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현석은 곽승재의 상황을 설명하고는 또 말했다.“형수님, 지연 씨, 저도 아버지랑 밥 먹기로 해서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 나중에 시간이 될 때 다시 모여요.”“그래요.”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 뒤로 고은서와 박지연은 여러 가지 특색이 있는 온천탕을 체험하고 예쁜 사진도 많이 찍으면서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냈다.저녁 시간 때 박지연은 밖에 나가 온 닥터와 통화하고 있었기에 고은서는 먼저 레스토랑에 갔다.저녁 식사의 장소는 산장에 있는 호화로운 레스토랑이었다.비록 이 레스토랑도 뷔페 형식이지만 음식은 온천 구역의 스낵과 바비큐보다 훨씬 좋았고 회, 성게, 호주 랍스터 등이 있었다.종일 물놀이 하느라 배가 많이 고팠던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보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일부 젊은 친구들은 수저를 사용하는 게 귀찮아서 맨손으로 랍스터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그들의 털털함과 맘껏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배가 고파졌다.전생에 정신병원에서 많은 굶주림을 당해서인지, 이번 생에 고은서는 음식에 대한 애착이 훨씬 강해졌다.집에 있을 때 고은서는 혼자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설사 곽승재가 집에 있다고 해도 너무 우아하게 밥을 먹어서 고은서는 그가 밥을 먹는 게 아니라 광고를 찍는 것처럼 느꼈고 전혀 입맛을 돋우지 못했다.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이 팔을 걷어 올리고 마음껏 먹는 모습을 보니 고은서도 식욕이 폭증했다.고은서는 이것저것 많이 챙겨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렇게 급하게 먹어?”고은서가 흐뭇하게 먹고 있을 때 곽승재가 갑자기 나타났다.그는 이미 자주 입는 셔츠로 갈아입었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가슴팍의 두세 개 단추를 풀어놓아 건장한 가슴을 드러냈다.“왜 넋이 나갔어? 일단 입에 있는 것부터 삼키고 봐.”곽승재는 두 볼이 빵빵한 고은서가 햄스터 같아 보였고 그녀의 이마 끝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저도 모르게 생겨났다.고은서는 경계하듯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고은서와 마주쳤다.“그때 당시 상황이 그 물음을 대답하기 적합한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해?”고은서는 아무 이유 없이 과일로 백유미를 내리쳤고, 또 백유미의 목을 졸라 죽일 기세였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미친 행동에 충격을 받아 그녀의 생트집 잡는 질문을 상대할 여지가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그윽한 눈동자가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말했다.“당신이 백유미 씨와 결혼하든 말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은서야...”“지연아, 이쪽!”곽승재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고은서는 그의 말을 끊고 입구에 나타난 박지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박지연은 두 사람 앞에 걸어와서 말했다.“승재 씨, 일 다 보셨어요?”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둘이 얘기 나누세요. 저는 저쪽에 다녀올게요.”“무슨 일 있었어? 너와 승재 씨의 분위기가 이상해 보이는데?”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조금 전에 곽승재가 자신한테 했던 말들을 숨기지 않고 박지연에게 말해주었다.“승재 씨는 네가 삐졌을까 봐 백유미 씨를 내쫓지 않는 이유를 특별히 설명한 거네.”박지연이 말했다.“내가 승재 씨가 너에게 감정이 있고, 너와 이혼하기 싫어한다고 계속 말했잖아. 이제는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눈총을 쏘아붙이며 말했다.“난 그게 나한테 감정이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어. 설사 그 사람이 나에게 감정이 있다고 해도 난 이혼할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박지연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은서야, 네가 승재 씨를 그렇게 오래 사랑했는데, 이제 겨우 희망이 보이는데, 왜 인제 와서 물러서는 거야? 얼마나 많은 여자가 승재 씨 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데, 너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고은서는 확고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후회하지 않을 거야.”전생에 고은서는 곽승재에게만 너무 집착하여 많은 아쉬움을 남겼었다.그녀는 외할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고, MQ를 지키지 못했고,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했으며, 인
