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만났던 여자들은 그의 돈을 탐냈다. 돈만 받으면 끈질기게 달라붙지 않고 흔쾌히 헤어졌다. 아무래도 일방적인 감정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천지현은 김경원에게 성가신 인물이었다.천지현은 천씨 집안의 딸이고 천지현이 먼저 그에게 다가갔다. 김경원은 그녀에게 여자친구라는 신분을 줬지만 외부에 공개한 적은 없고 그저 천지현의 몇몇 지인들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천지현과 헤어진 이유는 관계가 지속되면 천지현이 그의 집까지 찾아와 난리를 피울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또 그는 아내와 아들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그녀와 작별을 고했다.그런데 김경원이 예전에 하정원에게 작업을 건 적이 있어서 하정원은 천지현이 자기 남자친구를 빼앗아 갔다고 오해했다. 하정원은 누명을 쓴 셈이었다.그런 생각이 들자 진여훈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하정원은 자신이 그렇게 염불을 외우던 팔보채를 먹느라 진여훈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했다.같은 시각, 진씨 집안.진철은 원래 진여훈이 돌아오면 함께 밥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강유이가 말했다.“외증조할아버지,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삼촌 밥 집에 와서 먹지 않을 거예요.”강성연은 고개를 돌려 강유이를 바라봤다.“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강유이는 비밀스럽게 웃었다.“삼촌 외숙모랑 같이 있어요. 오늘 분명 외식할걸요.”강유이는 하정원을 당숙모라고 부르는 게 습관이 되어 고치고 싶지 않았다.진철은 웃으면서 그릇과 젓가락을 들었다.“그럼 됐다. 걔네 기다리지 말고 우리는 먼저 먹자.”진여훈은 늦은 시간에 하정원을 집까지 바래다줬다. 하정원은 하루 종일 놀아서 피곤한 상태인 데다가 밥까지 배불리 먹은 탓에 잠이 쏟아져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하정원의 집에 도착해서 기사는 차를 멈춰 세웠고 고개를 돌려 하정원을 깨울 생각이었는데 진여훈이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그 뜻을 알아챈 기사는 곧바로 고개를 돌린 뒤 담배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하정원은 고개를 돌려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차가 멈췄지만 그녀는 여전히 깨지 않았다.진여훈은 차에서 내
진여훈은 하정원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뒤 침대로 그녀의 머리를 바쳤다. 하정원은 줄곧 깊은 잠에 빠져 경계심이 전혀 없었다.진여훈은 그녀 대신 이불을 덮어주고 침대 옆에 잠깐 서 있다가 조명을 끄고 침실에서 나왔다.한혜숙은 그가 위층에서 내려오자 천천히 일어났다.“여훈아.”진여훈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비틀어 그녀를 바라봤다.“어머님, 무슨 일 있으세요?”“정원이 데려다줘서 고마워.”“별거 아니에요.”그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그러면 전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한혜숙은 고개를 끄덕였다.진여훈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혜숙은 감개했다. 그녀는 사실 진여훈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하정원은 왜 그의 좋은 점을 보지 못하는지 의문이었다.하정원은 일찍 잠이 들어 일찍 깼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아침 여섯 시였다.그러나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침실에 누워있는 걸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어제 차에서 잠든 것 같은데 언제 돌아온 거지?하정원은 세수를 하고 물을 마시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는 도우미가 일어나 아침을 하고 있었다.“아가씨, 벌써 깨셨어요?”하정원은 탁자 앞에 서서 물을 한 잔 따른 뒤 뭔가 떠올리고 말했다.“저 어젯밤 어떻게 돌아왔어요?”도우미는 웃으며 말했다.“진여훈 도련님이 바래다주셨어요.”컵을 들던 하정원의 손이 멈칫했다.“그 사람이 저 데려다준 건 알아요. 그런데... 누가 절 방에 데려다준 거예요?”그녀는 최근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 어제 죽은 것처럼 자서 기억이라고는 전혀 없었다.도우미가 대답했다.“당연히 진여훈 도련님이 방까지 안아주셨죠.”하정원은 넋이 나갔다.수십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봤지만 진여훈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녀를 방까지 안아다 주는 게 아니라 기껏해야 깨웠을 것이다.그런데 도우미가 그녀를 속일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진여훈이...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김경원 결혼 사실
