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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Penulis: 꽃길
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혔다. 분명 그가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이게 질투인 걸까?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유형은 내 손을 놓았고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윤지원, 내가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복수하려는 거야?”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으니까.

“아니 난...”

설명하려는 내 말은 도중에 끊겼다.

“너 정말로 그 녀석을 만졌어? 정말로 그곳을?”

강유형의 턱이 굳어졌고 그의 눈에는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무서운 빛이 서렸다.

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역시 질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순간 내 마음속의 불편함이 많이 사라졌다. 그가 나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만약 그가 나를 단순히 여동생이나 친구로만 여겼다면 내가 다른 남자를 만졌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야.”

나는 다시 한번 부인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태혁이 안에서 나왔고, 나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변태 아줌마, 또 우리 매형 꼬시려고?”

사람 성격 쉽게 안 변한다더니 정말 그랬다.

조태혁이 나를 바라보는 그 비열한 표정은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나 싶을 정도였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남매를 보면서, 특히 조나연의 그 순수한 모습과 그녀가 강유형을 만졌던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손을 들어 강유형의 팔을 감쌌다.

하지만 그의 근육이 순간 굳어지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또 거짓말이지.”

조나연이 조태혁의 귀를 꼬집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우리 앞에 서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유형 씨, 지원 씨, 정말 미안해요.”

“네 잘못 아니야.”

강유형이 조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아무도 널 구해주지 않을 거야.”

“흥.”

조태혁이 불만스럽게 강유형을 흘겨보았다.

“당신이 누군데요? 뭔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우리 새 매형이 되겠다면 말 들을게요.”

“조태혁!”

조나연이 꾸짖으며 그를 한 번 더 때렸고 조태혁은 피하며 말했다.

“누나, 저 사람이 누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안 그러면 왜 밤낮으로 누나 곁을 지키고 돌봐주겠어?”

나는 강유형의 팔을 감싸고 있던 손을 순간 움츠렸다. 요즘 그가 밤낮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회사에서도 자주 반나절씩 자리를 비웠던 이유가 바로 이 여자 때문이었구나...

그녀는 그의 친구의 아내였고, 그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돌봐주는 건 잘못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매일 돌봐줄 필요가 있을까?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정도로?

“무슨 소리야.”

조나연의 얼굴이 붉어졌고 더 세게 조태혁을 때렸다.

열일곱 살 소년의 반항기 때문인지 급하게 맞은 조태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고 조나연은 비틀거리며 한쪽으로 쓰러질 뻔했다.

순간 난 누군가에게 밀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나 넘어질 뻔했다.

내가 자세를 바로잡았을 때 나를 밀어낸 강유형이 이미 조나연 앞에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안고 있었다.

“나연아, 괜찮아? 어디 아파?”

“나... 배가 아파, 유형 씨.”

조나연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렸고 그녀의 손은 강유형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걱정 마,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 괜찮아.”

강유형의 목소리도 떨리며 당황한 듯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렸다. 강유형의 수많은 모습을 봐왔지만 이렇게 급하고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다른 여자를 위해서.

강유형은 조나연을 안고 차에 탔고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윤지원, 네가 운전해.”

나는 여전히 굳어있었고 움직이지 않았다.

“빨리 좀 해! 우리 누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 가만 안 둬!”

조태혁이 와서 거칠게 나를 잡아끌었다.

그가 나를 만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그의 뺨을 때렸다.

“만지지 마.”

조태혁의 하얀 얼굴에 순식간에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차 안의 두 사람도 놀랐고 조태혁은 더욱 놀란 듯했다.

그는 내가 그를 때릴 줄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놀람도 잠시 조태혁은 곧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나를 향해 손을 들며 소리쳤다.

“이 더러운 여자...”

“조태혁!”

강유형이 차갑게 꾸짖었다.

“손대기만 해봐. 당장 너를 다시 경찰서로 보내버릴 거야.”

이 위협은 효과가 있었다. 조태혁은 나를 때리려던 손을 거두고 나와 강유형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더니 큰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태혁아!”

조나연이 그를 불렀지만 한 번 부르고는 곧 배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했다.

“아파, 유형 씨, 빨리 병원에 데려가 줘.”

“윤지원!”

강유형이 다시 나를 불렀다.

조나연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니 다른 생각이나 감정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나는 빠르게 차에 올라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를 만나자 강유형은 조나연을 안고 급하게 말했다.

