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복을 입은 강씨 집안 둘째 할아버지 강상철은 전화 한 통을 받은 후부터 혼비백산 상태가 되었다.입으로는 계속 무어라 중얼거리면서.“끝났어, 완전히 끝났어.”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셋째 할아버지 강상규가 형 강상철의 옆으로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형님, 왜 그러십니까?”강상규의 음성을 듣고서 불현듯 깜짝 놀란 강상철이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이 강상규의 손을 꼭 쥐었다.“상규야, 우리는 끝났다. 이제 되돌릴 가능성이 없어. 다 사라졌어.”무언가에 큰 충격을 받은 사람 같았다. 아무 일도 없이 이럴 형님 강상철이 절대 아니었다.집안에 무슨 큰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숨을 깊게 들이마신 강상규가 차분한 음성을 내기 위해 애쓰며 물었다.“형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강상철은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로 집안에서 일어난 일을 털어놓았다.지금 둘째, 셋째 일가가 무너졌으니 더 이상 숨길 수도,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설령 자신들이 이 곳을 나갈 수 있다 하더라도 일어난 일을 해결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을 터였다.듣고 난 강상규 역시 창백한 얼굴이 되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그럴 리가?”강상철이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한평생 심혈을 기울여 계획을 세웠건만, 결국 이런 결말을 보게 되는구나, 하하하하.”강상규는 표정이 이상한 강상철을 보면서 옆에서 위로했다.“형님, 우선 진정하세요. 너무 속단하지 말고요.”가까스로 만들었던 지위와 세웠던 기업이 모두 하루아침에 무너졌다.강상규 또한 속이 쓰려 왔지만, 지금 아직도 교도소에 수감 중인 그들 두 노인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강상철은 계속 큰 소리로 웃으며 입으로 중얼거렸다.“죄를 지은 업보야, 업보야.”그렇게 중얼거리던 강상철이 순식간에 피를 토하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으로 쓰러졌다.순간 강상규가 당황하며 얼른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형님, 형님, 왜 그래요?
강상규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무진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강상규를 만나러 교도소로 향했다.그러나 둘째, 셋째 일가를 돕기 위해 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강상철, 강상규, 두 어른이 할아버지의 친 동기이기에 간 것일뿐.그들에 대해 무진은 절대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무진을 본 강상규는 드물게도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저 앞에 놓인 잔만 만지작거렸다.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셋째 할아버님, 할 말이 있으시면 그냥 말씀하세요.” 무진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하긴, 넌 이제 무척 바쁜 사람이니, 지금 나를 보러 온 것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겠지.” 강상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전에 자신이 무진을 대하던 여러 장면들을 떠올리니, 무진에게 자신을 도와달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가 않았다.강상규가 입을 열지 않자, 무진도 입을 다물었다. 침묵하고 있는 두 사람으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은 공기 가운데 무척이나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강상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무진아, 틀림없이 우리 둘째, 셋째 일가의 처지는 너도 분명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 할아비가 부탁하마. 이제 우리 하자. 우린 이미 그 죄과를 받았다.”평소 강상규가 얼마나 도도한 사람이었던가?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고개를 숙인 채 무진에게 사과하고 있었다.강상규도 예전만큼 정정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초췌한 것이 마치 십년은 더 늙어 보였다.어쩌면 이 모습이야 말로 노인이 가져야 할 덕목일지도 모른다.그러나 무진은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바로 대놓고 강상규에게 말했다.“저는 멈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제가 끝내고 싶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MS 가문이 둘째, 셋째 일가의 남은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안색이 창백해진 강상규의 마음은 완전히 낙담한 상태가 되었다.강명재와 강명기는 대단한 뒷배를 끌어들이면 큰 집에 맞설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하지만 그들은 집
