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은 회사에 오자마자 김욱의 전화를 받게 된다.“나 도착했어. 각 부서 팀장한테 한 시간 뒤에 회의한다고 전해.”“오빠, 벌써 돌아왔어?”심유진은 이상하기만 했다.월요일 아침 일찍 해외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이틀도 있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갑자기 일이 좀 생겼어.”김욱의 목소리는 그리 좋지 않았다.“자세한 건 돌아가서 얘기하자.”“알았어.”덩달아 신경이 곤두선 심유진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회의 통지에 관한 이메일을 팀장들한테 보냈다.한 시간 뒤, 김욱은 말한 대로 회사에 도착했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라 미처 슈트로 갈아입을 겨를도 없었다.평소와 달리 케주얼한 복장으로 딱딱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한 치의 오차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신체 조건으로 길쭉한 다리를 내디디고 있다.그에 비해 다리가 그리 길지 않은 루씨는 종종걸음으로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선명한 대조가 이뤄지면서 왠지 모르게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그와 반대로 김욱은 여느 때보다 멋지고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고개를 푹 숙인 채 일만 하고 있던 여성 직원들도 저도 모르게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시야가 정화되고 짧은 순간이었다.다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차가운 얼굴로 심유진의 책상을 두드렸다.“회의실로.”심유진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자료들을 챙겨 들고 전전긍긍하며 뒤따라 들어갔다.예상한 것과 마찬가지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비즈니스로 해외로 갔었던 김욱은 도착하자마자 문전박대를 당하게 되었다.만나기로 한 바이어가 갑자기 후회하면서 연락조차 닿을 수 없었다.그쪽 비서를 통해 여러 번 시도를 해보았으나 수 없는 이유로 거절하기 바빴다.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김욱은 어느 한 친구로부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모어에서 그가 오기 전에 낮은 가격으로 그 고객을 꼬드겼고 비즈니스 관계를 맺는다면 앞으로 여러모로 이익이 될 것이라며 약속까지 했다고 했다.하여 김욱은 바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블루항공은 직원이
사무실에는 어느새 큰 트렁크 하나가 덩그러니 나타났다.김욱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트렁크를 두드리며 말했다.“궁금하지 않아?”“지금은 근무시간입니다.”심유진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상사가 자기한테 했던 교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근무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다른 일인지 아닌지 그건 내 마음에 달렸어.”김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트렁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길쭉한 다리를 웅크리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트렁크를 열기 시작했다.선물은 언제나 설레는 법이다. 유혹을 견디지 못한 심유진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트렁크 안에는 선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옷, 가방, 쥬얼리, 화장품까지 한눈에 봐도 값이 만만치 않은 사치품들이다.“오빠, 우리 회사 지금 힘든 거 맞아?”심유진은 의문을 품은 채 김욱을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씀씀이를 보아서는 결코 힘든 과정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국내에서나 비싸지 해외에서는 꽤 저렴한 물건들이야. 그냥 간 김에 좀 많이 사 온 것뿐이고.”김욱은 설명하며 자리를 옮겨 심유진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다.“여기 성인용은 모두 유진이 네 선물이고 어린이용은 별이 선물이야. 어때? 마음에 들어?”심유진은 극히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보는 것만으로 황홀해지는 물건들인데 어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마음에 들면 됐어.”