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과 서한기에 관한 소문은 전교 학생들을 넘어 무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수하로부터 보고를 들은 무진의 기분이 가라앉았다.“나가서 손건호 들어오라고 해.” 손을 휘휘 저은 무진이 수하를 내보냈다.수하가 인사하고 물러난 지 얼마 뒤 손건호가 들어왔다.눈썹을 찌푸린 무진이 고개를 들고 손건호를 보았다.“그 새로 온 보건교사는 뭐야?”보스의 기색을 살피던 손건호는 보스의 심기가 썩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냥 기분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질투를 하는 거야?’속으로만 추측할 뿐,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한 채 말이다.무진에게 사실대로 말했다.“새 보건교사가 작은 사모님과 아주 가까운 건 확실합니다.”무진이 어두워진 눈을 내려 깐 채 미간을 찌푸렸다.“교장한테 전해. 만약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보건선생은 더 이상 학교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이 어떤 건지 명확하지 않았다.그렇다고 성연과 서한기의 관계를 오해하는 것도 아니었다.남녀 간의 감정에 대해 관심이 없는 성연인지라전혀 걱정되지 않았다.그러나 서로의 필요에 따라 합의한 형식상의 결혼이라 해도 성연이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이런 불미스러운 소문이 외부로 퍼지면 그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내가 이러는 건 단지 체면 때문이야.’무진이 드디어 평소와 다른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만한 이유를 찾아냈다.손건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무진이 지시하는 일은 보통 바로 즉시 가서 해결했다.설마 보스가 사모님을 진짜 마음에 둔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아직 어린 미성년이었다.‘보스의 눈이 겨우 이 정도야, 하긴 송성연도 보통이 아니긴 하지.’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손건호는 금세 머릿속의 잡생각들을 떨쳐냈다.‘그만. 이건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사무실을 나간 손건호가 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십니까?” 이전에도 이 번호를 본 적이 있는 교장이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물임을 알고 바로 표시하고 저장해 두
교장은 사무실에서 왔다갔다하며 서성거렸다.그는 사리 분간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력이 뛰어난 보건교사 서한기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단순한 소문으로 사람을 해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하지만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교장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성연의 집안 배경이 이런데 또 누가 감히 상대할 수 있겠는가.결국 교장은 서한기를 불러 직접 물어보기로 결정했다.“교장선생님,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요?” 10분 후, 서한기가 교장 앞에 섰다.서한기를 한 번 훑어보았다. 확실히 여학생들한테 인기 많을 외모이긴 했다.“이렇게 된 마당이니 그냥 묻겠습니다. 송성연 학생과 연애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송성연 학생은 아직 어려서 감정을 컨트롤 할 수가 있는 나이가 아닙니다. 두사람이 연애를 한다고 해도 미래가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일찌감치 정리하세요.”교장이 난감하다는 듯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교장은 숨기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서한기에게 말했다.교장의 말을 듣던 서한기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심정이었다.‘이 사람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렇게 삐뚤어진 생각까지 하다니, 참 나.’두 눈 멀쩡한 사람이라면 자신과 성연을 하나로 엮지 않을 것이다.더구나 서한기는 그럴 배짱도 없었다.할 수 없이 서한기가 설명하기 시작했다.“사실이 아닙니다. 정말 너무 억울하군요. 송성연 학생은 심각한 기면증이 있습니다. 마침 제가 그 방면 치료 경험이 있어서 치료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사실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그럴싸한 핑계를 찾아내야 했다.사실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요 며칠 거의 하루 종일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이런 것들에 주의하지 않았다.연구실에서 나와보니, 지금 이렇게 교장실에 불려와 있는 것이다.교장도 난처하긴 마찬가지다.“확실합니까?”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않은 채 교장이 다시 물었다.“물론입니다, 교장선생님. 송성연 학생은 아직 미성년자입니다.
