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훈은 하정원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뒤 침대로 그녀의 머리를 바쳤다. 하정원은 줄곧 깊은 잠에 빠져 경계심이 전혀 없었다.진여훈은 그녀 대신 이불을 덮어주고 침대 옆에 잠깐 서 있다가 조명을 끄고 침실에서 나왔다.한혜숙은 그가 위층에서 내려오자 천천히 일어났다.“여훈아.”진여훈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비틀어 그녀를 바라봤다.“어머님, 무슨 일 있으세요?”“정원이 데려다줘서 고마워.”“별거 아니에요.”그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그러면 전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한혜숙은 고개를 끄덕였다.진여훈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혜숙은 감개했다. 그녀는 사실 진여훈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하정원은 왜 그의 좋은 점을 보지 못하는지 의문이었다.하정원은 일찍 잠이 들어 일찍 깼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아침 여섯 시였다.그러나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침실에 누워있는 걸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어제 차에서 잠든 것 같은데 언제 돌아온 거지?하정원은 세수를 하고 물을 마시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는 도우미가 일어나 아침을 하고 있었다.“아가씨, 벌써 깨셨어요?”하정원은 탁자 앞에 서서 물을 한 잔 따른 뒤 뭔가 떠올리고 말했다.“저 어젯밤 어떻게 돌아왔어요?”도우미는 웃으며 말했다.“진여훈 도련님이 바래다주셨어요.”컵을 들던 하정원의 손이 멈칫했다.“그 사람이 저 데려다준 건 알아요. 그런데... 누가 절 방에 데려다준 거예요?”그녀는 최근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 어제 죽은 것처럼 자서 기억이라고는 전혀 없었다.도우미가 대답했다.“당연히 진여훈 도련님이 방까지 안아주셨죠.”하정원은 넋이 나갔다.수십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봤지만 진여훈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녀를 방까지 안아다 주는 게 아니라 기껏해야 깨웠을 것이다.그런데 도우미가 그녀를 속일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진여훈이...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김경원 결혼 사실
하정원은 멍청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녀와 진여훈을 이어주려 하고 있었다.이혼까지 했는데 왜 그러는 걸까?“숙모, 삼촌 싫어해요?”“네 삼촌이 날 싫어하는 거야.”강유이는 하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그러면 숙모는 삼촌 싫어해요?”하정원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네 삼촌이 날 싫어하는데 나도 당연히 싫지.”“우리 삼촌이 숙모를 싫어하지 않는다면요?”“...”하정원은 뜸을 들였다.“그래도 싫어.”“왜요?”강유이의 시선이 그녀를 지나쳐 뒤쪽으로 향했다.하정원은 컵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거만하고 위선적이고 성격도 나쁘고 전혀 다정하지 않잖아.”압박감 어린 그림자가 그녀의 뒤에 섰다.“그게 나에 대한 네 평가야?”하정원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돌렸다. 진여훈이 금테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은 채 그녀의 뒤에 꼿꼿이 서 있었다. 안경을 쓰면 외모가 가려진댔는데 진여훈만큼 안경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매너가 좋고 말수가 적어 보이며 내성적인 듯하면서도 은근히 사악한 느낌이 들어 더 매력적이었다.하정원은 입을 뻐끔거리며 말했다.“내가 뭐 잘못 말했어?”진여훈이 거만하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으며 사납지 않다고?진여훈은 시선을 내려뜨리고 하정원을 바라봤다.“그거 루머 생성이야.”하정원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루머는 무슨, 난 사실만 얘기해.”진여훈은 더는 그녀와 다투지 않았다. 그는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았고 하정원은 의아한 듯 물었다.“이게 뭐 하는...”진여훈은 덤덤히 말했다.“아침 먹으려고.”강유이가 웃었다.“삼촌도 저처럼 아침을 안 먹었나 보네요.”하정원은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아침을 먹든 말든 왜 자신에게 얘기한단 말인가?그녀가 언제 먹지 말라고 한 적이 있나?정말 이상한 남자였다.그런데 강유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활짝 웃어 보였다.“숙모, 삼촌. 전 오빠들이랑 같이 밥 먹을게요. 천천히 드세요!”“어... 유이야...”하정원은 강유이를 부르려 했지만 강유이는 이미 떠난
