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님, 강 대표님께서 찾으세요.”나를 따라온 이소희가 전화기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강유형의 집요함을 과소평가했나 보다. 이런 상황에서 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매우 공식적인 어조로 말했다.“지원아.” 강유형의 목소리는 낮고 쉬어 있었고 분명한 미안함이 묻어났다. “오늘 왜 그렇게 일찍 나갔어? 집에 와보니 네가 없더라.”그가 공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는 조금 멀리 걸어갔다.“아침 먹으러 나왔어.”“미안해. 나... 어젯밤에... 정말 돌아올 수가 없었어. 그래서 집에 못 갔어.”이 말에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왜 돌아올 수 없었는데?”“...”나는 숨을 참으며 그에게 대화의 여지를 주었다. “간병인을 못 구했어?”“...맞아.”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강유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원아, 거기 일 언제 끝나? 내가 데리러 갈게. 점심 같이 먹자.”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어젯밤 조태혁의 말대로 그는 조나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오늘 갑자기 나와 함께 식사하자고 하는 건 어젯밤 중간에 멈춘 것에 대한 보상인지, 아니면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낀 건지 알 수 없었다.그걸 추측하느라 두뇌 세포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아 난 담담하게 그에게 대답했다. “언제 끝날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점심시간에도... 끝나지 않을 수 있고. 너도 요즘 점심에 꽤 바쁘지 않았어?”“지원아.” 강유형은 아마도 내 말에서 빈정거림을 감지했는지 무거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2초 정도 침묵한 후 말했다. “오해하지 마.”어젯밤 서로 끌어안고 있을 때도 다른 여자에게 갈 수 있었던 그에게 내가 무엇을 더 오해할 수 있을까?지금은 근무 시간이라 그와 사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바빠. 할 말 없으면 끊을게.”그가 말을 하지 않자 나는 전화를 끊었다.오늘의 외근은 협력 업체와의 논의
“그럼 같이 먹어.”강유형은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동의해 버렸다.조나연이 앉으며 앞에 놓인 음식을 보더니 군침을 삼키는 표정을 지었다. “생선구이네. 요즘 딱 먹고 싶던 참이었어.”“그럼 거위 간도 하나 더 시켜줄까?” 강유형의 말투는 무척 자연스러웠다.“디저트도 하나 추가해 줘.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에 딸기 소스 올린 거. 음료는 오렌지 주스로 할게,” 조나연이 말을 마치고 나를 보았다. “지원 씨도 오렌지 주스 한잔하실래요?”“괜찮아요. 저는 물만 마실게요.” 말을 마치고 나는 포크에 꽂힌 거위 간을 입에 넣었다.부드럽고 섬세한 맛에 은은한 우유 향까지...“유형 씨, 전에 몇 번 사다 준 거위 간도 여기 거야?” 조나연의 말에 내 씹는 동작이 멈췄다.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표정이 약간 불편해 보였다. “...응.”그가 이곳의 거위 간 맛이 좋다는 걸 아는 이유가 밝혀졌다. 다른 사람에게 여러 번 사다 줬던 거였고 나는 오늘 처음이었다.그것도 그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보상하는 차원에서.순간 내 입 안의 거위 간 맛이 변했고 삼키기조차 힘들어졌다.“그래서 이 근처를 지나가다 거위 간 냄새가 익숙하다고 느꼈나 봐.” 조나연이 웃으며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 깊은 곳에 서려 있는 따스함이 마치 그물처럼 나를 감싸 숨이 막히는 듯했다.그녀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 씨, 유형 씨가 분명 자주 데리고 오셨겠어요. 그래서 이곳 거위 간 맛이 좋다는 걸 알고 저한테 사다 주신 거겠죠.”가슴에 꽂힌 칼로 부족해 두 번 더 비트는 느낌이 이런 걸까. 지금 나는 그 맛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나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오늘이 처음이에요. 저는 나연 씨만큼 복이 없나 봐요.”조나연의 웃음이 잠시 굳더니 시선을 살짝 내리며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진 씨가 저랑... 아이를 버리고 갔는데 무슨 복이 있겠어요?”말을 마치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나는 당황했다. 한 마디에
조나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고,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그녀의 주스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는... 저는 고의가 아니었어요.”연약하고 가련한 모습의 그녀를 보자 오히려 내가 말하면 안 될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았다.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왕 말을 꺼냈으니 확실히 해야 했으니까.“고의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준 건 사실이에요. 나연 씨가 의도하지 않으셨다면 앞으로 주의해 주시면 돼요.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석진 씨가 있었다면 절대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조나연이 말하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여자는 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그녀에게서 증명되는 듯했다.그녀의 말은 꽤 교묘했으나 나로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지원 씨.” 조나연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는데 눈빛이 제법 촉촉했다. “제가 유형 씨를 찾는 것도 석진 씨가 임종 때 부탁해서예요. 유형 씨도 약속했고요.”그녀의 손이 계속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아니었다면 저도 유형 씨를 찾지 않았을 거예요.”그녀는 자신을 변호하는 동시에 은근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우리 모두 성인이고 누구나 다 속내가 있는 법이다.