아보았어. 지금 그 놈 능력이라면 우릴 속이는 것도 간단했겠지.”강상철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형수 안금여 쪽에서 이런 수를 남겨 두었을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간신히 손에 넣었는가 싶었더니 또 이렇게 빠져나가 버렸다.본가 형수 쪽은 정말 운이 좋은 듯하다. 그런데 어째서 매번 이렇게 공교롭게 여겨지는 거지?괜히 그들을 힘들게 한 셈이 아닌가.가만 생각해 보면 그들을 힘들게 한 것도 아니지 않나?큰형님이 계실 때 늘 눌려 살았는데, 형님 가시고 난 뒤 또 눌려 지냈다.자신들보다 일찍 태어난 게 그렇게 대단한 거란 말인가?강상철의 마음에는 깊은 불만이 자리하고 있었다.“그럼 이제 어찌 해야 합니까?” 입을 연 강상규의 얼굴이 음산했다. 강무진의 명이 그리 길 줄 누가 알았겠나.가장 마음을 놓고 있던 대상이 거꾸로 화근이 되었다.“지금의 강무진은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지.”강상철이 양 입술을 힘주어 다물었다. 본가의 회생을 누구보다 원치 않는 이가 바로 자신이었다.그러나 또 누구보다 정세 판단이 빠르기도 했다. 지금 강무진과 강하게 부딪혀봐야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아니 엄청난 손해를 볼 수도.기회를 봐서 일격에 그 놈을 보내 버리는 수밖에는!“어떻게…….”강상규 또한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으나 결국 한숨만 길게 내쉴 뿐이었다.매번 성공을 코 앞에 두고는…….강상규가 강상철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형님, 운이 나빴습니다. 우리가 큰집의 자리를 대신할 날이 꼭 올 겁니다. 그땐 저 눈엣가시 같은 놈을 반드시 뽑아버릴 겁니다!”“네 말이 맞다. 형수를 치매로 만든 우리가 아니냐? 강무진을 못 일
회사 업무를 시작하면서 무진은 먼저 회사 내 썩은 부분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회사를 인수한 셈이다.그동안 강상철과 강상규 측은 훼방을 놓지 않고 의외로 숨을 죽인 채 조용했다.이제 이 일도 완전히 일단락된 셈.운경의 속도 상당히 풀렸다.오랫동안 숨 죽인 채 참기만 하다가 드디어 어깨를 펴게 되었다.찍 소리 못하던 두 늙은이를 보니 막혀 있던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도 같다.마침내 큰집 본가에서 둘째, 셋째 일가를 제압할 인물이 나온 것이다.기분 좋아 보이는 운경을 보던 무진도 마음이 홀가분했다.하지만 아직 방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고모, 안심하긴 아직 일러요. 쉽게 단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강상철과 강상규가 회장직을 노린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지금은 잠시 숨 죽인 채 엎드려 있을 뿐.위험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강상철과 강상규가 있는 한 선선히 물러날 사람들이 아니었다.그 점을 염려하고 있던 운경 또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 너도 당분간 최대한 조심하도록 해. 외출할 때도 인원을 좀 더 배치해서 빈틈을 보이지 않도록 하고!” 마음을 놓지 못한 운경이 신신당부를 했다.“아직은 대놓고 저에게 손을 쓰지는 못할 겁니다. 현재 제 수중에 있는 방대한 자원 때문에라도 최소한의 좋고 나쁨은 구분하겠죠. 설마 그 정도도 분간 못 할리가……. 어쨌든 고모가 더 조심하셔야겠어요.”무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저들의 향후 행동을 분석했다.무진의 말에 운경은 외려 대수롭지 않은 듯 손을 휘휘 저었다.“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저들이 말한 것처럼 나는 출가외인이야. 그저 직장인으로 회사를 다니는 사람일뿐이니 나에게 손을 대지는 않을 거야.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할 걸?” “할머니 쪽을 지킬 사람들을 좀 더 보내도록 할게요.” 무진이 곧바로 운경의 뜻을 이해했다.지금은, 확실히 할머니 안금여가 더 위험한 상황이 맞았다.할머니는 이미 치매가 온 상태였다. 예전이라면 더 이상 작은 할
무진의 일이 알려지고 무진 또한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무진은 매일 꼬박꼬박 회사에 나가긴 하지만 예전과 매한가지로 일을 하는 듯 마는 듯했다.마치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하지만 회사는 이미 완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채.이는 예전에도 무진이 회사를 관리해왔다는 강운경의 말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인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많은 주주들이 안금여를 만나려 고택을 방문했으나 사실은 강무진의 비위를 맞추려는 이가 대부분이었다.예전에야 온갖 비난들을 퍼부었지만, 이제 회사의 실권이 무진의 손아귀에 들어왔으니…….만일 스스로 뒤통수라를 친다 해도 이젠 득보다 실이 많은 상황인 것이다.그들의 방문 목적이야 우선 무진 태도를 떠보고 또 관계도 맺어 놓고 싶은 마음일 터.현재 강무진의 힘이 막강하니 관계를 터 두어도 좋으리라 생각하는 듯했다.그렇지만 고택 입구에 막 도착한 그들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이보게, 손 비서. 우리는 회장님을 뵈러 왔네. 이전에 업무가 바쁜 관계로 아직 회장님을 뵐 겨를이 없었어. 어쨌든 회장은 우리 회사의 일등공신이 아니신가? 당연히 찾아 뵙고 안부를 여쭈어야지.”