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님, 강 대표님께서 찾으세요.”나를 따라온 이소희가 전화기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강유형의 집요함을 과소평가했나 보다. 이런 상황에서 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매우 공식적인 어조로 말했다.“지원아.” 강유형의 목소리는 낮고 쉬어 있었고 분명한 미안함이 묻어났다. “오늘 왜 그렇게 일찍 나갔어? 집에 와보니 네가 없더라.”그가 공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는 조금 멀리 걸어갔다.“아침 먹으러 나왔어.”“미안해. 나... 어젯밤에... 정말 돌아올 수가 없었어. 그래서 집에 못 갔어.”이 말에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왜 돌아올 수 없었는데?”“...”나는 숨을 참으며 그에게 대화의 여지를 주었다. “간병인을 못 구했어?”“...맞아.”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강유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원아, 거기 일 언제 끝나? 내가 데리러 갈게. 점심 같이 먹자.”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어젯밤 조태혁의 말대로 그는 조나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오늘 갑자기 나와 함께 식사하자고 하는 건 어젯밤 중간에 멈춘 것에 대한 보상인지, 아니면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낀 건지 알 수 없었다.그걸 추측하느라 두뇌 세포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아 난 담담하게 그에게 대답했다. “언제 끝날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점심시간에도... 끝나지 않을 수 있고. 너도 요즘 점심에 꽤 바쁘지 않았어?”“지원아.” 강유형은 아마도 내 말에서 빈정거림을 감지했는지 무거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2초 정도 침묵한 후 말했다. “오해하지 마.”어젯밤 서로 끌어안고 있을 때도 다른 여자에게 갈 수 있었던 그에게 내가 무엇을 더 오해할 수 있을까?지금은 근무 시간이라 그와 사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바빠. 할 말 없으면 끊을게.”그가 말을 하지 않자 나는 전화를 끊었다.오늘의 외근은 협력 업체와의 논의
“그럼 같이 먹어.”강유형은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동의해 버렸다.조나연이 앉으며 앞에 놓인 음식을 보더니 군침을 삼키는 표정을 지었다. “생선구이네. 요즘 딱 먹고 싶던 참이었어.”“그럼 거위 간도 하나 더 시켜줄까?” 강유형의 말투는 무척 자연스러웠다.“디저트도 하나 추가해 줘.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에 딸기 소스 올린 거. 음료는 오렌지 주스로 할게,” 조나연이 말을 마치고 나를 보았다. “지원 씨도 오렌지 주스 한잔하실래요?”“괜찮아요. 저는 물만 마실게요.” 말을 마치고 나는 포크에 꽂힌 거위 간을 입에 넣었다.부드럽고 섬세한 맛에 은은한 우유 향까지...“유형 씨, 전에 몇 번 사다 준 거위 간도 여기 거야?” 조나연의 말에 내 씹는 동작이 멈췄다.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표정이 약간 불편해 보였다. “...응.”그가 이곳의 거위 간 맛이 좋다는 걸 아는 이유가 밝혀졌다. 다른 사람에게 여러 번 사다 줬던 거였고 나는 오늘 처음이었다.그것도 그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보상하는 차원에서.순간 내 입 안의 거위 간 맛이 변했고 삼키기조차 힘들어졌다.“그래서 이 근처를 지나가다 거위 간 냄새가 익숙하다고 느꼈나 봐.” 조나연이 웃으며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 깊은 곳에 서려 있는 따스함이 마치 그물처럼 나를 감싸 숨이 막히는 듯했다.그녀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 씨, 유형 씨가 분명 자주 데리고 오셨겠어요. 그래서 이곳 거위 간 맛이 좋다는 걸 알고 저한테 사다 주신 거겠죠.”가슴에 꽂힌 칼로 부족해 두 번 더 비트는 느낌이 이런 걸까. 지금 나는 그 맛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나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오늘이 처음이에요. 저는 나연 씨만큼 복이 없나 봐요.”조나연의 웃음이 잠시 굳더니 시선을 살짝 내리며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진 씨가 저랑... 아이를 버리고 갔는데 무슨 복이 있겠어요?”말을 마치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나는 당황했다. 한 마디에
조나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고,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그녀의 주스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는... 저는 고의가 아니었어요.”연약하고 가련한 모습의 그녀를 보자 오히려 내가 말하면 안 될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았다.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왕 말을 꺼냈으니 확실히 해야 했으니까.“고의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준 건 사실이에요. 나연 씨가 의도하지 않으셨다면 앞으로 주의해 주시면 돼요.