선물 받는 이가 좋아하니 선물을 주는 이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퇴근할 때 잊지 말고 가지고 가.”김욱은 재삼 일깨워주었다.“알았어.”심유진은 선물을 일일이 열어보고 또다시 일일이 제자리에 담아 놓았다.“오빠.”갑자기 고개를 들어 김욱에게 윙크까지 해가며 애교를 부렸다.“친구한테 좀 줘도 돼?”그러자 김욱은 아주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안 될게 뭐가 있어? 내가 아니라 네가 주인인데, 마음대로 해.”마음 같아서는 흥분할 때 별이가 방방 뛰는 것처럼 심유진도 뛰면서 그에게 뽀뽀까지 하고 싶은 심정이다.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좋아요." 심유진은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계산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날이 오면 핑계 대고 빠져나가 자리를 비켜 줄 속셈이었다."역시 유진 씨!"마리아가 심유진의 팔을 껴안고 다정하게 붙어 왔다....캐리어를 끌고 가는 게 너무 눈에 띌까 봐 심유진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야 불이 켜진 김욱의 사무실을 노크했다.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물건 가지러 왔어."심유진은 구석에 놓인 캐리어를 가리켰다."응."김욱은 그제야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지친 표정으로 안경을 벗었다."왜 그래?"심유진이 방향을 바꿔 다가갔다."일이 잘 안 풀려?""조금." 김욱이 한숨을 쉬었다."모어 항공은 우리 고객뿐만 아니라 마케팅 직원도 스카우트하려고 해."그에 심유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덧붙였다."그래도 마케팅팀 고위직은 다 내가 키운 사람이라 쉽게 배신하지는 않을 거야."김욱이 걸어온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육윤엽은 김욱을 후계자로 키울 의향이 있지만 힘을 완전히 가질 때까지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래서 김욱이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했을 때 밑바닥부터 시작했다.그 능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 결과, 불과 2년 만에 자신의 실력만으로 마케팅팀 부장 자리에 올라 부하 직원들과 함께 회사에 길이 남을 만한 공을 세웠다.김욱이 마케팅 부서에서 자리 잡고, 자기 편을 만든 후에야 육운엽은 그를 차근차근 승진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비서장 자리를 주었다."큰손들은 몇 명 떠났지만 지금 있는 주문도 적지는 않아. 적어도 상반기는 버틸 수 있어."김욱이 심유진을 바라봤다."다시 말하자면 주어진 시간은 4개월밖에 남지 않았어."심유진은 자신의 어깨에 진 짐이 더욱 무거워짐을 느꼈다."됐어, 빨리 가. 별이가 기다리잖아."김욱이 보내려 했지만 심유진은 입술을 짓씹을 뿐 안 움직였다.별이는 허태준이 데리러 갔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야근할 거야?"김욱에게
마리아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수고 많으시네요.""회사 근황이 안 좋으니까 잘리지 않으려면 이렇게라도 해야죠."잠깐 말을 멈춘 심유진이 말을 이었다."마리아 씨는요? 한참 전에 가신 거 아니었어요?""아, 두고 온 게 있어서요."마리아는 옆으로 비켜서며 뒤쪽을 가리켰다. "그럼 전 이만 가지러 갈게요.”"기다릴까요?”"아니에요. 괜찮아요."마리아가 연신 사양했다."먼저 가세요.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 안 나서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요."퇴근 시간은 지났지만 건물에 사람은 여전히 많았기에 계속 엘리베이터를 잡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먼저 가 볼게요. 내일 봐요~"엘리베이터 밖에서 손을 흔드는 마리아의 표정이 어딘가 굳어 있었다."내일 봬요~"...심유진이 가지고 온 캐리어는 구경꾼들의 관심을 끌었다."미친. 이 가방 8천 달러는 될 것 같은데?"여기서 '구경꾼'은 하은설뿐이었다."이 목걸이... 진짜 보석이면 만 달러는 넘겠어. 헉, 이 귀걸이. 미쳤다... 너무 예쁘네. 안목 대박이다. 아니, 이건! 전설의 귀부인 크림... 난 살 엄두도 안 났는데. 미백, 주름개선, 안티에이징에 탁월하대."그녀는 도굴하듯 캐리어를 뒤지면서 끊임없이 감탄했다.귀를 막은 심유진이 그 부자와 함께 스튜디오로 피신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하은설이 겨우 멈추자 심유진이 말했다. "마음에 드는 거 가져가. 어차피 오빠가 산 거라 내 돈 안 썼어."하지만 하은설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염치도 있는 사람이라 너무 비싼 물건 대신 자기가 평소에 쓰는 화장품만 챙겼다."그게 다야?"지켜보던 심유진이 부족하다 느껴 하은설에게 아까 그 팔천 달러짜리 가방과 하이힐을 챙겨 줬다."이건 너무 비싼데..."하지만 하은설은 쉽사리 받지 못했다."우리 사이에 무슨."심유진이 억지로 안겨 줬다."겨우 1억 조금 넘는 건데, 우리 사이에 못 받을 게 어디 있어."우리 사이라는 말이 하은설 마음 깊은 곳의 죄책감을 들
