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연을 본 리비어는 의사와 무언가 얘기를 주고받은 뒤 그녀에게 다가갔다.“성연아, 너도 역시 병원에 있었네.”강성연은 쓴웃음을 지었다.“제가 병원 말고 어딜 가겠어요?”그녀는 리비어를 보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랑 무슨 얘기 나눴어요?”리비어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웃으며 대답했다.“반 대표님 상태 좀 물어봤어.”“상태 안 좋대요?”강성연의 질문에 리비어는 부인하지 않았다. 강성연은 시선을 내리뜨리며 살짝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상태가 심각하대요?”“좀 그렇대.”리비어는 안색이 흐렸다. 단지 총상 때문이라면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반지훈의 상황은 총상보다 더욱 복잡한 듯했다.강성연이 말을 하려는데 별안간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잠깐 주저하던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아빠?”“성연아, 너 해외에서 별일 없지? 기사 보니까 S국에 폭동이 일어났다면서.”강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왔다.강성연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전 괜찮아요,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강진이 말했다.“무사하다니 다행이구나. 거기 언제까지 있을 셈이니? 아이들이 널 보고 싶어 해.”강성연은 세 아이를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무너진다면 아이들은 어떡해야 할까?게다가 반지훈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강성연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아이들한테 전해주세요. 저랑 아이들 아빠... 모두 무사하다고요.”강성연은 몇 마디 더 당부한 뒤 전화를 끊었다. 리비어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넌 먼저 호텔로 돌아가. 병원은 나한테 맡겨.”강성연은 리비어를 믿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강성연이 떠난 뒤 리비어는 조금 전 그 의사를 찾아갔다. 노크해서 허락받은 뒤 리비어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라이언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리비어 씨, 앉으세요.”리비어는 소파 앞에 걸어가 앉았다.“조금 전 했던 얘기 다시 상세히 얘기해줄 수 있나요?”라이언 의사는 리비어를 알고 있었다. 그는 태연자약
당시 호텔의 수원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쓰던 수원에도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 그러니 그 재난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된 것이었다.반지훈이 정말 감염되었다면 그의 우려가 정확하다는 걸 의미했다. 누군가 또다시 그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호텔로 돌아온 강성연은 반지훈의 할아버지와 희승이 나오자 살짝 당황했다.반지훈의 할아버지는 그녀를 보자 약간의 노여움을 내비쳤다.“내게 약속했던 일을 잊은 거냐? 지훈이는 지금 너 때문에 입원했어. 이제 만족하니?”강성연은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반지훈은 그녀 때문에 총에 맞아 입원했기 때문이다.반지훈의 할아버지는 굳은 표정이었다.“지훈이는 너랑 있으면서 많이 위험해졌다. 네가 정말 지훈이를 생각한다면 그 아이 곁을 떠나거라.”강성연은 움찔하더니 이내 말했다.“전 그를 떠날 수 없어요.”“그럼 그 애를 죽게 놔둘 셈이니?”어르신은 화가 난 얼굴이었다. 강성연이 입만 달싹거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언성을 높였다.“강성연, 내가 너희 둘이 같이 있는 걸 반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훈이는 감정을 너무 중요시해. 넌 지훈이의 약점이야. 그 사람들이 지훈이를 다치게 할 수 있던 건 너 때문이야!”“너랑 걔가 같이 있는다면 지훈이는 결국 너 때문에 죽게 될 거다.”그 말은 강성연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강성연은 마음이 부서질 듯했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반지훈은 그녀를 위해 목숨마저 버릴 수 있었다. 정말 그녀 때문에 반지훈이 죽게 되는 걸까?그런 생각이 들자 강성연은 숨 쉬는 것마저 힘들었다.희승은 강성연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반지훈의 할아버지가 화가 난 상태라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반지훈의 할아버지는 오히려 모든 것을 강성연의 잘못으로 돌릴 수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희승은 결국 반지훈이 깨어난 뒤에 다시 얘기하기로 했다.반지훈의 할아버지는 희승과 함께 떠났다. 그들은 아마 병원으로 향
