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혔다. 분명 그가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이게 질투인 걸까?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유형은 내 손을 놓았고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윤지원, 내가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복수하려는 거야?”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으니까.“아니 난...” 설명하려는 내 말은 도중에 끊겼다.“너 정말로 그 녀석을 만졌어? 정말로 그곳을?” 강유형의 턱이 굳어졌고 그의 눈에는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무서운 빛이 서렸다.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역시 질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순간 내 마음속의 불편함이 많이 사라졌다. 그가 나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만약 그가 나를 단순히 여동생이나 친구로만 여겼다면 내가 다른 남자를 만졌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야.” 나는 다시 한번 부인했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태혁이 안에서 나왔고, 나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변태 아줌마, 또 우리 매형 꼬시려고?”사람 성격 쉽게 안 변한다더니 정말 그랬다.조태혁이 나를 바라보는 그 비열한 표정은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나 싶을 정도였다.이쪽으로 걸어오는 남매를 보면서, 특히 조나연의 그 순수한 모습과 그녀가 강유형을 만졌던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손을 들어 강유형의 팔을 감쌌다.하지만 그의 근육이 순간 굳어지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또 거짓말이지.” 조나연이 조태혁의 귀를 꼬집으며 다가왔다.그녀는 우리 앞에 서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유형 씨, 지원 씨, 정말 미안해요.”“네 잘못 아니야.” 강유형이 조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아무도 널 구해주지 않을 거야.”“흥.” 조태혁이 불만스럽게 강유형을 흘겨보았다. “당신이 누군데요? 뭔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우리 새 매형이 되겠다면 말 들을게요.”“조태혁!”조나연이 꾸짖으며 그를 한 번 더 때렸고 조태혁은 피하며 말했다. “누나, 저 사람
조나연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아이는 무사했고 그녀는 병실로 돌아왔다. 창백한 얼굴에 붉어진 눈, 거기에 하얀 달빛까지 더해져 정말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너무 걱정하지 마. 아이는 괜찮아.” 강유형이 위로했다.“유형 씨, 나 너무 무서웠어.” 조나연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유형이 휴지를 건네자 조나연은 그것을 받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그의 손등에 기댔다.비록 가엾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약혼자를 자기 남자처럼 대해도 되는 걸까?나는 다가가 말했다. “나연 씨,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가 흥분하면 태아에게 좋지 않대요. 겨우 아이를 지키셨는데 이렇게 울다가 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질 거예요.”말하면서 난 그녀를 부축하며 강유형과 살짝 떼어놓았다. 하지만 강유형의 손등에 남은 눈물자국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더럽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깨끗한 걸 좋아한다. 일상에서도 그렇고 감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조나연은 내가 이렇게 말한 것에 놀란 듯했다. 그녀는 얼굴색이 확 변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로 잡았다.“유형 씨, 미안해. 내가 이렇게...”그녀가 휴지를 집어 강유형의 손을 닦으려 하자 내가 가로막았다. “나연 씨, 지금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요.”조나연의 표정이 굳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강유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병실을 나오자마자 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 “나연 씨가 널 좋아하나 봐?”“아니야!”강유형이 부인했다.“그럼 넌? 나연 씨를 좋아해?”한 번에 확실히 물어보고 싶었다. 애매하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유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몇 초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그저 친구일 뿐이야...”정말 그저 친구일까?“석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 내 손을 잡고 나연이를 돌봐달라고 했어...” 강유형의 목소리가 떨렸고 늘어뜨린 손도 마찬가지였다.임석진의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그는 항상 이렇게 격앙되
