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석은 그의 비서이다.그래도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시선을 떨구면서 말했다.“지원아,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솔직히 말해주면 안 돼?”그의 말에는 무기력하고 어쩔 수 없는 퇴폐함까지 들어 있다.정말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강유형, 우린 헤어졌으니 이렇게 난감할 필요가 없어. 네가 조나연을 어떻게 보살펴 주든지 나랑 상관이 없잖아.”나는 속마음을 얘기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나에게 다가왔고 나를 세면대와 그의 가슴 사이로 가두었다.“헤어질 생각은 하지 마. 내일 혼인 신고하러 가자.”“강유형, 너 진심으로 나랑 결혼하고 싶어?”내 귓가에 다시 그때 그와 신지태의 대화가 울렸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우린 너무 익숙해서 섹스하고 싶은 생각까지 없다며?”“지원아, 그건 그냥 농담이라고 했잖아. 그날 밤에 너도 봤지? 난 너에 대해...”“강유형.”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그날 밤을 다시 떠올리기 싫었다.“그날 밤은 내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야. 알겠어?”그의 동공은 격렬히 수축하였고 쩔쩔매면서 나에게 물었다.“내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날 용서해 줄 수 있어?”내가 이미 말했는데 그는 계속 물었다. 그러나 난 다시 말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를 밀어냈다.“비켜. 난 배고파서 뭐 좀 먹어야겠다.”“좋아. 그럼 난 다시 조나연과 연락하지 않을게.”그는 핸드폰을 꺼내면서 카톡과 연락처에서 조나연을 차단하였다.“지금 됐지?”그의 짜증 난 목소리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강유형, 내가 아줌마와 아저씨께 우리가 헤어졌다고 말씀드리면 욕먹을까 봐 그런 거지? 일단 아무 말도 안 할게.”“지원아, 난 그런 뜻이 아니야. 난 정말 너와 결혼하고 싶어.”강유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우린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고 결혼식이 없고 심지어 그런 관계도 없었지만 난 예전부터 이미 널...부인으로 생각했어.”‘부인’, 이 두 글자에 내 마음이 떨렸다.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아버지는 밖에서 종래로 어머니를 ‘
강두식과 김희연의 기대에 찬 눈빛에 나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강유형이 다시 조나연과 조금이라도 엮이면 혼인 신고를 했더라도 그를 떠날 것이라고 다짐했다.내가 동의하자 밥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분위기도 가볍고 따뜻해졌다.식사를 마친 후 나는 당연히 떠나지 못했다.침실에 돌아온 나와 강유형은 지난번보다 더 어색했다.“먼저 씻어.”강유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침 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안리영이 걸어온 전화였다.“너 먼저 씻어. 나 전화 받을게.”강유형이 욕실에 들어간 다음에 나는 전화를 받았다. 안리영이 질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너 어젯밤에도 안 왔고 오늘도 안 왔네. 설마 다시 강씨 집안으로 돌아간 거야?”“응.”침실 가운데 있는 큰 침대를 보면서 나는 낮은 소리로 대답하였다.이에 안리영은 의아해했다.“강유형과 또 화해한 거야?”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내일 혼인 신고할 거야.”안리영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잘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지??”나는 창가에 와서 하늘에 있는 반원 모양의 달을 보면서 말했다.“달도 흐리고 맑음, 차고 이지러질 때가 있으니 인간도 그런 거야. 강유형은 조나연의 연락처를 차단했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서 기회를 다시 한번 주려고.”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마지막으로.”안리영은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였다.“지원아, 넌 안전과 행복을 위해 남자를 찾는 것만 기억해.”“알았어.”전화를 끊은 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사색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없었고 마음도 슬프거나 기쁘지 않았다.문득 등이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강유형은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그는 상의를 입지 않았고 밑에는 잠옷 바지만 입었다. 