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간의 정략결혼은 흔히 있는 일이었고 보통은 집안 실력이 비슷해야 했다. 하지만 강유이와 한태군은 죽마고우는 아니더라도 그와 거의 비슷했다.도우미들이 의논하는 걸 강유이와 한태군은 듣지 못했다. 강유이는 손으로 펜을 놀리고 있었는데 겉으로는 한태군의 문제 풀이를 듣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정신이 딴 데 팔렸었다.한태군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강유이가 건성으로 듣고 있는 것 같자 한태군은 갑자기 펜으로 강유이의 머리를 톡 쳤다.“집중 좀 해.”강유이는 정수리를 만지작거렸다.“뭐 하는 거야?”“제대로 안 하면 강의 안 해줄 거야.”한태군이 위협하는 어조로 말했다.강유이는 입을 비죽이며 머리를 긁적였다.“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사실 강유이는 일이 있을 때 참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특히 뭔가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집중할 수가 없었다.한태군은 그녀의 질문을 짐작했다.“그래.”“그게...”강유이는 미간을 구겼다.“왜 오빠한테 리사 번호가 있는 거야?”한태군은 그 질문을 예상하였기에 나른하게 이마를 짚었다.“아, 그거 물으려고? 나 오늘 리사 찾아갔어.”강유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리사와 한태군은 한때 같은 반 친구였기에 아는 건 정상이었지만 한태군은 기억을 잃었다.그런데 리사는 기억해도 강유이는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한태군이 떠보듯 물었다.“리사가 그러던데. 너랑 친구라고.”강유이는 당황하더니 이내 시선을 내려뜨리고 침묵을 택했다.그녀와 리사는 과거 친구였다.하지만 그것은 강유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리사는 어쩌면 단 한 순간도 강유이를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심지어 그녀를 웃음거리 삼았을 것이다. 반대로 강유이는 리사에게 한없이 다정했다.강유이가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강유이는 친구 사이라면 좋은 건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유이 홀로 끊임없이 내어주다 보니 리사는 많은 걸 얻었고 그녀의 허영심도 따라서 커졌다.강유이는 입을 달싹였다.“리사가 그렇게 얘기했어
백이령은 갑자기 웃더니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천천히 내뱉었다.“너 정도 나이에 이 정도 야망을 품은 여자아이는 거의 본 적이 없어.”백이령은 담배를 잔 안에 버렸고 ‘치직’ 소리와 함께 담뱃불이 꺼졌다.“자신 있다면 널 믿을게. 실패한다면 아주 비참한 꼴이 될 거야. 알겠어?”리사는 입술을 씹었다. 이왕 한다면 절대 실패할 수 없었다.“걱정하지 마세요.”백이령은 일어나서 사람을 데리고 떠났다.복도에서 백이령의 뒤를 따르던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백 사장님, 저 여자아이 말을 믿으세요? 저 아이가 제멋대로 하게 놔두는 겁니까?”그는 백이령이 왜 리염의 여동생을 도와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10대 소녀인데 리사는 권력 있는 사람에게 붙을 줄 알았다.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백이령은 코웃음 쳤다.“네가 뭘 알겠어? 저 여자아이는 앞으로 크게 될 인간이야. 내가 쟤를 도와주는 건 내게 빚을 지게 만드는 거야.”“하지만 저런 사람이 장차 사장님을 배신할까 두렵지 않으십니까?”백이령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사람은 나쁜 일을 하게 되면 당당할 수 없어. 길들여서 내 사람으로 만들 거나, 길들일 수 없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면 그만이지.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이틀 뒤 한태군은 한재욱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반지훈과 강성연도 아이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병문안을 갔다.한재욱은 수술받은 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의사는 상태가 심각한 건 아니라고 했다. 다리뼈가 부러졌을 뿐 다른 치명적인 곳은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한태군은 간병인 의자에 앉아 줄곧 침묵을 지켰고 반지훈과 강성연은 복도에서 의사와 얘기를 나눴다.강유이는 병실 안으로 들어선 뒤 한태군의 옆에 섰고 참지 못하고 그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작은아버지 분명 깨어나실 거야.”한태군은 고개를 끄덕였다.혼수상태인 한재욱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한태군은 그곳에 남아 간호했고 다른 이들은 먼저
