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강유이를 막아야 했다.강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그러면 난 먼저 돌아갈게.”강유이는 돌아서서 차에 탔다.리사는 차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정말 아버지를 아프게 만들어야 할까?-차는 주택가에 멈춰 섰고 강유이는 창문을 내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운전기사가 돌아보며 물었다.“아가씨, 누구 찾으세요?”강유이가 말했다.“금방 돌아올게요.”강유이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뒤 위층으로 올라가 리사의 집에 도착했다. 3년이 흘렀는데 리사가 아직도 그곳에서 사는지 알 수 없었다.문을 두드렸으나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막 집을 나서던 옆집 이웃이 고개를 돌려 강유이를 훑어보았다.“학생, 누구 찾아?”“안녕하세요, 아주머니. 혹시 리사와 리사 아버지 아직 여기 사나요?”“리사 찾는 거였어?”옆집 이웃은 경멸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히 거기 살지. 그런데 학생, 어린 나이에 학교 안 다니고 나쁜 것만 배우면 앞으로 큰일 나.”강유이는 어리둥절해하며 얼굴을 찡그렸다.“리사 학교 안 다녀요?”강유이는 리사가 퇴학 후 전학할 거라고 생각했다.“몰랐어?”이웃 아주머니는 강유이를 보며 말했다.“좀 낯선 얼굴이긴 하네. 예쁘고 참하게 생겼어. 리사 친구들이랑 다르게 말이야. 학생, 리사랑은 놀지 마.”동네에서 리사의 평판이 형편없는 듯했다.동네에서 리사 또래 아이들의 학부모들은 자식들이 리사와 놀지 못하게 했다.리사는 그녀의 별 볼 일 없는 오빠 리염처럼 학교도 다니지 않고 빈둥거렸다.어린 나이에 화장하고 꾸밀 줄만 아는 게 아니라 성숙하게 입어서 거리의 양아치들이랑 별반 다를 바 없었다.“저기 아주머니, 리사가 아빠가 아프시다고 해서 보러 온 거예요.”“아프긴 무슨, 멀쩡해. 지금 회사에 있을걸.”이웃집 아주머니는 떠날 때 중얼거렸다.“걔 아빠도 안 됐지. 저런 아들딸이 있으니 참 고생이 많아.”강유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리사는 강유이가 준 걸 거절하지 않고 몇 번이고 받아들이며 마음 편히 누리다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 점은 리사가 허영심이 강하다는 걸 의미했다.한태군이 룸 밖에서 걸어들어왔다.“늦어서 죄송해요.”한재욱이 말했다.“마침 잘 왔네. 음식 아직 안나왔어.”한태군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강유이와 시선을 마주했고, 강유이는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밥 먹으면서 어른들이 대화를 나눌 때 강유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묵묵히 밥만 먹었다.강해신은 리사가 있어 강유이가 기분 나빠하는 거라고 생각해 강유이에게 닭 날개를 집어줬다.“잘 먹어. 괜히 다른 사람 때문에 영향받지 말고.”그가 말한 다른 사람이 누군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리사의 안색이 조금 흐려졌다.한태군도 강유이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장난스레 말했다.“돼지 뇌 요리라도 시켜줄까?”강유이는 화가 나서 울컥했다.“오빠나 먹어.”강유이의 큰 목청 때문에 반준성과 다른 이들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반준성은 고개를 들어 두 아이를 바라봤다.“갑자기 왜 싸우는 거야?”한재욱이 말했다.“아이들 장난이죠.”반준성은 전혀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시끌벅적해야 좋아. 유이는 평소 집에서도 해신이랑 다툰다니까.”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리사는 홀로 어울리지 못했다.리사는 고개를 들어 강유이를 바라봤다. 사람들의 눈에는 유이만 보이는 듯했다.화가 났든, 애교를 부리든, 다들 예뻐해 주기만 할 뿐 아무도 강유이를 짜증 나 하거나 시끄럽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심지어 한태군마저 분명 강유이를 기억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강유이에게 살갑고 리사에게는 적개심이 가득했다강유이는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고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복도에서 리사와 만났다.리사는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유이야.”리사를 대하는 강유이의 태도는 열정적이지도, 냉담하지도 않았다.“왜 나왔어?”“그... 혼자 안에 있으려니까 뻘쭘해서. 해신도 태군 오빠도 날 별로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아.”리사는 고개를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옷깃을 잡아당겼다.