나를 껴안은 그의 팔에는 아직 닦아내지 않는 물방울이 걸려 있다.야성적이고 섹시해 보였다.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에 대고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했다.오늘은 웃어야 하고 기뻐야 하며 앞으로 매일 행복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내가 아래로 내려올 때 아줌마와 아저씨는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했고 집의 소파 커버와 식기는 모두 설날에만 사용하는 상스러운 양식으로 바꾸었다.“지원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하고 오면 우리 제대로 축하하고 결혼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자.”김희연은 나보다 더 들떠 있는 것 같았다.“좋아요!”나는 그러기로 했다.김희연은 나를 보면서 말했다.“오늘 정말 예쁘게 입었구나. 빨간색이라면 더 예쁠 텐데.”“빨간색은 너무 튀잖아요.”이에 나는 이렇게 해명했다.“쓸데없는 참견하지 마. 지금 우리 때와는 다르다고. 누가 빨간색이나 자주색 같은 거 입냐고. 지원아, 네가 입고 싶은 거 입어. 어머니의 말은 신경 쓰지 마.”강두식은 호칭을 ‘어머니’로 바꿔주었다.나는 웃었고 마음이 따뜻해졌다.김희연은 나를 밥상에 앉혔고 평소처럼 푸짐한 아침 식사 외에 계란 두 개와 소시지 한 개가 더 추가되었는데 낯이 뜨거운 모양으로 플레이팅 해놓았다.내가 묻기도 전에 김희연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건 네 할머니때 전해 내려온 일찍 아들을 낳는 비법이야. 난 남아선호 사상은 없어. 그냥 너와 유형이가 일찍 애를 가졌으면 좋겠어. 손자이든 손녀이든 다 좋아.”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식탁 위에 놓인 계란과 소시지는 정말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랐다.“상징적으로 조금씩 먹으면 돼.”김희연은 내 옆에 앉아서 계란을 까고 나에게 주었다.나는 김희연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얼굴을 붉히면서 각각 한 입씩 깨물고 머리를 숙이고 죽을 먹었다.내가 다 먹을 때까지 강유형이 나타나지 않았다.“아줌마, 유형은요?”“아직 내려오지 않았어.”김희연의 말이 끝나기 전에 계단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리면서 강유형이 내려왔다.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느꼈다.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지
“나연 씨가 왜 여, 여기에 있어요?”고준석도 나처럼 놀라서 조나연에게 물었다.조나연은 잠옷을 여미면서 말했다.“저 여기서 살아요.”그녀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열쇠를 향했다.“남의 집에 들어올 때 왜 노크를 안 하세요?”고준석은 한 걸음 나서서 말했다.“아닙니다...여기는 강 대표님이 지원 씨를 위해 마련한 집입니다.”고준석은 말하면서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내서 강유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나도 당황해서 실수로 스피커를 눌렀다.“대표님, 봉화타운하우스에 있는 집은...”고준석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강유형은 그의 말을 끊었다.“그 집은 나연이에게 주었어.”조나연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그럼 지원 씨는...”고준석이 다시 물으려고 했으나 강유형이 재차 그의 말을 끊었다.“지원이에게 다른 것을 줄 거야. 그리고 이 일은...지원이에게 비밀로 해.”고준석은 어쩔 수 없으면서도 난감하고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미안한 짓을 한 사람은 강유형이 아닌가?그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이 일은 자기가 너무 경솔하게 처리한 탓이다.그는 사전에 강유형에게 물어보고 나서 나를 데리고 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엎질러진 물이라 돌이킬 수 없다.나는 그 자리에서 당장 폭로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고준석이 꼭 사퇴당하게 될 것이다.최근 경기가 침체되어 많은 회사에서 감원하고 있어서 급여와 대우가 좋은 직장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게다가 고준석은 지난달에야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지금 잘리면 연애도 실패하게 될 것이다.이런 상황에 고민하거나 미치지 않는 나에 대해 정말 탄복했다.고준석은 무안한 듯 전화를 끊고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 씨...”“준석 씨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나는 잠시 멈추고 다시 말했다.“준석 씨는 옆에서 차나 마시면서 기다려주세요. 저는 나연 씨와 할 얘기가 있어요.”나는 고준석을 멀리 보내지 않았다. 조나연이 잠시 후에 또 기절하거나 배가 아픈 척하는 수작을 부리면 내가 혼자
