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해! 받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왜 이렇게 사람을 다그치는 거야?”심유진은 이러다는 큰일날 것 같다는 생각에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말렸지만 조씨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게 거세게 그녀를 밀쳤다.“나와!”병실 안에 있던 다른 환자는 이 상황에 익숙하다는 듯 커튼을 쳤다.“아버지! 어머니! 제발 그만 좀 싸우세요!”조건웅은 심유진 앞에서 자신의 부모가 싸우자 부끄러워 얼굴이 시뻘게졌다.아들의 제지에 아버지는 폭력을 멈추었고, 그제야 어머니도 땅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의 이마에는 상처가 생겨있었고 아직 그 상처를 당사자는 모르는 듯 했다.“유진아, 간호사를 불러줄래? 아니면 여기 벨 좀 눌러줘.”조건웅의 말을 듣고 심유진이 병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조건웅의 아버지가 그녀를 가로막았다.“넌 병실에 있어, 아무데도 못 가!”그는 자신의 아내가 며칠간 심유진을 여기로 끌어오려고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병실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다.“간호사!”곧 간호사가 뛰어왔다.땅바닥에 누워 있는 여성을 보고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보호자분 왜 이러고 계세요?”간호사는 바닥에 앉아있는 그녀를 일으키려고 했다.조씨의 아버지는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간호사를 보았다.“몰라, 갑자기 쓰러지더니 이러네.”심유진은 간호사를 도와 그녀를 일으켰다. 조씨의 어머니는 방금 전에 있던 격렬한 다툼으로 다시 열이 났다.“열을 다시 재야겠네요.”“아무래도 몸이 뜨겁죠?”간호사는 체온계로 열을 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39.5도까지 올라갔네요. 일단 열을 내리는게 급선무이니, 얼음주머니를 여기 대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링거도 다시 맞아야겠어요.”’간호사가 얼음주머니를 가져왔지만 조씨 아버지는 받지 않았다.“난 담배 하나 태우고 와야겠어.”조씨 아버지는 자기 아내가 아프다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그의 무책임한 행동에 심유진도 그냥 가버리고 싶
조건웅의 병실에서 나온 심유진은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저기요, 조건웅 씨 보호자분!”심유진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여기 이거.”심유진은 명세서라고 적힌 종이를 바라보았다.“이거 납부하셔야 해요.”“백 만원……?”“예, 저기 코너 돌면 창구가 있는데 거기서 납부하시면 됩니다.”“근데 간호사님.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랑 저 남자는 아무 관계가 아니에요. 이 돈은 저 남자 부모님한테 받으세요.”“예? 환자 아내분 아니신가요? 전에 환자 보호자분께서 아내분이라고 하시던데?”심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아니니까 저쪽가서 받으세요.”간호사는 민망한 듯 명세서를 받아들고 연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죄송해요. 민폐를 끼쳤네요.”“충분히 오해 할만한 상황이었어요. 괜찮습니다. 근데 조건웅 왜 저러고 있는 거죠? 확실히 어디가 아픈거예요?”“척추외과에서 담당하고 있는 걸 보니 척추신경이 손상된 것 같아요. 회진 돌 때 의사선생님께서 어쩌면…… 못 걷게 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아……”간호사는 조건웅이 있는 병실을 힐끔보더니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사실 환자분도 불쌍해요. 결혼했다고 하던데 부인은 한번을 들여다 보지 않고, 부모라는 두 사람은 매일 저렇게 싸우고…… 같이 병실 못 쓰겠다고 다른 병실로 옮겨달라는 환자들이 많아서 저희도 엄청 고생했어요.”“아, 예……”심유진은 간호사의 말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못 걷는다라…… 설마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거야? 평생 책임지라고?’우정아를 언급했을 때 조씨 어머니의 태도를 보면 교통사고의 원인이 우정아이든지, 아니면 우정아가 조건웅이 평생 불구로 산다는 것을 듣고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던지 둘 중 하나가 분명했다.‘평생 장애 안고 살아야 할 아들 불쌍해서 나를 갖다 붙이겠다…… 저것들을 사람이라고……’**조씨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고나서 병실로 돌아왔을 때 심유진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조씨