결혼한 지 3년이 되어도 단 한 번도 그녀와 아침을 먹은 적이 없고 심지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다니, 갑자기 이혼한 뒤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구니 놀라지 않을 수 있는가?진여훈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멈췄다.“싫은 건 맞아.”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말했다.“하지만 정략결혼으로 묶인 게 싫었던 거야.”하정원은 살짝 놀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은 이혼해서 싫지 않다는 거야?”“넌 이혼해서 기쁜 거 아니었어?”진여훈이 반문했다.하정원은 말을 하려다 말고 시선을 내려뜨렸다.그러했다. 이혼해서 자유의 몸이 됐으니 당연히 기뻤다.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이상했다.다른 한편, 강성연과 반지훈은 두 아이를 데리고 같은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강유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강성연은 시선을 들며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너 숙모랑 아침 먹는 거 아니었어?”“숙모는 곁에 삼촌이 있잖아요. 제가 방해하면 안 되죠.”꽤 자발적이었다.반지훈은 강유이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나랑 네 엄마도 있는데 왜 우리는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그건 다르죠. 엄마가 원하면 아빠가 애정행각을 하잖아요.”강유이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하지만 숙모랑 삼촌은 다르죠. 원래도 위태로운 사인데 방해꾼인 제가 그곳에 있으면 분위기 깨잖아요?”강해신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분위기를 깨든 깨지 않든 위태로운 관계인 건 틀림없지.”강유이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오빠, 희망을 좀 가지라고.”강해신은 어깨를 으쓱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성연은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해신이 말도 일리가 있어. 두 사람은 예전부터 서로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잖아.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면 좀 이상하긴 하지.”“예전에 줄곧 자신을 싫어하다가 갑자기 좋아한다고 그러면 진심인 건지 아니면 농담인 건지 누가 알겠어?”게다가 하정원은 이미 죽은 남자를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 집착을
뭔가 눈치챈 하정원은 고개를 번쩍 들며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아빠.”하진석은 잠깐 멈칫했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하정원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무슨 책임을 진다는 거예요?”하진석은 고개를 쳐들고 심호흡했다.“속죄지.”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떠났다.하정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 있었다.그녀가 뒤따라갔지만 하진석은 이미 차를 타고 떠났다.비 때문에 차가 흐릿하게 보였다.하진석은 경찰서로 가서 몇 년 전 납치사건의 주모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당시 납치범들이 하진석의 이름을 대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법의 제재를 피했기 때문이다.이제 그는 스스로 자백했고 변호사를 둘 생각도 없었다. 경찰들은 그의 얘기를 듣고 모두 의아해했다.당시 하진석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정보를 숨겼다. 그들은 하정원이 납치당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의 주모자가 하진석이라니.하진석은 경찰을 따라 취조실에서 나왔고 하정원이 복도에 있었다.“아빠!”하진석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부랴부랴 도착한 하정원을 바라봤다. 하정원의 어깨와 바짓단은 빗물에 젖었고 얼굴에도 빗물의 흔적이 있었다. 서늘하고 축축하며 안색이 창백했다.하진석은 한숨을 쉬었다.“정원아, 돌아가.”하정원은 눈시울이 붉어져 울었다.“아빠, 저 아빠 용서했어요.”그가 말한 속죄는 자수였다.하지만 어찌 됐든 그는 그녀의 친아버지였다. 비록 그가 했던 일 때문에 그를 미워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더 이상 그가 밉지 않았다.하진석은 흠칫하더니 이내 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경찰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하정원은 등 뒤에서 울먹이며 외쳤다.“아빠, 엄마랑 같이 아빠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들이 복도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하정원은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 공허한 복도에서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서 있었다. 마치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은 듯 말이다.하정원