오후가 되어 성연이 보건실로 들어오자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서한기가 교장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기 시작했다. 교장이 그에게 던진 경고까지.성연 역시 이번 일로 고민했다. 이윤하도 이 문제를 빌미로 수업시간에 시비를 걸었던 거고.서한기까지 교장에게 불려갈 줄은 몰랐다.하지만 그 이상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서한기가 교장실에 불려간 게 무진의 입김 때문이었음도 여전히 알지 못했고.그저 소문이 너무 많이 퍼지게 되면 학교 입장에서도 당연히 안 좋을 테니 서한기를 불러 주의를 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어쨌든 소문이 무성해지도록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 터.“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연이 고개를 들어 서한기를 쳐다보았다.“저요?” 서한기는 성연이 자신에게 물어볼 줄 몰랐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저라면 말이죠. 당연히 신경 안 쓸 것 같은데요. 어차피 사실도 아니니까.”갑자기 교장의 말속에 들어있던 다른 의미가 떠오른 서한기가 히죽히죽 웃으며 성연의 곁으로 다가갔다.“제가 보기엔 말이죠. 강씨 집안 쪽에서 보스에게 관심이 무척 많은 것 같은데요.”“무슨 뜻이야?” 인상을 찡그린 성연이 곁에 다가온 서한기를 한옆으로 밀어냈다.서한기가 교장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거물이, 강씨 집안 외에 또 누가 있겠어요?”서한기가 으쓱 어깨를 들어올려 보였다.성연은 입술을 오므린 채 굳은 표정을 지었다.“지난번에 내가 할머니 연구소에 모시고 왔을 때 마침 강무진이 찾아왔었지. 이미 그때 의심을 산 걸지도. 신경 쓰지 마.”그 이유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다.‘서한기가 그냥 생각난 김에 꺼낸 거겠지.’강씨 집안 같은 세력가라면, 모든 일에 경계하고 조심하는 게 정상이었다.“제가 보기엔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서한기가 일부러 말을 길게 늘였다.강씨 집안 거물(?)이 학교에까지 전화해서 경고를 했다는 건 질투일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안타깝게도, 우리 보스는 절대 그쪽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
같은 시각. 강운경이 연기했던 주주총회 최종 기한이 되었다.강상철과 강상규는 이날 만을 기다려 왔다.시간이 되자 즉시 주주들을 모아 주주총회를 열었다.강상철과 강상규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회의실에는 긴장감이 흘렀다.강상철이 일어섰다.“지난번에 서류를 나눠드렸으니 주주님들 모두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회장님이 지금 저런 상황이니 더이상 회장직에 계실 수는 없을 겁니다. 이제 우리 WC그룹은 더 능력 있는 사람이 이끌어가야 합니다.”말을 하면서 기억 못하는 사람이 있을 까 주식합의서를 눈앞에 늘어놓았다.운경과 무진 모두 참석했으나 안금여의 자리만 비어 있었다.강상철이 말을 꺼내자 주총 현장엔 정적이 감돌았다.“만약 회장님의 건강만 좋으시다면 2년 정도 옆에서 보좌해드리는 것도 괜찮겠지만, 안타깝게도…….”뒷말을 흐렸지만 강상철의 의도는 불 보듯 뻔했다.지금의 안금여로서는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쯤은 모두가 뻔히 아는 사실.속으로는 안금여가 죽기를 그렇게 절박하게 바라면서도 입으로는 그럴싸한 말을 뱉었다. 정말 역겹고 볼썽사나웠다.운경은 참고 또 참았다. 잠시 후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초조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다.침묵을 지키고 있는 운경을 슬쩍 훑는 강상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금여는 끝났다. 큰 집도 더 이상 입을 못 열 것이다.‘그래,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야.’“주주 여러분들,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다른 의견이 없으시다면 새로운 회장을 선출하기로 하겠습니다. 각자 마음속에 이미 생각하고 계시는 인물이 있을 것이라 봅니다만.”강상철이 턱을 들어올렸다.현재 보유 주식이 가장 많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주위를 살피던 주주들이 회장 재선출에 동의했다. 회사에 경영자가 없어서는 안되는 법이다. 그러나 안금여가 금방 좋아질 리도 만무하고.게다가 회사 내의 주주들 대다수가 강상철과 강상규에게 매수된 상황이라 본가로서는 조금도 승산이
운경의 말이 떨어지자 강진성과 강일헌은 마치 무슨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었다.“큰댁은 정말 재미있군요. 큰 할머님 병세가 위급해서 병원으로 모신 거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저런 루저에게까지 희망을 걸다니 정말 우습기 짝이 없네요. 지금 이 자리에 다른 분들도 계시니 형님 체면을 봐서 이 정도만 하지요. 그런데 형님께 그런 기대를 품고 계시다니 본인의 의견은 들어 보셨습니까?” 강일헌은 말하는 내내 무진을 응시했다. 명백한 경멸의 시선을 담고.“그럼요, 고모님. 너무 그렇게 편파적이시면 안 되지요. 저희도 절반은 고모님 조카 아닙니까? 앞으로도 고모님의 회사 내 위치는 절대 낮지 않을 겁니다. 형님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대를 갖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라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렇지 않다가 너무 실망하시지 않겠습니까?”