무진의 실력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주주들의 눈에 비치는 손건호의 위치 또한 같이 상승한 듯.무진의 비서 손건호를 대하는 주주들의 태도가 매우 정중했다.예전이었다면, 벌써 비난하고 난리였을 것이다.이 늙은이들은 항상 시류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꼿꼿하게 똑바로 선 손건호의 말투가 어째 좀 차갑다.“회장님은 지금 휴식 중이십니다. 회장님은 지금 무엇보다 안정이 필요하신 상태입니다. 그러니 주주 여러분들께서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강무진의 곁을 지킨 시간이 오래되어서인지 손건호의 몸에도 자연 특별한 아우라가 있었다.비록 강무진 같은 위압감은 아니지만 사람을 긴장시키기만 매한가지였다.앞으로 나섰던 주주가 마른침을 삼킨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강무진 총괄
손건호가 모든 해외 관계망을 총동원해서 브라이언 교수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었지만 시간만 지체되고 아직도 찾지 못했다. 결국 치료제를 구하지 못해 안금여의 병세는 그대로 방치되다시피 한 상태였다.무진뿐만 아니라 손건호도 애가 탈 지경이었다.그런 무진 측에 비하면 성연 측은 진전이 있었다.그동안 틈만 나면 연구소에서 지낸 성연이다.서한기 또한 성연 옆을 지켰다. 보스가 일하는데 수하 직원들이 쉴 도리가 있나.“보스, 완성했어요.” 뛰쳐나오며 소리치는 서한기의 음성이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연구를 진행하며 수면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성연은 지금 연구실 소파에 누워 잠을 보충하고 있던 중이었다.서한기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잠에 빠져 있던 성연을 깨웠다.성연은 좀 심한 ‘모닝 성깔’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한기가 전한 소식은 그녀의 짜증을 싹 없앴다.“정말 성공한 거야?” 지금 ‘성공했다’는 건 물론 안금여의 치료제를 말하는 것이다.자신이 자는 동안 수하의 연구원들이 치료제를 개발할 줄이야.인재들을 힘들게 키운 보람이 있었다.“물론이죠. 저와 같이 보러 가시죠.” 서한기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졌다.치료제 개발은 중차대한 일이었다. 안 그랬다면 감히 잠든 보스 송성연을 깨우는 간 큰 짓은 못했을 터.성연이 서한기와 함께 내부 깊숙한 곳에 있는 연구실로 들어갔다.옆에는 이미 흰 가운을 입은 조수 몇 명이 서 있었다.모두 눈 밑이 시커멓다.밤새 쉬지도 못한 행색들이다. 바로 이 치료제 때문에.성연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았다. 과연 시험관 아래에 순백색의 영롱하고 투명한 알약 한 알이 있었다.실험기구를 사용해서 약물의 성분을 검사한 결과, 안금여의 치매 증세를 해독시켜 줄 수 있음을 먼저 확인했다. 성연은 특수 용기에 치료제를 담았다.그리고 주머니에 넣은 후 직원 모두에게 감사를 전했다.“요 며칠 정말 고생했어요. 모두에게 3일간의 휴가를 줄 테니 놀고 싶은 만큼 놀다 오세요. 모든 비용은 서한기 비서가 결재해 줄 겁니다.”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성연은 여전히 고민 중이다. 할머니에게 어떤 식으로 약을 먹여야 자연스러워 보일지.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터.다만, 지금 당장 실행 가능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저녁을 먹는 동안 할머니를 돌보기 편하도록.요 며칠 안금여의 주치의인 조승호가 고택에 머물렀다. 장모 안금여를 살필 겸 돌발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운경이 남편 조승호에게 물었다.“엄마 치료제는 어떻게 되어가요? 가능성은 좀 있어요?”조승호는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운경의 희망이 모두 그의 어깨에 달려있었다.무진에게 너무 큰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회사 경영으로 이미 충분히 바쁜 아이니까.결국 남편 조승호만 다그칠 수밖에 없었다.조승호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이미 가닥이 잡혔어. 외국에서 이런 방면 약을 연구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며칠이면 회복을 도울 약이 배송될 거야.”“정말요? 약을 보내오면 엄마가 예전과 같아지실까요?” 운경의 눈이 반짝거렸다.‘엄마가 정말 호전되시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즘 매일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엄마 안금여에 대한 걱정 때문.지금의 엄마가 귀찮다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앞으로 평생 이런 모습의 엄마를 돌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다만 평생을 바쁘게 사신 만큼 외부에 대해 아무런 지각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생을 보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뿐.그건 엄마에게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엄마가 눈을 떠 직접 보셨으면 좋겠다. 회장직과 강씨 집안 본가를 지켜낸 자신들을.이제 엄마는 안심하고 노후를 보낼 수 있으실 텐데.특히나 흉악한 자들에 의해 쓰러지셨으니 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조승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계속했다.“다만 아직 실험 단계여서 약의 효과를 단정하긴 어려워.”약을 드시고 회복하시지 못하면 아내 운경이 더 실망할까 봐 미리 설명했다.운경의 눈이 한순간 어두워졌지만, 그렇다고 낙담한 건 아니었다.‘그래도 지금은 희망이
