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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Author: 꽃길
내가 다시 강유형의 전화를 받았을 때, 법운사에서 경을 듣고 있었다.

“지원아, 곧 11시인데 왜 아직 안 왔어?”

강유형이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기다려.”

나는 일부러 이런 것이다.

강유형을 10년 동안 사랑하면서 그를 몇 번이나 기다렸는지 기억도 안 난다.

오늘 강유형이 나를 한번 기다리게 하는 것도, 내 지난 10년의 청춘과 사랑을 위해 한 작은 복수이다.

“그럼 빨리 와. 스님이 말씀하신 길시를 놓치지 마.”

강유형은 거듭 재촉하였다.

지금 내가 바로 수정 스님 앞에 앉아 있다. 이분은 내 결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이로써 이분은 오늘 내가 강유형과 혼인 신고하는 일을 전혀 모르실 뿐만 아니라, 길시를 잡아 주신 적도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나지막한 소리로 응답하고 나서 전화를 끊고 전원마저 꺼버렸다. 그러고 나서 계속 수정 스님이 경전을 강의하시는 것을 들었다.

강유형이 예불하는 것은 어렸을 때 한 번 크게 앓은 적이 있었는데 김희연이 산에서 사흘 밤낮으로 무릎을 꿇고 빌어서 완쾌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부터 김희연은 불교를 믿기 시작했고 강유형이 불문의 속가제자로 되게 하였으며 수정 스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게 하였다.

강유형의 껌딱지인 나는 자연스레 여러 번 사찰에 따라왔고 스님은 특별히 우리 둘을 위해 인연의 끈을 묶어주었다.

아쉽지만 나와 강유형의 인연의 끈은 끊어졌다.

나는 오후 3시에 법운사를 떠났다. 핸드폰의 전원을 켜지 않은 채 차를 몰고 구청으로 갔다.

강유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나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여기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예전의 내가 그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차를 세우고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수많은 메시지와 발신 정보가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강유형이 가장 많이 보냈다.

53통의 부재중 전화와 7개의 메시지가 있다.

[지원아, 왔어? 핸드폰이 왜 꺼져 있어?]

[지원아, 시간이 다 되가. 늦으면 길시를 놓치겠어.]

[윤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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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25화

    나는 비아냥거리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안리영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지원아, 강유형과 그 과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너에게 들킨 거지?”역시 내 절친이다. 그녀는 나의 마지노선이 어디까지 있는지 알고 있다.“강유형은 조나연에게 집을 한 채 줬는데 원래 나에게 주려고 한 집이었어.”나는 가장 짧은 말로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안리영은 잠자코 있었다가 한참 후에 이를 갈면서 말했다.“너...”나는 그녀가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짐작할 수 있었다.“다시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저 망할 놈. 네가 자꾸 용서하면 나중에 또 그런 짓을 할 거라고!”안리영의 애정관은 나와 같았다.“나도 알아.”“좋아.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천천히 생각하자. 먼저 그놈의 전화를 받아. 무슨 변명을 하는지 들어보자. 이따가 나한테 와.”안리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다른 사람과 근무 교대를 해야겠다.”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영상통화를 끊었다.강유형의 전화는 끈질기게 울렸다. 나는 통화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윤지원, 너 뭐 하는 거야? 왜 그랬어?”강유형의 고함에 내 고막이 찢을 뻔했다.나는 핸드폰을 멀리 들고 그가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잦아질 때 핸드폰을 귓가에 댔다.“강유형, 어제 내가 아줌마와 아저씨 앞에서 너와 혼인 신고를 하겠다는 것은 너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어.”“헛소리 집어치워! 지금 어디야? 오늘 왜 혼인 신고하러 안 갔어?”그는 화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고준석과 조나연은 모두 오늘 내가 그 집에 갔던 일을 언급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그 얘기를 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만 답했다.“나 법운사에 갔어. 수정 스님을 따라서 경전을 좀 읽었거든.”나의 말에 강유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된 것을 알아챘다.“지원아, 내 말 좀 들어봐...”“됐어. 넌 예전부터 변명을 너무 많이 해서 이제 듣기가 지겹고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26화