고은서는 박지연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니 진짜 곽승재의 모습을 보았다.캐주얼 셔츠를 입은 곽승재는 키가 훤칠하고 카리스마가 돋보였으며, 시크하고 우아한 온 닥터와 함께 서 있으니, 마치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처럼 멋있고 눈이 부셨다.“우리 남편 아주 멋있네.”박지연이 감탄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툭 치며 말했다.“군침 좀 닦아.”“됐거든. 너도 승재 씨를 바라보는 눈빛이 만만치 않거든.”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눈총을 쏘았다.앞에 있던 두 남자는 그녀들의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여보, 승재 씨랑 아는 사이였어?”박지연은 온 닥터의 옆으로 걸어가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온 닥터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안면이 있는 사이야.”온 닥터는 업계에서 평판이 매우 높아서, 많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그와 친분을 맺으려고 했다.게다가 온 닥터는 병원의 우수대표로 정부의 공식 시상식에 자주 참석하였기에 우수한 사업가 곽승재와 안면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박지연은 고은서를 소개했다.“당신도 만난 적이 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소개할게. 이쪽은 나의 친구 고은서야. 승재 씨의 아내이기도 해.”온 닥터는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고, 고은서는 미소로 답했다.온 닥터는 확실히 박지연이 말한 것처럼, 성격이 냉담하고 모든 사람에게 달갑지 않았다. 평소에 활발하고 장난기 많은 박지연이 온 닥터를 어떻게 견디는지 모를 일이었다.“온 닥터가 간만에 시간이 생긴 건데, 저희는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게요.”곽승재는 자연스럽게 고은서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고은서도 짝을 맞춰 움직이지 않았다.온닥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저희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박지연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말했다.“승재 씨가 은서와 함께 소화할 겸 산책 좀 해주세요. 은서가 아까 배 터지게 먹어서 지금 속이 불편할 거예요.”사람들 앞에서 배 터지게 먹었다는 말을 들은 고은서는 다소 민망함을 느꼈고 박지연을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곽승재는 고은서의 찡그린 미간을 보고 바로 이유를 알아차리고는 주민기에게 전화를 걸었다.“주변에 약국이 있는지 알아보고 사람을 시켜서 위약과 소화제를 좀 사 오세요.”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전생에 그녀는 다이어트를 너무 심하게 해서 가끔 위병을 앓곤 했다. 그날은 곽승재가 집에 있는 저녁이었다. 고은서가 곽승재에게 우유를 가져다줄 때 위가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우유도 하마터면 쏟을 뻔했지만, 곽승재는 그녀의 상태를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고 심지어 냉정한 얼굴로 나가라고 했었다.그러나 방금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곽승재는 이미 자신이 불편해하는 것을 눈치챘고 알아서 사람을 시켜 약을 사 오라 했다.역시 남자는 세심함을 배우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기에 세심하지 못한 것을 핑계로 삼는 것뿐이었다.고은서도 곽승재의 변화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그는 확실히 전생보다 고은서를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이혼에 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거지만, 곽승재를 집요하게 미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어쨌든 이번 생에 곽승재는 백유미가 자신을 함부로 상대하게 놔두지 않았고, 자기 일에 무관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왜 말이 없어? 위가 많이 불편해? 병원 갈까?”곽승재는 고은서의 곁에 다가가서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니야.”말을 마치고 고은서는 호텔에서 걸어 나오는 주민기를 보았다. 주민기는 외투를 걸치고 손에 차 키를 들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은서를 위해 약 사러 가는 길인 것 같았다.“실장님.”고은서는 주민기를 불러 세웠다.주민기는 고은서를 보고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어제 아침, 주민기가 곽승재에게 일을 보고할 때, 곽승재는 갑자기 그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듯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이에 놀란 주민기는 자신이 GS 그룹에 입사해서부터의 모든 일을 돌이켜보았지만, 여전히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갈
