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오빠, 오늘 한태군 만났어?”강유이가 다시 한번 물었다.이것 때문에 아까 음식점에서 자신에게 누구 만난 사람 없냐고 물었던 것이다.해신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팔짱을 꼈다. 그의 표정이 굳어있었다.“그래 만났어. 하지만 걔는 이미 우리를 잊었어.”강유이는 표정이 얼어붙었고 고개를 푹 숙이며 아무 말도 못 했다.한태군은 사고를 당하지 않았던가.강유이는 지금껏 한태군이 이미…결국 어쩔 수 없이 시언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유이야, 한태군은 이제 너랑 해신을 기억 못 해. 해신은 지금껏 네가 슬퍼할까 봐 말하지 못했던 거야.”강유이가 고개를 수그린 채 끄덕였다.“응. 나도 알아.”그들은 유이가 한태군의 일을 알게 되면 엄청난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그녀는 조용했다.“유이야, 넌 어떻게 생각해?”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뭘 어떻게 생각해?”시언은 여전히 평온한 말투로 물었다.“한태군에 대해서 말이야.”한태군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했던 말은 리사가 그녀에게 줬던 충격에 못지않았다.유이는 단순해서 사람을 쉽게 믿었다. 그 때문에 그녀가 한태군의 일을 알고 그때와 똑같이 멍청한 선택을 할까 봐 겁이 났다.강유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그녀가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큰오빠, 오빠가 뭘 걱정하는지 나도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나 한태군을 찾아가지 않을 거야.”시언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오빠는 널 믿어.”호텔 스위트 룸.전유준이 자료를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한태군은 폭신한 의자에 앉아 잡지를 훑고 있었다.잘 깎아 놓은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의 소년은 어딘가 냉철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창밖에서 비쳐 든 불빛이 그의 옆 모습을 비추자 흐릿해 보이던 얼굴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다.전유준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알아봤습니다. 오늘 본 그 소년은 반 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었습니다.”한태군이 고개를 들었다.“반 씨 가문이요?”“네.
한태군은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그 속을 알아채기 어려웠다. 그의 친아버지조차 자기 아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데 그는 오죽할까.이틀 뒤. 한재욱이 한태군과 함께 반 씨 저택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세 아이의 표정이 제각기 달랐다.해신이 먼저 불만을 터뜨렸다.“그놈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우리 집에 오겠다는 거예요.”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이를 바라보았다. 유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다.반준성이 찻잔을 내려놓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해신아, 한 씨 가문에서 손님 입장으로 오는 거다. 손님을 이놈, 저놈하고 부르는 건 예의 없는 거야.”해신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전 그냥 한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싫은 것뿐이에요.”반준성이 해신의 말을 무시하고 반지훈을 바라보았다.“한재욱이 언제 온다고?”반지훈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이제 곧 도착하겠네요.”반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구나.”해신이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으로 올라갔다. 시언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할아버지, 저도 아빠랑 같이 손님을 맞이할게요. 마침 제가 그 도련님과 한 번도 인사를 나눈 적이 없거든요.”반준성이 웃으며 말했다.“시언이가 점점 더 어른스러워지는구나.”아이가 외국에서 보낸 시간이 길다 보니 자연스럽게 식견이 넓었다. 또한 줄곧 큰 어르신 곁에 머물렀으니 어떤 일도 그에게 큰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어쩌면 큰 어르신이 그때 시언을 선택한 게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시언은 조숙하고 진중했다. 확실히 맏이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고용인들이 서둘러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열 시가 다 될 때쯤, 한재욱의 차가 정원 밖에 멈춰 섰다.집사와 고용인들이 그를 맞이했다.한재욱이 차에서 내린 뒤, 그 뒤를 따라 놀라울 정도로 준수하게 생긴 미소년이 내렸다. 소년의 외모는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그들의 눈에 큰 도련님과 둘째 도련님은 이미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해신이 거실에 한재욱과 그의 형, 그리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만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어디에도 한태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시언의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형, 그놈은?”시언은 해신이 찾는 이가 누군지 바로 알았다.“정원에.”해신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유이가 정원에 있어.”강유이는 한참 동안 정원에서 놀다가 이제 막 금이를 우리 안에 넣으려고 했다. 그때, 금이가 갑자기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금이야!”놀란 유이가 서둘러 일어나 금이의 뒤를 쫓았다.“금이야 이리 와!”금이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잔디밭을 뛰어다녔다.기진맥진한 강유이가 금이를 쫓아 나무 아래까지 달려왔다. 그런데 금이가 갑자기 나무를 보며 짓기 시작했다.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다. 길고양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금이를 보고 낮은 소리로 울고 있었다.강유이가 두 팔을 걷어붙이더니 재빠르게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길고양이가 경계심 가득 찬 눈빛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강유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유이가 손을 뻗어 나뭇가지에 낀 길고양이의 발을 빼주려던 그때, 고양이가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며 공격하려고 했다.다행히 유이가 한발 빨리 고양이의 공격을 피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일부러 화 난 척 연기했다.“도와주려는 사람을 공격하려 하다니.”강유이가 다시 몇 번인가 시도한 끝에 길고양이의 목덜미를 잡고 천천히 나뭇가지 사이에서 빼낼 수 있었다.그녀가 고양이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봐 진작 이러면 얼마나 좋아. 뭐 하러 그렇게 사납게 굴었어. 맞지, 금이야?”금이가 낑낑거리며 바닥에 앉아 있었다. 왠지 주인이 자기 말고 다른 동물을 안고 있어서 질투하고 있는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한태군이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거침없이 나무 위로 오르는 여자아이한테서 전혀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미소가 얼마나 눈부셨던지 얼어붙은 빙
