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바람이 통로를 뚫고 지나며 소녀의 머리카락과 소년의 옷깃을 이어주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이 진작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강유이가 순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너 혼자 잘 생각해 봐. 메롱~”그녀가 그를 향해 혀를 날름 내밀더니, 얼른 뒤 돌아서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한태군은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사실 그 자신도 왜 자꾸만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와 함께 있다 보면 저도 모르게 편안한 느낌을 받아서일지도 몰랐다.-그날 밤, 한재욱은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와 업소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상대방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준 후 웃으며 물었다.“한태군 도련님과 함께 서울에 왔다며?”한재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을 들었다.“응. 견문도 넓힐 겸 해서 국내로 데리고 왔어.”아이의 기억을 회복시키기 위해 데리고 왔다고 말하기는 싫었다.상대방이 웃으며 말했다.“한태군 도련님이 뭐 견문을 넓힐 필요가 있어. 요즘 어린애들이 아주 청출어람이잖아.”한재욱이 웃으며 답했다.“그렇지.”“듣기로 벌써 한 씨 그룹 일을 거든다며. 아마 채 몇 년도 되지 않아서 훌륭한 인재로 거듭날 거야.”그가 한재욱을 바라보았다.“그때가 바로 한 씨 그룹이 궐기하는 날이 되겠지.”한재욱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답을 하지 않았다.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종업원이 술을 들고 들어왔다. 술병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던 그녀의 귀에 한태군의 이름이 들려왔다. 순간 그녀가 실수로 술잔을 떨어뜨렸다.술잔이 넘어지며 테이블 위에 술이 쏟아졌다.긴장한 종업원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곳에 서 있었다.한재욱과 함께 온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기요. 아니 일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감히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정말 죄송합니다.”소리 지르던 남자가 그녀의 앳된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화장을 하긴 했지만, 전혀 화장이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관건은 현재 한태군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다.리사는 순간 결심이 섰다.한재욱이 친구와 함께 룸에서 나왔다. 친구와 인사를 나눈 후 그가 기사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기사가 그를 대신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가 막 차에 올라타려던 그때, 누군가가 그를 급히 불러세웠다.“한재욱 아저씨.”한재욱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아까 룸에서 봤던 그 어린 종업원이었다.그런데 방금 저 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한재욱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날 알아?”리사가 착하고 똑똑한 아이인 척 연기하며 대답했다.“사실 오늘 제가 일부러 실수한 게 아니었어요. 마침 아저씨들이 태군이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되어서...”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너 태군이 친구니?”리사가 부정하지 않았다.“네. 유이와 해신이까지 우리 모두 친구였어요.”그녀가 유이와 해신이까지 알고, 자기 조카 이름까지 대자 한재욱도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관찰했다.“나이도 어린 애가 왜 이런 곳에서 일을 하고 있어.”그녀는 한태군과 같은 나이였다. 이제 고작 열네 살 된 여자아이가 이런 업소에서 종업원을 하고 있다니.리사가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그녀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방학이라 아르바이트하고 있었어요. 저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빠도 몸이 안 좋아서 집에 부담을 좀 줄일 수 있을까 싶어서요.”그녀는 나이 든 어른일수록 효성이 지극하고 착한 아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사회를 나온 덕에 어느 정도 사람을 볼 줄 알았고, 눈치도 제법 빨랐다.보통 자수성가해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은 지위가 높아지고 돈이 많아지면서부터 특히 그녀와 같은 종업원을 무시했다.하지만 진짜 부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교양 있고 소질이 있었다. 그들은 사리가 밝았기에 자연히 계층을 따지지 않았다. 따지면 따질수록 자신을 깎아내린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그 때문에 그녀는 한재욱이 그녀를 무시하지 않으리라는 것에 도박을 걸었다.그리고