나의 이 두 마디에 조나연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되었다.사실 그녀의 컨셉이 정말 엉망진창이다. 내연녀가 되려면 뻔뻔하게 되든지. 강유형이 나에게 줄 집도 그녀에게 줬으니 그녀는 한껏 당당해져도 될 것 같다.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분명히 염치없는 일을 했는데도 순수한 척하려고 하였다.창녀이면서 열녀인 척하는 게 아닌가.“유형 씨는 지원 씨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조나연이 나에게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다.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아직 강유형의 사랑을 바라고 있다면 머리가 정상이 아니지.“강유형이 나연 씨를 좋아하면 되니까요.”나는 다시 이렇게 쏘아붙였다.조나연은 괴롭힘을 당했듯이 순간 눈물이 글썽거렸다. 다행히 내가 고준석을 옆에 있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조나연이 대성통곡이라도 하면 난 입이 열개라도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지원 씨, 무슨 뜻이에요? 오늘 혼인 신고하러 가잖아요?”조나연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할 때 눈에는 묘한 빛이 번쩍이었다.정말 야심이 많은 여자이다.갑자기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네. 이따가 가서 신고할 거예요. 강유형이 스님을 찾아가서 물었는데 10시 58분에 혼인 신고하면 백년해로하고 자손이 번창할 수 있다고 했어요.”조나연 눈 밑에 드러난 희색은 내 말에 산산조각으로 되어버렸다.그녀의 기대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나는 재차 충격을 주었다.“혼인신고를 마치면 나연 씨도 와서 축하주 드세요. 축의금도 잊지 마시고요.”조나연은 몸이 비틀거리더니 넘어진 척하려고 할 때 그녀가 예전에 했던 짓이 생각났다.“강유형이 여기에 없어서 넘어져도 나연 씨를 안을 사람이 없어요.”나의 쏘아붙인 말에 조나연은 말문이 막혔다.오로지 입술만 꽉 깨물었다.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아마 이렇게 강유형을 사로잡았는지도 몰라.어쨌든 이미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오늘부터 강유형은 내 인생에서 일반인으로 되었다.오늘 이런 일을 당했으나 이상하게도 난 그렇게 슬퍼
내가 다시 강유형의 전화를 받았을 때, 법운사에서 경을 듣고 있었다.“지원아, 곧 11시인데 왜 아직 안 왔어?”강유형이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기다려.”나는 일부러 이런 것이다.강유형을 10년 동안 사랑하면서 그를 몇 번이나 기다렸는지 기억도 안 난다.오늘 강유형이 나를 한번 기다리게 하는 것도, 내 지난 10년의 청춘과 사랑을 위해 한 작은 복수이다.“그럼 빨리 와. 스님이 말씀하신 길시를 놓치지 마.”강유형은 거듭 재촉하였다.지금 내가 바로 수정 스님 앞에 앉아 있다. 이분은 내 결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이로써 이분은 오늘 내가 강유형과 혼인 신고하는 일을 전혀 모르실 뿐만 아니라, 길시를 잡아 주신 적도 없는 것을 알 수 있다.나는 나지막한 소리로 응답하고 나서 전화를 끊고 전원마저 꺼버렸다. 그러고 나서 계속 수정 스님이 경전을 강의하시는 것을 들었다.강유형이 예불하는 것은 어렸을 때 한 번 크게 앓은 적이 있었는데 김희연이 산에서 사흘 밤낮으로 무릎을 꿇고 빌어서 완쾌한 것이라고 한다.그 후부터 김희연은 불교를 믿기 시작했고 강유형이 불문의 속가제자로 되게 하였으며 수정 스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게 하였다.강유형의 껌딱지인 나는 자연스레 여러 번 사찰에 따라왔고 스님은 특별히 우리 둘을 위해 인연의 끈을 묶어주었다.아쉽지만 나와 강유형의 인연의 끈은 끊어졌다.나는 오후 3시에 법운사를 떠났다. 핸드폰의 전원을 켜지 않은 채 차를 몰고 구청으로 갔다.강유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나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여기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예전의 내가 그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나는 차를 세우고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수많은 메시지와 발신 정보가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강유형이 가장 많이 보냈다.53통의 부재중 전화와 7개의 메시지가 있다.[지원아, 왔어? 핸드폰이 왜 꺼져 있어?][지원아, 시간이 다 되가. 늦으면 길시를 놓치겠어.][윤지원,