강성연은 이기적이게도 그의 옆에 있기를 원했다.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은 것뿐인데 오히려 그녀 때문에 그가 다치게 되었다.희영은 풀이 죽어 있는 강성연을 보더니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언니,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물러난다면 그건 나약한 거예요.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야죠. 대표님이 다친 게 언니 잘못이에요? 아니잖아요. 우리들의 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들이었어요. 언니가 없었다고 해도 대표님은 이 위기를 겪었을 거예요.”희영의 말을 들은 강성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위로를 꽤 잘하네요.”희영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강성연은 소파 앞에 가서 앉았다.“참, 서영유는 지금 그들이랑 같이 있겠죠?”“네. 오빠가 조사했었는데... 서영유가 그 사람들이랑 관계가 있다고 했어요. 정말 철저히 숨겼더라고요. 그러니 현지 일도 꾸민 거겠죠.”희영은 그녀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서영유가 배신한 걸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했다.강성연은 눈알을 굴렸다. 어쩌면 놀이공원 일에도 서영유가 참여했을지 모른다.인제 보니 서영유와 만날 필요가 있을 듯했다.병원.반지훈이 눈을 떴다. 옆에 있던 간호사는 그가 눈을 뜨자 다급히 밖으로 나갔다.“라이언 의사 선생님, 환자가 깨어났어요.”라이언 의사는 반지훈의 할아버지, 희승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반지훈의 할아버지는 침대 옆으로 걸어가 그를 보며 말했다.“지훈아, 정신이 드니?”반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가 그의 산소마스크를 벗겨주었고 반지훈은 병실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성연이는요?”반지훈이 깨어나자마자 강성연을 찾자 반지훈의 할아버지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아직도 걔 생각하니? 너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희승이 다급히 말을 이어받았다.“강성연 씨는 먼저 호텔로 돌아가셨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반지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등 뒤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그는 헛숨을 들이켰다. 총을 맞은 것만 기억날 뿐 그
서영유는 흠칫하더니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진짜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강성연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그럼 당신이 새로 찾은 뒷배 남호연 씨에게 물어볼까요?”“강성연 씨,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서영유의 눈동자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강성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당신이 들은 그대로죠. 어르신은 당신을 아끼시는데 당신은 결국 반씨 일가를 배신하고 남호연을 선택했잖아요. 남호연이 당신을 중요시할 것 같아요?”서영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면서 냉소를 흘렸다.“왜요? 설마 날 당신 편으로 끌어들일 셈이에요? 아쉽게 됐네요. 반씨 일가로 돌아가면 난 살길이 없을 테니 그럴 바에는 남호연 씨 곁에 있는 게 낫죠.”강성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영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당신이 15년 전 지훈이 어머니 일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요? 어르신이 연씨 집안 잘못이 아니란 걸 믿을까요? 강성연 씨 너무 단순하네요. 당신이 반씨 집안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당신은 지훈이 걱정이나 해요. 반씨 집안은 제 몸 하나 지키기도 어려울 거예요. 하하.”강성연은 의기양양하게 미소 짓는 서영유의 모습에 눈꼴이 셨다. 심지어 그녀는 반지훈의 얘기를 꺼냈다.반지훈은 강성연 대신 총을 맞아 입원한 상태였고 그날 밤 그 사람들은 남호연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상대가 누구든지 그녀의 남자를 다치게 했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강성연은 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서영유 씨, 난 당신에게 죽여달라고 빌 기회를 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네요.”“나한테 기회를 준다고요?”서영유는 미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강성연 씨, 당신이 뭐라고 나한테 기회를 준다는 거죠? 날 이렇게 몰아세운 건 당신들이에요.”강성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서영유는 앞으로 걸어가 강성연의 멱살을 잡았다. 예쁘장한 오관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면
