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힘들게 줄 서서 가져온 걸 왜 걔가 공짜로 먹어야 해!”박지연이 말하며 그쪽으로 가서 음식을 가져오려 했다.그러자 고은서가 그녀를 막았다.“그만해, 그런 유치한 짓 하지 마.”“뭐가 유치해? 당연한 거 아니야? 배고프면 스스로 가지러 가던지, 다른 사람이 가져다준 걸 저렇게 앉아서 편하게 먹고 있는 게 말이 돼?”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앉아서 편하게 먹다’라는 표현이 백유미에게 정말 딱 맞았다. 지난 생에서 백유미는 그녀와 직접 싸운 적이 없었지만 곽승재와의 감정만으로 그녀를 쉽게 밀어내고 예비 곽 씨 사모님이 되었으니, 정말 앉아서 편하게 먹은 셈이다.“지연 씨, 방금 것들이 더 먹고 싶으세요? 제가 가져다줄게요!” 육현석이 자진해서 말했다.박지연은 저쪽 테이블의 음식을 뺏으려던 행동을 포기했다.“고마워요, 그럼 부탁할게요.”“별말씀을요. 어차피 별로 힘들지 않았으니.”육현석이 자리를 떠난 후 박지연이 말했다.“은서야, 그래서 네가 전에 백유미를 그렇게 싫어했던 거구나. 정말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인물이야.”“넌 이게 첫 만남 아냐? 벌써 이렇게 싫어해도 돼?”고은서가 웃으며 묻자 박지연이 대답했다. “제일 짜증 나는 건, 걔가 분명히 여우짓을 하고 있는데 남자들은 그녀가 억울한 처지에서도 여전히 착한 줄로 알잖아.”고은서는 그 말에 두 손 들고 찬성했다. 백유미는 항상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모두에게 점잖고 온화한 모습만 보이도록 한다.“너 오늘 웬일이야? 백유미가 승재 씨와 함께 앉아 있는 걸 보고도 무감각하게 넘어가고, 내가 가서 시비 걸려는 것도 하지 말라고 하고.”박지연이 농담하며 말했다.“예전이라면 백유미와 승재 씨가 함께 밥 먹는 것만 보고도 테이블을 뒤엎었겠지?”고은서는 생각했다. 아니, 밥을 먹기도 전, 백유미가 나타나자마자 그녀는 이미 참지 못하고 사람을 내쫓았을 것이다.“됐어, 이 말 그만하자. 그녀가 어떻게 하든 나와는 상관없어. 어제 온 닥터가
육현석은 곽승재의 상황을 설명하고는 또 말했다.“형수님, 지연 씨, 저도 아버지랑 밥 먹기로 해서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 나중에 시간이 될 때 다시 모여요.”“그래요.”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 뒤로 고은서와 박지연은 여러 가지 특색이 있는 온천탕을 체험하고 예쁜 사진도 많이 찍으면서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냈다.저녁 시간 때 박지연은 밖에 나가 온 닥터와 통화하고 있었기에 고은서는 먼저 레스토랑에 갔다.저녁 식사의 장소는 산장에 있는 호화로운 레스토랑이었다.비록 이 레스토랑도 뷔페 형식이지만 음식은 온천 구역의 스낵과 바비큐보다 훨씬 좋았고 회, 성게, 호주 랍스터 등이 있었다.종일 물놀이 하느라 배가 많이 고팠던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보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일부 젊은 친구들은 수저를 사용하는 게 귀찮아서 맨손으로 랍스터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그들의 털털함과 맘껏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배가 고파졌다.전생에 정신병원에서 많은 굶주림을 당해서인지, 이번 생에 고은서는 음식에 대한 애착이 훨씬 강해졌다.집에 있을 때 고은서는 혼자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설사 곽승재가 집에 있다고 해도 너무 우아하게 밥을 먹어서 고은서는 그가 밥을 먹는 게 아니라 광고를 찍는 것처럼 느꼈고 전혀 입맛을 돋우지 못했다.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이 팔을 걷어 올리고 마음껏 먹는 모습을 보니 고은서도 식욕이 폭증했다.고은서는 이것저것 많이 챙겨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렇게 급하게 먹어?”고은서가 흐뭇하게 먹고 있을 때 곽승재가 갑자기 나타났다.그는 이미 자주 입는 셔츠로 갈아입었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가슴팍의 두세 개 단추를 풀어놓아 건장한 가슴을 드러냈다.“왜 넋이 나갔어? 일단 입에 있는 것부터 삼키고 봐.”곽승재는 두 볼이 빵빵한 고은서가 햄스터 같아 보였고 그녀의 이마 끝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저도 모르게 생겨났다.고은서는 경계하듯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고은서와 마주쳤다.“그때 당시 상황이 그 물음을 대답하기 적합한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해?”고은서는 아무 이유 없이 과일로 백유미를 내리쳤고, 또 백유미의 목을 졸라 죽일 기세였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미친 행동에 충격을 받아 그녀의 생트집 잡는 질문을 상대할 여지가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그윽한 눈동자가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말했다.“당신이 백유미 씨와 결혼하든 말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은서야...”“지연아, 이쪽!”곽승재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고은서는 그의 말을 끊고 입구에 나타난 박지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박지연은 두 사람 앞에 걸어와서 말했다.“승재 씨, 일 다 보셨어요?”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둘이 얘기 나누세요. 저는 저쪽에 다녀올게요.”“무슨 일 있었어? 너와 승재 씨의 분위기가 이상해 보이는데?”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조금 전에 곽승재가 자신한테 했던 말들을 숨기지 않고 박지연에게 말해주었다.“승재 씨는 네가 삐졌을까 봐 백유미 씨를 내쫓지 않는 이유를 특별히 설명한 거네.”