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호가 무슨 말을 하든 소지연은 제자리에 딱 붙어 선 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무진에게 엉기려는 게 분명했다.무진이 보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손건호는 너무 온화한 태도는 소지연에게 전혀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손건호가 차가운 음성으로 경고했다.“소지연 씨, 지금 우리 작은 사모님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작은 사모님 무척 대단하신 분입니다. 이미 보스를 위해 치료제를 만들어 냈거든요. 소지연 씨가 보스에게 한 일에 대해서는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지요.”소지연은 속으로 저도 모르게 떨었다.무진의 상태가 어째서 이렇게 빨리 완화되었는지도 이제 알게 되었다.‘송성연은 정말 대단해. 여기에 없으면서도 날 이렇게 화나게 하다니.’“나와 무진 오빠 사이에 이 일이 뭐 대단하다고? 무진 오빠는 나를 탓하지 않을 거야.”소지연이 계속 고집을 피웠다.사실은 그녀도 무진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다.그러나 손건호 앞에서 지고 싶지 않은 소지연.“그랬으면 좋겠네요.” 손건호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소지연이 자기자신을 너무 믿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나와 무진 오빠 사이의 친분을 생각해 보시죠.” 콧방귀를 뀌며 손건호를 바라보는 소지연의 눈에 혐오감이 떠올랐다.손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 그때 지나가던 집사를 향해 손건호가 말했다.“집사님, 운전기사를 시켜서 소지연 씨 좀 바래다 드리도록 하세요.”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지연 앞에 가서 청하는 자세를 취했다.“가시죠.”소지연은 눈에 쌍심지를 켠 채 손건호를 째려보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결국 마지못해 집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손건호에게는 함부로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집사는 그렇지 않았다.수십 년간 강씨 집안을 지킨 집사다. 만약 이 일을 안금여와 강운경에게 알리기라도 한다면 큰 일이다.손건호는 여전히 문 가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소지연을 배웅하기 위해 나갔던 집사는 소지연에게 운전기사를
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때, 무진이 눈을 떴다.매일 생체시계가 이 시간에 맞춰져 있어서 아무리 늦게 자도 이 시간에 깼다.어젯밤 성연의 말 대로 지은 약의 효과인지 무진은 기분이 상쾌했다.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한 느낌도 사라지고 없었다.하지만 무진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일어난 무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여니 손건호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밤을 꼬박 새운 손건호의 양복이 후줄근했다. 핏발이 선 눈으로 무진을 보자 바로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보스, 깨셨습니까?”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여기서 밤새 지켰어?”손건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이 마침내 왔다.하지만 보스도 조만간 이 일에 대해 알아야 했다.“어젯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진이 거실 소파에 앉자 손건호도 따라갔다.손건호는 어젯밤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무진에게 보고했다.“어젯밤에는 작은 사모님 덕분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보스의 상태가 걱정되신 사모님이 저를 시켜 지켜보게 했는데, 다행히 보스가 깨셨네요.무진은 몸이 살짝 굳은 상태였다. 얼굴은 경악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소지연이 나에게 약을 먹였다고?”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손건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무진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사실 소지연이 벌인 일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게 아니었다.온천호텔에 있을 때 소지연이 보여준 행동, 그리고 그를 유혹하던 말 등 모두 자신에 대한 소지연의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다만 그때 자신은 소지연을 무척이나 믿었고 또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이다.지난번에는 그저 성연의 단순한 질투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그런데 성연은 소지연의 목적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던 것.‘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이것도 못 알아차리고.’성연을 생각하던 무진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얼른 내 휴대폰을 가져와. 성연이에게 전화를 걸어야겠어.”성
