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했다.오늘은 웃어야 하고 기뻐야 하며 앞으로 매일 행복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내가 아래로 내려올 때 아줌마와 아저씨는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했고 집의 소파 커버와 식기는 모두 설날에만 사용하는 상스러운 양식으로 바꾸었다.“지원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하고 오면 우리 제대로 축하하고 결혼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자.”김희연은 나보다 더 들떠 있는 것 같았다.“좋아요!”나는 그러기로 했다.김희연은 나를 보면서 말했다.“오늘 정말 예쁘게 입었구나. 빨간색이라면 더 예쁠 텐데.”“빨간색은 너무 튀잖아요.”이에 나는 이렇게 해명했다.“쓸데없는 참견하지 마. 지금 우리 때와는 다르다고. 누가 빨간색이나 자주색 같은 거 입냐고. 지원아, 네가 입고 싶은 거 입어. 어머니의 말은 신경 쓰지 마.”강두식은 호칭을 ‘어머니’로 바꿔주었다.나는 웃었고 마음이 따뜻해졌다.김희연은 나를 밥상에 앉혔고 평소처럼 푸짐한 아침 식사 외에 계란 두 개와 소시지 한 개가 더 추가되었는데 낯이 뜨거운 모양으로 플레이팅 해놓았다.내가 묻기도 전에 김희연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건 네 할머니때 전해 내려온 일찍 아들을 낳는 비법이야. 난 남아선호 사상은 없어. 그냥 너와 유형이가 일찍 애를 가졌으면 좋겠어. 손자이든 손녀이든 다 좋아.”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식탁 위에 놓인 계란과 소시지는 정말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랐다.“상징적으로 조금씩 먹으면 돼.”김희연은 내 옆에 앉아서 계란을 까고 나에게 주었다.나는 김희연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얼굴을 붉히면서 각각 한 입씩 깨물고 머리를 숙이고 죽을 먹었다.내가 다 먹을 때까지 강유형이 나타나지 않았다.“아줌마, 유형은요?”“아직 내려오지 않았어.”김희연의 말이 끝나기 전에 계단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리면서 강유형이 내려왔다.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느꼈다.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지
“나연 씨가 왜 여, 여기에 있어요?”고준석도 나처럼 놀라서 조나연에게 물었다.조나연은 잠옷을 여미면서 말했다.“저 여기서 살아요.”그녀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열쇠를 향했다.“남의 집에 들어올 때 왜 노크를 안 하세요?”고준석은 한 걸음 나서서 말했다.“아닙니다...여기는 강 대표님이 지원 씨를 위해 마련한 집입니다.”고준석은 말하면서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내서 강유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나도 당황해서 실수로 스피커를 눌렀다.“대표님, 봉화타운하우스에 있는 집은...”고준석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강유형은 그의 말을 끊었다.“그 집은 나연이에게 주었어.”조나연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그럼 지원 씨는...”고준석이 다시 물으려고 했으나 강유형이 재차 그의 말을 끊었다.“지원이에게 다른 것을 줄 거야. 그리고 이 일은...지원이에게 비밀로 해.”고준석은 어쩔 수 없으면서도 난감하고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미안한 짓을 한 사람은 강유형이 아닌가?그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이 일은 자기가 너무 경솔하게 처리한 탓이다.그는 사전에 강유형에게 물어보고 나서 나를 데리고 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엎질러진 물이라 돌이킬 수 없다.나는 그 자리에서 당장 폭로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고준석이 꼭 사퇴당하게 될 것이다.최근 경기가 침체되어 많은 회사에서 감원하고 있어서 급여와 대우가 좋은 직장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게다가 고준석은 지난달에야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지금 잘리면 연애도 실패하게 될 것이다.이런 상황에 고민하거나 미치지 않는 나에 대해 정말 탄복했다.고준석은 무안한 듯 전화를 끊고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 씨...”“준석 씨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나는 잠시 멈추고 다시 말했다.“준석 씨는 옆에서 차나 마시면서 기다려주세요. 저는 나연 씨와 할 얘기가 있어요.”나는 고준석을 멀리 보내지 않았다. 조나연이 잠시 후에 또 기절하거나 배가 아픈 척하는 수작을 부리면 내가 혼자