박지연이 말했다.“내가 승재 씨가 너에게 감정이 있고, 너와 이혼하기 싫어한다고 계속 말했잖아. 이제는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눈총을 쏘아붙이며 말했다.“난 그게 나한테 감정이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어. 설사 그 사람이 나에게 감정이 있다고 해도 난 이혼할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박지연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은서야, 네가 승재 씨를 그렇게 오래 사랑했는데, 이제 겨우 희망이 보이는데, 왜 인제 와서 물러서는 거야? 얼마나 많은 여자가 승재 씨 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데, 너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고은서는 확고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후회하지 않을 거야.”전생에 고은서는 곽승재에게만 너무 집착하여 많은 아쉬움을 남겼었다.그녀는 외할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고, MQ를 지키지 못했고,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했으며, 인
고은서는 박지연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니 진짜 곽승재의 모습을 보았다.캐주얼 셔츠를 입은 곽승재는 키가 훤칠하고 카리스마가 돋보였으며, 시크하고 우아한 온 닥터와 함께 서 있으니, 마치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처럼 멋있고 눈이 부셨다.“우리 남편 아주 멋있네.”박지연이 감탄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툭 치며 말했다.“군침 좀 닦아.”“됐거든. 너도 승재 씨를 바라보는 눈빛이 만만치 않거든.”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눈총을 쏘았다.앞에 있던 두 남자는 그녀들의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여보, 승재 씨랑 아는 사이였어?”박지연은 온 닥터의 옆으로 걸어가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온 닥터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안면이 있는 사이야.”온 닥터는 업계에서 평판이 매우 높아서, 많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그와 친분을 맺으려고 했다.게다가 온 닥터는 병원의 우수대표로 정부의 공식 시상식에 자주 참석하였기에 우수한 사업가 곽승재와 안면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박지연은 고은서를 소개했다.“당신도 만난 적이 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소개할게. 이쪽은 나의 친구 고은서야. 승재 씨의 아내이기도 해.”온 닥터는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고, 고은서는 미소로 답했다.온 닥터는 확실히 박지연이 말한 것처럼, 성격이 냉담하고 모든 사람에게 달갑지 않았다. 평소에 활발하고 장난기 많은 박지연이 온 닥터를 어떻게 견디는지 모를 일이었다.“온 닥터가 간만에 시간이 생긴 건데, 저희는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게요.”곽승재는 자연스럽게 고은서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고은서도 짝을 맞춰 움직이지 않았다.온닥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저희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박지연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말했다.“승재 씨가 은서와 함께 소화할 겸 산책 좀 해주세요. 은서가 아까 배 터지게 먹어서 지금 속이 불편할 거예요.”사람들 앞에서 배 터지게 먹었다는 말을 들은 고은서는 다소 민망함을 느꼈고 박지연을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곽승재는 고은서의 찡그린 미간을 보고 바로 이유를 알아차리고는 주민기에게 전화를 걸었다.“주변에 약국이 있는지 알아보고 사람을 시켜서 위약과 소화제를 좀 사 오세요.”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전생에 그녀는 다이어트를 너무 심하게 해서 가끔 위병을 앓곤 했다. 그날은 곽승재가 집에 있는 저녁이었다. 고은서가 곽승재에게 우유를 가져다줄 때 위가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우유도 하마터면 쏟을 뻔했지만, 곽승재는 그녀의 상태를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고 심지어 냉정한 얼굴로 나가라고 했었다.그러나 방금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곽승재는 이미 자신이 불편해하는 것을 눈치챘고 알아서 사람을 시켜 약을 사 오라 했다.역시 남자는 세심함을 배우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기에 세심하지 못한 것을 핑계로 삼는 것뿐이었다.고은서도 곽승재의 변화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그는 확실히 전생보다 고은서를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이혼에 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거지만, 곽승재를 집요하게 미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어쨌든 이번 생에 곽승재는 백유미가 자신을 함부로 상대하게 놔두지 않았고, 자기 일에 무관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왜 말이 없어? 위가 많이 불편해? 병원 갈까?”곽승재는 고은서의 곁에 다가가서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니야.”말을 마치고 고은서는 호텔에서 걸어 나오는 주민기를 보았다. 주민기는 외투를 걸치고 손에 차 키를 들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은서를 위해 약 사러 가는 길인 것 같았다.“실장님.”고은서는 주민기를 불러 세웠다.주민기는 고은서를 보고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어제 아침, 주민기가 곽승재에게 일을 보고할 때, 곽승재는 갑자기 그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듯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이에 놀란 주민기는 자신이 GS 그룹에 입사해서부터의 모든 일을 돌이켜보았지만, 여전히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갈
