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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Author: 꽃길
“지원 님, 강 대표님께서 찾으세요.”

나를 따라온 이소희가 전화기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강유형의 집요함을 과소평가했나 보다. 이런 상황에서 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매우 공식적인 어조로 말했다.

“지원아.”

강유형의 목소리는 낮고 쉬어 있었고 분명한 미안함이 묻어났다.

“오늘 왜 그렇게 일찍 나갔어? 집에 와보니 네가 없더라.”

그가 공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는 조금 멀리 걸어갔다.

“아침 먹으러 나왔어.”

“미안해. 나... 어젯밤에... 정말 돌아올 수가 없었어. 그래서 집에 못 갔어.”

이 말에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왜 돌아올 수 없었는데?”

“...”

나는 숨을 참으며 그에게 대화의 여지를 주었다.

“간병인을 못 구했어?”

“...맞아.”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강유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원아, 거기 일 언제 끝나? 내가 데리러 갈게. 점심 같이 먹자.”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어젯밤 조태혁의 말대로 그는 조나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 갑자기 나와 함께 식사하자고 하는 건 어젯밤 중간에 멈춘 것에 대한 보상인지, 아니면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추측하느라 두뇌 세포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아 난 담담하게 그에게 대답했다.

“언제 끝날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점심시간에도... 끝나지 않을 수 있고. 너도 요즘 점심에 꽤 바쁘지 않았어?”

“지원아.”

강유형은 아마도 내 말에서 빈정거림을 감지했는지 무거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2초 정도 침묵한 후 말했다.

“오해하지 마.”

어젯밤 서로 끌어안고 있을 때도 다른 여자에게 갈 수 있었던 그에게 내가 무엇을 더 오해할 수 있을까?

지금은 근무 시간이라 그와 사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바빠. 할 말 없으면 끊을게.”

그가 말을 하지 않자 나는 전화를 끊었다.

오늘의 외근은 협력 업체와의 논의와 현장 조사를 포함했다. 오전 10시에 양측 논의가 끝나자 나는 이소희와 함께 현장으로 갔다.

이곳은 놀이공원 건설 프로젝트였다. 내가 모든 프로젝트의 진행을 담당하고 있었고 현재 80% 정도 완공된 상태였다. 완공 상황이 설계 도면과 차이가 있는지 직접 현장에서 확인해야 했다.

협력 업체가 도면대로 완전히 따랐다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매우 낮았지만 절차상 직접 한 번 둘러봐야 했다.

이렇게 한 바퀴 돌고 나니 발이 부어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발가락까지 아팠다.

나는 쉴 곳을 찾아 앉았고 이소희는 내 상태가 좋지 않음을 눈치챘다.

“지원 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네, 발이 아프네요,”

나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외부가 아니었다면 신발을 벗고 발을 좀 쉬게 해주고 싶었다.

“아.”

이소희가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지원 님, 혹시 발뿐만 아니라 몸도 안 좋으신 거예요?”

나는 약간 당황했고 이소희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원 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서요.”

어젯밤 제대로 잠을 못 잤으니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여자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화장을 잘해도 소용없었다.

“생리 전이라 그런가 봐요.”

나는 변명을 했고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는 척했다.

이소희는 수다스러운 타입이라 난 그녀가 더 물어볼까 봐 걱정되었다. 거짓말을 지어낼 자신이 없었으니까.

갑자기 내 앞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소희인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았는데 발목이 따뜻해지자 그제야 익숙한 큰 손이 눈에 들어왔다.

강유형이 내 신발을 벗기고 내 발을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주물러주고 있었다. “신발이 안 맞나 봐?”

나는 목이 메어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화났어?”

“아니야.”

나는 말하며 발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강유형은 손을 놓지 않고 계속 주물러 주었다.

“...앞으로 그러지 않을게.”

오늘 강유형은 푸른 정장 차림이었고 안에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셔츠의 맞춤 커프스단추가 햇빛 아래서 눈 부신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강유형 본인처럼.

