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이 유럽에 온 이후 그림자처럼 성연의 뒤를 쫓은 소지연.예의 성연을 주시하며 빈틈을 노렸다.친구와 쇼핑을 하던 중에 웬 잘생긴 남자와 함께 작은 가게에 있는 성연을 포착했다.성연과 남자가 있는 룸은 후문을 마주보며 반투명으로 되어 있어서 내부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런 까닭에 성연과 목현수가 같이 있는 모습을 소지연이 보게 된 것.소지연은 바로 휴대폰으로 성연과 남자의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소지연은 교묘한 각도로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두 사람 사이에 마치 끈적한 뭔가 있는 듯 찍힌 영상에 소지연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옆에 있던 친구가 그런 소지연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는 사람이야?”소지연은 부인하지 않았다.“바로 저 계집애야. 엄연히 약혼자가 있으면서 다른 남자와 어울리다니, 정말이지 내 친구와는 비교할 가치가 없어.”“그래? 세상에, 너무 못됐다. 이거 지금 바람 피우고 있는 거 맞지?” 옆에 있던 친구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누가 아니래? 그런데 하필 내 친구가 저 계집애를 무지 아낀다는 거야.” 소지연은 흰자위가 보일 듯 노려보며 성연을 비방하는 말을 쏟아냈다.성연의 험담을 한바탕 쏟아냈더니 속이 시원함을 느낀 소지연.“그래서 네 친구에게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진을 찍은 거야?” 친구는 계속 의문을 가지며 물었다.“당연하지, 이렇게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건 절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저 계집애가 내 친구를 속이고 다른 남자와 여자와 몰래 만나는데, 당연히 내 친구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 소지연의 눈에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소지연의 옆에 있던 친구는 소지연과 무진, 그리고 성연과의 사이에 얽힌 상황을 알지 못했다.그저 소지연의 친구인 줄로만 알았다.그래서 소지연의 옆에서 말렸다.“그냥 내버려 둬. 장거리 연애라는 게 원래 쉽지가 않아. 게다가 타국 아니니? 만에 하나 알고 봤더니 우리가 본 것과 다르다면? 그럼 낭패지 않아?”소지연은 갑자기 차
그때, 거실의 반대쪽 끝에서부터 발자국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몸집이 작고 유약한 생김새의 여자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소지연 앞에 와서 섰다. 그러더니 차가운 소지연의 표정을 보고는 몸을 움찔하며 가는 음성으로 변명했다.“죄송합니다, 마담 소. 주방에서 빵을 굽고 있느라 오시는 걸 몰랐어요.”“커피 가져와.” 소지연은 얼굴을 찡그린 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고용인은 얼른 소지연에게 커피를 내려 주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잠시 후, 어린 고용인이 돌아왔다.소지연은 얼굴을 더 찡그린 채 소리쳤다.“커피 가져오라고 한 지가 언제인데 시간을 이렇게 끄는 거야? 근무 능력이 그렇게 없어?”어린 여자고용인은 속으로 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평소 갓 내린 커피만 마시는 소지연, 커피를 내리는데 적어도 10분은 걸린다.만약 소지연의 입에 맞지 않기라도 한다면 더 많은 소리를 들을 터.자신의 행동이 굼떠서 커피를 늦게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소지연은 그 사실을 아는 게 분명한데도 자신을 비난하고 있었다.여자고용인은 무조건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일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그래서 마음속의 억울함을 참았다.“마담 소, 죄송합니다. 저는...”여자고용인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촥,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내밀었던 커피가 얼굴에 끼얹어졌다. 이어서 소지연의 노발대발하는 음성이 들렸다.“변명이나 할 생각이야? 일도 제대로 잘하지 못하는 걸 보고 내가 뭐라 하지도 못해?”연신 고개를 가로젓는 여자고용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행히 커피가 따뜻한 정도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자신의 얼굴은 화상을 입었을 터였다.소지연이 냉소를 지으며 여자고용인을 바라보았다.“그래도 억울해? 그렇게 불쌍한 척하면 내가 동정해 줄줄 알았어? 사람을 꼬실려고 타고난 물건이네 이거, 하! 잊지 마, 너한테 일할 기회를 준 사람이 나라는 걸. 만약 다음에 또 이렇게 마음에 안 들게 군다면 당장 짐 싸야 할 거야!”말을 마친 후 소지연은 여자고용인
