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원의 완강한 태도에 우정아는 어쩔 수 없이 노선을 틀었다.“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제발 저를 들여보내 주세요! 정말 생사가 걸린 중대한 일이라니까요? 오늘 꼭 삼촌을 만나야 해요. 저 정말 죽어요!”우정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경비원에게 애원했다.경비원은 그런 우정아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규정은 규정이기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우정아는 들고 있던 가방을 경비실에 던져넣더니 경비원에게 다가와 큰 소리로 말했다.“정말 빡빡하게구네! 가방 안에 내 핸드폰, 지갑, 신분증이 다 들어있다고! 됐지? 나 진짜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니까?”경비원은 그녀의 가방을 집어와 다시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죄송하지만, 규정은 어길 수 없습니다.”마침 심유진의 차 뒤로 다른 차가 왔다.“빵빵—”심유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숨만 푹 내쉬었다.심지어 경비원은 우정아에게 붙잡혀서 심유진 뒷차에게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잠시 후 심유진의 백미러에 한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그 남자는 경비실과 심유진의 차 사이에 멈춰 섰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냉담한 목소리에는 짜증이 많이 섞여 있었다.‘저 목소리는……’심유진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허 대표님, 오셨습니까!”경비원은 경직된 표정으로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우정아 역시 허태준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어떻게 당신이?!”“여기서 이렇게 뵙네요."허태준의 입꼬리가 한쪽만 싱긋 올라갔다.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 경비원이 허태준에게 다가가 물었다.“두 분 서로 아는 사이십니까?”“그렇다고 볼 수 있죠.”허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우정아는 이때다 싶어서 허태준의 팔에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여기 허 태표님하고 나하고는 잘 아는 사이라고! 이제 그만하고 대문을 열어주지?”허태준은 우정아의 태도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그녀를 밀어냈다.경비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더니 허태준에
허태준의 단호한 거절에 우정아의 걸음이 멈췄다.‘저 남자 뭐야? 외투까지 벗어줘 놓고는?’우정아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허태준을 보았다.“왜 그러시는 거죠? 이 추운 날……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한 것도 아니…….”그러나 허태준의 눈에는 그의 앞에 서있던 차가 점점 멀어지는 것만 보였을뿐 우정아가 묻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다. 심지어 여형민의 차가 그의 옆에 다가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빵!빵!”여형민의 경적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고, 우정아는 여전히 차 밖에 홀로 서있었다.여형민은 우정아가 입은 외투를 힐끗 보고는 허태준에게 말했다“저거 엄청 비싼 코트 아닌가? 와~ 허 대표님은 저 정도 금액의 옷은 그냥 달라고 하면 주시나봐요~”“……”“대표님 역시 통이 크셔! 그럼 대표님, 연말 보너스 기대해봐도 되는건가?”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여형민을 보았다.“못 들어주겠네.”여형민은 멋쩍은 표정으로 허태준을 보았다.“에이, 허 대표 보너스는 됐고, 나중에 저런 옷들 좀 나눠줘~”“나중에 내가 내놓은 쓰레기 더미에서 몇 개 집어가시던가.”사실 허태준과 여형민은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여형민은 허태준이 심유진에게 감정이 있다는 약점을 내세워 항상 그를 자극했다.“그나저나 방금 앞에 있던 차는 심유진 씨 차 아닌가? 이야~ 대표님 심유진 씨 보는 앞에서 외투를 벗어주다니, 혹시 심유진 씨가 오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 안 되시나?”“……”허태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내가 왜 그래야 하지?”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태준을 태운 차량이 대문을 지나 들어갔다.그는 창밖을 보며 심유진을 떠올렸다.‘심유진, 어쩜 그렇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는 거니……’**허태준이 우정아를 도와주고 외투를 빌려준 장면을 본 심유진은 어딘가 모르게 답답했다.‘내가 허태준 씨랑 어쩌다 하룻밤을 보낸 건 사실이지만, 나와 그의 사이는 기껏해야 아는 사이일 뿐이니까…… 그가 무슨 일을하고,