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석진 씨가 있었다면 절대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조나연이 말하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여자는 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그녀에게서 증명되는 듯했다.그녀의 말은 꽤 교묘했으나 나로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지원 씨.” 조나연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는데 눈빛이 제법 촉촉했다. “제가 유형 씨를 찾는 것도 석진 씨가 임종 때 부탁해서예요. 유형 씨도 약속했고요.”그녀의 손이 계속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아니었다면 저도 유형 씨를 찾지 않았을 거예요.”그녀는 자신을 변호하는 동시에 은근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우리 모두 성인이고 누구나 다 속내가 있는 법이다.“나연 씨, 유형 씨가 당신 남편에게 당신을 돌보겠다고 약속했다고 해도 그 돌봄에는 선이 있어야 해요. 결국 당신은 혼자 사는 여자고, 당신들이 매일 같이 있는 걸 남들이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고 말도 많을 거예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나연 씨, 다른 사람들이 강유형에 대해 뭐라고 하든 상관없겠지만 당신은 여자잖아요.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다가 나중에 아이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좋지 않잖아요, 그렇죠?”그녀가 순진무구한 이미지를 연기한다면 나도 성녀 역할을 해볼 수 있었다.조나연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 “지원 씨,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결국 유형 씨가 저를 돌보는 게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거잖아요? 이건 유형 씨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자신에 대한 자
고개를 돌리자 강유형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가 이내 짜증 섞인 분노로 바뀌었다.“윤지원, 네 고집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나연이는...”“난 네 약혼녀야.”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너무나 초라하게 들렸다.예전에 TV에서 이런 장면을 볼 때면 여주인공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저런 남자를 위해 말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지. 하지만 지금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나연이가 임신했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강유형이 말하며 뒷걸음질 쳤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난 그는 휙 돌아서더니 밖으로 달려 나갔다.결국 그는 나와 조나연 사이에서 그녀를 선택한 것이다.그 자리에 앉아 나는 그가 조나연을 쫓아가는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가 조나연과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조나연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의 품에 안기는 모습까지...고개를 숙이자 더 이상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오늘 그의 선택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 마음에 답이 생겼다.결국 이 식사에서 나는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50만 원의 식사값을 치렀다.나는 강씨 집안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안리영의 집으로 향했다.“정말 헤어지기로 한 거야?”산부인과 의사인 안리영이 내 혈 자리를 눌러주며 물었다. 덕분에 생리통의 고통은 덜했지만 마음의 통증은 어쩔 수 없었다.“응.” 나는 그녀의 침대에 엎드린 채 대답했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내 눈꼬리가 붉어져 있었다.“그렇게 쉽게 끊을 순 없을 거야.” 안리영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넌 아직 강유형의 비서잖아.”“사직할 거야!”이 문제는 오는 길에 이미 생각해 두었다.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사직하고 강유형과 일하지 않는다 쳐. 하지만 강씨 집안은 어쩔 건데? 강씨 집안에서 널 이만큼 키워줬는데 강유형과 헤어진다고 강씨 집안과의 관계를 끊을 순 없잖아? 강씨 집안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젯밤 그 상황에서는 나연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랬어. 너도 알다시피 석진이는 부모님의 외아들이었잖아. 지금 나연이 뱃속 아이는 임씨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야. 만약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니까 앞으로 나연 씨랑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그 여자를 우선시하겠다는 거야?” 내가 차갑게 묻자 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괜찮아질 거야.”