하정원은 멍청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녀와 진여훈을 이어주려 하고 있었다.이혼까지 했는데 왜 그러는 걸까?“숙모, 삼촌 싫어해요?”“네 삼촌이 날 싫어하는 거야.”강유이는 하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그러면 숙모는 삼촌 싫어해요?”하정원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네 삼촌이 날 싫어하는데 나도 당연히 싫지.”“우리 삼촌이 숙모를 싫어하지 않는다면요?”“...”하정원은 뜸을 들였다.“그래도 싫어.”“왜요?”강유이의 시선이 그녀를 지나쳐 뒤쪽으로 향했다.하정원은 컵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거만하고 위선적이고 성격도 나쁘고 전혀 다정하지 않잖아.”압박감 어린 그림자가 그녀의 뒤에 섰다.“그게 나에 대한 네 평가야?”하정원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돌렸다. 진여훈이 금테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은 채 그녀의 뒤에 꼿꼿이 서 있었다. 안경을 쓰면 외모가 가려진댔는데 진여훈만큼 안경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매너가 좋고 말수가 적어 보이며 내성적인 듯하면서도 은근히 사악한 느낌이 들어 더 매력적이었다.하정원은 입을 뻐끔거리며 말했다.“내가 뭐 잘못 말했어?”진여훈이 거만하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으며 사납지 않다고?진여훈은 시선을 내려뜨리고 하정원을 바라봤다.“그거 루머 생성이야.”하정원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루머는 무슨, 난 사실만 얘기해.”진여훈은 더는 그녀와 다투지 않았다. 그는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았고 하정원은 의아한 듯 물었다.“이게 뭐 하는...”진여훈은 덤덤히 말했다.“아침 먹으려고.”강유이가 웃었다.“삼촌도 저처럼 아침을 안 먹었나 보네요.”하정원은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아침을 먹든 말든 왜 자신에게 얘기한단 말인가?그녀가 언제 먹지 말라고 한 적이 있나?정말 이상한 남자였다.그런데 강유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활짝 웃어 보였다.“숙모, 삼촌. 전 오빠들이랑 같이 밥 먹을게요. 천천히 드세요!”“어... 유이야...”하정원은 강유이를 부르려 했지만 강유이는 이미 떠난
결혼한 지 3년이 되어도 단 한 번도 그녀와 아침을 먹은 적이 없고 심지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다니, 갑자기 이혼한 뒤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구니 놀라지 않을 수 있는가?진여훈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멈췄다.“싫은 건 맞아.”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말했다.“하지만 정략결혼으로 묶인 게 싫었던 거야.”하정원은 살짝 놀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은 이혼해서 싫지 않다는 거야?”“넌 이혼해서 기쁜 거 아니었어?”진여훈이 반문했다.하정원은 말을 하려다 말고 시선을 내려뜨렸다.그러했다. 이혼해서 자유의 몸이 됐으니 당연히 기뻤다.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이상했다.다른 한편, 강성연과 반지훈은 두 아이를 데리고 같은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강유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강성연은 시선을 들며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너 숙모랑 아침 먹는 거 아니었어?”“숙모는 곁에 삼촌이 있잖아요. 제가 방해하면 안 되죠.”꽤 자발적이었다.반지훈은 강유이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나랑 네 엄마도 있는데 왜 우리는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그건 다르죠. 엄마가 원하면 아빠가 애정행각을 하잖아요.”강유이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하지만 숙모랑 삼촌은 다르죠. 원래도 위태로운 사인데 방해꾼인 제가 그곳에 있으면 분위기 깨잖아요?”강해신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분위기를 깨든 깨지 않든 위태로운 관계인 건 틀림없지.”강유이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오빠, 희망을 좀 가지라고.”강해신은 어깨를 으쓱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성연은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해신이 말도 일리가 있어. 두 사람은 예전부터 서로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잖아.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면 좀 이상하긴 하지.”“예전에 줄곧 자신을 싫어하다가 갑자기 좋아한다고 그러면 진심인 건지 아니면 농담인 건지 누가 알겠어?”게다가 하정원은 이미 죽은 남자를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 집착을