강진성의 말에는 운경을 끌어들이려는 의도도 들어 있었다.강무진의 친 고모이긴 하지만 작금의 큰 댁 상황에서 볼 때 강운경이 아직 회사에 발을 담고 있어야 했다.직위도 낮지 않은 강운경이 자신들에게 돌아서면 자연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다만, 강운경이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눈치 빠른 사람들이라면 강무진이 루저라는 사실을 다 알 것이다.안금여와 강운경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한사코 저런 쓸모없는 놈을 편애하다니.그들은 시간으로 증명할 것이다.과연 누가 최선인지.“회사를 더 높이 끌어올려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무능력하신 형님에 대해 말하자면 저택에 머물며 정신병부터 치료해야 맞는 것 같은데, 고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강일헌 저들은 강무진을 무시하고 있음이 명백했다.요 몇 년 동안 회사에서 고생한 사람은 자신들이었다. 그에 반해 강무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않나 말이다.회장직을 물려받으려면 자신들의 동의뿐만 아니라 주주들까지…….물론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강운경의 눈이 조소를 띠었다. 속이 쓰린 건 말할 것도 없고.저들보다 몇 십 배나 뛰어난 무진이가,
운경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 안이 잠시 정적에 잠겼다. 그러더니 곧이어 믿을 수 없어 하는 소리들이 들렸다.차라리 이 모든 일들을 안금여 회장이 한 것이라면 모를까 강무진이라는 저 루저가 했을 거라고는 절대 믿기지 않았다.강상철과 강상규의 반발은 더 컸다.큰집이 회장직을 지키려고 모든 공을 억지로 강무진에게 돌린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강 대표, 거짓말도 정도가 있어야지. 있지도 않은 일을 늘어놓고 사람들을 기만하다니. 재미없군.”“그래요, 고모님. 늘 형님을 아껴 오신 걸 잘 알지만, 이렇게 과장할 필요는 없지요. 아마도 모두 고모님의 상상에서 나온 것 같은데요.”말하면서도 강일헌은 웃음을 참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얼굴에 경련이 일 정도였다.일부러 지어낸 과장된 표정과 동작은 모두 큰집의 호의도 모르는 큰 댁을 비웃기 위함이었다.저들의 태도를 하나하나 지켜보던 운경의 마음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냉소를 띈 운경이 입을 열었다.“여러분들이 믿지 않을 줄 알았죠. 그래서 증거를 준비했습니다.”대형 스크린을 열고 세계 100대 기업 중 하나와 직접 연결했다. 현재 WC그룹과 협력관계에 있는 유럽 최대의 회사였다.세계적적 기업으로 이 회사의 회장은 미스터 애벗이었다.자리에 참석한 주주들은 모두 알고 있다 할 수 있는 인물.하지만 비즈니스에서는 보통 자신의 비서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처리했고, 미스터 애벗 본인은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그러나 지금 미스터 애벗의 익숙하지만 직접 대면하기 힘든 얼굴이 대형 스크린에 등장해 주주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동시에 운경의 말에 대해 조금씩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스크린에 모습을 보인 미스터 애벗은 곧장 무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뒤 인사를 건넸다.“헤이, 무진. 요즘 잘 지냅니까?”“음, 아주 좋아요. 애벗 씨도 좋아 보이는군요.”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오랜 친구처럼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그리고 사업상의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다.강씨 그룹이 최근 계약을 체결한 대형 수주 건이었
미스터 애벗 쪽의 회담이 끝난 뒤 무진은 또 다른 두 기업과 영상 회의를 진행했다.믿고 싶지 않지만 생생한 현실이었다.강상철과 강상규 등 무진을 무시하던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예전 강무진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생각하면 지금 얼마나 난감할까.강무진이 보여주는 현실에 그야말로 자신들의 얼굴이 땅에 처박힌 꼴이었다.모든 회의가 끝나자 주주들은 모두 조용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더 이상 말할 면목이 없는 표정들이다.천지분간 못하고 눈앞에서 껍죽댔는데 결국 강무진이 그룹의 리더였던 것이다.운경 곧장 일어나 선언했다.“요 몇 년 동안 회사가 지금의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모든 게 무진이 뒤에서 손을 쓴 덕분입니다. 이 일은 회장님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지금 회장님의 연세는 쉬셔야 하는 게 맞습니다. 강무진은 자신의 신분에 맞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이때 무진은 예전처럼 침묵으로 대처하지 않고 마침내 입을 열어 발언했다.“여러분은 조금도 불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계속 회사에 남아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들을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회사를 더 잘 이끌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의견을 제기하셔도 됩니다.”