나는 웃음을 지었다.고개를 돌리는 순간 막 떠오른 태양이 눈을 찔렀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유형, 아이가 태어나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야. 아플 수도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지. 네가 이 아이를 핑계 삼는 한, 넌 조나연 씨랑 영원히 얽히게 될 거고 난 항상 너한테 버려지는 사람이 될 뿐이야.”강유형은 내 말에 침묵했다.나는 내 입장을 분명히 했다. “강유형,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면 난 내 남편이 사흘에 한 번씩 다른 여자를 돌보는 걸 원치 않아.”“지원아, 시간을 좀 줘. 잘 처리할게,” 강유형의 눈빛에 갈등이 스쳤다.“뭘 처리해? 조나연 씨는 다른 사람의 아내야. 돌봐야 한대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임석진한테는 너 말고도 다른 친구가 있잖아. 신지태랑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하필 너만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강유형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난 석진이가 사고 났을 때 유일하게 곁에 있었던 사람이야.”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고통을 듣고 임석진의 죽음에 대한 그의 죄책감과 자책을 떠올리며 나는 물었다. “강유형, 혹시 임석진에게 미안한 일이라도 했어?”“윤지원.” 강유형이 차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꼭 이 일을 꼬집어야겠어?”“어, 이미 나한테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유형, 친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괜찮은데 친구의 아내까지 돌보고 싶다면 우리 헤어지자. 그러면 너도
다만 놀이공원이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기에 난 이 시점에 떠나고 싶지 않았다.점심 무렵, 내가 업무를 정리하고 있을 때 이소희가 신비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지원 님, 어젯밤에 생리 시작했어요?”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물어요?”“별거 아니에요.” 이소희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강 대표님이 오늘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으신지 알겠어요. 욕구불만이었나 봐요.”잠시 멍했다가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나는 펜으로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 “근무 시간에 일에 집중해야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요.”이소희는 킥킥 웃으며 어제 우리가 함께 본 현장 보고서를 건넸다. “제가 멋대로 상상한 게 아니에요. 정말로 다들 강 대표님한테 혼나서 무서워하고 있어요. 오늘 대표님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중에 웃으면서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내 눈앞에 오늘 아침 강유형이 화가 나서 장미꽃을 버리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기분이 안 좋은 이유가 내가 평소처럼 쉽게 달래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헤어지자고 한 것 때문인지 궁금했다.“지원 님, 혹시 대표님이랑 싸웠어요?”이소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나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일이나 열심히 해요. 안 그러면 다음에 울 사람은 소희 씨일 지도 몰라요.”이소희를 보내고 나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 일을 정리하고 이소희의 보고서를 검토해 수정한 뒤 강유형에게 보냈다.그는 답장이 없었고 나도 묻지 않았다.오후 3시, 나는 휴게실에 물을 받으러 갔다가 강유형과 마주쳤다.이소희의 말대로 그의 얼굴은 먹구름이 잔뜩 낀 것 같았고 나를 보자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그래도 나는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제가 보낸 보고서 확인해 주세요. 문제없으시면 협력 업체에 답변을 드려야 해서요.”하지만 그는 나를 무시한 채 그냥 지나쳐 갔다.나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는데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지원 씨, 나