“선생님, 나연이가 임신했어요. 방금 넘어졌는데 지금 배가 많이 아프대요.”

임신이라고?

내 발걸음이 순간 무거워졌다. 마치 납을 부은 것처럼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가슴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조나연의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어떻게 아이가 있을 수 있지?

내 시선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강유형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가 이렇게 긴장하는 걸 보니 혹시...

조나연은 응급실로 실려 갔고 나와 강유형은 밖에서 기다렸다. 나는 조나연과 친분이 없어서 특별히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강유형은 명백히 초조해 보였다. 나는 한동안 그를 지켜보았지만 그는 계속 응급실 문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치 내 존재를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가슴 속에서 쓰라린 감정이 솟구쳤다. 나는 몇 번이나 삼키려 했지만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그 아이... 네 거야?”

억측하고 싶지 않아서 직접 물어봤다.

강유형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고 이내 깊은 눈빛으로 바뀌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아니지. 석진이 유복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석진은 조나연의 남편이자 강유형의 오랜 친구였고 한 달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나연이를 돌보는 것도 석진이 부탁 때문이야.”

강유형이 설명했다.

나는 임석진의 사고 처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의 강유형 모습을 떠올렸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턱은 수염으로 덮여 있어 마치 산속에서 도망쳐 나온 야인 같았다.

그들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친구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미망인을 돌보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순간 나는 조금 전 내 마음속에 스쳐 지나간 생각들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강유형의 팔을 잡으며 오늘 밤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난 그 꼬마를 만지지 않았어. 그 애가 일부러 날 모함한 거야.”

강유형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더니 잠시 후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앞으로는 술 마시지 마.”

나는 조금밖에 마시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순간 응급실 문이 열렸다.

의사가 나와 자연스럽게 강유형 앞으로 걸어갔다.

“임산부 가족분, 서명해 주세요.”

강유형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의사의 펜을 받았지만 서명하기 전에 물었다. “선생님,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아내분께서 유산 징후를 보이고 있어요. 지금 태아를 지키려는 중인데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명이 필요한 겁니다.”

의사가 설명했다.

“의사 선생님, 제발 아이를 지켜주세요.”

강유형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당연하죠. 빨리 서명해 주세요.”

의사의 재촉에 강유형은 조나연의 병원 기록부 가족란에 서명했다.

나는 단순히 서명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약혼자가 다른 사람의 가족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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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젯밤 그 상황에서는 나연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랬어. 너도 알다시피 석진이는 부모님의 외아들이었잖아. 지금 나연이 뱃속 아이는 임씨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야. 만약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니까 앞으로 나연 씨랑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그 여자를 우선시하겠다는 거야?” 내가 차갑게 묻자 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괜찮아질 거야.”나는 웃음을 지었다.고개를 돌리는 순간 막 떠오른 태양이 눈을 찔렀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유형, 아이가 태어나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야. 아플 수도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지. 네가 이 아이를 핑계 삼는 한, 넌 조나연 씨랑 영원히 얽히게 될 거고 난 항상 너한테 버려지는 사람이 될 뿐이야.”강유형은 내 말에 침묵했다.나는 내 입장을 분명히 했다. “강유형,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면 난 내 남편이 사흘에 한 번씩 다른 여자를 돌보는 걸 원치 않아.”“지원아, 시간을 좀 줘. 잘 처리할게,” 강유형의 눈빛에 갈등이 스쳤다.“뭘 처리해? 조나연 씨는 다른 사람의 아내야. 돌봐야 한대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임석진한테는 너 말고도 다른 친구가 있잖아. 신지태랑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하필 너만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강유형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난 석진이가 사고 났을 때 유일하게 곁에 있었던 사람이야.”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고통을 듣고 임석진의 죽음에 대한 그의 죄책감과 자책을 떠올리며 나는 물었다. “강유형, 혹시 임석진에게 미안한 일이라도 했어?”“윤지원.” 강유형이 차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꼭 이 일을 꼬집어야겠어?”“어, 이미 나한테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유형, 친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괜찮은데 친구의 아내까지 돌보고 싶다면 우리 헤어지자. 그러면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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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놀이공원이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기에 난 이 시점에 떠나고 싶지 않았다.점심 무렵, 내가 업무를 정리하고 있을 때 이소희가 신비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지원 님, 어젯밤에 생리 시작했어요?”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물어요?”“별거 아니에요.” 이소희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강 대표님이 오늘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으신지 알겠어요. 욕구불만이었나 봐요.”잠시 멍했다가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나는 펜으로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 “근무 시간에 일에 집중해야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요.”이소희는 킥킥 웃으며 어제 우리가 함께 본 현장 보고서를 건넸다. “제가 멋대로 상상한 게 아니에요. 정말로 다들 강 대표님한테 혼나서 무서워하고 있어요. 오늘 대표님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중에 웃으면서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내 눈앞에 오늘 아침 강유형이 화가 나서 장미꽃을 버리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기분이 안 좋은 이유가 내가 평소처럼 쉽게 달래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헤어지자고 한 것 때문인지 궁금했다.“지원 님, 혹시 대표님이랑 싸웠어요?”이소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나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일이나 열심히 해요. 안 그러면 다음에 울 사람은 소희 씨일 지도 몰라요.”이소희를 보내고 나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 일을 정리하고 이소희의 보고서를 검토해 수정한 뒤 강유형에게 보냈다.그는 답장이 없었고 나도 묻지 않았다.오후 3시, 나는 휴게실에 물을 받으러 갔다가 강유형과 마주쳤다.이소희의 말대로 그의 얼굴은 먹구름이 잔뜩 낀 것 같았고 나를 보자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그래도 나는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제가 보낸 보고서 확인해 주세요. 문제없으시면 협력 업체에 답변을 드려야 해서요.”하지만 그는 나를 무시한 채 그냥 지나쳐 갔다.나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는데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지원 씨,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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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82화