나는 비아냥거리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안리영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지원아, 강유형과 그 과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너에게 들킨 거지?”역시 내 절친이다. 그녀는 나의 마지노선이 어디까지 있는지 알고 있다.“강유형은 조나연에게 집을 한 채 줬는데 원래 나에게 주려고 한 집이었어.”나는 가장 짧은 말로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안리영은 잠자코 있었다가 한참 후에 이를 갈면서 말했다.“너...”나는 그녀가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짐작할 수 있었다.“다시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저 망할 놈. 네가 자꾸 용서하면 나중에 또 그런 짓을 할 거라고!”안리영의 애정관은 나와 같았다.“나도 알아.”“좋아.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천천히 생각하자. 먼저 그놈의 전화를 받아. 무슨 변명을 하는지 들어보자. 이따가 나한테 와.”안리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다른 사람과 근무 교대를 해야겠다.”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영상통화를 끊었다.강유형의 전화는 끈질기게 울렸다. 나는 통화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윤지원, 너 뭐 하는 거야? 왜 그랬어?”강유형의 고함에 내 고막이 찢을 뻔했다.나는 핸드폰을 멀리 들고 그가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잦아질 때 핸드폰을 귓가에 댔다.“강유형, 어제 내가 아줌마와 아저씨 앞에서 너와 혼인 신고를 하겠다는 것은 너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어.”“헛소리 집어치워! 지금 어디야? 오늘 왜 혼인 신고하러 안 갔어?”그는 화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고준석과 조나연은 모두 오늘 내가 그 집에 갔던 일을 언급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그 얘기를 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만 답했다.“나 법운사에 갔어. 수정 스님을 따라서 경전을 좀 읽었거든.”나의 말에 강유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된 것을 알아챘다.“지원아, 내 말 좀 들어봐...”“됐어. 넌 예전부터 변명을 너무 많이 해서 이제 듣기가 지겹고
“지원아, 엄마가 저녁에 특별히 성대한 축하연을 준비했고 친척과 친구들을 초대했어. 저녁 6시 전에 꼭 돌아와야 해.”김희연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직 나와 강유형이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어젯밤에 김희연과 강두식의 태도를 생각하면, 강유형은 혼날까 봐 말하지 않는 것 같았다.핸드폰 넘어 들려온 김희연의 기쁨과 기대가 넘치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와 강유형이 혼인 신고를 하지 않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잠깐 숨길 수 있어도 오랫동안 숨길 수 없다.더구나 지금은 잠깐이라도 숨길 수 없는 상황이다.김희연이 초대한 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간다면 그녀의 체면이 더욱 망가질 것이다.“아줌마.” “얘도 참, 이제 어머니라고 불러야지. 내가 예물을 안 줘서 안 부르는 거야?”김희연의 농담에 원래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마음이 갑자기 괴로웠다.“아줌마, 죄송해요. 저...저는 영원히 어머니라고 부를 자격이 없을 거예요.”사실 10년 동안 나는 많은 순간에 김희연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었다.그러나 이 소원을 영원히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무, 무슨 소리야?”김희연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지원아, 날 어머니로 부르는 게 불편해?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도 돼...”“저희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예요.”나는 김희연의 말을 끊었다.“뭐?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지원아...”김희연은 화들짝 놀랐다.“아줌마, 저희 헤어졌어요.”이 말을 하자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김희연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실망해서 견딜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몇 년 동안 나를 친딸처럼 키웠다. 내가 진정한 가족이 되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나도 알고 있다. 오늘 아침에 떠날 때 그녀는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집에 돌아오면 내가 어머니로 부르는 것을 기대한다고 하였다.나는 불안과 긴장을 삼키고 조심스레 불렀다.“아줌마...
