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놀이공원이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기에 난 이 시점에 떠나고 싶지 않았다.점심 무렵, 내가 업무를 정리하고 있을 때 이소희가 신비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지원 님, 어젯밤에 생리 시작했어요?”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물어요?”“별거 아니에요.” 이소희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강 대표님이 오늘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으신지 알겠어요. 욕구불만이었나 봐요.”잠시 멍했다가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나는 펜으로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 “근무 시간에 일에 집중해야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요.”이소희는 킥킥 웃으며 어제 우리가 함께 본 현장 보고서를 건넸다. “제가 멋대로 상상한 게 아니에요. 정말로 다들 강 대표님한테 혼나서 무서워하고 있어요. 오늘 대표님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중에 웃으면서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내 눈앞에 오늘 아침 강유형이 화가 나서 장미꽃을 버리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기분이 안 좋은 이유가 내가 평소처럼 쉽게 달래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헤어지자고 한 것 때문인지 궁금했다.“지원 님, 혹시 대표님이랑 싸웠어요?”이소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나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일이나 열심히 해요. 안 그러면 다음에 울 사람은 소희 씨일 지도 몰라요.”이소희를 보내고 나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 일을 정리하고 이소희의 보고서를 검토해 수정한 뒤 강유형에게 보냈다.그는 답장이 없었고 나도 묻지 않았다.오후 3시, 나는 휴게실에 물을 받으러 갔다가 강유형과 마주쳤다.이소희의 말대로 그의 얼굴은 먹구름이 잔뜩 낀 것 같았고 나를 보자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그래도 나는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제가 보낸 보고서 확인해 주세요. 문제없으시면 협력 업체에 답변을 드려야 해서요.”하지만 그는 나를 무시한 채 그냥 지나쳐 갔다.나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는데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지원 씨, 나
조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고 그 가련한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유형 씨, 결국 내가 귀찮아진 거지?” 조나연의 말과 함께 눈물이 뚝 떨어졌다.강유형은 말없이 서 있었고 주변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하지만 석진 씨한테 아무 일도 없었다면 나도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았을 거야...” 조나연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말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네가 나를 귀찮게 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지원이를 귀찮게 하지 마.” 두 사람이 싸우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지, 아니면 떠나야 할지 망설였다.“알겠어. 앞으로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 두 사람을 방해하지도 않을 거야.”조나연이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이번에는 강유형이 쫓아가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강유형이 바로 뒤따라왔다. 우리가 카페를 나서자마자 끼익하는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나와 강유형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보니 조나연이 주차장에서 나오던 차에 치여 넘어진 모습이 보였다.“조나연!” 강유형이 낮게 외치며 달려갔다.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따라갔다.“유형 씨, 아이가...” 조나연은 창백한 얼굴로 한 손으로는 배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강유형의 팔을 꽉 잡았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그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잡은 듯한 모습이었다.배우를 하지 않은 게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차를 몬 사람도 놀라서 연신 설명했다. “대표님, 저 여자가 갑자기 뛰어들었어요.”우연히도 운전한 사람은 우리 회사 직원이었다.“꺼져!” 강유형이 화를 내며 조나연을 안아 들고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마침 퇴근 시간이라 직원들이 오가고 있었고 모두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 이미 몇몇은 소곤거리기 시작했다.“대표님이 저 여자를 무척 걱정하