“나연 씨, 유형 씨가 당신 남편에게 당신을 돌보겠다고 약속했다고 해도 그 돌봄에는 선이 있어야 해요. 결국 당신은 혼자 사는 여자고, 당신들이 매일 같이 있는 걸 남들이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고 말도 많을 거예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나연 씨, 다른 사람들이 강유형에 대해 뭐라고 하든 상관없겠지만 당신은 여자잖아요.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다가 나중에 아이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좋지 않잖아요, 그렇죠?”그녀가 순진무구한 이미지를 연기한다면 나도 성녀 역할을 해볼 수 있었다.조나연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 “지원 씨,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결국 유형 씨가 저를 돌보는 게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거잖아요? 이건 유형 씨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자신에 대한 자
고개를 돌리자 강유형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가 이내 짜증 섞인 분노로 바뀌었다.“윤지원, 네 고집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나연이는...”“난 네 약혼녀야.”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너무나 초라하게 들렸다.예전에 TV에서 이런 장면을 볼 때면 여주인공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저런 남자를 위해 말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지. 하지만 지금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나연이가 임신했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강유형이 말하며 뒷걸음질 쳤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난 그는 휙 돌아서더니 밖으로 달려 나갔다.결국 그는 나와 조나연 사이에서 그녀를 선택한 것이다.그 자리에 앉아 나는 그가 조나연을 쫓아가는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가 조나연과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조나연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의 품에 안기는 모습까지...고개를 숙이자 더 이상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오늘 그의 선택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 마음에 답이 생겼다.결국 이 식사에서 나는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50만 원의 식사값을 치렀다.나는 강씨 집안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안리영의 집으로 향했다.“정말 헤어지기로 한 거야?”산부인과 의사인 안리영이 내 혈 자리를 눌러주며 물었다. 덕분에 생리통의 고통은 덜했지만 마음의 통증은 어쩔 수 없었다.“응.” 나는 그녀의 침대에 엎드린 채 대답했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내 눈꼬리가 붉어져 있었다.“그렇게 쉽게 끊을 순 없을 거야.” 안리영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넌 아직 강유형의 비서잖아.”“사직할 거야!”이 문제는 오는 길에 이미 생각해 두었다.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사직하고 강유형과 일하지 않는다 쳐. 하지만 강씨 집안은 어쩔 건데? 강씨 집안에서 널 이만큼 키워줬는데 강유형과 헤어진다고 강씨 집안과의 관계를 끊을 순 없잖아? 강씨 집안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젯밤 그 상황에서는 나연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랬어. 너도 알다시피 석진이는 부모님의 외아들이었잖아. 지금 나연이 뱃속 아이는 임씨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야. 만약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니까 앞으로 나연 씨랑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그 여자를 우선시하겠다는 거야?” 내가 차갑게 묻자 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괜찮아질 거야.”나는 웃음을 지었다.고개를 돌리는 순간 막 떠오른 태양이 눈을 찔렀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유형, 아이가 태어나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야. 아플 수도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지. 네가 이 아이를 핑계 삼는 한, 넌 조나연 씨랑 영원히 얽히게 될 거고 난 항상 너한테 버려지는 사람이 될 뿐이야.”강유형은 내 말에 침묵했다.나는 내 입장을 분명히 했다. “강유형,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면 난 내 남편이 사흘에 한 번씩 다른 여자를 돌보는 걸 원치 않아.”“지원아, 시간을 좀 줘. 잘 처리할게,” 강유형의 눈빛에 갈등이 스쳤다.“뭘 처리해? 조나연 씨는 다른 사람의 아내야. 돌봐야 한대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임석진한테는 너 말고도 다른 친구가 있잖아. 신지태랑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하필 너만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강유형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난 석진이가 사고 났을 때 유일하게 곁에 있었던 사람이야.”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고통을 듣고 임석진의 죽음에 대한 그의 죄책감과 자책을 떠올리며 나는 물었다. “강유형, 혹시 임석진에게 미안한 일이라도 했어?”“윤지원.” 강유형이 차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꼭 이 일을 꼬집어야겠어?”“어, 이미 나한테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유형, 친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괜찮은데 친구의 아내까지 돌보고 싶다면 우리 헤어지자. 그러면 너도