그가 나에게 할 말이란 자신의 후사에 관한 일이었다.“삼촌, 이런 말씀 하실 필요 없어요. 삼촌은 괜찮으실 거예요.”나는 그를 위로했다.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자산과 부동산 그리고 세상 물정들을 나에게 당부했다.그는 유언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와 비록 감정이 깊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별의 아픔을 느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슬퍼하는 나를 위로했다.“지원아, 누구나 다 죽게 돼 있어. 언젠가 그날이 온다면 슬퍼할 필요 없어, 나와 외숙모는 희연이와 재회하러 간 거야, 우리 가족이 다시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함께 살 수 있어.”이제야 그가 딸을 잃은 후 얼마나 슬프고 외로웠으며 그에게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유희연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있었고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삼촌한테는 제가 있잖아요, 이젠 저한테도 가족이 삼촌밖에 없어요.”나와 그는 혈연이 있으나 늦게 만난 탓에 정이 깊지 않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나는 그가 삶에 대한 욕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그의 가족이지만 친딸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그는 딸을 찾으러 가려는 것이다.지금까지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무사하길 원한다면 외숙모에게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리영아, 구 교수님을 만나면 나를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봐 줄 수 있어?”나는 안리영을 찾아 그녀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외숙모가 넘어져 이렇게 된 후 의사는 심근경색이라고 했다. 이 분야는 구안석전문이었다.“알았어, 마침 요 며칠 사이에 선배가 돌아올 거야.”안리영이 흔쾌히 대답해서 나는 그녀의 안색이 어둡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잘됐네.”나는 흥분해서 말했다.심장 분야 전문인 구안석이 진소영의 심장 이식도 성공했기에 외숙모의 일도 희망이 있을 것이다.안리영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용은서를 언급했다.“은서가 너무 불쌍해. 집으로 일찍
“아니에요, 저는 단지 은서가 나에게로 빨리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에요.”함소은의 얼굴은 수척해 보였다.하지만 나는 그녀가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소은 씨, 며칠도 참았는데 사흘만 더 참으세요.”나의 말을 들은 함소은은 화를 냈다.“지원 씨, 지금 무슨 뜻이에요?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니죠?”“전 소은 씨에게 이삼일만 더 기다려달라고 하는 거예요.”나는 그녀에게 설명했다.“왜 기다려야 하는데요? 뭘 하려고 그래요?”그녀는 머리가 좋았다.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누군가 무사하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려고요.”함소은은 나를 붙잡고 말했다.“은서로 성재 씨를 맞바꾸려고 그러는 거죠?”함소은도 배성재가 무엇을 하러 갔는지 알고 있다. 나도 대범하게 인정했다.“네.”“지원 씨!”함소은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이렇게 비열할 수가 있어요, 은서는 아직 아이일 뿐이에요.”“네, 맞아요. 은서는 당신이 딸이기도 하죠. 그런데 당신도 은서를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나요?”나는 그녀에게 거침없이 말했다.게다가 윤은서도 함소은이 직접 나한테 보내온 도구였기에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던 함소은은 몇 초 후 김빠진 공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 오직 자신뿐이네요.”나는 그녀의 인생을 꿰뚫어 본 듯한 발언을 무시한 채 차분하게 말했다.“은서는 무사할 거예요, 며칠 소은 씨와 늦게 만날 뿐이에요.”함소은은 더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를 데려다준 후 함소은은 떠났다. 나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음식을 주문했다. 배불리 먹고 물건을 사서 유희연의 집으로 갔다.그곳에 갇혀있는 동안 나는 꿈에서 유희연을 보았다. 비록 꿈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지만 나는 그녀가 나에게 무언가를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느껴졌다.유희연이 세상에서 가족은 오직 부모뿐이었기에 나는 그녀의 걱정도 그들이라고 생각