안리영은 내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지만 더 묻지 않고 말했다. “알았어. 소식을 들으면 알려줄게. 그나저나 오늘 어디 갈 거야? 강씨 집안에 돌아가기 싫으면 우리 집에 와.”오늘 안리영은 야간 근무였기에 그녀의 집에 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나는 정말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지금은 강유형과 한방에서 자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하지만 계속 안리영의 집에 머무는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없다고 해도 누구나 자신의 사생활 공간을 침해받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그래.”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살 곳을 찾을 때까지는 호텔보다 그녀의 집이 나을 것 같았다.밤에 잘 곳은 정해졌지만 나는 바로 그곳으로 가지 않고 차를 몰아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이곳은 이미 구도심이 되었지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임차인들이었는데 임대료가 싸기 때문이었다.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곳이 내 집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우리 가족 셋은 모두 이곳에서 살았다. 당시에는 이곳이 구도심이 아니었고 경제와 교통이 매우 편리하고 번영했었다.하지만 10년의 세월이 지나 이곳은 더 이상 예전의 번화함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었다.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 단지의 대부분의 집들도 임대로 나갔지만 우리 집만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심지어 부모님의 옷과 신발도 그대로 원래 자리에 놓여 있었다.부모님이 그리울 때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볼 수 있었다. 다만 최근 몇 년간은 자주 오지 못했다.결국 그들은 내 기억과 삶 속에서 서서히 퇴장하고 있었다.30분 정도 운전해서 도착한 나는 차 안의 수납함에서 열쇠를 꺼내 집으로 올라갔다.문을 열자마자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생긴 먼지 냄새가 났고 가구들도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전기도 끊겨 있었다.다행히 전기요금 번호가 있어서 바로 요금을 충전했고 곧 전기가 들어왔다.불을 켜고 나는 각 방을 돌아다녔다. 마지막으
“지원 씨, 오해하지 마세요.”조나연의 말에 나는 웃고 싶었다.방금 그녀가 침구를 고를 때 한 말을 생각하니, 그녀가 묵인한 남자친구가 강유형이었다.“강유형에게 사주시는 거예요?”그녀가 선택한 침구는 블루 그레이 색으로 확실히 강유형이 좋아할 만한 색상이었다.그러나 그건 예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나에게 동화되어 그가 좋아하는 색이 많이 밝아졌다.조나연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몇 초를 망설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제 남동생에게 사주는 거예요.”나는 이런 수작을 한 그녀와 실랑이하기 귀찮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강유형은 나연 씨와 같이 살겠대요?” 조나연의 아이가 사고가 나면 안 된다고 했으니 24시간 지키는 것이 가장 적합하겠지.“지원 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조나연은 감정이 격해졌다.“강유형에게 침구까지 샀는데, 왜 그런 말을 못 하죠?”나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반문하였다.“지원 씨는 너무 질투심이 많네요. 유형 씨가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조나연의 말에 나는 웃었다.“왜 웃어요?그녀는 억울하면서도 경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말했다.“강유형은 아무리 저를 좋아한다고 해도 남의 유혹에 잘 넘어가더라고요.”“지원 씨의 말이 듣기가 거북하네요.”조아연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제 말이 틀렸어요? 나연 씨는 어제 저에게 해명한다고 회사에 찾아왔지만, 사실은 강유형을 만나고 싶은 거죠?”어젯밤에 나는 꿀잠을 잤지만 아침에 일어난 후 문득 깨달았다.조나연이 어제 회사에 나타나서 일부러 남의 차에 치여 넘어진 것이다. 이로써 강유형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걱정하게 하고 끌어안게 한 것이다.조나연은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어떻게 저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세요?”이에 나는 반문을 하였다.“그럼 강유형이 어제 왜 커피숍에 나타났는지 변명해 보세요.”조나연은 순간 입을 다물고 눈에는 나에게 들킨 난감한