반씨 집안 때문에 서울시 학교들이 리사를 받지 않는데 지금은 동정하는 척하다니?강유이는 먼저 리사의 손을 잡았다.“그러면 내가 더욱더 아저씨에게 설명을 해줘야지.”리사는 당황한 건지 안색이 살짝 달라졌다.“그럴 필요 없어...”리사는 시선을 옮겼다.“유이야, 정말 더 설명할 필요 없어.”“왜 설명할 필요 없는데?”강유이는 리사를 응시했다.“설마 아저씨가 날 계속 오해하게 둘 셈이야?”리사는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리사야, 왜 아직도 날 속이려고 해?”강유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리사가 아버지가 아프지 않다는 걸 인정했다면, 거짓말했다는 걸 인정했다면 강유이는 어쩌면 리사에게 기회를 줬을지도 몰랐다.잘못하더라도 고치면 되는 법이다.하지만 리사는 여전히 그녀를 속였다.리사의 안색이 달라졌다.“유이야, 너... 너 그게 무슨 말이야?”“나 너희 집에 갔었어.”리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강유이는 느긋하게 설명했다.“난 네 말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 그런데 네 이웃이 그러더라. 너희 아빠 아프지 않고 출근까지 한다고.”리사는 갑자기 강유이의 손을 뿌리쳤다.“날 의심한 거야? 이웃들 말은 믿으면서 내 말은 믿지 않는 거야?”“그런데 네가 거짓말한 건 사실이잖아.”강유이는 이미 리사에게 실망한 적이 있어 기대가 별로 없었다.한태군의 말이 옳았다. 강유이는 멍청했다. 멍청하다 못해 리사가 뭐라고 하든 다 믿었다.그러나 지금 강유이는 본인을 믿었다.리사의 아버지가 정말 멀쩡한지 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리사가 거짓말한 게 아니라면 저렇게 얼버무릴 이유가 없었다.리사는 강유이가 자신을 의심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강유이는 심지어 그녀의 집까지 찾아가서 알아봤다.잠깐의 침묵 끝에 리사는 다시 강유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낯선 표정으로 강유이를 잡아당기면서 태도를 달리했다.“그래서 멋대로 날 조사한 거야?”“강유이, 내가 학
강유이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부잣집 딸이고 리사는 착하고 철이 든 아이였다. 게다가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본 것만 믿는 법이다.누가 진실이 어떠한지 신경 쓰겠는가?반준성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뭐라고 얘기하려 하는데 한재욱이 급히 말렸다.“두 아이가 장난치다가 실수로 넘어진 걸 수도 있잖아요.”“쟤 편들지마. 유이는 원래 성격이 제멋대로인 데다가 자꾸 너희가 예쁘다 예쁘다 해준 탓이야. 혼낼 때는 혼내야지.”반준성은 강유이를 보고 말했다.“얼른 친구한테 사과해.”강유이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씁쓸한 기분에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전 그런 적 없다니까요!”강유이는 고개를 돌리고 도망쳤다.“유이야, 너...”반준성의 부름에도 강유이는 멈추지 않았다.강성연과 세 아이와 함께 소리를 듣고 나왔는데 강유이가 울면서 그들을 밀치고 뛰어갔다.강성연이 강유이를 잡으려는데 강해신과 강시언이 말했다.“엄마, 저희가 유이 쫓아갈게요.”한태군은 먼저 한재욱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고 이마를 다친 리사를 힐끗 바라보며 눈빛이 차가워졌다.반준성은 손녀가 사고를 친 줄 알고 어쩔 수 없이 나서서 일을 잠재우려 하며 리사를 위로했다.리사는 한재욱에게 다가가 말했다.“죄송해요, 아저씨. 제가 따라와서는 안 됐어요. 그 때문에 유이가 절 오해했어요.”한재욱이 리사를 데려온 건 리사가 그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리사가 반씨 집안 아이들과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그는 아이들끼리 사이가 좋은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괜찮아. 내가 너희 사이를 몰랐던 탓이야. 자책하지 마. 내가 기사한테 너 데리고 병원에 가서 상처 치료하라고 할게.”한재욱은 돌아서서 떠났다.리사는 그를 뒤따랐고 한재욱의 곁을 지나치다가 한태군의 목소리를 들었다.“수단 좋네.”두 사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리사는 몸이 경직되며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강유이는 공원 그네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처음으로 믿음을 얻지 못한 것 때문에