무진이 차가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패기가 넘치는 말투에 그동안 애써 가두어 뒀던 기운이 발산되자 다들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타고난 카리스마에 두려움에 몸이 떨릴 정도였다.소위 지배자의 기운이란 게 아마 이렇지 않을까.주주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중요한 합작회사들과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는 무진이 그룹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고 봐야 했다.지금 만약 화가 난 강무진이 모든 인적 자원을 거둬 버리기라도 한다면자신들은 조금도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경악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주주들의 모습을 운경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지금 저들이 목격한 강무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평소 말하지 않은 건 그들과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뿐.강상철과 강상규까지 더하니 진짜 못 볼 지경이었
모두 의문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린 운경이 숨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 해 큰 오빠와 올케가 사망한 이후, 무진이 또한 알 수 없는 살해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려 왔습니다. 요 몇 년 동안 여러분들이 편안하게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들이 ‘쓰레기’라고 부르던 무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주주들은 순간 한 대 크게 얻어 맞은 듯했다. 창피해서 고개조차 들기 힘들었다.주주들 하나같이 닳고 닳은 사람들이다. 자연히 자신들에게 이익을 줄 사람을 편들 것이다.강무진이 회사를 이어받아 경영하는 것에 아무런 이견이 없는 게 당연했다.이날 회사 경영권을 정식으로 넘겨받은 무진이 드디어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그러나 회장직에 관심이 없는 무진은 그룹의 총괄 대표이사 직을 넘겨받았다. 최고 의결권을 가진.회사 직원들 동작도 빠르지, 회사 내에 즉시 무진의 집무실이 만들어졌다.의심할 여지없이 그룹 건물 전체에서 채광이 가장 좋은 위치였다.그의 위상이 단연 돋보이는 상황이다.그동안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 안금여의 사무실에서 일을 봐 왔었다.사실 무진에게는 별도의 사무실이 있었다.회사 내 아는 사람이 없었을 뿐.사무실 준비를 벌써 끝내다니 회사 직원들이 그래도 눈치가 좀 있는 듯하다.직원들이 새로 마련한 소파에 앉아 있다 회의실에서 나온 무진이 휠체어에서 일어나 직접 걸어 들어왔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운경의 눈엔 염려의 빛이 아직 남아있었다.“다리는 괜찮아? 의사가 서서 걸어도 된다고 했어?”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고모 운경이다.가까스로 좀 나은 터라 하루아침에 다치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괜찮아요. 의사가 운동을 많이 하는 게 다리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요.” 무진이 운경을 달래듯 웃었다.성연의 치료 방식이 아주 좋은 덕에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빨리 회복되었다.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그의 다리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그럼 됐어. 성연이가 도와준 거지? 엄마 말씀이 맞나 봐. 성연이
말을 마친 사무는 옆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뚱뚱한 남자를 재빠르게 발견했다.“아저씨, 바로 저 사람이 사진이를 이렇게 다치게 했어요!”사무는 우렁찬 목소리로 방금 엘리베이터를 나온 남자를 가리켰다.팍!쿵!서한기가 재빨리 깔끔하게 손을 쓰자, 남자의 커다란 몸은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심지어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남자는 온몸의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 아이들은 네가 감히 건드릴 수도 감당할 수도 없어! 꺼져!”피에 굶주린 듯 핏발선 눈으로 쏘아보면서, 서한기가 나지막하게 외쳤다.쓰러져 있던 남자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온몸의 통증을 느끼면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다.그러나 막 일어나려던 남자는 등줄기의 시큰한 통증에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아!”다시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결국 주저앉은 채 고통스럽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다른 쪽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무진은 자연스럽게 이쪽의 소동에 시선이 향했다.