물건 사러 갔다가 조나연 같은 여자 때문에 기분이 잡쳤지만 내가 밥 먹는 데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는 곱창국수 한 그릇을 먹은 후, 회사에 갔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강우형의 어머니인 김희연의 전화를 받았다.내가 이틀 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아서 전화하는 것은 정상이었다.“아줌마.”“지원아, 네 친구 집에만 있지 말고 오늘 집에 들어와. 아줌마가 김치만두를 만들었어.” 김희연의 말에 나는 웃고 싶었다. 강유형은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 핑계를 대신 찾아준 듯하다.나는 이미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가서 살기로 결정했기에 강씨 저택에 가서 짐도 정리해야 했다. “아줌마, 오늘 저녁에 돌아갈게요.”곧 퇴근할 때 이소희가 다가왔다.“지원 님, 괜찮으세요?”“왜요?”나는 어리둥절했다.“회사에서 늘 가십거리나 헛소문이 많잖아요. 그런 거 듣지 마세요. 강 대표님이 지원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 눈을 봤잖아요.”이소희의 말을 듣고 나는 손을 내밀었다.무슨 의미인지 안 그녀는 핸드폰을 뒤로 숨겼다.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이리 줘요.”나의 압박하에 이소희는 핸드폰을 주면서 그녀들의 비밀 채팅방을 오픈했다. 내용은 어제 직원들이 논의한 것과 비슷했으나 조나연과 강유형의 과거 정보까지 캐냈다.강유형, 조나연, 그리고 조나연의 돌아가신 남편 임석진은 대학 동창일 뿐만 아니라 학창 시절에 삼각관계라고 하였다.내가 처음 들은 정보였다. 가십거리이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핸드폰을 이소희에게 돌려주고 나는 운전해서 떠났지만 강씨 저택에 돌아가지 않고 신지태를 찾아갔다.그는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내가 도착할 때 그는 마침 당구를 치고 있어서 나를 보자 같이 치자고 하였다.“두 판 할래?”예전에 강유형과 온 적이 있었는데 당구도 강유형이 가르쳐준 것이다.나는 겉옷을 벗고 큐대를 잡고 신지태와 같이 당구를 쳤다.“잘하네. 역시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잘 배웠어.”그는 강유형을 칭찬한 것이다.“지태야, 대학교 때 강유형과 같이 다녔
나는 감동을 받았다.나는 이 집에서 얹혀서 자랐지만, 강유형의 부모님은 친부모님처럼 나를 관심해 주고 사랑해 주었다.그들은 완전히 나를 친딸처럼 대했다. 강유형의 형인 강진혁이 내가 이 집에 온 이후로 그들 형제는 눈 밖에 난 자식으로 되었다는 농담을 한 것이 생각났다.안리영의 말이 맞았다. 내가 강유형과 쉽게 헤어질 수 있으나 강씨 일가와는 쉽게 헤어질 수 없다.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문을 밀고 들어가자,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김희연은 바로 일어서서 다가왔다.“지원아, 왔어? 이제 식사하려고 하는데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아줌마, 아저씨, 안녕하세요!”내가 인사를 드리자 강유형도 강두식의 발길질에 일어섰다.그는 내 가방을 받고 말했다.“왜 이렇게 늦었어?”“당구 좀 치고 왔어.”신지태는 꼭 나와 만난 일을 그에게 말할 것을 알기에 숨김없이 알려주었다.강유형은 눈썹을 찌푸렸다.“다음에 갈 때 나도 불러.”그는 내가 이런 것들을 노는 것을 꺼렸다. 특히 그가 같이 없을 때 싫어했고 물론 내가 사적으로 그의 친구들과 접촉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죽은 친구의 아내와 붙어 다녔고 심지어 나에게 주지 않았던 서브 카드도 조나연에게 주었다.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화장실로 갔다. 강유형은 따라오면서 물었다.“너 왜 이래?”“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나는 손을 씻으면서 거울 속의 그를 향해 웃었다.“지원아, 난 이미 얘기했잖아. 이제 성질 좀 그만 부려.”강유형의 말에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손가락을 씻다가 왼손 중지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4년 전에 강유형이 술을 많이 마셔서 사람들과 싸우다가 내가 말릴 때 생긴 상처였다.당시 살점이 떨어졌는데 상처는 나았으나 그 부분이 움푹 들어갔다.강유형은 가장 큰 다이아몬드로 그 부분을 채워준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다이아몬드를 받지 못했다.“나 오늘 나연 씨를 만났어. 물건 살 때 네 서브 카드를 사용하더라.”줄줄 흐