성연은 무진이 외려 독박을 쓸까 염려했다.그러나 무진은 겁나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무진은 회사로 갔다.마침 월요일이라 매주의 정기 보고가 열릴 예정이었다. 회의석상에서 각 부서의 보고가 끝난 후, 무진이 선포했다.“소지연, 소 팀장은 오늘부로 즉시 유럽사업부에서 아프리카사업부로 전출됩니다.”유럽사업부 소속인 소지연은 그룹 본사에서는 가끔씩 유럽 시장의 상황만 보고할 뿐 매일 출근하지는 않았다.보통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소지연은 참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 회의에 소지연은 없었다.그런데 무진이 생각지도 못하게 소지연에게 직접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아프리카 사업부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는 미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회사에서 버림받은 자식 꼴이었다.아프리카 사업부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보통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그곳으로 이동되는 것은 모두 사고를 친 경우였다. 이번 생애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소지연의 생사에 대한 결정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많은 임원들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소지연이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강무진 대표가 이렇게 화가 난 걸까?’그러나 본사 내에 소지연과 관계가 좋은 임원이 있었다.과거 소지연은 본사에서 힘들게 일하며 실적을 쌓았기에 유럽 사업부로 갈 수 있었다.본사에서 오랫동안 일한 직원들은 소지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그런 소지연을 봤었기에 마음이 모질지 못한 임원들이 소지연을 위해 앞으로 나서 말했다.“대표님, 소 팀장은 회사를 위해 공로는 없다 해도 고생을 했습니다. 아리따운 젊은 여성을 아프리카로 보내는 건 막다른 길로 몰아붙이는 격이 되지 않겠습니까?”옆에 있던 임원도 따라서 맞장구를 쳤다.“맞습니다, 대표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지 않겠습니까?”“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건은 제가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입니다.”무진은 역시 풍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소지연의 남은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소지연이 벌인 일들은 입에 올리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 있던 사람이 회의에서 결정된 일을 소지연에게 알려주며 관심을 가지고 말했다.[소 팀장,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강 대표를 그렇게 화나게 한 거야? 아니면 회사에 직접 나와서 사정을 하면 강 대표가 높이 평가해서 용서해 주지 않겠어?]한마디로 소지연은 얼음굴에 빠진 셈이었다.그녀의 눈에는 충격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휴대폰 건너편에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억지로 웃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진짜야? 강무진 대표 보니까 장난 아니었어.] 휴대폰 속에서는 믿지 않는 빛이 선명했다.소지연은 짜증이 치밀어 올라 손가락으로 눈앞의 시트를 쥐어뜯었다. 손가락에 힘을 꽉 주었는데 이는 그녀가 지금 엄청 참고 있음을 말해 준다.그런데 회사 사람들 앞에서 안색을 바꾸면 그녀가 무진을 포기했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머릿속에서 잠시 생각하던 소지연은 마침내 꽤 괜찮다 싶은 방법을 생각해냈다.“사실 아프리카 사업부에서 최근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앞으로 해외 사업의 중심은 아프리카로 옮겨질 겁니다. 강 대표님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저를 보내 지켜보게 하실 생각이세요.”소지연의 오만은 자신이 이미 무진의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했다.설령 떠난다 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일을 회사의 수다쟁이들이 함부로 지껄이게 할 수는 없었다.같이 통화하던 임원은 문득 크게 깨달은 듯이 말했다.[어쩐지, 강 대표가 어떻게 소 부장을 그런 곳에 보내려 하는가 했더니, 역시 그런 사정이 있었군.]“그 동안 제가 강 대표님이 어떤 관계인지 다 보셨잖아요.”소지연이 득의양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두 사람이 통화 중일 때, 집안에 초인종이 울렸다.소지연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집에 사람이 왔나 보네요. 나가서 봐야겠어요. 우선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어요.”이어서 전화를 끊었다.그러나 소지연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며 무척이나 보기 흉했다.소지연이 문을 여니 찾아온 사람은 WS그룹 인사팀 팀장이
