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윤엽은 기어이 저녁 밥을 먹고 가라면 심유진과 별이를 붙잡았다.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담소도 좀 나누다가 두 사람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그만 가려고 했다.차에 오르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뒷좌석에 앉아 있는 별이에게 졸음이 밀려왔다. 배불리 먹고 신나게 놀아서 인지 피곤했던 별이는 끝끝내 버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푹 잤다.집에 도착한 심유진은 아래 층에서 허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별이 잠 들었어요. 안고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그러자 허태준은 두말하지 않고 바로 내려와 별이를 들어 안고 집으로 향했다.인제 제법 무거운 별이임에도 그는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체력적으로 남녀 사이에 꽤 차이가 난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고 나니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게 했다.“외할아버지 집에 있는 동안 우리 별이 엄청 잘 먹었어요. 살도 제법 찐 것 같고. 한 번 들어 안고 나면 아주 진이 다 빠질 정도예요. 태준 씨 아니었으면 저 혼자서 안고 올라가지 못했을 거예요.”떡 벌어진 어깨와 넓은 품속으로 쏙 안긴 별이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인다.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심유진의 칭찬에 허태준은 입가에 미소가 일었다.“앞으로 힘쓸 일은 나한테 맡겨요.”“그렇게 할게요.”심유진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심유진은 말머리를 돌리며 물었다.“은설이는 자요?”“잘 모르겠는데요. 저녁 먹고 자기 방으로 돌아간 뒤로 나오지 않았어요.”“컨디션은 어때 보였어요? 괜찮아 보이던가요?”“적어도 어제 보다는 좋아 보이던데.”“도우미는요? 왔었나요? 사람이 어때 보였어요?”“왔었어요. 사람이 어떠한지는 은설 씨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랑은 별다른 소통하지 않았거든요.”“네.”연달아 질문을 날리던 심유진은 답을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순간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해졌고 허태준은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한참을 기다렸으나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더 이
엄마인 심유진을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기뻐하며 흥분하는 듯했다.기분 탓일까? 심유진은 질투가 난 듯 이간질을 하려고 했다.“별아, 그렇게 좋아? 근데 엄마가 알기로는 조금 전 외할아버지 댁에서는 외할아버지가 세상 제일 좋다며 한 것 같은데. 아빠보다는 외할아버지가 더 좋다고 별이가 그러지 않았어?”하지만 그녀의 의도와 달리 별이도 허태준도 낚지 않았다.별이는 아주 당당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외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어른이잖아요. 별이는 손자로서 당연히 기쁘게 해드릴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조리 정연하게 말하는 별이의 모습에 허태준은 절로 흐뭇했다.사랑이 듬뿍 담긴 손길로 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우리 별이 말이 맞아. 아주 잘했어.”허태준의 칭찬까지 등에 업은 별이는 점점 어깨가 으쓱거렸다.지금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심유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그럼, 엄마가 좋아 아니면 아빠가 좋아?”“엄마요.”별이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 고민 일도 없이 바로.“엄마, 이 질문만 벌써 몇 번째인지 아세요?”같은 질문을 여러 번이나 하고 있는 심유진이 언짢아 별이는 숨김없이 자기의 정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음…”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심유진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 번도 아니고 이미 여러 번 물어본 듯 기억이 새물새물 떠올랐다.아들한테 이런 소리를 들으니 다소 체면이 깎이는 듯했다.“내가 한 번을 하든 두 번을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엄마는 앞으로 별이한테 계속 물어볼 거야. 우리 아들 귀가 닳도록 물어볼 거라고.”심유진은 별이의 귀를 살포시 잡아당기며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였다.이에 별이는 입만 삐죽거리며 허태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참, 여자들이란… 우리 아빠 힘들겠어요.”그러자 허태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덩달아 속삭였다.“그러니 앞으로 엄마 말씀 잘 들어. 아빠 좀 덜 힘들게.”“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별이 아니야?”이때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뜨