고준석은 그의 비서이다.그래도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시선을 떨구면서 말했다.“지원아,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솔직히 말해주면 안 돼?”그의 말에는 무기력하고 어쩔 수 없는 퇴폐함까지 들어 있다.정말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강유형, 우린 헤어졌으니 이렇게 난감할 필요가 없어. 네가 조나연을 어떻게 보살펴 주든지 나랑 상관이 없잖아.”나는 속마음을 얘기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나에게 다가왔고 나를 세면대와 그의 가슴 사이로 가두었다.“헤어질 생각은 하지 마. 내일 혼인 신고하러 가자.”“강유형, 너 진심으로 나랑 결혼하고 싶어?”내 귓가에 다시 그때 그와 신지태의 대화가 울렸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우린 너무 익숙해서 섹스하고 싶은 생각까지 없다며?”“지원아, 그건 그냥 농담이라고 했잖아. 그날 밤에 너도 봤지? 난 너에 대해...”“강유형.”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그날 밤을 다시 떠올리기 싫었다.“그날 밤은 내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야. 알겠어?”그의 동공은 격렬히 수축하였고 쩔쩔매면서 나에게 물었다.“내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날 용서해 줄 수 있어?”내가 이미 말했는데 그는 계속 물었다. 그러나 난 다시 말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를 밀어냈다.“비켜. 난 배고파서 뭐 좀 먹어야겠다.”“좋아. 그럼 난 다시 조나연과 연락하지 않을게.”그는 핸드폰을 꺼내면서 카톡과 연락처에서 조나연을 차단하였다.“지금 됐지?”그의 짜증 난 목소리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강유형, 내가 아줌마와 아저씨께 우리가 헤어졌다고 말씀드리면 욕먹을까 봐 그런 거지? 일단 아무 말도 안 할게.”“지원아, 난 그런 뜻이 아니야. 난 정말 너와 결혼하고 싶어.”강유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우린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고 결혼식이 없고 심지어 그런 관계도 없었지만 난 예전부터 이미 널...부인으로 생각했어.”‘부인’, 이 두 글자에 내 마음이 떨렸다.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아버지는 밖에서 종래로 어머니를 ‘
강두식과 김희연의 기대에 찬 눈빛에 나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강유형이 다시 조나연과 조금이라도 엮이면 혼인 신고를 했더라도 그를 떠날 것이라고 다짐했다.내가 동의하자 밥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분위기도 가볍고 따뜻해졌다.식사를 마친 후 나는 당연히 떠나지 못했다.침실에 돌아온 나와 강유형은 지난번보다 더 어색했다.“먼저 씻어.”강유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침 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안리영이 걸어온 전화였다.“너 먼저 씻어. 나 전화 받을게.”강유형이 욕실에 들어간 다음에 나는 전화를 받았다. 안리영이 질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너 어젯밤에도 안 왔고 오늘도 안 왔네. 설마 다시 강씨 집안으로 돌아간 거야?”“응.”침실 가운데 있는 큰 침대를 보면서 나는 낮은 소리로 대답하였다.이에 안리영은 의아해했다.“강유형과 또 화해한 거야?”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내일 혼인 신고할 거야.”안리영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잘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지??”나는 창가에 와서 하늘에 있는 반원 모양의 달을 보면서 말했다.“달도 흐리고 맑음, 차고 이지러질 때가 있으니 인간도 그런 거야. 강유형은 조나연의 연락처를 차단했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서 기회를 다시 한번 주려고.”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마지막으로.”안리영은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였다.“지원아, 넌 안전과 행복을 위해 남자를 찾는 것만 기억해.”“알았어.”전화를 끊은 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사색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없었고 마음도 슬프거나 기쁘지 않았다.문득 등이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강유형은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그는 상의를 입지 않았고 밑에는 잠옷 바지만 입었다. 나를 껴안은 그의 팔에는 아직 닦아내지 않는 물방울이 걸려 있다.야성적이고 섹시해 보였다.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에 대고
“뭔데요?”그녀의 말을 들은 안리영은 놀라지 않았다.누구든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나도 그에게 보답을 원한다. 이른바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는 법이다.“지원 씨는 제 딸을 납치한 죄를 뒤집어써야 해요.”함소은의 말을 들은 안리영은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소은 씨는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하기 힘들죠?”그녀의 마음을 간파한 안리영이 말했다.함소은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진표 그 개자식은 은서를 매우 사랑하는 것 같지만 이 상황이 되도록 그는 조급해하지 않아요.”그녀는 자신이 딸 용은서로 용진표에게서 돈을 바꾸고 싶었지만 그는 속지 않았다. 