다만 놀이공원이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기에 난 이 시점에 떠나고 싶지 않았다.점심 무렵, 내가 업무를 정리하고 있을 때 이소희가 신비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지원 님, 어젯밤에 생리 시작했어요?”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물어요?”“별거 아니에요.” 이소희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강 대표님이 오늘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으신지 알겠어요. 욕구불만이었나 봐요.”잠시 멍했다가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나는 펜으로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 “근무 시간에 일에 집중해야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요.”이소희는 킥킥 웃으며 어제 우리가 함께 본 현장 보고서를 건넸다. “제가 멋대로 상상한 게 아니에요. 정말로 다들 강 대표님한테 혼나서 무서워하고 있어요. 오늘 대표님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중에 웃으면서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내 눈앞에 오늘 아침 강유형이 화가 나서 장미꽃을 버리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기분이 안 좋은 이유가 내가 평소처럼 쉽게 달래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헤어지자고 한 것 때문인지 궁금했다.“지원 님, 혹시 대표님이랑 싸웠어요?”이소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나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일이나 열심히 해요. 안 그러면 다음에 울 사람은 소희 씨일 지도 몰라요.”이소희를 보내고 나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 일을 정리하고 이소희의 보고서를 검토해 수정한 뒤 강유형에게 보냈다.그는 답장이 없었고 나도 묻지 않았다.오후 3시, 나는 휴게실에 물을 받으러 갔다가 강유형과 마주쳤다.이소희의 말대로 그의 얼굴은 먹구름이 잔뜩 낀 것 같았고 나를 보자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그래도 나는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제가 보낸 보고서 확인해 주세요. 문제없으시면 협력 업체에 답변을 드려야 해서요.”하지만 그는 나를 무시한 채 그냥 지나쳐 갔다.나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는데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지원 씨, 나
조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고 그 가련한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유형 씨, 결국 내가 귀찮아진 거지?” 조나연의 말과 함께 눈물이 뚝 떨어졌다.강유형은 말없이 서 있었고 주변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하지만 석진 씨한테 아무 일도 없었다면 나도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았을 거야...” 조나연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말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네가 나를 귀찮게 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지원이를 귀찮게 하지 마.” 두 사람이 싸우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지, 아니면 떠나야 할지 망설였다.“알겠어. 앞으로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 두 사람을 방해하지도 않을 거야.”조나연이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이번에는 강유형이 쫓아가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강유형이 바로 뒤따라왔다. 우리가 카페를 나서자마자 끼익하는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나와 강유형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보니 조나연이 주차장에서 나오던 차에 치여 넘어진 모습이 보였다.“조나연!” 강유형이 낮게 외치며 달려갔다.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따라갔다.“유형 씨, 아이가...” 조나연은 창백한 얼굴로 한 손으로는 배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강유형의 팔을 꽉 잡았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그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잡은 듯한 모습이었다.배우를 하지 않은 게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차를 몬 사람도 놀라서 연신 설명했다. “대표님, 저 여자가 갑자기 뛰어들었어요.”우연히도 운전한 사람은 우리 회사 직원이었다.“꺼져!” 강유형이 화를 내며 조나연을 안아 들고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마침 퇴근 시간이라 직원들이 오가고 있었고 모두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 이미 몇몇은 소곤거리기 시작했다.“대표님이 저 여자를 무척 걱정하
안리영은 내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지만 더 묻지 않고 말했다. “알았어. 소식을 들으면 알려줄게. 그나저나 오늘 어디 갈 거야? 강씨 집안에 돌아가기 싫으면 우리 집에 와.”오늘 안리영은 야간 근무였기에 그녀의 집에 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나는 정말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지금은 강유형과 한방에서 자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하지만 계속 안리영의 집에 머무는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없다고 해도 누구나 자신의 사생활 공간을 침해받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그래.”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살 곳을 찾을 때까지는 호텔보다 그녀의 집이 나을 것 같았다.