하은설은 그렇게 한참 동안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자기한테 잘해 주지 말라며.심유진과 별이는 번갈아 가며 하은설을 얼리고 닥쳤고 그들이 노력한 끝에 하은설은 마침내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별이는 심지어 오늘 하은설과 함께 자겠다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은설에 대한 자기감정은 변함이 없음을 확신해 주었다.좋은 마음으로 한 말인데, 하마터면 하은설은 그런 별이의 마음에 감동되어 또다시 눈물을 쏟을 뻔했다.정신을 쏙 빼놓는 듯한 시간을 뒤로 하고 심유진은 마침내 두 사람을 방으로 돌려보냈다.기진맥진한 몸을 이끈 채 그녀도 자기 침실로 돌아왔다.허태준은 고생한 심유진을 위해 마사지를 자처하며 꼼꼼히 주물러 주었다.“다들 자요?”“네. 내일 아침에 별이 등교는 제가 할 테니 태준 씨는 은설이 데리고 병원에 가주세요.”“갑자기요?”허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거예요?”“그건 아니고.”피곤함이 잔뜩 묻어 있는 심유진은 어쩔 수 없어 했다.“허택양 씨가 지내고 있는 그 병원으로 데리고 가주세요. 은설이가 만나서 얘기 똑바로 하고 끝낼 모양이에요.”“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말려야 해요.”허태준은 이 일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다.허택양 같은 인간과 더 이상 얽히 필요도 없고 그런 인간 때문에 시간 낭비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말렸는데 듣지 않아요.”심유진도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이다.“허택양 씨한테 그동안 너무 당한 거 같아 속에서 내려가지 않나 봐요. 만나서 얘기하지 않는 이상 평생 끙끙 앓을지도 몰라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분풀이라도 좀 하고 싶은 모습인데 찾아가서 때리거나 아니면 욕하거나 둘 중 하나겠죠. 아직 회복 중이고 몸도 허약하니 너무 흥분하지 않게 태준 씨가 옆에서 좀 지켜봐 주세요. 그러다가 쓰러질지도 몰라요.”이에 허태준은 입술을 사리물었다.“알았어요.”…심유진과 별이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허태준은 지금 홀로 거실에 앉아 하은설을 기다리고 있다
하은설을 보게 되는 순간 초점을 잃었던 그의 눈은 순간 빛이 나기 시작했다.최선을 다해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은설아, 왔어.”유난히 즐거워하는 허택양이다.“저 왔어요.”하은설도 심유진만큼이나 프로페셔널하여 바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한 허택양은 그녀와 담소를 나누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서두르는 모습으로.“너 지난번에 소송 취소한다고 한 거 말이야…”“경찰서에 이미 다녀왔어요.”하은설은 그가 내민 손을 꼭 잡고 이를 악물었다.용솟음치는 역겨운 기억과 그 시간을 애써 억누르며 말을 이어나갔다.“근데 신고자가 제가 아니어서 취소할 수 없다고 그랬어요.”울먹이는 모습과 더불어 무척이나 억울한 듯한 표정까지 보이면서.그 말에 허택양은 눈에 훤히 보이게 당황했다.“심유진 씨는? 만나지 않았어?”“아니요. 앞으로 절대 다시 심유진 찾으러 가지 않을 거예요.”독을 품은 듯한 모습으로 하은설은 그들에 대한 한을 털어 놓았다.“심유진, 허태준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된 거잖아요. 심유진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엮겨우니 다시는 입에 올리지도 마세요.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고 인연 끊고 살 거예요.”“그럼, 난 어떡해? 소송은 어떻게 할 건데?”단호한 하은설의 모습에 허택양은 점점 불안했다.“택양 씨, 제가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요.”완쾌되지 않은 하은설은 오래 서 있을 수 없다.하여 의자를 그의 병상 옆으로 가져와 천천히 앉은 뒤 말을 이어갔다.“소송 취소하는 것 보다 우리 측에서 변호사 찾아서 심유진 걔들 고소하는 건 어때요? 허태준이 신고할 때 당신이 심유진 납치했다고 그랬다던데요. 경찰이 나한테 알려준 거예요. 근데 심유진 납치한 적 없잖아요. 그럼, 가짜 신고를 했다고 경력 낭비했다고 고소하고 당신 명예까지 침범했다고 그러면 되잖아요. 어때요?”허택양의 생각대로라면 하은설은 응당 심유진을 찾아가서 크게 한바탕 싸워야 한다.그러고 나서 심유진 스스로