게다가 며칠 동안 갇혀 있던 딸은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 보러 가고 싶었으나 노출이 될 것이 두려웠고 그녀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그녀는 아무 이유 없이 납치당한 아이를 돌아오게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들은 바에 의하면 용진표는 누가 자신의 딸을 납치했는지 조사 하라고 시켰고 그녀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최대한 빨리 은서를 무사히 돌아오게 해야 했다, 그러면 용진표도 조사를 멈출 것이다.“그러나 지원이가 죄를 뒤집어쓴다면 용 대표님이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안리영이 말했다.“진표 씨는 지원 씨 부모님께 목숨값 두 개를 빚진 것이 있기에 지원 씨가 그의 딸을 납치했다고 해도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은서가 다치지 않았기에 진표 씨는 지원 씨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함소은의 분석이 매우 정확했다.안리영은 웃으면서 말했다.“소은 씨는 얼굴이 이쁠 뿐만 아니라 지능도 좋아요.”함소은은 조롱하듯 웃었다. 만약 용진표가 그녀의 외모에 반해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의 숨겨둔 애인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정태성과 함께 연수해서 회사원이나 성공적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모든 것을 용진표가 망가뜨렸다. 이쁜 얼굴이 싫었던 그녀는 누가 그녀를 이쁘다고 칭찬하면 화를 냈다.누군가는 아름다운 외모를 밑천으로 생각하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불행의 시작이
함소은은 안리영의 말을 확신하는 듯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만약 태성 씨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말을 마친 안리영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저 말고 지원이가 도울 수 있어요.”안리영을 본 함소은은 첫눈에 그녀를 보낸 것이 윤지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윤지원의 상황을 생각한 함소은은 비웃으며 말했다.“지금 지원 씨 자신도 돌볼 수 없는 상황인데 나를 도울 수 있다고요?”“지원이 이 보살이 그곳에 들어가 나랏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기회를 만들어준 소은 씨에게 감사드려야죠.”안리영은 힌트를 주었다.함소은은 안리영의 눈길을 피해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뭔 상관이에요?”안리영은 직설적으로 말했다.“소은 씨, 여기까지 말했으면 더 이상 시치미를 떼지 마세요. 사실 은서는 소은 씨가 사람을 시켜 데려간 거죠?”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함소은은 화를 내며 소파를 내리쳤다.“무슨 헛소리에요? 제가 왜 제 딸을 납치해요. 저...”“소은 씨는 딸로 정태성을 맞바꾸려고 그러는 거잖아요.”안리영은 그녀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얼굴을 돌린 함소은은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아니에요.”“제가 용 대표님에게는 말하지 않을게요. 두려워 마세요.”안리영은 그녀를 안심시켰다.“그럼, 이 말을 저에게 한 이유가 뭐예요?”함소은은 직접적으로 안리영에게 물었다.안리영은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지원이가 저를 보낸 게 맞아요. 지원이는 지금 그곳에서 너무 불편해서 나오고 싶어 해요.”“나오고 싶으면 경찰을 찾으면 될 것을 저를 찾아 뭐 해요?”함소은은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가볍게 웃었다.“소은 씨가 지원이를 그곳에서 꺼내준다면 정태성을 만나게 도와줄 거예요.”안리영의 말을 들은 함소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함소은의 모습을 본 안리영은 그녀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지원 씨가 나오려고 하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을 텐데, 왜 저를 찾아오신 거죠?”함소은은 웃으면서 안리영에게
‘위선적이야!’그냥 거절하면 될 것을 방금까지 그녀와 여자 친구가 없다고 부정하던 조시언은 지금 또 여자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못 믿겠으면 물어봐요.”조시언은 안리영을 가리키며 말했다.안리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나랑 뭔 상관이야?’사실 이쯤 되면 여인은 조시언에게 거절을 당했기에 즉시 떠나는 것이 맞으나 여인은 대답을 요구하듯 안리영을 바라보았다.안리영은 그런 그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조시언을 노려봤다. 이어서 안리영이 대답하려는데 조시언이 먼저 말했다.“조금 전 여자 친구랑 산부인과에 갔던 일을 물어봤어요.”안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놀란 여인은 얼굴이 빨개서 뒤돌아 도망갔다.“삼촌은 여인들의 고백을 거절하는 법도 다양하네요.”안리영은 조시언을 조롱하며 말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조시언이 말했다.“쌀국수 왔어.”조시언이 말을 마치자 복무원이 쌀국수를 들고 왔다. 