사람들 속에서 처참한 모습의 마케팅팀 팀장과, 그 앞에 서서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미간을 찌푸린 무진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뒤를 바라보았다.“아이들이 아직 안 갔어?”그리고 무진이 엘리베이터 문을 나설 때, 손건호는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던 서한기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그들 두 사람은 예전 진성 조직의 공동 대장이었다. 여러 해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인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지난 일 때문에 서로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이 가슴이 찢어질 듯한 느낌도 그들 두 사람만 알 수 있을 뿐...왜인지는 모르지만 서한기의 망설임이 느껴지자,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아직도 안 가보고 뭐 해?”‘저 두 아이는 뭔가 나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머릿속에서 어떤
아직도 물린 곳에 통증을 느끼고 있던 마케팅팀 팀장은, 갑자기 사무가 이런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심적으로 위축되었다.‘어린 애가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방금 전에 행동은 치밀하게 생각하고 한 건가?’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던 마케팅팀 팀장은 곧 한숨을 돌렸다.‘내가 뭘 무서워하는 거야? 기껏해야 아이일 뿐인데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이렇게 생각하자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변했다.“이 조그만 녀석이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이렇게 버릇없게 말이지!”사무는 코웃음을 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이 버릇없는 새끼가 감히 욕을 해! 보아하니 너는 혼나는 걸로도 부족하겠어!”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줄곧 말을 하지 않던 무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됐어, 너희 두 아이는 빨리 나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때문에 너희 엄마가 회사의 징계를 받게 돼.”사무는 무진의 얘기하는 모습을 힐끗 보았다. 전혀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볼 뿐.‘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맞는’ 걸 보면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 이런 아버지라니! 얼마나 마음이 독한 사람인지 충분히 알겠어.’‘오늘 아버지를 찾아온 건 결코 잘한 선택이 아닌 것 같아.’사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마케팅팀 팀장을 흘겨보기만 했다. ‘얼마나 더 웃을 수 있는지 보겠어. 조금 있다가 한기 아저씨가 시원하게 혼내 줄 테니까!’조심스럽게 여동생을 일으켜 세운 사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동생을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사진아, 가자!”사진도 지금은 여기에 더 있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문 채 오빠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입구로 걸어가던 사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상 앞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무진도 마침 사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무진은 왠지 가슴이 아팠다.그러나 무진이 움직이기 전에, 고개를 돌린 사진은 오빠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마침내 소동이 마무리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두 아이는 쌍동이겠지. 한 네다섯 살 정도 된 것 같아.’‘아이들 나이와 지금 상황을 보면...’‘혹시 이 두 아이가 정말 보스와 사모님 사이의 아이인 거야?’‘사모님이 낙태한 뒤 출국한 게 아니라, 모두를 속이고 아이들을 낳은 건가?’너무나 엄청난 상상이라서, 손건호는 곧 뭔가 큰일이 닥칠 거라는 느낌마저 들었다.지금은 원래 마케팅팀 팀장이 보고하면서 무진의 눈에 들 기회를 찾던 중이었다.그러나 오늘 보고는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무려 30분 동안이나 저기압인 대표의 기세에 눌려 있던 상태였다.‘지금 대표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면 칭찬을 받겠지.’눈빛을 빛내던 남자는 손을 비비면서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너희들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빨리 나가지 않고 뭐 해!”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면서, 마케팅팀 팀장이 사진의 여린 팔을 꽉 쥐었다.“어린 애들이 함부로 아빠라고 거짓말이나 하다니, 도대체 부모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이게 얼마나 심한 장난인지 알기나 해?”