"내 눈 멀어 버린 것 같아."그에 심유진이 외쳤다."됐다. 너희한테 뭘 기대하겠어."별이가 혀를 낼름 내밀자 심유진이 삐죽이며 말다툼을 포기했다....저녁 식사 때 허태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허태준이 서재로 자리를 피했지만 심유진의 눈에 발신인 이름이 들어왔다.그렇게 허태준은 십여 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하은설과 별이는 벌써 밥을 다 먹고 스튜디오에서 게임하는 중이었기이 그 사이 심유진 혼자 허태준을 기다렸다.허태준의 표정이 아까보다 어둡자 심유진이 물었다."집에 무슨 일 생겼어요?""별일 아니에요."허태준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우리 둘째 숙모, 그러니까 허택양 엄마가 저희 집에서 난동 부렸대요. 허택양이 유럽에 온 지 이렇게 오래됐는데 돌아가지 않은 걸 보니 분명 제가 가뒀을 거라고."여기까지 말하자 허태준이 비웃었다."자기 아들은 잘 알면서 전 모르더라고요.""부모님은 뭐라고 하셨어요?"심유진이 물었다."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한참 동안 욕을 듣기만 하고 돌려보내셨어요."허태준은 정말 걱정할 만한 '큰일'이 아니라는 듯 담담한 말투였다."아버님께서 정말 허택양을 가두었느냐고 안 물었어요?""물어봤어요.”"뭐라고 대답했어요?""솔직하게 말했어요.""네?"심유진이 깜짝 놀랐다."솔직하게 말하면 나중에 둘째 숙모를 쫓아낼 명분이 없어지잖아요."허태준의 부모는 자신이 정말 떳떳하지 못한 짓을 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하나, 잘못한 사람은 허택양이지, 내가 아니에요. 둘, 허택양을 가둔 사람은 경찰이에요, 이것도 제가 아니고요. 쫓아낼 명분이 왜 없어요"허태준은 당당했다."이미 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앞으로 아무나 들이지 말라고. 집안 더러워지면 속상한 건 부모님이니까.""둘째 숙모가 일을 크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심유진은 허씨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허가네 무리를 본 적이 있다. 허태준의 숙모와 숙부를 가까이서 본 건 아니지만 절대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았다.
최근 전염병의 영향으로 국제 무역이 크게 감소했는데 블루항공도 당연히 많은 고객으로부터 예약 취소 신청을 받았다.그에 회사 분위기는 암울했고 각 부서마다 잘려나간 직원이 한둘이 아니었다.심유진은 이 때문에 김욱이 확신을 주기 원했다.김욱은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해서 안색이 파리했다."직원 정리 계획은 있지만 '대규모'는 아니야."피곤함과 어이없음이 동시에 묻어나왔다."실적 최하위 해직. 우리 회사는 줄곧 이런 식이었는데 그냥 몇 년간 전체 실적이 나쁘지 않아서 그 많은 사람들을 그냥 뒀던 거야. 지금은 회사가 어려우니까 성적 못 내는 사람은 무조건 해고야."그에 심유진이 걱정에 표정이 어두워지자 김욱이 말했다."그런 표정 짓지 마. 아직 끝난 거 아니잖아. 정부가 일 제대로 하고 있으니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니까 모어도 이번 일로 취소된 주문이 장난 아니던데.""그래도 우리 손해가 모어보다 훨씬 크지?"하지만 심유진은 그 말에 조금도 위로받지 못했다.육윤엽은 한국 토박이이기 때문에 블루 항공 고객의 대부분은 아시아 회사이고 그중에서도 한국 회사가 압도적으로 많다.모어는 블루 항공과 정반대였는데, 그들의 화물선은 거의 유럽과 미국으로만 다녔고 아시아 주문은 그저 새 발의 피였다."금방 지나가."김욱은 자신 있었다."유럽과 미국에도 바이러스가 퍼지는 건 시간문제야. 아마 그때가 되면 모어 상황은 우리보다 처참하겠지."심유진은 그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랐다."유럽과 미국에 바이러스가 퍼지면 우리도 끝장나는 거 아니야?""뉴스 좀 봐."김욱이 심유진을 일별했다. "가장 먼저 대규모로 발생한 도시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 감염자는 점점 줄고 있어. 그 도시들이 다 풀리면 우리 주문 양도 다시 증가할 거야. 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한 확진자가 한 자릿수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 정부와 시민이 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 우리보다 더 심각해질 수 있어."심유진의 가족과 친구들은 모두 여기에 있고 평소 국내