주민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재빨리 차 키를 곽승재의 손에 밀어 넣고 부리나케 도망갔다.고은서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곽승재에게 물었다.“당신 도대체 실장님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실장님이 날 보기만 하면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도망가?”‘평소에 늘 승재의 주변을 따라다니던 민기 씨가 오늘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것 같았어.’이 말을 듣자 곽승재는 기분이 잡쳐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실장님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 약 사겠다며? 가자.”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곽승재가 그 영문을 모른다는 말은 귀신도 안 믿을 소리였다.두 사람은 차를 향했다.고은서가 차에 올라타서 안전 벨트를 매자마자 안색이 창백한 백유미가 같은 주차장에 있는 것을 보았고 백유미도 두 사람을 보았다.“승재야, 은서 씨.”백유미는 머리를 짚고 허약한 목소리로 인사했다.“유미야, 너 어디 가려고?”곽승재가 묻자 백유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마의 상처가 염증 나서 많이 아파. 근데 약을 챙겨오는 걸 깜빡해서 일단 약을 좀 사 오려고 해.”곽승재가 말했다.“마침 우리도 나가려던 참이었어. 필요한 약이 있으면 나에게 보내줘. 내가 같이 사 올게.”백유미는 아픔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게. 나 혼자서도 약 살 수 있어.”백유미가 아픔을 끙끙 참는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유미 씨의 상황이 아주 심각한 것 같은데 승재 씨가 직접 병원에 데려다줘. 난 혼자 택시 잡으면 돼.”이렇게 말하면서 고은서는 안전벨트를 풀었다.곽승재는 손을 내밀어 고은서를 붙잡으며 말했다.“기다려 봐.”백유미도 얼른 사과했다.“은서 씨, 화내지 말아요. 저는...”“불쌍한 척 그만 좀 해요!”고은서는 백유미를 향해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정말 저를 괴롭히고 싶은 게 아니었다면, 왜 우리가 가는 곳마다 마침 유미 씨가 있는 거죠?”백유미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가볍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마디 하고는 재빨리 자기 차에 가서 차
“길 안 보고 다닐래?”곽승재가 화를 내며 말했다.방금 하마터면 차에 치일 뻔한 고은서는 깜짝 놀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나 왜 이래? 왜 갑자기 승재한테 화를 낸 거지? 게다가 그렇게 시큰둥한 말을 하다니...’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세뇌당한 것만 같았다. 곽승재가 그녀에게 잘해주고 이혼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니 또 내심 희망을 품기 시작한 것이었다.고은서는 두려웠다.그녀는 곽승재의 꾸지람을 무시하고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쇼핑몰에 안 가고 단팥빵을 파는 가게를 찾아서 빵만 사면 돼.”곽승재는 고은서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마’라면서 화낼 줄 알았다. 그러나 고은서는 화내지 않았을뿐더러 많이 침착해 보였다.곽승재는 당연히 고은서가 생떼를 부리지 않고, 할 말이 있으면 바로 얘기하는 지금의 반응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예전의 그녀는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서 있어 전혀 소통할 수 없었다.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라탔고 곽승재는 손이 가는 대로 약봉지를 콘솔에 올려놓았다.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단팥빵을 파는 노포를 찾아갔다.가게는 장사가 잘되는지 많은 사람이 줄을 서고 있었다.고은서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를 내리려 할 때 곽승재는 그녀가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당신은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내려가서 사 올 게.”이 말을 듣고 고은서는 안전벨트를 풀던 동작을 멈추었다. 곽승재가 차에서 내린 후 고은서는 속이 계속 불편해서 약 봉투를 열어 소화제를 찾아 먹었다.그러고 나서 고은서는 목을 축이려고 차 안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마셨다.그러나 물병을 딸 때 힘을 잘 조절하지 못해 안장과 옷에 물을 많이 쏟았다. 고은서는 얼른 휴지를 뽑아 물기를 닦았고 그러다가 실수로 곽승재가 백유미에게 사준 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처방 약은 위생을 고려하여 모두 작은 투명 봉지에 따로 담겨있었고 약품 명칭과 용량이 표시되어 있었다. 고은서는 약 봉투를 들어 대충 물이 젖지 않은
곽승재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회사 사람들이 다 우리가 금실인 줄 아는데 각방을 쓴다는 게 말이 돼?”‘이혼하기로 약속한 날짜가 일주일밖에 안 남아 나중에라도 사람들이 어떻게든 다 알게 될 텐데.’고은서는 곽승재가 또 자신이 삐진 거로 생각할까 봐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비아냥거렸다.“당신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해줄 여자가 필요한 거라면 그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어. 굳이 나에게서 괴로움을 살 필요 없잖아.”말이 너무 날카로워서인지 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점심때는 네가 발이 미끄러워서 내 품에 안긴 거잖아. 나도 남자고 스님이 아닌 이상 네가 그렇게 적게 입고 나에게 바짝 붙어있는데 어떻게 생리적 반응이 안 일어나겠어?”“...”역시 곽승재다운 대답이었다.