소지연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트렁크를 들고 나왔다.인사팀장은 한 걸음 비켜서서 청하는 자세를 취했다.“소 팀장님, 강무진 대표님께서 특별히 팀장님을 공항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여기 비행기 티켓입니다.”소지연은 입고리를 당겨 올렸다. ‘듣기 좋게 말해 선물이지 사실은 감시잖아?’‘강무진은 자신이 다시 되돌아올까 걱정되는 거야?’‘이건 내 퇴로를 다 막겠다는 거지?’소지연은 인사팀장이 건네는 티켓을 빼앗듯이 낚아챈 후 곧장 차에 올라탔다.앞에는 운전기사가 운전하고 있었고 뒷좌석에는 인사팀장과 소지연이 앉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금세 공항에 도착했다. 탑승시간이 다가오자 인사팀장은 소지연이 탑승하는 것까지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그리고 무진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했다.“대표님, 소지연 팀장이 탑승하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거기서 좀 더 기다려요.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돌아오세요.” 무진은 소지연이 금세 후회하고 비행기에서 내릴까 염려스러웠다.“알겠습니다, 대표님.” 짧게 대답한 인사팀장은 휴대폰을 수습한 후에 계속해서 비행기의 이착륙을 지켜보았다. 혹여 소지연이 다시 나오기라도 할까 봐.그러나 소지연은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아프리카로 가라면 가는 거지 뭐,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소지연은 미스터 제이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어조였다.“미스터 제이슨, 반드시 송성연을 잘 접대해야 해요. 유럽은 당신들 MS 가문의 홈그라운드잖아요. 어린 계집애일 뿐이니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겠지요?”국내에서는 무진이 보호하고 있어서 일단 피할 수 있었겠지만 유럽에서 송성연은 홀홀 단신이었다. 만약 호된 경고를 받게 된다면 강무진에 대한 원망이 생기지 않겠는가?송성연의 말로를 생각하면서 소지연은 득의양양하게 웃기 시작했다.[소지연 씨가 아프리카로 이동되었다고 들었어요. 강무진, 정말 매정한 사람이군요. 어떻게 당신 같은 미인을 아프
“아, 미안해요, 미안해요.” 성연은 호텔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화려한 금발의 여성과 부딪쳤다.룸 키가 바닥에 떨어졌다.금발 여성이 열쇠를 주워 성연에게 건넸다.“정말 미안해요. 당신 괜찮아요?”성연은 키를 들고 손을 저었다.“괜찮아요, 괜찮아.”성연은 다른 사람이 조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성연은 그리 소심한 사람이 아니다. 키를 대신 주워 주었으니 자신도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금발의 여성은 성연의 도량이 큰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정말 좋은 분이군요. 나는 안나예요. 혹 심심하면 나를 찾아와 같이 놀아도 돼요. 유럽은 내가 잘 아니까.”“고맙습니다. 저도 이곳에 친구가 있어요.” 성연도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그럼 됐어요. 다음에 밥 사게 해줘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미안해.” 안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꽤나 고민스러운 모양새였다.“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성연은 외국 사람들이 상당히 예의 바르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이 잠시 인사를 나눈 후에 안나는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안나와 작별을 고한 성연도 몸을 돌려 룸으로 돌아왔다.룸으로 돌아오자 때맞춰 휴대폰이 울렸다.무진이 전화한 것을 확인한 성연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휴대폰을 손을 들고 침대 대시보드에 기대어 화면에 나온 무진을 바라보았다.[오늘 어떻게 지냈어? 유럽은 재미있어?] 무진이 있는 곳은 저녁이다. 방금 목욕을 했는지 머리에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목욕가운 사이로 드러난 쇄골이 선명했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탄탄한 복근과 선명한 식스팩이 있음을 성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성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역시 미색은 남녀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성연은 조용히 내 남자의 미색을 감상했다.자신의 안목이 상당하다고 감탄하면서.무진은 몸매도 외모도 최고였다.성연 같은 중증 얼빠에게 있어서는 완전 계 탄 거나 마찬가지다.성연의 대답을 듣지 못한 무진은 성연이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진