지금은 내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흥분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 순간 그가 전화를 받거나 나가버린다면 나로서는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강유형의 목젖이 움직였다.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바로 끊어버리고는 다시 내 목과 쇄골에 입 맞추기 시작했다...하지만 휴대폰이 곧바로 다시 울렸다. 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우리 둘 다 평온할 수 없을 것 같았다.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받아.”강유형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옆에 있던 이불을 끌어다 나를 덮어주고는 휴대폰을 들고 발코니로 나갔다.그가 발코니 문을 닫긴 했지만 그의 낮은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지금 안 돼. 간병인을 부르는 게 어때?”“돌보지 않겠다고 한 적 없어... 내 잘못인 걸 알아... 알았어, 울지 마. 갈게, 지금 갈게...”그 후로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다만 라이터 켜는 소리만 들렸다.강유형이 담배를 피웠다.처음으로 집에서 담배를 피웠다.약 10분 후 강유형이 돌아왔고 공기 중에 담배 냄새가 섞여 있었다.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안함이 묻어났다. “저기...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나연이가 병원에 있는데 돌볼 사람이 없어서...”드물게도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이불 속 내 몸이 차가워졌다. “남자인 네가 나연 씨를 돌보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해?”“난, 난 나연이한테 간병인을 구해주러 가는 거야.” 강유형은 말하면서 이미 내가 흐트러뜨린 그의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를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난처함과 서운함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코끝까지 올라왔다. “강유형.”“응?”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는데 그의 눈 밑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아마도 내가 그를 붙잡고 가지 못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유명한 사업가인 강유형이 언제 이렇게 두려워했던가. 지금 내 앞에서 그는 긴장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이 순간 내 목구멍에 걸린 말을 더 이상 꺼낼 수 없었다. 나는 쓴
“지원 님, 강 대표님께서 찾으세요.”나를 따라온 이소희가 전화기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강유형의 집요함을 과소평가했나 보다. 이런 상황에서 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매우 공식적인 어조로 말했다.“지원아.” 강유형의 목소리는 낮고 쉬어 있었고 분명한 미안함이 묻어났다. “오늘 왜 그렇게 일찍 나갔어? 집에 와보니 네가 없더라.”그가 공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는 조금 멀리 걸어갔다.“아침 먹으러 나왔어.”“미안해. 나... 어젯밤에... 정말 돌아올 수가 없었어. 그래서 집에 못 갔어.”이 말에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왜 돌아올 수 없었는데?”“...”나는 숨을 참으며 그에게 대화의 여지를 주었다. “간병인을 못 구했어?”“...맞아.”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강유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원아, 거기 일 언제 끝나? 내가 데리러 갈게. 점심 같이 먹자.”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어젯밤 조태혁의 말대로 그는 조나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오늘 갑자기 나와 함께 식사하자고 하는 건 어젯밤 중간에 멈춘 것에 대한 보상인지, 아니면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낀 건지 알 수 없었다.그걸 추측하느라 두뇌 세포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아 난 담담하게 그에게 대답했다. “언제 끝날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점심시간에도... 끝나지 않을 수 있고. 너도 요즘 점심에 꽤 바쁘지 않았어?”“지원아.” 강유형은 아마도 내 말에서 빈정거림을 감지했는지 무거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2초 정도 침묵한 후 말했다. “오해하지 마.”어젯밤 서로 끌어안고 있을 때도 다른 여자에게 갈 수 있었던 그에게 내가 무엇을 더 오해할 수 있을까?지금은 근무 시간이라 그와 사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바빠. 할 말 없으면 끊을게.”그가 말을 하지 않자 나는 전화를 끊었다.오늘의 외근은 협력 업체와의 논의
“그럼 같이 먹어.”강유형은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동의해 버렸다.조나연이 앉으며 앞에 놓인 음식을 보더니 군침을 삼키는 표정을 지었다. “생선구이네. 요즘 딱 먹고 싶던 참이었어.”“그럼 거위 간도 하나 더 시켜줄까?” 강유형의 말투는 무척 자연스러웠다.“디저트도 하나 추가해 줘.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에 딸기 소스 올린 거. 음료는 오렌지 주스로 할게,” 조나연이 말을 마치고 나를 보았다. “지원 씨도 오렌지 주스 한잔하실래요?”“괜찮아요. 저는 물만 마실게요.” 말을 마치고 나는 포크에 꽂힌 거위 간을 입에 넣었다.부드럽고 섬세한 맛에 은은한 우유 향까지...“유형 씨, 전에 몇 번 사다 준 거위 간도 여기 거야?” 조나연의 말에 내 씹는 동작이 멈췄다.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표정이 약간 불편해 보였다. “...응.”그가 이곳의 거위 간 맛이 좋다는 걸 아는 이유가 밝혀졌다. 다른 사람에게 여러 번 사다 줬던 거였고 나는 오늘 처음이었다.그것도 그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보상하는 차원에서.순간 내 입 안의 거위 간 맛이 변했고 삼키기조차 힘들어졌다.“그래서 이 근처를 지나가다 거위 간 냄새가 익숙하다고 느꼈나 봐.” 조나연이 웃으며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 깊은 곳에 서려 있는 따스함이 마치 그물처럼 나를 감싸 숨이 막히는 듯했다.그녀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 씨, 유형 씨가 분명 자주 데리고 오셨겠어요. 그래서 이곳 거위 간 맛이 좋다는 걸 알고 저한테 사다 주신 거겠죠.”가슴에 꽂힌 칼로 부족해 두 번 더 비트는 느낌이 이런 걸까. 지금 나는 그 맛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나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오늘이 처음이에요. 저는 나연 씨만큼 복이 없나 봐요.”조나연의 웃음이 잠시 굳더니 시선을 살짝 내리며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진 씨가 저랑... 아이를 버리고 갔는데 무슨 복이 있겠어요?”말을 마치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나는 당황했다. 한 마디에