마케팅팀 팀장은 거칠게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무방비 상태였던 사진은 그저 팔이 꽉 잡힌 채 끌려갈 뿐이다.사진은 본능정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어린아이가 어떻게 어른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까?사진의 발버둥은 결국 전혀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했다.“오빠, 오빠, 사진이 너무 아파!”“아아, 아파...”팔의 통증에 몸부림치던 사진은 기어이 기회를 틈타서 남자의 팔을 물었다.갑작스럽게 팔에 통증을 느끼자, 남자는 아이들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서 나뒹굴었다“아! 이 계집애가 감히 나를 물었어!”잔뜩 살이 찐 남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으름장을 놓았다.갑자기 바닥에 떨어졌지만, 사무는 별다른 이상 없이 일어섰다.하지만 팔을 물린 남자는 사진을 떨쳐내려고 거칠게 밀쳤다.결국 힘에 밀린 사진은 의자에 이마와 팔을 부딪혔다. 부딪친 곳은 바로 빨갛
사진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어제 오빠 컴퓨터에서 아빠의 사진을 봤을 때도 천하제일 미남인 아빠 모습에 감탄했지만!오똑한 콧날에 굳게 닫힌 두 입술, 단정한 헤어 스타일에 온몸에 남성미가 가득한 건장한 모습!지금 그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경외심이 들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이 모든 아우라는 바로 책상 앞에 앉은 무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야!’‘우리한테 이런 멋진 아빠가 있다니!’ 지금 사진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아빠!”두 아이는 곧바로 책상 앞으로 달려갔고, 사진이 크게 외쳤다.가뜩이나 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에 ‘아빠’라는 소리가 들리자, 무진은 미간을 점점 찌푸리면서 그윽한 눈빛으로 두 아이를 훑어보았다.“어디서 온 애들이야? 언제부터 우리 회사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게 됐지?”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뒤로 젖혔다.“게다가 아무 데서나 아빠라니?”기쁨에 겨워 아빠에게 다가가려던 사진은 무진의 바로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의 눈에서는 순식간에 눈물이 솟아났다.애절하게 흐느끼면서 사진이 말했다.“아빠, 바로 우리 아빠잖아! 우리는 오늘 특별히 아빠를 찾으러 온 거야.”아이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무진은 마치 가슴속이 꽉 막힌 듯했다. 당황한 무진은 얼른 내선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두 아이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하는 무진의 목소리에는 왠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나는 너희들 아빠가 아니야. 거짓말하면 안 돼. 얼른 너희 엄마한테 가야지.”잠시 후, 수화기에서 시원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네, 보스.]무진은 다시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들어와서 두 아이를 데려가.”[아이들요?] 손건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응.”무진은 단지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아빠는 우리가 그렇게 싫어요?”갑자기 사진의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이지만
사무가 눈을 치켜뜨면서 말했다. “그래야 해?”다시 한 번 우유 막대사탕을 입에 넣은 채, 사진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그럼, 오빠 그건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데?”“하지만 내 말은 사실이야, 설마 네 오빠가 뛰어나지 않다는 거야?”사무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진지한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사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면서 다시 빌딩을 바라보았다.“우리 그래도 일을 해야지. 사람들이 우리가 아빠를 찾으러 올라가게 할까?”웃음을 거둔 사무는 입술을 꼭 닫은 채 앞을 보면서 진지 모드로 돌입했다.“당연히 우리를 못 들어가게 할 거야.”“그럼 어떡해?”사진은 바로 풀이 죽었다.‘이미 집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빠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정말 피곤해.’다음 순간.사진은 익숙한 오빠 손에 이끌려서 따라갔다.사무가 앞에 서고 사진은 따라서 함께 빌딩의 옆쪽의 작은 문으로 걸어갔다.입구에 선 두 아이는 작은 키 때문에 아주 순조롭게 입구의 경비원 순찰을 피할 수 있었다. 한바탕 민첩하게 왔다 갔다 한 끝에 이미 계단 앞에 도착했다.고개를 든 두 아이는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입을 삐죽 내민 사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텔레비전에 나오는 회장 사무실은 모두 맨 꼭대기층에 있어. 오빠, 아빠도 꼭대기층에 있는 건 아니겠지.”사무도 이 많은 계단을 보자 약간 풀이 죽었다.