저녁에 성연은 평소대로 심지환과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다 먹고 나서 좀 돌아다닌 후에 심지환이 성연을 호텔 입구까지 데려다 주었다.“너 혼자 호텔에 있으니 안전에 주의해야 해. 여자는 호의를 베풀지 않는 사람들을 수시로 경계해야 해.”안심하지 못한 심지환이 마치 마누라처럼 옆에서 신신당부를 했다.성연이 아직 대답하지 않자 심지환은 수다스럽게 계속 말했다.“아니면 네가 이사 와서 나와 함께 살아도 괜찮아.”성연은 정말 머리가 좀 아팠다.이전부터 심지환은 계속 수다를 떠는 습관이 있었는데, 최근에 더 심해지는 경향이다.성연은 심지환을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내 자신은 내가 돌볼 거야.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안녕.”말을 끝낸 후 심지환이 반응하기도 전에 성연은 도망쳤다.차에서 성연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심지환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호텔 객실 문을 연 성연은 즉각 경계심이 발동하며 동작을 멈췄다.객실 안에서 다른 냄새가 났다.은은한 향수 냄새였다. 평소 성연은 향수를 사용하지 않았다.보통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약한 잔향이다. 하지만 성연은 의술에 능통했고 코가 예민해서 쉽게 맡을 수 있었다.아마도 자신의 방에 들어온 사람은 분명 여자일 것이다.하긴 자신이 방심하는 통에 누가 객실에 침입했는지도 모른다.성연은 먼저 객실 구석구석을 둘러본 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짐들을 꼼꼼히 검사했다.다른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누군가 성연의 노트북을 사용한 흔적이 미세하게 남았음을 예민한 감각으로 발견했다.성연은 노트북을 사용할 때 왼쪽에 두는 습관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른쪽에 옮겨져 있었다.성연은 얼른 노트북을 켜고 여기저기 들어가서 확인했다. 메일 박스에 들어있던 자료들이 모두 복사된 흔적이 발견됐다.성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노트북의 메일 박스에는 은밀한 정보도 있었다.스승님께서 보내신 자료.지금 이 자료들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다음날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난 성연은 호텔 로비에서 안나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어젯밤에 호텔 보안시스템을 해킹해서 CCTV를 확인했다.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부분은 지워졌지만, 다른 부분이 남아 있었다.이 호텔에 묵고 있는 안나는 아직 나가는 모습이 포착되지 않아서 범인을 잡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듯이 안나가 로비에 등장했다.성연을 본 안나는 아주 반갑다는 듯이 인사했다.“어머, 당신, 왜 여기에 있어요? 내가 아침 먹으러 내려오길 일부러 기다린 거에요?”성연이 영리하게 눈치채지 않았더라면 안나가 단순히 친절하고 착한 외국인일 뿐이라고 믿었을 터였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저 웃음 뒤에는 독을 뿜는 뱀의 혓바닥이 숨겨져 있었다.안나의 인사에 맞추어 성연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웃으며 받았다.“네, 안나 씨에게 할 말이 좀 있어서요. 우리 호텔 내의 후원에 가서 이야기 좀 하죠.”여기 호텔 로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서 잠시 뒤에 손을 쓰기라도 하면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게 될 수도 있었다.게다가 물어보기도 곤란한 질문이니 은밀한 장소를 찾는 게 타당할 터.안나라는 이 여자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안나는 여전히 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요.”안나가 앞으로 나오며 성연의 팔을 잡으려던 순간, 성연은 아무런 내색없이 안나의 팔을 피했다.안나 역시 표정의 변화없이 성연을 따라갔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후원에는 사람이 없었다.성연의 얼굴 표정이 차갑게 변하며 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어젯밤 내 방에 들어온 게 당신이지? 내 자료 내 놔.”자신이 범인임을 성연이 이렇게나 빨리 알아챌 줄은 전혀 몰랐던 안나는 깜짝 놀랐다. ‘보아하니, 이 계집애 역시 간단한 인물이 아닌 것 같네?’안나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무슨 자료?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안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성연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안나가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이미 성연이 예
‘그래함과 무진 씨 사이는 썩 괜찮은 것 같아.’성연은 두 사람이 언제 번호를 교환했는지도 몰랐다.‘그런데 사형이 전화를 받는 속도가 꽤 빨랐어.’성연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사형하고 채연 언니는 뭐하고 있대요?”‘채연 언니가 멀미를 했으니까, 사형도 당연히 언니하고 같이 쉬고 있었을 텐데.’‘전화를 그렇게 빨리 받을 수가 없어.’그래서 성연은 약간 궁금해졌다.“두 사람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맞혀 봐?” “뭐 먹고 있었나...?” 성연이 머뭇거리며 답을 말했다.“두 사람은 임신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도 서둘러야 하지 않겠어?”성연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 얼굴을 가렸다.‘사형하고 언니는 대낮인데도...’‘하필이면 무진 씨가 들었어.’‘하지만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 호텔에는 방해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바로 불이 붙은 거야.’