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의 사무실은 호텔 입구가 있는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그녀가 올라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층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호텔 입구에 경찰차 한 대가 서있었다. 몇 분 후 두 명의 경찰이 조건웅의 부모님을 데리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뜻밖에도 두 사람은 아무런 반항도, 심지어 억척스러운 악다구니도 없이 순순히 경찰차에 올라타는 것이었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프런트 직원인 소미에게 듣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글쎄 허 대표님께서 4억으로 그 두 사람 목숨을 사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말에 잔뜩 겁을 먹은 두 사람이 경찰이 오자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기필코 경찰과 함께 가겠다고 우겨서 경찰의 보호하에 나갔어요.”소미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심 매니저님이 그때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겁먹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정말로 웃겼다니깐요.”심유진은 웃을 수가 없었다.두 사람이 벌인 소동은 그들 스스로의 얼굴을 깎았을 뿐만 아니라 심유진의 얼굴도 처참하게 깎아내렸다. 어쨌든 외부인의 눈에 그 두 사람은 그녀의 시부모님들이었다.**예상했던 대로 점심이 되기도 전에 심유진은 총지배인에게 직접 ‘소환’ 당했다.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 머리를 푹 수그렸다. 그렇게 그녀는 당장 자신에게 닥칠 ‘폭풍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그녀가 예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오히려 총지배인은 부드러운 어투로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휴가 며칠 더 필요하지는 않아?”놀란 심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혹시 그의 몸에 귀신이라도 씐 건 아닌가 하는 의심에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전에는 그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당장 욕부터 하던 그였다.그녀의 의심을 알아차린 듯한 총지배인이 바로 표정을 굳히더니 예전의 그 엄격한 모습으로 돌아갔다.그 모습에 심유진은 어쩐지 안심이 들었다.“비록 오늘 일은 심 매니저가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일이었기는 하지만 어쨌
“당신 그거 무슨 뜻이야?”심유진은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음료수를 가져온 직원이 화들짝 놀랐다.“주, 주문하신 레몬티입니다.”직원이 레몬티를 테이블 위에 올놓더니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그는 돌아서면서도 몇 번이나 두 사람을 힐끔거리다가 그제야 자리를 떠났다.그의 어설픈 방해에 심유진은 그제야 자신이 현재 공공장소에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녀는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다.“계약금 내가 냈어. 매 달마다 대출금을 갚고있는 것도 나였고. 그런 집이 나랑 상관이 없으면 대체 누구랑 상관있다는 거야?”그녀는 겨우 화를 참으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조건웅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가방에서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확인해 봐.”서류 첫 페이지의 맨 꼭대기에 검은색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주택 증여 계약서》심유진의 시선이 그 단어에서 2초가량 머무르다가 빠른 속도로 아래 내용을 확인했다.증여인: 심유진 (이하 “갑”이라 칭함)수증인: 조건웅 (이하 “을”이라 칭함)증여하는 주택은 결혼 후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바로 그 집이었다.“이걸 나한테 왜 보여주는데? 나더러 지금 여기에 사인하라고?”심유진이 계약서를 던지며 싸늘하게 웃었다.“똑똑히 들어 조건웅. 꿈도 꾸지 마!”조건웅의 얼굴에서 좌절이나 분노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승리의 미소가 걸려있었다.그가 계약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심유진에게 건넸다. 그리고 검지로 맨 마지막에 있는 서명란을 가리키며 말했다.“똑똑히 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닌지 말이야.”