그는 내 왼발을 주물러 주고 나서 오른발도 주물러 주었으며 주변에 사람들이 오가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몇몇 젊은 여성들이 부러운 눈빛을 보내며 속삭이고 있었다. 잘생기고 여자 친구를 아끼는 남자를 드디어 현실에서 봤다고.

나도 마음이 흔들렸음을 인정한다. 어젯밤의 그 약간의 서운함도 그가 내 발을 주무르는 동안 함께 풀어졌다.

“지원 님, 정말 행복해 보여요!”

이소희가 멀리서 입 모양으로 말했다.

강유형이 이 정도까지 했는데 내가 아직도 어젯밤 일을 붙잡고 있다면 내가 소심해 보일 뿐만 아니라 마치 그 일을 정말 원했던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점심에 뭐 먹고 싶어?”

강유형이 물었다.

“아무거나.”

나는 정말 식욕이 없었다. 지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고 해도.

“생선구이 먹으러 가자. 거기 구운 거위 간도 있는데 맛이 아주 좋아.”

강유형이 나를 차에 태웠고 내가 안전벨트를 매려고 할 때 그가 몸을 기울여왔다. 비누 향기가 내 코끝을 스쳐 지나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 이상한 반응을 느꼈는지 그가 웃으며 나를 위해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리고 몸을 바로 하면서 내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지원아, 네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어렸을 때랑 똑같아.”

“...”

이 키스는 비록 짧았지만 내 기분을 완전히 좋게 만들었다.

나는 항상 이렇게 의지가 약했다.

그가 조금만 잘 해주면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으니까.

순간 조나연이 생각나서 난 그에게 물어봤다.

“나연 씨는 지금 어때?”

“...괜찮아. 퇴원했어.”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잠시 후 강유형이 나를 보며 물었다.

“왜 말을 안 해?”

“할 말이 없어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순간 그가 말했던 ‘너무 익숙해’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 익숙해졌다. 서로의 일까지 다 알 정도로, 이제는 할 말도 없을 만큼 익숙해졌다.

강유형이 나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종업원이 우리를 창가 쪽 자리로 안내했는데 테이블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흰 장미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제야 그가 미리 자리를 예약해 놓았다는 걸 알았다.

생선구이와 거위 간이 나왔고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도 함께 나왔다.

이 식사에서 그의 정성이 느껴졌다.

나는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공유했다. 맛있는 음식, 꽃, 그리고 강유형의 마디가 길고 아름다운 손까지 그 사진에 잘 담겼다.

회사 동료들이 모두 바로 ‘좋아요’를 눌렀고 이소희는 삐친 표정을 보내며 ‘저도 데려가요’ 라고 덧붙였다.

아까 우리가 올 때 강유형이 그녀에게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고 나중에 영수증을 가져오면 경비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안리영은 본 후 ‘좋아요’를 누르는 대신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이 정도 성의면 잘못을 인정한 거 같아. 그래도 나쁘지 않네. 그리고 어젯밤 당직 간호사한테 물어봤는데 그냥 병실에 있었대. 아무 일도 없었어.]

“...”

“휴대폰 그만 보고 먼저 먹어.”

강유형이 나를 주의시키며 거위 간을 잘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나는 포크를 들어 한 조각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익숙한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조나연도 나를 보고 웃으며 다가왔다.

“지원 씨.”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형 씨도 여기 있어?”

이 말은 마치... 내 약혼자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들렸다.

“나연 씨도 여기 오셨네요, 우연이네요?”

나는 직접적으로 물었다.

“석진 씨 묘지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마침 이 근처를 지나다가 이곳의 거위 간 냄새를 맡고 먹고 싶어져서요.”

조나연의 얼굴은 하얗고 부드러웠으며 목소리도 부드럽고 달콤했다.

“혼자 왔어?”

강유형이 물었다.

“응, 그래서 괜찮다면 나도 같이 먹어도 돼?”