‘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것도 정상일 거야.’말을 하던 무진이 성연에게 바로 키스를 했다.무진의 키스를 받은 성연은 숨을 헐떡이며 무진의 품에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무진의 동작은 갈수록 대담해졌다.성연의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너무 조급하게 그러지 말아요.”‘여긴 집무실이라서 언제든지 사람들이 들어올 거야.’‘문을 잠그더라도 누군가 보고하러 문을 두드릴 거야.’성연은 아직 이런 정도로 개방적이지는 않았다.그리고 아이를 만드는 것도 조급해하지 않았다.‘적어도 결혼식 후에 생각해야지.’‘나는 아직 그렇게 젊은데, 아이가 생기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해.’‘생각만 해도 정말 귀찮아.’“안 돼,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성연이 사무실에서 그러는 걸 원하지 않는 이상, 무진도 개의치 않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그곳이라면 조용하고 공간도 넓어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거야.’“무진 씨, 좀 진정해요...”성연은 얼굴을 붉히며 무진의 가슴을 밀어냈다.‘무진 씨는 정말 갈수록 대담해져.’‘누가 강무진을 금욕주의자라고 했어?’‘나를 잡아먹으려고 눈이 벌개져 있는데, 그런
무진은 전례 없이 빠른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문을 열고 성연의 뒷모습이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곧장 달려가서 성연을 백허그로 안았다.고개를 돌린 성연이 무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키스를 날렸다.무진은 키스를 잠시 중단하고 대표실 문을 잠궜다.이어서 성연에게는 숨막히고 공격적인 키스가 기다리고 있었다.무진의 손도 슬슬 위험 수위를 넘나들기 시작했다.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성연도 빨갛게 뺨이 달아올랐지만 무진의 손을 잡고 막았다.“지금은 회사라서 안 돼요.”성연이 불편한 듯한 모습을 보이자,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려던 무진은 마음속의 욕망을 억지로 눌러야 했다.그리고 성연을 품에 꼭 안았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무진의 마음이 비로소 진정되었다.성연을 껴안은 채 소파에 앉았다.그리고 나서야 성연에게 그래함의 일에 대해 물었다.“어떻게 됐어?”성연은 그래함과 유채연의 일을 간단하게 말해주었다.그전의 우여곡절들은 많이 생략했지만, 그래도 핵심적인 내용들은 거의 다 말했다.이야기를 듣고 난 무진은 큰 충격을 받았다.‘그래함이 그렇게 다정한 남자인 줄 몰랐네.’‘그래함의 권력과 지위라면 어떤 여자인들 얻지 못하겠어?’‘줄곧 고향의 연인만을 애타게 기다렸다니.’무진의 생각이 지나치다고 탓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그러나 내가 성연과 함께 있을 때 성연의 신분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어.’‘감정이란 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오로지 느낌만 따라야 해.’무진은 유채연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좀 궁금해졌다.‘그래함 같은 대단한 남자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라니.’“무진 씨도 믿기지 않지요?” 성연이 고개를 들면서 물었다.“그래.”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좀 믿기 힘든 일이야.’“이전에 사형이 채연 언니를 찾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더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사형이 예전에 채연 언니가 자신에게 준 증표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채연 언니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걸
북성에 도착하자 그래함은 유채연을 데리고 최고급 호텔을 체크인했다.뒤에서 그들의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고 있던 성연은 자기도 모르게 무진이 생각났다.‘나도도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 뭐.’‘요 며칠 사형과 채연 언니가 애정을 과시하는 것만 바라보았지.’유채연과 그래함도 성연을 잊지 않았다.유채연이 물었다.“성연아, 너 우선 우리 호텔로 가서 쉬지 않을래? 차를 그렇게 오래 탔는데 힘들었잖아.”유채연은 멀미가 나서 창백한 표정으로 그래함의 품에 기대고 있었다.“됐어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두 사람의 세계를 방해할 수 있겠어요? 저는 먼저 갈게요.” 성연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혼자 차를 타고 떠났다.유채연은 성연이 떠나는 방향을 보면서 걱정했다.“성연이 걔가 갈 곳이 있어? 시간도 늦었는데 여자가 밖에 있으면 얼마나 위험해.”“특히 이런 대도시에서는.”그래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채연아, 성연이는 이곳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 잊었어? 전에 내가 너한테 말했잖아. 성연이에게는 아주 대단한 약혼자가 있다는 거 말이야.”