심유진은 커튼을 걷어 바깥 동태를 살폈다.그녀의 눈에 경찰차 두 대가 들어왔고, 경찰차는 그녀가 살고 있는 동을 지나 뒷쪽으로 갔다.이십 분이나 지났을까 경찰차는 다시 그녀가 살고 있는 동 쪽으로 되돌아왔다.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핸드폰에 아파트 단체 톡방에서 어제 있었던 소란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지금 몇 시입니까? 지금 이 시간에 누가 소리를 지릅니까?][그러게요. 여자가 우는 것 같은데……][경찰 불렀습니다. 다들 조금만 참아봅시다.]심유진은 단체 톡방에 대화들을 읽다가 문득 우정아가 떠올랐다.“설마…… 우정아겠어?”그녀는 의심가득한 표정으로 단체 톡방의 대화를 천천히 읽어보았다.[아무래도 25층 사람을 찾는 것 같던데.][25층이면 YT그룹 우원정 대표?][우 대표 얼마 전에 여기 매매하고 이사를 갔잖아요? 누가 찾아온 거죠?][YT그룹 우 대표, 뇌물 수수 사건하고 횡령 건으로 감옥간 거 아니었나요?][200억 가까이 해먹었다고 하던데, 10년은 감옥에 있을 듯 하네요.][YT그룹 임원들도 싹 교체된다던데, 어떻게 되려나 모르겠네요.]심유진은 톡방 내용을 가만 보다가 머리가 지끈거려 핸드폰을 잠시 탁자에 내려두었다.우원정 대표의 횡령 사건은 심유진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사실 YT그룹의 몰락을 전혀 예상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심유진은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느끼고 헛웃음이 났다.십여 분 정도 흘렀을까. 그녀의 전 시어머니가 호텔로 그녀를 찾아왔다.전 시어머니는 전과는 다르게 호텔 로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심유진이 나오자마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심유진은 깜짝 놀라 뒷걸음을 치다가 회전문 양쪽에 놓여진 나무 화분을 쓰러뜨릴 뻔했다. 그녀의 전 시어머니는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손목을 꽉 움켜줘고는 놓지 않았다.“유진아! 우리 건웅이 좀 살려줘!”심유진은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있었다.“아프니까 이거 먼저 놓으세요!”조건웅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조건웅의 어머니는 세번이나 머리를 조아렸고, 처음보는 광경에 심유진도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조건웅의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보았다.“유진아 건웅이 병원에 있어. 한 번만 가서 들여다 봐……”심유진은 팔에 닭살이 돋았다.‘결혼 생활 내내 이름 한 번 따듯하게 불러준 적이 없으면서 자기 필요할 때만 이러네.’그의 어머니가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을 보니 조건웅이 어떤 병에 걸렸든 큰병에 걸린 게 틀림없을 것이다. ‘설마 뭔 불치병에 걸린 거 아냐? 나보고 골수 이식같은 걸 부탁하려고?’심유진은 이미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싶지도 않았고 빨리 이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게다가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을 힘들게 했던 전 시어머니의 부탁에 기가 차고 기분이 언짢았다.“제가 왜 거길 가요? 안 가요.”심유진이 거절하자 그의 어머니가 그녀의 허벅지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유진아! 제발 부탁이야! 이전에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은 다 잊고 딱 한 번만 도와줘라……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빌게!”“지금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조건웅하고 저는 이미 끝났어요! 남이라니까요?”“살 맞대고 산 사이가 어떻게 남이 되니! 유진아 그렇게 모질게 굴지 말고…… 한 번만 딱 한 번만 부탁하마.”“조건웅 지금 우정아랑 살고 있는 거 아닌가요? 왜 저한테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우정아한테 가보세요.”“그 계집 이름은 꺼내지도 마!”우정아 얘기에 그녀의 안색이 바뀌더니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소란에 지나가는 행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행인들은 자초지종을 모르고 심유진을 손가락질했다.“저 여자는 어떻게 된 거야? 노인더러 무릎을 꿇게 하다니.”“그러게! 딱 봐도 엄마 뻘인데 말이야.”“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쯧쯧.”심유진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몇 사람은 핸드폰을 들어 두 사람을 촬영하