“잠깐만.”한태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모르는 사이면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것도 없겠네.”왠지 모를 그녀의 까칠한 태도에 그도 기분이 나빠졌다.강유이가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잘못했는지 어쨌는지 스스로 생각할 줄 몰라? 어쨌든…”그녀가 잠깐 말을 멈추더니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난 네가 눈꼴사나워.”시언과 해신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뒤뜰로 나왔다가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쓸데없는 걱정을 했음을 깨달았다.강유이는 멍청하고 사람을 잘 믿긴 했지만 그건 그 사람과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였다.그 점만큼은 자기 어머니와 똑 닮아 있었다.예를 들면 ‘원한을 새기는 것’을.강유이는 그때 한태군이 자기한테 상처 주는 말을 한 것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다. 아무리 한태군은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일이 없던 일로 되는 건 아니었다.그녀는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속인 친구를.“됐어. 더는 너랑 말하고 싶지 않아.”강유이가 서둘러 그의 곁을 벗어났다.한태군은 더 이상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반준성은 집사에게 진수성찬을 준비해 귀빈을 접대하라고 지시했다.강성연과 반지훈도 주인의 도리를 하며 한재욱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른들이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아이들은 각자 밥을 먹으며 크게 말하지 않았다.강유이는 시언과 해신의 중간에 앉아있었는데 마침 그녀의 맞은편에 한태군이 앉아있었다.그녀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그와 시선을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유이는 사발 안에 든 밥알과 원수라도 진 것처럼 젓가락으로 휘적거렸다.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갑자기 반준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니 한태군이 벌써 빅토리아 대학에 채용되었다고?”한재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합격 TO에는 들었고, 나중에 태군이 열다섯 살이 되면 입학
그는 한 그림 아래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건 군오에서 돌아올 때 하정원이 그녀에게 선물해 준 유화 《타락한 천사》였다.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는 그를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그를 못 본 척하며 지나치려던 그때.한태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 그림 재밌네.”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가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그림의 의미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봐서 예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니 호기심이 일었다.“저 그림에 숨은 뜻이 있어?”한태군은 여전히 그림에 시선을 둔 채 담담하게 말했다.“첫눈에 봤을 때는 사람들이 인간 세상에 떨어져 날개를 잃은 천사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 보다 보면 세인들이 천사를 옭아매고 있어.”강유이가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녀의 눈에는 사람들이 천사를 하늘로 보내는 모습으로 보였다.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어떻게 봐야 그렇게 보여?”한태군이 살짝 고개를 돌려 곤혹스러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동자는 마음이 복잡한 사람들의 것과 달랐다.그녀는 티 없이 깨끗한 백지장처럼 순수했다. 하지만 이런 백지장일수록 오염시키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드는 법이었다.“내가 묻잖아. 왜 날 그렇게 쳐다보고 그래?”강유이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설마 자신이 예술을 감상할 줄 모른다고 속으로 비웃고 있는 거 아니야?한태군이 시선을 돌렸다.“사람들이 천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고 꼭 천사를 구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어쩌면 천사를 인간 세상으로 끌어내릴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잖아.”“그림 속 천사는 날개를 잃고, 사람들에게 발이 묶여 자유를 잃었어. 천사는 구원과 선을 뜻해. 하지만 그림 속 천사의 선은 세인들에게 속박당한 족쇄가 되었지. 그걸로 천사는 존재의 의미를 잃은 거야.”그가 말을 마치자, 강유이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태군이 태연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쳐냈다.“내가 어떻게 집적거렸는데.”해신이 목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내뱉었다.“어쨌든 유이한테 가까이 가지 마.”그가 돌아서서 멀어져갔다.-다음날, 한태군은 한재욱, 반준성과 함께 아래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강유이와 그녀의 두 오빠는 그제야 아래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반준성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이들을 보았다.“이제야 일어난 거냐.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어디서 배웠어.”한재욱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방학인데 애들이 늦잠 잘 수도 있죠.”강유이가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젓가락을 들고 접시에 담긴 음식을 집으려는데 마침 한태군도 그녀와 같은 걸 집었다.