뭔가 눈치챈 하정원은 고개를 번쩍 들며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아빠.”하진석은 잠깐 멈칫했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하정원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무슨 책임을 진다는 거예요?”하진석은 고개를 쳐들고 심호흡했다.“속죄지.”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떠났다.하정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 있었다.그녀가 뒤따라갔지만 하진석은 이미 차를 타고 떠났다.비 때문에 차가 흐릿하게 보였다.하진석은 경찰서로 가서 몇 년 전 납치사건의 주모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당시 납치범들이 하진석의 이름을 대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법의 제재를 피했기 때문이다.이제 그는 스스로 자백했고 변호사를 둘 생각도 없었다. 경찰들은 그의 얘기를 듣고 모두 의아해했다.당시 하진석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정보를 숨겼다. 그들은 하정원이 납치당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의 주모자가 하진석이라니.하진석은 경찰을 따라 취조실에서 나왔고 하정원이 복도에 있었다.“아빠!”하진석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부랴부랴 도착한 하정원을 바라봤다. 하정원의 어깨와 바짓단은 빗물에 젖었고 얼굴에도 빗물의 흔적이 있었다. 서늘하고 축축하며 안색이 창백했다.하진석은 한숨을 쉬었다.“정원아, 돌아가.”하정원은 눈시울이 붉어져 울었다.“아빠, 저 아빠 용서했어요.”그가 말한 속죄는 자수였다.하지만 어찌 됐든 그는 그녀의 친아버지였다. 비록 그가 했던 일 때문에 그를 미워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더 이상 그가 밉지 않았다.하진석은 흠칫하더니 이내 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경찰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하정원은 등 뒤에서 울먹이며 외쳤다.“아빠, 엄마랑 같이 아빠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들이 복도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하정원은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 공허한 복도에서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서 있었다. 마치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은 듯 말이다.하정원
“내가 바래다줄게.”진여훈은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났다.가는 길 내내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조용한 분위기가 하정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뭐라 얘기하고 싶은데 진여훈이 받아주지 않을까 걱정됐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이미 그의 앞에서 두 번이나 울었었다. 처음엔 육진우의 방에서, 두번 째는 경찰서 밖에서였다.차는 하정원의 집 앞에 멈춰 섰고 진여훈은 그녀를 문앞까지 바래다줬다.한혜숙은 심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진여훈과 하정원이 함께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그제야 천천히 일어났다.“정원아, 왔니?”“엄마, 저...”“됐어. 아무 얘기도 하지 마.”한혜숙은 부드럽게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아빠가 한 결정, 엄마는 다 이해해.”한혜숙은 하정원의 앞에 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네 아빠가 잘못한 거잖아. 결과가 어떨지는 법원 판결에 맡기자. 우리는 네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알겠지?”하정원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한혜숙은 진여훈을 바라봤다.“여훈이도 왔으니 여기서 밥 먹고 가.”하정원이 그 대신 거절하려 했다.“아뇨...”진여훈이 대답했다.“네.”하정원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한혜숙은 싱긋 웃더니 도우미에게 저녁을 준비하라고 일렀다.-하진석이 예전 사건을 자수했다는 걸 알게 돈 진철은 거실에서 반지훈과 대화를 나눌 때 그 이야기를 거론했다.강성연은 꽤 놀랐다. 당시 납치 사건은 하진석이 꾸민 일이었지만 그는 납치범들에게 정말로 사람을 다치게 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납치범은 그의 뜻을 어겼고 큰 재앙이 찾아왔다. 사람을 죽인 건 하진석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납치 사건이 그 때문에 시작되었으니 간접적으로 육진우를 죽인 셈이었다.하진석의 지위와 인맥이라면 충분히 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하진석은 스스로 죗값을 치르려 했다.반지훈은 찻잔을 들었다.“변호사가 항소하려는데 거부했다면서요?”