강씨 집안 고택, 안금여와 강운경이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그때 집사가 들어와서 방문자가 있음을 알렸다.“회장님, 밖에 누가 찾아왔습니다.” “누구?” 안금여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둘째, 셋째 일가가 몰락한 이후 모처럼 평탄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당연히 조용히 지내는 게 제일 좋은 거지.’혹시나 또 말썽을 피우려는 주주들은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안금여는 더 이상 그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젊은 여자아이입니다. 주OO라고 하는군요.” 잠시 생각하던 집사가 이름을 떠올리고 말했다. “성이 주라고? 확실해?” 안금여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되물었다.강운경은 엄마 안금여의 반응에 궁금해서 물었다.“엄마, 누군데요?” “내 친구의 손녀일게다. 집사, 얼른 데려와 보게.” 안금여는 강운경을 향해 말했다.강운경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늘씬하게 키가 큰 소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할머니.” 소녀가 안금여를 소리 내어 불렀다. “오, 얘야, 그새 이렇게 컸구나.” 안금여가 앞으로 다가가서 소녀를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이 소녀는 안금여의 오랜 지기 경성 지역의 조씨 집안 손녀, 조수경이다.예전에 친구가 보내 준 사진이 있었기에 안금여는 한 눈에 이 소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조수경은 안금여의 자상한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안금여는 자신의 친구를 보는 듯 무척 반가웠다.둘도 없는 친구의 손녀를 안금여 역시 자신의 손녀처럼 생각했다.그런데 조수경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조수경의 발개진 눈시울을 보자 속이 상한 안금여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수경아, 무슨 일이니?”안금여의 말에 조수경이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입을 열었다.“할머니, 저희 집에 큰 변고가 생겼어요.”말을 꺼내자 마자 조수경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안금여가 티슈를 집어 조수경에게 건네며 달랬다.“아이고, 얘야, 그만 울거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 해결할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이 입술만 짓씹듯이 깨물던 조수경이 결국 안금여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경성 손씨 집안의 장남에게 구애를 받았어요. 손민철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 사람에게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상식적인 선에서 거절했을 뿐인데 그 사람 손민철이 화가 나서 저희 집안에 경제적 보복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 때문에 집안에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고, 부모님도 그만 구속이 되셨어요. 이런 일이 터지자 할머니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셨는데,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계세요.”말을 하던 조수경은 코가 시큰거리며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안금여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수경이, 이 아이도 참 고생이구나,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이처럼 꿋꿋하게 버티다니.’친구의 멀쩡하던 집안이 한순간에 이렇게 되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 “괜찮아, 괜찮아. 이 할머니가 있으니 이제 걱정하지 말거라.” 안금여는 자상하고 따뜻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대기업의 회장이라는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귀찮게 여기지 않고 조수경을 위로해 주었다.조수경은 조금 전까지 절망적이던 마음에 다시 희망이 생기며 가슴이 훈훈해졌다.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한 듯했다. 이제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었으니.손민철을 떠올릴 때마다 혐오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손민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조수경이 계속 말했다.“이렇게 우리 집안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건지 손민철은 지금도 저를 계속 괴롭히고 있어요. 정말이지 어찌할 방도가 없어요. 할머니, 저 손민철을 피해 여기에 잠시 와 있어도 될까요?”손민철은 그 전부터 부모님의 일을 빌미로 자신을 협박해 왔다.자신의 구애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손민철은 조수경을 생각해서 더 이상 그녀의 부모님을 괴롭히지 않고 도와줄 터였다.조수경 역시 모두 자신 때문에 집안에 이런 화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면 손민철에게 승낙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적어도 부모님이 나오실 수는 있을 것이다.하
