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3년이 되어도 단 한 번도 그녀와 아침을 먹은 적이 없고 심지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다니, 갑자기 이혼한 뒤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구니 놀라지 않을 수 있는가?진여훈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멈췄다.“싫은 건 맞아.”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말했다.“하지만 정략결혼으로 묶인 게 싫었던 거야.”하정원은 살짝 놀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은 이혼해서 싫지 않다는 거야?”“넌 이혼해서 기쁜 거 아니었어?”진여훈이 반문했다.하정원은 말을 하려다 말고 시선을 내려뜨렸다.그러했다. 이혼해서 자유의 몸이 됐으니 당연히 기뻤다.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이상했다.다른 한편, 강성연과 반지훈은 두 아이를 데리고 같은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강유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강성연은 시선을 들며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너 숙모랑 아침 먹는 거 아니었어?”“숙모는 곁에 삼촌이 있잖아요. 제가 방해하면 안 되죠.”꽤 자발적이었다.반지훈은 강유이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나랑 네 엄마도 있는데 왜 우리는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그건 다르죠. 엄마가 원하면 아빠가 애정행각을 하잖아요.”강유이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하지만 숙모랑 삼촌은 다르죠. 원래도 위태로운 사인데 방해꾼인 제가 그곳에 있으면 분위기 깨잖아요?”강해신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분위기를 깨든 깨지 않든 위태로운 관계인 건 틀림없지.”강유이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오빠, 희망을 좀 가지라고.”강해신은 어깨를 으쓱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성연은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해신이 말도 일리가 있어. 두 사람은 예전부터 서로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잖아.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면 좀 이상하긴 하지.”“예전에 줄곧 자신을 싫어하다가 갑자기 좋아한다고 그러면 진심인 건지 아니면 농담인 건지 누가 알겠어?”게다가 하정원은 이미 죽은 남자를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 집착을
뭔가 눈치챈 하정원은 고개를 번쩍 들며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아빠.”하진석은 잠깐 멈칫했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하정원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무슨 책임을 진다는 거예요?”하진석은 고개를 쳐들고 심호흡했다.“속죄지.”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떠났다.하정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 있었다.그녀가 뒤따라갔지만 하진석은 이미 차를 타고 떠났다.비 때문에 차가 흐릿하게 보였다.하진석은 경찰서로 가서 몇 년 전 납치사건의 주모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당시 납치범들이 하진석의 이름을 대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법의 제재를 피했기 때문이다.이제 그는 스스로 자백했고 변호사를 둘 생각도 없었다. 경찰들은 그의 얘기를 듣고 모두 의아해했다.당시 하진석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정보를 숨겼다. 그들은 하정원이 납치당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의 주모자가 하진석이라니.하진석은 경찰을 따라 취조실에서 나왔고 하정원이 복도에 있었다.“아빠!”하진석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부랴부랴 도착한 하정원을 바라봤다. 하정원의 어깨와 바짓단은 빗물에 젖었고 얼굴에도 빗물의 흔적이 있었다. 서늘하고 축축하며 안색이 창백했다.하진석은 한숨을 쉬었다.“정원아, 돌아가.”하정원은 눈시울이 붉어져 울었다.“아빠, 저 아빠 용서했어요.”그가 말한 속죄는 자수였다.하지만 어찌 됐든 그는 그녀의 친아버지였다. 비록 그가 했던 일 때문에 그를 미워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더 이상 그가 밉지 않았다.