저녁 식사 후, 운경과 무진은 또 서재에 들어가 업무 처리로 바빴다.조승호는 의학 자료들을 검토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연 남은 성연이 안금여를 돌보게 되었다.평소처럼 할머니가 앉은 휠체어를 방 안으로 밀고 간 성연이 이야기도 들려주고 노래도 불러 드렸다.할머니를 돌보며 성연이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이야기 중간에 노래를 곁들이니 할머니가 좀 더 빨리 잠이 들었던 것이다.10분도 안 되어 할머니 안금여가 잠이 들었다.성연이 가방에서 침을 꺼냈다.조명 아래 차가운 빛을 띠는 침이 특별 제작한 케이스에 한 줄로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긴 것, 짧은 것, 굵은 것, 가는 것 모두 있었다.넓은 부위에는 굵은 침을 사용했다. 혈관은 그렇게 민감하지 않았다. 뇌나 눈 등 중요한 부위라면 가는 침을 쓸 수밖에 없다. 중요 부위의 신경들은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만약 실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감히 침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성연은 케이스 안에서 가느다란 침 여러 개를 꺼내어 평소대로 안금여의 뇌에 꼽기 시작했다.동작 하나하나가 매우 신중했다.다행히 아무런 돌발 상황 없이 시침이 끝났다. 성연의 등이 땀으로 흥건했다.이미 습관이 된 지라 아무렇게 옆에서 휴지 한 장을 뽑아 등을 닦았다.그리고는 한쪽에 앉아 안금여를 바라보았다.이번에는 휴대폰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반드시 안금여의 반응을 관찰하며 침을 뽑을 시간을 추산해야 했다.다행히 평소 무진과 운경의 회의가 비교적 오래 걸리는 편이었다.그 참에 성연도 한숨 돌릴 여유가 있었다.성연이 긴장을 풀려고 할 때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성연은 아직도 침이 꽂혀 있는 안금여를 보며 이마에 힘을 주었다. ‘지금 여기로 오는 건가?’지금 침을 꽂은 지 절반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뽑을 수 없었다.뽑게 된다면 분명 영향이 있을 터.하지만 방이 이만큼 큰데도 숨을 곳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잠시, 당장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성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
“누가 물에 빠졌어요.”“빨리 와요, 사람 살려요.”“빨리 여기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게 해.”주위에서는 모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성연은 물에 빠지는 순간 바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다행히 호수의 물이 깊어서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그러나 갑자기 물살에 충격을 받자 현기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아래의 물살이 좀 급해서 물살에 말려들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성연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짙은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성연의 몸은 천천히 계속해서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이럴 수가, 누구 수영을 할 줄 알아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조된 소년의 어머니도 옆에서 소리쳤다.자신의 과실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비록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몹시 조급해진 목현수는 몇 번이나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주위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갔지만, 구조대는 한참이나 오지 않고 있었다.“이걸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서 구해달라고 해.”“여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CCTV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직접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었다. 성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물에 뛰어들 용기는 부족했다.자기 자식이 잘못된 걸 본다면 뛰어들었겠지만 말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던 미스 샤넬이 주저함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러나 옆에 있던 목현수가 눈치 빠르게 붙잡았다.“샤넬, 뭘 하려는 거야?”성연 한 명이 빠진 걸로 이미 충분히 애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