    안리영은 깊이 가라앉은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원의 외삼촌과 외숙모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자책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함께 살아갈 수는 없었어도 죽음은 함께하겠다는 그들의 선택이 그녀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사랑은 함께 죽는 서사로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사랑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가 꿈꾸는 사랑은 서로를 붙잡고 끝까지 함께 늙어가는 것, 그뿐이었다.예전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사랑은 단순한 줄만 알았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면 그걸로 족한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서로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랑, 그걸 얻는 게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늙을 때까지 함께하자는 건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었다.구안석이 돌아온 건 깊은 밤이었다. 안리영은 잠들지 않았고 테라스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 기다리지 말랬잖아.”구안석이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지친 숨을 내쉬며 작은 위로를 찾는 듯했다.“많이 피곤해?”안리영이 조용히 물었다.그는 그렇다는 뜻으로 낮게 대답하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는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리영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이러다 병나겠어. 선배, 이제 좀 자신을 덜 힘들게 해줄 생각은 없어?”“아직은 안 돼. 2년만 더 지나면 그땐 좀 괜찮아질 거야.”구안석의 말에 안리영은 웃었다.쓴웃음이었다.“정말 대단하다, 선배. 선배는 정말이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그녀의 말엔 약간의 농담도 섞여 있었다.구안석은 말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정말 말 한마디조차 하기 싫은 듯했다.안리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참이나 망설였던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그가 이런 모습인 걸 보니 결국 다시 삼켜버렸다.“너무 피곤해 보이네. 얼른 자자.”“응.”그는 대답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지쳐서 도무지 몸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81화