해신이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할아버지가 왜 갑자기 그들에게 임무를 부여하나 했는데.이런 속셈이 있을 줄이야!반지훈은 단번에 아버지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 그가 실눈을 떴다.“그건 좀 아니잖아요.”자기 딸을 한태군 저놈한테 붙여놓다니?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아니긴 뭐가 아니야.”반준성이 그를 힐끗 노려보더니 느긋하게 아침밥을 먹었다.“둘이 예전에 같은 반 동창이었잖아. 이 기회에 유이가 태군이의 기억도 회복해 주면 얼마나 좋아.”“아직 아이들일 뿐인데,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반지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아버지가 너무 사실만 콕 집어서 말했기 때문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확실히 두 사람은 아직 아이들이었다.하지만 그들 나이에 연애하는 애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만약 자기 딸이 저놈을 좋아하게 되기라도 한다면, 그가 어떻게든 막고 있었던 일이 자기 아버지 손에 무너지는 꼴이 아닌가?반지훈이 화를 참고 유이를 돌아보았다.“유이야, 넌 어떻게 생각해.”누가 봐도 아이가 거절했으면 좋겠다는 뜻이 강렬했다.강유이는 두 오빠와 아빠까지 자신을 쳐다보자, 순간 압박감을 느꼈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 보세요들, 다들 몸이 근질근질한가 봐? 감싸고 도는 건 좋은데, 정도껏 해야죠.”강성연이 쾅 하고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훈계하듯이 말을 이었다.“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우리 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애들은 크면서 자기 일은 스스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해요. 여기 반 씨 가문 남성분들처럼 시시콜콜 유이의 일에 간섭하면 안 된다고요. 보호하는 건 좋은데, 한평생 유이를 아빠와 오빠의 날개 아래서 키울 거예요? 그게 다 무슨 소용 있어요.”강유이가 그들의 바람대로 살았다가는 평생 독립할 수 없을 것이다.그랬다가는 아이가 나중에 어떤 곤란이 닥쳐도 먼저 오빠들과 아빠를 떠올리게 될 게 분명했다. 하다못해 자그마한 선택을 할 때도 자기 뜻대로가 아닌 오빠들과 아빠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유
한태군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러는 넌 왜 갑자기 돌아선 건데.”순간 말문이 막힌 그녀가 아예 그를 지나치고 앞으로 걸어갔다.강유이는 손에 꼬치가 담긴 박스를 들고 걸어 다니면서 먹고 있었다. 한태군은 그런 그녀의 곁에 서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그녀가 순간 걸음을 멈추더니 손에 들고 있던 꼬치를 그에게 건넸다.“자.”“안 먹어.”“싫으면 말어.”그녀도 자기 먹을 걸 그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음식을 다 먹기도 전에 그녀는 순간 몸의 이상을 감지했다. 갑자기 배가 너무나 아팠다. 이상함을 느낀 한태군이 그녀를 잡으며 물었다.“너 왜 그래.”“나… 나 속이 안 좋아.”한태군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녀를 꾸짖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여기 음식 다 위생적이지 않아. 그런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었으니. 아파도 싸지.”강유이는 바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배를 붙잡고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한태군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병원에 데려다줄게.”그가 최대한 빠른 속도로 그녀를 안고 차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유준에게 빨리 병원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강유이의 안색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걸 확인한 한태군은 난생처음 누군가가 걱정되었다.“괜찮을 거야. 유이야.”전유준이 병원 앞에 차를 세웠다.차에서 내린 그가 유이를 안으려 하자 한태군이 거절했다. 전유준은 강유이를 품에 안고 병원 안으로 달려가는 한태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외라고 생각했다.자신이 보아온 이래로 도련님은 한 번도 누군가를 저렇게 걱정한 적이 없었다.의사가 강유이의 상태를 확인한 뒤 간호사에게 말을 전했다. 유이가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다가온 간호사가 웃으며 물었다.“학생, 지금 몇 살이에요?”강유이가 옆으로 누워 배를 감싸고 있었다.“올해 열네 살이요.”그렇게 대답한 그녀가 순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왜요? 설마 저 무슨 죽을병 걸린 거 아니죠?”간호사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차근차근 설명해