증여인이라는 세 글자 뒤에 있는 서명란에는 멋들어지게 쓴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심유진 세 글자가.그녀가 가장 익숙한 필체였다. 전혀 위조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사인 위에는 붉은색 지장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마침 그녀의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심유진은 뜻밖의 욕설에 머리가 띵해졌다.하지만 그녀 역시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건 아니었다. 이보다 더한 고객도 겪어왔었다.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죄송합니다 서우연 씨. 아마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 막 호텔로 돌아온지라 아직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실례지만 잠시만 저한테 상황을 파악할 시간을 내어주시면 안 될까요?”그와 동시에 그녀의 두뇌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로열 호텔은 정규적인 호텔이었다. 이와 같이 사업 규모가 크고 사무가 번잡한 호텔에서 멋대로 사람을 내쫓을 리가 없었다.보안 요원과 청소부까지 모여있는 걸 보니 그녀를 쫓아내는 일이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았다.심유진은 호텔을 통틀어 권력 있고 고객을 쫓아낼 정도의 파워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총지배인을 제외하고는 떠오르지 않았다.그녀가 막 총지배인한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으려고 할 때 복도 끝 쪽에 있는 방 문이 열렸다.여형민이 잠옷을 입은 채 걸어 나왔다.그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의 주위로 허태준과 비슷한 싸늘한 기운이 느껴겼다. 아침에 친절하기 그지없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심유진은 그의 휴식을 방해한 줄 알고 황급히 사죄했다.“죄송합니다 여형민 씨. 현재 이쪽에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요. 소란스럽게 했다면 저희가 다른 방으로 옮겨드리겠습니다.”여형민이 손을 내젓더니 그녀를 향해 씩 미소 지었다.“괜찮습니다.”심유진이 당황했다.이게 괜찮으면 그는 도대체 왜 저렇게 저기압인 거지?여형민은 곧바로 서우연의 앞으로 다가갔다.서우연은 그를 알고 있는 듯했다.“여, 여 변호사님?”이전에 보였던 오만방자함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져있었다. 오히려 그녀가 긴장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서우연 씨.”그녀를 대하는 여형민의 태도는 심유진을 대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말투도 각박하기 그지없었다.“당신한테 퇴실을 요구한 건 허 대표님의 뜻이었습니다. 원인은……”그가 씩 입꼬리를 올렸
“풉!”물을 마시던 여형민이 그녀의 말에 그대로 물을 뿜었다.그가 다급하게 일어나 휴지를 뽑아 서둘러 입 주위와 젖은 옷을 닦았다.“죄송합니다.”그는 조금 뻘쭘해 보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눈매가 씰룩거리는 것이 어쩐지 웃음을 참고 있는듯했다.그가 다시 자리에 앉더니 짐짓 생각하는 척하며 턱을 만졌다. 잠시 후 그가 정색하며 말했다.“문제라, 허 대표한테 정말로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심유진이 두 귀를 쫑긋 세웠다.“심각한 결벽증이 있거든요.”여형민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한눈에 보아도 그 일로 꽤나 많은 피해를 입었던 것 같았다.그 ‘병명’이라면 심유진한테 신선감을 주지 못했다. 녀가 직접 그의 결벽증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눈앞의 남자의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결벽증과 서우연을 거절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허 대표의 결벽증이 심하다 못해 다른 사람과 그 어떤 신체적인 접촉을 할 수 없을 정도랍니다. 비즈니스를 할 때 협력 업체 사람들과 악수조차 하기 싫어할 정도죠.”여형민의 말에 심유진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허태준이 호텔에 와서 체크인하던 그날 밤. 분명 그녀와 악수를 나누지 않았던가. 심지어 어젯밤에 두 사람은……당연히 심유진은 자신이 허태준한테 특별한 “예외”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입으로 원래는 그녀한테 “사람”을 불러달라고 할 생각으로 전화했다고 했었다.때문에 그녀는 허태준의 괴상한 “결벽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부를지언정 서우연과는 자기 싫다니. 설마 그는 서우연이 돈만 주면 아무나 잘 수 있는 그런 “사람”보다도 불결하다고 생각하나?여형민은 심유진의 당혹감을 눈치챘지만 뭐라 더 설명하지는 않았다.그와 같은 외부인이 나서지 말아야 하는 일도 있었다.심유진 역시 그 이상은 뻔뻔스럽게 묻지 못했다.본론은 다 끝났으니 그녀도 더 이상 그 방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기도 하니 그녀는 예의상 그에게 물었다.“여 변호사님 혹