유채연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성연에 대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그래서 약혼자를 찾아간 거야?”“그래, 걱정하지 마. 지금 멀미하지? 힘들면 내가 밖에 나가서 약 좀 사올까?” 그래함은 유채연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유채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좀 자면 돼.”“그럼 그렇게 해.” 그래함도 마음 놓고 유채연을 혼자 둘 수 없었다.‘처음 이곳에 왔는데, 내가 채연이 곁에 없다면 채연이가 불안해할 가능성이 높아.’한편 성연은 바로 무진을 찾아갔다.그러나 자신이 돌아온 걸로 무진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려고 무진에게는 말하지 않았다.성연은 예전에 지문을 입력해 놓아서, 보고 없이 바로 최고층까지 갈 수 있었다.요 며칠 동안 무진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이제 곧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설레는 듯했다.성연이 집무실 입구에 도
외삼촌은 다가가서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을 부축했다.여전히 울고 있던 유채연이 일어나자, 그래함이 어깨를 감싸고 위로했다.“얼른 가거라.” 외삼촌도 울먹이는 목소리였고,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래함은 외삼촌을 한 번 본 뒤 유채연이 차에 타도록 부축해 주었다.유채연은 외삼촌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성연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외삼촌이 몸을 돌릴 때 눈물이 땅에 떨어지는 걸 봤지만, 유채연이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연이 옆에서 따라서 소리쳤다.“외삼촌, 제가 채연 언니하고 자주 돌아올 게요. 저는 외삼촌 가게 하드가 좋아요.”그제야 서둘러 눈물을 닦은 외삼촌이 몸을 돌려서 말했다. “그래,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마.”차가 천천히 시동을 걸자, 창밖의 장면도 빠르게 바뀌었다.차에 앉아서도 유채연은 여전히 훌쩍거렸다.그래함은 유채연을 꼭 안고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채연아, 외삼촌이 보고싶으면 앞으로 자주 돌아와서 볼 수 있어. 내가 같이 올게.”“정말?” 그래함을 바라보는 유채연의 눈은 마치 토끼의 눈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물론이지,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다 해 줄게.” 예전에는 그래함도 뭘 해도 혼자였다.하지만 이제 유채연이 있으니 모두 달라졌다.그래함은 틀림없이 유채연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다.어쩌면 유채연을 위해 정말 국내로 이주할 수도.“그런데 내가 없는데 외삼촌은 어떡하지? 자기 몸을 잘 추스릴까?” ‘예전에는 집안의 모든 일을 내가 책임졌지.’‘지금 내가 떠났으니 외삼촌은 잘 수습할 수 있을지 몰라.’성연은 조수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성연은 일부러 그 자리에 앉아서 유채연과 그래함에게 공간을 내주었다.그 말을 듣고 성연이 웃으며 말했다.“채연 언니, 외삼촌은 마음이 그렇게 섬세한 분이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떠날 때 그래함은 외삼촌에게 체크카드를 남겨 두었다. 비밀번호도 쪽지에 써 두었다. 그 돈이면 외삼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생 편안하게
이런 유채연의 모습을 보고 외삼촌은 또 한바탕 잔소리를 했다.“정말 재수 없게 징징거리고 있지. 꼴이 그게 뭐야? 나는 상관하지 말고 빨리 가. 나한테 돈도 있고 차도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는 말할 것도 없어. 너는 나한테 짐만 될 뿐이야!”유채연은 외삼촌이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었다.대부분 외삼촌은 그저 입으로만 모질게 굴었을 뿐이다.사실 자신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애초에 집에 그렇게 많은 일이 생기자 친척들마다 모두 양보하면서 피했다.외삼촌만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모두들 유채연이 흉악한 외삼촌을 따라가면 틀림없이 좋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그러나 그동안 삶의 질이 좀 떨어진 걸 제외하면, 외삼촌은 진심으로 자신을 보호해 주었다.가게에 온 손님 중에 간혹 유채연의 예쁜 모습을 보고 희롱하려고 했지만, 모두 외삼촌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이전의 여러 일들을 생각하자, 유채연은 외삼촌이 자신에게 그렇게 잘해 준 걸 알게 되었다.유채연이 갑자기 털썩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외삼촌, 그동안 거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옆에서 그 모습을 본 그래함도 유채연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외숙부님, 채연이의 부모님이 안 계시니 외숙부님이 채연이 아버님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무릎을 꿇고 맹세하겠습니다.”“저희는 곧 결혼하게 되면 반드시 읍내에서 잔치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채연이를 보고 비웃지 못하게 할 테니, 채연이를 제게 주시면서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채연이에게 정말 잘 하겠습니다.”남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엄성이다.그러나 그래함은 유채연을 위해 외삼촌 앞에 무릎을 꿇었다.이 역시 그래함의 성의를 충분히 드러낸 것이다.두 사람의 감정을 외삼촌은 더욱 눈에 새겨 두었다.‘채연이가 그래함과 함께 있으면서 미소도 눈에 많이 많아졌어.’“너희들 빨리 일어나!” 외삼촌은 유채연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었다.입으로는 듣기 싫은 말을 하지면, 개를 길러도 이