한태군은 대답하지 않았다.병실 문이 열렸다.“아빠...”꽃다발을 안은 리사는 갑자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원래 그녀는 병실을 잘못 찾은 척하며 한재욱과 만날 셈이었다. 리사는 한태군이 있을 거로 예상했지만 강유이가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미, 미안해요. 우리 아빠 병실인 줄 알았어요.”그녀가 막 떠나려 할 때 한재욱이 그녀를 불렀고 리사는 고개를 돌렸다.“무슨 일 있으신가요?”“학생, 날 잊은 거야? 그날 학생이 날 구했어.”한재욱의 태도는 그날 밤처럼 차갑지 않았다.아무래도 그의 목숨을 구한 아이였기 때문이다.“그분이 아저씨였어요?”“네 아버지도 입원하셨니?”리사는 시선을 내려뜨리며 미소 지었다.“네.”한재욱은 불현듯 리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아프시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집안 사정을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참 착한 아이네.”칭찬하는 말에 리사는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부끄러웠다.왜냐하면 리사가 어떤 사람인지 강유이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강유이는 지금 병실에 서 있었고, 한재욱의 칭찬에 리사는 강유이가 혹시라도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릴까 봐 마음이 불안했다.다행히도 강유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바로 그때 한태군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착한 아이였으면 자주 병원에 아버지 병문안을 왔을 텐데 아버지 병실이 어딘지도 모를까요?”리사는 옷깃을 쥐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한태군의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아빠가 다른 병실로 옮겨서...”“그만.”’한재욱은 미간을 구기고 한태군을 바라봤다.“너 뭐 하는 거야? 왜 사람 곤란하게 만들어? 너희 친구 아니니? 유이에게 물어봐.”한태군은 기억이 없었지만 강유이는 리사를 알고 있었다.한태군은 강유이를 응시했고 리사 또한 조심스럽게 강유이를 살폈다.강유이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주먹을 꼭 쥐었다. 만약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면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은 던진 격이 된다.강유이와 리사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는 건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야.”강유이는 어리둥절했다.한태군은 강유이에게 다가갔다.“넌 쟤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밝히지 않았어. 강유이, 조금 전 리사가 우리랑 같은 반 친구가 아니라고 거짓말했다면 내 삼촌은 리사를 경계했을 거야.”리사가 한재욱을 구한 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어떤 음모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재욱은 이미 리사를 믿는 눈치였다.강유이는 입술을 달싹였다.“하지만 리사는 오빠 삼촌을 구했는걸...”“그게 우연일까?”“그게 아니면?”한태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물렀다. 그는 한참 뒤에야 말했다.“네 두 오빠가 널 왜 그렇게 과보호하는지 알겠다.”강유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착한 것과 멍청한 것은 달라.”그는 강유이의 곁을 지나쳤다.“너처럼 어려서부터 사람들에게 떠받들려 자란 애는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본 적이 없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지.”강유이는 돌아서서 소리를 질렀다.“지금 나보고 멍청하다고 한 거야?”한태군은 멈추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강유이는 병원을 나섰고 한태군의 말을 떠올리자 화가 나고 억울했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한태군은 왜 그런 얘기를 한 걸까?왜 리사가 어떤 사람인지 강유이가 안다고 했을까?한태군은 기억을 잃지 않았는가?그녀와 리사 사이의 일을 한태군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유이야.”강유이는 걸음을 멈췄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강유이는 리사임을 알아챘고 리사는 강유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옆에 섰다.“유이야,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고 있어. 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았어. 앞으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해도 너랑 화해하고 싶어.”강유이의 성격이 어떤지 리사가 가장 잘 알았다.예전 일은 강유이가 너무 화가 나서 그랬을 뿐 진심으로 그녀와 절교할 생각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리사는 자신이 먼저 사과하고 화해하면 강유이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예전에도 강유이는 리사가 원하는 건 뭐든
