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는 이연이 보낸 주소에 따라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겁먹은 듯한 모습으로 산부인과 앞의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이연이 눈에 들어왔다.산부인과 앞이 다른 여자들은 모두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함께였다. 그와 달리 외톨이처럼 혼자인 이연의 모습이 무척 불쌍해 보였다.한동안 보지 못하던 사이에 이연은 심할 정도로 야위었다. 원래 동글동글, 통통하던 얼굴이 지금은 날카롭게 변했다. 눈을 거의 다 가린 앞머리 때문에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일자로 바짝 오므린 입술이 지금 어둡게 가라앉은 그녀의 기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던 원아는 자신이 이연의 상처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고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시큰거려 오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원아는 이연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또박또박, 분명한 음성으로 약속했다.“잘 들어. 내가 너한테 미안해. 나를 원망해도 좋아…… 하지만 아이는 잘못 없어. 지울 수 없다면 낳아야지.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키우는 것 도와줄 게. 내가 앞으로 아기의 대모가 되는 거야. 어때?”텅 비어 있던 이연의 눈에 조금은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원아, 난 널 원망할 생각 없어. 내가 너무 부주의했던 거야.
수성 아파트.“연아, 잠시 여기에서 지내. 여기 집세는 내가 이전에 이미 일년치를 지불했어. 임대 기한까지 반 년 정도 더 남았는데, 임대료 환급도 안돼. 그래서 지금 집만 빈둥빈둥 놀고 있는 셈이야.”원아가 이연을 잡고서 말했다.“원아,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나 혼자서는 정말 어째야 좋을지 몰랐을 거야.”이연은 방 하나와 거실 하나로 된 집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집 내부의 인테리어가 아주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마음 깊숙이 원아를 향한 고마움이 올라왔다.이제 그녀의 어머니 황신옥의 관심은 모두 오빠
“어머, 이게 누구야. 원아 씨 아냐? 남자한테 안겼지 않았어? 듣자하니, 그 부호가 별장 데려가서 호강을 시켜 준다며. 평생 여기 돌아올 리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찌 이리 빨리 돌아왔대? 설마 그 부호한테 차인 거야? 하, 그러게, 내가 뭐랬어. 여자가 안겨서는 끝이 좋을 리가 없지. 기어코 말 안 듣더니. 남자는 모두 새 걸 좋아하지, 오래된 건 싫어해. 원아 씨가 부귀할 운이 없으니, 참새가 봉황이 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지, 뭐.”원아는 정말 이 두씨 아주머니가 싫었다.그녀가 나이를 내세워 큰 소리 치는 게 너무 싫었다
원아는 이연을 위해 푸짐한 점심 상을 차렸다.식사를 마친 후, 그녀는 설거지를 하고, 주방 안팎까지 깨끗하게 닦았다.그런 뒤, 그녀는 다시 인근의 시장에 가서 채소들을 사다가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말 그대로‘눈으로 미끄러운 겨울’에 이연이 외출하기는 불편할 터였다. 그래서 육류와 채소들로 냉장고를 모두 채운 후, 이연이 음식을 하기 편하도록 모두 준비했다. 원아는 자신을 이렇게나 생각하니, 이연은 울컥해서 뭐라고 말해야 좋을 지 몰랐다.“어차피 회사도 곧 휴가이니, 그 동안은 더 이상 출근 안 해도 돼. 네가 연가를 낼 수
이문기는 아픈 마음으로 서지선을 쳐다보았다.예전의 그 청렴, 고결하고 도도하던 여자가 이 지경까지 타락했을 줄은 몰랐다.그를 미워해서. 그와 맞서기 위해서. 무엇보다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그가 맡는 사건이라면, 서지선은 무조건 끼어들어 방해했다. 심지어 인의, 도덕도 저버리면서까지.이번에 그녀는 이혜진과 원선미 모녀를 위한 무료 변호에 자원했다. 단지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몇차례의 소송을 진행하며, 이문기는 서지선이 성장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지금 그녀는 확실히 노련해졌다. 노련하면서 교활해졌다. 관건은
법원 정문을 나선 뒤, 새하얀 세상을 바라보니 원아의 눈이 밝아졌다.밝게 내리쬐는 바깥의 여전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막 왔을 때처럼 더 이상 침울하지 않았다.이혜진과 원선미 두 모녀는 마침내 응분의 처벌을 받았다.원아의 허리를 감싸 안은 문소남은 그녀가 계속 눈썹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리 넋을 놓고 있지?”“이혜진과 원선미가 제1고등법원에 2차 항소를 한다면, 재판 결과가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요.”원아가 한숨을
원아는 그제야 문득 정신이 들었다. 오늘은 근무하는 날이었는데, 이혜진 모녀 재판 때문에 재차 휴가를 낸 것이었다.난처했다. 원아는 T그룹에 입사한 지 짧은 몇 달 사이에 연차 일수가 부서에서 제일 많았다.설계부서로 돌아가면 팀장님이 또 난리 치실 텐데…….문소남은 눈을 반짝거리며 원아를 응시했다. 작은 얼굴이 다양한 표정들로 바뀌는 것을 보니, 무척 사랑스러웠다.“자꾸 쳐다보지 마요. 네?”원아는 문소남이 내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뜨거운 눈빛에 약간 긴장이 되었다.더욱이 엘리베이터 같은 좁은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