주민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재빨리 차 키를 곽승재의 손에 밀어 넣고 부리나케 도망갔다.고은서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곽승재에게 물었다.“당신 도대체 실장님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실장님이 날 보기만 하면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도망가?”‘평소에 늘 승재의 주변을 따라다니던 민기 씨가 오늘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것 같았어.’이 말을 듣자 곽승재는 기분이 잡쳐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실장님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 약 사겠다며? 가자.”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곽승재가 그 영문을 모른다는 말은 귀신도 안 믿을 소리였다.두 사람은 차를 향했다.고은서가 차에 올라타서 안전 벨트를 매자마자 안색이 창백한 백유미가 같은 주차장에 있는 것을 보았고 백유미도 두 사람을 보았다.“승재야, 은서 씨.”백유미는 머리를 짚고 허약한 목소리로 인사했다.“유미야, 너 어디 가려고?”곽승재가 묻자 백유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마의 상처가 염증 나서 많이 아파. 근데 약을 챙겨오는 걸 깜빡해서 일단 약을 좀 사 오려고 해.”곽승재가 말했다.“마침 우리도 나가려던 참이었어. 필요한 약이 있으면 나에게 보내줘. 내가 같이 사 올게.”백유미는 아픔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게. 나 혼자서도 약 살 수 있어.”백유미가 아픔을 끙끙 참는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유미 씨의 상황이 아주 심각한 것 같은데 승재 씨가 직접 병원에 데려다줘. 난 혼자 택시 잡으면 돼.”이렇게 말하면서 고은서는 안전벨트를 풀었다.곽승재는 손을 내밀어 고은서를 붙잡으며 말했다.“기다려 봐.”백유미도 얼른 사과했다.“은서 씨, 화내지 말아요. 저는...”“불쌍한 척 그만 좀 해요!”고은서는 백유미를 향해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정말 저를 괴롭히고 싶은 게 아니었다면, 왜 우리가 가는 곳마다 마침 유미 씨가 있는 거죠?”백유미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가볍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마디 하고는 재빨리 자기 차에 가서 차
“길 안 보고 다닐래?”곽승재가 화를 내며 말했다.방금 하마터면 차에 치일 뻔한 고은서는 깜짝 놀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나 왜 이래? 왜 갑자기 승재한테 화를 낸 거지? 게다가 그렇게 시큰둥한 말을 하다니...’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세뇌당한 것만 같았다. 곽승재가 그녀에게 잘해주고 이혼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니 또 내심 희망을 품기 시작한 것이었다.고은서는 두려웠다.그녀는 곽승재의 꾸지람을 무시하고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쇼핑몰에 안 가고 단팥빵을 파는 가게를 찾아서 빵만 사면 돼.”곽승재는 고은서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마’라면서 화낼 줄 알았다. 그러나 고은서는 화내지 않았을뿐더러 많이 침착해 보였다.곽승재는 당연히 고은서가 생떼를 부리지 않고, 할 말이 있으면 바로 얘기하는 지금의 반응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예전의 그녀는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서 있어 전혀 소통할 수 없었다.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라탔고 곽승재는 손이 가는 대로 약봉지를 콘솔에 올려놓았다.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단팥빵을 파는 노포를 찾아갔다.가게는 장사가 잘되는지 많은 사람이 줄을 서고 있었다.고은서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를 내리려 할 때 곽승재는 그녀가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당신은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내려가서 사 올 게.”이 말을 듣고 고은서는 안전벨트를 풀던 동작을 멈추었다. 곽승재가 차에서 내린 후 고은서는 속이 계속 불편해서 약 봉투를 열어 소화제를 찾아 먹었다.그러고 나서 고은서는 목을 축이려고 차 안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마셨다.그러나 물병을 딸 때 힘을 잘 조절하지 못해 안장과 옷에 물을 많이 쏟았다. 고은서는 얼른 휴지를 뽑아 물기를 닦았고 그러다가 실수로 곽승재가 백유미에게 사준 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처방 약은 위생을 고려하여 모두 작은 투명 봉지에 따로 담겨있었고 약품 명칭과 용량이 표시되어 있었다. 고은서는 약 봉투를 들어 대충 물이 젖지 않은