서영유는 남호연에게 걷어 차여 구석에 부딪혔다. 남호연은 넥타이를 풀어헤치면서 매섭고 악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빌어먹을, 후회돼서 날 배신할 셈이야?”서영유는 몸을 파르르 떨더니 그의 발치로 기어갔다.“아니에요. 전 배신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강성연이 사람을 시켜 절 억지로 끌고 간 거예요. 그리고 절 위협했는데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맹세해요!”남호연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턱을 쥐었다.“서영유, 넌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어. 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서영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남호연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고 배신자를 가장 혐오했다. 비록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만 바이러스까지 포함해 그녀가 알고 있는 비밀이 너무 많았다. “맹세해요. 정말 얘기하지 않았어요. 남호연 씨, 제발 절 믿어주세요. 전 입도 뻥긋하지 않았어요! 강성연이 절 모함한 거예요!”서영유는 울면서 빌었다. 남호연의 손아귀에 들어간 건 불행한 일이었다. 파라다이스도, 반씨 집안도 돌아갈 수 없었다. 어딜 가든 죽게 될 것이 뻔했기에 남호연에게 빌 수밖에 없었다.남호연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서영유가 안도하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그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멍청한 것. 이런 함정에 빠져? 이번에 제대로 교훈을 줘야겠네. 네가 다음번에 또 함정에 빠져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면 안 되니까 말이야.”서영유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별안간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문밖을 내다보니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울프독 세 마리를 데리고 서 있었다. 사나운 울프독이 그녀를 향해 짖고 있었다.서영유는 턱이 덜덜 떨리면서 모공까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호연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남호연 씨, 제가 잘못했어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제발요!”남호연은 다리를 빼냈다. 연민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목줄을 놓자 울프독 세 마리가 서영유를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처참한 비명이 밤하늘을
반지훈은 시선을 내리뜨며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는데 별안간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몸을 일으킨 강성연은 마음 아픈 얼굴로 말했다.“반지훈 씨, 괜찮아요?”반지훈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기침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손바닥에서 따듯한 액체가 느껴졌고 반지훈은 잠시 당황했다. 그는 강성연이 눈치채지 못하게 주먹을 움켜쥔 채로 손을 내렸다. 그는 강성연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난 괜찮아. 그냥 사레들린 거야.”강성연은 입을 비죽였다.“배고프지는 않아요? 뭐 좀 먹을래요?”반지훈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그 말 하니까 갑자기 배고프네. 네가 해준 음식 먹고 싶어.”강성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알겠어요. 내가 음식 해줄게요. 기다리고 있어요.”문가에 선 그녀는 때마침 리비어와 마주쳐서 말했다.“리비어 삼촌, 잠깐 저 대신 지훈 씨 좀 봐주세요.”리비어는 고개를 끄덕였다.강성연이 떠난 뒤 리비어는 병실로 들어갔고 반지훈이 손바닥을 펴서 보는 걸 보았다.“각혈했어요?”리비어는 알고 있었다.반지훈은 흠칫하더니 손을 움켜쥐었다.“네.”무언가 떠올린 그는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어떻게 아셨어요?”리비어가 대답했다.“지금 당신은 상태가 좋지 않아요.”반지훈은 피가 묻은 손바닥을 움켜쥐며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제가 어떤 상황인지 아시나요?”리비어는 시선을 내리뜨리며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당신은 M 바이러스에 감염됐어요.”병실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반지훈은 입을 꾹 다물더니 한참 뒤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성연이는 알고 있나요?”“아직 몰라요. 라이언 의사랑 저를 빼고는 아무도 몰라요.”리비어가 대답했다.반지훈의 시선이 어둑어둑한 창밖으로 향했다. 그는 M 바이러스를 알고 있었다.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치료가 불가능해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M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라졌다.게다가 M 바이러스는
