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심연희는 그의 카리스마에 깜짝 놀랐는지 조금 전과 달리 흥분을 가라앉혔다.“그쪽 상황 체크할 수 있게 연락 끊지 마.”하지만 허태준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휴대폰 너머로 쾅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윽고 심연희는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악! 들어왔어요!”심유진은 깜짝 놀라 허태준의 당부는 잊고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화장실로 뛰어가려고 했다.“우리 빨리 가서 구해요!”하지만 이윽고 허태준이 그녀를 도로 잡아당겼다.허태준은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어깨를 누르더니 허리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내 말 들어, 지금 바로 나가. 심연희 씨 아무 일 없게 할게.”그는 심유진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그의 말에 그녀의 심장은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허태준과 여형민은 화장실로 돌아왔다.왼쪽 문은 이미 열렸고 입구를 지키는 사람은 두 명밖에 남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죄다 안으로 들어갔다.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들은 심연희의 울부짖는 소리와 남자들의 방자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언니! 구해줘!”“언니 불러도 소용없어! 오빠라고 부르면 내가 예뻐해 줄 수도 있는데!”“오지 마! 오지 말라고! 악!”허태준과 여형민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계단을 밟았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두 사람은 인기척을 느끼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오는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허태준과 여형민이 그들 앞으로 걸어가자 그제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눈멀었어? 남자 화장실은 맞은 편에 있는 거 안 보여?”빨간 머리 깡패가 입에 담배를 문 채 짜증 난 듯 욕설을 퍼부었다.숨 막히는 전자담배 연기가 몽땅 허태준의 얼굴을 향해 뿜어졌다. 그 속에는 짙은 알코올 향도 섞여 있어 허태준은 짜증 난 듯 뒤로 물러서더니 다리를 뻗어 그를 힘 있게 걷어찼다.빨간 머리 깡패는 배를 움켜잡은 채 바닥을 굴러다니며 고통을 호소했다
“이 손 놔! 내 몸에 손대지 마!”절망에 빠진 심연희는 울부짖으며 말했다.너무 세게 운 탓에 그녀의 메이크업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핑크색 옷깃이 좌우로 찢기며 어깨가 반쯤 드러났다.대머리 깡패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부하를 보고 그는 깜짝 놀람과 동시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젠장, 당신들 누구야?!”그는 심연희를 내려놓더니 옆에 놓은 걸레를 잡고 힘 있게 허태준에게 내동댕이쳤다.“감히 내 일을 망쳐!”허태준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맨손으로 걸레를 잡은 다음 대머리 깡패가 반응하기도 전에 앞으로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대머리 깡패는 그대로 걸레와 함께 그의 앞으로 끌려왔다.대머리 깡패가 앞으로 넘어지려고 할 때 허태준이 잽싸게 옆으로 비켰다. 그러고는 다리를 들어 그대로 대머리 깡패의 오금을 발로 걷어찼다.철퍽 소리와 함께 대머리 깡패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심유진은 조심스럽게 취객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쓸데없는 싸움이 일어날까 봐 최대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려던 것이었다.여형민의 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녀는 허태준의 분부대로 모든 창문을 닫았다.그녀는 바를 나서자마자 경찰에 신고했고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차 안에서 경찰이 오기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었다.그녀는 휴대폰을 꼭 잡은 채 불안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허태준의 연락을 기다렸다.그녀의 심장은 너무 긴장한 탓에 계속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10분 정도 지나자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밤에 보는 경광등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마치 사막을 오래 거닐다가 본 오아시스처럼 심유진은 흥분한 나머지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녀는 다급히 차에서 내려 경찰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여기에요! 제가 신고했어요!”심유진이 경찰들을 데리고 퀸 바로 돌아갔을 때 1층 로비에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었고 위아래로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경찰이 한 사람을 잡고 물었다.“무슨 일이에요?”“2층 화장실에서 싸움 났어요
심유진을 발끌을 돌려 곧바로 심연희 앞으로 걸어갔다.그녀는 심연희의 팔을 붙잡더니 옷깃을 잡고 여며주며 물었다.“어때? 다친 데는 없어?”심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허태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허 대표님...”그녀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괜찮으세요?”“응.”허태준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심연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억울한 눈빛을 지어 보였다.“어떻게 된 일이에요?”경찰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심연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저 사람...”그녀는 꿈쩍하지 않고 쓰러져있는 대머리 깡패를 가리키며 말했다.“날 강간하려고 했어요... 다행히도 허 대표님께서 제때 도착하셔서...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난...”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현장 상태가 그녀가 한 말과 일치했기에 경찰도 길게 묻지 않았다.“몽땅 데려가서 사건경위서 작성해.”유일하게 따라온 여경이 나서서 그녀를 위로했다.깡패들은 허태준과 여형민에게 호되게 맞은 탓에 경찰의 부축이 있어야만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바를 나서는 길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대머리 깡패는 겁 없이 허태준을 위협하기까지 했다.