밤에 잘 곳은 정해졌지만 나는 바로 그곳으로 가지 않고 차를 몰아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이곳은 이미 구도심이 되었지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임차인들이었는데 임대료가 싸기 때문이었다.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곳이 내 집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우리 가족 셋은 모두 이곳에서 살았다. 당시에는 이곳이 구도심이 아니었고 경제와 교통이 매우 편리하고 번영했었다.하지만 10년의 세월이 지나 이곳은 더 이상 예전의 번화함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었다.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 단지의 대부분의 집들도 임대로 나갔지만 우리 집만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심지어 부모님의 옷과 신발도 그대로 원래 자리에 놓여 있었다.부모님이 그리울 때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볼 수 있었다. 다만 최근 몇 년간은 자주 오지 못했다.결국 그들은 내 기억과 삶 속에서 서서히 퇴장하고 있었다.30분 정도 운전해서 도착한 나는 차 안의 수납함에서 열쇠를 꺼내 집으로 올라갔다.문을 열자마자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생긴 먼지 냄새가 났고 가구들도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전기도 끊겨 있었다.다행히 전기요금 번호가 있어서 바로 요금을 충전했고 곧 전기가 들어왔다.불을 켜고 나는 각 방을 돌아다녔다. 마지막으
“헤르나!”진정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나는 친근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더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할수록 헤르나가 진정우를 더 쉽게 협박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런 뒤 여유롭게 와인잔을 들었다.“진, 너의 여자 친구는 정말 귀엽고 아름다워. 정말 매력적이야.”“걔는 이제 내 여자가 아니야.”진정우의 말은 마치 내 가슴을 칼로 베는 듯했다. 그가 사실을 말하는 건 알았지만 그 말이 여전히 날 아프게 했다.“아니라고? 내 정보가 아직 정확하지 않나 보네.”헤르나가 비웃었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해. 아니면 끊을 거야.” 진정우의 차가운 말투가 내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가 나를 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내버려두는 건 상상도 못 했다.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내가 헤르나에게 이용당할지 모르는 데도 진정우는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왜 그래?” 헤르나가 말하며 내 몸을 던지듯 당기더니 갑자기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그는 자기 얼굴을 내 쪽으로 바싹 붙이며 진정우에게 그대로 보여주었다.진정우는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금색 칼라 핀을 꽂고 있었다. 그는 화면 속에서 내게 무심히 시선을 보냈고 그 눈빛은 마치 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차갑고 냉정했다.“진, 이제 네 여자가 아니라면 내가 얘를 가져도 되겠지?”헤르나가 말하며 내 얼굴에 입술을 밀어붙이려고 했다.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물러났지만 그의 큰 손은 이미 내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그의 입술은 내게 닿지 않았지만 그 느낌은 마치 독사처럼 차가운 혓바닥이 내 몸을 스치는 듯했다.그는 이 모든 걸 진정우에게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진정우가 정말 나를 도와주지 않고 모른 사람 취급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바로 그때 진정우가 말했다.“헤르나, 네 마
내가 말하려고 입을 열기 전에, 헤르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꼬마야, 지금 그 남자를 들여보내면 인질 한 명 더 많아지는 건데.”그는 나를 협박하며 또 겁을 주고 있었다.“지원아?”강유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목소리에서 급한 기색이 묻어났다.나는 헤르나가 나를 데려가도록 그냥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갑자기 그의 손을 물었다.헤르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뺐고 그 틈을 타서 나는 몸을 일으켜 힘껏 문 쪽으로 달려갔다.“강유형, 구...”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나는 기억을 잃고 쓰러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두운 상태였고 몇 개의 노란 불빛만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흐릿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나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내 옷을 확인했다.그 순간, 내가 입고 있는 낯선 잠옷을 보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같은 잠옷을 입은 헤르나가 들어왔다.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고 두려움과 분노가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이렇게 화를 내다니?”헤르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는 그를 눈으로 죽어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저 내 옷을 누가 바꿔 입혔는지 왜 잠옷을 입고 있는지 묻는 것조차 용기가 나지 않았다.헤르나는 와인잔을 손에 들고 침대에 앉았다. 그의 하얀 피부와 유럽식 미남의 외모가 어우러져 고요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혹시 네 옷차림 때문에 화가 난 건가?”그는 내 몸에 입은 잠옷을 가리키며 웃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불을 더 꽉 움켜쥐었다.헤르나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너무 바보 같을 것 같았다.그가 나에게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몸을 조금만 움직이면 알 수 있을 테니까.“정말 순진한 여자애구나.”헤르나가 웃으며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저를 여기 데려와서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나