조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고 그 가련한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유형 씨, 결국 내가 귀찮아진 거지?” 조나연의 말과 함께 눈물이 뚝 떨어졌다.강유형은 말없이 서 있었고 주변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하지만 석진 씨한테 아무 일도 없었다면 나도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았을 거야...” 조나연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말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네가 나를 귀찮게 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지원이를 귀찮게 하지 마.” 두 사람이 싸우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지, 아니면 떠나야 할지 망설였다.“알겠어. 앞으로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 두 사람을 방해하지도 않을 거야.”조나연이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이번에는 강유형이 쫓아가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강유형이 바로 뒤따라왔다. 우리가 카페를 나서자마자 끼익하는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나와 강유형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보니 조나연이 주차장에서 나오던 차에 치여 넘어진 모습이 보였다.“조나연!” 강유형이 낮게 외치며 달려갔다.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따라갔다.“유형 씨, 아이가...” 조나연은 창백한 얼굴로 한 손으로는 배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강유형의 팔을 꽉 잡았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그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잡은 듯한 모습이었다.배우를 하지 않은 게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차를 몬 사람도 놀라서 연신 설명했다. “대표님, 저 여자가 갑자기 뛰어들었어요.”우연히도 운전한 사람은 우리 회사 직원이었다.“꺼져!” 강유형이 화를 내며 조나연을 안아 들고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마침 퇴근 시간이라 직원들이 오가고 있었고 모두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 이미 몇몇은 소곤거리기 시작했다.“대표님이 저 여자를 무척 걱정하
안리영은 내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지만 더 묻지 않고 말했다. “알았어. 소식을 들으면 알려줄게. 그나저나 오늘 어디 갈 거야? 강씨 집안에 돌아가기 싫으면 우리 집에 와.”오늘 안리영은 야간 근무였기에 그녀의 집에 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나는 정말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지금은 강유형과 한방에서 자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하지만 계속 안리영의 집에 머무는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없다고 해도 누구나 자신의 사생활 공간을 침해받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그래.”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살 곳을 찾을 때까지는 호텔보다 그녀의 집이 나을 것 같았다.밤에 잘 곳은 정해졌지만 나는 바로 그곳으로 가지 않고 차를 몰아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이곳은 이미 구도심이 되었지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임차인들이었는데 임대료가 싸기 때문이었다.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곳이 내 집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우리 가족 셋은 모두 이곳에서 살았다. 당시에는 이곳이 구도심이 아니었고 경제와 교통이 매우 편리하고 번영했었다.하지만 10년의 세월이 지나 이곳은 더 이상 예전의 번화함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었다.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 단지의 대부분의 집들도 임대로 나갔지만 우리 집만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심지어 부모님의 옷과 신발도 그대로 원래 자리에 놓여 있었다.부모님이 그리울 때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볼 수 있었다. 다만 최근 몇 년간은 자주 오지 못했다.결국 그들은 내 기억과 삶 속에서 서서히 퇴장하고 있었다.30분 정도 운전해서 도착한 나는 차 안의 수납함에서 열쇠를 꺼내 집으로 올라갔다.문을 열자마자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생긴 먼지 냄새가 났고 가구들도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전기도 끊겨 있었다.다행히 전기요금 번호가 있어서 바로 요금을 충전했고 곧 전기가 들어왔다.불을 켜고 나는 각 방을 돌아다녔다. 마지막으
구안석이 안리영을 안아 올려 빙글빙글 돌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 한복판,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의 모습은 마치 드라마보다도 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듯했다.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들에게 쏠렸고 심지어 박수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안리영은 마치 아이처럼 구안석의 품에서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바로 뒤에서 나왔던 소희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그들 곁을 지나쳤다.안리영도 그녀를 보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구 교수님만 있으면 됐으니까.“안 선생님! 