나의 이 두 마디에 조나연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되었다.사실 그녀의 컨셉이 정말 엉망진창이다. 내연녀가 되려면 뻔뻔하게 되든지. 강유형이 나에게 줄 집도 그녀에게 줬으니 그녀는 한껏 당당해져도 될 것 같다.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분명히 염치없는 일을 했는데도 순수한 척하려고 하였다.창녀이면서 열녀인 척하는 게 아닌가.“유형 씨는 지원 씨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조나연이 나에게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다.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아직 강유형의 사랑을 바라고 있다면 머리가 정상이 아니지.“강유형이 나연 씨를 좋아하면 되니까요.”나는 다시 이렇게 쏘아붙였다.조나연은 괴롭힘을 당했듯이 순간 눈물이 글썽거렸다. 다행히 내가 고준석을 옆에 있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조나연이 대성통곡이라도 하면 난 입이 열개라도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지원 씨, 무슨 뜻이에요? 오늘 혼인 신고하러 가잖아요?”조나연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할 때 눈에는 묘한 빛이 번쩍이었다.정말 야심이 많은 여자이다.갑자기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네. 이따가 가서 신고할 거예요. 강유형이 스님을 찾아가서 물었는데 10시 58분에 혼인 신고하면 백년해로하고 자손이 번창할 수 있다고 했어요.”조나연 눈 밑에 드러난 희색은 내 말에 산산조각으로 되어버렸다.그녀의 기대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나는 재차 충격을 주었다.“혼인신고를 마치면 나연 씨도 와서 축하주 드세요. 축의금도 잊지 마시고요.”조나연은 몸이 비틀거리더니 넘어진 척하려고 할 때 그녀가 예전에 했던 짓이 생각났다.“강유형이 여기에 없어서 넘어져도 나연 씨를 안을 사람이 없어요.”나의 쏘아붙인 말에 조나연은 말문이 막혔다.오로지 입술만 꽉 깨물었다.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아마 이렇게 강유형을 사로잡았는지도 몰라.어쨌든 이미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오늘부터 강유형은 내 인생에서 일반인으로 되었다.오늘 이런 일을 당했으나 이상하게도 난 그렇게 슬퍼
내가 다시 강유형의 전화를 받았을 때, 법운사에서 경을 듣고 있었다.“지원아, 곧 11시인데 왜 아직 안 왔어?”강유형이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기다려.”나는 일부러 이런 것이다.강유형을 10년 동안 사랑하면서 그를 몇 번이나 기다렸는지 기억도 안 난다.오늘 강유형이 나를 한번 기다리게 하는 것도, 내 지난 10년의 청춘과 사랑을 위해 한 작은 복수이다.“그럼 빨리 와. 스님이 말씀하신 길시를 놓치지 마.”강유형은 거듭 재촉하였다.지금 내가 바로 수정 스님 앞에 앉아 있다. 이분은 내 결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이로써 이분은 오늘 내가 강유형과 혼인 신고하는 일을 전혀 모르실 뿐만 아니라, 길시를 잡아 주신 적도 없는 것을 알 수 있다.나는 나지막한 소리로 응답하고 나서 전화를 끊고 전원마저 꺼버렸다. 그러고 나서 계속 수정 스님이 경전을 강의하시는 것을 들었다.강유형이 예불하는 것은 어렸을 때 한 번 크게 앓은 적이 있었는데 김희연이 산에서 사흘 밤낮으로 무릎을 꿇고 빌어서 완쾌한 것이라고 한다.그 후부터 김희연은 불교를 믿기 시작했고 강유형이 불문의 속가제자로 되게 하였으며 수정 스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게 하였다.강유형의 껌딱지인 나는 자연스레 여러 번 사찰에 따라왔고 스님은 특별히 우리 둘을 위해 인연의 끈을 묶어주었다.아쉽지만 나와 강유형의 인연의 끈은 끊어졌다.나는 오후 3시에 법운사를 떠났다. 핸드폰의 전원을 켜지 않은 채 차를 몰고 구청으로 갔다.강유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나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여기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예전의 내가 그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나는 차를 세우고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수많은 메시지와 발신 정보가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강유형이 가장 많이 보냈다.53통의 부재중 전화와 7개의 메시지가 있다.[지원아, 왔어? 핸드폰이 왜 꺼져 있어?][지원아, 시간이 다 되가. 늦으면 길시를 놓치겠어.][윤지원,