김욱이 온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다.마리아에게 시간 없을 거라 말하자마자 자신에게 식사 요청을 해 왔으니.마치 둘 사이를 일부러 방해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김욱 씨, 오늘은 벌써 퇴근하세요?"심유진이 이 오해를 벗어나고자 했다."주말이니까요."김욱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그래서 같이 밥 먹을 거예요?"그는 또 물었다. 심지어 심유진이 거절할까 봐 한 마디 덧붙이기까지 했다."제가 살게요.""아..."몇 초 동안 망설이던 심유진이 마리아의 이름을 내뱉었다."마리아 씨도 같이 가도 되죠? 마침 마리아 씨가 김욱 씨한테 밥 사려고 했어요, 맞죠."갑자기 자기 이름이 나오자 마리아는 약간 당황했다.마리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나중에요. 오늘 김욱 씨가 밥 사 드리기로 하셨으니까 저는 안 낄게요."그러고는 황급히 자신의 자리로 달려가 가방을 메고 떠나려 했다.그 가방을 본 김욱의 시선이 가방에 쭉 머물자 시선을 눈치챈 마리아가 무의식적으로 가방을 두어 번 만졌다."고마워요, 김욱 씨. 너무 마음에 들어요~ 언제 시간 되시면 밥 한번 사 드릴게요. 감사 인사 겸.""아닙니다." 김욱은 그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선물이 마음에 드시면 됐어요.”그에 마리아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그럼... 저 먼저 갈게요."마리아는 둘에게 손을 흔들며 하이힐 신은 발로 황급히 도망가듯 떠났다."일부러 그랬지?"심유진이 물었다.김욱은 눈치 없이 남들 앞에서 심유진만 따로 초대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러자 김욱이 코웃음 쳤다."내가 너한테 복수 안 해서 다행인 줄 알아.""응?" 심유진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나한테 복수를 왜 해.""아저씨한테 무슨 말 했는지 생각해 봐. 나랑 마리아에 대해."김욱이 힌트를 주자 심유진이 곧장 반응했다."아빠는 진짜 별걸 다 말해.""직접 물어보진 않으셨고, 마리아에게 호감이 있냐고 떠봤어. 근데 이런 일을 너 말고 누가 시키겠어?"누가 시킨 일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
아까 떠났던 마리아가 언제 온지 모르게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마리아는 그 예쁜 푸른 눈이며 입이 모두 커진 채로 충격을 받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심유진이 준 새 크로스백이 발 옆에 떨어져 안에 있던 립스틱이 굴러 나왔다."미, 미안해요!"정신을 차린 마리아는 재빨리 바닥에 있는 것을 주워 재빨리 나갔다."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오해...한 것 같지?"심유진은 김욱과 거리를 두며 그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아까 자세가 이상했을 뿐더러 그녀는 마리아였으니 오해를 안 할 수가 없을 것이다."오해해 준다면 더 좋지."김욱은 덤덤했다."이제 나랑 이어 달라는 부탁 같은 건 안 하겠지."심유진은 김욱과의 관계를 외부에 공개하는 것을 꺼렸으니 마리아에게 해명하긴 어려웠다.심유진이 신경질적으로 물건을 챙기고 중얼거렸다."언제까지 혼자 지내나 보자."...사실 심유진에게 밥을 산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저 마리아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그래서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인사하고 차로 향했는데 심유진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와 조수석에 앉았다."밥 사 준다며? 가자."뻔뻔한 표정으로 안전벨트를 맸다.그에 김욱은 별다른 말 없이 부드럽게 차를 몰기만 했다.김욱의 차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모퉁이에 세워둔 빨간 차가 비로소 혼잡한 차들 사이로 끼어들었다....모처럼 김욱에게 얻어먹는 것이니 심유진은 평소 비싸서 못 가던 레스토랑으로 골랐다.그러나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 넣어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이 시간에 심유진을 찾는 사람은 오직 집에 있는 세 명뿐이었다.심유진이 핸드폰을 쥐고 자랑하려는 순간, 발신인이 저번 부모 동반 수업 이후로 연락 없던 앨런인 것을 확인했다.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어 책상에 뒤집어 두고 알아서 끊기기를 기다렸다.그러나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듯 첫 통이 끝난 지 2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울렸다.결국 김욱이 심유진을 설득했다."받아 봐, 만약 급한 일이면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