해신과 시언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동시에 답했다.“알겠어요, 엄마.”일주일 뒤, 유이의 생리가 드디어 끝이 났다.봄날의 햇빛은 눈부시긴 했지만 그만큼 따사로웠다. 정원에서 기지개를 켜며 몸을 돌리던 그녀는 순간 조민과 민서율이 대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조민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강유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문 앞으로 다가가 그들을 바라보았다.“선배, 서율 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조민이 휴대폰을 꺼내며 자신이 예매한 표를 보여주었다.“너랑 영화 보러 가려고 왔지. 영화관에 금방 새로 개봉한 영화가 있거든. 그래서 내가 미리 세 장 예매해 놨어.”강유이는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조민이 이미 예매를 하고 민서율까지 함께 대동한 채 요청한 거라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그녀가 막 대답하려던 그때, 등 뒤에서 해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도 데리고 가요.”조민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반재신 후배님은 또 갑자기 웬 참견이실까.”그녀가 특별히 표 세 장을 예매해서 강유이를 요청한 건, 사실 민서율을 돕기 위해서였다.민서율이 강유이 후배한테 관심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하지만 하필 그녀의 곁에는 괴물 같은 오빠가 지키고 있었다. 괴물은 누가 자기 동생한테 가까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당장 물어뜯을 태세였다.해신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팔짱을 꼈다.“나는 왜 환영 안 해 줘요?”조민이 이를 악물었다.민서율은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당연히 환영하지. 해신이 너도 같이 가자.”“나도 갈래.”한태군의 등장에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조민과 민서율은 그와 초면이었다.“유이야, 이쪽은…”강유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해신이 느긋하게 답했다.“이쪽은 한 씨 가문의 도련님, 한태군이에요.”조민은 그를 몰랐으나 민서율은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하정원이 분명 민서율에게 알려줬을 테니까.민서율이 그의 이름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강유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얼마 후 다시
거기까지 생각한 한태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한태군 오빠?”그때 누군가가 그의 생각을 방해했다. 고개를 돌리니 멀지 않은 곳에서 웬 여자아이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한태군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그녀를 기억 못 했지만 상대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커피숍 안을 힐끗 바라보던 그가 굳은 표정으로 여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누구야 너.”긴장한 리사가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커피숍 내부, 강유이는 사는 김에 한태군이 마실 카페라테까지 포장했다. 돌아서서 문 쪽을 바라본 그녀는 그제야 한태군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엘리베이터 바로 옆 복도에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았다. 한태군이 걸음을 멈추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리사를 바라보았다.“너 도대체 누구야.”“오해하지 말아요.”리사가 손을 저어 보였다.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전 태군 오빠가 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다 이해하니까 괜찮아요.”한태군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태군 오빠라고 부르는 걸로 보아 예전에 알던 사이는 맞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이 아이가 어떻게 아는 거지?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리사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설명했다.“사실 오빠가 기억을 잃었다는 거… 유이가 저한테 알려줬어요. 오빠는 기억 못 하겠지만 유이랑 저 예전에 엄청 친한 친구였거든요.”그녀는 그에게 우연히 알게 된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한태군은 하필 기억을 잃고도 강유이와 함께 있었으니까.두 사람은 같은 반이었었기에 멀쩡한 한태군이 리사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보아하니 그가 기억을 잃은 게 확실해 보였다.한태군이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어떻게 네 말을 믿지?”리사가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오빠에 관해서 알고 있어요. 군오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어요. 맞죠?”한태군이 시선을 내려뜨렸다.그 일이라면