나는 비아냥거리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안리영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지원아, 강유형과 그 과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너에게 들킨 거지?”역시 내 절친이다. 그녀는 나의 마지노선이 어디까지 있는지 알고 있다.“강유형은 조나연에게 집을 한 채 줬는데 원래 나에게 주려고 한 집이었어.”나는 가장 짧은 말로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안리영은 잠자코 있었다가 한참 후에 이를 갈면서 말했다.“너...”나는 그녀가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짐작할 수 있었다.“다시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저 망할 놈. 네가 자꾸 용서하면 나중에 또 그런 짓을 할 거라고!”안리영의 애정관은 나와 같았다.“나도 알아.”“좋아.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천천히 생각하자. 먼저 그놈의 전화를 받아. 무슨 변명을 하는지 들어보자. 이따가 나한테 와.”안리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다른 사람과 근무 교대를 해야겠다.”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영상통화를 끊었다.강유형의 전화는 끈질기게 울렸다. 나는 통화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윤지원, 너 뭐 하는 거야? 왜 그랬어?”강유형의 고함에 내 고막이 찢을 뻔했다.나는 핸드폰을 멀리 들고 그가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잦아질 때 핸드폰을 귓가에 댔다.“강유형, 어제 내가 아줌마와 아저씨 앞에서 너와 혼인 신고를 하겠다는 것은 너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어.”“헛소리 집어치워! 지금 어디야? 오늘 왜 혼인 신고하러 안 갔어?”그는 화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고준석과 조나연은 모두 오늘 내가 그 집에 갔던 일을 언급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그 얘기를 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만 답했다.“나 법운사에 갔어. 수정 스님을 따라서 경전을 좀 읽었거든.”나의 말에 강유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된 것을 알아챘다.“지원아, 내 말 좀 들어봐...”“됐어. 넌 예전부터 변명을 너무 많이 해서 이제 듣기가 지겹고
“지원아, 엄마가 저녁에 특별히 성대한 축하연을 준비했고 친척과 친구들을 초대했어. 저녁 6시 전에 꼭 돌아와야 해.”김희연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직 나와 강유형이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어젯밤에 김희연과 강두식의 태도를 생각하면, 강유형은 혼날까 봐 말하지 않는 것 같았다.핸드폰 넘어 들려온 김희연의 기쁨과 기대가 넘치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와 강유형이 혼인 신고를 하지 않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잠깐 숨길 수 있어도 오랫동안 숨길 수 없다.더구나 지금은 잠깐이라도 숨길 수 없는 상황이다.김희연이 초대한 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간다면 그녀의 체면이 더욱 망가질 것이다.“아줌마.” “얘도 참, 이제 어머니라고 불러야지. 내가 예물을 안 줘서 안 부르는 거야?”김희연의 농담에 원래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마음이 갑자기 괴로웠다.“아줌마, 죄송해요. 저...저는 영원히 어머니라고 부를 자격이 없을 거예요.”사실 10년 동안 나는 많은 순간에 김희연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었다.그러나 이 소원을 영원히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무, 무슨 소리야?”김희연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지원아, 날 어머니로 부르는 게 불편해?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도 돼...”“저희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예요.”나는 김희연의 말을 끊었다.“뭐?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지원아...”김희연은 화들짝 놀랐다.“아줌마, 저희 헤어졌어요.”이 말을 하자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김희연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실망해서 견딜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몇 년 동안 나를 친딸처럼 키웠다. 내가 진정한 가족이 되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나도 알고 있다. 오늘 아침에 떠날 때 그녀는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집에 돌아오면 내가 어머니로 부르는 것을 기대한다고 하였다.나는 불안과 긴장을 삼키고 조심스레 불렀다.“아줌마...