조나연은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강유형 옆 의자에 걸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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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리영은 내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지만 더 묻지 않고 말했다. “알았어. 소식을 들으면 알려줄게. 그나저나 오늘 어디 갈 거야? 강씨 집안에 돌아가기 싫으면 우리 집에 와.”오늘 안리영은 야간 근무였기에 그녀의 집에 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나는 정말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지금은 강유형과 한방에서 자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하지만 계속 안리영의 집에 머무는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없다고 해도 누구나 자신의 사생활 공간을 침해받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그래.”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살 곳을 찾을 때까지는 호텔보다 그녀의 집이 나을 것 같았다.밤에 잘 곳은 정해졌지만 나는 바로 그곳으로 가지 않고 차를 몰아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이곳은 이미 구도심이 되었지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임차인들이었는데 임대료가 싸기 때문이었다.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곳이 내 집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우리 가족 셋은 모두 이곳에서 살았다. 당시에는 이곳이 구도심이 아니었고 경제와 교통이 매우 편리하고 번영했었다.하지만 10년의 세월이 지나 이곳은 더 이상 예전의 번화함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었다.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 단지의 대부분의 집들도 임대로 나갔지만 우리 집만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심지어 부모님의 옷과 신발도 그대로 원래 자리에 놓여 있었다.부모님이 그리울 때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볼 수 있었다. 다만 최근 몇 년간은 자주 오지 못했다.결국 그들은 내 기억과 삶 속에서 서서히 퇴장하고 있었다.30분 정도 운전해서 도착한 나는 차 안의 수납함에서 열쇠를 꺼내 집으로 올라갔다.문을 열자마자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생긴 먼지 냄새가 났고 가구들도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전기도 끊겨 있었다.다행히 전기요금 번호가 있어서 바로 요금을 충전했고 곧 전기가 들어왔다.불을 켜고 나는 각 방을 돌아다녔다. 마지막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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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 씨, 오해하지 마세요.”조나연의 말에 나는 웃고 싶었다.방금 그녀가 침구를 고를 때 한 말을 생각하니, 그녀가 묵인한 남자친구가 강유형이었다.“강유형에게 사주시는 거예요?”그녀가 선택한 침구는 블루 그레이 색으로 확실히 강유형이 좋아할 만한 색상이었다.그러나 그건 예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나에게 동화되어 그가 좋아하는 색이 많이 밝아졌다.조나연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몇 초를 망설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제 남동생에게 사주는 거예요.”나는 이런 수작을 한 그녀와 실랑이하기 귀찮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강유형은 나연 씨와 같이 살겠대요?” 조나연의 아이가 사고가 나면 안 된다고 했으니 24시간 지키는 것이 가장 적합하겠지.“지원 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조나연은 감정이 격해졌다.“강유형에게 침구까지 샀는데, 왜 그런 말을 못 하죠?”나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반문하였다.“지원 씨는 너무 질투심이 많네요. 유형 씨가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조나연의 말에 나는 웃었다.“왜 웃어요?그녀는 억울하면서도 경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말했다.“강유형은 아무리 저를 좋아한다고 해도 남의 유혹에 잘 넘어가더라고요.”“지원 씨의 말이 듣기가 거북하네요.”조아연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제 말이 틀렸어요? 나연 씨는 어제 저에게 해명한다고 회사에 찾아왔지만, 사실은 강유형을 만나고 싶은 거죠?”어젯밤에 나는 꿀잠을 잤지만 아침에 일어난 후 문득 깨달았다.조나연이 어제 회사에 나타나서 일부러 남의 차에 치여 넘어진 것이다. 이로써 강유형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걱정하게 하고 끌어안게 한 것이다.조나연은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어떻게 저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세요?”이에 나는 반문을 하였다.“그럼 강유형이 어제 왜 커피숍에 나타났는지 변명해 보세요.”조나연은 순간 입을 다물고 눈에는 나에게 들킨 난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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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8화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나는 야구 배트를 그에게 겨눈 채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낯선 남자였다.“누구 지시로 온 거야? 내 집엔 어떻게 들어왔고?”나는 곧장 다그쳤다.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태도였다. 나도 긴말 없이 바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경찰서로 가서 말해.”“신고하지 마세요!”남자는 겁에 질렸다.“그냥 뭐 좀 훔치려고 했을 뿐이에요. 지금 다 돌려드릴 테니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면서 그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나는 혹시라도 무기를 꺼낼까 싶어 차갑게 경고했다.“손 함부로 놀리지 마.”내 말이 끝나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의 손과 함께 나온 것은 내 액세서리들이었다.“이것뿐이에요. 다 여기 있습니다.”그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단순한 좀도둑인가?나는 믿지 않았다. 이건 그냥 지나가다 슬쩍한 게 분명했다.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이 나는 곧장 신고 버튼을 눌렀다. 남자는 허겁지겁 내 쪽을 향해 애원했다.“누님, 제발 신고하지 마세요! 경찰한테 잡히면 제 인생 끝장이에요.”그렇게 될 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떼고 단호하게 말했다.“솔직하게 다 말하면 한 번 봐줄 수도 있어.”남자는 다시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내가 한 마디 더 던지자 움찔했다.“고개를 젓는 순간 바로 신고할 거야.”내 휴대폰 화면에는 선명하게 112가 떠 있었다. 내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남자는 몇 초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어떤 형님이 시켰어요.”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 덧붙였다.“누군지는 몰라요. 그냥 돈을 좀 줬고 일이 끝나면 추가로 더 준다고 했어요.”“대체 무슨 일을 하라고 했는데? 내 집에서 뭘 찾으라고 했지?”나는 되물었다.“그런 건 말 안 했어요. 그냥 들어가서 이것저것 뒤집어 놓으라고 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장면이 그려졌다.내 집은 지금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7화