“왜 그러는 거예요?”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하은설은 질문 공세를 더해갔다.“억울 하지도 않아요? 하루라도 빨리 죄명 씻어내고 싶지 않아요?”“난…”허택양은 이를 악물더니 그나마 좀 더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괜찮을 거야. 감옥에 얼마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너만 괜찮다면 나 좀 기다려 줄래? 감옥에서 나오는 대로 찾아갈게. 우리 세 식구 단란하게 살 수 있게끔 내가 노력할게. 나 때문에 너까지 피해 보는 건 싫어. 허태준을 상대로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네가 고소하잖아? 아마 배로 갚아주고 말 거야.”그 말을 듣고 하은설은 한참 동안 침묵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마침내 스스로 침묵을 깨며 그렇게 하기로 했다.“당신 말대로 해요.”이윽고 자기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모성애를 드러냈다.“아가야, 엄마랑 같이 아빠 기다리자.”자기 말대로 하겠다는 하은설의 말을 듣고 허택양은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돌아가서 심유진이랑 다시 화해해.”“내가 들어가고 나면 적어도 널 보살펴 줄 수는 있잖아. 난 그냥 너랑 우리 아이가 건강하고 평온하게 지냈으면 해. 그래야 나도 안에서 살맛이 나지 않겠어?”“근데 그들이 당신한테 한 짓만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도 태어날 건데, 그들 때문에 아빠 얼굴도 보지 못하잖아요.”하은설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자주 보러 오면 되지 않을까? 아이 데리고 오면 되잖아.”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복수 계획도 어느 정도 틀이 맞혀진 듯했다.“그래요.”하은설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심유진이랑 화해 하는 건 좀 뒤로 할게요. 당장은 얼굴도 못볼 거 같아요. 보자마자 바로 귀싸대기 날릴 것 같거든요.”그러자 허택양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타일렀다.“그래도 되는데 너무 미루지는 마. 임신한 몸으로 홀로 지내는 건 시름이 놓이지 않아. 가능한 한 심유진 집으로 가서 같이 지내게 가장 좋을 것 같아. 적어도 널 돌볼 수
심유진은 회사에 오자마자 김욱의 전화를 받게 된다.“나 도착했어. 각 부서 팀장한테 한 시간 뒤에 회의한다고 전해.”“오빠, 벌써 돌아왔어?”심유진은 이상하기만 했다.월요일 아침 일찍 해외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이틀도 있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갑자기 일이 좀 생겼어.”김욱의 목소리는 그리 좋지 않았다.“자세한 건 돌아가서 얘기하자.”“알았어.”덩달아 신경이 곤두선 심유진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회의 통지에 관한 이메일을 팀장들한테 보냈다.한 시간 뒤, 김욱은 말한 대로 회사에 도착했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라 미처 슈트로 갈아입을 겨를도 없었다.평소와 달리 케주얼한 복장으로 딱딱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한 치의 오차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신체 조건으로 길쭉한 다리를 내디디고 있다.그에 비해 다리가 그리 길지 않은 루씨는 종종걸음으로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선명한 대조가 이뤄지면서 왠지 모르게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그와 반대로 김욱은 여느 때보다 멋지고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고개를 푹 숙인 채 일만 하고 있던 여성 직원들도 저도 모르게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시야가 정화되고 짧은 순간이었다.다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차가운 얼굴로 심유진의 책상을 두드렸다.“회의실로.”심유진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자료들을 챙겨 들고 전전긍긍하며 뒤따라 들어갔다.예상한 것과 마찬가지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비즈니스로 해외로 갔었던 김욱은 도착하자마자 문전박대를 당하게 되었다.만나기로 한 바이어가 갑자기 후회하면서 연락조차 닿을 수 없었다.그쪽 비서를 통해 여러 번 시도를 해보았으나 수 없는 이유로 거절하기 바빴다.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김욱은 어느 한 친구로부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모어에서 그가 오기 전에 낮은 가격으로 그 고객을 꼬드겼고 비즈니스 관계를 맺는다면 앞으로 여러모로 이익이 될 것이라며 약속까지 했다고 했다.하여 김욱은 바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블루항공은 직원이