    “지원아, 엄마가 저녁에 특별히 성대한 축하연을 준비했고 친척과 친구들을 초대했어. 저녁 6시 전에 꼭 돌아와야 해.”김희연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직 나와 강유형이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어젯밤에 김희연과 강두식의 태도를 생각하면, 강유형은 혼날까 봐 말하지 않는 것 같았다.핸드폰 넘어 들려온 김희연의 기쁨과 기대가 넘치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와 강유형이 혼인 신고를 하지 않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잠깐 숨길 수 있어도 오랫동안 숨길 수 없다.더구나 지금은 잠깐이라도 숨길 수 없는 상황이다.김희연이 초대한 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간다면 그녀의 체면이 더욱 망가질 것이다.“아줌마.” “얘도 참, 이제 어머니라고 불러야지. 내가 예물을 안 줘서 안 부르는 거야?”김희연의 농담에 원래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마음이 갑자기 괴로웠다.“아줌마, 죄송해요. 저...저는 영원히 어머니라고 부를 자격이 없을 거예요.”사실 10년 동안 나는 많은 순간에 김희연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었다.그러나 이 소원을 영원히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무, 무슨 소리야?”김희연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지원아, 날 어머니로 부르는 게 불편해?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도 돼...”“저희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예요.”나는 김희연의 말을 끊었다.“뭐?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지원아...”김희연은 화들짝 놀랐다.“아줌마, 저희 헤어졌어요.”이 말을 하자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김희연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실망해서 견딜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몇 년 동안 나를 친딸처럼 키웠다. 내가 진정한 가족이 되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나도 알고 있다. 오늘 아침에 떠날 때 그녀는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집에 돌아오면 내가 어머니로 부르는 것을 기대한다고 하였다.나는 불안과 긴장을 삼키고 조심스레 불렀다.“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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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리영은 내 생각을 눈치챘다.“어디 갈래? 내가 같이 있어 줄게. 아니면...”“내 집에 가서 같이 짐 정리하자.”나는 안리영의 말허리를 끊었다.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너...예전부터 준비했어?”“예전부터가 아니라 며칠 전이야.”나는 손가락으로 뒷좌석을 찔렀고 그 위에 내가 사 놓은 침구가 놓여있다.“어제 조나연과 같이 샀어.”안리영은 내 말을 듣자 놀라운 표정을 지었고 눈 밑에는 가십에 대한 흥미로 가득 찼다.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 털어놓았다. 그녀는 화가 나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혼인 신고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강유형은 정말 신시대 바람둥이 나쁜 남자이네.”“나쁜 남자는 시대와 상관없어.”나도 덩달아 농담을 던졌다.안리영은 나를 보면서 말했다.“지원아, 내 앞에서 억지로 웃을 필요가 없어.”“나 정말 별로 슬프지 않았어. 아마 나도 그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제 너무 익숙해서 그에 대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아.”나는 정말 이런 느낌이 들었다. 훗날에 나는 이런 너무 익숙해서 평범해진 감정은 동굴에 오래 보관된 술처럼 뒤늦게 취기가 많이 올라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나도 그렇고 강유형은 더욱 그랬다.안리영은 내 친부모님의 집에 대해 몰랐다. 내가 강씨 집안에 들어가서 학교에 다닐 때 그녀를 알게 된 것이다.“이 집은 좀 멀고 낡았지만 괜찮네.”안리영와 나는 말을 빙빙 돌아가면서 하지 성격이 아니고 항상 솔직하게 말했다.“응. 부모님과 내가 함께 살았던 곳이라 파괴하고 싶지 않아.”나는 침구를 소파 위에 올려놓고 새로 산 주전자를 씻고 물을 끓였다.안리영은 혼자 구경하고 나서 마지막에 주방의 문에 기대면서 나를 바라보았다.“조금 낡았지만 아주 따뜻한 느낌이 들어. 넌 예전에 정말 행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그래. 그 교통사고가 없었더라면.지금까지도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 아침에 날 학교에 데려다주시면서 오늘 계약이 성사하면 놀이공원을 만들어줄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28화

    청평군.나는 고속철도를 4시간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마침 등불이 갓 밝혀질 초저녁이었다.해동만큼 번화롭지는 않으나 불빛이 화려하고 소도시의 낭만적인 면이 있다.안리영은 시간에 맞춰서 전화하였다.“도착했어? 숙소는 구했고?”그녀는 내가 이렇게 급하게 떠날 줄은 몰랐다.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고 물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주소와 차표 시간까지 알려주었다.그녀는 강유형이 찾아와서 매달릴까 봐 두려워서 이렇게 급하게 떠나는 것이냐고 물었다.나는 강유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지금의 그는 나한테 바람맞아서 엄청나게 화나고 있을 것이다.내 생각이 맞았다. 그가 왜 혼인 신고를 하러 가지 않느냐고 따진 후로 메시지나 전화가 한 통도 없었다.내가 이렇게 급히 온 이유는 예전부터 오고 싶었고 또한 나는 강유형의 부모님이 계속 연락할까 봐 두려웠다.그들은 꼭 나를 찾아와서 설득할 것이다.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을 먹었기에 그들이 계속 찾아와도 그들은 정력만 낭비하게 되고 나는 대응하기에 지치게 된다.그렇다면 내가 차라리 일찍 떠나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낫다.심지어 나는 자주 사용했던 핸드폰 번호도 비행모드로 설정하였다. 지금 안리영은 강유형도 모르는 나의 다른 번호로 전화를 한 것이다.이 번호는 아버지의 것이고 줄곧 핸드폰의 다른 유심카드 트레이에 꽂혀 있었다. 10년 동안 한 번도 울리지 않았고 지금 처음으로 사용했다.“아직 찾지 않았어. 급하지 않아.”나는 이 낯선 도시를 둘러보면서 갑자기 느긋한 느낌이 들었다.“뭐가 안 급해? 지금 벌써 몇 시야?! 어서 찾아야지. 안전하고 좋은 호텔을 찾아. 자기 전에 옷장과 침대 밑을 검사하고 창문도 닫고 문을 안에서 잠가야 해...”안리영은 주절주절 신신당부하였다.나는 웃으면서 마음이 울컥했다. 그래도 그녀의 관심이 있어서 다행이야.“그래. 알았어. 그렇게 할게.”“밥 꼭 먹어야 한다. 그곳은 배달 앱이 있겠지?”안리영이 이 말을 할 때 마침 배달원이 지나갔다.“내가 한 명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29화