하진석은 흠칫하더니 이내 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경찰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하정원은 등 뒤에서 울먹이며 외쳤다.“아빠, 엄마랑 같이 아빠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들이 복도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하정원은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 공허한 복도에서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서 있었다. 마치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은 듯 말이다.하정원
“내가 바래다줄게.”진여훈은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났다.가는 길 내내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조용한 분위기가 하정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뭐라 얘기하고 싶은데 진여훈이 받아주지 않을까 걱정됐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이미 그의 앞에서 두 번이나 울었었다. 처음엔 육진우의 방에서, 두번 째는 경찰서 밖에서였다.차는 하정원의 집 앞에 멈춰 섰고 진여훈은 그녀를 문앞까지 바래다줬다.한혜숙은 심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진여훈과 하정원이 함께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그제야 천천히 일어났다.“정원아, 왔니?”“엄마, 저...”“됐어. 아무 얘기도 하지 마.”한혜숙은 부드럽게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아빠가 한 결정, 엄마는 다 이해해.”한혜숙은 하정원의 앞에 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네 아빠가 잘못한 거잖아. 결과가 어떨지는 법원 판결에 맡기자. 우리는 네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알겠지?”하정원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한혜숙은 진여훈을 바라봤다.“여훈이도 왔으니 여기서 밥 먹고 가.”하정원이 그 대신 거절하려 했다.“아뇨...”진여훈이 대답했다.“네.”하정원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한혜숙은 싱긋 웃더니 도우미에게 저녁을 준비하라고 일렀다.-하진석이 예전 사건을 자수했다는 걸 알게 돈 진철은 거실에서 반지훈과 대화를 나눌 때 그 이야기를 거론했다.강성연은 꽤 놀랐다. 당시 납치 사건은 하진석이 꾸민 일이었지만 그는 납치범들에게 정말로 사람을 다치게 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납치범은 그의 뜻을 어겼고 큰 재앙이 찾아왔다. 사람을 죽인 건 하진석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납치 사건이 그 때문에 시작되었으니 간접적으로 육진우를 죽인 셈이었다.하진석의 지위와 인맥이라면 충분히 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하진석은 스스로 죗값을 치르려 했다.반지훈은 찻잔을 들었다.“변호사가 항소하려는데 거부했다면서요?”
한혜숙은 딸이 기회를 잡지 못하고 놓칠까 봐 걱정됐다.무언가 떠올린 한혜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정원아, 엄마 요 며칠 친정에 갔다 올 거야. 그런데 엄마는 네가 혼자 있으면 마음이 안 놓여. 너 요 며칠 진씨 집안에 가 있을래?”하정원은 당황하며 한참 뒤에 말했다.“절 버리려는 건 아니죠?”한혜숙은 말문이 막혔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엄마는 볼일이 있어서 돌아가려는 거야. 네 사촌 동생도 지금 군오에 있잖아. 너 외할머니집에 가면 걔랑 노는 것 외에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할 거잖아.”다행히 그녀는 딸을 잘 알고 있었다.하정원은 젓가락을 물고 진여훈을 바라봤다.“진씨 집안에 가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 혼자 집에 못 있는 것도 아니고.”한혜숙이 반문했다.“도우미 아줌마 주말에 휴가 냈어. 너 밥할 줄 알아?”“...”한혜숙은 하정원에게 묻지도 않고 진여훈을 바라봤다.“여훈아, 며칠만 부탁할게.”진여훈은 덤덤히 웃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머니.”한혜숙은 다음 날 친정으로 돌아갔다. 도우미는 주말에 아이와 함께 있기 위해 휴가를 냈고 하정원은 어쩔 수 없이 진여훈의 집에서 며칠 묵어야 했다.사실 하정원이 진여훈의 집에서 묵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결혼했을 때 그녀는 줄곧 진여훈의 집에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때는 별거했었다.지금은 이혼도 했으니 진철이 손녀처럼 아끼는 신분으로 진여훈의 집에 묵게 되니 꽤 쑥스러웠다.물론 진철은 하정원을 무척이나 환영했고 예전처럼 살뜰히 그녀를 챙겼다. 게다가 강유이도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있었기에 하정원은 생각보다 덜 무안했다.도우미는 그녀를 대신해 그녀의 짐을 방 앞에 놓아줬다. 하정원은 안으로 돌아갔고 그 방은 그녀가 진씨 집안을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게다가 뜻밖에도 그녀가 남겨두고 간 생활용품들도 그대로였다.“하정원 씨, 편히 쉬세요.”도우미가 나갔다.유일한 변화라면 호칭이 사모님에서 하정원 씨로 변했다는 점뿐이었다.하정원은 화장대 앞에 섰