조용하게 앉아서 쌀국수를 먹던 안리영은 열심히 먹는 조시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자신도 열심히 먹었다.역시 장사가 잘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쌀국수가 정말 맛있었다. 얼큰하게 먹었던 안리영은 코끝에 땀이 났다.반면 우아하고 차분한 조시언의 모습은 마치 프랑스 파스타를 먹는 것 같았다.쌀국수를 먹은 후 조시언이 그녀와 할 말 도 다 했기에 안리영은 그와 작별했다.“삼촌, 나 먼저 갈게, 다음에 봐.”“리영아.”조시언이 귀국 후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어릴 적 그는 그녀를 항상 이렇게 불렀기에 안리영은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조시언을 바라본 그녀는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어봐, 스스로 추측하지 말고.”조시언의 말을 들은 안리영은 난감했다.다시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기에 나중은 없을 것이다.조시언과 헤어진 후 함소은을 찾아온 안리영은 문전박대를 당했다. 안리영은 전혀 놀라지 않고 그녀를 거절한 사람에게 말했다.“태성 씨가 보냈다고 소은 씨에게 전해주세요.”이 말은 확실히
“소고기 쌀국수 하나요. 맵기는 3단계로 해주세요.”안리영은 카운터에서 자신의 입맛에 따라 주문했다.조시언이 먹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주문을 마치자 그도 따라서 주문했다.“야채 쌀국수 하나 주세요. 맵기는 1단계로 해주세요.”안리영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삼촌도 먹을 거야?”조시언은 차분하게 말했다.“그럼, 너만 먹고 나는 앉아서 네가 먹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그의 농담을 들은 식당 주인은 웃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저희 가게에는 한 그릇을 같이 먹는 커플들도 많아요.”안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 오해를 받은 그녀는 이미 이 상황이 익숙해졌다. 예전에 조시언이 출국하기 전 그들이 함께 있으면 커플로 오해하곤 했었다. 심지어 학교 다닐 때도 개인 사정을 잘 모르던 선생님도 그들이 조기 연애한다고 오해하고 부모를 불렀다.현재 그들이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오해받고 있다.조시언을 힐끗 바라본 안리영은 그가 여전히 멋있고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네, 맞아요. 삼촌은 담백한 음식을 좋아해요, 고추를 너무 많이 넣지 마세요.”안리영은 일부러 사장님에게 이렇게 말했다.사장님은 멈칫하더니 멋쩍게 웃었다.“직계 가족은 아니죠?”혈연관계가 없었기에 직계가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를 친자식처럼 키웠기에 직계가족이나 다름없었다.이 화제에 유난히 민감한 그녀는 급히 사장님의 질문에 대답했다.“맞아요, 직계가족이에요.”그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던 조시언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안리영은 한숨을 쉬고 조시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삼촌, 뭐 마실래요?”“옆 가게에서 밀크티를 주문했어, 조금 있으면 가져다줄 거야.”조시언의 행동에 안리영은 놀랐다.‘언제 밀크티까지 주문한 거야? 왜 나는 모르지?’그러나 그의 이 모든 변화는 안리영에게 그가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예전의 그는 그녀가 밀크티와 쌀국수를 먹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이
소름이 돋은 안리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왜 또 만난 거야?”반갑지 않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인사했다.“삼촌.”검은색 셔츠에 짙은 색의 바지를 입은 조시언은 항상 변함없는 옷차림이었으나 안리영은 그를 볼 때마다 처음 만난 것만 같았다.“여긴 볼일이 있어서 온 거야?”조시언은 또다시 안리영에게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 친구가 여기에 있어.”“도움이 필요해?”조시언이 안리영에게 말했다.안리영은 생각에 잠겼다. 현재 윤지원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조시언에게 말한다면 그는 도울 것이다.그런데 윤지원이 그녀더러 함소은을 찾아가라고 했기에 그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아니, 고마워 삼촌.”안리영의 말에 가볍게 대답한 조시언이 물었다.“오늘 휴무야?”“응.”안리영은 대답하고 바로 후회했다. 조시언이 뭐라고 말할지 예측하였기 때문이다.그녀가 알고 있는 그는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안리영의 생각대로 조시언이 그녀에게 물었다.“그럼 같이 밥이나 먹을까?”그 당시 서로의 마음을 알아버린 이후부터 그에 대한 감정이 달라진 그녀는 조시언과 단둘이 있는 것이 불편했다.“아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안리영은 거절했다.“너에게 물어볼 게 있어, 아니 너랑 할 말이 있어.”조시언도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시간을 얼마 뺏지는 않을게, 그리고 너도 점심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그랬다. 