    나는 기껏해야 그녀의 새언니일 뿐인데 지금은 그녀를 보면서 엄마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아마 내 안에 숨어 있던 모성애가 폭발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아이를 가져볼 때가 된 걸지도 모른다.생각해 보면 참 이상했다. 요즘 들어 자꾸만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곤 했다.“아니야,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진소영이 말하는 고맙다가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내게 화를 내는 일은 드문데 그런 그녀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이 작은 아이는 참으로 감정이 뚜렷한 편이었다. 나는 그녀의 감사를 받아들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오빠는 또 어디 갔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건 아니지?”진소영이 갑자기 진정우에 관해 물었다.나는 솔직히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할까 봐 조금 걱정했었다. 그녀는 한 번 의문을 품으면 끝까지 답을 찾고야 마는 집요한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진정우에 관한 건 내가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일이 많았다.“별일 없어.”나는 진정우가 그녀에게 알리지 않길 원했던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둘이서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마. 요즘 동네에 낯선 사람들이 몇 번이나 다녀갔어. 내가 살던 곳에서 뭔가를 찾는 것처럼 말이야.”진소영의 말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 사람들이 그곳까지 찾아갔다고? 그렇다면 혹시 무덤을 파헤치거나 유골을 가져가려는 걸까?’“이제 솔직하게 말해 줄 거야?”진소영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예전보다 날카로워졌고 성숙해졌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진정우의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다 오히려 더 큰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침묵 속에서 진소영이 말했다.“언니, 오빠가 말하지 않는 건 내가 겁먹을까 봐, 혹은 나까지 말려들까 봐 그러는 거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 나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그래야 만약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더라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역시나 그녀는 냉철하고 이성적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6화