    “유정철 씨께서 신희선 씨께 먼저 약을 먹이시고 그다음 본인이 복용하셨어요. 이게 그분들이 드신 약입니다.”의사는 약병을 내게 건넸다.약병에 적힌 글자를 바라보자 목이 턱 막히고 쓴맛이 올라왔다.“그분들 정말 너무 고통스러웠던 거예요.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하신 거겠죠.”사실 예전부터 외삼촌은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땐 단지 외숙모가 세상을 떠난 뒤 함께 하려는 결심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숙모가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걸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먼저 보내드렸고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이건 유정철 씨가 남기신 유서입니다. 지원 씨께 드리라고 하셨어요.”의사가 봉투 하나를 내게 건넸다.나는 그걸 받아 들고 외삼촌이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을 읽어 내려갔다.‘얘야, 미안하구나. 외삼촌이 더는 너를 돌봐줄 수 없게 됐구나. 이런 방식으로 끝을 맺기로 한 건 사실 희연이가 떠났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결심했던 일이란다. 네 외숙모와도 충분히 상의한 일이야.얘야, 너무 슬퍼하지 말고 외삼촌을 원망하지도 말길 바란다. 이젠 정말로 세상에 미련도 남지 않았단다. 그래서 네 외숙모의 손을 잡고 희연이를 만나러 간다.얘야, 마지막 순간까지 네가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기뻤단다. 다만 외삼촌이 너무 이기적이라 끝내는 내 친딸을 잊지 못하겠더구나. 그래서… 그 아이를 따라가기로 했단다.얘야, 우리가 떠난 뒤엔 병원이나 그 누구도 탓하지 마라. 나와 외숙모는 화장해서 희연이 곁에 묻어다오. 우리 셋, 한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게 말이다.지원아, 우리에겐 네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외숙모와 희연이 그리고 내가 남긴 모든 재산은 너에게 물려주려 한다.네가 이런 돈에 욕심이 없는 거 외삼촌은 안다. 그러니 필요 없다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써다오.얘야, 다음 생이 있다면 우리 다시 만나 평안하고 건강하게, 행복한 삶을 살자꾸나.’편지를 다 읽으니 눈물이 뚝뚝 떨어져 종이를 적셨다.눈물이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80화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외숙모의 상태는 대략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떠났다는 말을 들어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외삼촌은 멀쩡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우리 외삼촌... 어떻게 된 거죠?”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직접 오셔서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간호사는 더 설명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나는 한동안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니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날이 떠올랐다.그날은 햇살이 유난히 밝았고 영어 수업 시간이었다. 갑자기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와 나를 불러냈고 복도 끝에서 강두식 삼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품에 안고 한마디를 건넸다.“이제 우리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어렸던 나는 그 말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삼촌, 무슨 일 있었어요?”눈가에 눈물이 고인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이 돌아가셨어.”그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멍한 상태였던 건지, 아니면 정말 몰랐던 건지, 바보처럼 되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강두식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거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이란다.”“정말 다시는 못 보는 거예요?”그땐 너무 어렸고 아마도 너무 무서웠던 나머지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삼촌은 다시 나를 껴안았고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한순간에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잃는다는 건 더없이 참혹한 일이었다. 그런 비극을 내 인생에서 두 번이나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하늘은 정말이지 나를 참으로 특별히 사랑해 주시는 모양이다.비록 외삼촌과 외숙모와는 큰 정도, 함께 밥 한 끼 제대로 먹은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가족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병원에 도착하니 외삼촌과 외숙모는 이미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윤지원 씨,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후에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 드릴게요.”의사와 간호사가 나를 이끌었다.나는 도저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9화