그래도 앳되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로 사무가 나지막히 말했다.“그 점은 드라마도 틀리지 않았어.”“아!” 오빠가 말을 하자 사진의 작은 다리는 벌써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만약에 이렇게 높은 층을 걸어서 올라간다면, 오늘 내 다리는 아마 망가지겠지?사진이 자신의 짧은 다리를 위해 ‘묵념’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사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가자, 위층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2층.지금은 출근 시간이라서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느라, 오히려 두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진 오빠의 이전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면, 내가 했던 짓도 모두 드러나지 않을까?’예민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처럼 느꼈다.‘약효가 줄어들면 그 뒤에는 반드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할 거야.’ ‘안 돼. 방법을 생각해야 해. 그런 상황이 절대 일어나게 해서는 안 돼.’찢어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무진을 보자, 예민주의 머릿속에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그 약을 다시 한번 더 먹여도 될까?’‘하지만... 하지만 또 복용하면, 나도 잊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겨.’‘이거 어떻게 해야 해?’일시에 모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모두 머릿속에 맴돌면서, 가뜩이나 초조한 예민주는 머리가 터질 듯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돌린 무진의 눈은 전혀 초점도 맞지 않은 채 암울해 보였다.걸음을 떼고도 마음의 피로로 인해서 이미 얼마나 붕 떠있는지도 몰랐다.무진이 예민주의 곁으로 다가가자, 예민주가 무의식중에 무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진은 다른 사람의 접촉을 원하지 않는 듯이 아주 교묘하게 예민주의 손길을 피했다.차로 향하면서 예민주에게 단 한 마디만 남겼을 뿐이다.“좀 있다가 너 혼자 돌아가. 오늘 일은 잠시 미루자.”그리고 곧바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남겨진 예민주만 어수선한 심정이었다.이어진 며칠 동안 무진은 여전히 평소와 마찬가지로 바빴다. 낮에는 업무를 볼 뿐만 아니라 접대도 해야 했다.그날, 산기슭의 별장 2층.위층에서 성연의 차가 점차 사라지는 걸 본 두 아이는 신속하게 작은 숄더백을 꺼냈다.사진은 동그란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맞은편에 있는 사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오빠, 정말로 이렇게 할 거야?”고개를 끄덕이는 사무의 눈에는 확고한 결의가 가득했다.“응, 엄마가 그날 돌아온 뒤 요 며칠 상태가 어떤지 못 봤어? 엄마는 분명히 아버지를 만났을 거야.” “내가 이미 아버지 위치를 알아냈어. 우리는 곧 아버지를 찾아갈 거야!”지금 집에 두 아이들밖에 없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성연은 낯선
“그렇게 트집을 잡겠다고?”“나는 단지 이 옷을 매우 좋아할 뿐이에요. 나와 무진 오빠의 결혼식에서 입고 싶은데 당신들도 마음에 들었는지는 몰랐는데요?”억울한 듯한 예민주의 얼굴.임서희는 마음이 우울했다. ‘무슨 이런 여우 같은 년이 다 있어? 그야말로 겉만 번드르르한 년이네!’“2억2천만 원! 빨리 카드 결제해요!”말을 마친 성연이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예민주는 마치 성연이 가는 방향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바로 성연의 앞을 막았다.짝!성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로 예민주의 따귀를 때렸다.얼굴의 통증을 느끼자 예민주는 무의식적으로 직접 만든 독약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성연은 이미 진작부터 예민주가 그럴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성연의 오른손에 갑자기 가는 은침 하나가 나타나더니, 예민주의 팔에 바로 박히면서 순식간에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좋은 개는 길을 막지 않는 법이야!”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지금 성연의 눈에서는 불꽃이 타오르면서 온몸의 피가 들끓는 듯했다.“서희야, 가자!”말이 끝나자 성연은 임서희를 데리고 웨딩 숍을 나섰다.오른쪽 얼굴의 화끈한 통증과 주위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느끼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화가 난 예민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무진 오빠!”그러나 다음 순간, 곧바로 문밖으로 나간 무진은 차의 시동을 걸고 바로 성연을 따라갔다. 울부짖는 예민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방금 회사를 나섰던 성연은, 임서희를 먼저 회사로 돌려보낸 뒤에 자신은 혼자 차를 몰고 떠났다.차 안.백미러를 통해 자신의 뒤를 바짝 뒤쫓는 무진을 발견하자, 성연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뭘 하려는 거야?’마음이 초조하자, 액셀러레이터를 바로 끝까지 밟았다. 성연의 차는 넓은 도로 위를 나는 듯이 달려갔다.고가도로 위.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진의 차가 성연의 차에 부딪치면서 곧바로 멈추게 만들었다. 빠른 속도로 달렸기 때문에 관성에 의해서 부딪친 것이다.성연은 입가가 찢어지면서 끈