“뭔데요?”그녀의 말을 들은 안리영은 놀라지 않았다.누구든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나도 그에게 보답을 원한다. 이른바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는 법이다.“지원 씨는 제 딸을 납치한 죄를 뒤집어써야 해요.”함소은의 말을 들은 안리영은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소은 씨는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하기 힘들죠?”그녀의 마음을 간파한 안리영이 말했다.함소은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진표 그 개자식은 은서를 매우 사랑하는 것 같지만 이 상황이 되도록 그는 조급해하지 않아요.”그녀는 자신이 딸 용은서로 용진표에게서 돈을 바꾸고 싶었지만 그는 속지 않았다. 게다가 며칠 동안 갇혀 있던 딸은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 보러 가고 싶었으나 노출이 될 것이 두려웠고 그녀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그녀는 아무 이유 없이 납치당한 아이를 돌아오게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들은 바에 의하면 용진표는 누가 자신의 딸을 납치했는지 조사 하라고 시켰고 그녀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최대한 빨리 은서를 무사히 돌아오게 해야 했다, 그러면 용진표도 조사를 멈출 것이다.“그러나 지원이가 죄를 뒤집어쓴다면 용 대표님이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안리영이 말했다.“진표 씨는 지원 씨 부모님께 목숨값 두 개를 빚진 것이 있기에 지원 씨가 그의 딸을 납치했다고 해도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은서가 다치지 않았기에 진표 씨는 지원 씨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함소은의 분석이 매우 정확했다.안리영은 웃으면서 말했다.“소은 씨는 얼굴이 이쁠 뿐만 아니라 지능도 좋아요.”함소은은 조롱하듯 웃었다. 만약 용진표가 그녀의 외모에 반해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의 숨겨둔 애인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정태성과 함께 연수해서 회사원이나 성공적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모든 것을 용진표가 망가뜨렸다. 이쁜 얼굴이 싫었던 그녀는 누가 그녀를 이쁘다고 칭찬하면 화를 냈다.누군가는 아름다운 외모를 밑천으로 생각하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불행의 시작이
함소은은 안리영의 말을 확신하는 듯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만약 태성 씨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말을 마친 안리영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저 말고 지원이가 도울 수 있어요.”안리영을 본 함소은은 첫눈에 그녀를 보낸 것이 윤지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윤지원의 상황을 생각한 함소은은 비웃으며 말했다.“지금 지원 씨 자신도 돌볼 수 없는 상황인데 나를 도울 수 있다고요?”“지원이 이 보살이 그곳에 들어가 나랏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기회를 만들어준 소은 씨에게 감사드려야죠.”안리영은 힌트를 주었다.함소은은 안리영의 눈길을 피해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뭔 상관이에요?”안리영은 직설적으로 말했다.“소은 씨, 여기까지 말했으면 더 이상 시치미를 떼지 마세요. 사실 은서는 소은 씨가 사람을 시켜 데려간 거죠?”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함소은은 화를 내며 소파를 내리쳤다.“무슨 헛소리에요? 제가 왜 제 딸을 납치해요. 저...”“소은 씨는 딸로 정태성을 맞바꾸려고 그러는 거잖아요.”안리영은 그녀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얼굴을 돌린 함소은은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아니에요.”“제가 용 대표님에게는 말하지 않을게요. 두려워 마세요.”안리영은 그녀를 안심시켰다.“그럼, 이 말을 저에게 한 이유가 뭐예요?”함소은은 직접적으로 안리영에게 물었다.안리영은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지원이가 저를 보낸 게 맞아요. 지원이는 지금 그곳에서 너무 불편해서 나오고 싶어 해요.”“나오고 싶으면 경찰을 찾으면 될 것을 저를 찾아 뭐 해요?”함소은은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가볍게 웃었다.“소은 씨가 지원이를 그곳에서 꺼내준다면 정태성을 만나게 도와줄 거예요.”안리영의 말을 들은 함소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함소은의 모습을 본 안리영은 그녀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지원 씨가 나오려고 하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을 텐데, 왜 저를 찾아오신 거죠?”함소은은 웃으면서 안리영에게
‘위선적이야!’그냥 거절하면 될 것을 방금까지 그녀와 여자 친구가 없다고 부정하던 조시언은 지금 또 여자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못 믿겠으면 물어봐요.”조시언은 안리영을 가리키며 말했다.안리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나랑 뭔 상관이야?’사실 이쯤 되면 여인은 조시언에게 거절을 당했기에 즉시 떠나는 것이 맞으나 여인은 대답을 요구하듯 안리영을 바라보았다.안리영은 그런 그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조시언을 노려봤다. 이어서 안리영이 대답하려는데 조시언이 먼저 말했다.“조금 전 여자 친구랑 산부인과에 갔던 일을 물어봤어요.”안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놀란 여인은 얼굴이 빨개서 뒤돌아 도망갔다.“삼촌은 여인들의 고백을 거절하는 법도 다양하네요.”