사람은 정말로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그렇지 않았다면 첫 반응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열고 도망쳤을 텐데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 남자에게 물었다.“누구세요?”“왜 이렇게 슬픈 표정이야? 사랑의 아픔을 겪고 있는 거야?”그 남자는 전형적인 외국인이었다. 깊은 눈두덩, 높은 콧날, 입체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모습이었지만 한국어는 정말 유창하게 했다.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게 내가 왜 슬픈지 한 번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누구세요?”나는 여전히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그 순간,잠깐 끊겼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나는 Q 클럽의 회장이 떠올랐다.하지만 그가 정말 그 사람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Q 클럽 회장이라면 거칠고 강한 남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단정하고 우아하며 나이에 비해 매우 세련된 멋있는 남자였다.길거리에서 만났다면 모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문득 강유형이 말했던 Q 클럽 회장이 다쳤다는 말을 기억했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를 다시 유심히 살펴봤지만 그냥 이 남자가 점점 더 잘생기고 멋있어 보였다.“난 헤르나 톨스크라고 해.”그 남자가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그는 내 얼굴을 만지려는 듯 다가왔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손을 피했다.그럼에도 그는 손을 내 머리에 얹고 마치 애완견을 쓰다듬듯 가볍게 톡톡 쳤다.“날 ‘헤르나’나 ‘톨스크’라고 불러도 돼.”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마치 궁지에 몰린 고양이가 꼬리를 감싸듯이 말이다.“뭐 하는 거죠?”나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만약 지금 소리라도 질렀다면 강유형이 달려와도 나는 그 남자의 손안에 갇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맞춰봐.”헤르나는 늘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기에 나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답했다.“나 잡으러 왔겠죠.”“하하...”헤르나는 껄
목 속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가슴 속 깊이까지 퍼져 나갔고 나는 침묵 속에서 겨우 입을 열었다.“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 반지 고르느라 바쁜 것 같네. 그럼, 이만!”나는 마지막까지 정신을 붙잡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어지는 순간 내 마음도 그 자리에서 무겁게 내려앉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나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강유형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강유형이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잠깐만 기다려. 짐 정리하고 올게.”강유형은 나를 따라오며 말했다.“내가 같이 올라갈게.”“괜찮아, 혼자 올라갈게.”나는 큰 소리로 거절하며 더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유형은 나를 계속 따라왔다.“무슨 일이야?”그는 내 불안한 모습을 눈치챘다. 나는 마음속에서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바라봤다.“괜찮아. 그냥... 혼자 정리하고 싶어서.”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내 마음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강유형의 그 질문에 난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러나 나는 그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진정우와 함께할 때 나는 강유형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는 정말 자신만만했었지만 지금은 그 아픔이 배로 되어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나는 마음속에서 넘쳐나려는 슬픔을 억누르며 억지로 강한 척 그를 바라봤다.“너랑 함께 올라가는 건 좀...”나는 담담하게 말했다.“다른 뜻은 없어. 네가 걱정돼서 그래.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게.”그가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강유형이 문밖에 있는 것조차 싫었다. 지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나는 진정우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방금 그 여자의 한마디가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나는 진정우를 완전히 잊지 못했고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다.“무슨 일이 생기겠어?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결국 나는 공격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강유형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함께