“내가 바래다줄게.”진여훈은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났다.가는 길 내내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조용한 분위기가 하정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뭐라 얘기하고 싶은데 진여훈이 받아주지 않을까 걱정됐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이미 그의 앞에서 두 번이나 울었었다. 처음엔 육진우의 방에서, 두번 째는 경찰서 밖에서였다.차는 하정원의 집 앞에 멈춰 섰고 진여훈은 그녀를 문앞까지 바래다줬다.한혜숙은 심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진여훈과 하정원이 함께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그제야 천천히 일어났다.“정원아, 왔니?”“엄마, 저...”“됐어. 아무 얘기도 하지 마.”한혜숙은 부드럽게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아빠가 한 결정, 엄마는 다 이해해.”한혜숙은 하정원의 앞에 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네 아빠가 잘못한 거잖아. 결과가 어떨지는 법원 판결에 맡기자. 우리는 네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알겠지?”하정원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한혜숙은 진여훈을 바라봤다.“여훈이도 왔으니 여기서 밥 먹고 가.”하정원이 그 대신 거절하려 했다.“아뇨...”진여훈이 대답했다.“네.”하정원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한혜숙은 싱긋 웃더니 도우미에게 저녁을 준비하라고 일렀다.-하진석이 예전 사건을 자수했다는 걸 알게 돈 진철은 거실에서 반지훈과 대화를 나눌 때 그 이야기를 거론했다.강성연은 꽤 놀랐다. 당시 납치 사건은 하진석이 꾸민 일이었지만 그는 납치범들에게 정말로 사람을 다치게 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납치범은 그의 뜻을 어겼고 큰 재앙이 찾아왔다. 사람을 죽인 건 하진석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납치 사건이 그 때문에 시작되었으니 간접적으로 육진우를 죽인 셈이었다.하진석의 지위와 인맥이라면 충분히 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하진석은 스스로 죗값을 치르려 했다.반지훈은 찻잔을 들었다.“변호사가 항소하려는데 거부했다면서요?”
한혜숙은 딸이 기회를 잡지 못하고 놓칠까 봐 걱정됐다.무언가 떠올린 한혜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정원아, 엄마 요 며칠 친정에 갔다 올 거야. 그런데 엄마는 네가 혼자 있으면 마음이 안 놓여. 너 요 며칠 진씨 집안에 가 있을래?”하정원은 당황하며 한참 뒤에 말했다.“절 버리려는 건 아니죠?”한혜숙은 말문이 막혔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엄마는 볼일이 있어서 돌아가려는 거야. 네 사촌 동생도 지금 군오에 있잖아. 너 외할머니집에 가면 걔랑 노는 것 외에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할 거잖아.”다행히 그녀는 딸을 잘 알고 있었다.하정원은 젓가락을 물고 진여훈을 바라봤다.“진씨 집안에 가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 혼자 집에 못 있는 것도 아니고.”한혜숙이 반문했다.“도우미 아줌마 주말에 휴가 냈어. 너 밥할 줄 알아?”“...”한혜숙은 하정원에게 묻지도 않고 진여훈을 바라봤다.“여훈아, 며칠만 부탁할게.”진여훈은 덤덤히 웃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머니.”한혜숙은 다음 날 친정으로 돌아갔다. 도우미는 주말에 아이와 함께 있기 위해 휴가를 냈고 하정원은 어쩔 수 없이 진여훈의 집에서 며칠 묵어야 했다.사실 하정원이 진여훈의 집에서 묵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결혼했을 때 그녀는 줄곧 진여훈의 집에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때는 별거했었다.지금은 이혼도 했으니 진철이 손녀처럼 아끼는 신분으로 진여훈의 집에 묵게 되니 꽤 쑥스러웠다.물론 진철은 하정원을 무척이나 환영했고 예전처럼 살뜰히 그녀를 챙겼다. 게다가 강유이도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있었기에 하정원은 생각보다 덜 무안했다.도우미는 그녀를 대신해 그녀의 짐을 방 앞에 놓아줬다. 하정원은 안으로 돌아갔고 그 방은 그녀가 진씨 집안을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게다가 뜻밖에도 그녀가 남겨두고 간 생활용품들도 그대로였다.“하정원 씨, 편히 쉬세요.”도우미가 나갔다.유일한 변화라면 호칭이 사모님에서 하정원 씨로 변했다는 점뿐이었다.하정원은 화장대 앞에 섰