로얄 스위트 룸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룸 내부 구석구석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스위트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은은한 향이 났다.“나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묙현수의 볼에 키스를 한 미스 샤넬은 목현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목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30분 후.찰칵,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스 샤넬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던 목현수.눈앞의 장면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물빛 실크 가운을 걸친 미스 샤넬의 허리에는 얇은 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실크 가운 사이로 풍만한 가슴 계곡과 희고 긴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가 천천히 목현수를 향해 걸어오자, 가운 안의 나신이 슬쩍 드러났다.목현수의 머리가 띵해 오기 시작했다.한 호텔 룸 안에서 내보이고 있는 샤넬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건강한 성인 남자인 목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미스 샤넬은 목현수에게 다가가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들었다.자신의 몸까지 드러내며 이렇게 다가가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목현수.점점 서운한 마음이 커지는 미스 샤넬.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현수 씨,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목현수도 미스 샤넬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미스 샤넬은 항상 씩씩하고 쾌활한 사람이어서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목현수 자신도 깜짝 놀랐다당황한 목현수가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그냥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미스 샤넬이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유혹하려는 거죠!”그녀의 눈에 원망과 질책의 빛이 들어찼다. 또한 짙은 실망감도.목현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
성연은 수시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음식을 먹으면서 성연이 농담처럼 물었다.“사형, 사형은 미스 샤넬과 언제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예쁜 미인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형을 따라다니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요?”성연은 그저 슬쩍 물어보았을 뿐이다.지난번에도 물어봤지만 매번 이 문제를 회피하는 목현수였기에.“곧 할 거야. 다음 달 즈음에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그런데 목현수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던 성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무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옆에서 목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두 달이면 목현수가 유부남이 된다는 말이지?’‘엄밀히 말해 지금 미스 샤넬은 목현수의 약혼녀.’‘이제는 목현수도 더 이상 성연이에게 매달릴 수 없다는 거지.’무진은 이제야 정말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그도 옆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그럼 이게 신혼여행인가요?” 그 말을 들은 목현수가 눈을 치켜 떴다.‘하, 내가 강무진 네 놈의 얄팍한 생각을 모르는 줄 알아?’‘성연이를 내가 뺏을까 봐 겁이 났던 거 아니야?’‘이제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강무진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어.’“그런 셈이지요.” 목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무진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슬쩍 가렸다.주문했던 음식들을 다 먹자, 디저트가 나왔다.이 음식점의 주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A국 특유의 디저트였다.미스 샤넬은 방금 먹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 만큼 맛있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디저트로 나온 이 케익들.동물을 본떠 동그랗게 만든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미스 샤넬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포크를 들었다.“이 케익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성연이 손을 흔들었다.“모두 먹는 것들이에요. 미스 샤넬. 많은 생각하지