그러니 강유이를 막아야 했다.강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그러면 난 먼저 돌아갈게.”강유이는 돌아서서 차에 탔다.리사는 차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정말 아버지를 아프게 만들어야 할까?-차는 주택가에 멈춰 섰고 강유이는 창문을 내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운전기사가 돌아보며 물었다.“아가씨, 누구 찾으세요?”강유이가 말했다.“금방 돌아올게요.”강유이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뒤 위층으로 올라가 리사의 집에 도착했다. 3년이 흘렀는데 리사가 아직도 그곳에서 사는지 알 수 없었다.문을 두드렸으나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막 집을 나서던 옆집 이웃이 고개를 돌려 강유이를 훑어보았다.“학생, 누구 찾아?”“안녕하세요, 아주머니. 혹시 리사와 리사 아버지 아직 여기 사나요?”“리사 찾는 거였어?”옆집 이웃은 경멸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히 거기 살지. 그런데 학생, 어린 나이에 학교 안 다니고 나쁜 것만 배우면 앞으로 큰일 나.”강유이는 어리둥절해하며 얼굴을 찡그렸다.“리사 학교 안 다녀요?”강유이는 리사가 퇴학 후 전학할 거라고 생각했다.“몰랐어?”이웃 아주머니는 강유이를 보며 말했다.“좀 낯선 얼굴이긴 하네. 예쁘고 참하게 생겼어. 리사 친구들이랑 다르게 말이야. 학생, 리사랑은 놀지 마.”동네에서 리사의 평판이 형편없는 듯했다.동네에서 리사 또래 아이들의 학부모들은 자식들이 리사와 놀지 못하게 했다.리사는 그녀의 별 볼 일 없는 오빠 리염처럼 학교도 다니지 않고 빈둥거렸다.어린 나이에 화장하고 꾸밀 줄만 아는 게 아니라 성숙하게 입어서 거리의 양아치들이랑 별반 다를 바 없었다.“저기 아주머니, 리사가 아빠가 아프시다고 해서 보러 온 거예요.”“아프긴 무슨, 멀쩡해. 지금 회사에 있을걸.”이웃집 아주머니는 떠날 때 중얼거렸다.“걔 아빠도 안 됐지. 저런 아들딸이 있으니 참 고생이 많아.”강유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리사는 강유이가 준 걸 거절하지 않고 몇 번이고 받아들이며 마음 편히 누리다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 점은 리사가 허영심이 강하다는 걸 의미했다.한태군이 룸 밖에서 걸어들어왔다.“늦어서 죄송해요.”한재욱이 말했다.“마침 잘 왔네. 음식 아직 안나왔어.”한태군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강유이와 시선을 마주했고, 강유이는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밥 먹으면서 어른들이 대화를 나눌 때 강유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묵묵히 밥만 먹었다.강해신은 리사가 있어 강유이가 기분 나빠하는 거라고 생각해 강유이에게 닭 날개를 집어줬다.“잘 먹어. 괜히 다른 사람 때문에 영향받지 말고.”그가 말한 다른 사람이 누군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리사의 안색이 조금 흐려졌다.한태군도 강유이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장난스레 말했다.“돼지 뇌 요리라도 시켜줄까?”강유이는 화가 나서 울컥했다.“오빠나 먹어.”강유이의 큰 목청 때문에 반준성과 다른 이들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반준성은 고개를 들어 두 아이를 바라봤다.“갑자기 왜 싸우는 거야?”한재욱이 말했다.“아이들 장난이죠.”반준성은 전혀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시끌벅적해야 좋아. 유이는 평소 집에서도 해신이랑 다툰다니까.”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리사는 홀로 어울리지 못했다.리사는 고개를 들어 강유이를 바라봤다. 사람들의 눈에는 유이만 보이는 듯했다.화가 났든, 애교를 부리든, 다들 예뻐해 주기만 할 뿐 아무도 강유이를 짜증 나 하거나 시끄럽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심지어 한태군마저 분명 강유이를 기억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강유이에게 살갑고 리사에게는 적개심이 가득했다강유이는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고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복도에서 리사와 만났다.리사는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유이야.”