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님, 강 대표님께서 찾으세요.”나를 따라온 이소희가 전화기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강유형의 집요함을 과소평가했나 보다. 이런 상황에서 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매우 공식적인 어조로 말했다.“지원아.” 강유형의 목소리는 낮고 쉬어 있었고 분명한 미안함이 묻어났다. “오늘 왜 그렇게 일찍 나갔어? 집에 와보니 네가 없더라.”그가 공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는 조금 멀리 걸어갔다.“아침 먹으러 나왔어.”“미안해. 나... 어젯밤에... 정말 돌아올 수가 없었어. 그래서 집에 못 갔어.”이 말에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왜 돌아올 수 없었는데?”“...”나는 숨을 참으며 그에게 대화의 여지를 주었다. “간병인을 못 구했어?”“...맞아.”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강유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원아, 거기 일 언제 끝나? 내가 데리러 갈게. 점심 같이 먹자.”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어젯밤 조태혁의 말대로 그는 조나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오늘 갑자기 나와 함께 식사하자고 하는 건 어젯밤 중간에 멈춘 것에 대한 보상인지, 아니면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낀 건지 알 수 없었다.그걸 추측하느라 두뇌 세포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아 난 담담하게 그에게 대답했다. “언제 끝날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점심시간에도... 끝나지 않을 수 있고. 너도 요즘 점심에 꽤 바쁘지 않았어?”“지원아.” 강유형은 아마도 내 말에서 빈정거림을 감지했는지 무거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2초 정도 침묵한 후 말했다. “오해하지 마.”어젯밤 서로 끌어안고 있을 때도 다른 여자에게 갈 수 있었던 그에게 내가 무엇을 더 오해할 수 있을까?지금은 근무 시간이라 그와 사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바빠. 할 말 없으면 끊을게.”그가 말을 하지 않자 나는 전화를 끊었다.오늘의 외근은 협력 업체와의 논의
“그럼 같이 먹어.”강유형은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동의해 버렸다.조나연이 앉으며 앞에 놓인 음식을 보더니 군침을 삼키는 표정을 지었다. “생선구이네. 요즘 딱 먹고 싶던 참이었어.”“그럼 거위 간도 하나 더 시켜줄까?” 강유형의 말투는 무척 자연스러웠다.“디저트도 하나 추가해 줘.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에 딸기 소스 올린 거. 음료는 오렌지 주스로 할게,” 조나연이 말을 마치고 나를 보았다. “지원 씨도 오렌지 주스 한잔하실래요?”“괜찮아요. 저는 물만 마실게요.” 말을 마치고 나는 포크에 꽂힌 거위 간을 입에 넣었다.부드럽고 섬세한 맛에 은은한 우유 향까지...“유형 씨, 전에 몇 번 사다 준 거위 간도 여기 거야?” 조나연의 말에 내 씹는 동작이 멈췄다.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표정이 약간 불편해 보였다. “...응.”그가 이곳의 거위 간 맛이 좋다는 걸 아는 이유가 밝혀졌다. 다른 사람에게 여러 번 사다 줬던 거였고 나는 오늘 처음이었다.그것도 그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보상하는 차원에서.순간 내 입 안의 거위 간 맛이 변했고 삼키기조차 힘들어졌다.“그래서 이 근처를 지나가다 거위 간 냄새가 익숙하다고 느꼈나 봐.” 조나연이 웃으며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 깊은 곳에 서려 있는 따스함이 마치 그물처럼 나를 감싸 숨이 막히는 듯했다.그녀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 씨, 유형 씨가 분명 자주 데리고 오셨겠어요. 그래서 이곳 거위 간 맛이 좋다는 걸 알고 저한테 사다 주신 거겠죠.”가슴에 꽂힌 칼로 부족해 두 번 더 비트는 느낌이 이런 걸까. 지금 나는 그 맛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나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오늘이 처음이에요. 저는 나연 씨만큼 복이 없나 봐요.”조나연의 웃음이 잠시 굳더니 시선을 살짝 내리며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진 씨가 저랑... 아이를 버리고 갔는데 무슨 복이 있겠어요?”말을 마치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나는 당황했다. 한 마디에
조나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고,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그녀의 주스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는... 저는 고의가 아니었어요.”연약하고 가련한 모습의 그녀를 보자 오히려 내가 말하면 안 될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았다.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왕 말을 꺼냈으니 확실히 해야 했으니까.“고의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준 건 사실이에요. 나연 씨가 의도하지 않으셨다면 앞으로 주의해 주시면 돼요.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석진 씨가 있었다면 절대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조나연이 말하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여자는 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그녀에게서 증명되는 듯했다.그녀의 말은 꽤 교묘했으나 나로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지원 씨.” 조나연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는데 눈빛이 제법 촉촉했다. “제가 유형 씨를 찾는 것도 석진 씨가 임종 때 부탁해서예요. 유형 씨도 약속했고요.”그녀의 손이 계속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아니었다면 저도 유형 씨를 찾지 않았을 거예요.”그녀는 자신을 변호하는 동시에 은근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우리 모두 성인이고 누구나 다 속내가 있는 법이다.“나연 씨, 유형 씨가 당신 남편에게 당신을 돌보겠다고 약속했다고 해도 그 돌봄에는 선이 있어야 해요. 결국 당신은 혼자 사는 여자고, 당신들이 매일 같이 있는 걸 남들이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고 말도 많을 거예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나연 씨, 다른 사람들이 강유형에 대해 뭐라고 하든 상관없겠지만 당신은 여자잖아요.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다가 나중에 아이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좋지 않잖아요, 그렇죠?”그녀가 순진무구한 이미지를 연기한다면 나도 성녀 역할을 해볼 수 있었다.조나연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 “지원 씨,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결국 유형 씨가 저를 돌보는 게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거잖아요? 이건 유형 씨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자신에 대한 자