점심때는 확실히 고은서가 부주의로 발이 미끄러져서 곽승재의 품속에 안긴 것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와 꼬치꼬치 따지기 귀찮아서, 그가 책상을 차지하도록 내버려 둔 채 화장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으며 또 스프레이로 자신의 어깨에 약을 뿌렸다.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고은서는 팩을 붙이고 또 케어를 조금 했다. 이 모든 것은 앞뒤로 한 시간 정도 걸렸다.고은서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 곽승재는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메일을 보고 있었다.곽승재의 사무가 바쁜 것을 보고 고은서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적어도 다른 쓸데없는 생각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고은서는 바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다시 화장실에 가서 살짝 젖어 있는 머리를 말리려 했다.막 화장실에 들어설 무렵 고은서는 곽승재의 전화벨이 울리는 것을 들었다.전화를 받고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 곽승재의 말투가 갑자기 엄숙해졌다.“어쩌다가 그런 거야? 나 바로 갈게.”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급한 상황인 것 같았다.고은서가 잠시 생각하고 있을 때 곽승재는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곽승재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또 무언가 생각났는지 입술을 오므렸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나도 가야 한다고?’그러나 고은서가 몇 마디 더 묻기도 전에 곽승재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이때 문밖에서 주민기의 의젓한 목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준비 마치고 밑으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저는 먼저 내려가서 차를 찾겠습니다.”곽승재의 일 처리 속도는 워낙 빨랐다. 고은서가 망설이거나 거절한 시간도 없이 주민기는 이미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잠옷을 벗고 아방한 티로 갈아입은 후 작은 가방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오밤중에 무슨 일로 나의 금 같은 수면 시간을 방해하는지 거야.’고은서는 조금 툴툴거리며 차 뒷좌석에 앉았다.가는 길에 주민기는 열심히 차만 몰았다.고은서는 주민기가 자신에게 말 걸 생각이 없는 것을 보고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승재가 실장님에게 뭐라고 했어요? 왜 이제 저랑 말도 안 해요?”주민기는 이실직고할 리 없었다.“사모님, 별일 없었습니다. 대표님은 그저 저보고 맡은 바 일을 잘 처리하고 사모님을 잘 모시라고 했습니다.”주민기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고은서는 더 캐묻지 않았다.약 이십 분이 걸려 주민기는 고은서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사모님, 대표님은 응급실에 계십니다. 응급실까지 안내해 드릴까요?”주민기가 물었다.“괜찮아요. 저 혼자 갈게요.”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이상해서 물었다.“누가 응급실에 실려 간 건데요?”주민기가 대답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모님, 그럼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네.”‘누가 응급실에 실려 갔길래 날 부른 거지? 설마 지연이는 아니겠지?’고은서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그녀는 다급하게 응급실로 올라갔지만, 응급실 밖 복도에서 곽승재를 보지 못했고, 오히려 나이가 쉰 남짓한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남자는 배가 조금 나와 있었고 얼굴에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머릿속으로 되새겨보았지만, 이 남자에 대한 인상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딴생각을 제쳐두고 핸드폰을 꺼내 곽승재
박지연은 고은서의 질문에 놀라고 있었다.‘고은서가 깨어나자마자 민시후에 관해 묻는다고?’박지연은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농담을 하는 대신 진지하게 답했다.“민시후는 검사를 받고 있을 거야. 정확한 상태는 모르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민시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녀는 평생 자책했을 것이다.“얼른 약 먹어. 조금 있다 병실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박지연은 고은서를 침대에 눕히고 약을 먹이며 이전에 계성진이 먹였던 약은 의식이없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강한 수면제였고 이미 열 몇 시간 자고 깨난 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중간에 몇 번 깨긴 했지만 의식은 없었어.”“약에 의존성은 없겠지?”고은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의존성은 없지만 약간의 후유증은 있을 거야. 한동안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박지연이 고은서를 걱정하며 말했다.