리사를 대하는 강유이의 태도는 열정적이지도, 냉담하지도 않았다.“왜 나왔어?”“그... 혼자 안에 있으려니까 뻘쭘해서. 해신도 태군 오빠도 날 별로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아.”리사는 고개를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옷깃을 잡아당겼다.반씨 집안 때문에 서울시 학교들이 리사를 받지 않는데 지금은 동정하는 척하다니?강유이는 먼저 리사의 손을 잡았다.“그러면 내가 더욱더 아저씨에게 설명을 해줘야지.”리사는 당황한 건지 안색이 살짝 달라졌다.“그럴 필요 없어...”리사는 시선을 옮겼다.“유이야, 정말 더 설명할 필요 없어.”“왜 설명할 필요 없는데?”강유이는 리사를 응시했다.“설마 아저씨가 날 계속 오해하게 둘 셈이야?”리사는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리사야, 왜 아직도 날 속이려고 해?”강유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리사가 아버지가 아프지 않다는 걸 인정했다면, 거짓말했다는 걸 인정했다면 강유이는 어쩌면 리사에게 기회를 줬을지도 몰랐다.잘못하더라도 고치면 되는 법이다.하지만 리사는 여전히 그녀를 속였다.리사의 안색이 달라졌다.“유이야, 너... 너 그게 무슨 말이야?”“나 너희 집에 갔었어.”리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강유이는 느긋하게 설명했다.“난 네 말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 그런데 네 이웃이 그러더라. 너희 아빠 아프지 않고 출근까지 한다고.”리사는 갑자기 강유이의 손을 뿌리쳤다.“날 의심한 거야? 이웃들 말은 믿으면서 내 말은 믿지 않는 거야?”“그런데 네가 거짓말한 건 사실이잖아.”강유이는 이미 리사에게 실망한 적이 있어 기대가 별로 없었다.한태군의 말이 옳았다. 강유이는 멍청했다. 멍청하다 못해 리사가 뭐라고 하든 다 믿었다.그러나 지금 강유이는 본인을 믿었다.리사의 아버지가 정말 멀쩡한지 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리사가 거짓말한 게 아니라면 저렇게 얼버무릴 이유가 없었다.리사는 강유이가 자신을 의심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강유이는 심지어 그녀의 집까지 찾아가서 알아봤다.잠깐의 침묵 끝에 리사는 다시 강유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낯선 표정으로 강유이를 잡아당기면서 태도를 달리했다.“그래서 멋대로 날 조사한 거야?”“강유이, 내가 학
강유이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부잣집 딸이고 리사는 착하고 철이 든 아이였다. 게다가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본 것만 믿는 법이다.누가 진실이 어떠한지 신경 쓰겠는가?반준성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뭐라고 얘기하려 하는데 한재욱이 급히 말렸다.“두 아이가 장난치다가 실수로 넘어진 걸 수도 있잖아요.”“쟤 편들지마. 유이는 원래 성격이 제멋대로인 데다가 자꾸 너희가 예쁘다 예쁘다 해준 탓이야. 혼낼 때는 혼내야지.”반준성은 강유이를 보고 말했다.“얼른 친구한테 사과해.”강유이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씁쓸한 기분에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전 그런 적 없다니까요!”강유이는 고개를 돌리고 도망쳤다.“유이야, 너...”반준성의 부름에도 강유이는 멈추지 않았다.강성연과 세 아이와 함께 소리를 듣고 나왔는데 강유이가 울면서 그들을 밀치고 뛰어갔다.강성연이 강유이를 잡으려는데 강해신과 강시언이 말했다.“엄마, 저희가 유이 쫓아갈게요.”한태군은 먼저 한재욱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고 이마를 다친 리사를 힐끗 바라보며 눈빛이 차가워졌다.반준성은 손녀가 사고를 친 줄 알고 어쩔 수 없이 나서서 일을 잠재우려 하며 리사를 위로했다.리사는 한재욱에게 다가가 말했다.“죄송해요, 아저씨. 제가 따라와서는 안 됐어요. 그 때문에 유이가 절 오해했어요.”한재욱이 리사를 데려온 건 리사가 그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리사가 반씨 집안 아이들과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그는 아이들끼리 사이가 좋은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괜찮아. 내가 너희 사이를 몰랐던 탓이야. 자책하지 마. 내가 기사한테 너 데리고 병원에 가서 상처 치료하라고 할게.”한재욱은 돌아서서 떠났다.리사는 그를 뒤따랐고 한재욱의 곁을 지나치다가 한태군의 목소리를 들었다.“수단 좋네.”두 사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리사는 몸이 경직되며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강유이는 공원 그네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처음으로 믿음을 얻지 못한 것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