조나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고,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그녀의 주스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는... 저는 고의가 아니었어요.”연약하고 가련한 모습의 그녀를 보자 오히려 내가 말하면 안 될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았다.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왕 말을 꺼냈으니 확실히 해야 했으니까.“고의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준 건 사실이에요. 나연 씨가 의도하지 않으셨다면 앞으로 주의해 주시면 돼요.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석진 씨가 있었다면 절대 유형 씨를 귀찮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조나연이 말하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여자는 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그녀에게서 증명되는 듯했다.그녀의 말은 꽤 교묘했으나 나로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지원 씨.” 조나연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는데 눈빛이 제법 촉촉했다. “제가 유형 씨를 찾는 것도 석진 씨가 임종 때 부탁해서예요. 유형 씨도 약속했고요.”그녀의 손이 계속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아니었다면 저도 유형 씨를 찾지 않았을 거예요.”그녀는 자신을 변호하는 동시에 은근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우리 모두 성인이고 누구나 다 속내가 있는 법이다.“나연 씨, 유형 씨가 당신 남편에게 당신을 돌보겠다고 약속했다고 해도 그 돌봄에는 선이 있어야 해요. 결국 당신은 혼자 사는 여자고, 당신들이 매일 같이 있는 걸 남들이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고 말도 많을 거예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나연 씨, 다른 사람들이 강유형에 대해 뭐라고 하든 상관없겠지만 당신은 여자잖아요.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다가 나중에 아이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좋지 않잖아요, 그렇죠?”그녀가 순진무구한 이미지를 연기한다면 나도 성녀 역할을 해볼 수 있었다.조나연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 “지원 씨,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결국 유형 씨가 저를 돌보는 게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거잖아요? 이건 유형 씨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자신에 대한 자
고개를 돌리자 강유형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가 이내 짜증 섞인 분노로 바뀌었다.“윤지원, 네 고집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나연이는...”“난 네 약혼녀야.”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너무나 초라하게 들렸다.예전에 TV에서 이런 장면을 볼 때면 여주인공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저런 남자를 위해 말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지. 하지만 지금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나연이가 임신했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강유형이 말하며 뒷걸음질 쳤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난 그는 휙 돌아서더니 밖으로 달려 나갔다.결국 그는 나와 조나연 사이에서 그녀를 선택한 것이다.그 자리에 앉아 나는 그가 조나연을 쫓아가는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가 조나연과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조나연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의 품에 안기는 모습까지...고개를 숙이자 더 이상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오늘 그의 선택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 마음에 답이 생겼다.결국 이 식사에서 나는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50만 원의 식사값을 치렀다.나는 강씨 집안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안리영의 집으로 향했다.“정말 헤어지기로 한 거야?”산부인과 의사인 안리영이 내 혈 자리를 눌러주며 물었다. 덕분에 생리통의 고통은 덜했지만 마음의 통증은 어쩔 수 없었다.“응.” 나는 그녀의 침대에 엎드린 채 대답했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내 눈꼬리가 붉어져 있었다.“그렇게 쉽게 끊을 순 없을 거야.” 안리영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넌 아직 강유형의 비서잖아.”“사직할 거야!”이 문제는 오는 길에 이미 생각해 두었다.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사직하고 강유형과 일하지 않는다 쳐. 하지만 강씨 집안은 어쩔 건데? 강씨 집안에서 널 이만큼 키워줬는데 강유형과 헤어진다고 강씨 집안과의 관계를 끊을 순 없잖아? 강씨 집안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젯밤 그 상황에서는 나연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랬어. 너도 알다시피 석진이는 부모님의 외아들이었잖아. 