‘가야 하는가?’강유형이 그렇게 많은 충고를 줬지만 난 여전히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강유형은 나를 묵묵히 바라보았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우한테 물어볼게.”그러자 강유형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래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나는 강유형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진정우만큼은 확실히 믿는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내린 결정을 따라야 했다. “여보세요?”전화가 연결되자 진정우의 목소리가 낮고 매력적으로 들려서 귀가 조금 따갑게 느껴졌다.“무슨 일이야?” 내가 말을 꺼내지 않자 진정우가 다시 물었다.“정우야, 지금 내가 있는 호텔에 두 사람이 나를 감시하고 있어. 네가 보낸 사람이야?”내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3A 좌석에 있는 사람들 맞아?”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3A에 있으면 맞겠지. 그곳에서 널 지켜보고 있어.”그렇다면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강유형이 여기서 뭘 하든 진정우는 이미 전혀 모르는 게 없다는 게 확실해졌다.“강유형이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해줬어.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어. 나는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강유형이 마련한 다른 곳으로 가야 할까?” 내 목소리가 낮아졌다. 진정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차가운 침묵을 깨고 나서 물었다.“왜 나한테 묻는 거지?”나는 그냥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서 묻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이 일이 너와도 관련이 있잖아.”침묵 속에서 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말을 꺼냈다. “강유형은 널 해치지 않을 거야.”그의 말은 결국 내가 강유형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었고 강유형과 함께 가라는 의미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했다.이전에 진정우는 나를 강유형에게 맡기기도 했고 내가 강유형을 위해 헌혈했을 때 화를 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또 나를 강유형에게 보내려고 한다
“신지태는 당분간 괜찮을 거야.”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강유형이 설명을 덧붙였다.“Q 클럽은 겉으로는 스누커를 하지만 실제로는 도박을 하고 있어. 신지태에게 그런 일을 벌인 건 그들이 우승을 이어가면서 도박에서 가장 큰 이득을 챙기려는 거였어.”도박이라... 들은 적은 있지만 스누커와 그런 일이 연관될 줄은 몰랐다.“신지태는 이제 그들 손에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런데 그들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어. 그게 바로 지태를 도박에 이용하는 거야. 지태가 경기에서 이기면 겉으로는 그들이 돈을 잃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이득을 챙기게 될 거야.”강유형의 말에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스누커 하나로도 그런 무서운 자본가들이 돈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예전에 신지태가 스누커를 좋아한다고 했었고 그 후에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인도 스누커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었는데... 만약 그가 지금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 기분이 어떨까?나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지태 오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몰라. 만약 알았다면 아마 경기를 하지 않았을 거야.”강유형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말을 이었다.“그런데 만약 지태가 경기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지원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진정우가 신지태를 구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야. 사실 이 일은 그들이 모두 계획한 함정이었어.”나는 갑자기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진정우는 이 일을 알고 있는 걸까? 진정우도 모르고 있는 건가?“지원아, 이제 경기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어야 해. 그런데 브라운이란 사람은 예외야. 그의 팬은 Q클럽이 아무리 손을 써도 제어할 수 없지. 그래서 Q클럽은 너한테도 손을 대려 할 거야. 너를 다치게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너를 협상 카드로 쓰려고 할 거야.”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정우는 다시 Q클럽에 복수하는 걸 안 무서워하는 거야?”강유
강유형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분명히 뭔가 의도가 있는 거였다.그는 내 눈을 깊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진정우는 좀 더 신중하게 브라운을 처리해야 했어. 그의 배경을 먼저 조사하고 나서 행동을 취했어야지.”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네 말은 그 사람 배경이 강하니까 내가 괴롭힘을 당해도 참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내가 피해를 봐도 그냥 참고 있으라는 거지?”강유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지원아, 그런 말은 아니야.”“강유형, 나는 진정우가 한 일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생각해. 브라운은 그냥 자업자득이야.”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강유형의 눈빛에 잠깐의 무력감이 스쳤다.“내 말은 좀 더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잖아. 이런 식으로 일을 키우는 건 결국 너를 더 위험하게 만들 뿐이야.”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 내가 말하는 건 진정우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상황을 냉정하게 보자는 거야.”