한태군은 리사를 보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한태군이 믿을지 믿지 않을지 리사도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리사는 잠시 뒤 마주칠까 봐 두려워 핑계를 댔다.“더 얘기하지 않을게요. 전 먼저 가볼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연락해요.”리사는 부랴부랴 떠났다.한태군은 고개를 숙이고 손에 쥐고 있던 연락처를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다른 한편, 강유이 일행은 한태군을 찾아 헤매다가 이내 그가 사람들 틈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걸 보았다.“태군 오빠, 왜 막 돌아다니는 거야.”강유이는 숨을 몰아쉬면서 다가갔다.“오빠를 잃어버리면 우리가 오빠 작은아버지에게 뭐라고 얘기해?”강해신은 코웃음 쳤다.“나이가 얼만데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조민과 민서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태군의 시선이 강유이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강유이는 조금 전 그 여자아이가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협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사실 그는 믿지 않았다. 그저 뇌리에 기억의 파편이 스쳐 지나갔고, 그것이 그녀와 말한 것과 조금 흡사했을 뿐이다.보아하니 확실히 수상쩍었다.한태군은 한참 뒤에야 미소 지었다.“미안, 내가 걱정시켰네.”강유이는 들고 있던 커피를 건넸다.“오빠 주려고 산 거야.”한태군은 멈칫하더니 강유이가 건네준 커피를 받으며 덤덤히 웃었다.“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강유이는 당황하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리며 당당하게 말했다.“싫긴 한데 우리랑 같이 와서 우리 때문에 억울한 일 생기면 우리가 돌아가서 욕먹잖아.”강유이는 솔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대한 미움을 감추지 않았지만 악의는 전혀 없었다.진짜 싫어한다면 강유이처럼 굴지 않았을 것이다.들고 있던 커피는 따뜻했다. 마치 지금 한태군의 마음속처럼 말이다.조민과 민서율은 먼저 돌아갔고 세 사람은 그제야 차를 타고 반씨 저택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강해신과 한태군은 서로를 무시했고 그 탓에 분위기가 좋지 않아 중간에 앉아있던 강유이만
설령 강유이가 평생 남이 떠받드는 공주로 산다고 해도 그들은 기꺼이 떠받들 것이다.감히 강유이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혼쭐 내줄 생각이었다.강해신과 강시언은 평생 강유이의 뒷배가 되어줄 생각이었다.한태군은 눈동자를 굴렸다.“그러면 유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 물은 적은 있어?”강해신은 코웃음 쳤다.“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강유이는 줄곧 침묵을 유지했다. 듣지 않고 있던 게 아니라 한 마디, 한 마디 빼놓지 않고 듣고 있었다.강유이는 오빠들이 자기를 지켜주고 싶어 하고, 그녀가 영원히 세상일에 어둡기를 바란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강유이는 평생 그들에게 의지할 생각은 없었다.엄마가 말했다시피 사람은 크면 독립할 줄 알아야 하고,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일도 스스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강유이의 성적은 강해신이나 강시언만큼 좋은 건 아니었고, 심지어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조차 말할 수 없었다.강유이는 단지 어렸을 때 연기를 하면서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져서 자기가 아주 잘난 줄로 알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누군가는 여전히 그녀를 싫어하고, 그녀를 따돌리려 하고, 심지어 그녀를 속이고 배신하기도 했다.강유이는 어릴 때 구천광과 연기를 하면서 광고를 몇 개 따내며 수많은 팬을 보유하게 되었고 팬들은 그녀가 자라기를 기다렸다.하지만 강유이 본인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해 본 적이 없다.오빠들이 빅토리아를 목표로 할 때도 강유이는 여전히 미래가 막막했다.차는 반씨 저택 정원에 멈춰 섰고 강유이는 차에서 내린 뒤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강유이의 이상한 모습을 눈치챈 한태군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강유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끝내 아무 얘기 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강유이는 모든 수업과 숙제를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시언 오빠, 해신 오빠, 나 공부하고 싶어.”강시언과 강해신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강유이의 행동에 겁을 먹은 것이다.“유이야, 너 왜 그래?”강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