“너네 A국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진작부터 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현수 씨한테 데리고 가달라고 졸랐죠. 첫 번 째로 성연 씨를 보러 온 거예요.” 미스 샤넬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어떤 의미에서는, 목현수가 자신을 A국으로 데려온 것 자체가 자신을 인정한 거라고 생각하는 미스 샤넬.미스 샤넬이 따라온 걸 본 무진은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성연의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아무 내색 없이 슬그머니 풀렸다.미스 샤넬과 성연이 다정한 모습으로 앞장서 걸었다.목현수와 무진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서로를 싫어하는 두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공항 밖을 나온 사람들은 모두 무진이 준비한 차량에 탑승했다.무진은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아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음식점으로 데려갔다.북성에서 아주 유명한 음식점인 이 곳은 언제나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하지만 이곳의 VIP고객인 무진은 얼굴을 보이자마자 곧바로 특실을 준비해 주었다.음식점의 총지배인이 직접 메뉴판을 가져와서 무진 일행의 주문을 받았다.살짝 허리를 숙인 채 아주 정중한 자세로 지배인이 말했다.“강 대표님, 최근 저희가 아주 참신한 신 메뉴 하나를 선보였는데, 평이 아주 좋습니다. 한번 맛보시겠습니까?”“이곳의 특선 메뉴들을 하나씩 내오세요.” 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지배인이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가서 준비하겠습니다.”특실 안에는 성연과 무진이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샤넬과 목현수가 나란히 앉았다.북성이 처음이라 연신 두리번거리던 미스 샤넬은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이게 바로 A국 스타일? 정말 예뻐요. 유럽과는 정말 다르군요.”“미스 샤넬, 여기가 마음에 들면 자주 오세요.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해요. 특히 미스 샤넬 같이 아름다운 외국 여성에게는 더요.” 성연이 미스 샤넬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며 놀리듯이 말했다.성연의 칭찬에 미스 샤넬은 좀 쑥스러운 표정을
“정말요?”“비행기 시간을 알려주면, 제가 그 시간에 마중 나갈게요.”전화를 받다가 의자에서 일어선 성연의 음성에 기쁨이 철철 넘쳐 흘렀다.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무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폰 건너편 음성이 남자 같은데...’무진이 무의식 중에 한마디를 꺼냈다.“누구?”성연이 재빨리 대답했다.“사형인데 벌서 북성으로 오는 중이라고 하네요. 나보고 마중나와 달라는데, 무진 씨도 같이 갈래요?”마음이 좀 불편해진 무진이 미간을 찡그렸다.‘그 자식은 왜 또 튀어나오는 거야? 사형이면 사형답게 행동해아지. 왜 자꾸 성연에게 들러붙는 거야?’성연이 혼자 목현수를 마중 나간다면 당연히 마음이 놓이지 않을 터.잠시 고민하던 무진이 이내 대답했다.“음, 내가 같이 가지.”“무진 씨 일은 안 바빠요? 바쁘면 나 혼자 가도 돼요.”그냥 공항으로 사람을 마중하러 가는 것이니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성연은 생각했다.무진이 바쁜 시간을 짜내 가면서 자신과 함께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괜찮아, 내가 같이 갈게.” 무진이 노트북을 닫았다.고개를 끄덕인 성연이 따라 일어섰다.“시간이 거의 다 됐어요. 우리가 공항에 도착하면 딱 맞을 거예요. 가요.”무진이 성연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북성의 공항.비행기 도착 시간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한 성현과 무진. 목현수가 탑승한 비행기는 아직 착륙하기 전이었다.두 사람은 함께 대합실에서 목현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목말라?” 무진이 물었다.“괜찮아요.” 성연이 고개를 저었다. 무진이 움직이는 순간, 성연은 그가 물을 사러 간다는 것을 알았다.성연이 무진의 팔을 잡아당겼다.“귀찮게 갈 필요 없어요.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형이 곧 도착할 거예요.”무진이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래.”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던 성연이 투덜거렸다“나올 때가 됐는데...”성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국 게이트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다시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하니 바로 목현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