안리영은 내 생각을 눈치챘다.“어디 갈래? 내가 같이 있어 줄게. 아니면...”“내 집에 가서 같이 짐 정리하자.”나는 안리영의 말허리를 끊었다.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너...예전부터 준비했어?”“예전부터가 아니라 며칠 전이야.”나는 손가락으로 뒷좌석을 찔렀고 그 위에 내가 사 놓은 침구가 놓여있다.“어제 조나연과 같이 샀어.”안리영은 내 말을 듣자 놀라운 표정을 지었고 눈 밑에는 가십에 대한 흥미로 가득 찼다.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 털어놓았다. 그녀는 화가 나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혼인 신고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강유형은 정말 신시대 바람둥이 나쁜 남자이네.”“나쁜 남자는 시대와 상관없어.”나도 덩달아 농담을 던졌다.안리영은 나를 보면서 말했다.“지원아, 내 앞에서 억지로 웃을 필요가 없어.”“나 정말 별로 슬프지 않았어. 아마 나도 그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제 너무 익숙해서 그에 대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아.”나는 정말 이런 느낌이 들었다. 훗날에 나는 이런 너무 익숙해서 평범해진 감정은 동굴에 오래 보관된 술처럼 뒤늦게 취기가 많이 올라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나도 그렇고 강유형은 더욱 그랬다.안리영은 내 친부모님의 집에 대해 몰랐다. 내가 강씨 집안에 들어가서 학교에 다닐 때 그녀를 알게 된 것이다.“이 집은 좀 멀고 낡았지만 괜찮네.”안리영와 나는 말을 빙빙 돌아가면서 하지 성격이 아니고 항상 솔직하게 말했다.“응. 부모님과 내가 함께 살았던 곳이라 파괴하고 싶지 않아.”나는 침구를 소파 위에 올려놓고 새로 산 주전자를 씻고 물을 끓였다.안리영은 혼자 구경하고 나서 마지막에 주방의 문에 기대면서 나를 바라보았다.“조금 낡았지만 아주 따뜻한 느낌이 들어. 넌 예전에 정말 행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그래. 그 교통사고가 없었더라면.지금까지도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 아침에 날 학교에 데려다주시면서 오늘 계약이 성사하면 놀이공원을 만들어줄
청평군.나는 고속철도를 4시간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마침 등불이 갓 밝혀질 초저녁이었다.해동만큼 번화롭지는 않으나 불빛이 화려하고 소도시의 낭만적인 면이 있다.안리영은 시간에 맞춰서 전화하였다.“도착했어? 숙소는 구했고?”그녀는 내가 이렇게 급하게 떠날 줄은 몰랐다.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고 물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주소와 차표 시간까지 알려주었다.그녀는 강유형이 찾아와서 매달릴까 봐 두려워서 이렇게 급하게 떠나는 것이냐고 물었다.나는 강유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지금의 그는 나한테 바람맞아서 엄청나게 화나고 있을 것이다.내 생각이 맞았다. 그가 왜 혼인 신고를 하러 가지 않느냐고 따진 후로 메시지나 전화가 한 통도 없었다.내가 이렇게 급히 온 이유는 예전부터 오고 싶었고 또한 나는 강유형의 부모님이 계속 연락할까 봐 두려웠다.그들은 꼭 나를 찾아와서 설득할 것이다.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을 먹었기에 그들이 계속 찾아와도 그들은 정력만 낭비하게 되고 나는 대응하기에 지치게 된다.그렇다면 내가 차라리 일찍 떠나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낫다.심지어 나는 자주 사용했던 핸드폰 번호도 비행모드로 설정하였다. 지금 안리영은 강유형도 모르는 나의 다른 번호로 전화를 한 것이다.이 번호는 아버지의 것이고 줄곧 핸드폰의 다른 유심카드 트레이에 꽂혀 있었다. 10년 동안 한 번도 울리지 않았고 지금 처음으로 사용했다.“아직 찾지 않았어. 급하지 않아.”나는 이 낯선 도시를 둘러보면서 갑자기 느긋한 느낌이 들었다.“뭐가 안 급해? 지금 벌써 몇 시야?! 어서 찾아야지. 안전하고 좋은 호텔을 찾아. 자기 전에 옷장과 침대 밑을 검사하고 창문도 닫고 문을 안에서 잠가야 해...”안리영은 주절주절 신신당부하였다.나는 웃으면서 마음이 울컥했다. 그래도 그녀의 관심이 있어서 다행이야.“그래. 알았어. 그렇게 할게.”“밥 꼭 먹어야 한다. 그곳은 배달 앱이 있겠지?”안리영이 이 말을 할 때 마침 배달원이 지나갔다.“내가 한 명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
