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동을 받았다.나는 이 집에서 얹혀서 자랐지만, 강유형의 부모님은 친부모님처럼 나를 관심해 주고 사랑해 주었다.그들은 완전히 나를 친딸처럼 대했다. 강유형의 형인 강진혁이 내가 이 집에 온 이후로 그들 형제는 눈 밖에 난 자식으로 되었다는 농담을 한 것이 생각났다.안리영의 말이 맞았다. 내가 강유형과 쉽게 헤어질 수 있으나 강씨 일가와는 쉽게 헤어질 수 없다.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문을 밀고 들어가자,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김희연은 바로 일어서서 다가왔다.“지원아, 왔어? 이제 식사하려고 하는데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아줌마, 아저씨, 안녕하세요!”내가 인사를 드리자 강유형도 강두식의 발길질에 일어섰다.그는 내 가방을 받고 말했다.“왜 이렇게 늦었어?”“당구 좀 치고 왔어.”신지태는 꼭 나와 만난 일을 그에게 말할 것을 알기에 숨김없이 알려주었다.강유형은 눈썹을 찌푸렸다.“다음에 갈 때 나도 불러.”그는 내가 이런 것들을 노는 것을 꺼렸다. 특히 그가 같이 없을 때 싫어했고 물론 내가 사적으로 그의 친구들과 접촉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죽은 친구의 아내와 붙어 다녔고 심지어 나에게 주지 않았던 서브 카드도 조나연에게 주었다.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화장실로 갔다. 강유형은 따라오면서 물었다.“너 왜 이래?”“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나는 손을 씻으면서 거울 속의 그를 향해 웃었다.“지원아, 난 이미 얘기했잖아. 이제 성질 좀 그만 부려.”강유형의 말에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손가락을 씻다가 왼손 중지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4년 전에 강유형이 술을 많이 마셔서 사람들과 싸우다가 내가 말릴 때 생긴 상처였다.당시 살점이 떨어졌는데 상처는 나았으나 그 부분이 움푹 들어갔다.강유형은 가장 큰 다이아몬드로 그 부분을 채워준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다이아몬드를 받지 못했다.“나 오늘 나연 씨를 만났어. 물건 살 때 네 서브 카드를 사용하더라.”줄줄 흐
고준석은 그의 비서이다.그래도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시선을 떨구면서 말했다.“지원아,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솔직히 말해주면 안 돼?”그의 말에는 무기력하고 어쩔 수 없는 퇴폐함까지 들어 있다.정말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강유형, 우린 헤어졌으니 이렇게 난감할 필요가 없어. 네가 조나연을 어떻게 보살펴 주든지 나랑 상관이 없잖아.”나는 속마음을 얘기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나에게 다가왔고 나를 세면대와 그의 가슴 사이로 가두었다.“헤어질 생각은 하지 마. 내일 혼인 신고하러 가자.”“강유형, 너 진심으로 나랑 결혼하고 싶어?”내 귓가에 다시 그때 그와 신지태의 대화가 울렸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우린 너무 익숙해서 섹스하고 싶은 생각까지 없다며?”“지원아, 그건 그냥 농담이라고 했잖아. 그날 밤에 너도 봤지? 난 너에 대해...”“강유형.”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그날 밤을 다시 떠올리기 싫었다.“그날 밤은 내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야. 알겠어?”그의 동공은 격렬히 수축하였고 쩔쩔매면서 나에게 물었다.“내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날 용서해 줄 수 있어?”내가 이미 말했는데 그는 계속 물었다. 그러나 난 다시 말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를 밀어냈다.“비켜. 난 배고파서 뭐 좀 먹어야겠다.”“좋아. 그럼 난 다시 조나연과 연락하지 않을게.”그는 핸드폰을 꺼내면서 카톡과 연락처에서 조나연을 차단하였다.“지금 됐지?”그의 짜증 난 목소리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강유형, 내가 아줌마와 아저씨께 우리가 헤어졌다고 말씀드리면 욕먹을까 봐 그런 거지? 일단 아무 말도 안 할게.”“지원아, 난 그런 뜻이 아니야. 난 정말 너와 결혼하고 싶어.”강유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우린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고 결혼식이 없고 심지어 그런 관계도 없었지만 난 예전부터 이미 널...부인으로 생각했어.”‘부인’, 이 두 글자에 내 마음이 떨렸다.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아버지는 밖에서 종래로 어머니를 ‘