심유진은 조건웅의 어머니 손에 든 수십 장의 종이를 보았다.맨위에 적힌 금액만 200만원이 넘었다.‘저 수많은 종이를 다 합치면……’심유진의 굳은 표정을 본 그의 어머니는 큰 소리로 또 울부짖기 시작했다.“간호사가 하는 말이 이 돈을 안 내면 퇴원해야 한다고 하더라, 아픈 사람을 어떻게 그냥 집으로 데려가…… 옛정이 있기도 하고 너희는 부부였잖아. 남편이 죽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볼 거야?”그의 어머니가 울며불며 심유진에게 매달리자 수납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심유진에게 꽂혔다.심유진은 민망함과 불쾌함에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 몰랐다.‘이 집안 사람들하고 얽히는 게 아니었어. 어쩜 이렇게 뻔뻔하지?’그녀는 그의 어머니 손에 쥐어진 종이를 낚아채 총 금액을 확인했다.대충 계산을 해보니 700만원 정도였다. 심유진에게 700만원은 그렇게 큰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건웅에게 쓰이는 돈이라고 생각하니 아까워서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불우한 곳에 기부를 하고 말지 조건웅에게 700만원을 쓰다니.’그녀는 이 돈을 꼭 돌려받아야만 했다.“700만원 빌려드릴게요. 대신에 차용증을 하나 쓰죠.”그의 어머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나보고 차용증을 쓰라고?”심유진은 어리둥절해 하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건데 당연히 차용증을 써야죠.”“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누가 떼먹는다고 해?”“싫으세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전에 조건웅이 저한테 사기쳐서 집 가져간 것도 모르세요? 아 잘 됐네. 그 집 팔아서 갚으면 되겠네요.”그녀는 남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다 들리게 일부러 성량을 높였다.“네가 감히……”“그럼 제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네요. 가볼게요.”심유진이 휙 몸을 돌리자 그의 어머니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의 코트 가락을 잡았다.“기다려! 그래 써줄게 차용증 써준다고!”**심유진은 항상 가방에 메모지와 펜을 지니고 다녔다.그의 어머니가 차용증을 쓰고
심유진은 여형민에게 전화로 자세하게 상황 설명을 했다.“심 매니저, 깜짝 놀랐잖아요. 다짜고짜 전남편이 죽으면 내 집과 돈은 어떻게 되는거냐고 물으면 어떡해요!”“아…… 제가 죽이겠다는 건 아니고, 지금 이런 상황이라. 놀라셨다면 미안해요.”“지금까지 맡은 이혼 소송 중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긴 한데…… 아직 재산 분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경우 배우자 사망 시에 재산 분할에 관해서는 판례가 없는 거로 알고 있어서요. 일단 그 상황이 온다면 판사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겠죠. 하지만 확실히 불리할 겁니다.”심유진은 다소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변호사님 전 왜 이렇게 운이 없는 거죠? 똥 밟았네요.”“아무튼 전 남편이 죽지 않길 기도해야 겠네요. 전 남편 가족들이 심 매니저한테 하는 짓을 보면 사망 후에는 더 들러붙겠어요. 뻔뻔한 사람들이라면 자식이 죽었다며 어쩌면 심 매니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도……”심유진은 여형민의 말에 100% 동의했다.**다음 날.조건웅의 어머니가 다시 로열 호텔로 심유진을 찾아왔다.경비원은 어제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심유진에게 인터폰을 통해 상황을 알렸고, 그녀는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조용히 호텔 뒷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생각보다 훨씬 더 끈질겼다. 그녀는 심유진을 만나지 못하자 매일 호텔 로비에 살다시피 했다.**태풍의 영향으로 도시는 물에 잠겼고 많은 사람들이 운전을 포기하고 지하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어머니는 호텔 로비에 출석했다.그의 어머니는 호텔 로비 구석에 앉아 자신의 몸을 숨겼다. 혹시 자신이 밥을 먹는 시간에 심유진이 도망이라도 갈까봐 도시락까지 싸오는 정석을 보이며 심유진을 스토킹하다시피 했다.호텔 로비에서 늙은 노인이 구석에서 도시락을 먹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심유진은 경비원을 통해 구질구질한 소식을 전해들을 때마다 기분이 무척 안좋았다.“심 매니저님, 그 나이드