“그리고 다친 어깨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마른하늘에 닥친 날벼락에 억울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고은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유린당하고 유흥가에 팔려 가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지연아, 우리 지금 어디 있는 거야?”갑자기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T 국 병원이야. 경찰이 사건을 조사 중이라 며칠 동안은 귀국하기 어려울 거야.”아무리 치안이 안 좋은 나라라고 해도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진 이상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웠다.“너는 여기 어떻게 온 거야?”“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에 부랴부랴 달려왔지. 어제 너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돼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비행기에서 내리면 연락하겠다고 해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도 없고 먼저 연락해도 받지 않으니 속이 타들어 갔어. 곽승재한테는 내가 연락한 거야. 너도 연락 안 되고 민시후도 연락이 안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곽승재한테 한 거야. 은서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곽
계성진은 곽승재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너희 나라 사람들 말은 믿을 수 없잖아. 내가 이 여자를 놓아주면 너희는 바로 나를 잡으려고 할 거야. 오늘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이 여자를 방패로 삼아야겠어.”곽승재는 재빨리 답했다.“그럼 나랑 바꿔. 내가 인질이 될게.”계성진은 비웃으며 말했다.“넌 키도 키고 보니까 몸도 좋더라. 이 여자 대신 널 쓸 필요는 없지. 내가 멍청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막지 않겠다. 밖에 있는 차 아무거나 타고 가. 은서를 다치게 하지만 않는다면 놔주겠다.”곽승재가 이내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말을 마친 곽승재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하며 계성진과 그의 동료들이 지나갈 길을 열어주었다.계성진은 고은서를 끌고 천천히 창고 밖까지 나갔다.경찰들이 총을 들고 있었지만 계성진이 인질을 잡고 있어 누구도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목이 꽉 조였던 고은서는 숨쉬기가 힘들었지만 머리에는 여전히 총이 겨눠져 있었다.오늘 하루 너무 많은 공포를 겪은 탓인지 고은서는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그녀는 질식사가 더 괴로운지 아니면 총알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게 더 괴로운지 생각하고 있었다.이내 계성진은 고은서를 데리고 차 앞까지 왔다.“악! 악! 아악!”그때 창고 안에서 백유미의 비명이 들렸다.무언가 끔찍한 일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그녀의 비명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릴 뿐 안쪽 상황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오로지 계성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외곽에 배치되어 있던 사람들은 곽승재가 데려온 사람들에 의해 모두 제압당했다.상황을 눈치챈 계성진의 얼굴에는 살기가 더 짙게 피어올랐다.그는 고은서의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고 그녀의 턱을 쥐고 강제로 삼키게 했다. 그러면서 옆의 동료에게 차 문을 열라고 명하며 고은서를 차에 밀어 넣으려고 했다.“고은서!”그때 앞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바로 고은서가 기다리던 민시후였다.그는 지친 모습으로 뒤에 총을 든 현지 경찰들을 대동하고
거칠게 다가오는 두 남자의 모습에 고은서는 놀라서 옆으로 몇 걸음 피했다.벽 끝에 닿은 그녀에게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고은서는 맞더라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남자들이 경찰봉을 휘두르는 순간 고은서는 눈을 꼭 감고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남은 방어용 스프레이를 그들에게 향해 필사적으로 뿌렸다.“악!”“멈춰!”거의 동시에 두 남자의 비명이 들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곽승재의 목소리였다.비록 경찰봉은 빗나갔지만 여전히 어깨를 맞은 고은서는 고통스럽게 눈을 떴다.문 앞에는 아니나 다를까 곽승재가 서 있었다.정장을 입고 급히 어디서 달려온 듯한 모습을 한 곽승재의 얼굴에는 급박함이 드러났다.그의 곁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몇 명의 근육질 남자들과 몇 명의 현지 경찰들이 함께 있었다.경찰들이 오자 고은서를 공격했던 두 남자는 눈을 가리며 피하기에 바빴고 백유미에게 올라타 있던 남자들도 상황을 눈치채고 일어나 무기를 집어 들며 반격하려고 했다.“은서야!”곽승재는 고은서가 다친 걸 보고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그때 백유미는 누구의 옷가지에서 칼을 빼낸 건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자기 가슴을 향해 찌르려고 했다.