가련한 조수경의 모습에 안금여는 화가 났다.경성 지역의 손씨 집안에 대해서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날뛰다니.’경성의 큰 가문은 맞지만 신분과 지위를 이용해서 이런 날강도 같은 짓을 하다니, 그야말로 횡포가 극심했다.조수경이 여기서 지내면서도 불안해할까 걱정이 된 안금여가 안심을 시켰다.“아무 일 없을 거야. 여기서 지내다 폭풍이 지나가거든 다시 이야기하자. 손씨 집안 사람들이라 해도 내 앞에 와서 행패를 부리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안심하고 여기에서 지내.”다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입을 뻐끔거리는 조수경.조수경의 입 모양을 본 안금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그 즉시 손을 들어 다시 감사인사 하려는 조수경을 막아세웠다.“됐다. 내가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말이 ‘고맙다’ 세 글자다. 내 친구의 손녀인 넌 내 손녀이기도 해. 이 할머니를 너무 어려워 말거라.”조수경은 안금여의 손을 잡은 채 감동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안금여 할머니에게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이고 아가씨, 너무 부담 갖지 마. 그저 상에 수저 더 놓는 것뿐이야.”강운경도 옆에서 한마디 했다.말을 하지 않을 때의 강운경은 꽤나 엄한 인상이다.그래서 조수경에게 무서운 이미지를 심어 줄까 신경이 쓰인 것. “운경 이모, 할머니, 모두 정말 친절하세요.” 조수경은 지금의 이 심정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하이고 얘도 참. 너 뭐 좀 먹었니?” 안금여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자신의 배를 쓸던 조수경의 볼이 금세 새빨개졌다.서두르는 바람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고택으로 바로 왔다. 안금여가 자신을 거두지 않는다면 얼른 다른 곳을 찾기 쉽도록.조수경의 얼굴을 본 안금여가 눈치를 채고 강운경에게 일렀다.“운경아, 주방에 먹을 것 좀 준비하라고 하거라.”안금여의 세심한 배려에 조수경은 더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할머니, 아니에요, 배고프지 않아요. 정말 괜찮아요.”안금여는 강운경에게 눈짓을 보내
식사를 마친 후, 하인이 조수경을 데리고 방으로 안내했다.목욕을 하고 나온 후에 옷까지 갈아입고 나니 마치 새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조수경은 기분이 좋아졌다.그저 방 안에서 쉬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거실로 나가 안금여, 강운경과 함께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그때, 거실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하던 안금여는 마침 무진이 유럽에서 북성으로 막 돌아온 게 생각났다.무진을 불러 서로 인사도 시키고 또 앞으로 조수경이 북성에서 지내는 동안 보살피게 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어쨌든 지금 강씨 집안을 안팎으로 관리하는 이는 자신이 아니라 무진이니까.무진이 하는 말이 좀더 설득력이 있을 터.안금여가 직접 무진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말하자 무진이 바로 고택으로 건너왔다.무진이 거실로 들어서자 안금여는 조수경을 가리키며 무진에게 소개했다.“무진아, 여긴 수경이야, 조수경, 할머니 친구 손녀.”안금여의 소개에 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같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안녕, 난 강무진이다.”조수경은 무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저 멍한 기분이었다.뚜렷한 이목구비에 맞춤 정장 차림의 무진은 목 끝까지 셔츠 단추를 채고 있어 금욕적이면서 시크한 분위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조수경이 순간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인사했다. “안, 안녕하세요.”무진은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 안금여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그저 한 사람 소개하기 위해 자신을 부르지는 않았을 테니까.그러나 무진은 생각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에 안금여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그저 무진과 조수경을 서로 소개시켜 줄 생각뿐이었음을.안금여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무진아, 수경이는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거야. 나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딸리니까 앞으로 수경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네가 좀 도와주도록 해.”안금여의 말을 듣는 순간 그제서야 무진은 할머니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까닭을 알아차렸다.그러나 할머니의 절친한 친구 손녀라는 생각에 무진은 흔쾌히 대답했다.