강일헌, 강씨 집안 둘째 일가의 둘째 도련님인 그가 은성그룹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다.이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으며, 다들 이 일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강씨 집안 둘째, 셋째 일가가 천륜을 어긴 죄값을 드디어 받은 거죠?'“봐요, 은성그룹이 무너진 다음에 그런 일들이 드러났는데, 어떤 일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이런 사람은 진작에 죽었어야 해요.”“바로 이렇게 투신자살했다고? 저들이 강한 정신력을 지닌 줄로 알았는데? 어쨌든 이런 과도한 일도 저들은 해내는 군요.”강일헌의 죽음에 아무도 동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조롱뿐이었다.이와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느꼈다. 둘째, 셋째 일가에 사람이 없어진 것은 또한 그들이 강씨 집안을 쪼개려던 저들의 계획이 철저히 박살났음에 대한 선포였다.성연은 TV로 그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해바라기씨를 까먹었다.처음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봤다.성연의 옆에 앉은 무진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이렇게 건조된 것들은 많이 먹지 마. 열이 나지 않게 물을 많이 마셔야 해.”물을 한 모금 받아 마신 성연이 얼굴을 구겼다.“이건 무슨 맛이 이래요?”“주방에 말해서 안에 화기를 제거하는 것을 좀 넣으라고 했어.”무진이 설명했다. 얼굴에 좀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은 채.성연이 물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무진 씨는 내 전공이 뭔지 잊었어요? 설마 내가 내 몸이 어떤 지도 잘 모르겠어요? 무진 씨야 말로 몸에 화기를 없애야 한다고요!”말하면서 성연은 자기 앞에 놓인 물잔을 무진 앞으로 밀어 놓으며 무진을 향해 양 눈썹 끝을 세웠다.무진은 아무 말도 없이 잔 속의 물을 한 번에 다 마셨다.그리고 잔을 흔들어 잔이 비었다는 뜻을 성연에게 표시했다.성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바꿔보지만 이리저리 돌려봐도 모두 이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눈이 더러워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둘째, 셋째 일가에 관한 뉴스는 가급적 안 보
둘째, 셋째 일가가 처참할 정도로 무너지면 무진이 저들을 그냥 놓아줄 줄 알았다.그런데 무진은 멈추지 않았다. 바로 이어 자신을 배신했던 협력업체들에게도 타격을 주었다.이 사람들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여긴 사람들은 둘째, 셋째 일가처럼 처참한 상태가 될까 두려워 미스터 제이슨에게 투항했다.자료를 뒤적거리던 무진이 눈살을 찌푸렸다.무진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손건호가 물었다.“보스, 왜 그러십니까? 자료들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말하면서도 손건호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자료들은 자신이 직접 확인한 것들이라 누락된 부분은 절대 없을 테니까.다만 자신의 보스가 어떤 일로 인해 안색이 나빠진 것인지 궁금했다“자료는 별 문제가 없어. 단지 이건 어째 MS 가문이 판 함정이 아닌가 싶다.” 무진의 의심은 수집한 자료들과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연관 지으며 든 것이다.둘째, 셋째 일가가 쓰러진 이후, 미스터 제이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들을 삼켜버렸다. 그전에 은성그룹과 협력하던 회사들도 모두 미스터 제이슨과 협력 관계를 맺었다.사건 전체를 놓고 볼 때,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은 바로 미스터 제이슨.또한 강명재와 강명기 두 사람의 추진해서 세웠던 은성그룹은 결국에 미스터 제이슨의 수중에 들어가며 그가 국내 시장에 진출하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결국 둘째, 셋째 일가는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한 셈이다.지난 일을 되돌아보던 손건호 역시 하나 둘 차례대로 정리되면서 갑자기 등 뒤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정말 그렇다면 미스터 제이슨의 계략이 너무 치밀한 것 아닌가요?”“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MS 가문도 외국에서 100년을 이어온 가문이야. 오래된 역사만큼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는 가문에서 미스터 제이슨이 인정받았다는 건 미스터 제이슨이 그만큼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거겠지.”무진은 분석할수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느껴졌다.‘이건 역시 미스터 제이슨 쪽에서 계획한 게 분명해.’아닐 수도 있