남자친구 진짜 잘생겼어요!”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쳤다.안리영이 바라보니 낯이 익은 여성이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아마도 자신이 분만을 도왔던 산모일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안리영은 거리낌 없이 구안석의 어깨에 기댄 채 활짝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제 남자친구예요!”“안 선생님, 두 분 행복하세요! 그리고 우리 애처럼 귀여운 아기도 얼른 낳길 바라요!”이보다 더 강력한 덕담이 있을까.안리영은 익살스럽게 OK 사인을 그려 보였다.“알겠어요!”이 짧은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둘은 손가락을 맞잡은 채 공항을 나섰다.“화났지?”구안석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지난번 일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았다.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화났어. 근데 이제 용서해 줄래.”다른 사람들 눈에 안리영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는 당당한 의사였지만 구안석 앞에서는 그냥 사랑에 빠져 있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었다.구안석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입 맞췄다.“우리 리영이 진짜 넓은 마음을 가졌네.”“나 그런 거 싫어.”안리영은 단호했다.넓은 마음과 착한 심성의 전제는 결국 자기희생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할 때 이미 충분히 넓은 마음으로 배려하고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구안석 앞에서는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이고 싶었다.구안
내가 두 손 모아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냈지만 안리영은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몇 마디 더 보내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급한 일이 생겨 불려 간 것 같았다.내 예상은 맞았다. 1385번째 천사의 엄마가 갑자기 대출혈을 해서 안리영이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그녀가 수술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동이 틀 무렵이었다. 손과 수술복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었고 이번 응급 처치는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산모는 고비를 넘겼다.“산모 가족 중 한 분, 제 사무실로 오시라고 해 주세요.”안리영은 간호사에게 지시하며 곧장 탈의실로 향했다.산모가 갑작스럽게 대출혈을 일으킨 원인은 다름 아닌 분노 때문이라는 걸 수술하는 과정에 이미 파악했었다.그녀가 화가 난 건 산모가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모진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산모의 남편은 좋은 거 먹이고 마시게 하면서 10달을 공들였는데 고작 이런 쓸모없는 딸을 낳았다면서 원망했고 마침 딸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2천만 원에 팔겠다고 했다.안리영은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게 아니었지만 매번 참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아직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산모의 남편이 먼저 들이닥쳤고 안리영한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난 동의한 적 없어. 저 여자가 수술받은 비용 난 인정 못 해.”그 말에 안리영은 그대로 폭발했고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서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 한 번 더 말해봐요.”안리영의 손에 묻은 피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풍기는 기세에 눌린 건지 남자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래도 계속 투덜댔다.“어쨌든 난 인정 못 해.”“인정 안 하기만 해 봐요.”안리영이 콧방귀를 뀌자 그는 움찔했지만 계속 강하게 밀어붙였다.“인정 못 해. 애 낳고 피 좀 흘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병원에서 돈 벌려고 괜히 호들갑 떠는 거지.”그 뻔뻔한 태도에 안리영은 더욱 화가 치밀어서 그대로 남자의 코앞까지 손가락을 들이밀며 쏘아붙였다.“당신 와이프가 당신 자식을 낳았어요. 그런데 고