“예를 들어……”여형민이 교활하게 씩 웃으며 허태준 쪽을 힐끗 보았다.“여기 있는 허 대표와 잘 지내봐요. 허 대표한테 뒤에서 그 인간들이 골탕 먹게 힘 좀 써달라고 해요.”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하늘 높이 치솟던 심유진의 기대가 바늘에 콕 찍힌 듯이 펑 하고 터져버렸다.“그건……”그녀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양 고고하게 있는 허태준을 몰래 힐끔거렸다.“역시 허 대표님한테 폐를 끼칠 수는 없죠.”그때 허태준이 입을 열었다.“왜? 나 같은 건 쓸모없나?”그가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심유진이 서둘러 해명했다.“절대 아닙니다. 공사 다망한 허 대표님한테 어떻게 이런 작은 일로 폐를 끼치겠어요? 더군다나 저와 대표님은 안지도 며칠 안 됐고……”그녀는 방금 자신이 말한 부분 어디에서 허태준의 역린을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그렇다고.”허태준이 한 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의 눈빛이 갑자기 싸늘해졌다.“그렇게 작은 일이 나한테 폐를 끼칠 수나 있겠어? 하지만……”갑자기 그가 화제를 돌렸다.“어제 심 매니저가 나를 도왔으니 나도 응당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어. 아니면 당신이 한번 말해 봐.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는지.”“괜찮습니다.”심유진이 주저 않고 그를 거절했다.“대표님께서는 오늘 아침에도 이미 저를 크게 도우셨습니다. 그걸로 계산 끝내죠. 이제 서로 빚진 건 없습니다.”허태준은 여전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이었다.“잘 생각해 봐 심 매니저. 이런 기회는 다음에 오지 않아.”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심유진이 답했다.“충분히 생각해 봤습니다.”“그래.”허태준이 그녀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옮기고 와인잔을 들었다.그가 살짝 고개를 젖히자 검붉은 색 액체가 잔을 타고 그의 입안으로 흘러들어갔다.꿀꺽.그의 목젖이 꿀렁거렸다.심유진은 그저 생각 없이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허태준의 완벽한 옆선과 무심히 흘러나오는 퇴폐적인 섹시미에 눈을 떼지 못했다.그녀는 왠지 목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심지어 저
잠에서 깬 심유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당황한 상태에서도 그곳이 어딘지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지난번 그녀가 “운 좋게” 하룻밤 묵었던 8888호 방이었다.충격과 공포에 쏟아지던 잠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유진이 이불을 슬쩍 들어보았다.이불 아래 있는 자신의 몸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만큼 처참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어제 그녀가 입고 있었던 옷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호텔 VIP 고객을 위해 준비된 실크 가운이 걸쳐져 있었다.목 위로 두텁게 몇 번이나 덧발랐던 화장도 사라지고 그 대신 얼룩덜룩한 검붉은 색 키스마크가 남아있었다.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감히 기억을 찾을 용기도 없었다.2미터 침대에 현재 그녀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베개도 정갈하게 침대 머리에 놓여 있었다. 방금 그녀가 어지럽힌 이불을 제외하고 주름 하나 없을 정도였다.심유진은 허태준이 잠을 자고 깨나서 나간 건지, 아니면 이곳에서 자질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의 희망 대로 후자가 맞았으면 좋겠지만. 욕실 문은 열려있었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빨래 바구니에는 옷이 한가득 담겨있었다.위에는 허태준의 옷이 있었고 아래에는 그녀의 옷이 깔려있었다.두 사람의 옷이 한데 엉켜 어쩐지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심유진은 곧바로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입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그녀는 간단히 씻고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허태준의 옷을 입을 생각이었다.그녀가 막 옷장을 열었을 때 누군가에 의해 방 문이 열렸다.깜짝 놀란 심유진이 옷장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커다란 소리와 함께 옷장 문이 몇 번이나 열렸다 닫았다 하더니 겨우 닫혔다.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허태준이었다.그는 이번에는 간단한 캐주얼 차림이었고 머리도 자연스럽게 흐트러져있었다.심유진이 침대 옆에 서있는 모습을 본 그는 약간 놀랐지만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걸로 표현했다.“깼으면 옷 갈아입어.”그가 손에 들고 있