만약 그가 손녀를 오해했다면 당연히 손녀에게 사과할 것이다.강성연은 노크한 뒤 문을 열었다. 강유이는 침대에 엎드린 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강성연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유이야, 엄마는 널 믿어.”강유이는 일어나 앉았다.“하지만 할아버지는 절 안 믿잖아요.”“할아버지는 진실을 모르잖아. 그런데 어떻게 널 믿겠어?”강성연은 손바닥으로 강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이 세상에는 네 예상 밖의 것들이 가득해. 특히 인성이 그래. 사람을 해칠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지만 경계를 풀어서도 안 돼. 선량함과 인자함은 모두 마지노선이 있는 거야.”“다른 사람이 널 향해 송곳니를 드러낸다면 더는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돼. 바보처럼 상대가 바뀔 거라고 기대해서도 안 되고, 알겠니?”강유이는 시선을 내려뜨렸다.당시 강유이는 확실히 마음이 약해졌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프시다고 리사가 거짓말한 사실을 남에게 알리지 않았다.이 일로 강유이는 리사가 그녀의 무른 마음과 친절함을 이용해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걸 깨달았다.-리사가 동네를 나서자 대문 밖에 주차되어 있던 벤틀리의 차창이 천천히 내려갔다.강유이의 어머니인 걸 확인한 리사는 당황하더니 이내 웃으며 다가갔다.“아주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참, 리사는 어때요? 어제는 제 잘못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리사를 오해했잖아요.”강성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리사를 바라봤다.“그 수작 나한테는 안 먹혀. 유이가 널 밀었는지 아니면 네가 유이를 모함했는지는 네가 가장 잘 알겠지.”리사는 돌연 얼어붙어서 시선을 내려뜨렸다.“아주머니께서 절 오해하신 거예요...”강성연은 팔을 뻗어 리사의 턱을 쥐었다.“리사야, 네가 어리니까 내가 널 상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리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강성연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리사의 뼛속에 스며들며 두려움이 생겼다.사람은 원래 그런 법이다. 약한 사람은 만만하게 보고 강한 사람 앞에서는 두려워한다. 그래서 리사가 강유이에게 손을 쓴 것이다.
리사가 그의 목숨을 구한 건 맞았다.하지만 강유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만약 리사가 아버지의 건강을 이용해 거짓말을 해서 한재욱이 믿게 할 생각이었다면, 십 대 소녀치고는 정말 간단치 않았다.그로 인해 한재욱은 리사에 대한 의심이 깊어졌다.그는 한태군과 반씨 집안 두 아들처럼 계략에 능한 아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리사를 얕봤다.한재욱은 미적지근하게 물었다.“너희 아빠 안 아프시니?”리사는 이토록 치욕적이고 난감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거짓말했음을 인정해야 했지만 한씨 집안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잃고 싶지 않았다.한재욱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것 같자 리사는 눈시울을 붉혔다.“그런 거 아니에요. 전 속일 생각이 없었어요. 저희 아빠는 확실히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강유이는 리사를 바라봤다.“그러면 지금 오빠한테 너희 아빠에게 연락하라고 할게.”리사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연락한다면 완전히 끝장이었다.강해신은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고 리사는 비틀거리면서 식은땀을 흘렸다.리사는 속으로 받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전화가 통했다.그러나 전화를 받은 것은 리사의 아빠가 아니라 낯설고 다급해 보이는 여자였다.“여보세요, 혹시 휴대폰 주인의 가족분 되시나요? 휴대폰이 지금 저한테 있는데 가족분들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서요.”강해신은 당황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누구세요?”상대방이 대답했다.“여기 병원이에요. 조금 전에 저희 서에 신고가 들어왔어요. 휴대폰 주인분이 조금 전에 변을 당하셨거든요. 가족에게 연락하려고 했는데 아드님은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요. 혹시 가족 되시나요?”리사는 당황해하며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아... 아빠.”리사는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하필 전화를 걸어 확인하려 할 때 리사의 아버지에게 사고가 일어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리사는 쏜살같이 뛰어 병원으로 향했고 휴대폰으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경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리사는 그녀의 앞으로 곧장 뛰어갔다.“저희 아빠... 어떠세요?”“미안해