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건 여전히 그의 뒷모습뿐이었다.환한 달빛 아래 그 익숙한 실루엣이 또렷하게 보였다. 가깝지만 멀기만 한 거리였다.“강유형, 고마워.”나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김지영한테 이렇게 쉽게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김지영이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준 것도 그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는 조용히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게 그가 한때 나를 사랑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그 순간 나는 머리 위로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강유형과 함께한 10년의 시간을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다들 말하길, 헤어진 연인은 마치 젊은 날을 헛되이 버린 것과 같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왔지만 쉽게 잠들 수 없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찍어 SNS에 올렸다.[이제는 놓아줄 거야.]그 순간 안리영이 바로 좋아요를 눌렀고 메시지를 보냈다.[뭘 놓아준다는 거야?][과거.]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아직 안 자? 혹시 이제 막 수술 끝났어?][야근 중.]그녀의 말과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작고 붉은 얼굴의 신생아 사진과 짤막한 메모가 붙어 있었다.[1385번째 천사야.]그 숫자는 그녀가 지금까지 받아낸 아기들의 수를 뜻했는데 그녀의 성과와도 같은 숫자였다.사진 속 갓난아기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고 아이를 갖고 싶다는 감정이 불쑥 치밀어 올라 안리영과의 채팅창을 끄고 진정우의 카톡을 열어 메시지를 작성했다.[돌아와 줘. 우리 아기 갖자.]하지만 메시지는 끝내 답이 없었다. 그가 답을 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답장을 기다리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정말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그의 답장을 받고 싶었다.[기다려.]그 한마디 말이다.그사이 안리영이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냈지만 내가 계속 답을 하지 않자 마지막으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잠들었
옷의 재질을 손끝으로 느끼는 순간 값비싼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넘겨주었고 그 순간 나는 묘한 감동과 함께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나는 그녀를 이용하려 했는데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사모님, 이 옷 너무 귀한 거라서 받을 수 없습니다.”나는 정중히 거절했다.“귀하다니, 그냥 옷 한 벌일 뿐이야.”그녀의 태도와 모든 걸 초월한 듯한 담담한 말투가 오히려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와 진정우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나는 아무 말 없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바라봤다.“무슨 일 있어?” 그녀가 내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입술을 꾹 눌렀다. “사모님, 제 이름은 윤지원입니다.”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나는 순간 멍해졌고 그녀는 이내 덧붙였다.“네 사진을 본 적이 있으니까.”더욱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침대에 앉아 천천히 설명했다.“전에 우리 아들이 널 마음에 두고 있어서 당연히 알아봤지. 하지만 네 사진을 보자마자 우리 아들이 안 될 거라는 걸 알았어.”‘그랬구나.’나는 그녀의 온화한 눈빛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사모님, 사실 오늘 사모님 뵈러 여기 왔어요.”“그럼 앉아서 얘기해 봐.” 그녀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솔직히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따뜻한 사람이었다.나도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그녀 곁에 앉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질수록 마음도 열리는 법이니까.“사모님, 저는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나는 더 숨길 것도 없이 내 처지와 진정우의 상황을 모두 털어놓았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모님, 회장님과 용준호가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하면 저와 그것을 함께 없애버릴 겁니다. 살아남으려면 사모님의 도움이 필요해요.”그녀는 어느새 손에 염주를 들고 한 알 한
“콜록, 콜록...”감기가 걸렸는지 한밤중에 기침이 나왔다. 나는 기관지가 약해서 감기에 걸리면 꼭 기침을 심하게 한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닌 데다 산속은 기온이 낮아 금세 병이 도진 것 같다.“콜록, 콜록...”목을 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뭔가 이물질이 걸린 듯한 답답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물을 마셨음에도 기침이 가라앉지 않을 때 갑자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한밤중에 울리는 노크 소리는 섬뜩한 법이지만 여기는 절이라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내가 묻기도 전에 문밖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옆방에 있는 운약 스님이네.”운약은 김지영의 법명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불교에 심취해 이미 속가 신도가 된 상태였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공손히 합장했다.