사무실에는 어느새 큰 트렁크 하나가 덩그러니 나타났다.김욱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트렁크를 두드리며 말했다.“궁금하지 않아?”“지금은 근무시간입니다.”심유진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상사가 자기한테 했던 교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근무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다른 일인지 아닌지 그건 내 마음에 달렸어.”김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트렁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길쭉한 다리를 웅크리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트렁크를 열기 시작했다.선물은 언제나 설레는 법이다. 유혹을 견디지 못한 심유진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트렁크 안에는 선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옷, 가방, 쥬얼리, 화장품까지 한눈에 봐도 값이 만만치 않은 사치품들이다.“오빠, 우리 회사 지금 힘든 거 맞아?”심유진은 의문을 품은 채 김욱을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씀씀이를 보아서는 결코 힘든 과정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국내에서나 비싸지 해외에서는 꽤 저렴한 물건들이야. 그냥 간 김에 좀 많이 사 온 것뿐이고.”김욱은 설명하며 자리를 옮겨 심유진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다.“여기 성인용은 모두 유진이 네 선물이고 어린이용은 별이 선물이야. 어때? 마음에 들어?”심유진은 극히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보는 것만으로 황홀해지는 물건들인데 어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마음에 들면 됐어.”선물 받는 이가 좋아하니 선물을 주는 이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퇴근할 때 잊지 말고 가지고 가.”김욱은 재삼 일깨워주었다.“알았어.”심유진은 선물을 일일이 열어보고 또다시 일일이 제자리에 담아 놓았다.“오빠.”갑자기 고개를 들어 김욱에게 윙크까지 해가며 애교를 부렸다.“친구한테 좀 줘도 돼?”그러자 김욱은 아주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안 될게 뭐가 있어? 내가 아니라 네가 주인인데, 마음대로 해.”마음 같아서는 흥분할 때 별이가 방방 뛰는 것처럼 심유진도 뛰면서 그에게 뽀뽀까지 하고 싶은 심정이다.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좋아요." 심유진은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계산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날이 오면 핑계 대고 빠져나가 자리를 비켜 줄 속셈이었다."역시 유진 씨!"마리아가 심유진의 팔을 껴안고 다정하게 붙어 왔다....캐리어를 끌고 가는 게 너무 눈에 띌까 봐 심유진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야 불이 켜진 김욱의 사무실을 노크했다.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물건 가지러 왔어."심유진은 구석에 놓인 캐리어를 가리켰다."응."김욱은 그제야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지친 표정으로 안경을 벗었다."왜 그래?"심유진이 방향을 바꿔 다가갔다."일이 잘 안 풀려?""조금." 김욱이 한숨을 쉬었다."모어 항공은 우리 고객뿐만 아니라 마케팅 직원도 스카우트하려고 해."그에 심유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덧붙였다."그래도 마케팅팀 고위직은 다 내가 키운 사람이라 쉽게 배신하지는 않을 거야."김욱이 걸어온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육윤엽은 김욱을 후계자로 키울 의향이 있지만 힘을 완전히 가질 때까지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래서 김욱이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했을 때 밑바닥부터 시작했다.그 능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 결과, 불과 2년 만에 자신의 실력만으로 마케팅팀 부장 자리에 올라 부하 직원들과 함께 회사에 길이 남을 만한 공을 세웠다.김욱이 마케팅 부서에서 자리 잡고, 자기 편을 만든 후에야 육운엽은 그를 차근차근 승진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비서장 자리를 주었다."큰손들은 몇 명 떠났지만 지금 있는 주문도 적지는 않아. 적어도 상반기는 버틸 수 있어."김욱이 심유진을 바라봤다."다시 말하자면 주어진 시간은 4개월밖에 남지 않았어."심유진은 자신의 어깨에 진 짐이 더욱 무거워짐을 느꼈다."됐어, 빨리 가. 별이가 기다리잖아."김욱이 보내려 했지만 심유진은 입술을 짓씹을 뿐 안 움직였다.별이는 허태준이 데리러 갔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야근할 거야?"김욱에게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