이전에 유채연이 입었던 옷은 전부 그래함과 성연이 함께 골라준 옷으로 교체되었다.유채연은 트렁크를 사서 물건을 다 넣었다.곧 떠나야 할 때, 유채연이 외삼촌과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내가 같이 갈게.” 유채연을 도와 트렁크를 닫고서 그래함이 일어났다.“그래도 나 혼자 갈래...” 유채연은 망설였다.“채연아, 이제는 우리 둘이 같이 있잖아. 외삼촌은 우리 관계의 증인이자 네 유일한 가족이야. 내가 널 데리고 갔다가,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래함이 유채연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요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유채연은 자연스럽게 그래함과 더 가까워졌다.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그래함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만약 외삼촌이 그래함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 마음이 더 괴로울 거야.’“그래, 같이 가자.” 유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두 사람이 함께 문을 나섰다.나오다가 마침 두 사람을 찾으려던 성연과 마주쳤다.“성연아, 우리 외삼촌 보러 갈 건데, 너도 갈래?” 유채연은 요 며칠 성연과 계속 붙어 있어서, 성연에 대한 감정도 이미 예전처럼 좋았다.어디를 가든지 성연을 데리고 가야 해서, 그래함이 한바탕 질투하기도 했다.“출발하기 전에 외삼촌과 작별인사 하러 가는 거예요?”성연이 물었다.“그래.” 유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나도 함께 갈게요.” 눈치 빠른 성연은 유채연의 손을 잡지 않고 뒤에서 따라갔다.‘채연 언니하고 그래함 사형이 나란히 다정하게 가는 모습을 보면, 외삼촌이 좀 안심할 수 있겠지.’유채연과 그래함은 앞에서 함께 걸어갔다.유채연의 마음은 여전히 좀 불안했다.‘예전에 외삼촌이 못마땅했을 때는 여기를 탈출하겠다는 생각도 했지.’그러나 정말로 외삼촌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유채연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비록 그다지 내 생각대로 지내지는 못했지만.’‘하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내 유일한 피난처였지.’“걱정 마, 외삼촌은 좋은 분이니까 이해해 주실 거야.”
그 말을 듣자, 유채연은 코가 시큰거리면서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꽉 쥐었지만 뜬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지금처럼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은 없었다.유채연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한 걸 보자, 가볍게 한숨을 쉰 그래함이 휴지로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그렇게 울기를 좋아해? 앞으로 나하고 있으면서 내가 잘 해줄 테니까 이렇게 울면 안 돼. 네가 눈물을 흘리는 게 안타까워.”그래함의 부드러운 말을 들으면서 유채연의 감정도 점차 가라앉았다.감정이 진정되자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맛보았다.아주 달았다. 이 달콤함이 유채연의 마음속에 스며들면서 마음을 천천히 따뜻하게 했다.“고마워, 그래함.” 유채연은 코를 훌쩍이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내가 너에게 고마워해야지. 그렇게 오래 되었는데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잖아. 내가 좀 일찍 너를 찾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함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우리는 지금이 좋아.” 유채연은 그래함의 이런 의기소침한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그래, 이제 네가 있으니까 앞으로 우리는 더 좋아질 거야.”그래함이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비록 성연은 어느새 감정이 없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그러나 계속 뒤를 따라 가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성연은 정말 기뻤다.자신도 그런 분위기가 달콤하게 느껴졌다.예전에는 그저 단순하게 그래함 사형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그러나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자, 정말 두터운 그래함의 깊은 정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성연은 두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처음에 굳어 있던 두 사람이 점차 풀어질 때까지 이미 정말 잘 지나왔어.’“두 분, 연애하면서 여동생도 잊어버렸지요? 나 너무 배가 고파요. 밥 먹으러 가고 싶어요.” 성연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게에서 별로 먹지 않고 이렇게 오래 걸었더니 벌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그 말을 들은 유채연이 바로 뒤돌아서 미