이혼에 관한 일은 전부 여형민한테 맡기니 당사자인 심유진은 오히려 너무나 한가할 정도였다.휴가는 아직 이틀이나 남아있었다. 심유진은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로열 근처에 있는 작은 아파트를 알아봤다.로열 호텔은 대구에서도 가장 번화한 지역에 있었다. 그 주위에는 온통 몇십억을 호가하는 고급 빌라 단지뿐이었다. 단지 내에 빈집이 매우 적었는데 있다고 해도 팔지는 않았다.결국 그녀는 차선택으로 세 개 정거장 이내거나 막히지 않는 상황에서 삼십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 범위를 한정했다.중개인이 그녀를 데리고 하루 종일 다니며 여러 집을 보여줬지만 주변이 시끄럽거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낡은 단지뿐이었다.결과적으로 그녀의 마음에 드는 집은 찾지 못했다.심유진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녀가 막 침대에 누우려는데 조건웅 동생 조건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다짜고짜 자기 용건을 말했다.“나 다음 주에 아름이랑 대구에 갈 거니까 비행기 표와 호텔 예약해 줘요.”조건이는 경주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소아름은 그와 교제한지 2년이 되는 여자친구였다.심유진은 결혼식 그리고 이번 년 설에 조건이를 몇 번 본 게 다였기에 친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소아름은 본적도 없었다. 그저 조 씨 부모한테서 그녀가 경주 어디 사장님의 외동딸이라는 말만 들었었다.때문에 그녀는 조건이의 다짜고짜 한 “명령”에 얼떨떨하기만 했다.이런 일은 그녀를 찾을 게 아니지 않나?“네 형한테 예약해 달라고 해.”보아하니 조 씨 집안에서는 아직 그에게 그녀와 조건웅의 이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또 다른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 역시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조건이가 화를 내는 게 아닌가.“우리 형이 얼마나 바쁜데요. 어디 그런 걸 예약할 시간이 있다고 그래요!”그의 말투가 거칠었다.“형수님이 되서 그 정도도 못해 줘요? 그리고 형수님 로열 호텔에서 일하잖아요? 프런트
여형민은 업계에서 꽤나 이름난 변호사였다. 지난 몇 년간은 전문적으로 돈 많은 부자들의 이혼 전문 변호를 맡으며 변호 한 번에 2억 이상씩 받았었다. 거기다 CY 그룹 주주라는 신분까지 있었기에 대구에 집을 사는 건 그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마침 저한테 빈집이 있거든요. 바로 이 근처에 있는 ‘리친시아’예요.”‘리친시아’는 대구에서 탑 급에 속하는 고급 단지 중 하나였는데 그곳을 살 수 있을 정도면 어마어마한 부자여야 했다.‘리친시아’는 로열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주택가였고 주변에는 모든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정말로 제게 임대해 주시는 거예요?”심유진은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물론이죠.”여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장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임대하실 생각 있으시면 지금 저희랑 집 보러 가도 돼요.”“좋아요!”심유진이 바로 답했다.호텔 입구에는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허태준과 여형민이 다가가자 운전석에서 누군가가 내리더니 그들의 짐을 트렁크에 실어주었다.여형민이 심유진 보다 한발 앞서서 부 좌석의 문을 열었다.“제가 여기에 앉는 걸 좋아하거든요.”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심유진이 바로 자리를 내주었다.“타세요.”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사이에 허태준은 이미 차에 앉아있었다.그는 문을 닫지 않고 있었다. 싸늘한 음성이 심유진의 귓가에 똑똑히 들려왔다.“빨리.”심유진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허태준은 뒷좌석의 중간쯤에 앉아있었는데 혼자서 두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그의 몸에 닿지 않기 위해 심유진은 차 문에 딱 달라붙어 앉았다.그녀의 그런 노력에도 그의 얼굴은 무서울 만큼 굳어있었다.심유진은 혹시 그의 화를 돋우기라도 할까 두려워 허리를 곧게 펴고 숨도 큰 소리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로열 호텔에서 리친시아까지 차로 5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기에 나름 견딜만했다.차가 한 건물 아래에 멈춰 섰다.“여기에요.”여형민이 먼저 내리고 손으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