마침 열두 시였다. 모든 것이 그렇게 공교로웠다.조시언이 말을 들은 나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고 또 그는 할 말이 있다고 하였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뭘 먹고 싶어?”차에 타자 조시언이 안리영에게 물었다.“아무거나.”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다.조시언은 핸들을 잡고 말했다.“그럼, 네가 좋아하는 매운탕 먹자.”확실히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 기품이 넘쳐흐르는 조시언과매운탕을 먹는다면 그녀 자신을 매운탕에 넣어서 끓여버리고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도 그를 보낸 것을 보면 강진혁은 그를 떠보려는 것이다.“정우 씨의 계획이 뭐예요 ?”나는 허진호에게 물었다.허진호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다. 진정우가 오랫동안 잠복하고 있었던 원인은 그곳을 망가뜨리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협조할 것이다.또한 강진혁도 이번 기회를 빌려 진정우를 철저히 제거하려 한다면 그들 중 누가 누구를 이기는지 봐야 한다.“정우 씨는 지원 씨에게 약속한 걸 다 기억하고 있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허진호는 진정우의 말을 나에게 전달 하러 온 것이었다.진정우가 직접 오지 않은 것은 얼굴을 마주하고 이별에 대한 아쉬움과 서로에 대한 걱정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기에 나에 대한 걱정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나는 허진호를 향하여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 하러 가라고 하세요, 그리고 나는 이곳에 계속 있을 수 없어요, 비록 안전하기는 하지만 너무 심심해서 병날 것 같아요.”“나가고 싶은 거예요?”허진호는 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그리고 음식도 너무 맛없어요.”나는 허진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허진호는 웃으면서 말했다.“알았어요, 제가 정우 씨에게 전달할게요. 대신 지원 씨를 이곳에서 내보내 줄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어요.”“정우 씨에게 말해주세요, 제가 자신을 잘 보호할 수 있다고요.”내가 이곳을 나가면 위험하지만 나는 자신을 스스로 지킬 것이다.허진호가 떠난 후 나는 그의 소식을 기다렸으나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다.보아하니 진정우는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는 것을 동의하지 않은 거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다행히 안리영이 나를 보러 왔다.“소은 씨를 찾아가 사람을 시켜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 달라고 해줘, 그리고 내가 소은 씨의 첫사랑 오빠를 찾아 줄 수 있다고 말해줘.”안리영더러 함소은에게 내 말을 전달해 달라고 했
나는 진정우가 강진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내가 경찰에 끌려와서 구속까지 당했기 때문이다.나는 변호사는 아니지만, 법을 좀 알고는 있다. 기껏해야 용의자일 뿐이라 조사에 협조만 하면 구속할 수는 없다.진정우는 분명 나를 안전한 곳에 가두고 보호할 생각인 것이다. 미리 말해줬기에 나는 긴장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조용히 있었다.처음으로 날 보러 온 사람은 허진호였다. 그는 오자마자 농담했다.“윤 부장, 이번 달 월급은 경찰 아저씨한테서 받아야겠네요.”회사에서의 직급과 최근 근무 상황을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웠다.“부대표님, 저 지금 구두로 사직 신청할게요. 그리고 이제 여기서 나가면 회사에 정식으로 수속 밟으러 갈게요.”“사직하라고 강요하러 온 게 아니니까,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알고 있어요. 제가 미안해서요. 제가 사장이면 저 같은 직원은 진작 잘라버렸을 거예요.”허진호는 눈썹을 찡긋하면서 말했다.“윤 부장은 고위층 직속 라인인데 그럴 일은 없죠.”허진호는 드디어 대놓고 말했다. 진정우와 배성재의 신분도 진작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한 것이다.나는 허진호를 놀려보기로 했다.“무슨 직속 라인이요? 진정우 씨 말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이미 재가 됐어요.”허진호는 입을 실룩거렸다.“윤 부장, 저는 남이 아니니 농담 그만 하세요.”“농담이라니요?”나는 계속 모른 척했다.그런 내 모습에 허진호의 표정이 풍부해졌다. 결국 허진호는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독순술로 말했다.“진정우 씨가 걱정하지 말래요. 여기 며칠만 있으면 될 거예요.”며칠만 있으면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너무 심심했다.지난번에 경찰에게 체포된 건 조나연의 남동생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그 망할 놈의 소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심술을 부렸을 때 강진혁이 데려갔으니, 아마 지금쯤 강진혁 밑에서 일할 것이다.