고개를 돌리자 강유형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가 이내 짜증 섞인 분노로 바뀌었다.“윤지원, 네 고집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나연이는...”“난 네 약혼녀야.”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너무나 초라하게 들렸다.예전에 TV에서 이런 장면을 볼 때면 여주인공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저런 남자를 위해 말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지. 하지만 지금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나연이가 임신했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강유형이 말하며 뒷걸음질 쳤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난 그는 휙 돌아서더니 밖으로 달려 나갔다.결국 그는 나와 조나연 사이에서 그녀를 선택한 것이다.그 자리에 앉아 나는 그가 조나연을 쫓아가는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가 조나연과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조나연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의 품에 안기는 모습까지...고개를 숙이자 더 이상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오늘 그의 선택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 마음에 답이 생겼다.결국 이 식사에서 나는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50만 원의 식사값을 치렀다.나는 강씨 집안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안리영의 집으로 향했다.“정말 헤어지기로 한 거야?”산부인과 의사인 안리영이 내 혈 자리를 눌러주며 물었다. 덕분에 생리통의 고통은 덜했지만 마음의 통증은 어쩔 수 없었다.“응.” 나는 그녀의 침대에 엎드린 채 대답했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내 눈꼬리가 붉어져 있었다.“그렇게 쉽게 끊을 순 없을 거야.” 안리영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넌 아직 강유형의 비서잖아.”“사직할 거야!”이 문제는 오는 길에 이미 생각해 두었다.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사직하고 강유형과 일하지 않는다 쳐. 하지만 강씨 집안은 어쩔 건데? 강씨 집안에서 널 이만큼 키워줬는데 강유형과 헤어진다고 강씨 집안과의 관계를 끊을 순 없잖아? 강씨 집안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젯밤 그 상황에서는 나연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랬어. 너도 알다시피 석진이는 부모님의 외아들이었잖아. 지금 나연이 뱃속 아이는 임씨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야. 만약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니까 앞으로 나연 씨랑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그 여자를 우선시하겠다는 거야?” 내가 차갑게 묻자 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괜찮아질 거야.”나는 웃음을 지었다.고개를 돌리는 순간 막 떠오른 태양이 눈을 찔렀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유형, 아이가 태어나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야. 아플 수도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지. 네가 이 아이를 핑계 삼는 한, 넌 조나연 씨랑 영원히 얽히게 될 거고 난 항상 너한테 버려지는 사람이 될 뿐이야.”강유형은 내 말에 침묵했다.나는 내 입장을 분명히 했다. “강유형,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면 난 내 남편이 사흘에 한 번씩 다른 여자를 돌보는 걸 원치 않아.”“지원아, 시간을 좀 줘. 잘 처리할게,” 강유형의 눈빛에 갈등이 스쳤다.“뭘 처리해? 조나연 씨는 다른 사람의 아내야. 돌봐야 한대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임석진한테는 너 말고도 다른 친구가 있잖아. 신지태랑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하필 너만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강유형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난 석진이가 사고 났을 때 유일하게 곁에 있었던 사람이야.”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고통을 듣고 임석진의 죽음에 대한 그의 죄책감과 자책을 떠올리며 나는 물었다. “강유형, 혹시 임석진에게 미안한 일이라도 했어?”“윤지원.” 강유형이 차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꼭 이 일을 꼬집어야겠어?”“어, 이미 나한테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유형, 친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괜찮은데 친구의 아내까지 돌보고 싶다면 우리 헤어지자. 그러면 너도
다만 놀이공원이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기에 난 이 시점에 떠나고 싶지 않았다.점심 무렵, 내가 업무를 정리하고 있을 때 이소희가 신비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지원 님, 어젯밤에 생리 시작했어요?”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물어요?”“별거 아니에요.” 이소희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강 대표님이 오늘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으신지 알겠어요. 욕구불만이었나 봐요.”잠시 멍했다가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나는 펜으로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 “근무 시간에 일에 집중해야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요.”이소희는 킥킥 웃으며 어제 우리가 함께 본 현장 보고서를 건넸다. “제가 멋대로 상상한 게 아니에요. 정말로 다들 강 대표님한테 혼나서 무서워하고 있어요. 