“멈춰!”곽승재의 머릿속에 갑자기 익숙한 장면들이 스치며 강한 불안과 혼란이 밀려왔다.그는 몇 걸음 달려가 칼을 걷어찼다.팅하는 소리와 함께 백유미의 손목에서 힘이 빠지며 칼이 떨어졌다.백유미가 처량하게 울부짖으며 외쳤다.“왜 막았어! 왜! 죽게 놔두지 왜 막은 거야! 승재야...”백유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몸은 온통 멍 자국과 붉은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흩어진 채 몸은 사정없이 떨고 있었다.곽승재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백유미가 자살하려 한 순간 곽승재는 강한 공포감을 느꼈다.마치 이전에 누군가가 그 앞에서 자살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지금 이 상황을 막지 않으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
비록 고은서가 한 말을 이해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경계심과 불신으로 가득 차 그녀를 향해 경찰봉을 휘두르며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고은서도 이를 잘 이해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자신에게 돈이 있으니 그들에게 두 배의 돈을 줄 수 있다고 했다.“네가 돈이 있다고 하면 있는 거야?”그때 기름지게 다듬은 머리를 한 중년의 남자가 주차장에서 걸어왔다.경찰봉을 쥔 두 남자는 즉시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보스라고 불렀다.기름진 머리를 한 남자는 고은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국어로 말했다.“너희처럼 예쁜 여자의 말은 믿을 수 없어.”그는 날카로운 눈을 한 채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장 몇천억 내놓을 수 있으면 믿을지도 모르지.”남자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불렀다.그만한 금액은 당연히 내놓을 수 없었다.카드가 있다고 해도 유동 자금이 부족해 그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웁!”백유미도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구조 신호를 보냈다.기름진 머리를 한 계성진은 잠시 안을 훔쳐보고 다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역시 예쁜 여자일수록 수단이 범상치 않아. 이렇게 쉽게 남자들을 자기편으로 돌리잖아. 그냥 사람 하나 데려가는 간단한 일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고은서가 눈썹을 찡그렸다.‘백유미가 원지훈에게 30분을 준다고 한 게 이 남자 때문인가? 이 남자를 통해 나를 유흥가로 팔려고 한 건가?’“당신 목적도 결국 돈이죠? 몇천억은 줄 수 없지만 100억 정도는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보내드릴 수 있어요. 사람을 원하신다면 저 안에 있는 여자도 그냥 덤으로 드릴게요.”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하하하.”고은서의 말에 계성진은 큰 웃음을 터뜨렸다.“예쁜 아가씨, 내가 너를 데려가면 모든 남자가 당신한테 푹 빠질 거야.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놓치겠어? 돈도 사람도 다 가질 거야. 국내에서 유명한 곽씨 가문 대표 전 부인인데 그 타이틀이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겠어?”고은서
옆에서 손을 거들던 장정들도 그 모습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 백유미를 희롱하는 행렬에 끼어들었다.이내 백유미의 입에 물려있던 수건이 떨어졌지만 그녀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다른 것으로 입이 가득 차 버렸다.남자들의 음탕한 신음과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순식간에 창고를 채웠다.모든 일든 불과 일이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고은서는 구석에 숨어서 원지훈이 차버린 쇠막대기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떨리는 심장은 평온을 되찾을 수 없었다.몇 명의 남자들이 각 방향에서 백유미를 희롱하고 있었다.고은서는 모든 장면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내가 원지훈을 회유하지 않았더라면 저기에 누워있는 건 나였겠지.’백유미는 동정받을 처지가 아니었다.고은서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비록 돈으로 매수했다고는 하나 약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시선을 그녀에게 돌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또한 밖에 백유미가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뭔가 이상함이라도 눈치채고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고은서는 자신의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고은서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백유미의 핸드폰을 켜려고 했지만 땅에 부딪히며 떨어질 때 전원이 나가버렸다.그녀는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겨우 핸드폰을 켤 수 있었지만 비밀번호에 막혀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백유미의 생일, 곽승재의 생일을 입력했지만 비밀번호는 맞지 않았다.