    나와 그녀의 교집합은 강유형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남자는 나와 조나연, 그 누구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는 법이다.“어떻게, 요즘 그 사람 못 봤어?”나는 옅은 미소를 띠고 반문했다.조나연은 솔직했다.“못 봤어.”“왜, 보고 싶어졌어?”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조금.”조나연도 담백하게 인정했다.“보고 싶으면 찾아가.”나는 그녀를 부추겼다.그러자 조나연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올랐다.“찾아갈 수 있었다면 왜 굳이 그쪽한테 묻겠어?”이 여자는 나와 대화할 때마다 꼭 불꽃이 튀는 듯했다. 언제나 날카롭고 거칠게 반응했다.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나는 더 차분해졌다.“예전엔 나연 씨를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변했다니... 참, 남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어.”“지원 씨, 그렇게 비꼬지 마.”조나연이 불만스럽게 말했다.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강유형이 이런 그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나연 씨, 후회한 적 있어?”나는 문가에 기대어 물었다.“없어.”그녀는 단호했다. 망설임도 없었다.그러나 그럴수록 그녀가 후회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부정하는 건 누군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차릴까 봐 두려운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니 말이다.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만약 나연 씨가 그렇게 부와 명예만 좇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어. 돈이 많든 적든, 부유하든 평범하든, 결국 가장 소중한 건 담백하고 평온한 삶이란 걸.”나는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려 이런 말을 뱉은 게 아니었다. 그저 솔직한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요즘 나는 걷는 게 가장 좋아. 길을 걷다가 평범한 부부가 자전거 한 대를 함께 타거나 장을 본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나란히 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5화

    조나연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진소영의 월급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까지 함께 내밀며 말했다.“이것도 안 받을 거면 아예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이건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그때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가 일부러 놀란 척을 했다.“어, 나연 씨 방에 사람이 있었네?”진소영은 나를 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물론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철저히 선을 그었다.조나연은 나를 보곤 순간 살짝 긴장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바로 감정을 감췄다. 그러곤 진소영에게 말했다.“이건 다 네가 받아야 할 몫이니 가져가.”진소영은 손을 내밀어 봉투만 들고 갔다. 조나연이 준비한 상자는 끝내 손에 들지 않았다.역시 진정우의 손에 자란 아이다웠다. 기개가 남달랐다.“고맙습니다.”진소영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돌아섰다.끝까지 나에게는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아직도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조나연에게 우리 관계를 들키기 싫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나중에 또 아르바이트하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돼.”조나연은 내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나연 씨가 여자라서 다행이지. 남자였으면 진짜 관심 있는 줄 알았겠어.”진소영이 문을 나서자 나는 곧바로 조나연을 놀리듯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나는 그녀가 진소영에게 주려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이거, 실례라고 생각 안 해?”나를 사장으로 대하는 태도 따위는 없었다.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가 들어 있었다. 가격이 꽤 나가 보였다.“직원 잡으려고 돈을 이렇게 쓰는 거 보니, 나연 씨도 진짜 통이 크네.”“하긴 순진한 양 없이 어찌 늑대를 잡겠어.”조나연은 숨김도 없었다.나는 상자를 딱 소리 나게 닫았다.“그 애한테 부리는 수작은 이쯤에서 접어.”조나연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봤다. 뭔가 설명을 바라듯 말이다.나는 그녀가 진소영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따지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 애, 진정우의 동생이야.”조나연은 놀란 듯 살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4화

    이런 깊은 밤, 바에서 진소영을 마주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요즘 나도 일이 너무 많아 그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진소영은 먹색이 감도는 짙은 녹색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디자인도 아니었고 그저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운 바의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나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대체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건지 지켜보고 싶었다.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더니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방향을 꺾어 방으로 들어갔다.그곳은 조나연의 사무실이었다.‘조나연이 그녀를 찾은 건가?’순간 가슴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방문 앞에 섰다. 마침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대화 내용도 들을 수 있었다.“조 매니저님, 저 다음 주부터 개강이라 여기 더 이상 못 나와요. 이번 공연비 정산 좀 부탁드려요.”진소영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그녀가 여기서 돈을 벌고 있었다니, 게다가 말투를 보니 꽤 오래 이 일을 해온 것 같았다.“서울대로 가는 거야?”조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울대요.”“좋은 학교지. 우리 남편도 그 학교 나왔어.”그녀는 태연하게 임석진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어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중에 그의 영혼이 그녀를 찾아와 복수를 해도 모자랄 텐데 말이다.“아, 그렇군요.”진소영은 짧게 대꾸했을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나연도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웠는지 화제를 돌렸다.“어떤 전공을 선택했어?”“의학이요.”진소영은 묻는 말에 곧바로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조나연은 가느다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이렇게 예쁜 애가 왜 하필 의대를 가려는 거야?”“그냥 좋아서요.”진소영은 의대를 선택한 진짜 이유를 굳이 밝히지 않았다.“그렇지만 너무...”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3화