“난 반지훈의 외할머니를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여훈이 할머니도 저버렸어. 난 그녀가 원하는 감정을 줄 수 없었고 그녀는 결국 우울함에 잠겨서 삶을 마감했어. 심지어 여훈이 아버지는 그 일 때문에 날 미워했어. 그래서 내가 여훈이 이놈을 몇 배나 더 아끼는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니까.”하정원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진철은 고개를 들어 하정원을 바라봤다.“정원아, 내가 너와 여훈이 이혼을 동의한 건 너희가 나처럼 되길 바라지 않아서야. 난 너희 둘이 서로를 원망하는 것도 바라지 않아.”“동시에 난 너희가 서로 편견을 내려놓고 서로를 다시 알아갔으면 좋겠어. 너희들은 아직 갈 길이 멀어. 어떤 사람과 일들은 마음속에 숨겨두고 기억 속에 새겨져 잊을 수 없지만 삶은 계속되잖아.”하정원은 들고 있던 체스를 꼭 쥐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하정원은 서재에서 나와 고개를 들었다가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흠칫했다.진여훈은 창가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하정원은 팔짱을 두르고 그에게 다가갔다.“설마 엿들은 건 아니지?”진여훈은 시선을 거두어들였다.“뭐 엿들을 게 있다고.”하정원은 고개를 홱 돌렸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비록 그가 남의 대화를 엿들을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혹시 누가 알겠는가?“하정원.”진여훈은 하정원의 이름을 불렀고 하정원은 의아해했다. 진여훈이 거리를 좁혔다.“너 그렇게 얄밉지는 않네.”하정원은 살짝 당황하더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뭐라고?”진여훈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고정됐다.“우리가 정략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난 아마 너에 대해 알고 싶었을 거야.”하지만 억지로 치러진 결혼식이었고 서로 상관도 없는 낯선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알아갈 마음이 없었다.재벌 간의 결혼에서 부부들은 서로 체면만 지켜주면 충분했다. 하정원이 얌전히 지내며 허울뿐인 아내의 자리를 지킨다면 그에게 영향이 없었다.하지만 하
진여훈은 덤덤히 웃었다.“시간은 많아.”하정원은 잠깐 넋을 놓았다. 진여훈의 미소는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그가 웃을 줄 모르는 게 아니라 그녀 앞에서는 웃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하정원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오빠로서 동생인 그녀를 알아가고 싶다는 뜻인 줄로 알았다.“그렇게 한가하면 혼자 천천히 알아보든가.”하정원은 턱을 쳐들고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어차피 난 알려주지 않을 거니까.”하정원은 코웃음을 치며 방으로 향했다.진여훈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강유이는 구석에서 고개를 내밀었고 강시언과 강해신은 강유이의 뒤에 서 있었다. 그들은 벽 뒤에 숨어 엿보는 강유이가 어이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진여훈이 강유이를 발견했다.그는 강유이를 향해 다가가더니 강유이의 시야를 가렸다.“볼 만큼 다 봤어?”강유이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며 씩 웃었다.“삼촌, 나 일부러 엿본 건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진여훈은 눈알을 굴렸다.“어린애가 뭘 궁금해해.”강유이는 입을 비죽일 뿐 대꾸하지 않았다.강해신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솔직하게 말했다.“삼촌이 전 아내랑 다시 잘 될지 궁금해서 그런 거죠.”진여훈은 흠칫하더니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너희는 어떻게 생각해?”강해신은 어깨를 으쓱였다.“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강유이가 강해신의 팔을 잡고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좋은 얘기 좀 해주면 안 돼?”희망을 줘야 할 거 아닌가?강해신이 대꾸하기도 전에 강시언이 태연하게 대답했다.“타이밍이 중요하죠. 숙모는 엄마랑 달라요. 이어준다고 해서 꼭 이어질 리 없어요. 그러다가 도리어 숙모가 도망갈 수도 있어요. 전 숙모 같은 성격이면 0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0부터 다시 시작하라니.진여훈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강시언을 바라봤다.강시언과 강해신은 그야말로 판박이었다. 그러나 강시언이 강해신보다 더 차분했다. 평