[네. 있어요.]심유진은 문자를 보고 갸우뚱했지만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목요일은 그녀가 당직을 서는 날이었는데 그 때문에 금요일 아침부터 토요일까지 연이어 쉴 수 있었다.[다행이네요. 그럼 금요일에 나랑 저녁 파티 좀 같이 가시죠.][대구로 와서 친구도 없고, 이번에도 혼자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서 그래요. 저 좀 살려줘요 심 매니저!]심유진은 그의 문자를 보고 한참을 고민했다.여형민는 그저 평범한 변호사였더라면 심유진도 별 생각없이 파티에 같이 가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CY 그룹의 대주주다. 그가 말한 파티는 보통의 파티가 아닐 것이 분명했다.[근데 제가 괜히 가서 폐만 끼치는 건 아닐까요?][다들 내가 아는 사람이라 괜찮아요.][그래도 부담스러운 자리라……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다들 안경 쓴 너드남이니까 걱정말아요. 게다가 내 파트너로 가면 술 마실 필요도 없고 그냥 파티만 즐기다가 오면 돼요.]여형민은 심유진이 걱정하지 않도록 여러번 문자를 했다.심유진은 고민 끝에 그를 돕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녀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요. 그럼 드레스코드가 따로 있나요?][걱정말아요. 파티 전에 드레스랑 헤어 메이크업도 다 예약했으니 시간만 비워둬요.][네. 알겠어요.]심유진은 답장을 마친 후 핸드폰을 내려두고 일을 하기 위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조건웅이 부모를 설득하는데 성공한 건지, 조건웅의 어머니가 호텔 로비에 이틀 내내 나타나지 않았다. 심유진은 이제부터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홀가분했다.목요일 당직을 선 심유진은 아침에 집으로 돌아와 오후 3시까지 잠을 잤다.잠을 자고 일어난 심유진은 여형민의 문자를 확인했다.[파티에 음식이 있긴한데, 나랑 같이 다니느라 못먹을 수도 있으니 일단 배를 채워둬요.]그녀는 그의 문자를 보고 라면을 끓였다.‘이따가 드레스를 입을 텐데 라면은 좀 과한가……’그녀는 라면을
조수석 창문이 내려오자 심유진은 허리를 굽혀 안쪽을 보았다.“어…… 허 대표님?”그녀는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허 대표님이 여기에는 무슨 일로……”“여형민, 그 사람이 잠시 일이 생겼다고 해서 내가 대신 왔어.”“아……”그녀는 자기가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랐다.허태준의 옆에 앉자니 민망하고, 뒷자리에 앉자니 그를 기사 취급하는 것 같아서 그가 불쾌할까 걱정이 됐다.“뭘 기다리는 거야?”허태준은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고 짜증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아니에요!”심유진은 하는 수 없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다행히 허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형민이라도 같이 있었으면 분위기가 좀 괜찮았을 텐데, 조용한 차에 둘 만있으니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30분이 지날 무렵. 차는 파르비엥 백화점 앞에서 멈추었다.“내려.”허태준이 안전벨트를 풀었다.파르비엥 백화점은 젊은이들이 많은 곳으로 프랑스 풍의 독특한 건물 형태를 지녔으며, 그 때문에 주말 평일 할 것 없이 웨딩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붐볐다. 그래서 각종 사진관, 조형작업실, 헤어메이크업 샵 등이 즐비했으며 아티스트들이 많이 탄생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허태준은 그녀를 데리고 ‘V 스타일’이라는 샵에 도착했다.‘여기는 비비안 왕이라는 유명 패션 스타일리스트가 운영하는 곳 아닌가?’그녀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동경의 눈빛으로 V스타일을 지나쳤다.옷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만큼 사악한 가격으로 그녀는 엄두도 못내는 샵 중에 하나였다.“어서오십시오. 두 분 예약은 하셨겠지요?”“여형민.”두 사람을 맞이하던 사람이 여형민이라는 이름을 듣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여기로 오십시오!”두 사람은 중앙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는 화려한 조명과 함께 비비드한 색상의 옷들이 가득했다. “비비안이 두 분을 기다리고 있어요.”샵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두 사람의 뒤에 섰다.심유진은 허태준 뒤에서 걸으며 샵 여기저기를 관찰했다.3층은 통유리로