“언니, 빨리 나와서 사형에게 보여주세요.” 성연이 바로 유채연을 데리고 나갔다.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유채연은 바로 그래함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그래함은 지금도 유채연이 겉모습만 꾸민 여자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다.약간 수줍어하는 그 모습은 언제나 그래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그래함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한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유채연도 그래함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걸 정말 기대하고 있었다.그런데 한참 기다렸는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그래함의 눈을 마주한 유채연이 어색하게 치마자락을 잡고 말했다.“어때? 보기 싫어?”“예뻐. 내가 홀딱 반할 정도야.” 그래함의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웠다.유채연은 입술을 오므린 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화장을 마친 뒤 그들은 계속 쇼핑을 했다.성연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게 자리를 양보했다.그래함이 바로 앞으로 가서 유채연의 손을 잡았다.유채연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래함은 꼭 쥔 채 유채연이 벗어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성연이도 여기 있잖아.” 유채연은 20여 년을 살면서 그래함 이 한 사람만 좋아했다.평소에도 남자와 스킨십을 해본 적도 없었다.지금 그래함과 함께 걸으면서 유채연은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러나 그래함의 따뜻한 손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을 느끼자 마음은 달콤했다.“신경 쓸 필요 없어.”그래함이 바로 말했다.두 사람 뒤에 있던 성연은 하마터면 그래함을 흘겨볼 뻔했다.‘이건 날 훼방꾼으로 여기는 거야.’유채연은 감히 고개를 돌려 성연을 보지 못하고, 손을 잡힌 채 얼굴만 빨개졌다.그래함은 유채연이 자신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자 불만스러웠다.“채연아, 팔장을 낄래.”“아니, 손을 잡았잖아.” 유채연은 입술을 깨물며 수줍어했다.“우리 연인 사이잖아?” 그래함이 유채연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열기가 귓가를 스쳐 지나가자 유채연은 더욱 부끄러워했다.‘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외삼촌에게 차를 주자, 외삼촌은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 차의 성능을 시험해 보겠다고 말했다.그래함이 자신을 속이는 건지 보려는 것이다.외삼촌이 차를 몰고 가자 성연과 그래함, 유채연만 남게 되었다.오늘 손님이 오기 때문에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다.‘자세히 헤아려 보니 외삼촌은 정말 디테일한 사람이야.’“채연 언니, 우리 쇼핑하러 가요.” 성연이 다가가서 유채연의 팔장을 꼈다.“그래.” 유채연은 성연이 쇼핑을 하려는 걸로 생각하고 함께 갔다.성연이 유채연을 데리고 온 곳은 모두 고급 쇼핑몰이었다.유채연도 옷을 좀 사고 싶었지만, 가격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성연은 흰색 원피스를 유채연의 몸에 대고 비교해 보았다.“채연 언니, 이 원피스가 잘 어울려요. 한번 입어 보세요.”“난 됐어. 네가 맘에 들면 사.” 방금 유채연은 가격표를 언뜻 봤다.‘너무 엄청난 가격이야.’‘원피스 한 벌에 어떻게 가격이 이렇게 비쌀 수 있는지 정말 상상할 수가 없어.’‘정말 터무니없는 가격이야!’“언니, 이 치마가 정말 잘 어울려요. 한번 입어보고 싶지 않아요?” 성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채연을 바라보았다.눈앞의 원피스를 보고 유채연은 망설였다.“채연아, 한번 입어 봐.” 그래함도 유채연이 이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유채연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기대되면서도 머뭇거렸다.마침내 결정을 내린 뒤에 옷을 가지고 탈의실로 들어갔다.‘확실히 잘 어울리네.’유채연은 한번 입어 본 걸로 만족했고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성연과 그래함이 번갈아 설득해서 유채연도 결국 옷을 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또 유채연에게 많은 옷을 사주었다.처음에는 유채연도 두 사람이 돈을 쓰는 걸 걱정했다.그러나 두 사람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유채연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중에는 돈을 쓰는 것에도 무감각해졌다.예쁜 옷을 많이 산 뒤 그래함이 뒤에서 가방을 들어주었다.그래함의 두 손으로 겨우 들 수 있을 정도였다.성연은 또 유채연을 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