지금 나연이 뱃속 아이는 임씨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야. 만약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니까 앞으로 나연 씨랑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그 여자를 우선시하겠다는 거야?” 내가 차갑게 묻자 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괜찮아질 거야.”나는 웃음을 지었다.고개를 돌리는 순간 막 떠오른 태양이 눈을 찔렀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유형, 아이가 태어나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야. 아플 수도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지. 네가 이 아이를 핑계 삼는 한, 넌 조나연 씨랑 영원히 얽히게 될 거고 난 항상 너한테 버려지는 사람이 될 뿐이야.”강유형은 내 말에 침묵했다.나는 내 입장을 분명히 했다. “강유형,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면 난 내 남편이 사흘에 한 번씩 다른 여자를 돌보는 걸 원치 않아.”“지원아, 시간을 좀 줘. 잘 처리할게,” 강유형의 눈빛에 갈등이 스쳤다.“뭘 처리해? 조나연 씨는 다른 사람의 아내야. 돌봐야 한대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임석진한테는 너 말고도 다른 친구가 있잖아. 신지태랑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하필 너만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강유형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난 석진이가 사고 났을 때 유일하게 곁에 있었던 사람이야.”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고통을 듣고 임석진의 죽음에 대한 그의 죄책감과 자책을 떠올리며 나는 물었다. “강유형, 혹시 임석진에게 미안한 일이라도 했어?”“윤지원.” 강유형이 차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꼭 이 일을 꼬집어야겠어?”“어, 이미 나한테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유형, 친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괜찮은데 친구의 아내까지 돌보고 싶다면 우리 헤어지자. 그러면 너도
‘내가 골탕을 먹였다고?’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음표를 보냈다.[안석 선배가 왔어!]안리영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는 곧장 호텔 사건이 떠올라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답장을 보냈다.[내가 만들어 준 둘만의 시간을 잘 즐겨.][즐길 시간이 어딨어, 나 지금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해!]‘아, 진짜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하지만 안리영은 일부러 일을 피하는 게 아니었고 정말로 수술이 있었다.사실 다른 의사에게 맡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구안석이 몇 달 동안 연락도 없이 자기 일에만 몰두했는데 이제 와서 그가 돌아왔다고 해서 그녀가 바로 일정을 바꿔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그리고 시간이 흘러 수술이 끝났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수술을 마친 안리영은 제일 먼저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메시지 창은 텅 비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구안석과의 대화방을 열어 보았지만 대화는 그가 한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에서 멈춰 있었다.‘몇 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없었다고? 설마... 진짜로 화난 거야?’안리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평소처럼 휴게실로 향했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휴게실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아래 POLO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구안석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수술은 잘 끝났어?”안리영은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며 힘없이 대답했다.“응, 잘 끝났어. 그런데... 여기서 뭐 해?”“너 기다리고 있었어.”그의 짧은 대답에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나도 원래 이따 찾아가려고 했는데...”“정말... 올 생각이 있었어?”그 말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한 압박감을 주었다.안리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치며 애써 피식 웃었다.“나, 먼저 씻고 옷 갈아입을게.”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리며 욕실 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구안석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계좌번호를 보여주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1억 2,000만 원을 이체했다.“빚 문서 내놔.”내가 손을 내밀자 그들은 약속대로 빚 문서를 건네며 비웃듯 말했다.“와, 생각보다 돈이 많네.”나는 문서를 확인한 후, 차갑게 경고했다.“난 돈뿐만 아니라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소희를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마. 만약 또 한 번 찾아오면 그땐 죽을 줄 알아.”내 단호한 태도에 그들은 더 이상 헛웃음을 짓지 않았다.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지자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지만 가던 길에 한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돈 많은 친구가 있는데 대체 왜 사채를 빌린 거야?”“꺼져.”