곽승재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회사 사람들이 다 우리가 금실인 줄 아는데 각방을 쓴다는 게 말이 돼?”‘이혼하기로 약속한 날짜가 일주일밖에 안 남아 나중에라도 사람들이 어떻게든 다 알게 될 텐데.’고은서는 곽승재가 또 자신이 삐진 거로 생각할까 봐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비아냥거렸다.“당신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해줄 여자가 필요한 거라면 그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어. 굳이 나에게서 괴로움을 살 필요 없잖아.”말이 너무 날카로워서인지 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점심때는 네가 발이 미끄러워서 내 품에 안긴 거잖아. 나도 남자고 스님이 아닌 이상 네가 그렇게 적게 입고 나에게 바짝 붙어있는데 어떻게 생리적 반응이 안 일어나겠어?”“...”역시 곽승재다운 대답이었다.점심때는 확실히 고은서가 부주의로 발이 미끄러져서 곽승재의 품속에 안긴 것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와 꼬치꼬치 따지기 귀찮아서, 그가 책상을 차지하도록 내버려 둔 채 화장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으며 또 스프레이로 자신의 어깨에 약을 뿌렸다.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고은서는 팩을 붙이고 또 케어를 조금 했다. 이 모든 것은 앞뒤로 한 시간 정도 걸렸다.고은서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 곽승재는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메일을 보고 있었다.곽승재의 사무가 바쁜 것을 보고 고은서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적어도 다른 쓸데없는 생각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고은서는 바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다시 화장실에 가서 살짝 젖어 있는 머리를 말리려 했다.막 화장실에 들어설 무렵 고은서는 곽승재의 전화벨이 울리는 것을 들었다.전화를 받고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 곽승재의 말투가 갑자기 엄숙해졌다.“어쩌다가 그런 거야? 나 바로 갈게.”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급한 상황인 것 같았다.고은서가 잠시 생각하고 있을 때 곽승재는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곽승재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또 무언가 생각났는지 입술을 오므렸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
민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또 우리 형 들먹이네? 곽승재, 너도 이 수밖에 안 되냐? 설마 나만 쫓아내면 은서 씨가 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민시후의 말은 곽승재의 정곡을 찔렀고 그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곽승재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숨은 쉴 수 있었지만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마침 손을 씻고 다가온 고은서는 싸늘한 분위기를 보고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저 곽승재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서 안 먹을 거면 아주머니한테 국만 싸달라고 해서 가져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으며 대답했다.“먹고 갈 거야.”고은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미숙은 주방에서 빠져나왔고 남은 세 사람은 어색하지 않지만 편안하지도 않은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식사 후, 피곤한 모습의 고은서를 본 민시후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나가기 전에 곽승재까지 데리고 떠났다.다음 날 오전, 고은서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어젯밤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던 두 노숙자의 혈액 검사 결과, 불법 약물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그 약물은 뇌를 자극해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고은서를 덮치려 한 것이었다.문제는 그 약물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였다. 조사 결과, 노숙자들이 먹은 음식과 술에서 검출되었고 누군가 일부러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고은서가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회의실에는 송민아가 있었고 접견실 소파에는 송민준이 앉아 있었다.그날 개업식 이후, 고은서는 송민준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개업식에서 송민준의 정장을 엉망으로 만든 일이 마음에 걸린 고은서는 송민아에게 그가 입고 있던 정장이 얼마였는지 물어봤었다. 그러나 송민아는 단칼에 보상을 거절했다.“겨우 정장 한 벌일 뿐인데 무슨 보상이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오빠도