허태준의 말에 비비안과 심유진 모두 당황했지만, 비비안이 심유진보다 빠르게 반응했다.그녀는 심유진을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제가 엄선해서 고른 드레스들부터 보러갈까요? 그래야 헤어나 메이크업하기 편할 테니까요. 드레스들은 자체 제작한 것도 있고 샤넬이나 루이비통 등 브랜드 제품도 있어요. 다들 한정판 드레스니 파티에서 주목받기 딱 좋아요. 마음대로 골라보세요.”“네……. 좋아요.”심유진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스타들도 입기 힘든 V스타일의 드레스. 심지어 탑 중에서도 가장 탑급의 연예인들만 이곳에서 헤어메이크업을 받는다는데…… 이곳에서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을 하게 될 줄 알았겠는가.“저기…… 비비안 씨”“네?”“정말로 아무거나 골라도 되는 건가요?”“물론이죠! 가운데를 기준으로 왼쪽은 고전이고 오른쪽은 신상품이에요.”“아 그렇군요.”심유진은 웃음이 세어나올까봐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여형민 씨는 여기 앉아 기다리시겠어요? 아니면……”허태준은 비비안의 말을 가로챘다.“같이 고르죠.”심유진은 몸을 흠칫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당신의 미적감각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심유진은 허태준의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났다.그녀는 허태준에게 ‘방금 안 예쁘게 꾸며달라고 한 사람이 제 미적감각을 의심한다고요? 이상한 옷을 골라주려고 그러는 거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그럼…… 좀 도와주세요.”심유진은 여러 옷들을 몸에 대보고 거울에 비춰보았다. 다들 고급스럽고 예뻤지만 평소 이런 드레스를 잘 입지 않는 심유진은 어떤 스타일이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러나 허태준은 달랐다.그는 드레스를 쭉 보더니 딱 한 개를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우선 이것부터 입어보지 그래.”심유진이 피팅룸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서우연 씨, 지금 3층은 올라가실 수 없어요. 2층에서 옷을 고르시는 게 어떠세요? 모두 신상품에 협찬도 안나갔던
하이힐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발걸음이 그자의 다급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이윽고 계단 코너 쪽에서 머리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비비안!”다급한 부름 소리에 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비비안은 다년간 연예계 활동을 한 탓에 눈치가 매우 빨랐다. 그녀는 허태준의 표정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곧바로 계단 입구로 달려와 서우연을 막아섰다.“우연 씨 왜 얘기도 없이 그냥 찾아오셨어요?”그녀가 아리송한 말투로 물었다.서우연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나 원래부터 자주 얘기 없이 찾아왔잖아요? 하지만 지금처럼 직원에게 입구 컷을 당한 건 처음이네요.”그녀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비비안 앞에서는 조금 전 직원을 대하던 횡포와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퉁명스러운 말투로 불평을 늘어놓을 뿐이었다.비비안은 다정하게 그녀의 팔을 감싸 안더니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오늘 한 손님께서 3층을 통째로 빌리셨거든요! 먼저 아래에서 대기해 주세요. 이쪽 메이크업 끝마치면 곧바로 해드릴게요, 네?”“안 돼요.”서우연이 말했다.비비안의 표정이 굳어지자 그녀는 태도를 바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참석해야 할 파티가 있거든요. 7시 시작인데 늦어도 6시 반엔 이곳에서 출발해야 해요. 알잖아요, 매번 메이크업에만 두세 시간 소요되는거...”비비안과 서우연은 여러 번 합작한 덕에 꽤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서우연의 인지도도 꽤 높았기에 비비안은 섣불리 관계가 틀어질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게다가 여형민... 비록 말수가 없었지만 내뿜는 카리스마만으로도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비비안은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방안을 생각해 냈다.“너무 급한 상황이라면 저쪽 손님과 한 번 얘기해 볼게요. 먼저 3층에서 드레스를 골라 피팅하고 계세요. 메이크업은 아만다가 맡아서 해줄 거예요, 어때요? 아만다 실력도 우리 샵에서 제 버금이에요. 전에 많은 셀럽의 메이크