한혜숙은 딸이 기회를 잡지 못하고 놓칠까 봐 걱정됐다.무언가 떠올린 한혜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정원아, 엄마 요 며칠 친정에 갔다 올 거야. 그런데 엄마는 네가 혼자 있으면 마음이 안 놓여. 너 요 며칠 진씨 집안에 가 있을래?”하정원은 당황하며 한참 뒤에 말했다.“절 버리려는 건 아니죠?”한혜숙은 말문이 막혔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엄마는 볼일이 있어서 돌아가려는 거야. 네 사촌 동생도 지금 군오에 있잖아. 너 외할머니집에 가면 걔랑 노는 것 외에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할 거잖아.”다행히 그녀는 딸을 잘 알고 있었다.하정원은 젓가락을 물고 진여훈을 바라봤다.“진씨 집안에 가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 혼자 집에 못 있는 것도 아니고.”한혜숙이 반문했다.“도우미 아줌마 주말에 휴가 냈어. 너 밥할 줄 알아?”“...”한혜숙은 하정원에게 묻지도 않고 진여훈을 바라봤다.“여훈아, 며칠만 부탁할게.”진여훈은 덤덤히 웃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머니.”한혜숙은 다음 날 친정으로 돌아갔다. 도우미는 주말에 아이와 함께 있기 위해 휴가를 냈고 하정원은 어쩔 수 없이 진여훈의 집에서 며칠 묵어야 했다.사실 하정원이 진여훈의 집에서 묵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결혼했을 때 그녀는 줄곧 진여훈의 집에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때는 별거했었다.지금은 이혼도 했으니 진철이 손녀처럼 아끼는 신분으로 진여훈의 집에 묵게 되니 꽤 쑥스러웠다.물론 진철은 하정원을 무척이나 환영했고 예전처럼 살뜰히 그녀를 챙겼다. 게다가 강유이도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있었기에 하정원은 생각보다 덜 무안했다.도우미는 그녀를 대신해 그녀의 짐을 방 앞에 놓아줬다. 하정원은 안으로 돌아갔고 그 방은 그녀가 진씨 집안을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게다가 뜻밖에도 그녀가 남겨두고 간 생활용품들도 그대로였다.“하정원 씨, 편히 쉬세요.”도우미가 나갔다.유일한 변화라면 호칭이 사모님에서 하정원 씨로 변했다는 점뿐이었다.하정원은 화장대 앞에 섰
“난 반지훈의 외할머니를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여훈이 할머니도 저버렸어. 난 그녀가 원하는 감정을 줄 수 없었고 그녀는 결국 우울함에 잠겨서 삶을 마감했어. 심지어 여훈이 아버지는 그 일 때문에 날 미워했어. 그래서 내가 여훈이 이놈을 몇 배나 더 아끼는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니까.”하정원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진철은 고개를 들어 하정원을 바라봤다.“정원아, 내가 너와 여훈이 이혼을 동의한 건 너희가 나처럼 되길 바라지 않아서야. 난 너희 둘이 서로를 원망하는 것도 바라지 않아.”“동시에 난 너희가 서로 편견을 내려놓고 서로를 다시 알아갔으면 좋겠어. 너희들은 아직 갈 길이 멀어. 어떤 사람과 일들은 마음속에 숨겨두고 기억 속에 새겨져 잊을 수 없지만 삶은 계속되잖아.”하정원은 들고 있던 체스를 꼭 쥐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하정원은 서재에서 나와 고개를 들었다가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흠칫했다.진여훈은 창가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하정원은 팔짱을 두르고 그에게 다가갔다.“설마 엿들은 건 아니지?”진여훈은 시선을 거두어들였다.“뭐 엿들을 게 있다고.”하정원은 고개를 홱 돌렸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비록 그가 남의 대화를 엿들을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혹시 누가 알겠는가?“하정원.”진여훈은 하정원의 이름을 불렀고 하정원은 의아해했다. 진여훈이 거리를 좁혔다.“너 그렇게 얄밉지는 않네.”하정원은 살짝 당황하더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뭐라고?”진여훈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고정됐다.“우리가 정략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난 아마 너에 대해 알고 싶었을 거야.”하지만 억지로 치러진 결혼식이었고 서로 상관도 없는 낯선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알아갈 마음이 없었다.재벌 간의 결혼에서 부부들은 서로 체면만 지켜주면 충분했다. 하정원이 얌전히 지내며 허울뿐인 아내의 자리를 지킨다면 그에게 영향이 없었다.하지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