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남자들이었기에 고은서는 소리를 내어 그들의 시선을 끌 수조차 없었고 백유미에게 비밀번호를 물을 수조차 없었다.고은서는 긴급버튼을 눌렀지만 백유미는 긴급 연락망을 따로 작성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의 비상 번호는 해외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어떡하지?’고은서가 원지훈을 불러 도박하려고 할 때 백유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핸드폰에는 알파벳 C만 떠 있을 뿐이었다.잠시 생각한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핸드폰을 움켜쥐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
“끈은 혼자서 칼로 푼 것 같아요. 제가 얼른 다시 묶을게요! 이번에는 절대 풀 수 없을 거예요.”말을 마친 원지훈이 밧줄을 챙겨 고은서에게 다가가려 했다.“됐어!”백유미가 원지훈을 제지했다.“누나, 왜 그래요?”백유미는 쇠막대기를 거두며 얼굴에 음험한 미소를 떠올렸다.“챙겨온 술은 다 마셨어?”원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고마워요. 누나.”“뭔가 치밀어 오르는 충동이거나 특별한 감각은 없고?”백유미가 물었다.그 말을 들은 원지훈은 바로 백유미가 술에 최음제를 탔음을 눈치챘고 달아오르는 몸을 느꼈다.“안 그래도 조금 덥네요.”“그렇다면 뭘 기다리고 있어? 저기 해소할 만한 사람 하나 있잖아?”원지훈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누나, 후에 데려온 두 사람 먼저 들여보낼까요? 하지만 두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은 것 같던데요.”“그 사람들은 놔두고 먼저 온 사람들만 들여보내.”백유미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30분 줄게. 죽이지만 않으면 되니까 원하는 대로 해.”원지훈은 고은서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불렀다.백유미는 원망과 경멸 섞인 시선으로 칼을 손에 쥔 채 구석에서 떨고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밖에 있는 남자들은 네가 유흥가로 가기 전에 적응하는 단계라고 생각해.”고은서가 경악하며 물었다.“백유미,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아니면?”백유미의 얼굴에 서린 경멸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고은서, 어차피 곽승재랑도 많이 잤잖아. 유산까지 해본 사람이면 닳을 대로 닳은 여자잖아. 여기까지 와서 왜 성녀라도 되는 것처럼 하고 있어? 있는 대로 즐겨.”그때 밖에서 남자들이 걸어들어왔다.그들의 벨트는 이미 풀려있었고 흉한 뱃살과 속옷도 내놓고 있었다.원지훈은 밖에 있던 두 사람과 말을 나눈 후 이내 창고 문을 닫았다.“그래, 이참에 너도 잘 즐겨야지.”고은서는 작은 틈을 이용해 침대 위에 있던 낡은 수건을 재빨리 백유미의 입에 쑤셔넣었다.
백유미가 입을 열었다.“고은서, 여기서는 사람을 가축처럼 팔아버릴 수도 있다는 걸 몰랐어?”백유미는 마치 애완동물을 파는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말했다.“운이 좋으면 유흥가로 팔려 가겠지. 네 몸매와 얼굴로 부잣집 딸이라는 자존심만 내려놓으면 손님을 받기는 쉬울 거야. 운이 나쁘면 손발이 잘리고 신장이나 간이 적출되어 거지가 되거나 장난감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지. 결과는 네 운명에 달렸어.”백유미의 부드러운 말투는 고은서에게 오히려 독을 품은 뱀이 주는 온기로 느껴졌다.그녀는 가식적인 백유미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며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미쳤어? 내가 무슨 일을 당하면 너라고 무사할 줄 알아?”백유미는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쇠막대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그것을 한 단씩 늘려 고정한 뒤 고은서의 가느다란 목에 겨눴다.“고은서, 곽승재를 언급했지? 그 사람이 널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차가운 쇠막대가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몸을 움찔했다.백유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곽승재가 소식을 들을 때쯤이면 넌 이미 팔려 가고 난 후일 거야. 설령 널 찾더라도 너는 이미 망가진 상태일 텐데 그 남자가 여전히 널 원하겠어?”고은서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곽승재가 날 원하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이런 짓을 한 걸 알게 되면 분명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내가 뭘 했는데?”백유미는 마치 작은 강아지를 놀리듯 쇠막대로 고은서의 목을 쿡 찌르며 물었다.“나는 T 국에 사업차 온 거야. 증인도 있고 증거도 있어. 네가 무슨 일을 당했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고은서는 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쇠막대기를 뿌리치고 백유미를 제압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백유미가 새로 데려온 두 사람이 바로 문밖에 있었고 그들은 무기도 소지한 듯해 보였다.혹시라도 백유미를 단번에 제압하지 못한다면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다행히 백유미는 아직 고은서가 반격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뜨리지는 않았다.고은서는 고통