나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이소희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온몸을 떨고 있었다.“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나는 그녀를 조용히 끌어안았고 그제야 그녀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흑... 으아아아아...”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며 그저 울게 놔두었다.이소희가 실컷 울고 난 후, 나는 그녀를 조용히 그녀의 원룸 안으로 데려갔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곰팡이가 핀 벽지, 낡고 좁은 침대, 허름한 책상 위에 놓인 남은 음식들.한때 당당하고 씩씩했던 그녀가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살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거칠었고 피부는 갈라져 있었으며 곳곳에는 작은 상처도 남아 있었다.그녀는 돈을 갚기 위해 거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잘못된 길을 택하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데리고 호텔로 향했다. 그녀에게 샤워를 시키고 새 옷을 입힌 뒤, 함께 침대에 누웠다.그제야 이소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용씨 가문이야.”“뭐?”“그놈들, 다 해동 용씨 가문의 사람들이라고.”순간, 내 머릿속에 용진표의 얼굴이 떠올랐다.그 집안의 돈이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야?”나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제야 문을 두드리던 세 명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 중 하나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와, 임도에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었나?”다른 남자는 비웃으며 말을 던졌다.“아가씨, 여기 방 빌리러 왔어? 아니면 저 안에 있는 그 여자랑 아는 사이야?”나는 차갑게 시선을 던지며 냉정하게 말했다.“내가 먼저 물었잖아?”그러자 문을 두드리던 남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우리는 예쁜 여자를 찾으러 왔지. 딱 당신 같은 사람을 말이야.”그는 말하며 내 턱을 건드리려 손을 뻗었다.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피했다. 그러자 그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성격 있는 여자네. 난 이런 여자가 더 좋더라.”그는 곧바로 옆에 있는 남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오늘, 헛걸음한 건 아니겠어.”그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놔둬! 건드리지 마!”나는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이소희가 있었다. 그녀는 손에 나무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면서 주저 없이 남자들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이 미친놈들아, 당장 꺼져!”그러나 남자들은 오히려 비웃었다.“하필이면 네가 알아서 나와 주네? 우리가 널 찾고 있었는데.”그들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나는 바닥에 있는 벽돌을 주워 들고 그대로 남자들에게 던졌다.“아, X발!”한 명이 벽돌에 맞고 비명을 지르면서 나를 향해 달려들려 했지만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어쩌면 진정우가 떠난 후, 난 두려울 게 없어진 걸지도 모른다.한 남자가 나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회전하며 그에게 강하게 발차기를 날렸다.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정확히 급소를 가격당했고 두 손으로 급소를 감싸며 뒹굴었다.남은 두 명이 이소희를 잡으려 하자, 나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외쳤다.“돈 필요하면 움직이지 마.”내 말에 그들은 멈칫하더니 눈을 번뜩이며 나를
이런 부류의 남자는 언제나 돈 많고 외모가 뛰어난 여자에게만 관심을 두는 법이다.윤시안이 나를 알아본다는 건, 분명 나에 대해 미리 조사했거나,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왜 당신을 찾아온 것 같아요?”윤시안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이소희 때문이겠죠?”역시, 나와 이소희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다.“맞아요. 소희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경찰에게 진술한 것 외에도 더 숨기고 있는 것이 있지 않나요?”하지만 윤시안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제가 꼭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이 상황에서도 거래하겠다는 건가.’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조건이 뭔데요?”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2억이요? 혹시라도 협박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돈을 어디에 쓰시려고요? 지금 교도소에 계시면서 그 돈을 사용할 곳이라도 있어요?”그러자 그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한테 주실 필요 없어요. 부모님께 주시면 됩니다.”‘이 인간은 쓰레기지만 효심은 있네...’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런데 부모님께서 그 돈을 받을 것 같아요? 제가 돈을 건네려 하면 두려워서 도망치시지 않을까요?”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윤시안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한참 후, 힘없이 입을 열었다.“저는 소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돈을 빌린 것뿐이에요.”“그렇다면 왜 소희가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려고 했을까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만약 정말 효심이 남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모든 걸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이 한 일 때문에 부모님까지 손가락질받으며 사시는 건 알고 계시죠?”그 순간, 윤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부모님