오늘 대표님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중에 웃으면서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내 눈앞에 오늘 아침 강유형이 화가 나서 장미꽃을 버리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기분이 안 좋은 이유가 내가 평소처럼 쉽게 달래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헤어지자고 한 것 때문인지 궁금했다.“지원 님, 혹시 대표님이랑 싸웠어요?”이소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나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일이나 열심히 해요. 안 그러면 다음에 울 사람은 소희 씨일 지도 몰라요.”이소희를 보내고 나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 일을 정리하고 이소희의 보고서를 검토해 수정한 뒤 강유형에게 보냈다.그는 답장이 없었고 나도 묻지 않았다.오후 3시, 나는 휴게실에 물을 받으러 갔다가 강유형과 마주쳤다.이소희의 말대로 그의 얼굴은 먹구름이 잔뜩 낀 것 같았고 나를 보자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그래도 나는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제가 보낸 보고서 확인해 주세요. 문제없으시면 협력 업체에 답변을 드려야 해서요.”하지만 그는 나를 무시한 채 그냥 지나쳐 갔다.나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는데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지원 씨, 나
조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고 그 가련한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유형 씨, 결국 내가 귀찮아진 거지?” 조나연의 말과 함께 눈물이 뚝 떨어졌다.강유형은 말없이 서 있었고 주변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하지만 석진 씨한테 아무 일도 없었다면 나도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았을 거야...” 조나연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말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네가 나를 귀찮게 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지원이를 귀찮게 하지 마.” 두 사람이 싸우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지, 아니면 떠나야 할지 망설였다.“알겠어. 앞으로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 두 사람을 방해하지도 않을 거야.”조나연이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이번에는 강유형이 쫓아가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강유형이 바로 뒤따라왔다. 우리가 카페를 나서자마자 끼익하는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나와 강유형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보니 조나연이 주차장에서 나오던 차에 치여 넘어진 모습이 보였다.“조나연!” 강유형이 낮게 외치며 달려갔다.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따라갔다.“유형 씨, 아이가...” 조나연은 창백한 얼굴로 한 손으로는 배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강유형의 팔을 꽉 잡았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그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잡은 듯한 모습이었다.배우를 하지 않은 게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차를 몬 사람도 놀라서 연신 설명했다. “대표님, 저 여자가 갑자기 뛰어들었어요.”우연히도 운전한 사람은 우리 회사 직원이었다.“꺼져!” 강유형이 화를 내며 조나연을 안아 들고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마침 퇴근 시간이라 직원들이 오가고 있었고 모두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 이미 몇몇은 소곤거리기 시작했다.“대표님이 저 여자를 무척 걱정하
안리영은 내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지만 더 묻지 않고 말했다. “알았어. 소식을 들으면 알려줄게. 그나저나 오늘 어디 갈 거야? 강씨 집안에 돌아가기 싫으면 우리 집에 와.”오늘 안리영은 야간 근무였기에 그녀의 집에 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나는 정말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지금은 강유형과 한방에서 자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하지만 계속 안리영의 집에 머무는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없다고 해도 누구나 자신의 사생활 공간을 침해받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그래.”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살 곳을 찾을 때까지는 호텔보다 그녀의 집이 나을 것 같았다.밤에 잘 곳은 정해졌지만 나는 바로 그곳으로 가지 않고 차를 몰아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이곳은 이미 구도심이 되었지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임차인들이었는데 임대료가 싸기 때문이었다.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곳이 내 집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우리 가족 셋은 모두 이곳에서 살았다. 당시에는 이곳이 구도심이 아니었고 경제와 교통이 매우 편리하고 번영했었다.하지만 10년의 세월이 지나 이곳은 더 이상 예전의 번화함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었다.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 단지의 대부분의 집들도 임대로 나갔지만 우리 집만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심지어 부모님의 옷과 신발도 그대로 원래 자리에 놓여 있었다.부모님이 그리울 때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볼 수 있었다. 다만 최근 몇 년간은 자주 오지 못했다.결국 그들은 내 기억과 삶 속에서 서서히 퇴장하고 있었다.30분 정도 운전해서 도착한 나는 차 안의 수납함에서 열쇠를 꺼내 집으로 올라갔다.문을 열자마자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생긴 먼지 냄새가 났고 가구들도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전기도 끊겨 있었다.다행히 전기요금 번호가 있어서 바로 요금을 충전했고 곧 전기가 들어왔다.불을 켜고 나는 각 방을 돌아다녔다. 마지막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