강두식과 김희연의 기대에 찬 눈빛에 나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강유형이 다시 조나연과 조금이라도 엮이면 혼인 신고를 했더라도 그를 떠날 것이라고 다짐했다.내가 동의하자 밥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분위기도 가볍고 따뜻해졌다.식사를 마친 후 나는 당연히 떠나지 못했다.침실에 돌아온 나와 강유형은 지난번보다 더 어색했다.“먼저 씻어.”강유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침 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안리영이 걸어온 전화였다.“너 먼저 씻어. 나 전화 받을게.”강유형이 욕실에 들어간 다음에 나는 전화를 받았다. 안리영이 질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너 어젯밤에도 안 왔고 오늘도 안 왔네. 설마 다시 강씨 집안으로 돌아간 거야?”“응.”침실 가운데 있는 큰 침대를 보면서 나는 낮은 소리로 대답하였다.이에 안리영은 의아해했다.“강유형과 또 화해한 거야?”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내일 혼인 신고할 거야.”안리영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잘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지??”나는 창가에 와서 하늘에 있는 반원 모양의 달을 보면서 말했다.“달도 흐리고 맑음, 차고 이지러질 때가 있으니 인간도 그런 거야. 강유형은 조나연의 연락처를 차단했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서 기회를 다시 한번 주려고.”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마지막으로.”안리영은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였다.“지원아, 넌 안전과 행복을 위해 남자를 찾는 것만 기억해.”“알았어.”전화를 끊은 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사색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없었고 마음도 슬프거나 기쁘지 않았다.문득 등이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강유형은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그는 상의를 입지 않았고 밑에는 잠옷 바지만 입었다. 나를 껴안은 그의 팔에는 아직 닦아내지 않는 물방울이 걸려 있다.야성적이고 섹시해 보였다.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에 대고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했다.오늘은 웃어야 하고 기뻐야 하며 앞으로 매일 행복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내가 아래로 내려올 때 아줌마와 아저씨는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했고 집의 소파 커버와 식기는 모두 설날에만 사용하는 상스러운 양식으로 바꾸었다.“지원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하고 오면 우리 제대로 축하하고 결혼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자.”김희연은 나보다 더 들떠 있는 것 같았다.“좋아요!”나는 그러기로 했다.김희연은 나를 보면서 말했다.“오늘 정말 예쁘게 입었구나. 빨간색이라면 더 예쁠 텐데.”“빨간색은 너무 튀잖아요.”이에 나는 이렇게 해명했다.“쓸데없는 참견하지 마. 지금 우리 때와는 다르다고. 누가 빨간색이나 자주색 같은 거 입냐고. 지원아, 네가 입고 싶은 거 입어. 어머니의 말은 신경 쓰지 마.”강두식은 호칭을 ‘어머니’로 바꿔주었다.나는 웃었고 마음이 따뜻해졌다.김희연은 나를 밥상에 앉혔고 평소처럼 푸짐한 아침 식사 외에 계란 두 개와 소시지 한 개가 더 추가되었는데 낯이 뜨거운 모양으로 플레이팅 해놓았다.내가 묻기도 전에 김희연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건 네 할머니때 전해 내려온 일찍 아들을 낳는 비법이야. 난 남아선호 사상은 없어. 그냥 너와 유형이가 일찍 애를 가졌으면 좋겠어. 손자이든 손녀이든 다 좋아.”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식탁 위에 놓인 계란과 소시지는 정말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랐다.“상징적으로 조금씩 먹으면 돼.”김희연은 내 옆에 앉아서 계란을 까고 나에게 주었다.나는 김희연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얼굴을 붉히면서 각각 한 입씩 깨물고 머리를 숙이고 죽을 먹었다.내가 다 먹을 때까지 강유형이 나타나지 않았다.“아줌마, 유형은요?”“아직 내려오지 않았어.”김희연의 말이 끝나기 전에 계단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리면서 강유형이 내려왔다.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느꼈다.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지