“난 반지훈의 외할머니를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여훈이 할머니도 저버렸어. 난 그녀가 원하는 감정을 줄 수 없었고 그녀는 결국 우울함에 잠겨서 삶을 마감했어. 심지어 여훈이 아버지는 그 일 때문에 날 미워했어. 그래서 내가 여훈이 이놈을 몇 배나 더 아끼는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니까.”하정원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진철은 고개를 들어 하정원을 바라봤다.“정원아, 내가 너와 여훈이 이혼을 동의한 건 너희가 나처럼 되길 바라지 않아서야. 난 너희 둘이 서로를 원망하는 것도 바라지 않아.”“동시에 난 너희가 서로 편견을 내려놓고 서로를 다시 알아갔으면 좋겠어. 너희들은 아직 갈 길이 멀어. 어떤 사람과 일들은 마음속에 숨겨두고 기억 속에 새겨져 잊을 수 없지만 삶은 계속되잖아.”하정원은 들고 있던 체스를 꼭 쥐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하정원은 서재에서 나와 고개를 들었다가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흠칫했다.진여훈은 창가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하정원은 팔짱을 두르고 그에게 다가갔다.“설마 엿들은 건 아니지?”진여훈은 시선을 거두어들였다.“뭐 엿들을 게 있다고.”하정원은 고개를 홱 돌렸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비록 그가 남의 대화를 엿들을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혹시 누가 알겠는가?“하정원.”진여훈은 하정원의 이름을 불렀고 하정원은 의아해했다. 진여훈이 거리를 좁혔다.“너 그렇게 얄밉지는 않네.”하정원은 살짝 당황하더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뭐라고?”진여훈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고정됐다.“우리가 정략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난 아마 너에 대해 알고 싶었을 거야.”하지만 억지로 치러진 결혼식이었고 서로 상관도 없는 낯선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알아갈 마음이 없었다.재벌 간의 결혼에서 부부들은 서로 체면만 지켜주면 충분했다. 하정원이 얌전히 지내며 허울뿐인 아내의 자리를 지킨다면 그에게 영향이 없었다.하지만 하
진여훈은 덤덤히 웃었다.“시간은 많아.”하정원은 잠깐 넋을 놓았다. 진여훈의 미소는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그가 웃을 줄 모르는 게 아니라 그녀 앞에서는 웃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하정원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오빠로서 동생인 그녀를 알아가고 싶다는 뜻인 줄로 알았다.“그렇게 한가하면 혼자 천천히 알아보든가.”하정원은 턱을 쳐들고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어차피 난 알려주지 않을 거니까.”하정원은 코웃음을 치며 방으로 향했다.진여훈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강유이는 구석에서 고개를 내밀었고 강시언과 강해신은 강유이의 뒤에 서 있었다. 그들은 벽 뒤에 숨어 엿보는 강유이가 어이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진여훈이 강유이를 발견했다.그는 강유이를 향해 다가가더니 강유이의 시야를 가렸다.“볼 만큼 다 봤어?”강유이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며 씩 웃었다.“삼촌, 나 일부러 엿본 건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진여훈은 눈알을 굴렸다.“어린애가 뭘 궁금해해.”강유이는 입을 비죽일 뿐 대꾸하지 않았다.강해신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솔직하게 말했다.“삼촌이 전 아내랑 다시 잘 될지 궁금해서 그런 거죠.”진여훈은 흠칫하더니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너희는 어떻게 생각해?”강해신은 어깨를 으쓱였다.“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강유이가 강해신의 팔을 잡고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좋은 얘기 좀 해주면 안 돼?”희망을 줘야 할 거 아닌가?강해신이 대꾸하기도 전에 강시언이 태연하게 대답했다.“타이밍이 중요하죠. 숙모는 엄마랑 달라요. 이어준다고 해서 꼭 이어질 리 없어요. 그러다가 도리어 숙모가 도망갈 수도 있어요. 전 숙모 같은 성격이면 0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0부터 다시 시작하라니.진여훈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강시언을 바라봤다.강시언과 강해신은 그야말로 판박이었다. 그러나 강시언이 강해신보다 더 차분했다. 평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