    “응.”긁히면서 상처가 날 때는 아프지 않았는데 약을 바르려니 오히려 더 따끔하고 아팠다.구안석은 손을 멈췄다.“그럼 좀 더 살살 할게.”“아니, 안 발라도 아파. 세기 문제는 아니야.”안리영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았다.구안석은 그녀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리영아, 미안해. 널 지켜주지 못했고 제때 찾아내지도 못했어.”사실 누구한테 질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구안석 자신이 가장 자책하고 있었다.어떻게 자기 여자조차 지키지 못하는 남자 친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선배 탓하는 거 아니야.”안리영은 진심이었다.그녀는 정말 구안석을 원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건 그녀의 직업이 안고 가야 할 위험이었다.“하지만 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구안석은 안리영의 상처를 바라보며 깊이 자책했다.“그럼 그 원망을 보살핌으로 바꿔 봐. 나 다쳤으니까 남자 친구가 잘 챙겨줘야지.”안리영이 귀염스레 애교를 부렸다.이런 순간에 구안석이 거절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그래.”그는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그러자 안리영이 장난스럽게 웃었다.“그럼 일은 안 하려고?”구안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일보다 여자 친구가 더 중요하지.”“농담이야. 당연히 일이 더 중요하지. 볼일 봐.”안리영은 구안석이 이번에 돌아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괜찮아. 상대방이랑 얘기해 볼게. 며칠 동안은 네 곁에 있을 거야.”하지만 구안석은 단호했다.그의 마음이 그런 거라면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구안석은 약을 다 바르고 말했다.“가자, 집으로.”입원이 필요한 부상은 아니었기에 병원에 남을 이유는 없었다.안리영도 밤새 정신없이 지내느라 한숨도 못 잤다.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구안석과 함께 가려는데 그가 몸을 숙이며 말했다.“안아줄게.”“괜찮아. 혼자서도 걸을 수 있어. 이 정도 상처로는 아무 문제없...”거절하려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구안석이 끊어버렸다.“올 때도 안겨서 왔잖아.”그 말에 안리영은 순간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2화

    병원 로비에서 나는 조시언과 마주쳤다. 그의 손에는 연고가 든 작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리영이는요?”나는 머뭇거리다 물었다.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됐다. 조시언 씨라고 하자니 너무 딱딱했고 삼촌이라 부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어차피 우리와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위에서 검사 중이에요.”조시언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목시계를 흘깃 보았다.“아마 지금쯤이면 곧 끝날 거예요.”“그럼 전 올라가 볼게요.”나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요.”그는 나를 불러 세우고는 손에 든 봉투를 내밀었다.“리영이 손목이랑 발목에 상처랑 멍이 좀 있어요. 연고를 발라줘야 할 것 같아서요.”나는 조용히 봉투를 받아 들었다.“그쪽은 안 올라가세요?”“네. 전 차에 있으려고요. 이따 누나랑 매형이 볼일 끝나시면 데리고 나오실 수 있으세요? 부탁드릴게요.”조시언의 말은 영 이상했다. 하지만 그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니 굳이 더 캐묻진 않았다. 그래도 하나만은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리영이를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찾으려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죠. 어렵지 않아요.”그의 답변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하지만 어딘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랑 구안석도 필사적으로 안리영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실패했으니 말이다.“리영이한테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는 건 역시 시언 씨뿐이네요.”나는 장난스럽게 한마디 던졌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없이 돌아서서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키의 단정한 실루엣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걸음을 옮겼다. 정말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인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병실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안리영과 구안석을 만났다. 그리고 그 순간 조시언이 굳이 올라오려 하지 않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지원아! 나 안아줘!”안리영은 나를 보자마자 애교를 부리며 달려들었다.나는 그녀를 꼭 안아 주며 웃었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1화