“나연 씨가 왜 여, 여기에 있어요?”고준석도 나처럼 놀라서 조나연에게 물었다.조나연은 잠옷을 여미면서 말했다.“저 여기서 살아요.”그녀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열쇠를 향했다.“남의 집에 들어올 때 왜 노크를 안 하세요?”고준석은 한 걸음 나서서 말했다.“아닙니다...여기는 강 대표님이 지원 씨를 위해 마련한 집입니다.”고준석은 말하면서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내서 강유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나도 당황해서 실수로 스피커를 눌렀다.“대표님, 봉화타운하우스에 있는 집은...”고준석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강유형은 그의 말을 끊었다.“그 집은 나연이에게 주었어.”조나연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그럼 지원 씨는...”고준석이 다시 물으려고 했으나 강유형이 재차 그의 말을 끊었다.“지원이에게 다른 것을 줄 거야. 그리고 이 일은...지원이에게 비밀로 해.”고준석은 어쩔 수 없으면서도 난감하고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미안한 짓을 한 사람은 강유형이 아닌가?그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이 일은 자기가 너무 경솔하게 처리한 탓이다.그는 사전에 강유형에게 물어보고 나서 나를 데리고 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엎질러진 물이라 돌이킬 수 없다.나는 그 자리에서 당장 폭로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고준석이 꼭 사퇴당하게 될 것이다.최근 경기가 침체되어 많은 회사에서 감원하고 있어서 급여와 대우가 좋은 직장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게다가 고준석은 지난달에야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지금 잘리면 연애도 실패하게 될 것이다.이런 상황에 고민하거나 미치지 않는 나에 대해 정말 탄복했다.고준석은 무안한 듯 전화를 끊고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 씨...”“준석 씨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나는 잠시 멈추고 다시 말했다.“준석 씨는 옆에서 차나 마시면서 기다려주세요. 저는 나연 씨와 할 얘기가 있어요.”나는 고준석을 멀리 보내지 않았다. 조나연이 잠시 후에 또 기절하거나 배가 아픈 척하는 수작을 부리면 내가 혼자
나의 이 두 마디에 조나연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되었다.사실 그녀의 컨셉이 정말 엉망진창이다. 내연녀가 되려면 뻔뻔하게 되든지. 강유형이 나에게 줄 집도 그녀에게 줬으니 그녀는 한껏 당당해져도 될 것 같다.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분명히 염치없는 일을 했는데도 순수한 척하려고 하였다.창녀이면서 열녀인 척하는 게 아닌가.“유형 씨는 지원 씨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조나연이 나에게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다.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아직 강유형의 사랑을 바라고 있다면 머리가 정상이 아니지.“강유형이 나연 씨를 좋아하면 되니까요.”나는 다시 이렇게 쏘아붙였다.조나연은 괴롭힘을 당했듯이 순간 눈물이 글썽거렸다. 다행히 내가 고준석을 옆에 있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조나연이 대성통곡이라도 하면 난 입이 열개라도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지원 씨, 무슨 뜻이에요? 오늘 혼인 신고하러 가잖아요?”조나연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할 때 눈에는 묘한 빛이 번쩍이었다.정말 야심이 많은 여자이다.갑자기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네. 이따가 가서 신고할 거예요. 강유형이 스님을 찾아가서 물었는데 10시 58분에 혼인 신고하면 백년해로하고 자손이 번창할 수 있다고 했어요.”조나연 눈 밑에 드러난 희색은 내 말에 산산조각으로 되어버렸다.그녀의 기대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나는 재차 충격을 주었다.“혼인신고를 마치면 나연 씨도 와서 축하주 드세요. 축의금도 잊지 마시고요.”조나연은 몸이 비틀거리더니 넘어진 척하려고 할 때 그녀가 예전에 했던 짓이 생각났다.“강유형이 여기에 없어서 넘어져도 나연 씨를 안을 사람이 없어요.”나의 쏘아붙인 말에 조나연은 말문이 막혔다.오로지 입술만 꽉 깨물었다.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아마 이렇게 강유형을 사로잡았는지도 몰라.어쨌든 이미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오늘부터 강유형은 내 인생에서 일반인으로 되었다.오늘 이런 일을 당했으나 이상하게도 난 그렇게 슬퍼