두 사람이 서로 인사를 다 나누었다 싶은 안금여는 무진에게 조씨 집안에 일어난 변고를 전해주었다.그러나 옆에서 듣고 있는 조수경의 마음을 생각해서 다소 완곡한 표현으로 무진이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무진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두 눈에 동정의 빛을 띄었다. 그저 북성에 놀러 온 조수경이 며칠 고택에 머무는 거라고만 생각했다.그런 힘든 일을 당하고 왔을 줄이야.그제야 조수경을 바라보는 무진의 눈빛이 다소 부드러워졌다.조수경의 눈자위가 다시 붉어지기 시작하며 음성에도 울먹임이 더해졌다.“무진 오빠, 정말 어쩔 수 없이 여기 고택에 와서 폐를 끼치게 됐어요. 진짜 너무 많은 폐를 끼치는 것 같아요.”그 말에 무진이 안심시키듯이 말했다.“신경 쓸 필요 없어. 안심하고 여기에서 지내.”할머니의 목적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무진.자신에게 조수경을 비호하라는 뜻.같은 남자로서 무진 역시 손민철이 한 짓은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이다.또한 할머니가 직접 말씀하셨는데 자신이 안 도울 수가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무진 오빠, 정말 고마워요. 여기가 아니면 전 정말 갈 데가 없어요.” ‘강씨 집안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강무진은 언뜻 냉정해 보였지만 사실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안금여가 조수경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북성에 왔으니 여기서 마음 놓고 지내.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말고. 휴가 온 것으로 생각하면서 말이야. 모든 건 금세 지나갈 거야.”“네.” 조수경이 코를 훌쩍이며 감동된 음성으로 말했다.“항상 너희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해. 손씨 집안 같은 사람들을 그냥 둬서는 안돼. 저들의 기를 살려주면 더 미쳐 날뛰게 될 거야.”조수경이 가족들 생각에 지금까지 끌어왔으리라 생각하며 한 말이다.“할머니, 저희 할머니도 똑같이 말씀하셨어요.”안금여의 말을 듣고 할머니를 떠올린 조수경은 안금여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자신의 할머니를 경성에 홀로 두는 게 마음에 걸린 조수경은 자신도 경성에 남아 할머니를 돌볼 생각
안금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되긴 뭐가 돼? 네가 이제 막 왔으니 우리도 제대로 대접을 해야지. 무진이가 아무리 바쁘다 해도 그 정도 시간은 뺄 수 있다.”일단 조수경의 정서가 걱정되는 데다 손민철 쪽의 사람들이 찾아올 지도 모른다.‘이럴 때는 누군가 함께 있어 주는 게 좋을 테지.’조수경은 망설이며 무진을 한 차례 슬쩍 쳐다보았다.무진에게 호감을 느낀 자신은 무진과 같이 나간다니 당연히 좋았다.하지만 자신에 대한 동정심을 이용해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무진은 속으로 어쩔 도리가 없다 생각하며 대답했다.“뭐 쇼핑 정도는 시간을 내 볼 수 있겠네요.”조수경의 두 눈이 반짝였지만, 이내 자신의 마음을 감추었다.“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무진이 조수경에게 물었다.조수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무진 오빠, 옷을 좀 사고 싶어요. 여기 올 때, 시간이 너무 빠듯해서 제대로 챙겨 오질 못했어요.”손민철이 눈치챌까 봐 거의 야밤도주 하다시피 해서 온 참이었다.무진 역시 수긍하며 말했다. “그래, 데리고 백화점으로 가도록 하지.”고택에는 상시 대기 중인 운전기사가 있어서 언제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다.안금여는 무진이 좀 냉담한 성정이지만 속은 따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은 더더욱 없다는 것도.그래서 믿고 조수경을 맡긴 것이다.안금여가 입술을 옆으로 늘이며 살며시 웃었다.“그럼 두 사람 외출해서 쇼핑을 하도록 해. 할머니는 집에서 저녁을 준비하여 너희들을 기다리마. 쇼핑한 김에 겸사겸사 근처에서 좀 놀다 와도 돼. 북성엔 경치 아름다운 곳이 많단다.”“가지.” 무진이 조수경에게 말했다.조수경은 안금여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할머니, 나갔다 올게요. 늦지 않게 돌아올게요.”“어여 가거라.”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안금여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나이가 드니 젊은 아이들이 자신의 곁에서 북적대는 것이 좋았다.차 안.무진이 오른쪽에 앉고 조수경이 왼쪽에 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