“나 마침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려던 참이야.”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는 낮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가 국을 끓였다고 하더라. 나한테 와서 가져가라고 했어.”원래 기분이 좋지 않던 민시후는 곽승재가 고은서네 가정부를 핑계 삼아 온 것을 보고 더 답답해졌다.“그래도 곽 대표가 데려다줄 필요는 없어!”그리고 이어 고은서를 향해 투정 부렸다.“나도 배고픈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도 뜨끈한 국 한 그릇 먹어도 될까?”민시후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고은서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그렇게 해.”그리하여 곽승재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고은서는 민시후의 차에 올랐다.민시후의 차가 점점 멀어져갔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주민기는 밤바람 속에서 쓸쓸해 보이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안쓰러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애써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함께 있는 걸 목격하고 말았으니...’곽승재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하아... 대표님의 아내 되찾기 여정은 끝도 없이 험난하구나.’주민기가 속으로 한탄하던 중, 갑자기 곽승재의 시선이 그를 스쳤다.주민기는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대표님, 그래도 가시겠습니까?”곽승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고가 났던 골목에 CCTV 설치해요. 그리고 사모님한테는 실력 좋은 운전사를 붙이도록 하세요.”“네, 대표님.”주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는 그 길로 차를 몰아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차를 세우고 막 올라가려는데 저쪽에서 막 도착한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직접 운전해서 온 듯했고, 비서는 곁에 없었다.민시후는 그가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고은서는 곽승재를 기다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두 사람은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다.집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같이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랐다.“사모님, 곽 대표님도 오신다고 하셨는데 같이 안 오셨나요?”
고은서는 일부러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후 씨,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재벌가 아들이라는 신분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야?”“시후 씨가 가족 앞에서 나에 대한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 아버님과 형도 그냥 이성 친구라 생각하고 괴롭히지 않을 거야.”민시후는 그녀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포기하기를 원하는 거야?”고은서는 다소 수척해진 민시후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사실 시후 씨도 잘 알잖아. 1년이 지나도 가족분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민씨 가문에선 나와 곽 씨 집안의 혼인 관계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만약 고은서가 예전에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민씨 가문에서도 그걸 덮을 수 있었겠지만 곽승재의 전처라는 신분은 그들에게 너무 민감하고 큰 문제였다.민씨 가문 같은 재벌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면이기에 그녀가 며느리가 되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예전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은서 씨, 아직도 내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거야?”민시후의 눈에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아니, 시후 씨 마음을 알아. 문제는 나야.”고은서가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내가 정말 시후 씨를 사랑했다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함께할 수 있었을 거야. 시후 씨 가족의 태도나 외부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그만큼 시후 씨에 대한 감정이 부족해. 그래서 시후 씨 가족분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다른 외부적인 이유도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 그래서 나는...”민시후가 갑자기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급하게 말했다.“그러지 마, 나에게 기회를 준다고 약속했잖아.”고은서는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살며시 민시후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사실이라는걸 시후 씨도 알 거야. 그러니 그런 고집은 의미가 없어.”민시후는 여전히 고은서를 끌어안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