“스님.”“기침이 심하더구나. 그래서 목에 좋은 비즙을 가져왔어.”김지영은 온화한 인상이었다. 머리를 가지런히 묶었는데 정수리 부분이 살짝 부풀어 있었고 이마는 둥글고 넓었다. 단번에 복이 많고 인자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런 그녀가 잔혹하기 짝이 없는 남편과 온갖 악행을 저지른 아들을 두었다.이렇게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감사합니다, 사모님. 한밤중에 신경 써 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나는 그녀가 내민 배청을 공손히 받으며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힘들게 찾았던 걸 갑작스럽게 찾게 된다는 게 이런 뜻인 것 같다.마침 그녀와 연결고리를 만들 방법을 고민하던 차였는데 감기 덕분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접점을 만들게 되다니.‘역시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몸이 냉한가 보구나. 산속은 기온이 낮은데 젊은 아가씨들은 대개 옷을 얇게 입더라고.”김지영은 내 이불을 흘낏 보며 조용히 말씀하셨다.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네, 두꺼운 옷을 가져오지 못했어요.”이 말에도 나름 계산이 있었다. 일부러 조금 안쓰러운 척해야 그녀와 더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김지
강경이 끝날 때쯤 스님에게 다가간 나는 강유형을 보았다.나를 데리고 처음으로 경을 들으러 온 것이 강유형이었다. 처음에 나는 지루하다고 느꼈지만 후에 경을 들으면 그에게 복을 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매번 그를 따라와서 진지하게 들었다.몇 번을 듣다 보니 경을 듣는 것이 좋아졌고 심지어 가끔 경서를 따라 읽었다.강유형과 헤어진 후에도 나는 경을 들으러 왔었다. 이제 다시 만나도 그와 나는 평범한 낯선 사람일 뿐이다.그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와 나는 수정 스님 앞에 다가가서 재앙을 소멸하는 법술을 받았다. 이런 법술은 매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운 좋게 맞닥뜨린 것이었다.불교에서 이 법술은 자신의 지은 죄와 재난 그리고 질병을 소멸해 준다. 비록 이것은 마음속 염원에 불과했으나 모두가 좋아한다.불교 의식이 끝난 후 나와 강유형은 법당을 떠났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에 아직도 올 줄은 몰랐어.”“나는 마음을 비우러 온 거야.”나도 그를 속이지 않았다.어떤 일은 그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유형은 알고 있을 것이다.“혹시 내가 도울 거라도 있어?”그는 나에게 물었다.달빛 아래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저번보다 훨씬 야위었고 심지어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으나 현재 그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고 이 관심을 마음속에 억눌렀다.“아니, 없어.”나는 거절했다. 그리고 바로 그에게 설명했다.“이 일에 너까지 연루시키고 싶지 않아.”강유형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지금 나를 지켜주는 거야?”나는 웃으면서 말했다.“그렇게 생각하던가.”“나는 내 최선을 다해 너를 지켜줄 거야, 그러니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해.”강유형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나는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일에 참견하려고 했다.“고마워.”나는 그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했다.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낯설었기에 좋지 않았다.“요즘 경을 들
“진혁 오빠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요. 그러나 더는 말하지 마세요. 말해도 저는 답이 똑같을 거예요. 저에게 없다고요.”나는 직접적으로 태도를 밝히고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지 않았다.“지원아,용씨 가문을 네가 이길 수 없어.”강진혁은 나를 설득하는 것이기도 하고 협박하는 것이기도 하다.많은 일을 겪은 후 나는 강진혁의 협박 따위가 두렵지 않았다. 나는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저는 한번 시도해 보고 싶어요, 혹시 알아요? 성공할지?”“사마귀가 수레 막는 식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지?”강진혁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비웃는 것이다.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진혁 오빠는 사람이 동물보다 위대한 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바로 감히 맞서고, 시도하고, 반격하는 것이에요.”강진혁은 나의 강경한 태도를 보고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말했다.“만약 지원이 너는 정우가 무사하기를 원한다면 물건을 내놔. 그리고 너와 정우는 돈을 가지고 너희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모처럼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는 것을 증명한다.