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반준성과 한재욱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한태군이 젓가락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강유이도 지지 않고 젓가락에 힘을 실었다.“야, 이거 내가 먼저 집었어.”“거기에 네 이름이 새겨진 것도 아니잖아.”“너 어쩜 이렇게…”반준성이 헛기침했다.“유이야, 태군인 손님이고 넌 반 씨 가문의 아가씨야. 손님한테 양보해야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한태군이 그녀를 향해 살짝 눈썹을 찡긋해 보였다.강유이는 어쩔 수 없이 젓가락을 거두었다.“알겠어요. 내가 양보할게.”그래 먹어라 먹어. 먹다 콱 사레나 걸려라!그런데 뜻밖에도 한태군이 그 음식을 집어 그녀의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반준성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순간 묘한 기류를 눈치챘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경악한 강유이의 표정을 확인한 그가 웃으며 말했다.“레이디 퍼스트.”해신은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부러트릴 뻔했다. 저 교묘한 놈 좀 보게!진정하지 못하는 해신에 비해 시언은 조용했다. 그는 자기 생각을 좀처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강유이는 접시에 담긴 음식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태군이 예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녀가 한태군을 싫어하지 않는 건 사실이
다른 한편, 강유이는 금이를 찾으러 또다시 뒤뜰로 향했다. 금이가 활기 넘치게 잔디밭에 누워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순간 금이가 그녀를 발견했는지 헐레벌떡 그녀 쪽으로 달려왔다. 강유이가 웃으며 손을 뻗어 금이를 맞이했다.그런데 금이가 그녀를 쑥 지나치고 계속 내달리는 것이다.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금이는 이미 한태군의 다리 밑에서 킁킁거리며 그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금이야!”강유이가 버럭 화를 냈다.그녀가 성큼성큼 다가가 금이를 안아 올렸다.“네 주인은 나야. 너 지금 누굴 따라간 거야!”금이가 불쌍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한태군을 힐끗 째려보았다.“넌 여기 왜 왔어.”한태군이 태연자약하게 말했다.“산책.”그의 시선이 그녀가 안고 있는 강아지에게로 향했다.“걔 이름이 금이야?”강유이가 금이를 안고 우리 앞까지 걸어갔다.“왜 무슨 문제 있어?”한태군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잠시 침묵했다.“이름이 촌스러워.”그녀가 콧방귀를 꼈다.“네가 뭘 알아. 촌스러움이 극에 달하면 그게 바로 트렌드거든? 애가 멋을 몰라.”잠깐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그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강유이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똑같았다. 마치 방금 웃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처럼.한태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여기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아, 그래?”그녀가 무심하게 금이의 털을 만지며 답했다.그녀는 알 수 있었다.그가 기억을 잃은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녀의 표정이 어딘가 침울해 보였다. 바람에 날려 떨어진 나뭇잎이 그녀의 머리 위에 떨어졌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한태군이 그녀의 곁에 멈춰 섰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유이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뭐 하는 거야?”그가 손에 쥔 나뭇잎을 내밀었다.강유이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털었다. 곧이어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한태군.”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
서늘한 바람이 통로를 뚫고 지나며 소녀의 머리카락과 소년의 옷깃을 이어주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이 진작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강유이가 순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너 혼자 잘 생각해 봐. 메롱~”그녀가 그를 향해 혀를 날름 내밀더니, 얼른 뒤 돌아서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한태군은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사실 그 자신도 왜 자꾸만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와 함께 있다 보면 저도 모르게 편안한 느낌을 받아서일지도 몰랐다.-그날 밤, 한재욱은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와 업소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상대방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준 후 웃으며 물었다.“한태군 도련님과 함께 서울에 왔다며?”한재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을 들었다.“응. 견문도 넓힐 겸 해서 국내로 데리고 왔어.”아이의 기억을 회복시키기 위해 데리고 왔다고 말하기는 싫었다.상대방이 웃으며 말했다.“한태군 도련님이 뭐 견문을 넓힐 필요가 있어. 요즘 어린애들이 아주 청출어람이잖아.”한재욱이 웃으며 답했다.“그렇지.”“듣기로 벌써 한 씨 그룹 일을 거든다며. 아마 채 몇 년도 되지 않아서 훌륭한 인재로 거듭날 거야.”그가 한재욱을 바라보았다.“그때가 바로 한 씨 그룹이 궐기하는 날이 되겠지.”한재욱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답을 하지 않았다.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종업원이 술을 들고 들어왔다. 술병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던 그녀의 귀에 한태군의 이름이 들려왔다. 순간 그녀가 실수로 술잔을 떨어뜨렸다.술잔이 넘어지며 테이블 위에 술이 쏟아졌다.긴장한 종업원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곳에 서 있었다.한재욱과 함께 온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기요. 아니 일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감히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정말 죄송합니다.”소리 지르던 남자가 그녀의 앳된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화장을 하긴 했지만, 전혀 화장이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