조씨의 어머니의 상태를 본 의사는 감기 몸살같다며 해열제와 몸살 약을 처방했고, 영양제 링거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심유진이 약국에서 약을 받아 오자 간호사가 환자가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안된다며 옷을 갈아입히라고 했다. “보호자 분, 여기 환자복 드릴테니 이거로 갈아입히시면 됩니다.”“네? 제가요?”그녀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조건웅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그의 휴대전화는 여전히 꺼져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조건이에게 연락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조건이가 자신의 번호를 차단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심유진은 환자복을 들고 두리번거리다가 옆침대 환자의 간병인에게 2만원을 주고 옷을 갈아입혀달라고 했다.**링거를 세번이나 갈았고, 두 시간이나 흘렀지만 조씨의 어머니는 아직 깨지 않았다.마지막 링거를 맞고 간호사가 와서 주사를 뽑자 조씨의 어머니가 깨어났다.정신이 든 그녀는 다짜고짜 심유진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깜짝 놀란 간호사가 뒷걸음질 치며 선반에 놓인 보온병을 건들였고 보온병이 떨어지면서 뜨거운 물이 간호사의 몸에 튀었다.옆 침대의 환자는 그 상황을 보고 급히 호출 벨을 눌렀고, 간호사 한 명이 들어와 이 광경을 보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병원에서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뜨거운 물에 데인 간호사는 황급히 병실을 나오며 들어온 간호사에게 자신의 임무를 넘겨주었다.“저기 두번째 침대 환자 바늘을 뽑는데 움직여서 제대로 처리를 못했으니, 나 대신 처리해주세요.”심유진은 민망함과 난처함 그리고 간호사와 다른 환자들에게 미안해서 얼굴이 붉어졌다.조씨의 어머니 손등에서는 피가 흘러내렸고, 이 상황을 그녀는 모르는 듯 씩씩 거리며 심유진을 노려보았다.그녀는 간호사가 지혈을 하려고 했지만 피했다.“날 좀 내버려둬!”간호사는 빠르게 바늘을 제거하고 알코올 솜을 심유진에게 주었다.“보호자분, 여기 꼭 눌러 지혈해 주세요.”심유진이 알코올 솜을 건네받기도 전에 시어머니가 두 발을 침대 아래로
소리를 지른 것은 옆 침대의 환자였다.그녀는 구석으로 몸을 움츠리며 부들부들 떨면서 조씨의 어머니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그거 내려놓으세요!”조씨의 어머니은 보온병이 깨지면서 생긴 유리병 조각을 쥐어 자신에 목에 갖다대고 있었다.“건웅이를 만나주지 않으면, 여기서 콱 죽어버릴 거야! 넌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게 되겠지?”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심유진을 노려보는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결연한 표정이었다.심유진은 그의 어머니의 충동적인 행동에 놀랐지만, 이내 침착해졌다.‘저러는 거 한두번도 아니고…… 매번 자기 필요할 때마다 저렇게 목숨걸고 협박하는 건 변하지 않았군. 그래…… 속는셈치고 한 번 가주자.’**조건웅은 이미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나 현재 척추외과 일반 병실에 입원 중이었다.3인실이었지만, 조건웅을 포함한 두 명만 있었다.심유진이 들어섰을 때 조건웅의 아버지는 빈 침대에서 큰소리로 코를 골고 있었고, 조건웅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드르륵-”문 열리는 소리에 조건웅은 문 쪽을 보았다.“심유진……?”조건웅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심각했다.박박 민 머리에 칭칭 감겨있는 붕대, 창백한 얼굴색 그리고 흐린 두 눈.보아하니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조건웅의 눈에는 곧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는 심유진이 여기까지 와준 것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흘렸다.“유진아……”그는 잠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심유진은 병실 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뒤돌아 나가고 싶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어서 들어가지 않고 뭐하니?”그녀가 계속 움직이지 않자 조건웅의 어머니가 그녀의 등을 떠밀어 병실로 몰아넣었다.조씨의 어머니는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 병실 문을 잠갔다.“아들 목 안 말라?”“조금……”조건웅은 대답을 하면서도 시선이 심유진에게 꽂혀있었다.심유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언제라도 도망가기 위해 가방을 꼭 움켜쥐었다.그의 어머니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