원지훈도 백유미를 증오하고 있었기에 고은서의 제안을 듣자마자 바로 동의했다.“알았어. 그때는 내가 제일 먼저 나설게.”‘역시 원지훈은 믿지 못할 놈이야. 백유미가 먼 친척 누나라는 자각은 있나? 이런 생각을 품는다는 게 놀랍네. 아니지. 지금은 이럴 생각할 시간이 없어.’고은서는 속에서 올라오는 혐오감을 참으며 말했다.“시간 없어. 얼른 내 가방에 들어있는 호신용 무기 가져와 줘.”백유미가 다른 사람을 더 데리고 올지, 앞으로 어떤 계획으로 움직일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래서 밖에 있는 몇몇 사람들을 매수했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원지훈도 곧 도착할 백유미를 두려워하며 고은서의 손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고 그녀에게 호신용 도구를 건넸다.밖으로 나가기 전 원지훈은 고은서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너도 알아서 살아남아. 상황이 안 좋으면 약속했던 건 나도 못 지켜.”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고은서도 단지 원지훈을 이용해 백유미의 시간을 더 끌어보려 했을 뿐이었다.그렇게 하면 민시후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해 사람을 데리고 그녀를 구하러 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니 말이다.돈으로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했던가, 돈의 힘으로 원지훈은 손쉽게 밖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매수했다.바로 그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백유미가 도착했나 보네.’손에 묶인 밧줄은 느슨하게 풀어졌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손발이 묶인 척하며 침대 한구석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누나, 드디어 오셨네요! 고은서도 이제 깨어났어요. 방금 들어가서 살짝 경고 줬는데 정말 입에 독침이라도 품었는지 험한 말을 서슴지 않더라고요.”원지훈은 아첨하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누나 기분 상하게 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제가 대신 혼내줄게요!”“수고했어. 차에 먹을 것과 마실 것 준비해 놓았으니 가서 가져와. 조금 있다 너희 도움이 필요할 거야.”“고마워요, 누나.”곧 창고 문이 열리고 백유미가 하이힐을 신은 채
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핵심을 찔렀다는 것을 눈치챈 고은서는 계속 차분한 말로 설득했다.“같이 해외로 나왔으니 같은 사건에 휘말렸다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겠어? 우리 둘을 같이 제거하면 백유미는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여전히 평온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을 거야. 백유미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백씨 가문 산업이 있지만 너는 애꿎은 목숨 하나 날리는 거지.”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정말 백 보 물러나서 백유미가 너를 살려준다고 해도 너는 평생 숨어지내야 할 텐데 어머니는 어떻게 할 거야? 너도 그런 생활에 만족할 수 있겠어?”원지훈은 사색에 잠겼다.전에 내비치던 우월감과 경멸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여유로운 척하며 말했다.“백유미가 곧 도착할 거야. 그러니 얼른 결정을 내려야 해.”마침내 고개를 든 원지훈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백유미 말을 따르지 않고도 살아남을 길이 있다고? 내가 너를 이런 곳에 데려왔는데 네가 날 용서해 줄 리가 있겠어?”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네가 나를 배신한 건 정말 화가 나. 앞으로도 널 신뢰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했다는 건 이해해. 그리고 나는 뻔뻔하게 널 괴롭힐 생각은 없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큰돈을 줄게. 그 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 비록 영광스러운 귀향은 아니겠지만 풍족하고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테니 지금 상황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고은서는 이어 원지훈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고향은 너에게 익숙한 곳이고 백씨 가문과는 어쨌든 친척 관계잖아.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백유미도 굳이 너희를 어떻게 하진 않을 거야.”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마음은 기울기 시작했다.백유미의 잔혹함으로 보건대 고은서가 말한 일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이번에 백유미를 배신한다면 죽을 길밖에 없겠지만 배신하지 않아도 좋은 날을 없을 거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