“싸움이 났어요, 밖에서 누가 싸우고 있어요!”복도에서 급히 들어온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리고 그 순간 용준호의 주먹이 강유형을 향해 뻗어가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그만둬! 준호 오빠, 당장 멈춰!”나는 소리치며 달려가 그를 말렸다.하지만 그는 내 손을 뿌리치더니 힘껏 내던졌다. 나는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하얘짐을 느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킨 것처럼 어질어질해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그동안 단 한 번도 반격하지 않던 강유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애틋했다. 걱정이 담긴 목소리였다.“지원아...”그는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곧장 용준호에게 주먹을 날렸다. 곧이어 두 사람은 완전히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두 사람을 바라보다 결국 누군가에게 부탁해 경호원을 불러달라고 했다.몸싸움을 겨우 뜯어말렸을 땐 이미 멍과 상처가 두 사람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강유형은 계속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고개를 젖혀 코피를 거꾸로 흐르게 했다.이들이 왜 갑자기 싸운 건지 너무 궁금했지만 강유형의 코피가 너무 심하게 나서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는 수밖에 없었다.“강유형, 병원으로 들어가자.”그는 꼼짝도 하지 않더니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너는 괜찮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끌었다.“나랑 같이 들어가자”“괜찮아. 금방 멈출 거야.”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찰나 용준호가 고함을 질렀다.“강유형, 이 개자식아! 우리 엄마 어딨어? 당장 우리 엄마 데려와!”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분명 그의 어머니는 화재로 숨졌다고 했는데 왜 강유형한테서 어머니를 찾는지 알 수가 없었다.“준호 오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나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네가 직접 물어보든지.”“신경 쓰지 마. 미쳐서 그래.”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
강유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의 눈가엔 슬픔이 가득했다.수정 스님은 행각승이었다가 법운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그의 고향이나 가족을 알지 못했다.굳이 혈육을 꼽으라면 강유형이 유일한 존재일 터였다.그는 어릴 적부터 수정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며 경을 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지원아, 먼저 부상자들부터 도와줘.”강유형이 내 슬픔을 잠재우듯 말했다.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화재는 갑자기 일어난 거야? 너 그때 절에 있었어? 이상한 점은 없었고?”강유형의 눈빛이 짙어졌다.“지원아, 그건 내가 조사할 테니 네가 나설 필요 없어.”그 말에서 나는 그가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내가 위험에서 멀어지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강유형, 나도 모르는 척 편히 있으려 했지만 이 불은 나를 노리고 온 것 같아서 말이지.”내가 추측을 내뱉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위로의 말이 오리라 예상한 찰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진정우, 곧 돌아오지?”맞았다. 강진혁이 직접 알려준 소식이었다.“이 화재가 진정우랑 관련 있다는 거야?”내 물음에 그는 담담히 말했다.“네가 방금 너 자신이 표적이라 말했으니 네 일은 곧 그의 일과 마찬가지인 셈이지.”하긴 지금 내 존재는 진정우의 약점이자 방패나 다름없었다.“지금은 급박한 때야. 조심해.”강유형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이내 덧붙였다.“가능하다면 내 곁에 있어.”그가 나를 지키려는 의도임을 알았다.그래도 나는 되물었다.“진짜로 내가 표적이라면 네 힘만으로는 부족할 텐데.”법운사에 불을 지른 자들은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수정 스님마저 피해자로 만들 정도로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김지영이 역시 불길에 휩싸일 줄은 용씨 가문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업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한 분께서 이런 재앙을 마주했다니, 안타까울 뿐이었다.용진표의 혼란스러운 이성 관계가 떠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