내가 다시 강유형의 전화를 받았을 때, 법운사에서 경을 듣고 있었다.“지원아, 곧 11시인데 왜 아직 안 왔어?”강유형이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기다려.”나는 일부러 이런 것이다.강유형을 10년 동안 사랑하면서 그를 몇 번이나 기다렸는지 기억도 안 난다.오늘 강유형이 나를 한번 기다리게 하는 것도, 내 지난 10년의 청춘과 사랑을 위해 한 작은 복수이다.“그럼 빨리 와. 스님이 말씀하신 길시를 놓치지 마.”강유형은 거듭 재촉하였다.지금 내가 바로 수정 스님 앞에 앉아 있다. 이분은 내 결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이로써 이분은 오늘 내가 강유형과 혼인 신고하는 일을 전혀 모르실 뿐만 아니라, 길시를 잡아 주신 적도 없는 것을 알 수 있다.나는 나지막한 소리로 응답하고 나서 전화를 끊고 전원마저 꺼버렸다. 그러고 나서 계속 수정 스님이 경전을 강의하시는 것을 들었다.강유형이 예불하는 것은 어렸을 때 한 번 크게 앓은 적이 있었는데 김희연이 산에서 사흘 밤낮으로 무릎을 꿇고 빌어서 완쾌한 것이라고 한다.그 후부터 김희연은 불교를 믿기 시작했고 강유형이 불문의 속가제자로 되게 하였으며 수정 스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게 하였다.강유형의 껌딱지인 나는 자연스레 여러 번 사찰에 따라왔고 스님은 특별히 우리 둘을 위해 인연의 끈을 묶어주었다.아쉽지만 나와 강유형의 인연의 끈은 끊어졌다.나는 오후 3시에 법운사를 떠났다. 핸드폰의 전원을 켜지 않은 채 차를 몰고 구청으로 갔다.강유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나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여기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예전의 내가 그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나는 차를 세우고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수많은 메시지와 발신 정보가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강유형이 가장 많이 보냈다.53통의 부재중 전화와 7개의 메시지가 있다.[지원아, 왔어? 핸드폰이 왜 꺼져 있어?][지원아, 시간이 다 되가. 늦으면 길시를 놓치겠어.][윤지원,
나는 비아냥거리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안리영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지원아, 강유형과 그 과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너에게 들킨 거지?”역시 내 절친이다. 그녀는 나의 마지노선이 어디까지 있는지 알고 있다.“강유형은 조나연에게 집을 한 채 줬는데 원래 나에게 주려고 한 집이었어.”나는 가장 짧은 말로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안리영은 잠자코 있었다가 한참 후에 이를 갈면서 말했다.“너...”나는 그녀가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짐작할 수 있었다.“다시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저 망할 놈. 네가 자꾸 용서하면 나중에 또 그런 짓을 할 거라고!”안리영의 애정관은 나와 같았다.“나도 알아.”“좋아.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천천히 생각하자. 먼저 그놈의 전화를 받아. 무슨 변명을 하는지 들어보자. 이따가 나한테 와.”안리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다른 사람과 근무 교대를 해야겠다.”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영상통화를 끊었다.강유형의 전화는 끈질기게 울렸다. 나는 통화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윤지원, 너 뭐 하는 거야? 왜 그랬어?”강유형의 고함에 내 고막이 찢을 뻔했다.나는 핸드폰을 멀리 들고 그가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잦아질 때 핸드폰을 귓가에 댔다.“강유형, 어제 내가 아줌마와 아저씨 앞에서 너와 혼인 신고를 하겠다는 것은 너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어.”“헛소리 집어치워! 지금 어디야? 오늘 왜 혼인 신고하러 안 갔어?”그는 화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고준석과 조나연은 모두 오늘 내가 그 집에 갔던 일을 언급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그 얘기를 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만 답했다.“나 법운사에 갔어. 수정 스님을 따라서 경전을 좀 읽었거든.”나의 말에 강유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된 것을 알아챘다.“지원아, 내 말 좀 들어봐...”“됐어. 넌 예전부터 변명을 너무 많이 해서 이제 듣기가 지겹고
진정우와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소영이 마당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봤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날리며 그 장면이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진소영은 책에 몰입해 있었고 우리가 내린 것도 몰랐다. 이때 도성운이 크게 외쳤다.“소영아, 누가 왔는지 봐봐!”“성운 오빠, 엔진 소리가 어찌 크던지 단번에 오빠인 줄 알았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고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성운은 조금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었다.“나만 온 거 아닌데. 다른 사람도 있어.”