“너 이 자식, 딱 기다려!”심연희는 심유진에게서 자신의 팔을 빼더니 소심하게 허태준 옆으로 다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허 대표님... 이런 일에 휘말리게 만들어서 죄송해요.”허태준은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며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괜찮아.”심연희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그녀는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립스틱이 사라지자 핏기 없는 입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경찰은 깡패들을 죄다 경찰차에 태웠고 여형민은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허태준은 뒷좌석 문을 열더니 심유진을 불렀다.“이리 와.”심유진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네?”“타.”허태준의 명령은 짧고 심플했지만 그속에
심연희는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신세만 지네요.”여형민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인데요.”심유진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의 속마음을 직접 드러내진 않았다.**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여형민은 18, 19, 20층 버튼을 순서대로 눌렀다.“...엥?”심연희는 고개를 돌려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왜 세 층이나 누르는 거예요?”여형민은 입을 꾹 다문 채 미소를 짓더니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잠시 뒤면 알게 될 거예요.”엘리베이터는 곧 18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자 여형민이 내리더니 입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안녕히 가세요, 심연희 씨.”“엥?”심연희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하지만 여형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도로 닫혔다.심연희는 또다시 심유진을 바라보았다.“여 변호사님 18층에 살아.”심유진이 그녀에게 해명을 늘어놓았다.“난 19층에 살고 허 대표님은 20층에 사셔.”“모두 이 건물에 산단 말이야?”심연희는 적잖이 깜짝 놀랐다.“아닌데!”그녀는 심유진과 허태준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두 사람 사귀는 사이 아니야? 왜 같이 살지 않는 거야?”예상치 못한 질문에 심유진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하지만 그녀가 핑계를 생각해 내기 전에 허태준이 물었다.“그럼 심연희 씨는 남자친구와 함께 살아?”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마치 알아서는 안 될 일을 발견한 것처럼 얘기했다.심연희는 곧바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저와 정재하는 모두 가정교육을 엄격하게 받아서...”그러자 허태준이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심연희 씨 뜻은 나랑 당신 언니가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거야?”“아니에요!”심연희는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했다.“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허 대표님,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띵!”엘리베이터는 마침 19층에 도착했다.심유진은 심연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심유진은 두 눈을 질끈 감더니 북받쳐 오르는 화를 꾹 눌러 담고 욕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세면대 바로 옆에 플러그가 있어. 거기서 말려.”“...응.”심연희는 얌전히 플러그를 뽑더니 드라이기를 안은 채 욕실로 들어갔다.심유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티슈로 바닥에 떨어진 물을 깨끗하게 닦았다.심연희가 머리를 말리고 나왔을 때 심유진은 이미 잠이 든 상태였다.심연희는 그녀의 침대에 올라가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그녀의 팔을 잡고 부르기 시작했다.“언니~”심연희는 심유진이 잠에서 깰 때까지 끊임없이 그녀를 불렀다.심유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짜증 난 말투로 물었다.“왜?”심연희는 깜짝 놀라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난...”그녀는 겁먹은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잠이 안 와서... 언니랑 얘기나 하려고 했지. 졸, 졸리면 그냥 자, 괜찮아.”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더니 애써 괜찮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신경 쓰지 마.”말을 마친 그녀는 곧바로 몸을 돌려 심유진을 등지고 누웠다.심유진은 심연희가 코를 들이키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 것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쉰 뒤 결국 타협하기로 마음먹었다.“무슨 얘기하고 싶은데?”그녀의 말투는 조금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언니, 그냥 자!”심연희가 다급히 말했다.“진짜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괜찮아, 나 안 졸려.”심유진은 마음과 반대되는 말밖에 꺼낼 수 없었다.“너랑 얘기하다가 잘래.”심연희는 반신반의하며 몸을 돌렸다.“진짜?”“응.”심연희는 곧바로 심유진을 껴안더니 그녀의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언니가 최고야!”“하하.”심유진은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지었다.“언니, 왜 집에 남자가 사는 흔적이 하나도 없는 거야?”심연희가 물었다.“보니까 욕실에도 온통 언니 물건뿐이던데~”“나 혼자 사는데 당연히 내 물건밖에 없지.”“그럼 허 대표님께선 단 한