비비안은 이토록 센 고집을 가진 사람을 만날 줄 미처 몰랐다.그 느낌이 매우 별로였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약속을 먼저 어긴 사람은 그녀였기 때문이다.“죄송합니다, 여형민 씨. 지금 바로 말씀 전하겠습니다.”그녀는 허리 숙여 사과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그녀가 가자마자 누군가 노란색 커튼을 열고 나왔다.심유진이 고개를 내민 채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비비안 씨~”하지만 그녀는 소파에 앉아있는 허태준밖에 발견하지 못했다.“비비안 씨는요?”그녀는 의아한 말투로 허태준에게 물었다.“조금 번 분명 비비안 씨 목소리가 들렸는데.”“일 보러 잠깐 자리 비웠어.”허태준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갔다.“무슨 일 있어?”그는 그녀의 앞에 멈춰서더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오늘 메이크업 받으러 오기로 한 탓에 심유진은 아직 생얼 상태였다.이토록 가까이 서 있으니 허태준은 그녀의 솜털과 오른쪽 귀 뒤에 있는 빨간색 점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녀의 하얀 피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심지어 귓불도 매혹적인 핑크빛을 띠고 있었다.너무... 물어버리고 싶었다.순간 떠오른 생각에 허태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핥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음...”심유진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자신의 생각을 말할지 말지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비비안 씨가 언제 올 거란 얘기는 했나요?”그녀가 물었다.“아니.”허태준은 여전히 그녀의 귓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온갖 낯부끄러운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귓불을 깨문 채 계속 빨아들이는 모습이었다.그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호흡도 따라서 거칠어졌다.“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심유진이 도로 커튼을 닫으려고 하는데 한 손이 나타나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마음은 복잡해도 허태준은 애써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비비안 씨가 언제 올지 아무도 몰라.”“아...”심유진은 입술을 꽉
허태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빛에서 빨간 뭔가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혹시 지퍼에 낀 머리카락 봤어요?”심유진의 물음이 그의 생각을 멈추게 만들었다.허태준은 두 눈을 깜빡이더니 잡생각을 떨쳐내고 고개 숙여 지퍼를 확인했다.심유진의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흰색 지퍼에 끼어있었다.“아플 수 있으니까 좀 참아.”허태준은 목이 마른 탓에 한껏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한 손으로 지퍼 꼭대기를 잡은 뒤 두 지퍼를 가지런히 놓고 다른 손으로 지퍼를 아래로 내렸다.그의 행동은 매우 부드러웠고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것 같았다.심유진은 실수로 거울로 그의 얼굴을 봤다가 깜짝 놀라 굳어버리고 말았다.지금 이 시각 허태준은... 그녀가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 뭔가 달랐다.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쿵 뛰기 시작하더니 곧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심유진의 귓가에는 오로지 자신의 심장소리밖에 들리지 않았고 쿵쿵 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뒤흔들었다.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숙여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허태준은 순조롭게 지퍼를 내린 뒤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빼냈다.“아파?”그가 물었다.“안 아파요.”심유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목을 틀자마자 두피가 걸린 탓에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뱉었다.허태준은 가볍게 피식 웃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바보.”심유진은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지퍼가 열리자 그녀의 뒷등이 허태준 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그는 어렴풋이 그 촉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단결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우면서 매혹적이었다.심유진은 한참 동안 아무런 기척이 없는 것을 느끼고 긴장한 말투로 물었다.“됐어요?”“잠시만 더 기다려.”허태준이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그는 두 손가락으로 지퍼를 눌러 위로 올렸다. 그 과정에 중지가 그녀의 등을 살짝 스쳤는데 그 촉감은 마치 거위털처럼 두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실수로 닿은 스킨쉽인 걸 알면서도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