눈 깜짝할 사이에 성연이 곧 유럽으로 대학 진학하는 날이 되었다.그 기간 동안은 무진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성연과 함께 할 것이다.자신의 어린 약혼녀가 먼 유럽으로 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그리고 무진의 말을 통해 성연이 유럽에 가는 일도 알고 있었던소지연이 선물을 들고 방문했다.성연과 무진, 두 사람은 바둑을 두며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얼굴에 시종 훈훈한 웃음을 띠고 있는 무진을 보는 소지연의 눈에 질투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예전 무진은 자신에게 무척 잘해주었지만,자신의 눈앞에서는 지금 같은 표정을 지어 준 적이 없었다.소지연은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말했다.“무진 오빠, 성연 씨, 바둑 두고 있어요?”성연은 고개를 들어 소지연을 한 번 쳐다본 후에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눈앞의 바둑판을 연구하는 데 전념했다.무진이 소지연에게 인사를 했다.“왔어? 편하게 앉아.”소지연은 선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단정한 자세로 소파에 앉은 자세가 예의범절의 정석 같았다.보아하니 양갓집 규수들이라야 익힐만한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물론 자신의 단정한 자세와 성연의 앉은 것 같지 않은 자세와 비교되게끔 소지연은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였다. 무진이 자신의 뛰어난 점을 알아볼 수 있도록.그동안 소지연은 두 사람이 바둑을 두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입을 열지 않았다.두 사람의 바둑이 끝난 후에야 소지연은 입을 열었다.“성연 씨, 유럽으로 진학한다고 들었어요. 마침 우리 둘이 서로 동반자가 되어 줄 수 있겠어요. 성연 씨는 언제 갈 생각이에요? 우리 둘이 같이 가요.”성연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아니오, 몇 시간만 비행기를 타면 바로 도착인데요, 뭘.”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소지연과 동행하고 싶지 않았다.새 학교에 대한 기대로 들뜬 자신의 즐거움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소지연은 순간 불쾌한 마음을 드러냈다.하지만 가까스로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성연 씨, 몇 시간이래도
성연에게 거절당한 소지연의 머리 속에 계략이 떠올랐다. 잠시 엠파이어 하우스에 머물고 있던 소지연은 기회를 엿보다 서재에 있는 무진을 찾아갔다.무진이 서류를 펼치는데 서재 문입구에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였다.그는 성연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평소 성연은 이처럼 조심스럽게 자신을 대하지 않으니까.성연은 보통 바로 그냥 문을 열고 들어온다.고용인이 몰래 나쁜 짓을 하려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진이 차가운 음성으로 소리를 쳤다.“누구야?”그 소리에 깜짝 놀란 소지연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소지연인 것을 본 무진이 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어째서 거기 있어?”소지연은 다소 불만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무진 오빠, 왜 그렇게 무섭게 말해?”무진의 안색이 좀 누그러졌다.“다음에는 용건이 있으면 문을 두드려. 남몰래 수상하게 행동하지 말고.”유럽에 있을 때 무진이 본 소지연은 모든 일들을 깔끔하게 처리해냈다.그러나 이번에 북성에 온 후에 소지연이 한 일에 대해서는 무척 불만스러웠다. 심지어 의심스러운 점도 보였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한 소지연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마음속의 의심을 털어버린 무진은 예전의 마음으로 소지연을 대했다.“용, 용건은 없어요. 난 그냥, 오빠가 여기 있는지 어떤 지 잘 몰라서.” 소지연은 이를 악물었다. 무진이 자신을 수상하다고 말하다니.보아하니 무진의 심중에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가 정말 낮아졌구나 싶었다.“됐어,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 무진은 빙빙 돌리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자신과 소지연 단둘이 있는 모습을 성연이 보고 의심하면 안되니까.소지연 역시 대놓고 바로 말했다.“무진 오빠, 나 이렇게 빨리 유럽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휴가를 더 내고 싶어요. 며칠 더 여기 머물 생각이에요.”무진이 눈을 들어 소지연을 쳐다보았다.며칠 전, 소지연 자신이 나에게 말하지 않았나? 모든 게 이미 잘 안배되었으니 유럽으로 갈 수 있겠다고 말이다.‘그런데