이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내가 화장실에서 얼굴에 잔뜩 묻은 물을 닦고 있을 때였다.“언니...”그녀의 목소리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아는 이소희라면 평소엔 마치 작은 기관총처럼 말을 쏟아내던 아이였는데.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때의 자살 시도가 지금의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너 계속 전화 안 받으면 내가 직접 찾아갈 거야.”“언니, 오지 마. 난 괜찮아.”그녀는 다급하게 나를 말렸다.나는 손에 들고 있던 휴지를 버리고 세면대에 기대어 말했다.“괜찮으면 내가 왜 너한테 수십 통씩 전화를 걸었겠어. 이제 좀 말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야?”이소희는 한참 후에야 힘없이 입을 열었다.“언니, 나 지금 완전히 빈털터리야. 그리고... 빚이 거의 2억 가까이 돼.”나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강진혁에게 들었는데 그녀는 남자 친구에게 속아 모든 걸 잃었다.“...그래서 자살을 생각한 거야? 네 목숨이 2억보다 못해?”“언니... 그 2억 중에는 인터넷 대출도 있고 신용카드도 있고 게다가... 사채도 있어.”그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어졌다.“그 사람들이 매일 협박 전화를 하고 온라인에 내 신상을 퍼뜨렸어.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찾아갔어.”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묻어 있었다.“그렇게 힘들었으면 나한테 전화를 했어야지.”그녀에게 빌려주는 돈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그 돈을 줬다면 그녀가 죽으려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 순간 그때 내 휴대전화가 고장 나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혹시 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내가 받지 못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후회를 해도 소용없어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차분히 물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임도에 있는 이유가 돈을 갚기 위해서야?”“응...”낯선 도시에 와서, 변변한 학력도 없는 그녀가 한 달에 얼마를 벌 수 있겠는가.월급이 200만 원이라 해도, 2억을
문득, 나도 저런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임석진의 집을 떠난 후, 나는 곧장 회사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이소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강진혁이 준 정보가 틀릴 리 없었다. 이소희가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아마도 여전히 도망치고 싶어서겠지.나는 곧장 문자를 보냈다.[소희야, 나를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내 전화 좀 받아줘.]하지만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읽지 않았다.이제 남은 방법은 직접 찾아가는 것 하나뿐이었다.나는 출근 중이었지만 어차피 회사에서는 나를 관여하지 않는 분위기였으니 별 고민 없이 임도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그런데 막 표를 결제한 순간 허진호가 등장했다.“윤 부장, 요즘 참 한가하신가 보네요?”물잔을 들고 내 맞은편에 앉은 허진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 타이밍에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분명 실시간 검색어를 본 게 틀림없었다.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혹시 제 업무량을 늘리실 생각인가요?”“그래야 할 것 같은데요.”그는 천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너무 한가하게 지내다 보면 쓸데없는 사고가 터질 수도 있잖아요. 괜히 사고 치셨다가, 혹시라도 정우 씨가 무덤에서 튀어나와 저한테 따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허진호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을 겁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놀이공원의 조명 문제를 수없이 곱씹어 봤고 나는 진정우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하지만 내 확신과는 별개로, 허진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어쨌든, 더는 봐 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는 규칙대로 근무하세요. 회사 규정 어기시면 처벌이 있을 겁니다.”그가 드디어 대표다운 태도를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물었다.“처벌이라면... 벌금인가요?”벌금? 그거야말로 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중 하나였다.안리영이 늘 말했다.“너는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삼무인간이야. 그 많은 돈 다 쓰지도