나는 그가 내 뜻을 왜곡할까 봐 걱정하지 않기 위해 선을 그었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어. 게다가 브라운의 목표는 나니까 진정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가 더 대담해질 거야.”브라운은 이미 진정우와 강유형이 함께한 연회에서 나를 괴롭혔고 그는 아예 두 사람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거였다.“지금은 그의 팬들이 더 난리가 났지.” 강유형은 멀리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지원아, 넌 지금 어디에 있든 위험할 수 있어. 그래서 여기에 있는 건 안전하지 않아.”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강유형이 나에게 말한 의도를 알겠지만 내가 그와 함께 호텔에 가는 건 더 불편한 일이었다.내가 그에게 피를 주고 진정우는 이미 자기와 헤어졌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으면 상황이 더 복잡해지겠지.그래서 나는 그럴 수는 없었다.“그의 팬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 거니까 어디에 있든 난 위험할 거야.”나는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강유형은 턱선
“경기를 보러 온 거야? 티켓 샀어?” 강유형이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아직 안 샀어. 너는 티켓 있어? 티켓 구하기 힘드니까 내가 네 걸 살게. 얼마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빠른 길이 있는데 일부러 돌아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니까.그러자 강유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있긴 한데 안 팔아.”그는 말하자마자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냈고 그것도 두 장이었다. “이미 나한테 남겨두라고 했어. 이건 신지태가 준비한 거야.”그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잠깐 떨렸다. 신지태는 나에게 오라고 연락도 안 했는데 티켓을 남겨둔 걸 보면 나를 기다린 거였을 거다. 내가 안 왔으면 실망했을 것 같았다.“한 장 더 줄 수 있어?”강유형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또 다른 티켓을 꺼내주었다.“강유형, 너 진짜 티켓 파는 사람 같아.”나는 티켓을 받으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 강유형은 웃기만 했지 특별히 대답은 하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그때, 마침 소지훈이 진소영을 데리고 내려왔다. 그는 진소영의 짐을 밀어주고 진소영은 수줍게 그의 옆을 따르며 둘은 정말 달콤한 느낌을 주었다.“친구들이야.” 나는 강유형에게 두 사람을 소개하며 일어섰다.진소영은 소지훈과 함께 내 쪽으로 걸어오며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새언니.”나는 진소영을 보며 그녀가 강유형을 경계하듯 쳐다보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의도적으로 ‘새언니’라고 불렀다. 이건 분명 강유형을 자극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지훈이가 잘 돌봐줄 거야. 그런데 만약 뭐가 이상하거나 네가 괴롭힘당하면 언제든지 전화해.”나는 진소영에게 말하는 척하며 소지훈에게 경고했다. 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소지훈을 지키려고 했다.“지훈 오빠는 저를 절대 괴롭히지 않아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나는 소지훈에게 티켓을 건네며 말했다.“이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야.”“고마워요, 새언니.”진소영은 예의 있게 답하며 또다시 나를 ‘새언니’라고 불렀다.“잘 가. 뭐 필요하면 연
“예쁜 아가씨,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흰머리의 외국인 할머니가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나는 예의 있게 물었다.“커... 커피 한잔 사주실 수 있을까요? 돈이 없어서 너무 오래 마셔보지 못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면서 그런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래서 나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내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앉아서 마셔도 될까요?”선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거니까 앉게 해주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요. 저쪽 자리가 비었는데 그쪽으로 앉으세요.”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보았다. ‘강유형이 왜 여기 있지?’어리둥절한 사이 강유형은 내 커피를 마시려던 그 할머니에게 옆자리를 가리키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건네주었다.“커피 드시고 싶으시면 직접 주문하시면 돼요.”강유형의 행동에 그 할머니는 그대로 물러나고 커피도 주문하지 않고 나갔다.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할머니가 돈을 들고 가는 모습에 미묘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때 강유형이 다시 말을 꺼냈다.“봤지? 그 할머니는 사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게 아니야.”“돈을 원한 거야?”“그래. 만약 오늘 그 할머니가 여기 앉아서 커피를 주문하게 되면 10분도 안 돼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거야. 그러면 누군가 신고하고 넌 커피를 사준 사람으로 경찰에 끌려갈 거야.”강유형의 말에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이 떠오르면서 신지태가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강유형의 말에 반박했다.“사람들을 그렇게 나쁘게만 볼 필요 없잖아.”강유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내 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한 할머니와 젊은 여자가 싸우는 영상이 나왔고 내용은 강유형이 말한 것과 거의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