"아빠, 미안해요. 탓하려거든 저한테 원하는 생활을 줄 수 없었던 스스로를 탓하세요."리사는 단호하게 몸을 돌려 떠났다.얼마 후, 고아가 된 리사가 한재욱의 수양딸이 되었다는 소식이 세간 사람을 놀라게 했다.호텔 스위트 룸.한태군은 한재욱의 뒤로 가서 멈춰 서며 물었다."작은아버지, 그 아이를 진짜 수양딸로 들일 생각이에요?""응, 부모가 없는 건 둘째 치고... 참 불쌍한 아이잖니."한재욱은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리사가 아버지의 병에 관해 숨기는 바가 있다는 건 이미 밝혀진 일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혼자 집안일에 신경 쓰느라 병에 걸리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하고 충격받았을 리사가 자꾸 눈에 밟혔다.더구나 한재욱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구한 적 있는 아이를 수양딸로 들이는 것쯤은 괜찮다고 생각했다.한태군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아이를 아직도 믿나 보네요."한재욱은 몸을 돌리며 물었다."태군아, 넌 리사가 싫어?"리사를 상대로는 싫다는 말도 순화된 것이었다. 한태군의 표정에는 적나라한 혐오까지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거짓말이 일상인 사람을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한태군은 밖으로 걸어 나가며 단호하게 말했다."수양딸로 들이는 건 반대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한씨 성을 쓰는 건 절대 안 돼요. 그리고 저의 도움을 기대하지도 마세요."한태군은 스위트 룸 밖으로 나가자마자 복도에 서 있던 리사와 마주쳤다. 리사는 먼저 그에게 다가가며 인사를 건넸다."태군... 오빠."한태군은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로 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작은아버지를 따라 한씨 집안에 들어오니 나랑 가족이라도 된 것 같아?"리사는 미소를 짓고 있는 채로 굳어버렸다. 한태군은 머리를 돌리더니 싸늘한 표정으로 이어서 말했다."즐길 수 있을 때 많이 즐겨둬."말을 마친 한태군은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리사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한태군의 표정은 말로 이루 형
4년 후.Y국 빅토리아대학교.강유이는 한 차례의 교내 연극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백스테이지로 돌아갔다. 테이블 위에는 낯선 꽃다발과 파란색 선물 상자가 있었다.강유이는 천천히 걸어가 꽃다발을 들어 올렸다. 카드에는 '생일 축하해.'라고 적혀 있어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거울 속에 비친 한 사람을 바라봤다."오늘이 내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어?"한태군은 여유로운 자태로 문턱에 기대어 있었다. 4년 사이에 그의 이목구비는 훨씬 뚜렷해졌고 분위기도 훨씬 어른스러워졌다. 따지고 보면 한창 의기양양할 나이이기도 했다.강유이는 약속대로 빅토리아대학교의 연극영화과에 입학해서 반재신, 한태군의 후배가 되었다. 반재언은 빅토리아대학교가 아닌 S국 최고 대학교를 선택해 경영을 배우기 시작했다."생일을 알아내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한태군은 강유이를 향해 걸어가더니 머리 장식을 풀어줬다. 비단과 같은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백옥 같은 피부와 완벽한 몸매 역시 눈에 띄었다. 괜히 연극영화과에서 '동방의 아프로디테'라고 불리는 게 아닌 듯했다.한태군은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빨간 립스틱이 묻어났다. 강유이는 가만히 그의 동작을 지켜볼 뿐이었다.이때 휴게실 문이 요란하게 열리고, 한태군과 강유이는 동시에 문을 바라봤다. 반재신은 역시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두운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야, 한태군! 너 나한테 뒤지고 싶어?!"'어디서 감히 더러운 앞발을 내 동생 몸에 대는 거야!'한태군은 눈썹을 치켜떴다. 꽤 도발적인 표정이었다.강유이는 어이없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동안 함께 지내온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둘 사이의 관계는 아무런 변함없었다."오빠, 왜 왔어?""어쭈, 내가 방해했다 이거야?"반재신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소중한 동생이 외간 남자의 편을 들어주려고 하니 말이다. 강유이는 미소를 지으며 총총 걸어가 반재신과 팔짱을 꼈다."그런 뜻 아니야. 그나저나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