금세 성연이 유럽의 학교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성연을 위해 직접 전세기를 띄운 무진은 성연을 공항까지 바래다주었다. 비행기 안에는 조종사와 승무원을 제외하고 성연 혼자뿐이라 무척 조용했다.과자가 가득 담긴 커다란 봉지를 든 주연정이 성연을 보며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성연아, 성연아.”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던 성연은 얼른 주연정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받으러 갔다. 이 봉지의 무게는 아마 주연정의 절반은 될 터였. ‘도대체 뭘 그렇게나 많이 샀는지.’ 성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연정아, 너 뭘 이렇게 많이 샀니?”무진이 먼저 앞으로 다가가 과자가 담긴 봉투를 받아서는 한쪽에 선 채 두 사람에게 먼저 시간을 양보했다.어느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주연정이 성연의 어깨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흑흑흑, 성연아, 이번에 가면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어?”어깨의 촉촉함을 느낀 성연의 마음이 모처럼 말랑말랑해졌다. 주연정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성연이 말했다.“별거 아니야, 방학하면 돌아올 거야. 만약 내 생각 나면 네가 유럽으로 나를 찾아와도 되고.”주연정도 그러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해외로 나가기에는 좀 어려운 형편.주연정이 주먹을 꼭 쥐고 다짐하듯 말했다.“내가 여름 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돈을 모아서 꼭 너를 찾아갈 게.”성연은 연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연정의 우정은 순수하고 담백했다.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그대로.북성남고에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 성연 또한 주연정 같은 친구만 사귀고 싶었다.대답을 듣지 못하고 고개를 둔 주연정이 눈시울이 붉었다. 눈에는 짙은 아쉬움을 한가득 띈 채.“너 꼭 돌아와서 날 만나야 해. 기억해. 나는 네가 너무 그리울 거야.”성연은 가볍게 한숨을 쉰 뒤에 손을 뻗어 주연정을 안았다.“걱정 마, 꼭 그럴게.”주연정은 성연의 손을 잡아당겼다. 무진이 한 옆에 선 무진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사실 성연에게 하고
몇 시간 후, 성연은 순조롭게 파리에 도착했다.비행기에서 내려 예약한 호텔에 도착한 성연은 무진에게 연락했다.호텔의 푹신한 침대에 누워 턱을 괸 채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곧이어 휴대폰 화면에 무진의 모습이 나타났다.무진이 엠파이어 하우스의 서재에 있었다. 아직 서류를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두 사람은 화면을 사이에 둔 채 마주보았다. 가까운 듯 또 아주 먼 듯했다.어느 순간 서로를 바라보기만 한 채 아무 말도 없었다.성연을 바라볼 때면 늘 냉기를 머금은 듯한 무진 눈동자가 순식간에 따뜻함을 머금었다. 날카로운 이목구비마저 부드러워지는 듯했다.“네가 떠난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나는 벌써 네가 그리워지기 시작했어. 아직 새털 같은 시간들이 남았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성연은 모처럼 무진의 말에 반대하지 않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나도, 무진 씨가 보고 싶어요.”말하는 성연의 얼굴에 옅은 분홍 빛이 피어났다. 모처럼 보이는 부끄러운 기색.이런 모습은 어쩌면 무진 앞에서만 드러낼 터.무진의 마음은 이미 보들보들해졌다.‘아, 송성연, 왜 이리 사랑스러운 거니? 당장 네 곁으로 날아가지 못하는 게 한이다.’‘하지만, 아직은 안 돼. 미스터 제이슨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는.’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무진이 스크린을 사이에 둔 채 성연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시간이 나는 대로 너를 만나러 갈게.”성연이 입을 삐죽거렸다. 강씨 집안의 상황으로 봐서 일이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자신 도한 무진의 상황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해한다.어쨌든 이런 시기에 무진이 손을 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언제요?” 무의식적으로 손끝으로 침대 시트 위를 반복해서 문지르며 무진을 바라보는 성연의 얼굴에는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금방, 약속할 게.” 먼 유럽에 있는 성연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 무진은 모든 사람들의 일을 최대한 빨리 속도를 내어 처리할 생각이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