이곳의 웨딩드레스는 모두 디자이너의 작품들로, 이 웨딩드레스도 당연히 하나밖에 없다. 이걸 예민주가 가져가면, 자신은 당연히 다른 웨딩드레스를 찾을 수밖에 없다.‘게다가 이건 분명히 우리가 먼저 보고 결정했어.’임서희가 무의식적으로 막았다.“아가씨, 이 옷은 우리가 방금 이미 고른 거예요. 면사포도 모두 골랐는데, 아가씨의 이런 행동은 우아하지 않은데요?”임서희는 아주 완곡하게 표현했다.하지만... 예민주는 임서희의 태도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호호, 당신이 어떻게 먼저 골랐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 웨딩드레스는 이미 오랫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거예요.”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이건 원래 일찍부터 내 소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예민주는 임서희의 반응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피식 비웃으면서 다시 직원에게 그 웨딩드레스를 가져오라고 했다.직원이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고 고민하자, 예민주는 짜증이 난 목소리로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너 거기서 뭐하고 있어? 빨리 안 움직여?”직원은 양쪽의 손님들 사이에 낀 채 난처한 표정이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야?’‘이 두 손님들은 척 봐도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지금 웨딩드레스 하나를 놓고 서로 싸우려는 기세인데, 우리는 이쪽을 도와도 안 되고, 저쪽을 위해도 안 돼.’“저는...”직원은 순간 말을 더듬으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래 좋은 기분이던 성연은 예민주에게 방해를 받자, 아예 신용카드를 꺼내서 직원에게 건네주었다.“이 웨딩드레스는 우리가 사겠어요. 카드로 결제할게요.”성연의 목소리에는 말참견을 용납하지 않는 힘이 실려 있었다.성연의 이 말은 또 마침 직원도 정확한 답안을 제시할 수 있게 도왔다. ‘옷을 입어보는 목적은 옷이 어울리는지 보기 위한 것이고, 어울리면 사는 거야.’‘하지만 이들은 지금 입어보는 단계를 건너뛰고 구매하겠다고 하니 가장 명확한 답이겠지.’“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포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말하면서 직원이 은행카드를 받으려고 했다.“잠깐만
지금 직원의 설명을 듣자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어때? 직원에게 한번 입어보게 가져오라고 해볼까?”임서희가 정말 마음에 들어한다는 걸 눈치챈 성연이 다가와서 건의했다.가게 앞.바로 같은 시간에 한 쌍의 남녀가 밖에서 들어왔다. 여자는 앙증맞은 표정으로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매달려 있었다.“무진 오빠, 이 브랜드의 웨딩 숍은 운성에 이곳 한 곳밖에 없어요.” “이 가게 웨딩드레스가 정말 예쁘다고 해요. 심플한 스타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좀 화려한 스타일이 좋을까요?”예민주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했다. 마치 꼬리를 활짝 편 공작새처럼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웨딩 숍 안으로 들어섰다.예민주가 팔을 꽉 잡고 있어서 무진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천천히 팔을 풀었지만 눈빛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좀 심플한 스타일로 해. 그렇게 화려한 걸 입을 필요는 없어.”예민주는 사실 결코 온화한 사람이 아니지만, 무진의 곁에 있으면서 오히려 많이 순해졌다.하지만 평생에 한 번 밖에 없는 결혼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무진의 말이 떨어지자, 예민주는 무의식 중에 그 말에 반박하려고 했다.“하지만...”‘지금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저건... 송성연이잖아?’머릿속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다시 자세히 보니 정말 성연이 맞았다.말을 하다가 만 예민주가 마치 뭔가에 시선이 고정된 듯이 바라보자, 무진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예민주의 시선을 따라갔다.‘왜 또 저 여자야?’성연을 보는 순간, 무진은 다시 한번 참기 힘든 두통을 느꼈다.‘왜, 왜 매번 저 여자를 볼 때마다 냉정을 유지할 수 없는지 모르겠어. 또 익숙한 느낌도 있지만, 분명히 저 여자를 만난 적도 없잖아.’또각또각!무진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예민주는 성연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갔다. 이미 조금 전처럼 놀라지 않았고, 온통 거만한 표정을 지으면서.“공교롭게도 이런 데서 만나게 되다니.”임서희와 함께 면사포를 고르고 있던 성연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눈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