    용준호가 바로 좋아요를 눌렀다. 거기에 덧붙여 댓글도 남겼다.‘어수선함도 하나의 아름다움이지.’강진혁 쪽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못 본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나는 용준호의 댓글을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경찰 아저씨도 그렇게 말했어요.’용준호가 다시 답글을 달았다.‘이 정도 사소한 일은 내가 해결해 주지. 경찰 아저씨까지 귀찮게 할 필요가 있나?’‘오빠가 해결하면 더 엉망이 될까 봐 그래요.’‘이 오빠 못 믿어?’‘네.’‘아침부터 상처받았어.’‘파스 붙여 드릴 게요.’‘속을 다스려야지.’그의 마지막 답글을 보고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강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무슨 일이야? 집에 도둑이라도 들었어?”갓 잠에서 깬 듯한 나른한 목소리였다.“네, 근데 잡았어요. 누군가가 시켜서 왔대요.”나는 그에게 힌트를 던졌다.사실 내게 사람을 보낼 만한 사람은 강진혁 아니면 용준호였다. 원하는 걸 찾지 못하니 나를 일부러 귀찮게 해서 불안하게 만들고 나 스스로 허점을 드러내길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그래야 그들이 실마리를 잡을 테니 말이다.“그래? 그럼 제대로 심문해야겠네. 경찰에 넘겼어?”강진혁이 물었다.나는 가볍게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덧붙였다.“경찰이 저런 녀석들한테서 뭘 제대로 캐낼 수 있을까.”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그 말 경찰 아저씨들이 들으면 기분 상하겠는데요.”강진혁이 가볍게 기침을 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원하는 걸 얻기 어렵다는 뜻이야.”“그래도 원칙대로 가는 게 낫죠. 난 경찰 아저씨를 믿어요.”내 말에 그는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오빠 생각엔 누가 시킨 것 같아요?”한참을 돌려 말하다가 결국 본론을 꺼냈다.강진혁도 바로 이해했다.“설마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쓸데없이 돌려 말할 필요 없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오빠 아니면 준호 오빠잖아요.”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8화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나는 야구 배트를 그에게 겨눈 채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낯선 남자였다.“누구 지시로 온 거야? 내 집엔 어떻게 들어왔고?”나는 곧장 다그쳤다.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태도였다. 나도 긴말 없이 바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경찰서로 가서 말해.”“신고하지 마세요!”남자는 겁에 질렸다.“그냥 뭐 좀 훔치려고 했을 뿐이에요. 지금 다 돌려드릴 테니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면서 그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나는 혹시라도 무기를 꺼낼까 싶어 차갑게 경고했다.“손 함부로 놀리지 마.”내 말이 끝나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의 손과 함께 나온 것은 내 액세서리들이었다.“이것뿐이에요. 다 여기 있습니다.”그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단순한 좀도둑인가?나는 믿지 않았다. 이건 그냥 지나가다 슬쩍한 게 분명했다.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이 나는 곧장 신고 버튼을 눌렀다. 남자는 허겁지겁 내 쪽을 향해 애원했다.“누님, 제발 신고하지 마세요! 경찰한테 잡히면 제 인생 끝장이에요.”그렇게 될 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떼고 단호하게 말했다.“솔직하게 다 말하면 한 번 봐줄 수도 있어.”남자는 다시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내가 한 마디 더 던지자 움찔했다.“고개를 젓는 순간 바로 신고할 거야.”내 휴대폰 화면에는 선명하게 112가 떠 있었다. 내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남자는 몇 초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어떤 형님이 시켰어요.”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 덧붙였다.“누군지는 몰라요. 그냥 돈을 좀 줬고 일이 끝나면 추가로 더 준다고 했어요.”“대체 무슨 일을 하라고 했는데? 내 집에서 뭘 찾으라고 했지?”나는 되물었다.“그런 건 말 안 했어요. 그냥 들어가서 이것저것 뒤집어 놓으라고 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장면이 그려졌다.내 집은 지금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7화

    나는 기껏해야 그녀의 새언니일 뿐인데 지금은 그녀를 보면서 엄마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아마 내 안에 숨어 있던 모성애가 폭발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아이를 가져볼 때가 된 걸지도 모른다.생각해 보면 참 이상했다. 요즘 들어 자꾸만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곤 했다.“아니야,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진소영이 말하는 고맙다가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내게 화를 내는 일은 드문데 그런 그녀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이 작은 아이는 참으로 감정이 뚜렷한 편이었다. 나는 그녀의 감사를 받아들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오빠는 또 어디 갔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건 아니지?”진소영이 갑자기 진정우에 관해 물었다.나는 솔직히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할까 봐 조금 걱정했었다. 그녀는 한 번 의문을 품으면 끝까지 답을 찾고야 마는 집요한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진정우에 관한 건 내가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일이 많았다.“별일 없어.”나는 진정우가 그녀에게 알리지 않길 원했던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둘이서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마. 요즘 동네에 낯선 사람들이 몇 번이나 다녀갔어. 내가 살던 곳에서 뭔가를 찾는 것처럼 말이야.”진소영의 말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 사람들이 그곳까지 찾아갔다고? 그렇다면 혹시 무덤을 파헤치거나 유골을 가져가려는 걸까?’“이제 솔직하게 말해 줄 거야?”진소영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예전보다 날카로워졌고 성숙해졌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진정우의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다 오히려 더 큰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침묵 속에서 진소영이 말했다.“언니, 오빠가 말하지 않는 건 내가 겁먹을까 봐, 혹은 나까지 말려들까 봐 그러는 거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 나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그래야 만약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더라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역시나 그녀는 냉철하고 이성적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6화