진소영은 책을 계속 읽으며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성운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나는 가볍게 그를 막으며 사뿐사뿐 진소영에게 다가갔다.“이 책 저번에 같이 읽었잖아?”지난번에 봤던 오래된 연애 소설 책이었다. 진소영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고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언니!”나는 환하게 웃었고 진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내 뒤에 있는 진정우를 보고 급히 책을 던져두고 그에게 달려갔다.“오빠!”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우가 진소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평소에도 진소영을 많이 챙겼다. 나는 그들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진소영이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링」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책이 많이 갈라지고 색이 바래 있었기에 분명 여러 번 읽은 책일 거다.내용이 궁금해져서 책을 넘기다 진소영이 다가와서 책을 빼앗으려 했다.“안 돼요. 보지 마세요.”그녀는 책을 빼앗으며 말했다.“왜? 이 책에 비밀이라도 있어?”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그럴 리가요. 언니는 오빠랑 연애 중인데 이런 소설을 보면 안 되죠.”그녀의 얼굴이 빨개지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아, 그럼 연애 초보인 너에게 딱 맞는 교과서겠네.”“언니!”진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쏘아봤다.나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책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그때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들어와 물 좀 마셔.”나는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정우가 물을 꺼내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저녁노을이 빨갛게 물든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떨렸다.“이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내가 감탄하며 말했다.“나도 그래.” 그러자 진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제 별로 감동이 없었다.그런데 차에 앉아 그의 SNS를 보니 조금 전에 본 노을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글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가 옆에 있어서.]한눈에 보면 사진과 글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그 의미가 확 와닿았다. [이건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네가 옆에 있어서.]진정우는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형, 이번에 결혼식 하려고 돌아온 거야?” 차를 운전하던 남자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는 진정우의 친구였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우리를 데리러 왔다.“아니. 이번은 아니야.” 진정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다음에 한다는 뜻인가?“형수님 미인이시네.” 그 남자가 나를 몇 번이나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그럼.”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형수님 나는 도성운이라고 해요“ 그 남자가 친근하게 자기를 소개했고 나도 웃으며 말했다.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알아요. 알아요.” 도성운은 두어 번 반복하며 말했다. “소영이가 매일 말하더라고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알죠. 형수님 이름이 윤지원이란걸.”나는 그제야 부끄러움을 좀 떨쳐내고 있었는데 도성운은 또 다른 말을 덧붙였다.“그래요? 그럼 앞으로 아마 자기 소개할 일 없겠네요.”“그러묭. 이렇게 예쁜 분이 오면 다들 한 번에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되는 칭찬을 들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그런데 진정우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보니까, 네가 먼저 분위기 잡은 것 같네.”도성운은 진정우를 많이 존경하고 따라 배우고 싶