    그녀는 그의 허벅지를 움켜잡은 걸로도 모자라 아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그의 민감한 부위로 들이대게 되었다.순간적으로 엄습한 당혹감에 안리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예전에 욕실에서 알몸인 상태로 서로를 마주쳤을 때보다도 훨씬 더 난감한 상황이었다.마치 감전된 듯 손을 황급히 떼려는 순간, 그녀의 몸이 단숨에 들어 올려졌다.조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품에 안고 성큼성큼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병원에 도착하자 안리영은 부모님과 구안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리영아,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고?”“시언아, 리영이는 안 다쳤지?”부모님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정밀 검사를 받는 게 좋겠어요.”조시언의 제안에 부모님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구안석이 입을 열었다.“리영아, 정말 괜찮아? 안 다쳤어?”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안리영은 코끝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다리는 괜찮아?”구안석은 모두가 놓친 부분을 예리하게 짚었다.그제야 안리영은 자신이 아직 조시언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아니, 괜찮아. 그냥 다리가 조금 저려서 그래.”그녀는 몸을 비틀며 내려오려 했지만 조시언은 더욱 단단하게 그녀를 고쳐 안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은 채 검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안석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는 곧 조시언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안석 씨, 리영이는 저한테 맡기시죠.”하지만 조시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안리영을 품에 안은 채 그대로 검사실에 들어갔다.“리영이를 구해줘서 고마워요.”구안석은 다시 한번 조시언에게 말을 건넸다.“고맙다는 말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죠?”조시언의 목소리는 싸늘했다.그 말의 뜻을 구안석은 알고 있었다. 주시언은 안리영이 도움이 필요할 때 그녀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구안석을 원망하고 있었다.그 점은 구안석 자신도 자책하고 있었다.더는 할 말이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70화

    경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그가 온 것이었다.하지만 누가 됐든 간에 구해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리영의 공포는 한결 가라앉았다.그녀도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방금까지 유창하게 떠들며 납치범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혹여라도 한 마디라도 잘못 내뱉어 납치범이 화를 내기라도 하면 망설임 없이 자신을 아래로 던져버릴 것 같았으니까.“헛소리 집어치워. 당장 꺼져! 안 그러면 이 여자랑 같이 뛰어내린다.”연시훈이 조시언을 향해 위협적으로 소리쳤다.조시언은 목이 졸려 있는 안리영을 힐끗 바라보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납치범을 응시했다.“지금 뛰어내리면 넌 아무것도 얻지 못해. 하지만 리영이를 놓아주면 병원에서 네가 받아야 할 보상금을 내가 직접 챙겨주지. 거기에 더해 내 개인 돈으로 2억을 얹어 줄게.”그는 말뿐이 아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그대로 던지자 지퍼도 잠그지 않은 채 가방에서 새 지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와 연시훈의 발치에 떨어졌다.잠시 정신이 멍해진 연시훈은 이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네 돈 따위 필요 없어! 난 내 와이프랑 아이를 원한다고!”그의 말과 오늘 저지른 일은 마치 절절한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했다.그러나 조시언은 비웃음을 흘렸다.“연시훈, 맞지? 나한테 그런 가식적인 연기 따위는 통하지 않아. 내가 돈을 들고 왔다는 건 이미 네가 어떤 놈인지 다 알고 있다는 뜻이야.”안리영은 연시훈의 몸이 순간 굳어지는 걸 느끼자 조시언이 제대로 짚어낸 걸 알고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죽은 와이프랑 아이에 대한 사랑 운운하더니 결국 다 헛소리였던 거야? 그냥 감성 코스프레였던 거라고?’그런데 지금까지 연시훈은 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만약 조시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돈을 요구할 생각이었던 걸까?’그때 연시훈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네 말을 믿을 수 없어! 날 속이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리고 네가 혼자 왔을 리도 없어. 경찰을 데리고 왔을 거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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