너무 지루하던 차에 누군가 찾아왔으니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허진호를 계속 놀렸다.“진정우가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는 약하고 상처받고 있는 것 같다.옛날에는 이득을 챙기기 위해 시집을 보냈고, 전쟁 시기에는 위안부로 끌려갔으며, 지금은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다.나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남자 모델이라며. 그럼 남자 모델도 고퀄리티로 고르는 거야?”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은 기준이야.”이제야 왜 용준호한테 가짜라는 걸 들키려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드래곤킹은 가장 큰 수출 집단이다. 만약 배성재가 사칭이라는 걸 알면 진정우는 아무것도 조사해 낼 수가 없다.“강진혁은 이미 진짜 신분을 알았는데, 왜 용준호한테 말하지 않았을까? 일이 생기면 자신도 연루될 수 있을 텐데.”나는 그 점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그게 강진혁이 똑똑한 곳이야. 드래곤킹에 강진혁 몫도 있다지만, 강진혁에 관한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으니까 두려울 게 없는 거야. 그리고...”진정우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드래곤킹에 일이 생기길 바랄 거야.”나는 강진혁이 어느 정도 야망을 품고 있는지를 떠올렸다.“드래곤킹에 일이 나면 국내 루트를 혼자 독점하려는 거겠지?”진정우는 웃으며 대답했다.“똑똑하네.”“진우 씨가 이쪽 산업을 통째로 뽑아버리면 어쩌려고?”나는 진정우한테 계속 질문했다. 이런 불법 산업은 여러 단계별로 긴밀한 협력이 필요했다. 진정우가 몰래 잠입한 것도 그들을 송두리째 뿌리까지 뽑아버리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진정우는 절대 작은 불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강진혁은 이미 해외에 있는 브라운과 헤르나와 결탁했어. 그자들은 신세대 불법 산업의 대표 주자들이야. 내가 이 낡은 루트를 완전히 망가뜨린다고 해도, 강진혁은 다시 자기만의 새 루트를 만들면 돼.”진정우는 강진혁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는 이유를 밝혔다.“그럼 강진혁부터 처리해야지. 다시 일어날 수 없게.”나는 오만한 강진혁의 생각에 참을 수 없었다.“그래. 강진혁을 처리하는 것도 내가 맡은 임무 중 하나야.”진정우는 나를
진정우는 손가락으로 내 코끝을 두 번 세게 눌렀다.“너무 똑똑해서 탈이라니까.”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진정우의 손을 피했다.“피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진정우는 내 머리를 감싸고 말했다.“그만 흔들어. 더 흔들면 어지러워.”“그럼 이유를 말해봐.”나는 진정우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진정우는 거짓말을 할 때면 눈동자에 빛이 없다. 전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때 나는 미처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교통사고를 낸 진짜 범인이 누구인 건 알고 있지?”진정우는 내 속눈썹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진정우도 잘 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지원아, 너 속눈썹이 엄청 길구나. 어렸을 때랑 똑같네.”진정우가 또 화제를 돌렸지만, 나는 계속해서 내 생각을 말했다.“그 말은 용준호한테 보여주는 상처란 말이야?”“맞아. 내가 가짜 배성재라는 걸 용준호가 알게 해선 안 돼.”진정우는 그제야 인정했다.“근데 강진혁은 알잖아.”말을 꺼내자마자 강진혁과 용준호가 한 편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강진혁이 진정우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다고 해도 용준호에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배성재는 무슨 신분이야?”전에도 물었지만 진정우는 많은 걸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배성재가 관건인 것 같아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포주. 뭔 말인지 알겠어?”진정우의 말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무슨 말인지는 당연히 알겠지만, 진정우가 그동안 포주 일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쩐지 이소희가 드래곤킹에서의 일을 쉽게 조사해 내더라니.“배성재가 그냥 일반 모델인 줄 알았는데, 가장 큰 범죄의 원천이었네.”“가장 높은 신분은 아니야. 위에 또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 진정한 거물이고, 부하들이 전 세계 수십 개국에 퍼져 있어.”진정우는 엄숙한 표정으로 보태어 설명했다.여러 국가가 연루된 국제 범죄인 만큼, 배후의 실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 수 있었다.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망치려는 벌레들은 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