하정원은 고개를 숙였다.“괜찮아 보였어요. 아빠가 걱정하지 말래요.”사실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그만 알고 있었다.비록 징역 2년뿐이지만 2년 동안 자유를 잃는 것이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한혜숙은 아무 얘기 하지 않았다.진여훈은 그들을 집으로 데려다줬다. 그는 마당에 서서 그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바라보았고 잠시 뒤 몸을 돌려 차 앞으로 걸어갔다.문을 여는 순간, 하정원이 따라왔다.“잠깐만.”그는 몸을 돌린 뒤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멈췄다.“왜 그래?”하정원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했다.“감사 인사 하려고.”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었다.하정원은 입꼬리를 당겼다.“인사받기 싫으면 말고.”진여훈이 갑자기 웃었다.“내가 언제 안 받는대?”하정원은 뜸을 들이다가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에 옅은 웃음기가 보였는데 아주 자세히 봐야 보였다.하정원은 다급히 시선을 옮겼다.“누가 알겠어. 네가 인사 안 받는다고 하면 내가 무지 무안할 거 아니야?”진여훈은 잠깐 침묵했다.“말로 때우려고?”“그... 그러면 내가 밥이라도 사줘야 해?”진여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하정원은 기가 막혔다.“사양하지도 않네.”진여훈은 웃었다.“동생이 오빠 밥 사준다는데 내가 사양해야 해?”하정원은 팔짱을 두르고 고개를 돌렸다.“아냐. 밥 한턱낼 수는 있으니까.”곧이어 하정원이 말을 보탰다.“언제 시간 있어?”진여훈은 앞으로 나서며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알맞았다.“언제든.”레스토랑은 환경이 좋고 아늑하며 스타일은 회색 위주에 어두운 파란색 벽등이 걸려 있었다. 높은 건물에서 군오의 야경을 내려다보면 반짝거리는 밝은 구슬이 밤의 장막에 박힌 것처럼 보였다.하정원은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종업원과 대화를 나누며 주문했다.하정원은 흰색 털 코트에 샴페인 색 터틀넥 셔츠를 입고 있었고 넥라인에 리본을 맸으며 긴 머리는 단정하게 하나로 묶어 얼굴을 드러냈다.하정원은 메
진여훈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똑같이 잔을 들어 하정원과 건배했다.“밥도 안 먹었는데 날 취하게 만들려고?”하정원은 천천히 술을 마셨다.“어차피 집까지 데려다 줄 기사가 있잖아. 그래도 취하는 게 무서워?”그의 시선이 유리창 속 그녀에게 향했다.“나 취하게 만든 뒤에 거리에 버려둬서 뉴스에 나오게 하려고?”“...”하정원은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진여훈을 취하게 만들어 망신을 줄 생각은 있었다.진여훈은 손끝으로 컵을 만지며 시선을 들었다.“내가 맞췄어?”하정원은 잔을 내려놓았다.“난 그렇게 지나친 사람은 아냐.”진여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태연하게 말했다.“그러면 네게 날 취하게 할 능력이 있어야 할 텐데.”하정원은 믿지 않았다.“그래. 두고 보자고.”밤은 점차 깊어졌고 네온사인이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거리를 비췄다.검은색 차가 천천히 골목길에 들어섰다.하정원은 취기가 오른 상태였는데 진여훈은 의자에 기대어 꼼짝하지 않았다. 하정원은 거리를 좁히고 그의 뺨을 툭툭 쳤다.“진여훈?”그에게서 반응이 없자 하정원은 더욱더 우쭐했다.“겨우 이 정도면서 안 취할 거라고? 당당한 진씨 집안 도련님이 여자보다도 주량이 약하네.”기사는 백미러를 힐끗 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는 진여훈의 집에 도착했고 하정원은 창밖을 바라봤다.“절 먼저 데려다주는 거 아니었어요?”기사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저 혼자서는 도련님을 부축하지 못합니다.”하정원은 그를 훑어봤다. 건장해 보이는 남자가 진여훈을 부축하지 못한다고?기사는 그녀의 시선에 불편해져서 뒷좌석을 바라봤다,“날도 어두우니 하정원 씨께서는 도련님 집에서 묵으시죠.”어차피 진여훈의 집에 그녀가 묵을 방도 있으니 하정원은 흔쾌히 승낙했다.“그래요.”하정원은 뒷좌석 문을 열었고 기사가 진여훈을 부축해 차에서 내렸다. 그가 하정원에게 몸을 기대는 바람에 하정원은 살짝 비틀거렸는데 다행히도 기사가 반응이 빨랐다.하정원은 혀를 찼다. 그녀는 진여훈의 주량이 이렇게 약할