    이 사람은 전체적으로 거칠고 딱딱하며 조금 무서운 인상을 주었다.몇 년 동안 내가 만났던 남자들은 모두 피부가 하얗고 잘 다듬었으며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양복과 코트를 입는 그런 부류였다.눈앞의 남자가 나에게 준 첫인상은 방금 그런 곳에서 풀려난 사람 같았다.나는 무의식적으로 가방을 꽉 쥐었다. 떠나기 전에 안리영이 내 가방에 넣어준 호신용 스프레이와 호신용 칼이 생각났다.하지만 내가 이것들을 만지기도 전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택시의 시동을 걸고 떠났다.방금 왜 날 쳐다본 거지?나는 그 영문을 몰랐지만 방금 이 도시에 와서 치유된 마음이 다시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경계심 때문에 나는 도시의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했다. 택시가 목적지에 이르자 나는 계산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 택시가 떠나는 것을 보자,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녁 10시가 되었다. 이 시간에 여기에 온 것은 확실히 적절하지 않았다.예전에 부모님이 살던 곳을 찾고 싶다면 사실 대낮에 찾아와도 되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미 왔으니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지금 있는 이곳은 매우 허름해 보였다. 벽은 너덜너덜해졌고 바닥도 망가져서 울퉁불퉁하였으며 길에는 물이 고여 있다.나는 이런 길에서 캐리어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없어서 힘겹게 손으로 들고 갈 수밖에 없었다.아버지가 남겨 주신 주소는 옛골목 42호였다. 옛 거리의 집 건물 입구에 붙어 있는 문패를 보고 찾으니 정말 찾아냈다. 입구에 ‘임대’라는 글자가 씌어 있다.이런 집을 임대할 수 있다고?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곳에 와서 집을 구한 사람이 있겠어?나는 속으로 투덜대면서 들어갔다. 이곳은 작은 마당이 있고 사면은 모두 방이 있으며 마당 중간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어두워서 무슨 나무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아버지는 이 나무가 은행나무이고 자라나는 것을 지켜봤다고 알려준 적이 있었다.“사람을 찾으러 왔어? 아니면 숙박하러 왔어?”어떤 노인의 목소리가 전해왔다.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였다. 손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30화

    “꼬맹이.”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매우 매력적이고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내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진혁 오빠.”원래 핸드폰 번호를 바꾸면 강씨 집안의 사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강유형의 형인 강진혁이 이 번호를 알고 연락까지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내 번호를 저장해서 날 잊지 않았나 봐.”강진혁은 조롱 섞인 말투로 말하였다.그는 강유형보다 두 살 위였고 출국하지 않을 때는 나를 많이 챙겨주었으며 늘 ‘꼬맹이’라고 불렀다.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의 말투에 불만이 들어 있다.그가 방금 떠난 2년 동안에 나는 가끔 그와 연락하면서 그쪽에서 잘 지냈는지 물어보곤 했는데 나중에는 점점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강진혁은 원래 소극적인 성격이라 가족들과의 연락도 적었고 나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지금 갑자기 이런 전화를 하는 것은 아마 나와 강유형의 결혼이 무산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강진혁은 가족과 연락이 뜸하지만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다.“진혁 오빠는 이 번호를 어떻게 알았어요?”나는 직설적인 사람이라 궁금한 점이 있으면 추측하기 싫어하고 바로 묻는다.“예전에 통화요금을 내겠다고 나한테서 돈을 빌려 간 적이 있었잖아.”강진혁의 말을 듣고 나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공부의 신이야. 통화요금을 한번 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전화번호를 기억했고 그것도 10년 동안 기억했다니!당시 부모님이 사고가 난 후 아버지의 핸드폰은 나에게 남긴 유품으로 되었다. 갑자기 어느 날에 핸드폰이 정지된 것을 발견했다. 통화요금을 내고 싶었지만 당시 돈이 없었다. 김희연과 강두식에게 말하기가 어려워서 나는 강진혁을 찾아갔다.그는 내가 돈을 가지고 다른 용도로 쓸까 봐 어디에 쓸 것이냐고 물었다. 내가 통화요금을 낸다고 하자 그는 믿지 않고 나를 따라갔다.마지막에 그는 통화요금을 지불했고 이 번호까지 기억한 것이다.당시 그가 낸 통화요금은 내가 갚는 것을 까먹었다. 그래서 그의 전화를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31화