    나와 그녀의 교집합은 강유형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남자는 나와 조나연, 그 누구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는 법이다.“어떻게, 요즘 그 사람 못 봤어?”나는 옅은 미소를 띠고 반문했다.조나연은 솔직했다.“못 봤어.”“왜, 보고 싶어졌어?”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조금.”조나연도 담백하게 인정했다.“보고 싶으면 찾아가.”나는 그녀를 부추겼다.그러자 조나연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올랐다.“찾아갈 수 있었다면 왜 굳이 그쪽한테 묻겠어?”이 여자는 나와 대화할 때마다 꼭 불꽃이 튀는 듯했다. 언제나 날카롭고 거칠게 반응했다.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나는 더 차분해졌다.“예전엔 나연 씨를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변했다니... 참, 남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어.”“지원 씨, 그렇게 비꼬지 마.”조나연이 불만스럽게 말했다.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강유형이 이런 그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나연 씨, 후회한 적 있어?”나는 문가에 기대어 물었다.“없어.”그녀는 단호했다. 망설임도 없었다.그러나 그럴수록 그녀가 후회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부정하는 건 누군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차릴까 봐 두려운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니 말이다.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만약 나연 씨가 그렇게 부와 명예만 좇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어. 돈이 많든 적든, 부유하든 평범하든, 결국 가장 소중한 건 담백하고 평온한 삶이란 걸.”나는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려 이런 말을 뱉은 게 아니었다. 그저 솔직한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요즘 나는 걷는 게 가장 좋아. 길을 걷다가 평범한 부부가 자전거 한 대를 함께 타거나 장을 본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나란히 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5화

    조나연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진소영의 월급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까지 함께 내밀며 말했다.“이것도 안 받을 거면 아예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이건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그때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가 일부러 놀란 척을 했다.“어, 나연 씨 방에 사람이 있었네?”진소영은 나를 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물론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철저히 선을 그었다.조나연은 나를 보곤 순간 살짝 긴장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바로 감정을 감췄다. 그러곤 진소영에게 말했다.“이건 다 네가 받아야 할 몫이니 가져가.”진소영은 손을 내밀어 봉투만 들고 갔다. 조나연이 준비한 상자는 끝내 손에 들지 않았다.역시 진정우의 손에 자란 아이다웠다. 기개가 남달랐다.“고맙습니다.”진소영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돌아섰다.끝까지 나에게는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아직도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조나연에게 우리 관계를 들키기 싫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나중에 또 아르바이트하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돼.”조나연은 내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나연 씨가 여자라서 다행이지. 남자였으면 진짜 관심 있는 줄 알았겠어.”진소영이 문을 나서자 나는 곧바로 조나연을 놀리듯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나는 그녀가 진소영에게 주려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이거, 실례라고 생각 안 해?”나를 사장으로 대하는 태도 따위는 없었다.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가 들어 있었다. 가격이 꽤 나가 보였다.“직원 잡으려고 돈을 이렇게 쓰는 거 보니, 나연 씨도 진짜 통이 크네.”“하긴 순진한 양 없이 어찌 늑대를 잡겠어.”조나연은 숨김도 없었다.나는 상자를 딱 소리 나게 닫았다.“그 애한테 부리는 수작은 이쯤에서 접어.”조나연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봤다. 뭔가 설명을 바라듯 말이다.나는 그녀가 진소영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따지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 애, 진정우의 동생이야.”조나연은 놀란 듯 살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4화

    이런 깊은 밤, 바에서 진소영을 마주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요즘 나도 일이 너무 많아 그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진소영은 먹색이 감도는 짙은 녹색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디자인도 아니었고 그저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운 바의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나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대체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건지 지켜보고 싶었다.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더니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방향을 꺾어 방으로 들어갔다.그곳은 조나연의 사무실이었다.‘조나연이 그녀를 찾은 건가?’순간 가슴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방문 앞에 섰다. 마침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대화 내용도 들을 수 있었다.“조 매니저님, 저 다음 주부터 개강이라 여기 더 이상 못 나와요. 이번 공연비 정산 좀 부탁드려요.”진소영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그녀가 여기서 돈을 벌고 있었다니, 게다가 말투를 보니 꽤 오래 이 일을 해온 것 같았다.“서울대로 가는 거야?”조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울대요.”“좋은 학교지. 우리 남편도 그 학교 나왔어.”그녀는 태연하게 임석진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어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중에 그의 영혼이 그녀를 찾아와 복수를 해도 모자랄 텐데 말이다.“아, 그렇군요.”진소영은 짧게 대꾸했을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나연도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웠는지 화제를 돌렸다.“어떤 전공을 선택했어?”“의학이요.”진소영은 묻는 말에 곧바로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조나연은 가느다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이렇게 예쁜 애가 왜 하필 의대를 가려는 거야?”“그냥 좋아서요.”진소영은 의대를 선택한 진짜 이유를 굳이 밝히지 않았다.“그렇지만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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