임석진의 부모님은 내 질문에 순간 당황한 듯 얼어붙었다.그들은 조심스럽게 나를 훑어보더니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누구세요?”분명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아마 나이가 많아 기억이 흐려진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석진 오빠 친구예요. 오빠에게 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한번 찾아왔어요.”내가 정체를 밝히면 아예 아이를 보여주지 않으려 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을 돌렸다.그들의 표정에는 의심과 불안이 가득했다.“우린 당신을 본 적도 없고 석진이도 당신 같은 친구에 대해 말한 적 없어요.”요즘 같은 세상에 사기꾼이 많으니, 이렇게 신중한 건 당연한 일이겠지.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내밀었다.“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괜찮아요, 그냥 뵙고 싶었을 뿐이에요. 별다른 의도는 없어요.”하지만 그들은 선물을 받기는커녕 손사래를 쳤다.“우린 당신을 모릅니다. 받을 이유도 없어요.”말을 마치자마자 발걸음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나는 그들을 멀어지는 시선을 가만히 바라봤고 굳이 따라가서 말 붙일 생각은 없었다.이 시점에서 내가 더 접근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할 게 분명했다.그렇다면... 아이는 어디 있는 걸까? 집에 있고 보모가 돌보고 있는 걸까?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래서 나는 곧장 단지 내 관리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가 가져온 선물들을 맡기며 아이에 대한 정보를 슬쩍 떠봤다.그러자 관리소 직원이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그 집 아이요? 잘 지내고 있어요. 매일 어르신 두 분이 데리고 나와 놀아주던데요. 저기 보이세요? 저쪽 놀이터에서요.”직원이 손가락으로 놀이터를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한 중년 여성이 유모차를 밀고 있었다.“아이가 감기에 걸려서 최근에는 가끔만 나오더라고요. 요즘은 가정 의사를 불러서 돌보고 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네가 직접 화장하는 걸 봤잖아. 그냥 우연일 수도 있어.”강진혁은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관람차 위에 있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나는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관광객들이 하나둘 떠나고 화려하게 빛나던 조명도 점차 밤과 함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모든 것이 다시 원래의 고요한 상태로 돌아가자, 나도 천천히 관람차에서 내려왔다.강진혁은 여전히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다가와 나를 부축했고 시선은 내 얼굴을 깊이 탐색하고 있었다.아마도 내 감정을 읽어내려 했겠지. 하지만 나는 이미 관람차 위에서 모든 감정을 쏟아냈다. 이제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늦었어. 이제 가자.”그의 말에 나는 말없이 그를 따라 놀이공원을 빠져나오면서 문득 떠올라 물었다.“오빠, 소희에 대한 소식... 알려주신다면서요.”강진혁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내게 문자를 보냈다.“소희는 지금 임도에 있어. 다른 정보는 직접 연락해서 알아봐.”곧바로 핸드폰 알림이 울렸고 새로운 전화번호와 주소가 전송되어 있었다.“고마워요, 오빠.”나는 감사 인사를 건네고 곧장 몸을 돌렸다.“지원아.”강진혁이 나를 부르면서 그윽하게 쳐다봤다.“...잘 쉬어.”하지만 나는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놀이공원이 유명한 핫플레이스인 만큼, 이번 사고는 순식간에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하지만 정작 내 이름이 거론된 이유는 놀이공원 때문이 아니었다.[윤지원, 바에서 만난 남자와 함께 호텔 투숙?]기사에는 영상까지 첨부되어 있었고 마치 몰래 찍은 듯한 각도로 화면이 잡혀 있었고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촬영된 것이었다.날 망가뜨리려고 한 짓이라는 게 너무 뻔했다.솔직히 나는 상관없었다. 애초에 감출 생각도 없었고 어제 안리영에게도 "차라리 내가 먼저 폭로하고 말지." 라고 했으니까.하지만 내가 하는 건 괜찮아도 남이 나를 이
나는‘해동 아이’라 불리는 대형 관람차 앞까지 내달렸다.놀이공원이 개장한 이후, 이곳은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명소 중 하나였고 매일 긴 줄이 늘어섰다.“태워줘.”나는 이곳의 주인이었다. 내가 원하면 관람차는 나를 위해 멈출 수도, 움직일 수도, 최고점까지 올라갈 수도 있었다.천천히 상승하는 관람차 아래에서 강진혁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날 따라오는 듯한 시선을 느끼며 점점 더 높이 올라갔다.놀이공원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높은 곳에서 놀이공원을 내려다본 건, 진정우가 직접 조명을 조정했던 날이었다.그때 나는 그와 함께 있었고 우린 단순히 조명만 감상한 것이 아니었다.그날 밤, 우리는 찬란한 불빛 아래서 서로를 바라보았고 감정이 깊어지는 걸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았고 우리는 누구보다 행복했다.‘하지만 이제는... 아니! 진정우는 아직 살아 있어.’방금 전의 조명은 분명 나에게 보내는 신호였다.관람차가 최고점에 다다르자, 놀이공원뿐만 아니라 해동시 전체가 내려다보였다.하지만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그런 거창한 풍경이 아니었다. 내가 보고 싶은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진정우! 나랑 결혼하고 싶다면... 돌아와!”나는 손을 높이 들어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 반지를 흔들었다.“네가 직접 주문한 우리 커플링이야. 난 한 번도 빼지 않았어. 네가 준 팔찌도 그대로야. 이제 너만 돌아오면 돼.”내 목소리는 밤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졌고 마치 나의 외침에 반응하듯 조명이 순간적으로 깜빡였다.아래에서는 다시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비명 같기도 했고 놀람 섞인 감탄 같기도 했다오늘 밤의 조명은 예상치 못한 최고의 공연이 되었다. 놀이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열광하며 아예 분위기를 즐기기 시작했다.삶이란 뜻밖의 일들로 가득 차 있으며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기는 편이 낫다. 놀이공원 측으로 환불을 요구하던 고객들도 모두 취소했다는 연락이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