안리영은 조시언을 조롱하며 말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조시언이 말했다.“쌀국수 왔어.”조시언이 말을 마치자 복무원이 쌀국수를 들고 왔다. 조용하게 앉아서 쌀국수를 먹던 안리영은 열심히 먹는 조시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자신도 열심히 먹었다.역시 장사가 잘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쌀국수가 정말 맛있었다. 얼큰하게 먹었던 안리영은 코끝에 땀이 났다.반면 우아하고 차분한 조시언의 모습은 마치 프랑스 파스타를 먹는 것 같았다.쌀국수를 먹은 후 조시언이 그녀와 할 말 도 다 했기에 안리영은 그와 작별했다.“삼촌, 나 먼저 갈게, 다음에 봐.”“리영아.”조시언이 귀국 후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어릴 적 그는 그녀를 항상 이렇게 불렀기에 안리영은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조시언을 바라본 그녀는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어봐, 스스로 추측하지 말고.”조시언의 말을 들은 안리영은 난감했다.다시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기에 나중은 없을 것이다.조시언과 헤어진 후 함소은을 찾아온 안리영은 문전박대를 당했다. 안리영은 전혀 놀라지 않고 그녀를 거절한 사람에게 말했다.“태성 씨가 보냈다고 소은 씨에게 전해주세요.”이 말은 확실히
“소고기 쌀국수 하나요. 맵기는 3단계로 해주세요.”안리영은 카운터에서 자신의 입맛에 따라 주문했다.조시언이 먹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주문을 마치자 그도 따라서 주문했다.“야채 쌀국수 하나 주세요. 맵기는 1단계로 해주세요.”안리영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삼촌도 먹을 거야?”조시언은 차분하게 말했다.“그럼, 너만 먹고 나는 앉아서 네가 먹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그의 농담을 들은 식당 주인은 웃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저희 가게에는 한 그릇을 같이 먹는 커플들도 많아요.”안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 오해를 받은 그녀는 이미 이 상황이 익숙해졌다. 예전에 조시언이 출국하기 전 그들이 함께 있으면 커플로 오해하곤 했었다. 심지어 학교 다닐 때도 개인 사정을 잘 모르던 선생님도 그들이 조기 연애한다고 오해하고 부모를 불렀다.현재 그들이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오해받고 있다.조시언을 힐끗 바라본 안리영은 그가 여전히 멋있고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네, 맞아요. 삼촌은 담백한 음식을 좋아해요, 고추를 너무 많이 넣지 마세요.”안리영은 일부러 사장님에게 이렇게 말했다.사장님은 멈칫하더니 멋쩍게 웃었다.“직계 가족은 아니죠?”혈연관계가 없었기에 직계가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를 친자식처럼 키웠기에 직계가족이나 다름없었다.이 화제에 유난히 민감한 그녀는 급히 사장님의 질문에 대답했다.“맞아요, 직계가족이에요.”그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던 조시언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안리영은 한숨을 쉬고 조시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삼촌, 뭐 마실래요?”“옆 가게에서 밀크티를 주문했어, 조금 있으면 가져다줄 거야.”조시언의 행동에 안리영은 놀랐다.‘언제 밀크티까지 주문한 거야? 왜 나는 모르지?’그러나 그의 이 모든 변화는 안리영에게 그가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예전의 그는 그녀가 밀크티와 쌀국수를 먹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이
소름이 돋은 안리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왜 또 만난 거야?”반갑지 않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인사했다.“삼촌.”검은색 셔츠에 짙은 색의 바지를 입은 조시언은 항상 변함없는 옷차림이었으나 안리영은 그를 볼 때마다 처음 만난 것만 같았다.“여긴 볼일이 있어서 온 거야?”조시언은 또다시 안리영에게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 친구가 여기에 있어.”“도움이 필요해?”조시언이 안리영에게 말했다.안리영은 생각에 잠겼다. 현재 윤지원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조시언에게 말한다면 그는 도울 것이다.그런데 윤지원이 그녀더러 함소은을 찾아가라고 했기에 그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아니, 고마워 삼촌.”안리영의 말에 가볍게 대답한 조시언이 물었다.“오늘 휴무야?”“응.”안리영은 대답하고 바로 후회했다. 조시언이 뭐라고 말할지 예측하였기 때문이다.그녀가 알고 있는 그는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안리영의 생각대로 조시언이 그녀에게 물었다.“그럼 같이 밥이나 먹을까?”그 당시 서로의 마음을 알아버린 이후부터 그에 대한 감정이 달라진 그녀는 조시언과 단둘이 있는 것이 불편했다.“아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안리영은 거절했다.“너에게 물어볼 게 있어, 아니 너랑 할 말이 있어.”조시언도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시간을 얼마 뺏지는 않을게, 그리고 너도 점심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그랬다. 