    원래 이런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는데 강진혁의 말이 마치 기억의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처럼 지나간 일들이 머릿속에서 오래된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유형이가 무슨 짓을 했어? 오빠한테 말해줄 수 있어?” 내가 침묵하자 강진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내가 말하지 않으면 그들은 의아해할 것이고, 강유형은 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며칠 뒤에 내가 돌아가면 강유형 부모님도 물어볼 게 뻔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금 얘기해서 나중에 다시 이 문제를 마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강유형 다른 여자랑 얽혀있어요.” 내 말에 강진혁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에 난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 여자는 강유형 친구 아내예요. 두 사람 사이의 소문은 아저씨 아주머니께서도 알고 계시고요.”강진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오빠도 알고 있죠, 그렇죠?”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나와 강유형은 이미 결혼식을 올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의 부모님이 이 문제를 물어보거나 조사할 것은 당연하고, 강진혁이 아버지께 묻지 않을 리도 없었다.“유형이는 너를 정말 많이 좋아해.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닐까?” 강진혁은 내가 강유형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와 똑같이, 이제는 강유형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의외는 아니었다. 그 몇 년 동안 강유형은 자주 나를 아내라고 부르며 다른 남자들이 가까이 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강진혁과 조금 가까이 지내면 강유형은 항의하곤 했다.“오빠, 사람은 변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문 밖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우람진 남성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이내 집주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우야, 돌아왔니?”내가 이사하려고 했던 집의 세입자인 것 같았다.잠시 후, 할머니의 말소리로 그 결론을 확정 지을 수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32화

    “정우야, 내가 말했지? 방을 바꾸고 싶어 하는 그 아가씨야. 두 사람 서로 얘기해볼래?” 집주인 할머니가 입을 열자 서로 마주보고 있던 우리는 서로 눈을 돌렸다.나는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윤지원이에요. 저기, 지금 살고 있는 방 저랑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싫습니다.” 그의 거절은 방금 머리를 감던 동작만큼이나 단호하고 깔끔했다.내 입가가 살짝 떨리며 속에서 불쾌함이 일었고, 고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 안 되죠?” 남자는 나를 한 번 흘끗 보더니 대답 없이 군복색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는 내 옆을 지나쳐갔다. 차가운 수돗물 냄새가 스치면서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지원이 맞지?” 집주인 할머니가 다가와서 말했다. “화내지 마. 정우는 여자를 어떻게 대하는 지 잘 몰라. 내가 나중에 다시 얘기해볼게.” 나도 기분이 언짢아 일부러 크게 말했다. “됐어요. 그 방에 산다고 인생이 활짝 피는 것도 아니고, 살고 싶은 사람이 실컷 살라고 하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주인 할머니가 나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렇게 화내지 마. 정우는 군인 출신이라서 훈련도 많이 받았거든. 진짜 화나면 너를 번쩍 들고 밖에 내던질지도 몰라.”헛... 나는 실소했다.영광스러운 인민의 군인을 마치 범죄자처럼 여긴 게 우습기도 했다.“이봐, 아가씨. 웃지 마. 장난치는 게 아니야. 진짜라니까... 저기 길 건너 ‘오향설’이라는 이름의 과부 있지? 그 여자가 자꾸 정우 집 문을 두드리더라고. 결국 정우가 침대 시트로 그 여자를 싸매서 그냥 던져버렸어. 이 동네 사람들 다 봤지.” 또 과부라니. 나는 참 과부와 인연이 있나 보다.“그래요? 그럼 둘이 잤어요?”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올라가려고 했지만 결국 올라가지 못하고 던져졌지. 망신만 당했지 뭐야.” 집주인 할머니가 혀를 차며 말했다.나는 입가를 살짝 비틀며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저는 과부들이 마음에 들어 한 남자에게는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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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4화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3화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2화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1화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0화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99화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98화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97화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96화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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