7시를 조금 넘겼는데 심유진은 심연희의 부름 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통틀어 잠을 청한 시간이 두 시간도 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끊임없이 하품을 했다.반면 심연희는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생기가 넘쳤다.“언니, 빨리 와! 늦으면 싱싱한 재료를 살 수 없단 말이야!”그녀는 심유진을 끌고 힘차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마트는 채소 시장이 아니었기에 매일 8시 반에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했다.그녀들이 도착했을 때 점원은 금방 실어 온 채소들을 가게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 진열대는 텅텅 비어있었고 저울대와 카운터 앞에도 사람 하나 없었다.심연희는 입구에서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언니, 왜 8시 반부터 영업한다고 얘기하지 않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메이크업이라도 하고 나왔을 텐데!”심유진은 지친 나머지 반박할 힘도 없었다.**심연희는 점원에게 가장 좋은 닭고기와 갈비 두 줄, 그리고 약간 곁들어진 반찬을 요구했다.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메뉴를 세어보았다.“양념갈비, 목이버섯 참마 볶음에 삼계탕이면 충분하겠지?”그러자 심유진이 대충 둘러대며 말했다.“충분해.”“그럼... 언니 레시피 알아?”심유진은 순간 잠에서 깼다.“응?”심연희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내가 단 한 번도 요리한 적이 없거든, 그래서... 언니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하지만 사실이 증명해 주다시피 심연희에게 필요한 건 도움뿐만이 아니었다.그녀는 요리의 기본도 아예 몰랐다.갈비는 물에 데쳐야 하고 목이버섯은 물에 담가야 하며 탕을 끓일 때 냄비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도 몰랐다. 게다가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채소를 썰 줄도, 볶을 줄도 모를 뿐만 아니라 가스레인지를 켜는 방법도 몰랐다.뜨거운 기름이 그녀의 손에 튀는 바람에 국자까지 내동댕이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심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밀어냈다.“내가 할게. 허 대표님한테는 그냥 네가 직접 만든 음식이라고 해.”“어?”심연희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심유진은 택시 문을 닫은 뒤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걸어갔다.심연희는 그녀의 가방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방문 카드!”그러자 심유진이 말했다.“나한테 방문 카드 없어.”심연희는 단번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말투도 쌀쌀맞아졌다.“방문 카드도 없으면서 여기까진 왜 왔어? 내 우스운 꼴이라도 보려고 온 거야?”그녀의 태도에 심유진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원래 경호원에게 사정하여 심연희를 안에 들여보내려고 했지만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친구랑 이 부근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김에 나한텐 방문 카드가 없다고 얘기해주려고 왔지.”심유진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나 먼저 갈게. 허 대표님한테 다시 한번 연락해 봐. 미팅 끝났을지도 모르잖아.”“심유진 씨!”회전문이 열리자 전에 만났던 경호원이 달려 나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무슨 일로 오셨어요?”심유진은 재빨리 자본주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마침 지나가던 길이었어요.”“네?”경호원은 흠칫 놀라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럼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고마워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심유진이 대답했다.심연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심유진이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고 할 때 그녀를 붙잡았다.“언니, 여기 경호원이랑 아는 사이야?”심유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경호원이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아니에요! 저희가 심유진 씨를 아는 겁니다!”“왜요?”심연희는 의아했다.“허 대표님 명령이었거든요.”경호원은 겁에 질린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허 대표님께서 심유진 씨가 오셨을 때 길을 막으면 저희를 몽땅 해고한다고 하셨거든요.”심유진은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마음속으로 거대한 파문이 일었지만 겉으로 조금도 티 내지 않았다. 그녀는 전에 허태준이 이런 말을 꺼낸 기억이 없었다. 아무래도 경호원이 일부러 과장해서 얘기한 듯싶었다. 이렇게 생각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심연희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더욱 어두워졌다
심유진이 심연희에게 물었다.“몇인분 가지고 왔어?”음식은 모두 심유진이 만들었기 때문에 심연희는 자신의 진심 어린 마음을 담고자 직접 포장했다.포장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심유진은 그녀에게 맡기고 확인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녀가 대체 몇 인분을 준비했는지 알 수 없었다.심연희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시선을 회피한 채 불안한 말투로 물었다.“허 대표님 것만 준비했어, 왜?”“아무것도 아니야.”심유진도 심연희가 생각이 짧았다고 나무랄 자격이 없었다. 여형민이 따져 묻지 않았다면 그녀도 이부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먼저 올라가. 허 대표님 사무실은 69층에 있어. 도착하면 직원한테 구체적인 위치 물어봐. 난 나가서 여 변호사님한테 줄 음식을 사 올 테니까. 어제 많이 도와주셨잖아.”심연희는 그제야 여형민을 떠올렸다.“아! 여 변호사님!”그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고뇌에 빠진 듯 연기하며 말했다.“내가 왜 이 사실을 잊고 있었지!”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그녀는 순간 표정이 돌변하여 심유진에게 말했다.“그럼 수고해 줘, 언니~”그러고는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비록 심연희가 같이 가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이대로 심연희를 상관하지 않고 자리를 뜨면 여형민에게 미움을 사게 될 상상까지 하게 되었다.휴대폰 진동이 울려 확인해 보니 여형민이 보낸 문자메시지였다.[설마 정말 날 잊은 건 아니죠?]말 한마디에 심유진은 그가 얼마나 실망했을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결국 마음이 약해져서 대답했다.[아니에요.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 사무실 몇 층이에요?]**심유진은 옆 건물 스타벅스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산 다음 69층으로 올라갔다.여형민의 말에 의하면 그가 대구에 새로 세운 변호사사무소와 CY 그룹 대표 사무실은 같은 층에 있지만 단독으로 떨어져 있다고 한다. 두 사무실을 이어주는 문은 오직 여형민과 허태준만이 열 수 있다고 했다.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