그러나 나는 그의 방식에 따를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나와 진정우의 결과는 더 비참해질 것이다.“진혁 오빠는 저보고 숨어 살란 말이에요?”나는 고개를 흔들었다.“우리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천지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셨어요.”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내가 진혁 오빠가 말한 것처럼 산다면 죽은 후 엄마 아빠 얼굴 보러 갈 면목이 없어요.”강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말해둘게 있어. 용씨 가문에서 나의 체면 때문에 너를 건드리지 않아서 네가 무사할 수 있는 거야.”“진혁 오빠 체면이 값지네요.”나는 강진혁을 공개적으로 비웃었다.나의 말을 들은 강진혁은 표정이 굳어졌다.“네가 끝까지 견지한다면 나도 이젠 해줄 말이 없어.”이 말을 마친 후 그가 떠나려고 할 때 진정우가 생각 난 나는 그에게 말했다.“정우 씨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용진표는 가볍게 웃었다.“역시 어리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도 미래 언젠가 후회할 수도 있어.”“미래를 누가 확신할 수 있겠어요? 눈앞의 오늘날을 소중히 여겨야죠.”나는 슬픈 척했다.“그래, 알았어. 지원 씨가 원하는 사람이니 성재가 돌아오면 데려 가요.”용진표는 흔쾌히 승낙했다.나도 따라서 말했다.“용 대표님, 고맙습니다.”“우리는 등가 거래야.”용진표가 말했다.“허허!”나는 웃었다.“무슨 거래요?”내 말을 들은 용진표는 표정이 굳어졌지만 큰 풍파를 겪었던 사람이라 바로 웃으면서 말했다.“아가씨, 물건을 내놓기만 한다면 무엇을 원하던 다 들어줄 수 있어.”그는 흔쾌히 말했으나 내가 원하는 걸 그는 줄 수 없었다.그러나 나는 여전히 말했다.“그럼, 제가 저희 엄마 아빠를 원한다면요?”이는 불가능한 일로서 그가 이루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가슴을 찔러 부모님께 목숨을 빚졌음을 일깨워주었다.용준표는 얼굴이 굳어졌다.“지원 씨, 이러면 재미없어. 실질적인 걸 요구해야지, 예를 들면 돈이라던가 주식이라던가 혹은 기타 등등.”“용 대표님은 제가 돈이 부족하다고 보세요?”나는 조롱하듯 물었다.“돈은 부족하지 않아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역시 용 대표다운 이론이었다.용진표의 말을 들은 나는 쓸쓸하고 슬픈 기색을 드러냈다.“그러나 돈이 많다고 해도 저에게 가족의 온기를 느끼게 해줄 수는 없어요.”한참 얘기를 나눈 후 용진표도 그가 원하는 걸 내가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럼, 돈이 필요 없고 사람만 원하는 거라면 사람으로 물건을 바꾸지. 어때?”용진표는 배성재로 나를 협박했다.조금 전 배성재를 말했기에 그는 그를 이용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을 말했으면 그는 다른 사람도 이용했을 것이다.진정우는 나에게 배성재의 정체를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용진표는 가짜인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지금 용진표가 이러는 것은 나를 겁주며 물건을 내놓게 하려는 것이었다.“용 대표님이 방금 저에게 이미 약속하셨잖
나는 용은서를 품에 안고 눈앞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호시탐탐 나를 노려보았다. 곧이어 발자국 소리와 함께 애타는 외침이 들려왔다.“은서야, 두려워 마. 엄마가 왔어.”이 말을 듣고 나는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함소은은 내 품에서 아이를 빼앗고 나를 밀쳐 버렸다.그녀는 연기를 정말 잘했다.함소은은 용은서를 안고 뽀뽀하며 달래더니 나를 노려보았다.“내가 지원 씨를 그렇게 믿고 은서랑 친구도 하게 해줬는데, 지원 씨는 어떻게 우리 모녀의 믿음과 사랑을 이용해 우리를 해쳐요?”“언니는 나를 해치지 않았어.”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용은서가 말했다.용은서의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진 함소은은 딸을 안고 울기 시작했다.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함소은이 용은서를 데려가기 위해 그들과 함께 연기하러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용은서의 이 납치극 함소은에 의해 끝났지만 나의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용진표가 나를 찾아왔다.“지원 씨는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을 거야.”용진표는 직접적으로 말했다.나는 그를 보며 함소은이 계획한 이 연극 같은 상황이 생각났다. 사람은 평생 총명하다가도 어리석을 때가 있다고 하더니 지금의 용진표가 그랬다.그는 자신의 여자에게 놀아났다.“용 대표님은 제가 왜 은서를 납치했는지 알고 싶으신 거예요?”나는 용진표에게 물었다.그는 사람을 시켜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나를 여기로 초대했다. 함소은의 예측대로 나에게 빚진 것이 있었기에 너그럽게 나를 대했다.그래도 그는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용 대표님은 모르시나요?”나는 웃으면서 말했다.그는 손으로 짐볼을 굴리면서 말했다.“지원 씨는 단순히 복수만 하고 싶은 것이 아닐 거야. 그리고 복수를 한다고 해도 어린아이한테 손댈 사람은 아니야.”‘잔인한 그가 나를 이렇게 떳떳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니!’“지원 씨는 나에게 원인을 말해주지 않아도 돼. 우리 앉아서 얘기 나누면서 지원 씨가 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