마침 열두 시였다. 모든 것이 그렇게 공교로웠다.조시언이 말을 들은 나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고 또 그는 할 말이 있다고 하였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뭘 먹고 싶어?”차에 타자 조시언이 안리영에게 물었다.“아무거나.”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다.조시언은 핸들을 잡고 말했다.“그럼, 네가 좋아하는 매운탕 먹자.”확실히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 기품이 넘쳐흐르는 조시언과매운탕을 먹는다면 그녀 자신을 매운탕에 넣어서 끓여버리고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도 그를 보낸 것을 보면 강진혁은 그를 떠보려는 것이다.“정우 씨의 계획이 뭐예요 ?”나는 허진호에게 물었다.허진호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다. 진정우가 오랫동안 잠복하고 있었던 원인은 그곳을 망가뜨리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협조할 것이다.또한 강진혁도 이번 기회를 빌려 진정우를 철저히 제거하려 한다면 그들 중 누가 누구를 이기는지 봐야 한다.“정우 씨는 지원 씨에게 약속한 걸 다 기억하고 있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허진호는 진정우의 말을 나에게 전달 하러 온 것이었다.진정우가 직접 오지 않은 것은 얼굴을 마주하고 이별에 대한 아쉬움과 서로에 대한 걱정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기에 나에 대한 걱정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나는 허진호를 향하여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 하러 가라고 하세요, 그리고 나는 이곳에 계속 있을 수 없어요, 비록 안전하기는 하지만 너무 심심해서 병날 것 같아요.”“나가고 싶은 거예요?”허진호는 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그리고 음식도 너무 맛없어요.”나는 허진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허진호는 웃으면서 말했다.“알았어요, 제가 정우 씨에게 전달할게요. 대신 지원 씨를 이곳에서 내보내 줄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어요.”“정우 씨에게 말해주세요, 제가 자신을 잘 보호할 수 있다고요.”내가 이곳을 나가면 위험하지만 나는 자신을 스스로 지킬 것이다.허진호가 떠난 후 나는 그의 소식을 기다렸으나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다.보아하니 진정우는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는 것을 동의하지 않은 거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다행히 안리영이 나를 보러 왔다.“소은 씨를 찾아가 사람을 시켜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 달라고 해줘, 그리고 내가 소은 씨의 첫사랑 오빠를 찾아 줄 수 있다고 말해줘.”안리영더러 함소은에게 내 말을 전달해 달라고 했
나는 진정우가 강진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내가 경찰에 끌려와서 구속까지 당했기 때문이다.나는 변호사는 아니지만, 법을 좀 알고는 있다. 기껏해야 용의자일 뿐이라 조사에 협조만 하면 구속할 수는 없다.진정우는 분명 나를 안전한 곳에 가두고 보호할 생각인 것이다. 미리 말해줬기에 나는 긴장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조용히 있었다.처음으로 날 보러 온 사람은 허진호였다. 그는 오자마자 농담했다.“윤 부장, 이번 달 월급은 경찰 아저씨한테서 받아야겠네요.”회사에서의 직급과 최근 근무 상황을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웠다.“부대표님, 저 지금 구두로 사직 신청할게요. 그리고 이제 여기서 나가면 회사에 정식으로 수속 밟으러 갈게요.”“사직하라고 강요하러 온 게 아니니까,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알고 있어요. 제가 미안해서요. 제가 사장이면 저 같은 직원은 진작 잘라버렸을 거예요.”허진호는 눈썹을 찡긋하면서 말했다.“윤 부장은 고위층 직속 라인인데 그럴 일은 없죠.”허진호는 드디어 대놓고 말했다. 진정우와 배성재의 신분도 진작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한 것이다.나는 허진호를 놀려보기로 했다.“무슨 직속 라인이요? 진정우 씨 말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이미 재가 됐어요.”허진호는 입을 실룩거렸다.“윤 부장, 저는 남이 아니니 농담 그만 하세요.”“농담이라니요?”나는 계속 모른 척했다.그런 내 모습에 허진호의 표정이 풍부해졌다. 결국 허진호는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독순술로 말했다.“진정우 씨가 걱정하지 말래요. 여기 며칠만 있으면 될 거예요.”며칠만 있으면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너무 심심했다.지난번에 경찰에게 체포된 건 조나연의 남동생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그 망할 놈의 소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심술을 부렸을 때 강진혁이 데려갔으니, 아마 지금쯤 강진혁 밑에서 일할 것이다.너무 지루하던 차에 누군가 찾아왔으니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허진호를 계속 놀렸다.“진정우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