그러다가 잠복기가 끝나면 감염자는 지속해 각혈하게 되고 면역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암 환자는 암세포가 더 빨리 퍼져나가고 신진대사도 활발히 진행되어 혈소판 수치가 비정상적이 된다. 그리고 몇 년 안에 갑작스레 죽게 된다.반지훈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래서 전 얼마나 더 살 수 있나요?”리비어는 미간을 구겼다.“지금 당신 상황을 보면 3, 4년 정도 살 수 있어요.”...강성연은 직접 만든 음식을 가지고 병원에 도착했다. 병실에 들어서니 반지훈이 홀로 침대 위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리비어는 없었다.“반지훈 씨, 저녁 가지고 왔어요.”그녀는 침대 옆에 가서 앉더니 저녁을 침대 옆 서랍 위에 올려놓았다.반지훈은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보더니 덤덤히 웃었다.“그래. 나 먹여주라.”강성연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시락을 열더니 침대 옆에 앉아 숟가락을 들어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반지훈이 음식을 먹자 강성연이 물었다.“리비어 아저씨는 갔어요?”“응. 일 있다고 먼저 갔어.”강성연은 그에게 음식을 먹이면서 웃었다.“맛있어요?”반지훈은 시선을 내리뜨리며 웃어 보였다.“네가 한 건데 어떻게 감히 맛없다고 하겠어?”강성연은 입을 비죽였다.반지훈이 음식을 비우자 강성연은 침대 옆 서랍에 놓인 도시락을 정리하고 말했다.“저녁엔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반지훈의 미련 가득한 눈빛이 그녀에게 멈추었다. 그는 어렵사리 ‘응’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강성연은 간호사에게 간이침대 하나를 부탁했고 베개를 베고 누웠다. 반지훈은 옆으로 누워 그녀를 보았다.“성연아.”“네?”강성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왜 그래요?”반지훈은 그윽한 눈빛으로 말했다.“만약... 내가 너한테 숨기는 게 있다면 나를 탓할 거야?”뜸을 들이던 강성연은 한참 뒤에야 이불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아뇨. 당신이 나한테 뭔가를 숨긴다면 그건 날 위해서겠죠.”반지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반지훈은 덤덤히 대답했다.“응. 입원할 필요 없어.”그는 희승을 보며 말했다.“귀국하게 티켓 준비해 둬. 모레 아침 비행기로.”희승은 당황했다.“하지만 몸이...”“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반지훈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했다.희승은 난감한 얼굴로 반지훈의 할아버지를 보았고 할아버지는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말했다.“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 난 간섭하지 않을 거다.”그는 화를 내며 병실을 떠났다.강성연은 이를 악물며 반지훈의 앞에 섰다.“어르신 말대로 해요. 며칠 뒤에 간다고 해도 늦지 않아요.”비행기를 오랫동안 타야 하는데 혹시나 상처가 벌어진다면 어떡한단 말인가?반지훈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강성연은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다.“반지훈 씨?”“난 반드시 돌아가야 해.”반지훈은 몸을 일으켰고 별다른 설명 없이 옆으로 걸어가 옷을 들었다.그가 윗옷을 벗을 때 강성연은 그의 등 뒤에 붕대가 감겨 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총상을 제외하고 칼에 베인 듯한 새로운 상처가 있었다. 아마 그날 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싸우다가 생긴 상처인 듯했다.강성연은 그의 등 뒤에 서더니 갑자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몸에서 온기가 느껴졌지만 체온이 조금 낮았다.반지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리며 그녀를 떼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지 마.”그가 셔츠를 입자 강성연은 그를 대신해 단추를 잠갔다. 반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를 말리지도 않았다.단추를 다 잠근 뒤 강성연은 시선을 내리뜨리며 말했다.“반지훈 씨,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강성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그녀는 반지훈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그녀를 멀리하는 걸 느꼈다.반지훈의 그윽한 눈동자는 마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호수 같았다.“묻지 않았으면 좋겠어.”양복바지를 집어 든 반지훈은 강성연이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자 미간을 살짝 좁혔다.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