그가 진지하게 내게 농담하는 건가?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그래서 나는 그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오히려 순수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었다.“안 믿으면 한번 해봐?”진정우의 뜨거운 시선에 내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나는 그를 한 번 꼬집으며, 일부러 화난 척했다.“너 계속 듣고 싶어? 안 듣고 싶으면 말 안 할 거야.”“듣을거야!”나는 창밖을 보며, 강진혁이 그때 나에게 했던 말을 진정우에게 전했다.그는 내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 듯 물었다.“너 걱정되는 거야?”“응, 하지만 나는 강유형이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야. 회사가 걱정이야.”내가 그렇게 바로잡자, 진정우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알아, 너는 이 일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거라고 느끼는 거지?”진정우는 정말 나를 너무 잘 안다.“너의 걱정이 틀린 건 아닐 거야. 혹시 강진혁이 돌아오는 것도 이미 다 계산된 일일 수도 있어.”진정우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그럴 수도 있어?”내가 의심하고 있었던 부분을 진정우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니, 조금 충격을 받았다. 강진혁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안다. 그는 늘 나와 강유형을 위해 양보하며, 언제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니까.게다가 강진혁은 4년 전에 회사를 떠나고 얼마 전에 돌아왔다. 그렇게 회사를 걱정한다면 굳이 4년 전에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거야.”진정우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지원아, 사실 너는 남자들에 대해 잘 몰라.”나는 그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그럼 남자의 입장에서 말해봐.”“강진혁이 너 좋아하지?”진정우는 직설적으로 말했다.“응, 나도 이제야 알았어. 예전엔 몰랐고 이번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거야.”나는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강유형이랑 비슷한 시기에 좋아했을 거고 그 감정은 강유형보다 더 강했을 수도 있어.”진정우는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걸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누구나 속고 사는 걸 좋아하진 않으니까.나는 그를 바라보며 민감하게 물었다.“혹시, 앞으로 나를 속이려고 하거나 이미 나한테 뭔가 숨긴 거 있어?”진정우는 잠시 침묵했다.“...아니.”그 두 마디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내 입장을 밝혔다.“너무 싫어.”그러자 그의 목젖이 조금 움직였다.“알겠어.”만약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명확하게 말하고 싶었다.그때 공항 대기실에 비행기 탑승 안내가 나왔고 해외행 비행기였다.나는 본능적으로 강유형을 떠올렸다. 그가 짐을 끌고 보안 검색대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해외에 무엇을 하러 가는 걸까?사업 얘기라도 하러? 아니면... “우리 이제 보안 검색대 쪽으로 가자.” 진정우가 내 생각을 끊으며 말했다.“어!” 나는 대답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강유형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진정우가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정우의 표정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불안하고 조금 죄책감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가자.”우리는 보안검색을 무사히 통과하고 비행기도 무사히 탑승했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 전, 내 휴대폰에 한 통의 미처 읽지 못한 메시지가 도착했다.강유형이었다.[안전 비행.]그 문자를 보며, 예전에 그가 출장을 갈 때마다 내가 보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그때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보내곤 했다.어느 날, 강유형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너 그런 말 너무 촌스럽잖아. 다음엔 다른 말로 보내봐. 새로 배운 거 있으면 알려줘.”그 이후로 나는 그 말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안전 비행.]그 문구는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었다.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나는 가까운 사람과 헤어질 때마다 늘 그 말을 떠올린다.다시 볼 수 있을지라는 두려움이 함께 밀려오기 때문이다.하지만 강유형은 내 마음을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